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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교육관(2)
(공자의 자녀교육)
1. 공자의 가정환경
공자의 교육관을 살펴보자면 그의 일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 인명사전에 의하면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은 춘추전국시대 노(魯)나라 사람으로 성은 공(孔)이고, 이름이 흘(紇), 자가 숙량(叔梁)이다. 노의 양공(襄公) 때 추읍(郰邑, 또는 鄹邑)의 대부(大夫)가 되었다. 용감하고 무예를 갖추었으며 완력이 있었다. 양공 10년 진(晉)나라가 제후(諸侯)의 군사와 함께 노나라의 핍양(偪陽)을 공격했을 때 현문(縣門)의 갑문(閘門)이 갑자기 내려앉았을 때 그가 들어 올려 문을 빠져나가게 했다. 17년 제(齊)나라가 노나라를 치자 장흘(臧紇)이 방(防)에서 제경(齊卿) 고후(高厚)에 의해 포위되었는데 그가 장주(臧疇), 장가(臧賈)와 함께 포위를 돌파하여 장흘을 호송했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 지켰다. 처음에 시씨(施氏)를 아내로 얻어 딸 아홉을 낳았는데, 다시 안씨(顔氏)의 딸 징재(徵在)를 아내로 얻어 공자를 낳았다.
공자는 자신의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64세 때 밭에서 일하는 16세의 처녀를 겁탈하여 첩으로 들였는데 그녀가 공자의 어머니다. 공자의 유년 시절은 불우했다. 세 살 때 부친을 잃었고, 정부인과 이복형제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공자의 어머니는 공자를 데리고 나와 모자가 의지하며 살았다.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매운 곤궁한 결손가정이었다.
공자는 이런한 성장환경으로 열등감이 매우 깊었다. 이런 공자를 훌륭하게 교육한 것은 공자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공자가 네 살이 되던 해부터 매일 집에서 재를 올리게 했다 귀족에게 필요한 예법을 배우게 하기 위함이었다. 공자는 스승이 없었기에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면서 스스로 해답을 구했다. 공자는 어느 것하나 소홀히 여기지 않고 배움의 기회로 삼았다. 그는 예법을 익히기 위해 제사를 드리는 장소까지 찾아가 이것저것 묻기도 했다. 그야말로 피나는 노력을 통해 예법과 학문에 정통하게 된 것이다.
공자는 당시 명성이 높아던 노자를 네 번이나 찾아가 배웠다고 했다. 여씨춘추에는 공자가 처음으로 노자를 찾아가 만난 때가 17세 였으며, 마지막으로 만난 때가 47세 때라고 하였다.
사마천의 사기 한비열전에는 「달리는 짐승을 그물을 쳐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물고기는 낚시를 드리워 낚을 수 있고, 나는 새는 화살을 쏘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오늘 나는 노자를 만났는데 그는 마치 용 같은 존재였다」 라고 기록을 하고 있다.
공자가 17세 때 어머니 마져 사망하게 되어 공자는 고아가 되었음에도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30세에 성인으로 칭송을 받았고, 제자가 3,000 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공자는 19세 때 송(宋)나라 견관씨의 딸과 결혼했다. 결혼한 지 1년 만에 아들 백어(伯魚)를 낳았고, 그 뒤 딸 하나를 더 낳았다. 백어(伯魚)는 이름이 이(鯉)이다. 이 이름에는 사연이 있었다. 공자는 처음 아들의 이름을 백어(伯魚)라고 지었다. 그런데 당시 노(魯)나라 임금인 소공(昭公)이 사람을 보내 축하하면서 커다란 잉어 한 마리를 보냈다. 이에 공자가 백어(伯魚)의 이름을 잉어를 뜻하는 한자인 이(鯉)로 고쳐 지었다. 백어(伯魚)는 공자에게는 단 하나뿐인 아들이었는데, 나이 50세에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백어(伯魚)는 공급(孔伋 : 자사)을 낳아, 공자의 가계를 이을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는 증자(曾子 : 증삼) 문하에서 학문을 배워, 유학의 정통 학맥을 이었다.
공자는 51세가 되어서야 노나라의 관리로 등용되어 정치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는데, 처음에는 중도현의 현장을, 다음에 대사구(大司寇 : 사법권의 책임자. 법무부장관)을 역임한 후에는 대리재상(代理宰相 : 국토교통부장관)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실권자인 계손씨의 배척을 받아 물러나 55세에 여러나라를 주유하는 여행길에 오른다. 이러한 여행은 공자의 수제자 중 부유한 상인이었던 자공 덕분에 공자는 13년 가까이 여행을 다닐 수 있었다. 또한 총 72명의 수제자가 그를 따랐다고 한다.
