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신역동적 관점
▪프로이트(Sigmund Freud)
프로이트는 가정이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해 혼잡한 아파트에서 살 수 밖에 없었지만 부모들은 그의 명석한 지적 능력을 키워주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다. 프로이트는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지만 유태계 혈통이라는 사실 때문에 마음대로 직업을 선택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의사가 되기로 결정했다. 26세 때 비엔나 대학에서 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4년 만에 그는 강사라는 명예스런 위치를 획득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이론을 형성하고 확장하는데 생애의 대부분을 투자했다. 흥미롭게도 그는 생애의 가장 창조적인 시기에 심각한 정서적 문제를 겪었다. 40대 초반에 그는 많은 정신 신체장애를 앓았을 뿐만 아니라 죽음에 대한 심한 공포와 여타의 공포증도 있었다. 이 시기 동안 그는 자기분석이라는 힘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꿈의 의미를 탐색함으로써 성격 발달의 역동에 대한 통찰을 얻었다. 그는 먼저 자신의 아동기에 대한 기억을 탐색했으며 어렸을 때 자신이 아버지에게 강한 적대감을 느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아동기에 매력적이고 사랑스럽고 정이 많았던 어머니에게 성적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도 회상했다. 후에 환자 심리상담치료에서 발견한 사실들과 자기 문제 분석에서 발견한 사실을 통합하여 임상적으로 자신의 이론을 형성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적 원리로부터 이탈하는 동료들에 대해서는 참지 못했다. 그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추방함으로써 그러한 움직임을 막으려고 했다. 예를 들어, 융과 아들러는 프로이트와 긴밀하게 연구를 했으나 이론적 문제와 임상적인 문제에서 여러 번 프로이트와 의견의 불일치를 보인 후 각자의 심리상담치료 학파를 세웠다.
프로이트는 매우 창조적이고 생산적이었으며 하루에 18시간이나 연구를 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그의 전집은 총 24권이나 된다. 프로이트의 활동은 턱에 암이 걸렸던 생애 후반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생애의 마지막 20년 동안 그는 33번씩이나 수술을 받았으며 끊임없는 고통 속에 살았다. 그는 1939년 런던에서 숨을 거두었다.
융(Jung)은 스위스의 정신 분석자였으며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였다. 융은 1875년 스위스의 작은 마을인 케스빌에서 태어났다. 그는 내적 경험과 그가 몰두하게 된 생각을 아무도 이해할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주로 혼자서 지내는 상당히 내성적인 아이였다. 스위스의 행복치 못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고 자신의 내부적 자원에 의지하는 법을 일찍부터 배웠다. 융은 아동기의 많은 시간을 꿈의 의미와 그가 경험했던 초자연적인 환상에 깊이 빠져서 보냈다. 그가 10살이 되었을 때 나무로 2인치 정도 되는 인간의 형상을 조각했다. 그는 그 형상을 숨겨놓고 혼자 있을 때 그 형상과 이야기하고 때때로 얘기한 내용을 비밀스런 부호로 기록했다.
자신을 이해하려는 융의 열망은 그를 정신의학의 새로운 분야로 이끌었고 1900년에 바젤 대학에서 의학학위를 받았다. 취리히 대학의 정신병 진료소에서 정신분열증 연구를 했으며 1905년에 바젤 대학에서 정신병리학을 강연했다.
인간 마음에 대한 융의 호기심은 곧 프로이트의 연구와 연관 되었으며 융은 1900년에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읽은 후에 프로이트와 서신 왕래를 시작했다. 1907년에 프로이트를 만나 13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고 1909년에 프로이트를 따라 미국에 갔으며 클라크 대학에서 강연을 하였다. 1911년에 융은 프로이트의 후원을 받아 국제정신분석학회장이 되었으나 결국 프로이트의 개념(정신분석, 무의식, 리비도)과는 입장이 달라 후에 그 둘 사이는 불화가 생겨나고 결국 결별하였다.
