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할 작품 공개
1. 국밥 한 그릇
바람이 분다. 찬바람이,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접어드는 언저리에 노란 산국화도 빛을 잃고, 초록이 바랜 덤불 사이로 작은 열매들은 마지막 햇살을 즐기고 있다. 새들은 높이 날며 길을 떠나고, 감나무 끝에 나부끼는 마른 잎새의 몸부림은 갈 곳 잃은 영혼처럼 처연하다.
어머니와 마지막 작별을 고하던 날도 잎새의 흐느끼는 소리가 문밖을 서성거렸다. 슬픔도 애달픔도 곰삭은 세월이라지만 해마다 이맘때면 찾아드는 잔영들, 마음이 헛헛하다. 털실로 짠 목도리를 두르고 여든 넘은 어머니와 소풍을 하던 육거리 시장으로 나서본다.
무심천 둑을 따라 표표히 흐르는 억새 물결에 흘러간 시절도 출렁인다. 남주동 쪽 시장 골목 어귀에 이르자 건강원에서 달이는 진한 약초 냄새가 마중을 나왔다. 은근한 향기는 내 몸을 감싸며 어머니의 체취처럼 한기를 녹인다. “내년에 내가 여길 다시 올 수 있을까?” 예측할 수 없는 노년의 삶에 겸허히 순응하며 히죽 웃으시던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저만치서 나래를 편다.
석교동 파출소가 있던 장터 사거리에 서니 체육사 유리점 수예점...어슴푸레한 옛 풍경들이 고리를 문다. 문명의 옷을 입은 채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재래시장의 풍속은 여전히 후한 인심과 넉넉한 인정으로 사람 사는 냄새를 풍기고 있다. 여기저기 호객하는 소리조차 시장에서만 볼 수 있는 정겨움이 아닌가, 품바 차림을 한 엿장수가 걸쭉한 만담을 토해내자 시장은 한바탕 웃음바다가 된다.
사람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는 시장은 우리네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공간이지만 마음 한켠에 서글픈 사연이 움츠리고 있다. 채소전, 어물전, 난전, 약전, 싸전...이 낯익은 골목들은 어머니가 장날이면 채소를 팔러 다니던 유년의 언어이기도 하다. 마침 시계방 옆 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노쇠한 할머니 몇 이서 묵나물과 고사리 그리고 짓 고추를 팔고 있다. 조막만 하게 늘어놓은 좌판에 마음이 시리다. 늙고 야윈 몸으로 일손을 놓지 못하는 것은 오랫동안 시장에서 잔뼈가 굵어 간 때문일까? 괜한 연민이 걸음을 붙들고 어머니 생각에 젖게 했다. 허기진 세월, 젊잖고 단아하시던 어머니가 저잣거리 난전에서 열무 다발을 이고 다녔을 서글픈 잔상이 눈시울을 적신다. 양은 다라에 푸성귀를 이고 장고개를 넘던 어머니의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명하다.
사 십 년 전 신혼 초기에 장 항아리를 사러 어머니와 옹기전에 왔던 기억이 난다. 아담한 항아리를 두어 개 골라놓고는 순대 국밥집으로 나를 데리고 가셨다. 처음 가본 허름한 국밥집에서 허기를 채웠을 어머니의 지난 시간을 가늠할 수 있었다. 돼지 뼈를 푹 고아 달였다는 순대국밥이 푼푼한 뚝배기에 담겨 나왔다. 세월을 정제하듯 뭉근한 장작불에 우려낸 국물이 바글바글 끓는다. 딸에게 진국을 먹이고 싶었던지 내 국그릇에 고명을 얹어 거품을 걷어내시던 어머니의 잔정이, 뚝배기에 모락모락 피어났다.
아련하게 밀려오는 추억에 옛날 어머니와 들렀던 국밥집 생각이 났다. 골목 끄트머리 구석진 자리에 세월을 간직한 채 대를 잇는 국밥집이 보인다. 뉘엿한 볕을 뒤로하고 덜컹대는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섰다. 인생은 허기진 것이라더니 따뜻한 국물 한 그릇에 위안을 받으려는 듯 탁자마다 손님들이 떠들썩하다. 일상에 지쳐 보이는 사람들, 애환과 눈물로 채워진 사람들, 세상을 타박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젊은이의 넋두리도, 저마다 뜨거운 국물을 후후 불며 뚝배기를 비우고 있다. 나는 혼자 계면쩍어 벽을 보고 앉았다. 살그락 소리가 들리더니 아주머니가 국밥을 내어온다. 자글자글 끓고 있는 뚝배기에 오종종하게 잔거품이 모여든다. 거품을 걷어내고 구수한 진국에 공깃밥을 욱여넣었다. 추억을 만난 순댓국에 헛헛하던 마음에 포만감을 더하며 이마에 구슬땀이 맺혔다. 옆자리에 살가워 보이는 젊은 아내가 남편의 그릇에 거품을 걷어주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삼삼오오 시끌벅적하던 손님들이 흡족한 듯 자리를 뜬다. 빈 그릇을 치우는 주인 아낙에게 국물맛이 좋다고 인사를 건네자 적당한 때 거품을 걷는 게 진국을 맛보는 비결이라고 귀뜸을 해 주었다.
옅은 어둠이 내린다. 시장 골목을 빠져나오는 동안 주인아주머니 말이 떠나지 않았다. 국밥 한 그릇이 주는 무언의 교훈에서 “욕심은 부릴수록 힘이 없다”던 어머니의 옛이야기를 반추하며, 우리 사회에 만연한 거짓과 허망한 욕심이 어서 빨리 걷히기를 소원해 본다.
2. 우리동네 재래시장
‘오이 호박’ ‘오이 호박’
오늘도 어김없이 들려오는 트럭 아저씨의 친근한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들려온다.
이쪽 저쪽 골목에서 아주머니 할머니들이 우루루 쫓아 나와 2톤 트럭에 다닥다닥 해안가 바위에 붙은 홍합 처럼 바짝 붙어 필요한 식자재를 고르기 시작한다.
일주일에 세 번씩 월 수 금 오전 10시쯤 되면 들려오는 소리다. 좀 멀리 사는 분은 일찍 나와서 낯익은 분들과 여담도 나누고 가까이 사는 분들은 “오이 호박‘ 확성기 소리를 듣고 바지런하게 달려 나와 트럭 아저씨와 아주머니를 맞이한다
월요일은 시금치,오이,호박,양파,감자,파,배추등의 채소 종류와 제철 과일을 가져오고 화요일은 채소와 오징어,고등어,가자미,조개등의 해물이 실려있고 금요일엔 채소와 함께 땅콩 아몬드 김 같은 건어물과 젓갈류등 을 싣고 온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트럭을 동네 텃밭이라고 부른다. 텃밭에서 캐온 채소처럼 늘 상큼하고 금방 바다에서 건져 올린 생선처럼 싱싱하기에 붙여준 이름이다. 값도 싸고 덤은 기본이며 양심적이다. 이 물건이 좋으니 조금 비싸고 요건 흠이 있어 싸게 판다고 쪽지에 써서 넣어 온다. 몇 십년을 서로 믿고 상생하는 이유이리라
전엔 몸도 건강하고 팔도 튼튼해서 장을 보고 웬만큼 무거운 배추나 무도 번쩍번쩍 들고 다녔는데 언제부터인지 양배추 한 포기만 들어도 집에오려면 몇 번을 쉬어야 올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맨 처음 트럭을 알게 된 건 몸이 아파 병가를 냈을 때 동네 아주머니의 소개를 받았다. 기운이 없어 시장가기도 버거울 때 알게 된 이동식 재래시장인 야채 트럭은 내겐 구세주 같았다. 내가 물건을 이것저것 골라놓으면 남편이 와서 들어다 주기도 하고 친한 이웃이 가져다 주기도 했다. 아마 내가 이만큼이라도 건강을 회복 된건 어쩌면 늘 싱싱한 각종 채소와 선도 높은 생선이나 제철 과일을 가까이서 수시로 먹은 덕분 이 아닐까 생각한다.
세월이 차츰 흘러 서로 친근한 사이가 되니 조금 무거운듯 싶으면 아저씨나 아주머니가 물건 다 팔고 지나는 길에 내려주고 갈테니 그냥 올라가라고 한다. 나도 더울땐 시원한 음료수도 드리고 집에 넉넉한 물건이 있으면 나눠드리기도 한다. 밖에 외출할일이 있어 부득이 못 나갈땐 미리 전화로 부탁하면 현관 앞에 무거운 마늘이며 총각김치거리를 시들지 않게 잘 여며 놓고 가신다. 이웃사촌처럼 손이 되어주고 발이 되어주니 참 고마운 분들이다.
집에서 한 10여분 거리에 사창시장이 있다. 옛날에 곡식 창고가 있던 곳에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어 사창시장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가끔 물건을 사러 가기도 하지만 마음이 울적하거나 어떤 일이 생각대로 안될 때 훌쩍 나와 시장을 한 바퀴 돌면 스르르 마음이 풀어진다
추운 날씨에 몸을 옹송 거리면서 호박잎 한 소큼, 상추 한 웅큼, 아욱이나 호박 몇 개 차려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부른다. ‘애기엄마, 방금 뜯어 온겨. 많이 줄게 어여 가져가’ 머리가 히끗히끗한 할머님들이 농사 지어온 채소를 권하신다. 마주 앉아 이야기를 주고 받다 보면 돌아가신 엄마가 생각나기도 하고 저 연세에도 저리 치열하게 사시는데 넌 뭔 투정여 하고 나무라시는 것만 같아 에이 별일도 아니네 하고 엉켰던 실타래가 술술 풀어지기도 한다.
언젠가 시장을 보고 대문을 들어선 순간 혼비백산해서 다시 시장으로 한달음에 달려간 적이 있다.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고 가게 앞의 평상에서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지갑을 놓고 왔는데 다행히 사장님이 챙겨줘서 찾아 온 일이 있었다.
또 작년에는 친구가 지나가는데 고추방앗간 주인이 내 인상착의를 얘기하며 고춧가루값을 안낸 것 같다고 물어봐 달라고 하더란다. 전화를 받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고추와 메주등 을 빻아놓으라고 하곤 값을 지불 하는 걸 나도 주인도 깜박 잊고 물건만 들고 와 버린 것이다. 재래시장 이어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여있기에 아무 일 없는 듯이 자연스런 일상이 되고 그 일로 인해 더욱 친근해지고 단골로 이어지는 것 같다.
한 번은 두부 가게 앞에서 모처럼 반가운 친구를 만나 잠깐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성깔 고약한 아주머니가 가게 앞을 가린다고 바르르 화를 내길래 단골 아저씨한테 물었더니 시장 상인들하고 싸우지 않은 사람이 없단다. 그러더니 일 년도 안돼 문을 닫고 말았다. 인지상정(人之常情) 이라고 사람 마음은 다 비슷하다. 인심이란 물 흐르듯 바위와 골짜기를 돌아 흘러가기 때문이리라.
요즘은 시장의 모습도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음식을 만들려면 식자재를 사서 만들었지만 손쉽게 반찬가게에서 완제품을 사간다. 사창시장에도 연 매출이 몇십억이 넘어 서민갑부, 6시 내 고향에 출연한 반찬가게도 있다. 매일 4~50명씩 줄을 서서 반찬을 사간다. 추석이나 설날이면 떡집 전집 반찬집에 줄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그래도 재래시장은 예전에 비해 손님이 많이 줄고 있는 건 사실이다.
며칠 전 시장 골목을 지나는데 옷가게 주인이 나를 보더니 하루 종일 가게안에 들어오는 손님이 없어 사람 구경 나왔다고 하소연을 한다. 자꾸 손님이 줄어드는데 코로나로 그나마 반도 더 줄었단다. 예전엔 가만히 서 있어도 인파에 저절로 떠밀려가다시피 사람이 많았던 시장이었는데.....
그래도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겠지. 따스한 봄이 오면 이름 모를 산나물과 냉이, 달래, 씀바귀를 뜯어다 작으마한 소쿠리 소복소복 담겨 있을 거다. 할머니가 뜯어온 봄나물엔 봄내음이 살풋이 담겨 있을테고, 아주머니가 띄워온 청국장엔 구수한 고향소식이 묻어 올 것이다. 흙 묻고 갈라진 야채가게 아주머니손, 겨울에도 물 마를 새 없어 빨갛게 동상에 걸린 손두부 아주머니의 손은 바로 우리 어머니의 손이다. 자녀와 가족을 위해 온몸으로 오롯이 살아내는 어머니, 그 어머니가 만든 우리의 음식은 신선한 재료와 정성이 담긴 밥상이고 좋은 음식은 최고 명약이며 엄마밥 만큼 훌륭한 음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어머니가 정성 들여 마련한 음식을 먹고 자란 자녀는 연어가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오듯 어머니의 입맛을 찾아 건강 음식을 찾아 재래시장으로 찾아오지 않을까? 우리 동네로 찾아오는 이동식 재래시장처럼 말이다.