공자는 69세에 외아들인 리(鯉)가 죽고, 이어서 연연하게 제자 안희와 자로의 죽음으로 마음에 충격을 받아 병상에 누워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 공자의 교육방법
가. 인재시교(因材施敎)
공자는 중국에서 관학(官學)의 독점을 타파하고 사항(私學)을 창시한 분이시다. 획일적인 관학에서 저마다 타고난 능력과 소질에 맞게 가르쳐야 한다는 인재시교(因材施敎 : 논어 선진편))을 주장하였다. 맹자의 불설지교회(불설지교회) 즉 상대가 달가와 하지 않더라도 가르쳐 깨닫게 하여야 한다는 적극적인 교육방법론과 함께 생각할 교육론이다.
나. 유교무류(有敎無類)
교육대상에 있어서 "교육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유교무류 有敎無類)"
종족, 신분, 재산의 유무와 관계 없이 누구든지 배움을 청하는 자라면 가르친다.
다. 거일삼반(擧一三反)
학생들에게 "하나를 보고 열을 알게 하고(擧一三反)", 선생은 학생이 독립적으로 연구에 몰두하는 기초 위에서 계발과 지도를 해야한다. 즉 계발실 교육을 중요시 하였다.
라. 겸허호학(謙虛好學)
배우는 자의 학습태도는 겸허호학(謙虛好學: 겸허하게 배우기를 좋아함)하여야 한다. 즉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고 해야 바로 배울 수 있다.
마.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가이위사의(可以爲師矣)
학습방법은 반복학습을 강조하여 몸에 완전히 베일 때까지 공부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여, "옛 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알고(溫故而知新)",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고 하였다.
가이위사의(可以爲師矣)는 “낡은 것만 붙잡지 말고 새로움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배우고 익히되 과거에 머물지 말고 새로운 것으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바. 학이부사칙(學而不思則)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두워지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게 된다(學而不思則 , 思而不學則殆)"고 하였다. 학습은 사고를 잘해야 하며 학습과 사고가 결합되어야 한다고 강조한 말이다.
공자의 교육방법론은 오늘에도 적용되는 교육론이다. 교육의 평준화는 교육 받은 기회의 평준화여야 하고, 교육은 개인의 소질과 능력에 따른 인재시교가 정답이다.
공자는 직접 제자들에게 설명하여 가르치기 보다 스스로 공부해 모르는 것을 질문하는 방식으로 교육했다고 한다. 질 문 위주로 수업을 할 경우 학생들은 먼저 스스로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교수(敎受) 방법도 주입식, 암기식에서 공자의 질의식 거일삼반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3. 공자의 자녀교육
부모의 마음으로 제자를 대하고, 스승으로 마음으로 자식을 대한다.(부모지심,대착제자, 로사,해자심정 父母之心,對着弟子, 老師, 孩子心情)
공자는 19세 때 송(宋)나라 견관씨의 딸과 결혼했다. 결혼한 지 1년 만에 아들 백어(伯魚)를 낳았고, 그 뒤 딸 하나를 더 낳았다. 백어(伯魚)는 이름이 이(鯉)이다. 이 이름에는 사연이 있었다. 공자는 처음 아들의 이름을 백어(伯魚)라고 지었다. 그런데 당시 노(魯)나라 임금인 소공(昭公)이 사람을 보내 축하하면서 커다란 잉어 한 마리를 보냈다. 이에 공자가 백어(伯魚)의 이름을 잉어를 뜻하는 한자인 이(鯉)로 고쳐 지었다. 백어(伯魚)는 공자에게는 단 하나뿐인 아들이었는데, 나이 50세에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백어(伯魚)는 공급(孔伋 : 자사)을 낳아, 공자의 가계를 이을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는 증자(曾子 : 증삼) 문하에서 학문을 배워, 유학의 정통 학맥을 이었다. 백어(伯魚)는 아주 어려서부터 아버지인 공자(孔子)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 때문에 공자의 제자들 중에는 공자(孔子)가 자식인 백어(伯魚)에게만 무슨 특별한 것을 가르치지 않나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와 관련한 이야기가 『논어(論語)』 「계씨(季氏)」편에 나온다.