1913년에 융은 내적 혼란으로 고통을 받았으며 그것은 약 3년 동안 지속되었다. 프로이트처럼 그는 자신의 정서적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꿈 해석을 통한 자기분석을 하였다. 이 기간은 융으로 하여금 성격이론에 대한 독특한 접근으로 이끈 창조력과 성장의 시간이었다. 융은 역사를 통해 전해 내려온 인류의 상징과 신화를 평가했다.
융의 분석심리학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기본적인 차이는 프로이트는 리비도를 성적 에너지라고 주장했고 융은 생활에너지로 간주 했으며 프로이트는 성격에 있어 어린 시절의 영향을 받은 결정론적 견해에 있으며 융은 생활 속에서 후천적으로 변할 수 있고 미래의 목표에 의해 형성된다고 믿었다.
▪아들러 (Alfred Adler)
남자 형제 1명은 어려서 죽었고 어린 시절 아들러는 병치레를 많이 했으며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기에 그리 행복하지는 않았다. 4세 였을 때는 폐렴으로 죽을 뻔했다. 이 시기에 아들러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을 하였다.
태어나서 몇 년간 심하게 아팠기 때문에 어머니는 아들러를 응석받이로 키웠다. 후에, 동생이 태어나 이 자리를 빼앗기게 되었다. 아버지와는 신뢰로운 관계였으나 어머니한테는 친밀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아들러는 형을 질투했기에 아동기와 청소년기에 형제 사이는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아들러의 초년 특징은 아동기의 유약함과 열등감을 극복하려는 투쟁으로 볼 수도 있다. 이 가족 경험이 아들러가 이론을 형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렇지만 아들러는 운명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삶을 만들어간 본보기다.
아들러는 성적이 나쁜 학생이었고 담임선생님은 아버지에게 아들러가 구두 수선공 정도밖에는 못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들러는 엄청난 노력으로 마침내 반에서 일등을 하게 되었다. 아들러는 비엔나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했으며 안과의사로 개업을 했으나 후에 일반의로 바꾸었다. 결국에는 신경학과 정신의학을 전공했으며 아동 불치병에 관심이 많이 가졌다.
아들러는 보통 사람에 대해 열정적 관심을 가졌다. 아동 양육, 학교 개혁, 갈등을 야기하는 편견 등에 대한 문제를 자주 거론했다. 단순하고 평범한 언어로 연설을 하고 글을 썼기 때문에 일반인들도 개인 심리학의 원리를 이해하여 적용시킬 수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군의관으로 참전한 후 비엔나에 있는 32개 공립학교들에 아동지도 심리상담치료소를 개설해 교사, 사회사업가, 의사, 여타의 전문가들을 교육시켰다. 많은 대중 앞에서 아동을 지도하는 생생한 시범을 통해 전문가들을 교육시키는 방법을 개척했다. 그가 창설한 심리상담치료소는 수적인 면에서나 인기 면에서 성장을 거듭했으며 아들러는 자신의 심리상담치료를 강연하고 시범을 보이는데 지칠 줄을 몰랐다.
아들러는 위와 같이 많은 일을 하면서도 노래하고 음악을 즐기고 친구와 함께 하는 시간들도 가졌다. 1920년대 중반 미국에서 강연을 하기 시작했으며 그 후로도 미국을 자주 여행했다. 쉬어야 한다는 친구들의 충고를 듣지 않았으며 바쁜 스케줄은 계속 되었다. 1937년 5월 28일 스코틀랜드 애버딘에서 강연을 앞두고 산책을 하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설리반(Harry Stack Sullivan,1892~1949)
설리반의 청소년기 대인관계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아마도 그의 거친 10대를 반영한다. 설리반이 8살 때 그는 13살의 베링커(Clarence Belinger)와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설리반의 전기 작가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의 관계가 동성애 관계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베링커 또한 정신과의사가 되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설리반의 청소년기에 끝이 났다.