3 재래시장
“ 오! 저거 봐 빨간 감자가 아직도 있네? ”
휴일 육거리시장을 떠돌다가 빨간 감자를 보고 옛 친구 만난 듯 반가워 했다. 1950 년 6,25 때 생각이 났다. 조부님 돌아가시기 직전 그분 생전에 우리 집 감자 씨의 대부분이 빨간 감자였다. 이것은 호랑이 같으시던 조부님의 내것을 지키던 고집 때문이었다. 그분은 닭도 조선 닭 (재래종이란 뜻) 이래야 맛이 좋다고 했다. 더러는 자주감자거나 흰 감자도 있었으나 그 후 조부님도 돌아가시고 품종 개량에 밀려 없어지고는 가끔 감자를 보면 그 시절 생각이 나곤 했는데 각 지역 농산물이 상품으로 몰려드는 전시장 같은 재래시장에서 그 아득하고 따사로운 옛날을 만난 것이다. 옷매무새가 다양하고 연령층도 다양한 상인과 손님 들이 무질서하게 법석거리는 재래시장 청주의 육거리 시장을 나는 휴일에 가끔 자전거를 끌고 돌아본다. 그 소박성과 다양성과 원시성이 과거와 현재를 뒤섞으며 묘하고 솔직하게 인간사의 진실을 활력화 하기 때문 인가 싶다. 외국에도 재래시장이 따로 있어서 몽골 여행 중 재래시장을 일부러 가 봤다. 그런데 가난한 나라라서 인지 집에서 쓰던 전기소켙 이나 전깃줄까지 팔고 쓰던 식도까지 팔고 있어서 짠 한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아침 7시경 무엇을 사면 좋을까? 생각부터 하고 또 자전거를 타고 육거리 쪽으로 향했다. 코로나 여파로 아직도 생기를 찾지 못한 시장이지만 그래도 큰 보따리 나 박스들을 풀어 얼었거나 염장한 생선도 진열하고 옷가게들도 보기 좋게 옷을 내 걸고 있다. 떡집은 군침이 돌게 하는 반질반질 기름 바른 송편이나 김이 나는 시루떡을 좌판에 올린다. 오늘은 얼마나 팔릴까 기대에 찬 개점이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그저 운이 좋기만를 생각해야 하는 상인들의 표정은 이미 잘 연습한 배우들이 무대의 막을 열 때처럼 밝아 보인다. 나는 돼지 족발을 진열하는 단골집 아저씨와 스치며 인사를 하고 내가 좋아하는 닭발과 똥집을 파는 도매 집으로 갔다. 그 집도 자주 가는 단골집인데 그 집 아주머니는 용하게 고객인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하며 “ 아저씨야 말로 맛을 아시는 분이라 팍팍 한 닭가슴살을 마다하시고 얼큰한 닭발 요리를 즐기시는데 나름대로 멋쟁이셔요.” 라고 슬쩍 추켜세워 주는 걸 잊지 않는다. 나는 남들이 웃을까 몰래 닭발과 똥집을 사며 나 스스로 식성이 좀 천박한 거 아닌가 때로는 창피한데 저렇게 알아주니 속으로 고마웠다. 다 장삿속이라 비위 맞추는 것일 수 있으나 그래도 틀린 얘기는 아니니 인간관계는 밝아지는 것 아닌가 싶었다. 다음 구매 물건은 염장한 조기인데 그쪽으로 가다 보니 각종 모자를 파는 가게가 있었다.
아! 자전거 탈 때 귀가 시려서 고생했는데 털모자도 사야겠다 싶어서 견물생심 (見物生心) 으로 털모자를 골랐다. 엷은 군청색 천에 예쁘게 털을 장식한 모자를 써보니 부드럽고 따스했다. 가격을 물으니 12000 원 이래서 으레 에누리가 붙은 가격인가 싶어 만원 만 하자니 그 늙수그레한 점주가 그렇게는 안되고 천원 깍아 준대서 그냥 샀다. 만약에 만 원에 하자고 빡 빡 우겼다면 천원 더 깍을 수 도 있을 눈치였으나 저 분들 도 이 어려운 상황 속을 벗어나야 하니 라는 생각에 양보하고 많이 팔으시라 는 인사를 하고 생선 가게로 갔다. 각종 물 좋은 생선들 속에서 나는 내 특유의 식성대로 소금물에 담겨 있다시피 한 제사상에 오르는 염장 조기를 샀다. 생각보다 무척 비싼데 이걸 석쇠에 굽거나 밥솥에 찐 건 내 괴팍스런 식성에는 딱 맞는다. 집에 가져 와 봐야 너무 짜다고 아무도 젓가락을 대지 않으니 얼마나 호젓하냐고 아내가 비꼬아 가며 조리를 해준다. 만 원을 주고 조기 두 마리 사고 채소 전으로 가서 내가 잘 먹는 미나리를 찾으니 늦가을은 시기가 미나리 나올 때가 아니라 있어도 엄청 비싸고 사도 질겨서 못 먹을 정도로 품질이 나쁘다 해서 사는 걸 포기했고 집으로 향하며 얼 큰 한 닭발 요리와 간조기 요리를 떠 올렸다.
육거리 시장 큰 도로변에는 시린 손을 모닥불에 쪼이며 커피를 마시거나 시켜온 국밥을 서서 떠먹으며 사세요! 사세요! 손님의 발길을 붙잡는 모습이 생생한 삶의 파노라마 였다. 이런 시장 복판에 섞여 그들의 대화와 인정에 얼키면 어떤 호젓한 삶의 정서만이 참다운 것은 아니고 대양의 물결처럼 함께 너울지고 파도소리처럼 어울리는 게 삶의 길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잠시 잠겨 보는 것이다. 시골 할머니들이 이 손시린 초겨울 들에 나가 나물을 캐어 길가에 쪼그려 앉아 손님을 기다리는 걸 으례히 본다. 돈이 되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나 조금이라도 용돈을 벌어서 떳떳 한 노년을 지내시려는 생각일 수 있고 또는 집에서 편하게 누워 계서도 되겠지만 이 재래시장 속 삶의 무리에 섞여 무언가 동화되고 기다림으로 하루를 보내는 게 더 그럴 듯 하니 저럴 것 이라고 생각해 본다. 그러니 재래시장의 생리야 말로 측은하기도 하고 고귀한 아름다움이기도 한 것 같다.
4. 나는야 재래시장 마니아
날씨가 추워져 새벽 운동 시 편하게 입을 기모 바지를 하나 사러 육거리 시장엘 들렀다. 톡톡한 바지도 고르고 눈처럼 하얗고 보드라운 흰 목티도 더 샀다. 자주 가는 상점에서는 견과류와 흑미를 샀더니 되로 절반 가까이나 더 퍼준다. 난전의 할머니로부터는 콩나물을 사고, 강정 파는 곳에선 출출할 때 먹기 좋은 ‘현미 인절미 뻥튀기’도 한 봉지 샀다. 유튜브에서 본 맛집이 눈에 뜨여 떡갈비와 치즈 돈가스도 한 상자씩 담는다. 젊은 총각이 시원시원한 입담으로 서비스라며 넉넉하게 챙겨주니 장사가 더 잘되는 듯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훈훈하다. 장을 봐온 떡갈비와 돈가스를 구워 저녁을 내니 가족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에 이게 바로 재래시장의 묘미가 아닌가 싶다. 큰돈을 들이지 않고도 마음이 흐뭇해지는 곳.
요즘 딸과 함께 ‘우쿨렐레’를 배우는데 이번 주는 '쿵따리 샤바라'라는 노래를 연습 중이다. 마음이 울적하고 답답할 땐 산으로 올라가 노래하고 춤추며 스트레스를 푼다는 내용이다. 나 같은 경우는 종종 그럴 때 재래시장을 찾는다. 골목골목 누비며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시름을 잊게 된다. 다양한 사람들의 삶은 나를 돌아보게 한다. 나보다 더 힘든 일을 하는 이들로부터는 삶의 에너지를 얻고, 기우(杞憂)로 복잡해진 머리는 단순하게 만들어준다. 오늘도 온종일 냄새나는 닭집에서 장화와 방수 앞치마를 두르고 닭 잡는 일을 하는 아저씨를 보며 내 현실에 고마움을 느낀다. 이곳은 치열한 삶의 현장이기도 하지만, 엄마 품과 같은 푸근함과 그리움이 있다. 옛것과 새것의 공존은 호기심과 신선감을 주어 지루하지 않고 가끔 쏠쏠한 재미를 주기도 한다. 내게는 쇼핑으로 다이어트도 하고 힐링도 되는 ‘일석이조 (一夕二鳥)’의 효과를 얻는 장소다.
어릴 적 농번기의 부모님은 농사지은 채소와 오이를 리어커나 경운기에 가득 싣고 십여 리 밖의 시장에 내다 파셨다. 채소를 파는 일은 늘 엄마의 몫이었다. 일단 시장에 도착하면 아버지께서는 어느 술집으로 향하셨는데, 꼭 술집을 여기저기 옮겨 다니셨다. 엄마가 찾으러 오는 게 싫은 것이다. 다음날 장거리 준비에 마음이 바쁜 엄마는 어쩌다 채소를 일찍 팔아도 기약 없는 아버지로 인해 한여름 뙤약볕 아래의 새까만 얼굴만큼이나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셨다. 가을이 깊어 채소가 적은 날에는 호박 몇 덩이와 비름나물 몇 단을 머리에 이고 혼자 장에 나오셨는데, 날이 어둑어둑하도록 다 못 팔고 시장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계신 모습을 볼 때면 가슴이 미어졌다. 그런 엄마의 모습 때문일까? 지금도 다 팔아야 고작 1~ 2만 원 안팎의 채소를 팔아보고자 시장 귀퉁이에서 마지막 떨이를 기다리는 어머님들의 모습은 외면하기가 힘들다. 나물 하나, 호박 하나를 장바구니에 담는 것은 그 당시 엄마의 애잔한 그리움이다.
뭐니 뭐니해도 재래시장의 꽃은 즉석 먹거리장터다. 길거리의 매콤한 떡볶이와 고추 튀김에 삶은 달걀 하나 얹어 허전한 배를 채우고 나면 바늘구멍 같았던 내 마음이 보름달처럼 크고 둥글어진다. 그러면 가족을 위한 먹거리도 덩달아 늘어난다. 시장마다 인기 있는 먹거리 메뉴들이 있다. 순대, 꽈배기, 사색 인절미, 메밀전병, 빨간오뎅, 만두, 수수뿌꾸미전, 닭강정, 멸치회, 옛날통닭, 닭똥집 등 내가 체험한 재래시장의 먹거리도 수십여 가지는 된다. 전국의 재래시장 맛집 투어는 내 버킷리스트 중의 하나라 아직 가보지 못한 시장은 앞으로도 남은 과제다.
좋아하는 의류 쇼핑을 할 때면 마치 허공에 들뜬 기분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눈에 반짝반짝 헤드라이트를 켜면 시야가 넓어진다. 도파민의 분비량이 많아짐을 느낀다. 쇼핑중독도 게임이나 마약과 같은 부위의 뇌가 활성화된다는데, 아마 나도 그 부위의 뇌가 활발해지는 것 같다. 의상 디자인을 전공하고 싶었던 오래전 미련이 아직 남아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장 패션도 옷감과 색상이 맘에 들고 나한테 어울리면 약간씩 변형시켜 내 체형에 맞춰서 입는 건 내 특기다. 내 스타일에 맞게 내 손때가 묻어야 오래도록 그 옷에 애착이 크다.
얼마 전엔 약탕기가 필요하여 옹기 상점을 찾았더니 그 옛날 약탕기가 아직도 그대로 있다. 근처엔 지게도 보이고 키도 보인다. 옛날 엿 집도 그대로다. 골동품 시장 같은 이곳은 진정한 장인정신을 이어가는 산 장소이기도 하다. 시장 지붕의 아케이드 설치는 보면 볼수록 흐뭇하다. 나도 이만큼 좋은데 시장 상인들은 얼마나 더 좋을까? 대형마트를 선호하는 주민이 늘면서 악취가 풍기던 시장들도 많이 개선되었다. 구청과 상인들의 노력이 보태진 결과다. 어느 재래시장은 격주로 시장 대청소를 하면서 코로나 19시기임에도 점포 수가 오히려 늘고, 인근 상점의 매출까지 끌어올렸단다. 명절 대목에만 인기 있는 전통시장이 연중 내내 인기 있는 장소로 탈바꿈된 모범 사례다. 이런 전통시장의 본보기가 전국으로 확대되어 옛것은 지키고 새로움을 창조해나가는 풍습이 오래도록 이어지길 간절히 바란다.
