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채'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세계를 관통하려는 형형한 영혼!
비가 한여름의 더위를 일갈(一喝)시키려는 듯 후두둑 하강하는
어느 날 밤. 이/상/은/의/ 추/종/자/들/의/ 소/굴/인(온동네에
소문이 쫙~ --;;, 옮긴이 주 ^^;;) 인사동의 <섬>에서 오랜만
에 그녀를 만났다.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로 나타난 그녀에
게 나는 담가둔 술 한잔을 건네고 8집 에
대한 얘기를 빙자해 소탈한 수다를 떨었다. 존재에 대한 고집
런 탐구욕에 불타있던 그녀가 얼마간 안 본 사이에 좀더 투명
한 모습으로 변신하여, 자신의 근황을 털어놓기 시작하자.
<어기여 디어라>의 가사처럼 비는 점점 달게 쏟아졌고, <섬>의
구석구석에서 작주를 하던 사람들은 어느새 그녀의 노래를 따
라 부르기 시작한다.
요즘 근황이 어떠하신가?
- 일본에서 활동하다가, 영국에 들아가서 레코딩도 해보고,
<버진> 본사에 들어가서 여러음악 관계자들에게 나를 어필시
켜 보기도 하고, 그 후 일본으로 가서 새 앨범을 만들고, 공
연도 했지.
일본 영화 <간빳데이 키맛쇼이>에 네 음악 <어기여 디어라>가
O.S.T로 쓰였잖아. <간빳데이 키맛쇼이>가 무슨 뜻이야?
- 이와이 슈운지 감독이 제작한 영화지.
7집 <외롭고 웃긴 가게>에 있었던 <어기여 디어라>가 어떻게
<간빳데이 키맛쇼이>의 영화음악으로 쓰이게 된 거지?
- NHK방송에 나가서 한국말로 노래를 부른 적이 있었어. 그걸
이와이 슈운지 감독이 보고, 뜻도 모르면서 자기 영화에
<어기여 디어라>를 쓰고 싶다고 하더라구. 그런데 이상한
건 그 영화가 '보트부' 여학생들 이야기인데, 내 노래를 들
으면서 그냥 배에 관한 노래라고 느껴졌대.
우와~ 이건 '무의식 공동체'인데? 그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냐?
- 하하하. 내가 관련된 일은 흥행에 관련이 별로 없잖아. 그리
고 흥행이 너무 잘되는 것도 별로 좋은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
6집 이후 공동 작업을 계속 하고 있는 다케다 하지무씨와는 어
떤 면에서 교감이 잘되는 건지...
- 처음에 봤을 때는 과연 교감이 가능할까 의심을 했지. 그런데
음악에 대한 태도가 아주 성실하고 상당히 진지했어. 그 분,
오끼쯔라는 엔지니어 분도 마찬가지였지. 다케다 하지무 씨와
함께 음악을 하는 팀 'L&T'는 마치 독립영화를 만들 듯이 작
은 규모로 조그맣게 작업을 하지만 그 울림과 공명은 아주 크
거든. 함께 작업하면서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어느 틈엔가 서
로가 추구하는 게 같다는 것을 알게 되고, 교감을 이룰 수 있
게 됐어. 또 다케다 하지무 씨가 일본 사람이지만 한국에 대
한 편견이 전혀 없거든.
이번에 발매된 앨범의 제목은 인데, 앨범을 들으면서 또다시 감동의 큰 물결에 휩쓸렸어.
이번 앨범의 컨셉을 좀 얘기해줘.
- 동양적인 사상을 깊이 이해하고 있진 않지만, 내가 알고 있는
영역 안에서 소화해 내려고 했어. 홍신자씨를 만나서 내 인생
에 깊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 분이 이런 얘기를 해주셨어. '서
양인은 자연과 인간을 이원론적으로 생각하고, 동양인들은 자
연의 일부로서 인간을 바라본다' 그 얘기를 들은 게 92년도인데,
그 이후로 동양적인 철학관과 사상에 대해 책도 찾아보고, 공부
도 하고 생각과 고민을 많이 했지. 서양권에서 음악을 하기 시
작했지만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서양식으로는 대결이 되지
않았어. 그래서 내 자아를 그대로 드러내고, 내가 기억하고 상
상하는 것들. 내가 속한 아시아를 표현하자. 여기서 음악이란
뭘까. 그건 아마 사람들의 다친 마음을 치유해주는 처방전이 아
닐까 그런 생각에 도달하게 됐지.
얼마 동안 안 본 사이에 상당히 과묵해진 것 같아. 말을 아끼고
있는 이유가 있어?
- 말을 많이 하면 실수를 많이 하잖아. 에너지를 발산한다기 보다
는 묵히고 충전해야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했어. 자동차로 보자
면 뉴트롤 상태 있잖아. 중립상태. 구조적으로 설명하자면 너무
애쓴다거나 너무 침착하지 않은 상태로 있고 싶어.
한국의 대중 시장을 떠나서 세계의 음악 시장에 진입하려는 움직
임이 느껴지거든. 시작 단계인데 어때?
- 세계로 나간다는 게 무슨 마돈나나 머라이어 캐리 같은 그런 형
태가 아니잖아. 메가톤급으로 돈을 버는 대형 가수가 아니라.
한명의 아티스트로 음악을 하는 거니까. 사실, 앨범에 세계적인
어쩌구 저쩌구 그런 말이 붙었는데, 별로 맘에 들진 않아. 내
음악을 공감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 있다면, 그들과 내 음악을 연결시켜 주고 싶은 거야.
요즘 가장 영향받고 있는 건 뭐야?
- 새삼스럽게 '칼 융'인데, '무의식 공동체'에 관한 것들이야.
무의식 공동체라는 것은, 이제까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태어
났다가 죽었냐. 그러나 그 사람들의 생각이나 정보, 가치 등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거야. 그 세계는 인터넷보다 광활한 지
식과 정보, 가치가 담겨져 있는데, 공통의 생각과 가치를 가지
고 있는 사람들은 지구 곳곳에 흩어져 있어도 교감이 이루어진
다는 얘기지. 결국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의식적으로 혹은 눈
에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거야.
가볍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뭐니?
- 어렸을 때는 도시에서 태어나 자라서 그런지 시골에 가서 나무를
보면 기분이 이상했어. 세상에서 가장 이해가 안되는 게 자연이
다, 라고 생각했지. 인간이 만들어 낸 게 아니잖아. 지금은 부모
님이 양수리에 계시니까 양수리집에서 아침을 맞을 때, 창문을
열고 나무를 보면 안심이 돼. 너무 좋아.
지금 행복하니?
- 응. 행복해. 난 뭔가 마구 일을 한다는 게 체질상 안 맞아. 바쁘
게 움직이는 걸 되게 싫어하거든. 담다디 떴을 때 한 2년간 엄청
나게 바빴잖아. 그 때 내 자신을 마구 잃어 간다는 생각이 들더라
구. 요즘은 내 리듬에 맞춰 쉬엄쉬엄 달팽이 같이 움직여.
아주 히피가 되가는구만.
- 하하히. 히피보다는 어린이가 되어 가는 거겠지. 언제나 진정한
어른이 되고 싶었어. 근데 진정한 어른이란 어린이 같은 사람이
진정한 진짜 어른인 것 같아.
1999년 12월 31일날 뭘 할래?
- 가까운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게 가장 힘들잖아. 힘들기 때문에
더욱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1999년의 마지막 날을 함께 보
내고 싶어.
인터뷰/정유희 사진/박창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