설리반의 대학 배경은 위대한 학자들의 배경과는 달랐다. 그는 16세에 코넬대학에 입학했으나 모든 과목에서 낙제한 후 일 년 후에 그만두었다. 1911년에 입학자격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의구심이 제기되지만 대학의 학위 없이 시카고대학 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1차 대전 중에 군에 복역한 후 1922년 까지 정부를 위해 일을 하였다. 설리반은 1922년에 워싱턴 D.C에 있는 장애인들을 위한 연방병원인 성 엘리자베스 병원에 근무하면서 유명한 정신의학자 화이트(William Alanson White)의 영향을 받았다. 설리반의 정신의학 영역에서 아버지라 할 수 있는 화이트는 설리반의 정신의학에 대한 관심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대한 비판을 자극하였다. 설리반은 밀리노우스키(Bronislaw Malinowski), 쿨리Charles Cooley), 미드(G..H.Mead), 사피어(Cdward Sapir)등을 통해 사회 심리학과 인류학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는 또한 사회심리학자 맥도걸(Willam Mc Dougall)과 영국의 심리학자 리버스(W.H.R.Rivers)의 영향을 받았다. 1927년에 설리반은 비공식적으로 자신의 정신분열증 환자들 가운데 한 명인 15살 제임스(James)를 양자로 들였다. 제임스는 그의 여생을 설리반과 함께 지냈고 설리반은 한 번도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냈다.
정신의학의 사회적 특성은 설리반의 생각에 영향을 주었다. 설리반에 따르면 개인은 대인관계에서 자신의 성격을 드러낸 뿐만 아니라 심리치료 시에도 환자와 치료자간의 대인관계가 성공적인 치료에 결정적이라고 믿었다. 참여적 관찰자로서 치료자는 환자가 하는 문제탐색에 참여한다. 설리반은 모든 정서적 문제에 근본이 되는 불안이 개인을 잘 기능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므로 안전감이나 정서적 편안함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설리반은 1939년 여러 달 동안 조지타운대학 의대의 정신과 교수 및 주임으로 있었다. 이것을 제외하고는 어느 대학 어떤 직책에도 머물러 있었던 적이 없었다.
1949년에 설리반은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정신건강 세계연방회의 집행자 모임에 참여한 후 호텔에 머물면서 뇌출혈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이때가 그의 나이 56세였다. 설리반은 그가 제안했던 주요한 정신의학 개념의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그의 사후에 명성을 얻었다.
2. 인본주의적 관점
▪칼 로저스 (Garl Rogers)
로저스는 1964년 캘리포니아 라졸라에 있는 서부행동과학 연구소 연구팀에 합류하였다.
이곳에서 인간관계능력을 개선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심리상담 치료하였다. 1968년 로저스와 그의 동료들은 라졸라에 인간행동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로저스는 심리상담치료에서 인본주의 운동을 창안․발전시키고 선구자적인 연구를 하고 심리학과 관련된 모든 영역에 영향을 준 사람으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한 인터뷰에서 그에게 부모와 연락을 할 수 있다면 자신의 공로 중에서 어떤 것을 알아주기를 원하는지 물었다. 로저스는 자신의 어머니는 분명히 부정적인 판단을 할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그 어떤 것이라도 어머니와 얘기하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로저스 이론의 핵심주제가 내담자를 변화시키려면 무비판적으로 듣고 수용해야 한다는 것은 흥미롭다.
로저스는 생애 마지막 15년 동안 정책 입안자, 지도자, 갈등집단을 훈련시킴으로써 정치에 인간중심접근을 적용하기도 하였다. 가장 힘썼던 분야는 인간 긴장완화와 세계 평화였는데 이러한 업적을 힘입어 노벨 평화상 후보자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로저스는 1987년에 낙상하여 허리 골절상을 입은 후 성공적으로 수술을 받았으나 수술을 마친 날 밤 심장이상으로 며칠 뒤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대로신을 신고 항상 앞을 바라보면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몇몇 회고록에서 로저스는 85세 때의 삶은 자신이 원하고 꿈꿔왔던 것 이상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내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지만 85년 동안 충만하고 흥미로운 삶을 산 것은 안다.