5. 재래시장 순서가 되지 않았는데 비슷한 이름이 불리니, 꼬부라진 오이 같은 허리를 펴지도 못하고 한쪽 다리를 절며 진료실 문을 열고 냅다 들어간다. 그 행색(行色)을 보고 다행히 뭐라 하는 이는 없지만 안 들리는 건지, 듣고 싶지 않은 건지,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난전에 판을 벌여 놓고 왔으니, 마음은 거기에 가 있을 것이다. 진료를 받고 나서 그 몸으로는 한참 가야 제자리로 갈 터인데, 그동안 손님은 몇이나 왔다 갈까 싶어 마음이 쏠린다. 일을 마치고 빠른 걸음으로 저녁거리를 살 요량으로 일부러 시장 끝 난전으로 향한다. 특별한 호객 행위도, 손짓도, 없지만 병이 생긴 줄 알면서도 약만 의지한 채 무심히 자리를 지키는 그 앞에 또 쭈그려 앉는다. 이것저것 두어 봉지 꼭꼭 채워 주고, 한사코 마다해도 한 움큼을 더 넣어 주기는 하지만 오고 가는 이들의 발길이 뜸해 졌는데, 팔 것들은 그다지 줄지가 않은듯하다. 빈 함박이 보이지 않으니, 농사철 틈틈이 속리산에 관광객이 들 때면 푸성귀를 솎아서, 산으로 난 지름길로 무거운 광주리 이고 갔다가 다 못 팔고 오셨던 어머니가 앉아 있는 거 같아 자꾸 뒤돌아본다. 발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면, 소방차가 지나가게끔 그은 선을 따라 반듯하게 정리 되어 있지만, 누구라도 붙잡고 이심전심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이다. 국산, 외국산 따지며 부위별로 고기를 고를 땐 사려고 줄 서는 이들과 친절히 설명을 해 주는 젊은 주인 칭찬을 잊지 않는다. 비릿한 생선과 물컹한 닭은 물로 씻고 손질까지 해주니 집에서 조리 하기가 수월하다. 필요치 않은 것을 사게 될 까봐 장을 보려면 배를 채우고 가라는 누군가의 삶의 지혜 같은 말을 잠시 뒤로 하고 먹음직스럽게 진열해 놓은 반찬가게에 앞으로 간다. 만들 때 시간이 걸리는 것 몇 가지 집어 들 땐, 김치 버무리던 어머니의 벌건 손이 슬그머니 생각이 난다. 한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전날 저녁에 재료를 주문하면 아침준비 할 때쯤, 문 앞에 와 있는 새벽배송을 이용 하였으나 편리함은 몸은 덜 움직이게 하지만 발품을 팔아 보고 듣고 하여 그 속에서 느끼는 것 이야 말로 삶의 자양분(滋養分)이 되지 않나 싶다. 마음 트는 단골이 되고 누구든지 추억 하나쯤 가지고 있는 곳이 여기 인 것 같다. 아버지를 따라 십리 길을 걸어 나가, 장에 가는 버스를 타고 두 살 위 오빠와 처음 5일장 구경을 했다. 사람이 많은 것도 수북이 쌓인 물건도 가끔 지나는 차들도 모두가 신기하고 아버지와 떨어질까 두렵기도 했다. 모처럼 농사의 힘든 노동에서 벗어나 마음 편히 막걸리 한잔 걸칠 수 있고, 이사 나와 장터 끝에 점포를 낸 마을형님도 볼 수 있는 날이었다. 도회지로 공부하러 간 형님대신 고향에 남아 농사를 지어야 한다며, 어미 없이 할머니 손에서 자란 아버지는, 형님을 여러 번 찾아 오신듯하다. 장마당을 돌고 오신 얼큰해진 아버지는, 묵직한 자루를 쥐어 주고 미처 사지 못한 것을 사느라, 장터에서 흥정을 벌이셨다. 무엇이 나오려는지 입구가 풀어지고 끝내 삐 집고 나온 새끼 돼지가 도망가려고 세게 꿈틀거렸다. 온 힘을 다해 뒷다리를 잡고 오빠는 목을 감싸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오시지 않고 맨들맨들한 돼지는 더욱 발버둥 쳤다. 힘이 빠진 사이 품을 벗어난 돼지는 재빠르게 장터 안으로 도망갔다. 멀리서 이 소란을 보던 아버지가 잡으러 뛰어 가고, 뒤이어 물건 팔던 몇몇이 따라 나서지만 어미 품에서 떼어진 새끼는 온통 장터를 헤집고, 큰길가로 뛰쳐나가더니 곧 건물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찾으러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술기운 탓인지 얼굴은 더욱 발개져 있었다. 해거름이 다 되어 말없이 집으로 가는 길은 무척 멀게만 느껴졌다. 공부도, 점포도 갈등에서 지우고 뿌리를 내리려 하였던 아버지는 빈 우리 같은 심사로 묵직한 가장의 무게를 지게처럼 평생 지고 살았을 것이다. 분식집 앞에서 주저앉아 떼쓰는 아이를 보니, 추억이 하나 만들어 지는 것 같아 미소가 지어 진다. 예전의 떠들썩한 장날 같은 맛은 덜하지만, 파는 이나 사는 이나 사연과 삶의 이야기가 있고 마음의 덤이 얹어 지는 곳이다. 시장은 변했어도 고향처럼 자꾸 발길이 닿는다. 아마도 사람 냄새와 옛 시절이 그리운 탓인 것 같다. 요즘이야 달리 정을 충전할 곳이 마땅치 않으니 사람 부딪히는 이곳으로 모이는 듯하다. 한동안 병원도 오시지 않고 난전에도 보이지 않아 물어보니, 돈이 모일 때마다 하나뿐인 아들이 다 가져다 없애 속앓이가 심했나 보다. 삶에서 삶을 지키려고 귀 막고 입 닫고 속으로는 남모르게 발버둥 치는 이가 이뿐이랴. 장에서 필요한 물건만 골라 담듯 마음에도 그러면 좋으련만 세상사는 그렇지가 못하다. 찬바람 지나는 시장 끝자리에서 가늘게 웃음 지으며 빈 마음을 채우듯, 봉지를 그득 담아주던 할머니의 자리는 오늘도 비어 있다. |
6. 유성장의 풍경
식탁위에는 방금 내 열손가락에 매 달려 온 검은 봉지가 널려 있다. 각각의 자리로 선택 받기 위해 기다리는 중이련만 난 한참동안이나 그 검은 봉지에 몰입해 있었나보다. 걸핏하면 추억놀이를 일삼는 내게 장에서 가져온 검은 봉지는 시장나들이에 대한 회상을 부르기에 제격이 된 셈이다. 잠깐의 꿀맛 같은 시간이 지난 것 같다. 장으로 가던 길에 마을 어귀에서 친척 할머니를 만나고 소달구지 위에 앉아 깔깔대던 까무잡잡한 모습들, 그 얼굴에 하얗게 핀 웃음까지도 만날 수 있었다. 그 중 언제나 만나는 아이가 있다. 그럴 때면 내 추억은 만발을 하고 만다. 어릴 적 가끔 있었던 어머니와의 장나들이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장터에 이르기도 전 돌담사이로 들려오던 엿장수의 외침에 금세 내 입안에는 단물이 흐르고 내 뛰는 발걸음에 가슴도 마구 뛰었다. 이는 내가 지닌 기억 가운데 최고의 순애보다. 이토록 내 삶에 바늘과 실이 되어버린 추억의 보따리들을 어찌 마다 하겠는가. 오늘은 4 , 9일장이 서는 유성장날이다. 친정과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고향이 유성인 남편에게 굳이 동의를 구할 필요는 없었다. 고향이야기만 꺼내도 신바람이 나는 남편과 돌아가신 시어머님과의 추억담을 나누며 장터입구에 도착했다. 예전에는 트럭이나 봉고차정도가 서있던 길가에 이름도 어려운 승용차들이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장대동 시장터의 변한 모습에 놀랄 새도 없이 나는 십여년이 지났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점심때가 되어서인지 왁자지껄한 시장은 마치 작은 지구를 연상시켰다. 누가 뭐래도 내 게는 그렇게 다가왔다. 인간이 사는 시장에서 각각의 명분을 달아 그 틈에 끼어 자리매김하는 물품의 구성은 최고의 조합이다. 삶의 근원이 되는 이곳에서 어느 것 하나도 소외될 수 없는 것, 천태만상의 장이야말로 경이로움 그 자체다. 그래도 재래시장이라하면 지난 삶들이 넘나들어야 제맛이라고나 할까. 어디서 들려오는지 찔레꽃 피던 시절의 노랫가락은 아련하고 한가로운 여인들의 입술에선 못잊을 사람들이 스쳐가버렸다. 이 추억의 노래에 숨어있던 사연들이 이 시장바닥에 많이도 쏟아졌겠다. 만물상처럼 눈에 들어 온 시장풍경은 감흥을 얻기에 충분했다. 비록 천막에 매달려 종일 흔들리는 신세라지만 그 옷이 결코 유행에 뒤지 지는 않았다. 넉장에 만원하는 속옷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빛바랜 씨앗봉지 역시 몇 장터를 돌아 다시 그 자리에 앉았어도 그 씨앗의 인고는 어느 농부의 손길에서 힘찬 빛이 되고 마는 것을 . 그렇게 묵묵히 씨앗봉지처럼 철물도 의류도 풍물도 빛의 나날을 기다리며 떠돈다. 그 속에서 함께 살고 있는 나 역시 이 작은 지구의 거룩한 뜻에 일조를 해보리라 마음을 내어 보는 시간이다. 시장바닥에는 플라스틱 그릇마다 싱싱한 채소와 과일이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흙에서 막 빠져나온 연뿌리는 아예 땅바닥에 몸을 뉘고 있다. 그 앞에 종이상자를 잘라 만든 가격표가 주인 행세를 하며 지키고 있다. 그 빼뚤한 글씨가 나를 불러 세우고 연뿌리는 검은 봉지에 싸여 이내 내 손에 쥐어지고 만다. 한나절이 지나고 애타는 생선장수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만 가는 오후, 그래도 아침에 제주에서 올라왔다는 은갈치의 기세는 아직 팔팔하기만 하다. 난 아직 마수도 못했다며 연신 외쳐대는 할머니의 걸직한 목소리에 수수와 귀리 두 봉지를 사고는 낯익은 떡집 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안으로 가득 퍼지는 기름 냄새는 예전 그 느낌이었다. 뉘 집으로 갈 고사떡인지 떡시루엔 물씬 김이 오르고 내 맘속에선 이미 한 차례 기도가 끝났다. 이처럼 알지 못하는 이의 대소사에 행인의 마음이 보태지듯 재래시장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는 따스한 연대가 굳건히도 쌓여간다. 나는 이 골목 방앗간의 내력을 익히 알고 있다. 몇십년 째 터를 잡고 있는 장대동의 본부였다. 열 동네 소문이 집결하고 기쁨과 슬픔이 그 안에서 더해지고 나눠지는 곳, 소식을 그 곳에 두고만 와도 이미 당사자에 전한 것으로 간주되는 믿을 만한 정거장이다 이 뿐이랴. 이 골목에는 새벽별을 보며 수레를 끌었던 가장의 어깨에 비장한 각오가 있었노라는 이 골목만의 큰 자랑거리가 있다. 시어머님도 이에 못지않은 세월이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 천식을 앓으셨던 아버님을 대신해 삼십년 넘게 이곳에서 장사를 하신 분이다. 채소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버스를 타고 다니시며 몇십년째 그자리, 장대동 김약국집 출입문을 비켜 겨우 손바닥만 한 곳에 자리를 잡으셨다. 어머님이 해가 저물도록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자식을 가진 어미의 간절함 아니고는 쉽지 않을 터, 뭇사람들의 눈초리를 어찌 감당하셨을까 지금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온다. 가져간 채소가 일찍 팔리기라도 한 날엔 남 몰래 콧노래를 불렀을 것만 같은 어머니, 어쩌면 안주머니의 구겨진 지폐를 만지작거리다 일곱남매의 반짝이는 눈망울에 가슴이 뜨거워졌던 어머니, 그리고는 그 오그라진 무릎을 힘껏 펴 과일 가게로 가는 걸음이 빨라졌을 어머니. 해는 아직 창창했다. 늦은 점심을 먹으려 순댓집으로 들어섰다. 순댓국을 시켜놓고 딱히 할 말도 없는 우리는 금세 옆테이블의 대화에 빠지고 말았다. 요즘 티비만 켜면 등장하는 유쾌하지 못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여기 순댓집의 밥상에도 올라온 것이다. 목소리가 꼿꼿한 노신사의 말은 쉴 새 없이 쏟아졌다. 70년대의 역군이었던 그는 벗들의 말이 안중에도 없는 듯 "뭔 소리여! "를 연발한다. 불편한 눈빛들은 금세 식탁위로 모여지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안주거리가 이리도 풍성한 날 소주병 하나 더 보태지는 것쯤이야. 드디어 내게도 순댓국이 나왔다. 입천장이 벗겨지도록 한 그릇을 후딱 비웠나보다. 물론 맛도 좋았지만 뚝배기가 품은 온기를 느끼며 '여기 온 장꾼들은 이 국밥집을 알까? 이 집을 찾은 적이 있겠지?" 생각해 본다. 돌아가는 길엔 이 따끈한 국밥 한 그릇으로 그들의 심신도 따스해지길 바라는 게 내 마음인 것을. 필경 그랬으리라. 아마도 장이 끝나면 지친 발걸음들이 이 문턱을 넘었으리라. 우리의 부모님들이 허기진 속을 달래고 시름을 달래고, 그리고 여기 다시 부모가 된 이들이 힘찬 걸음을 내딛어 또 이 문턱을 넘었으리라. 문득 어머님이 그리워진다. 순댓국 한 그릇을 마다하며 주린 배를 토닥였을 어머님, 그 가슴에 품었던 당신의 소망이 어찌 숭고하지 않으리오. 묵혀 두었던 연민이 짠하게 밀려오는 오늘, 어머님의 모습을 어디에서 찾을까? 저녁해는 까칠하고 아낙네의 졸음은 야속하기 그지없고 옹이 진 손끝에선 늦게 나선 풋동부가 가을볕에 여문다 유성장의 풍경, 아 거룩한 세상이여! |
7. 진천 전통시장 탐방기
아침에 일어나니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려 마음이 심란하다. 어디로든 나가 가을이 어디쯤 오고 있나 확인하고 싶다. 창밖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세며 머릿속으로 갈 곳을 찾는다. 가까운 곳으로, 가급적이면 안 가본 곳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지난여름 소낙비가 장대처럼 쏟아지던 날 진천 전통시장을 가본다고 아내와 함께 나섰었다. 장터는 썰렁했다. 주변 상인들에 물어보니 장날만 장이 선단다. 하는 수 없이 버스정류장 시장을 서성이다 돌아왔던 기억이 스친다. 달력을 보니 15일. 오늘이 마침 진천 장날 아닌가. 그래 진천 전통시장을 가보는 거다. 아내의 의견을 물으니 좋단다. 오랜만에 의기투합 했다.