공자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진항(陳亢 : 자금)이 백어(伯魚)에게 물었다. "그대는 선생님께 혹시 우리가 듣지 못한 특별한 가르침을 받은 것이 있는가?" 이에 백어가 대답했다. "없습니다. 어느 때인가 아버님이 마당에 홀로 서 계시는데, 제가 빠른 걸음으로 뜰을 지나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아버님이 저를 부르시어 시(詩)를 배웠느냐고 물으시기에, 아직 배우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아버님께서 시(詩)를 배우지 않으면 다른 사람과 대화할 수 없다고 하셔서, 저는 그 뒤 시(詩)를 배웠습니다. 어느 날엔가 또 아버님이 마당에 홀로 서 계시기에, 제가 빠른 걸음으로 뜰을 지나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아버님은 저를 불러 예(禮)를 배웠느냐고 물으시기에, 아직 배우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예(禮)를 배우지 않으면 다른 사람 앞에 설 수가 없다고 하시어, 저는 그 뒤 예(禮)를 배웠습니다. 저는 아버님에게 이 두 가지 말씀을 들었을 뿐입니다."
진항(陳亢)은 물러나 기뻐하며 말했다. "한 가지를 물어서 세 가지를 얻었다. 시(詩)를 듣고, 예(禮)를 듣고 또 군자는 자신의 아들과 제자들을 다르게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들었다."
공자가 자식을 교육하는 방법은 특별하지 않았다. 평소 제자들을 가르치듯이 자신의 자식을 가르쳤다. 진항(陳亢)은 보통의 스승들이 그러하듯, 공자 역시 제자들에게는 가르쳐주지 않은 무슨 특별한 것을 자식인 백어(伯魚)에게 가르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자가 백어(伯魚)에게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시(詩)와 예(禮)에 관한 가르침을 주었을 뿐이라는 것을 듣고, 공자의 치우치지 않은 사랑에 감동한 것이다. 안연(顔淵)의 경우에서 보듯, 공자는 제자를 자식처럼 대했다. 또 제자들 역시 공자를 부모처럼 모셨다. 부모의 마음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고 꾸짖은 것이 스승의 자리에서 공자가 보여준 모습이었다면, 스승의 마음으로 자식을 가르치고 꾸짖은 것은 부모의 자리에서 보여준 공자의 모습이었다.
공자는 직접 제자들에게 설명하여 가르치기 보다 스스로 공부해 모르는 것을 질문하는 방식으로 교육했다고 한다. 질 문 위주로 수업을 할 경우 학생들은 먼저 스스로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래된 미국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님을 4차 산업시대에 가장 이상적인 교사상으로 꼽고 싶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입시제도가 존재하는 한국의 고등학교에서 키팅 선생님처럼 수업을 한다면 학부모와 학생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 키팅은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목적에 국한된 학교 교육을 부정했다. 삶의 목적이 아닌, 방식과 도구에만 얽매이는 교육 현실을 ‘죽은 시인의 사회’라고 표현했다. 대한민국 학교는 이미 죽은 사회이고 시인으로 표현할 만한 교사가 없는 게 현실이다. 죽은 사회가 아닌 살아 있는 사회가 되려면 학교 교육의 방향이 성적 위주에서 전인교육으로 바뀌어야 한다. 나만 되면 된다는 교육에서 더불어 사는 삶을 배우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다시 조선시대로 공자의 시대로 되돌아 가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의예지(仁義禮智)의 수직적 예절에서 ‘너와 내가 같다’ 라는 사랑(仁)의 가치로 사람과 사람의 수평적 예절을 가르치는 인성교육이 선행되어야 한다.
예일대 교수였던 전혜성 박사는 여섯 자녀를 모두 훌륭하게 키워 미국 내에서도 존경을 받는다. 자녀교육의 비결로 공자의 말씀인 덕이 재주보다 우선이라는 ‘덕승재(德勝才)’를 첫 번째로 꼽았다. 덕은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인품이다. 난 사람보다 된 사람이 더 아름답다. 가장 중요한 인성교육의 장이 가정이고 부모인 시대가 됐다. 부모가 자녀의 인성교육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이들이 나오지 않는다.
재승덕(才勝德-재주가 덕을 넘어섬)하지 말고
덕승재(德勝才-덕이 재주보다 나음)하라. ⇒ 재주가 덕을 앞지르지 못하게 하고, 덕이 재주를 앞서게 하라.
德勝才(덕승재)를 謂之君子(위지군자)요, ‘덕이 재주보다 많은 사람을 군자(인격자)라 하고,’
才勝德(재승덕)을 謂之小人(위지소인)이라. ‘재주가 덕보다 많은 사람을 소인(속물)이라 한다.’
공자가 하신 말씀을 꼭 되새겨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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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덕과 재가 제 위치에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지금의 인권과 평등이란 가치관으로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교육하자는 전교조 이념은 미래가 어두울 뿐입니다.
사람마다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교육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