▪펄스 (Fritz Perls, 1893~1970)
프랑크푸르트에 있는뇌를 다친 군인들을 치료하는 골드스타인 연구소에서 골드스타인과 함께 일했다. 그는 이 연구소에서 인간은 별개로 기능하는 부분들의 합이 아니라 합 이상의 기능을 하는 전체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후 비엔나로 가서 정신분석 훈련을 받았다.신체를 통한 자기 이해와 성격 변화라는 선구적 방법을 개발한 라이히에게 정신분석을 받았다. 또한 호나이를 비롯한 정신분석 운동의 중심인물들에게서 지도를 받았다. 1948년 미국으로 이주하였으며 이 무렵부터 정신분석적 전통에서 벗어났으며 1952년 뉴욕 형태치료연구소를 열었다. 후에 캘리포니아의 빅수에 정착해 에살렌 연구소에서 워크숍과 세미나를 개최하면서 심리치료 혁신자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세워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펄스의 영향력은 전문 저서로서도 이루어졌지만 주로 워크숍을 열면서 사람과의 직접적인 만남으로 이루어졌다.
펄스는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이면서도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대개 그에게 압도당했으며 그를 매우 도전적이면서 쇼맨십으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사람으로 보았다. 사람들은 그를 통찰력 있는 사람, 재치 있는 사람, 적대적인 사람, 요구하는 것이 많은 사람, 영감이 뛰어난 사람 등으로 다양하게 보았다. 불행이도 그의 워크숍에 참석했던 사람 중 일부는 그를종교적 교주로 받들면서 형태치료의 교리를 전도해 나갔다.
3. 행동주의적 관점
라자러스는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에서 태어나 학교를 다녔다. 4남매 중 막내인 그는 아이들이 거의 없는 동네에서 자랐기 때문에 외롭고 두려웠다고 회상한다. 그는 일찍이 피아노 연주를 배웠고 1달러를 벌기 위해 토요일 아침 극장 막간에 연주를 하기도 했다. 그는내가 7살 때는 12살 난 아이만큼 연주를 잘 했지만 14살이 되어서도 12살 난 아이 실력밖에 안되어 피아노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라고 말했다. 그 당시 그의 흥미는 보디빌딩, 역도, 권투와 레슬링으로 바뀌었다.
난 아주 말라깽이여서 자주 얻어맞았고 아이들이 날 못살게 굴었다. 그래서 미친 듯이 운동을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나중에 그는 권투와 역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고 나서는 체육관과 헬스센터를 운영하려고 하기도 했으나 곧바로 방향을 바꾸었다. 남아프리카에서 성장했으나 자신을 미국인으로 보았다. 어렸음에도 그는 인종차별과 차별대우는 부당한 것으로 보았다. 이런 문제로 싸움을 하게 되었으며 또한 권투와 역도를 시작한 이유가 되었다. 그는 언론계에서 일하고 싶어서 영어를 전공하려고 대학에 입학했지만 곧 심리학과 사회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그는 1957년 실험심리학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1960년 임상심리학 박사가 되었다. 그 후 요하네스버그에서 전임 치료자가 되었다. 1963년 그는 스탠포드대학에서 가르치라는 알버트 반두라의 요청을 받았다. 후에 그는 템플 의과대학과 예일대학에서 가르쳤다.
그는 임상심리학회 회원이었으며 에메리투스 루터스대학 초빙 교수이고 뉴저지 프린스턴의 중다양식 심리센터 회장이었다. 그는 국내와 외국에서 강연과 연수회를 많이 개최했다.