급할 것도 없고 기다리는 것도 없으니 천천히 가을 들녘을 감상하며 달렸다. 연 노란 벼들이 고개를 숙여 풍요로운 결실을 알리고 있었다. 지난여름 천둥 번개를 이겨낸 연노란 결실이야말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그림이다. 40분을 달려 도착하니 넓은 주차장에 자동차가 빼곡하다. 역시 장날이라 다르구나. 입구에 들어서기 전부터 주변 도로변까지 천막이 빼곡히 처져 있다.
진천 전통시장은 소우주다. 커다란 만물상이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다. 민초들의 삶이 있고, 인생의 희로애락이 있다. 금방 깡충깡충 뛰어 오를 듯이 싱싱한 갈치, 고등어가 지느러미를 곧추세우며 누워있고, 상어만큼 큰 삼치도 벌렁 누워 동그란 눈을 멀뚱멀뚱 우리를 바라보며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갓 뽑아온 열무는 설설 기어 밭으로 갈 태세로 할머니의 손에서 우리를 향해 흔들리고 있었고. 각종 약초 파는 천막에는 이름을 알 수 도 없는 약초들이 즐비 했다. 입담 좋은 아주머니가 야관문(夜關門)을 들고 소리친다.“ 남자에게 끝내 줘!” ”한번 먹어봐, 내일 아침 반찬이 틀려!“ 관절에 좋다는 우슬(牛膝), 암에 특효라는 상황버섯 등 수 도 없이 많다. 나는 야관문에 머물러 있는 눈길을 억지로 떼어 냈다. 아내는 벌써 저만치 앞서 가고 있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바라봐요?” 왠지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응, 그냥” 하고 얼버무렸다. 팔딱거리며 튀어 오르는 새뱅이를 나이 드신 아주머니가 주워 그릇에 담으며 소리친다. “싱싱한 새뱅이 한 사발 사 가유” “ 힘이 엄청 쎄유. 밖으로 튀어나오는 거 봐유”라며 목청을 높인다.
뭐니 뭐니 해도 밖에 나오면 먹 거리가 최고다. 건물 매장에 있는 식당들은 허전한데, 야외 천막속의 순대 집만은 인산인해다. 왠지 소풍 나온 들뜬 기분으로 우리도 한자리 차지했다. 주변을 보니 나이 드신 분들이 많았지만, 한쪽에서는 여자 분들끼리 순대를 맛있게 먹고 있었고, 아기를 안은 젊은 부부랑 초롱초롱한 아기의 눈길도 순대를 향하고 있었다. 나이와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이 토속음식을 좋아하나 보다. 많은 사람들 속에 우리도 한자리 했다는 안도감이었을까? 생각 보다 꽤 맛있는 순대국밥이었다. 참기름이 필요하다하여 할머니들이 모여 농산물을 파는 곳을 향했다. 할머니들은 만둣국을 한손으로 먹으며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많은 인파 속에서 불편하게 쪼그려 앉아 점심을 먹는걸 보며 삶의 애착이 보이는 듯 하여 가슴이 찡 했다. “할머니 이 참기름 진짜 국산인가요?” “그럼 내가 직접 농사 지은건대”하셨다. “진짜일까?” 아내가 귓속말로 물었다. “글쎄 맞겠지” 대답하면서 퇴직하기 전, 육거리 전통시장에 농산물원산지 표시 관계기관 합동단속 갔었던 장면이 떠오른다. 초라한 할머니가 도라지를 팔고 있었다. “할머니 이도라지 국산 맞아요?”물으니 “그럼, 내가 직접 농사 지은건대”하셨다. 전문가의 감정으로 중국산이란다.
“ 할머니 주소와 이름 대세요.” “난 글씨도 모르고 주소도 몰러“ 무조건 모른단다. 방법이 없다. 할머니 행색을 봐서 물건을 압수 할 수도 없다. ”할머니 국산으로 속여 팔면 안돼요“ ”난 아무것도 몰러“ 모른다 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었다. 저 참기름은 진짜 국산일까. 할머니에게 재차 확인해 보지 않았다.
마치 돌아가신 할머니 같이 온화한 모습에 그런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불효인 것 같아 얼른 한 병 사가지고 돌아섰다.
아내가 옛날이 그립다고 핫도그를 한 개 먹고 싶단다. 줄이 길게 늘어선 기다림 끝에 한 개를 입에 물고 기웃거리는 아내의 모습이 천진난만해 보인다.
분위기가 그렇게 보이게 하나 보다. 시내에서 육십 넘은 아녀자가 핫도그를 입에 물고 다니면 보기 좋았을까. 그만큼 전통시장에서는 모든 것이 너그럽다. 모든 사람들이 이웃같이 보여 정겹다. 막걸리 한잔에 목소리 커진 촌부의 모습에서 작은아버지 모습이 보이고,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디 있냐며 조금이라도 깎아 달라 소리치는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의 모습에서, 귀가 어두워 목소리가 커진 어머님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정겨운 이웃사람들에게서 많은 것을 팔아주고 싶은 마음에 내년에나 필요한 호미도 두 자루 샀다. 장사가 잘 안 된다며 푸념하는 할머니에게서 찐빵도 한 봉지 샀다. 오늘 배불러 못 먹으면 내일 먹으면 되지 했다. 뒤돌아 나오는데 분재랑 꽃을 파는 곳에 머물렀다. 노란 국화꽃이 소담하다.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내 누님’ 같은 포근하고 원숙한 모습이다. 세월 따라 가지가 구부러져 비정상이 정상인 분재도 있다. 유난히 가지가 굽은 소나무 분재 사고 싶었다. 가격을 물어보니 이십 만원 이란다.
팔아주고 싶지만 내 주머니 사정으론 어림없다. 눈을 꾹 감고 돌아섰다. 물어만 보고 돌아서는 뒤통수에 허름한 아저씨의 눈길이 와 닿는 듯 따갑다.
아저씨 나중에 돈 많이 벌면 팔아 줄게요. 속으로 외치며 끈끈한 정을 남기고 전통시장을 나섰다.
8.산막이 재래시장 벌써 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먼발치에서 얼핏 보아도 오늘이 괴산 장날이다. 계절 속 깊이 무르익은 가을 5일장은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그래서 전통 재래시장은 구경하는 게 바로 최고의 상품이다. 무질서 한 듯 붐비고 다소의 소란스러움과 불편함이 오히려 재래시장만의 자연스러운 전통적인 멋이며 특유한 맛이다. 5일장은 물건을 사고팔기 이전에 역시 사람구경 사람냄새가 으뜸이다. 그래서 재래시장 사람들 모두는 푸근한 인심과 인정으로 맺어진 훈훈하고 정겨운 한 가족이다. 터널 같이 긴 천막의 시장 통 양옆으로 한여름의 푸르름을 잘 견딘 붉은 과일들이 한자리에서 서로가 고운 가을빛을 자랑한다. 윤기가 흐르는 짙 노란 크고 작은 늙은 호박들을 보니 옛날 어머니가 자주해 주시던 어린 시절에 별미였던 콩을 넣은 호박범벅이 생각난다. 오늘 괴산의 5일장에는 역시 괴산의 특산물인 청결고추가 단연 인기이다. 시기적으로 김장철을 앞둔 터라 외지에서 온 사람들도 많다. 산막이 재래시장 입구에는 전국적인 유명세로 이미 여러 차례 T.V방송에도 나온바 있는 괴산의 대표 맛 집인 가마솥 치킨집에는 오늘도 역시 긴 줄이 그 명성을 말해준다. 올 때마다 긴 줄에 밀려 나는 아직도 먹어보지 못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괴산하면 민물매운탕과 올갱이 해장국이 유명했다. 이제는 중국산 올갱이와 변해가는 세월의 입맛에 밀려 빛바랜 간판과 썰렁한 식당만이 옛 명성이라도 유지해 보려는 듯 힘들어 보인다. 복잡한 시장사람들 틈새로 조그만 손수레를 앉아서 밀고 다니며 생필품잡화를 파는 앉은뱅이 장애인아저씨가 지나가자 모두가 길을 내어준다. 이곳 장터의 오랜 터줏대감인 듯 흥겨운 노랫가락에 맞춰 상인들과 다정하고 친숙하게 눈인사 손인사를 한다. 장애인이면서도 붐비고 복잡한 인파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아저씨의 배려적 노력이 참으로 대단하다. 많은 상인들 틈에 노란 모자를 쓴 키 작은 젊은 여자 상인이 내 눈에 크게 뜨이기에 다가가 먼저 말을 걸었다. 캄보디아에서 시집왔다는 결혼이주여성이 시어머니와 함께 채소 노점상을 한다. 겉으로는 낯설고 어설퍼 보이지만, 장사 속 대화에는 이미 영락없는 우리의 농촌아낙이며 야무진 장사꾼이다. 결혼 7년차라는데 잘 웃고 애교있게 우리말도 상냥하게 잘한다. 목도리까지 하고는 날씨가 춥다며 엄살이다. 이제는 손님 목소리만 들어도 채소를 살지 안 살지를 알 정도라고 하니 장사수완(手腕) 또한 보통이 아닌 듯하다. 그는 5일마다 나오는 장날이 즐거운 소풍 같고 재미있어 기다려진단다. 캄보디아의 재래시장보다도 더 좋단다. 울긋불긋 화려한 단풍색의 반장화 같은 신발이 예쁘고 잘 어울린다고 칭찬을 하니 2년 전에 친정 캄보디아에서 친정엄마가 사준 거라며 자랑이다. 옆에서 말없이 콩을 까고 있던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바라보면서“아이구 어른한테 또 까부네”라고 칭찬같은 핀잔을 주면서도 외국인 며느리가 대견하고 사랑스러운지 나를 쳐다보며 찡그리는 눈웃음을 짓는다. 다문화 고부간이지만, 딸 같고 친구 같이 스스럼없이 즐거워하는 두 사람의 행복한 모습에 보는 내가 더 흐뭇하다. 시어머니는 가느다란 고구마 줄기와 속이 미끄러운 울타리강낭콩을 흘리지도 않고 잘 깐다. 잘 보이시냐고 묻자, 이제는 눈이 아니라 손끝이 알아서 깐단다. 세월 경험으로 쌓은 노련한 솜씨이다. 나는 시어머니가 깐 콩 한바가지를 5천원에 사고는 며느리 칭찬을 하자 옆에 있던 며느리가 내 칭찬에 어깨춤을 추면서 양손으로 엄지 척을 하며 크게 웃는다. 두 손을 머리위로 올리고 엉덩이를 흔들고는 캄보디아의 전통춤 이란다. 이제 그는 누가 뭐라 해도 어엿한 수다쟁이 우리의 시골 아낙이다. 장날의 특식인 포장마차 국밥집에는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이 노인들이다. 노란 양재기로 한잔에 천원하는 막걸리와 순대 국밥 그리고 돼지 뒷 고기와 묵은지 김치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입맛까지 붙잡는다. 시장 끝에는 작은 동물원이다. 강아지, 병아리, 새, 고양이, 토끼들이 좁은 철창과 종이상자 안에서 새 주인을 기다린다. 보는 사람들은 새끼들의 귀여운 모습에 그저 안쓰럽다. 하필이면 바로 앞 포장마차에서 풍기는 부침개와 튀김의 짙은 냄새가 강아지와 고양이 새끼들을 더 힘들게 한다. 주인은 트로트 노래를 들으며 무심(無心)하게 간이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졸고 있다. 생선좌판 노점상 앞을 지날 때는 옛날 초등학교시절 겨울방학 때 충주 공설시장에서 생선가게를 하던 외갓집에 갔던 겨울추억이 생각났다. 꽁꽁 언 시장의 맨땅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거적때기 같은 것을 깔았고 가장자리에는 연탄재를 뿌려 놓았다. 장터 중간 중간에 커다란 노천 연탄불을 피워 여러 상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공동으로 불을 쬐며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장사를 하던 열악하고 춥고 힘들었던 그때의 모습이 생각난다. 그렇게 힘들게 고생을 하시던 외삼촌은 40대 후반 탄금대에서 음주 후 수영을 하다 익사사고로 돌아 가셨다. 시장을 둘러보고 나오는데 길 저편에 아직도 팔리지 않고 시들어가는 채소를 보니 내가 더 걱정이다. 순간 갑자기 짧고 긴 호루라기 소리에 그쪽을 쳐다보려는 순간‘뻥’하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뻥튀기 장수의 튀밥 튀기는 소리이다. 놀래지 말라고 미리 호루라기로 친절히 예고를 하니 애 엄마가 알았다는 듯 얼른 아이 귀를 막아준다. 예전에는 아저씨가 큰 소리로‘뻥이요 뻥’했었다. 오늘 보니 요즘 뻥튀기 기계는 손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고 자동으로 시간에 맞춰 혼자 잘 돌아간다. 큰길 건너편 시내버스 정류장 옆에는 오래된 골동품과 놋그릇, 대나무와 짚 등으로 만든 토속수제품을 판다. 농기계와 연장들도 보이고 화로와 인두, 숯다리미 등 추억의 옛날 물건들을 옛 추억들과 함께 판다. 구경사람도 없고 휴대폰만 열심히 보고 있는 주인아저씨한테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어 멀찌감치서 대충 구경을 한다. 아직도 해가 중천이니 여전히 시장은 많은 사람들로 시끌벅적 북적이고 혼잡하다. 나는 오늘 괴산 산막이 전통 5일장을 둘러보면서 먼 훗날의 또 다른 추억을 위해 시장 속 가을풍경을 화려한 가을색깔로 소중하게 많이 담아간다.<끝> |