라자러스는 많은 공로패와 수많은 상을 받았다. 미국전문심리학회로부터 저명한 봉사상, 미국심리학회로부터 우수 전문가상을 두 번 받았고 또한 효과적인 심리상담치료에 대한 혁신적이고 지속적인 공헌으로 명성이 높은 최우수 심리학자상을 최초로 받았다.
존 왓슨(John Watson)이행동주의의 아버지라면 스키너는행동주의의 장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키너는 1904년 펜실베이니아의 스케하나에서 태어나 화목하고 안정된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변호사였으며 스키너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쾌활하고 아름다웠으며 선에 대한 확고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스키너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썰매, 마차, 등 물건을 만드는 것을 즐겼다. 그는 자신이 좋아했던 조그마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헤밀튼 대학에 진학했다. 그곳에서 스키너는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자신의 음악, 미술, 작문과 생물학에 대한 식견을 높이 평가한 한 가정에서 가정교사를 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작가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졸업 후 2년 동안 자신이 쓴 작품에 대해 실망하였으며 자신이 오히려 심리학에 관심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다가 1928년 가을에 스키너는 하버드대학에 입학해서 심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931년 박사학위를 받은 후 5년 동안 하버드대학에 머물면서 연구를 계속했다. 그 후 미네소타대학에서 강의를 하다가 1945년에 인디아나대학의 심리학과장이 되었다. 1948년에 그는 다시 하버드대학의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또한 같은 시기에「Walden II」라고 하는 유토피아적 소설을 썼다. 이것은 행동주의의 원리에 기초하여 쓴 이상적 사회를 묘사한 소설이었다. 스키너의 유토피아에서는 사회란 바람직한 행동에 대해 긍정적 강화를 제공함으로써 시민들을 조절하는 행동주의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다고 묘사되었다. 버지니아 주의 트윈 옥스 같은 작은 공동 사회에 묘사되어 있는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행동주의적 이상형은 없을지라도 행동주의적 관점은 아이들 교육이라든지 산업 현장에서 생산성 향상이라든가 심리적 장애의 치료 등과 같은 많은 부분에서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1971년에는 「자유와 존엄을 넘어서」를 집필했으며 여기서는 행동의 기술이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문화공학의 개념이 왜 상당한 반대에 부딪혔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였다.
또한 스키너의 연구는 아동발달 분야로까지 확대되었다. 심리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심리치료 분야에서 스키너의 이론이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행동수정의 접근은 스키너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행동공학은 어린이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이 기법은 말더듬, 공포증, 동성애, 정신병적 행동 같은 성인들이 가진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성공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4. 인지주의적 관점
▪엘리스 (Albert Ellis)
엘리스는 자신이 사람들을 능숙하게 심리상담치료할 수 있고 그렇게 하는 것을 대단히 즐기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심리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엘리스는 정신분석이 심리상담치료의 가장 심오한 형태라고 믿고 훈련 분석가로부터 정신분석을 받고 지도감독도 받았다.
1947년에서 1953년까지 그는 고전적 분석을 배웠고 분석심리상담치료로 지향했고 정신분석이 피상적이고 비과학적인 심리상담치료형태라고 생각하여 그는 다른 체계들을 연구했다. 1955년 초기에 그는 인본주의적, 철학적, 행동적심리상담치료를 결합하여 합리적정서치료(RBTI : Rational Emotive Behavior Therapy)를 만들어 냈다.
어떤 면에서 엘리스는 청년기 동안 자기 문제를 심리상담 및 치료하기 위한 기법으로 자신의 접근을 개발했다. 예를 들어, 그는 한 때 대중 앞에서 말하는 것에 대해 심한 공포를 느꼈다. 사춘기 동안에는 여성들 주위에 가면 극도로 수줍어했다. 19살 때 그는 한 달 동안에 길거리에서 100명의 여성들에게 억지로 말을 걸었다. 이 짧은 만남들이 데이트로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그는 여성에 의한 거부의 공포를 둔감하게 했다고 보고했다. 인지행동적 기법을 적용하여 그는 자신의 최악의 장애를 극복하게 되었다.