9. 난전과 재래시장 그날은 5일마다 돌아오는 장날이어서 어머니는 할머니를 모시고 장 나들이에 가셨다. 집 앞에서 찰칵찰칵 굵고 투박한 가위소리가 들려왔다. 엿장수가 지나가는 소리였다. 엿을 바꿔먹으려고 집 안 구석구석 낡은 냄비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때마침 우물가에 놓여있는 놋쇠대야가 보였다. 엿장수가 떠나기 전에 무거운 대야를 낑낑거리며 가지고 나가 엿판의 엿 전부와 바꿨다. 친구들에게 으스댈 생각에 신이 나, 동네 아이들을 모두 불러들여 엿판을 벌였다. 점심때가 지나 돌아오신 어머니와 할머니는 많은 엿을 보고 놀라셨다. 자초지종을 들은 어머니는 나를 앞장세워 엿장수를 찾아 길을 나섰다. 재래시장 안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흙바닥에 깔린 멍석에는 색색의 옷과 옷감이 있었다. 토끼를 파는 아저씨도 계시고 어리 속에 어미 닭이 품은 노란 병아리를 팔러온 아주머니도 계셨다. 시장은 활기찼다. ‘뻥이요!’ 고함과 동시에 구수한 냄새가 시장 안을 휩쓸고 지나갔다. 면사무소 앞에서 냄비 때우는 사람, 고무신 붙여주는 사람 등 볼거리가 넘쳤다. 엿장수 찾는 것도 잊어버리고 어머니의 손을 놓친 것도 까맣게 잊은 체 재밌는 구경거리에 정신이 팔려있는데, 시장에서 친구 엄마를 만났다. “여기서 혼자 뭐하고 있니? 엄마가 아래 장터에서 너를 찾고 계신다.” 나는 그제야 어머니를 잃어버린 것을 알고 장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아주머니는 나의 손을 잡고 어머니를 찾아 돌아다녔다. 해가 어둑해져서야 간신히 어머니를 찾았다. 어머니는 땀으로 범벅이 되어 동네 마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내 손을 잡은 어머니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집에 돌아와 싸릿가지로 종아리를 맞았지만, 그날의 시장풍경은 여전히 나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편리한 마트를 다니게 되면서부터는 재래시장과는 꽤 멀어졌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다시 재래시장이 좋아졌다. 아침잠이 적어져서 이따금 새벽시장을 나서기도 한다. 때깔 좋은 하우스 채소보다 흙 묻은 노지 채소가 정감있게 느껴져서이리라. 시장 가까이 버스가 하차하는 곳에서 기다리면 각종 채소를 머리에 이고 손에 들고 내리는 촌로들이 하나둘 길옆에 난전을 편다. 아직 새벽바람은 차다. 제일 연장자처럼 보이는 촌로에게서 가져온 푸성귀와 봄나물을 모두 샀다. 고맙다며 내 손을 잡는 촌로의 손이 거북등처럼 갈라져 있다. 이제 집에 돌아가셔서 따뜻한 아랫목에 몸을 녹이실 수 있겠지. 빙긋 웃음이 나온다. 시장 안은 음산하리만큼 한적하다. 생선, 채소, 옷가지에도 호패처럼 가격표가 붙어있다. 흥정 없이 필요한 물건을 돈을 내고 사가라는 뜻으로 보인다. 매일 전쟁터 같던 시장이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스산하니 냉기가 돌았다. 구면인 옷집 사장님이 차 한잔하자며 불러들였다. 역병으로 장사를 접어야 하나 생각이 많단다. 세금도 내야하고 월세도 밀리니 한 달 한 달이 고역이라고 했다. 난전에서 장사하는 촌로들 때문에 장사가 더 어렵다고 볼멘소리다. 옷 장사와는 상관이 없지 않냐고 했더니 아니란다. 채소나 과일을 사러 들렀다가 옷도 사서 가는데, 신선하고 싼 맛에 난전에서 사고 바로 돌아간다고 했다. 공감은 되면서도 어느 편을 들어 이야기할 상황이 아니다. 모두가 어려운 시기를 견디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 안은 흥청거리는 맛이 있어야 하고 갈지자로 걷는 노장도 있어야 제맛이다. ‘뻥이요!’ 하고 뻥튀기 터지는 기계음도 들리고 엿장수의 묵직한 가위소리도 있어야 한다. 몇 년 만에 시장에서 만난 친구와 안부를 물으며 뜨끈한 곰탕 한 그릇에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떡장수, 묵장수, 국수장수, 활기에 넘치고 가지가지 소리에 소란스러운 시장 바닥. 그곳이 바로 우리네 삶 그 자체가 아닐까. 5일장마다 생선 한코를 손에 들고 훠이훠이 내젓는 팔자걸음에 생선 비린내를 묻혀오던 할아버지와 그 명주 두루마기를 혀를 끌끌 차며 손질하시던 나의 할머니 모습이 문득 재래시장에서 갸웃 고개를 내민다. 그 북적이던 시장통을 곧 다시 만나길 바라본다. |
10. 재래시장 벌써 70대 후반! 드디어 인생 제 2막이 열리는가 보다. 직장생활을 끝낸지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그 동안 가장 변한 것 중 하나는 집사람과 같이 재래시장에 들려 장보기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돈 번다는 핑계로 시장에 간다는 것은 집사람 몫이지 내가 거기 낀다는 것은 권위에 대한 도전? 즉 마음으로 용납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그 내막을 들여다 보면 옛날 사고방식에 의한 남자 본위의 우쭐함 즉 무언가 잘못된 것을 알면서 편안하니까 그냥 무심히 지내왔던 것이다. 옛날부터 고정관념으로 시장과 남자는 좀 먼 것 같다. 왠지 거기에 남자가 가면 큰 손해나 날 것 같아 정가표가 붙어 있는 마트· 슈퍼· 편의점을 위주로 이용했지 재래시장을 이용한다는 것은 큰 모험으로 여겼고 지금도 좀 어설픈 생각이 든다. 아마 지금도 재래시장 가서 장보기를 남자가 혼자 한다는 것은 좀 창피하고 무력하고 어설픈 해프닝으로 간주 받을지도 모르겠다. 어찌됐건 지금도 혼자는 못 가겠고 시장 구르마를 끌면서 집사람 졸졸 따르는 것이 주요 임무다. 구르마가 넘치면 얼른 주차장으로 끌고 가서 차에 있는 시장 보나 바구니에 담고 냉큼 돌아 오는 것이 몸에 배게 되었고 가끔은 같이 호떡을 먹으며 고마운 표정을 짓는다. 이것도 자주하다 보니 도가 트는지 상황을 적당히 파악하게 되고 시장 돌아가는 형국을 어느 정도 가늠케 되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나름대로 눈치코치가 신의 경지인 9단으로 올라간다는데 나야 한 5단은 되는 거 같으니 몇 년 열심히 하다 보면 경지에 오르는 날이 있을 것이다. “척! 하면 삼천리라는데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서방님! 어째 하나를 가르쳐 주면 꼭 그거밖에 못하십니까! 좀 생각을 하고 사세요!” 늘 하시는 말씀을 한 귀로 흘리면서 거꾸로 속으로는 “내가 언제 살림을 살아봤나! 하나만 아는 것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고 신랑 귀한 줄 모르고 구박을 하다니!” 하면서 튀고 싶어도 그냥 그렇게 꾹 참으면서 지내고 있다. 혹시 그 동안 내가 너무 서럽게 무얼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는데 또 억울해서 한 말씀 하셨는데 불경스럽게 얼굴을 들다니 안 될 일이다. 지금까지 무사히 넘어 왔음을 상기하면서 얼굴을 돌리고 빙그레 웃는다. “웃지 좀 말아요!” 그러면서 서로 쳐다 보고 웃는다. 이게 시장길이다. 내가 집사람한테 배운 것은 첫째 정가표가 없어도 시장 아줌마가 부르는 값을 절대로 깍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값을 물으면 조금 비싼 느낌이 들더라도 거의 반드시 산다는 것이다. 이게 손해일 것 같지만 이게 단골이 되고 서로 주고받는 상품과 돈의 교환을 넘어서 거기엔 정이 오가고 서로의 믿음을 확인하면서 다음을 기약하고 있다. 참 애매하지만 이 다음이라는 것이 정말로 가격을 깎아준다. “다음에 또 들리세요!”란 말이 “더 많이 깎아 드릴게요!”란 아이스크림처럼 들린다. 둘째는 단골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한국 아줌마들 서로 어느 정도 알면 누구나 친구가 되는 것은 세계 제일일 것이다. 어느 날 늘 있던 시장 아줌마가 안 보이면 다른 곳에 들려 일을 보다가도 다시 돌려 확인하고 그래도 못 미더우면 주위사람들에게 물어서 확인해야 사안이 끝이 나는 아름다움이 있다. 이런 곳에 발을 붙이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의 여유를 분석해보면 정말 고객을 믿고 마음 편히 장사를 하는 것은 우리 대한민국 만이 가지고 있는 유전인자이리라! 셋째 재래시장의 국가대표라 할 수 있는 육거리 시장의 경우 7년전인가 젊은 남자 몇 명이 조그마한 생선가게를 열었다. 젊고 패기 있게 호객행위를 하는 것을 보고 또 믿음이 가는 손님 접대와 매너 등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더니 지금은 가장 큰 생선가게 터주대감으로 자릴 잡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이 청년 실업을 극복할 요소가 아닐까? 우리 재래시장의 전문적인 연구분석을 통한 일자리 창출 자체가 분명 비전 있는 방향임을 감지했다. 직업의 귀천을 넘어 자신들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부가가치 창출에 있어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델이 된다면 한걸음 더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재래시장의 청년진출! 왠지 신선한 느낌이 든다. 특히 젊은 아가씨들의 진출이 정말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한국의 아가씨들이 손에 잡았다 하면 세계제일이기 때문이다. 그냥 여자골프, 양궁 등을 보면서 거룩한 세계제일의 능력을 거듭 확인 사살해 본다. 넷째 현대적인 대형매장을 철저히 Benchmarking 해서 재래시장과 접목시키는 노력을 많이 해야 앞으로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거꾸로 요즘 E-마트, 롯데, 홈-플러스 등을 자주 이용하게 되는데 이들은 재래시장의 장단점을 철저히 연구해서 자신들의 Marketing에 응용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장터가 떠나갈 듯이 왁자지껄한 맛깔스런 분위기를 띄우면서 재래시장의 장점을 많이 응용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젊고 깔끔한 멋도 재래시장의 Trademark로 Mixing 되어야 좀 더 발전이 기약되리라--- 기대가 된다. 물론 일부분이겠지만 이를 연구하는 전문인력을 양성해서 접목시킨다면 앞으로 우리 재래시장의 Know-how가 전 세계로 수출될 것이 기대가 되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집사람과 같이 재래시장을 다니면서 나 자신이 발전하고 있는 상황을 연출해 보았다. 또 한국 사람으로 재래시장과 우리의 아름다운 어울림을 상상해 보면서 서울과 지역사회의 균형발전을 위한 재래시장의 발전을 위한 느낌을 나름대로 풀어 나간 것이다. ‘서울민국’ 또는 ‘사람은 나서 서울로’ 라는 속담이 지역사회의 돈을 몽탕 거두어 서울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공출된 결과물이다. 여기에 미약하지만 우리가 계속해서 청주에 산다는 전제로 앞으로 나아갈 한 방편이 되었으면 좋겠다. End |