엘리스의 강연을 듣는 사람들은 그의 거칠고 유머러스하고 화려한 표현에 대해 논평을 했다. 워크숍에서는 매우 거친 말과 유머를 많이 사용하고 어떤 면에서는 화려해 보였다. 워크숍에서 그는 자신의 특이한 면을 나타내는 것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의 일을 즐기고 자신의 일에 매우 열심이다.
엘리스는 매우 활동적이고 생산적인 사람이며 심리상담 및 치료 분야에서 가장 저술이 많은 사람 중에 하나다.
▪벡 (AAron T.Beck)
브라운대학과 예일의과대학을 졸업한 벡은 초기에는 신경학에 매력을 느꼈지만 전문의 실습기간 동안 정신의학으로 바꾸었다. 벡은 심리상담 및 치료에 가장 영향력 있고 경험적으로 타당한 접근 중의 하나인 인지치료의 주창자다. 또한 인지치료는 세상에서 우울증을 매우 잘 이해할 수 있는 이론이기도 하다.
벡은 프로이트의 우울 이론을 타당화 시키려고 시도했지만 그의 연구는 우울은 자기 자신에게로 향한 분노라는 프로이트의 해석과 동기모형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결과로 인해 벡은 수년 동안 많은 정신병 치료 단체로부터 거부당하고 고립되는 등의 고통을 받았다.
벡은 연구를 통해 우울에 대한 인지이론을 개발하였다. 그는인지적 왜곡이라 불리는 논리적 오류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우울한 사람들에 대한 인지를 발견했다. 벡의 이론에 따르면, 부정적 사고는 기본적으로 역기능적 신념과 가정을 반영한다. 이 신념이 상황적 사건에 의해 촉발되었을 때 우울 패턴이 행동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벡은 내담자가 역기능적 사고를 수정하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정신병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정신 병리 영역에서의 지속적 연구와 인지치료의 활용으로 그는 미국 과학계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다.
벡은 1954년 펜실베이니아대학 정신의학과에 합류했고 벡의 연구는 우울증에 대한 인지치료의 효율성을 확립했다. 그는 인지치료를 우울증에 성공적으로 적용시켰고, 불안과 공포장애, 알코올 중독과 약물 남용, 섭식장애, 부부문제와 대인관계 문제, 성격 장애를 일반화시켰다. 또한 우울증, 자살 위험, 자기 내면, 성격에 대한 평가 척도를 발전시켰다.
그는 벡연구회의 창시자이며 이 연구회는 벡의 네 자녀 중의 하나인 벡 J.S.가 관리하는 연구․훈련기관이다.
5. 발달단계적 관점
▪에릭슨(Erik H. Erikson, 1902~1994)
에릭슨은 고등학교 이상의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는 의학을 공부하는 학생이었으나 예능과 역사에 흥미가 높았다. 졸업 후 의사가 되라는 양부의 권유를 물리치고 그는 유럽 여행길에서 나르시시즘으로 방황했다. 그러나 그는 곧 이러한 나르시시즘(narcissism)이 그에 대항할 만한 생각이나 힘을 찾지 못하면 그것은 젊은이의 정신적 타락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25세 때 비엔나에 있는 조그마한 미국 유치원 교사의 초청으로 교사가 된다. 어린이 연구소로 알려진 그 학교는 정신분석가가 되고자 하는 아이들을 위해 프로이트의 딸 안나 프로이트(Anna Freud)와 아이크호른(August Aichhorn)이 세운 것이다. 그는 이 학교에 있는 동안 정신분석에 대한 훈련을 받게 된다.