11.시장 할머니 나이가 먹어가면서 기가 작아지게 하는 것이 있다. 건강이 좋지 않으면 움직이는 일이 적어지면서 생활 반경이 좁아지고 집안에서만 생활을 하게 되는 것으로 그렇게 되어가는 것 같다. 오늘은 아침에 집을 나서는데 아내가 부탁을 한다. 집에 들어올 때, 육거리 시장을 들려서 이것저것 사가지고 오란다. 아내가 시킨 심부름을 하기 위하여 시장안으로 들어왔다. 오고가는 사람들이 많다. 저마다 시장 가방을 들고 왔다갔다 바쁘다. 괜시리 나도 바뻐지는 기분이다. 모든 사람들이 얼굴에 마스크를 다 쓰고 있어 묘한 생각이 든다. 무언가 작전을 벌리려 나온 사람들 같다. 온통 마스크가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다. 판토마임 극장 무대처럼 말이다. 관객보다 배우가 훨씬 더 많은 극장 같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매일 아침에 먹었던 호두는 어디서 사 느냐고 전화를 하니 호두는 어디쯤이이라며 무릅 관절염이 오고 손가락 마디마다 통증이 있어서 부탁을 한단다. 당연히 그래야지 대답을 하고 집을 나섰다. 평소에는 무엇을 부탁을 하면 ‘아이코 잊어내’ 라고 답으로 마무리를 하곤 했었다. 요즈음 집안에서 살림을 함께하고 있다.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설거지도 한다. 몸이 불편한데 집안일을 함께하지 않는다면 아내의 마음은 더욱 속상하고 서러울 것이다. 때로는 오늘은 내가 할 수 있으니 그냥 나가라고 할 때도 있다. 오전 일을 마치고 육거리 시장을 들렸다. 주차장에서 막 시장 쪽으로 가려는데 입구에서 할머니 한분이 좌판을 벌리고 있었다. 힐끗 보니 땅콩이 보였다. 파시는 것 인가요 물었다. 집에서 깨서 가지고 나온 건데 비가 오기 시작하니 얼른 팔고 가야 한단다. 땅콩은 올해 농사지어 어저께 깨서 한 이틀 말려서 갖이고 나온 것이란다. 얼마큼 남았어요 하고 물으니 두서너 되박 남았다고 한다. 다 주세요 비가 많이 오기 전에 얼른 들어가시라 했다. 아저씨 검은 콩도 있는데 이것은 작년에 수확을 한 것이라고 하면서 흰 자루를 가르킨다. 다 살 수는 없고 한 되박 주세요. 이렇게 흥정을 하고 있으니 시장보러 오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을 하였다. 아내가 시킨 심부름을 하기 위하여 시장안으로 들어왔다. 오고가는 사람들이 많다. 저마다 시장 가방을 들고 왔다갔다 바쁘다. 괜시리 나도 바뻐지는 기분이다. 모든 사람들이 얼굴에 마스크를 다 쓰고 있어 묘한 생각이 든다. 무언가 작전을 벌리려 나온 사람들 같다. 온통 마스크가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매일 아침에 먹었던 호두는 어디서 사 하고 전화를 하니 호두는 어디쯤이고, 사야할 물건마다 평소에 다니던 상점의 위치를 알려주어 손쉽게 사가지고 주차장으로 오는데 그 할머니가 짐을 싸고 있었다. 할머니 다 팔았어요 하고 물으니 아이고 아저씨가 사주어 다른 사람들도 모여 들더니 조금씩 사주어 다팔았다고 하면서 고맙단다. 할머니 연세가 어떻게 되셨어요 하고 물으니 88세란다. 그러세요 저의 어머니도 생전에 계신데 올해 96이고요 아직은 약간의 걷는 것이 불편은 하지만 건강하세요 했다. 할머니는 나더러 효자 갔다고 한다. 괜시리 기분이 좋아져 으쓱 해졌다. 나의 어머니도 젊으셨을 때 농사를 지어 나무새 등 이고 나와 북부시장에서 물건을 팔곤 하셨다. 그 때를 생각하면 시장에서 노인들이 농작물을 팔고 있는 것을 보면 어머니 생각이 나서 꼭 사가지고 오는 습관이 있다. 어느 해 겨울에는 석교동을 지나는데 시장도 아닌 인도에 홍시를 놓고 파는 할머니가 눈에 띄였다. 날씨가 너무 몸은 웅크리고 두 손을 비비고 입가에 대고 호호 한다. 안쓰러웠다. ‘홍시와 노파’ 어는 삼류 소설의 제목 같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차를 세우고 다가가서 얼마에 파세요 물으니 한 박스 가지고 나왔는데 아직 하나도 못 팔았다고 한다. 시장에 가서 파셔야지 여기에 게시면 어떻게 팔아요 했다. 다 자기들 자리가 정해져 있어 못 들어오게 한단다. 아마도 자주 나오시는 분이 아니고 어쩌다 팔 물건이 있을 때만 가끔 나오시는 것 같았다. 어디서 오셨어요 했더니 낭성인데 집 마당에 오래된 감나무가 있어 해마다 감 팔러 나온단다. 그래요, 그 박스 다 내가 사갈 테니 팔고 추우신데 얼른 집에 들어가세요. 하고는 감 박스를 얼른 들어 차에 싫고 돈을 드리며 얼른 집에 가서 몸 좀 녹이세요. 너무 고맙단다. 그 해 겨울에는 유난히도 추웠었다. 서로 간에 물건을 팔고 값을 치른 정상적인 경제활동이지만 사고 판 사이에 감사함을 표시한 것은 왜일까? 특히 기억에 남아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젊은 사람이 그런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면 나는 사지를 않았을 것이다. 관심도 두지 않고 지나쳤을 지도 모른다. 나의 어머니가 시장에서 채소 나무래기를 팔고 계실 때 나와 같은 마음으로 사주었던 사람들이 꽤나 있었을 것이다. 보답의 차원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그냥 먹고 싶어서 그랬을까? 누구나 자식들 뒷바라지 하면서 나이를 먹어가면서 겪는 모습이지만 그 고생을 하면서 지나온 세월이 불쌍하게 느껴지고 노인이라는 단어에 존경의 마음이 앞서는 것 같다. 이제 나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일 나이에 접어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의 늙어가는 모습을 젊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질까? 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아직은 젊다는 생각으로 이런 저런 활동을 하고 살지만 더 나이가 들어 신체 활동에 지장에 온다면 어떻게 지내야 할까 걱정도 된다. 묵은 솔이 광솔 이라는데 나는 어떤 빛을 내면서 지낼까? 조금씩 타 들어가는 광솔의 향기를 뿜으며 살아가고 싶다. |
12. 유거리시장 떨이 아줌마
내가 새댁 이었을때부터 난전을 지키던 사람들이 이젠 나처럼 늙은이가 되어 시장을 지키고 있다. 세월이가고 좋아지면서부터 육거리 시장도 활성화가 되었다 . 시장지붕도 새로하고 쾌적하게 환풍기와 선풍기도 달아놔서 장사하는 사람들 골목에서 비바람을 안맞아도 돼서 좋다 . 아무리 곳곳에 대형마트가 있어도 재래시장 을 다니던 사람들은 육거리 시장을 드나든다 . 청주에서 재래시장하면 육거리 사장을 제일 알아준다. 흠이 있다면 시장입구에 주차공간이 적어 불편한것이다 .나는 원래 육거리시장을 즐겨 찾지만 예전에 애들 아버지는 언제나 주차때문에 투덜 거렸던것이 생각나 그리워진다 . 내가 이곳을 드나든지도 어언 사십년이 되어간다 . 어쩌다 대형마트에 들르면 원 플러스 원과 세일행사에 현혹되어 잔뜩 사놓고는 집에와서 후회를 하지만 재래시장에서는 필요한 만큼 조금만 살수있어 절약이되고 쓸데없는 낭비를 하지않아서 좋고 덤도 듬뿍 주는맛에 정이있어좋다 . 육거리 시장에가면 언제나 들르는 멸치 떨이 아줌마가 있고 그옆에는 오징어 파는 생선 아저씨도 있다 .아저씨 가게는 옆눈질만 하고 지나친다 . 몇년전 겨울이었는데 오징어에서 나온 시커먼 물에 걸레를 빨아서 좌판을 닦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찌나 더럽고 구역질이 났는지 지금도 그생각을 하면 구역질이 막 나려고 한다. 물을 떠다닦지 더럽게시리 나만본게 아니고 여러사람이 봤다 그들도 기억을 하겠지 멸치 떨이 아줌마 곁에는 항시 손님이 많다 . 나처럼 떨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일거다 . 우리나라 사람들은 공짜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래서 양잿물도 큰거 먹는다고 하는 말도 있다. 예전에 우린 아줌마들이었는데 이젠 할머니들이 됐다 .육거리 시장에서 멸치 아줌마 모르면 간첩이라고 한다 아줌마지만 아저씨같다. 커다랗고 우람한 몸집 대충빗은 머리 거무틱틱한 얼굴 걸걸한 목소리 호탕한 웃음소리 그런데 몸이 자유롭지 못해 늘 전동차를 타고 오랜세월 떨이를 외친다 . 떨이는 말그대로 막 떨어서 주니까 아주 큰횡재를한 기분이든다. 처음에는 진짜로 떨이인줄 알았는데 세월이 가다보니 상술 이었다. 떨이는 아줌마 혼자만하는게 아니다 .난전시골할머니들도 떨이라고 팔어달라고 하신다 엄마생각해서 추운데 얼른 팔고 가시라고 알면서도 속아준다 . 강산이 몇번이나 바뀌는 동안 비가오나 눈이오나 삼십년이 넘게 떨이를 외치고 살아온 그아줌마의 강한 생활력에 존경심마저 생긴다 . 처음에는 속아서 샀고 지금은 알고도 산다 떨이라는 말 자체가 좋은거다. 떨이 아줌마도 나도 이젠 나이 먹을만큼 먹었다, 그아줌마도 언제까지 떨이를 외칠지 모르고 나또한 언제까지 아줌마의 멸치를 먹을지 모른다. 오늘도 육거리 시장에와서 멸치 한되박 떨이로 사가지고 다음 행선지로 발걸음을 옮긴다.. 끝 |
13. 재래시장
연로하신 어머니를 모시고 오랫만에 시장 구경도 하고 생필품도 구입 하려고 집을 나섰다. 복대가경시장을 가려면 복대 초등학교를 지나 15분 정도 가면 되는데 어머니를 모시고 천천히 산책하는 기분으로 걸었다.
복대가경시장 북적북적이는 시장을 지나 가려면 늘 바쁘게 걷는 나에게는 불편한 곳이다. 그레도 통근 버스에서 내려 시장 앞을 지나가야 된다. 좌판에 할머니들이 진열한 앞을 지나 가노라면, 할머니 많이 팔으셨나 눈길 한번 주며 오늘은 무엇을 들고 나오셨을까. 어제 팔다 남은 마늘이랑 무우,고추,배추,토란줄거리등이 바닥에 진열 되어 있다. "뭐 필요 한거 있어 예 과일 좀 사러 왔어요". 하며 할머니 옆을 지나쳐 간다. 역시 시장에 와야 사람 살아 가는 맛을 제대로 느낄수 있다. 재래시장 안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코너는 오뎅,떡복이, 튀김류를 파는 곳을 그냥 지나치면 서운한 곳이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 옆에는 떡을 파는 가게가 있다. 중년의 아줌마들이 즐겨 찿는 떡 가게에는 바람떡, 기지떡, 백설기,콩떡, 이름모를 떡이 먹기 좋은 크기로 간편하게 이쁘게 포장되어 시장 사람들에 눈길을 기다리며 진열대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야채가게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려온다. 사장님 이케 시글시들 한 것을 팔면 어떻게 해요. 바꿔 주세요. 팔 때는 괜찮았는데 하며 한판 실랑이가 붙었다. 오징어,동태,새우,고등어등 여러거지 수산물이 진열대 생선에 얼음조각을 뿌리며 싱싱한 생선 지금 막 들어 왔어요 한번 보시고 가세요. 싸게 드릴께요 하며 손님을 끌어 모은다.
서로 조금씩 이해 하고 양보하면 될 텐데 크게 손해 보는 줄 안다. 앞을 내다 보면서 인정이 깃 들게 장사 하시면 좋을텐데 속으로 생각하며 시장을 빠져 나왔다.
추석 명절을 앞두고 서울 사는 막내 여동생이 어머니를 뵈러 찿아왔다. 동생이 온다 하길레 어머니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현관에 벗어놓은 어머니 운동화를 보더니 신발 바꿀때 됬네 이게 뭐여 한다. 한방 먹은 듯 하다. 그레서 재래시장에 길 안내도 하고 짐꾼도 할겸 따라 나섰다. 동생이 어머니 용돈 드릴려고 온누리 상품권을 준비 하여 부러 어머니 운동화를 핑계 삼으 듯 싶다. 마음씨 착한 동생 고마워 하며 조수석에 앉아 복대가경시장 주차장으로 안내를 했다. 친구랑 술 생각 나면 들리는 곱창전골 가게 순대집 여 사장님과 눈 인사를 나누고 신발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 그건 색이 너무 칙칙해 이걸로 하셔요" 환하고 이쁜게 좋으네, 아녀 때 잘 타고 불편해. "어머니 나들이 하실땐 이런걸 신어야지" 어머니를 설득한다. "오빠 옷 가게는 어디 있어". 옆에서 얘기를 들으시고 "아녀 옷은 됬다". "너희들이 선물해 준 옷 많이 있어 돈 좀 있다고 막 쓰면 못 써." 하시며 정육점 안으로 들어가시는 어머니를 쫓아간다. 한눈 팔다 잃어 버리기 쉬운데가 시장 안이다.
무엇을 드릴까요? 하며 정육점 사장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인사를 한다. 미역국에 넣을 소고기 좀 주세요 얼마나 드릴까요? 반근이면 되죠. 예 그렇게 주세요.
명절때 제사 상에 올릴 전을 사오라고 심부름을 한적이 있다. 와이프는 가경복대시장에서 사오라는 것을 그것을 몰 알아 듣고 터미널가경 시장에서 사다 주었더니 심부름도 제대로 못 한다며 핀잔을 받은 적이 있었다. 반찬가게 앞을 지나치면 늘 그 생각이 난다. 등산 산행 준비를 할 때에도 반찬가게에 들려 4~5시간 가방 안에 있어도 상하지 않을 반찬 한두가지 사곤 했었다.
지역경제 살림에 밑거름 전통재래시장에 대하여 생각을 해 보았다. 시장보기 편리한 대형마트가 여기저기 우후죽순 처럼 마구 생기는 바람에 재래시장이 많이 침체 되어 있다. 그리고 시장 상가 번영회에서도 주차장을 마련하고 카트를 준비하여 시장 보는데 불편 한 것을 해소 하려는 노력을 한다. 정부에서도 서민 생활 안전 차원에서 제도적으로 많은 혜택을 부여하고 있어서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14. 재래시장 재래시장에 가면 혼잡한 거리에서 할머니들이 집에서 기른 채소와 밤, 도라지, 무 등 옹기종기 앉아서 노점을 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아직도 21세기 인가? 하는 생각으로 안됐다는 마음이 앞선다. 나이가 먹지 않았을 때엔 내가 늙어도 저렇게는 살지 말아야지 했다가 세월이 가서 내 나이 50이 넘어가니 어르신들이 왜 시장에 나와 계셔야 되는지 어렴풋이 알 수도 있을 것 같다. 세월이 흘러도 먹고 살기위한 어쩔 수 없이 나와 계시는 것이겠지만 이렇게 오고가는 사람들 보는 재미와 푼돈벌이라도 할 수 있다는 일념이 아닌가 생각된다. 터미널시장 반찬가계에 들려 이것저것 오빠에게 가져다 줄 저염식 반찬을 한보따리사서 가지고 나온다. 우리 동네 시장의 반찬가게는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젊은 청년이 장사를 잘한다. 내가 반찬을 다른 걸로 바꿔 달라 했더니 그냥 가져가시고 비용은 담에 주란다. 젊은 청년이 준 덤이가 계속 날 잡아 끓어 당긴다. 그 집에서 반찬을 안사면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고단수라 할까? ‘젊은 청년이 머리도 좋아 계속 날 잡아끄니’ 난 혼잣말을 하였다. 신혼일 때 우리 집이 시장이 옆에 있어 큰아이를 갖고 퇴근 후 복대시장에 들려 과일 한 바구니를 사서 집에 와서 실컷 먹었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딸기가 제철이었던 같다. 4월부터 8월까지 과일이 넘쳐나는 복대시장이다. 가경동H아파트에 살 때에는 정말로 과일먹는 재미에 푹 빠졌던 것 같다. 남편이 늦는 날이 많아 거의 매일혼자식사를 했는데 그때마다 복대시장에 들러 고기와 과일 잔뜩 사서 저녁으로 혼자 고기 구어 먹고 딸기와 과일을 한바구니 먹었다. 그래서 그런가? 과일을 많이 먹고 태어난 큰딸은 피부가 백옥처럼 하얗다. 둘째를 가져서는 직장에 살림에 치여서 재대로 시장에도 못가고 커피만 먹었더니 나처럼 황색피부를 가진 딸이 태어났다. 재래시장이 주는 풍요는 이루 말할 수 없다. 2년 전 어느 날 인가 우리농산물 팔아주기 날이 되어 직원들과 육거리시장에 갔다. 거기서 과장님 동생분을 만났는데 생선을 팔고 계셨다. 직원들과 앞 다투어 생선가게에서 고등어, 코다리, 이면수 등을 샀다. 과장님이 직장에서 목에 힘을 주고 계셨던 분이라 장사를 하는 동생분이 있다고 해서 약간 의야 해 했다. 형이 직원들을 많이 데리고 왔다고 형이 산생선 값을 안 받으려고 하고 형은 열심히 동생주머니에 돈을 챙겨 넣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생선가게를 하는 동생 분은 약간 수줍어 하길래 직원들 모두 많이 파시라고 인사하고 얼른 자리를 피해주었다. 직원들이 그런다. 육거리 시장은 코로나에도 끝 덕 없는 시장이라고 육거리시장 상인들은 모두 경기를 거의 타지 않고 영업도 잘되고 물건회전율이 좋아 청주에 있는 시민들이 가장 많이 가는 시장이라면서 상가1개만 갖고 있어도 일 년이면 몇 십 억대수입을 내는 곳이라 했다. 난 속으로 다행이다. 라고 했다. 육거리시장이 활성화 되야 우리 모두 좋아지니까? 시장을 다 보고나면 직원들과 맨 마지막 가는 곳이 있는데 순대집에서 회식을 하는 거다. 1달에 1번씩 순대집 팔아주기 운동을 이렇게 잘할까? 순대 모듬이 나온다 염통 순대 허파 간 등 난 돼지고기는 싫어하지만 모듬으로 나오니 먹을 만해서 저녁식사 대신 열심히 순대를 먹는다. 사무실에서 일에 치여서 제대로 자신의 속말을 못하는 직원들이 순대 집에서 이러 쿵 저러 쿵 자신의 마음속얘기를 하면서 가슴에 응어리진 사건을 막걸리 한잔에 모두 날려버린다. “맛있게 먹었어! 다음 달에 또 오자구" 우리들은 저마다 풋풋한 마음으로 시장통 순대 집을 뒤로 한 채 귀가를 한다. |
15 전 통 시 장
유년시절 가을이면 노랑색 빨강색 낙엽이 소리없이 사뿐이 내려 앉아 찬바람이 사르르 불면 바스락 소리를 내며 굴러가는 저 낙엽은 누구를 찾아 날아 가는걸까 ?
공중에 떠있는 나뭇가지에서 모진 찬바람을 피해 땅에 내려 앉아 안식처를 찾는걸까 ?
아니면 가냘푼 새싹들의 이불이 되어 주려고 눈처럼 사뿐이 내려 앉아 이불이 되어 주려는 걸까?
궁금함을 뒤로 한채 한없이 높고 푸른 청명한 하늘을 하염없이 처다 보노라면 내 몸과 마음은 두둥실 하얀 구름에 휩싸여 훨훨 나르고 먼 산은 아름다운 원색의 가을 풍경이 나를 흡수한다.
이렇게 춥지 않고 덥지 않고 오곡을 거둬들여 농민들의 가정에 훈풍이 돌때면 어머님 과 오일장을 갔던 생각이 난다
그 시절 보리 고개 라는 춘궁기가 있어 밥 세끼 먹는 것도 사치라고 할 정도로 가난했던 시절이라 부모님을 졸라 오일장을 쫓아가면 하루 종일 시장구경을 해도 엿 한가락에 눈깔사탕 하나면 만족해야했고 거기다 한여름에는 얼음과자 아이스케키 하나 얻어먹으면 횡재로 알았던 시절이다
1950년대 중반쯤으로 생각된다 설이나 추석 명절 이면 설빔 추석빔 이라고 하여 어렵게 옷 한 벌을 얻어 입는다. 지금처럼 아무 때나가서 옷을 살수도 없어 재래시장이 열리는 5일장이라야 살 수 있다.
그날이 얼마나 기다려 지던지 하루 하루를 손꼽아 기다리다 하루전날 밤이면 새옷을 입고 동네방내 다니며 자랑하다 눈을 뜨니 꿈속에서의 환상이었다. 얼마나 황당한지 옆에서 누가 처다 보지나 않나 겸언적어 얼굴이 붉어진다. 얼마나 고대하고 기다렸던 새 옷인가.
지금은 기계 문명의 발달로 옷이나 생필품을 짧은 시간에 만들 수 있겠지만 나의 유년 시절에는 한땀 한땀 손으로 만든 옷이니 그 얼마나 많은 정성을 들였을까?
장날 아침이면 어머님은 곡식을 머리에 이고 장에 가고 싶다고 떼를 쓰는 나의 손을 잡고 울퉁불퉁한 논 밭길을 지나 산마루에 올라서면 옷 속으로 흐르는 땀과 서늘한 바람이 맛닿아 한기를 느끼고 구불구불한 산모퉁이 를 지나 시장 문턱에 다달으면 한숨을 토해낸다.
시장 들어 가기전 길가에서 낮 익은 아줌마가 곡식 자루를 잡고 쉬어 가란다 그 사람들은 자기 가족들에게 일등 곡식을 먹이려고 시장에 들어가기전 구입하려는 일반 가정 집 아주머니로 서로의 안면이 있어 인사와 함께 정담도 나누고 사는 이야기도 하다보면 흥정이 이루어저 시장 상인보다는 조금더 높은 가격을 받을수 있고 나머지는 싸전 마당 공터 아무 곳이나 곡식 자루를 열어놓고 있으면 실소비자들이 질서도 없고 길도 없는 곳을 요리조리 어깨를 부디 치며 장마당을 한 바퀴 돌아보다 자기 눈에 맛는 곡식이 있으면 거래를 하고 그래도 판매를 하지 뫁 하면 마지막으로 가는 곳이 상회라는 전문 장사꾼에게 파는 형식으로 한단게 한단게 지날수록 가격은 내려가니 첫 번째에서 거래가 되는 날은 운이 좋은날이다
50년대 시장의 옷 모습을 보면 지금과 같이 화려한 색상의 모습은 볼 수 없고 염색기술이 발달되지 않은 때라 하얀색과 검은색의 한복이 주류를 이루고 빨강색과 노랑색이 어렵게 눈에 뜨일 정도라고 기억된다
시장 길 양옆에는 가마니 같은 걸로 자리를 깔고 어지럽게 널려저 쌓여있는 생필품들을 파는 장사꾼들은 싸구려를 외치며 손님을 모으고 의류를 파는 길 양편에는 몇벌의 옷을 걸어놓고 엄마 손을 잡고 지나가는 아이들을 세워놓고 고놈 예쁘다며 옷을 대보이고 이옷을 입으면 남자아이 에게는 왕자 같다고 하고 여자아이 에게는 공주 같다느니 너스래를 떠는 장사꾼의 재치 있는 말솜씨가 은근히 가슴을 설래게 하고 수래에 엿판을 올려놓고 엿가락 자르는 가위로 찰칵닥 찰칵닥 하는 소리로 박자를 맞춰 노래와 춤으로 시선을 끌고 울릉도 호박엿, 쫄깃쫄깃 찹살엿, 달랑 달랑 호두엿, 이어 상소리와 음담패설로 흥을 돋우는가 하면 엿장수의 품바 또한 익살스런 모습이 보는 이에게 웃음을 선사 하는 것이 힘들고 찌들은 가난한 생활에 활력소가 되지 않았나 생각되며 하루 밥 세끼 먹기가 그렇게 힘들어도 재주꾼의 해학과 정담은 인간미가 넘처 흘렀고 인정 또한 후하여 내가 한끼 굶어도 더 배고푼자 에게 양보하고 베풀줄 아는 그 시절의 그 장터가 지금도 너무 그립다.
지금의 전통 재래시장을 둘러보면 옜날 정겨웠던 재래시장의 정겨운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잘 정돈된 시장 모습은 언뜻 백화점을 연상하게 하기도 하고 추억을 되살리기에는 역부족 이기에 국어 사전을 찾아 보니 뚜렷하게 틀리다고 설명 한곳은 없고 다음과 같다.
재래시장(在재來래市시場장)
예전부터 있어오던 시장을 백화점 따위의 물건 판매 장소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전통재래시장(傳전統통在재來래市시場장)
예전부터 있어오던 전통적인 판매 방식과 상점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시장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오일장이 정해진 날에 시장이 형성 되는 것을 전통재래시장이라 칭하고 약간의 현대 양식으로 바꾸어 판매가 이루어지는 것이 재래시장이 아닐까하는 하는 개인적인 결론을 내리고 지난날의 추억을 되살릴수 없다는 아쉬움으로 가슴이 서린다
16. 엉뚱한 허풍
추석 명절을 쇠려고 집근처 새벽 재래시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새벽시장이라 대부분 할머니, 할아버지가 장판을 벌이고 있었다. 각자 농촌에서 농사지은 채소나 과일이 인기 상품이다. 새벽시장에 싱싱한 상품이다. 그런데 저쪽 구석에서 별난 할아버지가 밤을 땅바닥에 펼쳐 놓고 됫박에 밤을 담아 놓고 내가 보기에는 야바위 행동을 하고 있었다. “자, 여기들 보세요. 여기 가운데 됫박에 밤은 영의정 밤이고, 오른쪽 밤은 우의정 또 좌측에 있는 밤은 좌의정 밤입니다.” “할아버지 그냥 밤이나 팔 것이지, 어찌 예전 궁궐에 3정승을 들먹거리면서 밤을 팔려고 합니까?” “허, 허, 뭘 모르시네. 공무원 시험이나 높은 벼슬길에 오를 사람들은 내가 시골 영감탱이라고 무시하지 말고 잠깐만 발걸음을 멈추고 내말을 들어보시오. 공직에 나갈 사람은 가운데 됫박에 밤을 사가시면 백발백중 합격할 것이고, 고시 공부를 하시는 학생은 우측에 있는 밤을, 명문 대학을 꿈꾸는 학생은 좌축에 있는 밤을 사가시면 됩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순진한 할머니 손님들이 우르르 모여들어 밤이 그 자리에서 다 팔리고, 밤을 미처 사지 못한 사람들은 내일은 밤을 더 많이 가지고 오라는 부탁까지 한다.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아무리 재래시장이라 웃자고 하는 말이겠지만 정말 허무맹랑한 말이 아니던가? “할아버지, 그런 소리는 어디서 듣고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세요.” “허허, 이 할망구 무식 하기는 예부터 밤송이 속에서 삼정승이 정사를 보았다는 말도 못 들어 본 모양이네.” 아무리 재래시장이라 웃자고 하는 말치고는 그럴싸하지만 내 생각에는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새벽 재래시장에서는 아직도 이렇게 훈훈한 정감이 살아있는 멀쩡한 거짓말들이 있다. 신록이 우거진 싱그러운 숲이 아니더라도, 가을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산등성이가 아니더라도, 이곳 재래시장에도 울긋불긋 정겨운 꽃이 피었다.