1929년 에릭슨은 안나 프로이트가 운영하는 실험학교의 무용 선생인 캐나다 여성 조안 세르슨과 결혼했으며 그의 두 아들과 함께 1933년에 코펜하겐으로 이주했다. 얼마 후 그의 가족은 미국 보스턴으로 이주하여 에릭슨은 거기서 개업했고 그 다음 1년 동안 하버드의과대학 신경정신과의 심리학 연구원으로 일했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예일의과대학에서 일했다. 그 후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1942년에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1950년 그는 충성심 맹세에 서명을 거절한 이유로 다른 동료 교수들과 함께 교수직을 사임했다.
1950년 그의 첫 저서『아동기와 사회』(Childhood and Society)가 출판되었으며 이 책은 그를 자아심리학의 대변자로서 인정하게끔 만들었다. 1951년부터 1960년까지 에릭슨은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오스틴 피그스 센터에서 시니어 컨설턴트로 봉사했으며 동시에 피츠버그의과대학 및 다른 연구소의 강의를 맡아 활동했다. 에릭슨은 정식교육을 받지 못했고 학위도 없었지만 심리치료사와 대학교수로 왕성한 활동을 했다.
▪피아제(Jean Piaget)
먼저 초등학교 6학년 때 개구리의 변태에 대한 관찰을 기록한 관찰일기를 스위스 생물학회에 제출하였다. 그런데 학자들은 초등학교 6학년생이 제출한지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그 관찰에 대한 학문적 업적을 인정하고 그를 스위스 한 대학의 교수로 초빙하는 해프닝이 있을 정도로 관찰력과 두뇌가 명석했다.
두 번째의 그의 인지발달이론은 바로 뛰어난 관찰력의 소산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는 단지 자신의 세 자녀의 성장과정을 관찰하면서 기록한 내용을 토대로 이후 거의 모든 학문분야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인지발달이론을 만들게 되었다는 점이다. 피아제는 아버지의 학구열을 이어받아 다른 사람들이 대학에 입학할 나이인 21세에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피아제는 알프레드 비네(Binnet)의 연구실에서 일하게 된다. 그의 실험실에서 피아제는 아동의 지능 검사 시 아동의 틀린 답이 일관성 있는 유형을 나타냄을 발견하고 아동의 사고가 독특한 특성을 갖고 있음을 알아냈다. 그는 아동이 어떤 사고를 하는가에 연구 초점이 되었다. 그는 아동의 꿈 도덕성 아동의 흥미 등의 주제를 연구 목표로 삼았다.
특히 비네의 경우는 지능이 어떤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가(요인 구성)에 주로 초점을 맞춘 반면, 피아제는 자신 특유의 관찰력으로 아동들의 공통적 오류를 통해발달상 각 연령범위에 맞는 인지발달수준이 있을 수 있음을 이때 처음으로 깨닫는다.
1921~1925년 사이의 업적으로는 유아의 언어, 판단과 추리, 세계관, 물리적 인과 그리 고 도덕관에 대한 연구가 있다. 특히 초기 연구 중에서 특징적인 것은 그가 아동의 사고를 특정 짓기 위해서 자기중심성(전 조작기의 아동인지수준과 관련 있는 개념으로자신의 입장과 관점에서만 현상을 해석하려는 현상)이라는 개념을 제안하였다.
이후 1926~1955 중기의 업적에는 유아의 행동관찰과 유아의 개념 형성에 대한 연구가 있다. 그는 자신의 자녀 세 명의 출생 이후, 행동을 관찰하였는데 이를 통해 자신의 인지발달이론과 4단계를 체계화하게 된다.
그리고 1956년 이후 말기는 제네바대학에 정착해서 수학, 물리학, 생물학 등의 여러 과학의 인식을 과학사와 발달심리학 등의 실증적 자료의 근거를 두고 과학적 방법으로 발달이라는 관점에서 연구해서 인식론적 철학사상을 발표하게 되는데 이것이 구조주의 철학사조(structuralism)에 속하는 발생적 인식론을 강조하였고 이후 리겔(Riegel)의 변증법적 심리학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엄밀히 말해 피아제는 성격심리학자는 아니다. 피아제는 발달심리학자이며 그의 생애가 보여주듯이 그의 삶은 생물학과 같은 자연과학, 철학 그리고 중간영역인 발달심리학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6. 미술심리치료의 선구자
미술을 최초로 표준화시킨 사람으로인물화에 의한 측정(DMT)을 1926년부터 심리검사의 도구로 쓰기 시작하였으며 발달 단계에 따른 그림의 능숙함을 지능의 발달과 관련 시켰다. 또한 발달 단계는 다시 말해 아동기부터 청소년기에 이르기까지의 인물화의 발달 과정을 표준화한 것이다. 그녀는 특히 내담자 가운데 자신의 몸에 결함을 갖고 있는 장애아동들은 그림을 통해 그 결함을 나타내고 있다고 했으며 이 같은 실험적 근거, 과학적 방법을 바탕으로 아동의 성격검사를 위한 투사적 기법으로 지금까지 인물화를 진단 도구로써 연구 활용되고 있다.
▪나움버그(Margaret Naumburg)
그녀는 1920년에 뉴욕에 있는 월든학교에서 자발적인 그림(spontaneous art)을 미술교육의 한 방식으로 도입한 뒤에 이런 시도를 하나의 미술치료 기법으로 개발했다. 또한 정신분석학교에서 행동장애아동들에게 미술치료를 적용했다. 이렇게 임상을 통해 넓힌 미술치료 기법을 계속적으로 성인미술치료에도 적용시켜 봄으로써 후에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을 토대로 정신분석 지향적 미술치료 모델을 정립하였다. 나움버그(Naumburg)의 정신분석 지향적 미술치료에서 중요시하는 것은 투사와 승화, 자발적 그림표현과 해석, 치료적 관계 형성, 그림의 상징성 등이며 위와 같은 미술치료들은 그림에 내담자의 무의식이 투사되고 언어화됨으로써 자신을 표현할 때보다 검열기능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함으로써 치료를 촉진시킬 수 있다고 했다.
울만(Ulman)은 미술작가로서 활동했으며 자신의 미술작가로서의 경험을 토대로 미술치료를 하게 되었음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녀가 1950년대 초 정신병원에서 미술교사의 입장에서 일하면서 결코 미술교사 혹은 미술치료사는 전혀 무관하지 않다라는 주장을 했다. 그 후 1961년 울만(Ulman)은미술심리치료와치료로서의 미술을 통합할 수 있는 정의를 내리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런 통합을 위해 울만(Ulman)은 치료자로서 나움버그(Naumburg)와 크래머(Kramer)의 견해를 적절히 절충함으로써 둘 간의 융통성을 부여하였다.
▪루빈(Judith A. Rubin)
루빈은 인본주의 심리학과 대상관계이론을 바탕으로 아동미술치료를 연구한 심리학자이며 미술이 아동의 무의식을 반영하고 아동의 관계 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 심리학자이다.
▪크래머(Edith Kramer)
내담자에게 있어 미술치료는 진단을 위한 도구가 아닌 미술활동을 하는 과정에서의 자기표현 그 자체로서 승화작용을 하며 미술작업을 통해 발산하는 억제된 자신, 즉 무의식의 분출로 인해 감소되며 건강한 에너지로 전환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미술작업과정을 통해 자신의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과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고 했다. 치료사의 입장은 내담자를 진단하는 역할이기보다는 내담자 스스로 통합하고 승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치료사의 입장이라 주장했다.
코헛은 시카고 정신분석 연구소에서 훈련받은 정신 분석가다. 1959년 논문을 통해자아심리학의 체계를 정립하였으며 자아심리학을 1971년에 코헛이 써 낸자아의 분석에서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다. 그는 자아심리학을 프로이트의 이론을 근간으로 하여 치료해 나가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또한 미술치료의 기능을 위니콧과 마찬가지로 무의식의 긴장과 고통을 표현시키는 것이라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