저쪽 길 건너 건새우 파는 아저씨는 할머니 손님들 여남은 명을 불러 모아 놓고 익살스러운 입담으로 건 새우를 팔고 있다. ‘싱싱한 새우 사세요. 눈을 감았다 떴다. 허리를 구부렸다 폈다, 눈알은 동굴동굴하고 까만 눈동자는 반짝반짝, 팔딱팔딱 뛰는 새우 사세요.’ 라고 말하는 카세트테이프를 틀어 놓고 손님들을 불러 모은다. 참 익살스럽다. “사장님, 허리를 구부렸다 폈다하는 새우 주세요.” “네, 여기 있습니다.” “어디요? 이거는 허리를 구부리고만 있네요? 폈다, 구부리진 않는데요?” 이때 가게 안에서 여사장님이 나오더니 화를 버럭 내면서 “우리 집 양반이나 손님이나 똑같군요. 어떻게 죽은 새우가 허리를 폈다 구부렸다 합니까?” 재빠른 손놀림으로 비호같이 카세트를 꺼버리고 남편에게 쓸데없이 거짓말 하지 말고 장사를 제대로 하라고 한다. 웃자고 한 농담 한마디 한 게 화근이 되었다.
오늘 아침 새벽 재래시장에서 뿌듯한 행복을 한바구나 가슴 한 가득 담아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나도 한때 부산 국제시장에서 1960대 엉뚱한 허풍과 멀쩡한 거짓말을 밥 먹듯이, 숨 쉬듯이 허풍떨며 옷 장사를 했었다. 사람들이 분홍색 티셔츠가 색깔이 너무 연하다고 하면, 이 스웨타는 원사가 화학사이기 때문에 집에 가서 찬물 세탁을 하면 연분홍색이 진분홍색으로 변한다고 말도 안 되는 허풍을 늘어놓아도, 그 시절 사람들은 거짓말이라거나 사기라고 하지 않았다. 그 정겨운 시절이 그리울 땐, 지금도 새벽 재래시장에 가서 아직 남아있는 훈훈한 정을 가슴 한 가득 담아오곤 한다.
17. 외할머니와 엄마 “할머니~” “응 손녀딸~, 우리 증손자들도 왔네~” 외할머니는 구부정한 허리로 우리를 보시곤 반가움에 함박웃음을 지으신다. 5일장이 서는 날이면 아이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나들이 삼아 시장 구경을 갔다. 시장 한쪽엔 늘 할머니가 계셨고, 작은 체구에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시는지 몇 배나 되는 리어카를 끌고 시장에 나오셔서 장사를 하셨다. 나물이며 야채, 직접 만든 손 두부, 과수원을 하는 큰 외삼촌 댁의 사과가 리어카에 한 가득 실려 있었다. 리어카 옆 할머니의 모습은 작고 초라했지만 목소리는 시장이 쩌렁쩌렁 할 만큼 힘이 있으셨다. 아이들과 이것저것 구경하고 한 바퀴 돌고 오면 할머니는 땀방울이 방울방울 맺혀 있는 얼굴로 우리를 반겨주시며 투박하신 손으로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손 두부 한모를 봉지에 담아 주셨다. 농사지은 콩을 직접 불리고 가마솥에 삶아 두부를 만들어 오신 할머니의 수고로움과 정성이 그대로 느껴졌다. 우리 식탁에 올라오기까지 그 손 많이 가는 일들을 우리 할머니 엄마들은 척척 해내셨다. 요즘 같이 완제품으로 물만 부어 끊이면 먹을 수 있는 편리한 세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사랑과 정성이 담겨있었다. 할머니는 1000원, 2000원에 두부도 팔고 사과도 파셨다. 그렇게 팔아서 얼마나 남을까 싶었지만 알뜰살뜰 모아 저축도 하시고 손자들 용돈도 주시며 자식들에게 의지하지 않으시고 본인의 삶을 강인하게 일구며 사셨다. 외할머니는 한평생을 부지런하게 쉼 없이 일하셨고 허리는 한해가 지나갈수록 더 구부정해 지셨다. 5남매의 맏딸인 우리 엄마는 할머님처럼 안 늙을 거라고, 저렇게 억척 떨며 살지 않을 거라고 나에게 독백처럼 말씀하곤 하셨다. 평생을 자식들 뒷바라지 하시며 가난한 집 생활 일구시느라 고생하시고, 노년의 나이까지 밭일에 장사까지 하시는 할머니의 억척스러움을 엄마는 늘 못마땅해 하셨다. 그 마음 안에는 고생하시는 할머니에 대한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함께 있었으리라.. 가난한 집 5남매의 맏이로 어린 나이에 동생들 돌보며 온갖 집안일을 도맡아 하셨다고 하니 엄마의 고생과 회한이 독백 같은 푸념에서 그대로 느껴졌다. 우리집도 과수원을 했고 엄마 아빠는 농사일로 늘 바쁘셨다. 사과가 나는 수확철이 되면 크기별로 사과를 선별해서 도매로 넘기곤 하셨는데 직거래 장터가 생기면서 부터는 도매로 넘기면 편하지만 남는 게 별로 없다시며 직접 장에 나와 파셨다. 장이 서는 날이면 분주히 사과 상자를 작업해 새벽부터 나오신다. 직거래 장터는 주로 주말에 열렸는데 감자, 고구마, 마늘, 양파, 버섯, 곡류, 여러가지 야채, 제철 과일 등등 주로 밭에서 나는 농작물들이 주를 이룬다. 직접 키워 직거래를 하니 중간 유통이 생략되어 농사 짖는 분들에게 더 이익이 되고 소비자들은 값싸게 살 수 있으니 참 좋은 장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골이 생기고 한번 왔던 분들은 계속 찾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집 사과는 맛있다고 소문이 나서 꽤나 잘 팔렸고 단골 손님도 많았는데 엄마 혼자 너무 바쁘실 때는 가끔 장사를 도와야 했다. 익숙하진 않았지만 사과를 먹기 좋게 썰어 “사과 한번 드셔보세요. 정말 맛있어요~” 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시식용으로 건네면 열에 여덟은 사과를 한 봉지라도 사갔다. 엄마는 늘 덤을 챙겨 주셨고 단골손님에겐 더 많이 주셨다. 인심이 후하니 사는 분도 파는 사람도 기분이 좋다. 엄마는 딸이 와서 장사를 도우면 훨씬 잘된다며 좋아하셨다. 엄마는 사과 외에도 제철 야채나 나물을 다듬어 시장에 나오셨다. 나물이 용돈 벌이가 쏠쏠하시다며 집에 계신 날에도 나물을 캐고 다듬고 데쳐서 준비를 하신다. 70 중반의 나이, 여기저기 아픈 곳도 많고 귀찮기도 하시련만 이제 여가를 즐기시며 좀 여유 있게 살만 하신데도 손에서 일을 놓지 못하신다. 자신들 쓰실 용돈이라도 벌어 쓰시려는 것 같아 마음 한편이 무겁기도 하지만, 그렇게 소일거리라고 있으시니 건강을 유지하시는 거라고 마음의 위안을 삼아본다. 엄마도 이제는 외할머니의 나이가 되셨고 외할머니처럼 허리가 구부정하시다. 그렇게 닮고 싶지 않았는데 엄마도 외할머니의 억척스러움과 모습이 그대로 닮아있다. 엄마가 좋아하시는 시원한 맥주를 챙겨 시장을 가면 엄마는 “우리 딸 왔어~?”하시며 세상 행복하신 표정으로 나를 반기신다. “오늘은 많이 팔았어~?” 엄마는 요즘 시장에 사람이 많이 없다시며 맥주를 종이컵에 따라 시장 아줌마들을 불러 모으신다. “어휴 형님은 딸이 이렇게 자주 와서 도와주니 얼마나 좋아~” 하시며 덕담을 하시고, 지나가던 손님도 덤을 많이 챙겨주는 딸이 왔다고 반가워하신다. 엄마는 딸 없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다고 한마디 거드시며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신다. 시장은 먹거리가 풍성해 모든게 자급자족이다. 고구마 파는 아줌마는 고구마를 구워 오시고 버섯 파는 아줌마는 버섯 찌게를 뚝딱 끊여 오신다. 야채 파는 아줌마는 풋고추며 상추, 오이를 가져오시고 이렇게 모아지면 아주 풍성한 점심 식탁이 된다. 고추장에 풋고추를 푹 찍어 아줌마들과 같이 점심 한 끼를 맛있게 먹고 나면 버섯이며 야채를 또 잔뜩 챙겨주신다. 콩 한쪽도 나눠 먹고 모두 형님 동생이 되는 이곳, 그분들의 삶의 터전이였고 희노애락을 함께한 시장, 그곳은 외할머니와 엄마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게 닮고 싶지 않았지만 외할머니의 삶을 그대로 살고 계시는 우리 엄마, 언제쯤 그분들의 삶을 이해할수록 있을까? 결혼해서 두 아들들을 키우고 이제 50대의 엄마 나이가 되었는데도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 이제는 돌아가시고 안 계신 외할머니의 구수한 손 두부를 생각하며 오늘도 난 시장으로 향한다. 주문만 하면 문 앞에 배송되고 반듯하게 진열된 크고 편리한 마트가 있지만, 시장은 여전히 나에게 푸근하고 정이 오가는 고향 같은 곳이다. 함박웃음 지으시며 반겨주시는 우리들의 엄마 우리들의 할머니가 그곳에 계시기 때문이다. |
18. 전통재리시장의 하루 물억새 하얀 꽃이 이슬을 머금고 소리 없이 조용하다. 여울물 소리 내는 징검다리를 하나 둘 건너간다. 기온이 낮은 날씨 탓일까 희미하게 물안개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난다. 옛날의 징검다리 같지는 않았지만 추억의 낭만이 보였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뒤뚱대는 돌멩이 위에서 곡예를 하듯이 빠지지 않으려고 했던 생각이 나서 피식 웃음이 났다. 징검다리를 건너 이슬을 밟으며 언덕을 오르니 지붕위에 허옇게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육거리시장이다. 길 건너에서 봐도 왁자지껄 삶의 냄새가 풍기고 물건을 사지 않고 구경만 하여도 힘이 저절로 나는 광경이다. 물건을 사려는 사람과 팔려는 사람들의 아우성 같은 소리가 자동차의 엔진 소리를 넘어 들린다. 시장 안은 아직도 잠을 자듯 조용한데 시장 밖 거리는 질서가 있는 아수라장이다. 어떤 사람은 가족을 위하여 물건을 조금이라도 비싸게 팔아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가족을 위하여 물건을 조금이라도 싸게 덤을 많이 받고 사야 하는 삶의 쌍곡선이 있는 장거리는 동이 틀 무렵이면 조용해진다. 시장 안에서 제일 먼저 문을 연 가게에는 하얀 수증기 속에 눈물을 쏟아내는 커다란 솥이 있다. 솥 안에는 몽글몽글 어머니 젖가슴처럼 뽀얀 찐빵이 익어가고, 방금 솥을 나온 주름진 김치만두가 불그레하게 웃고 있다. 먹음직스럽다. 한바탕 전쟁이 끝나고 몇몇 상인들은 따끈한 찐빵 하나로 허기를 달래며 총총 사라진다. 쓰나미가 몰려왔다가 빠져나간 것처럼 모두 돌아가고 나니 여기저기 쓰레기 더미를 피하여 할머니들이 이고지고 나온 야채들로 옹기종기 새롭게 시장의 거리가 채워진다. 가지고 온 야채들이라고 해야 손수 농사지은 노각 몇 개와 텃밭에서 방금 따온 반짝반짝 빛나는 보라 빛 가지, 솜털 보송한 깨끗한 박도 있고 애써 키운 가을 상추도 몇 줌 있다.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모두 같다. 야채의 종류만 한두 가지 다를 뿐이다. 조금 전 시장에서 산 물건을 자루째 펼쳐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할머니도 있다. 지금부터 인간적인 시장의 하루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첫 거래가 시작되고 덤으로 콩나물 한 줄기라도 더 가져가려는 할머니와 더 주지 않으려고 하는 할머니가 팽팽하다. 결국 한줌을 덤으로 더 주고 돈을 받아 '퉤퉤' 침을 뱉어 주머니에 넣으며 싱글벙글이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모두 할머니들뿐이다. 청춘의 활기는 보이지 않았지만 시끌벅적 아침 시장은 20대 청년들의 끓는 피 같은 활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해가 높아질수록 시장 안은 조금씩 조금씩 조용해져 갔다.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닌데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오묘한 적막감 속에서 점심 장이 시작되나 보다. 점심의 시장 거리는 아침의 느낌과는 많이 다르다. 잘 정리된 가게 안에 가지런히 진열된 물건들이 손님을 기다리는 조용한 분위기로 40대의 중후한 멋과 안정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옛날처럼 "골라 팔라 싸다 싸" 목청 높여 손님을 부르는 호객행위 같은 것은 볼 수가 없었다. 점점 대형 마켓 같은 분위기를 따라가고 있는 것 같아 사람 사는 시장의 맛이 덜하다. 그래도 먹자골목은 왁자지껄 한 끼 끼니를 때우려는 사람들로 인간미 풍기는 시장 분위기가 되었다. 순대 한 꼭지에 막걸리 한 사발과 해물파전 한 쪽에 정이 듬뿍 담긴 자리였다. 마지막 남은 한 쪽을 서로 먹으라고 하고 그것을 본 전집 아주머니는 손해를 봐도 한 쪽을 더 주고 만다. 이게 재래시장의 맛이지 하는 생각을 해 보며 마트의 시식행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차츰 손님이 많아지는 느낌이더니 저녁 시장이 열렸다. 저녁에는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는 시각이라 손님들보다는 상인들이 더 조급한 모습이다. 준비한 물건들을 조금이라도 더 손해 보지 않고 팔아야하기 때문인가 보다. 저녁 시장의 꽃은 반찬가게가 아닐까. 아침 시장의 시끄러움과는 또 다른 분위기로 북적인다. 의외로 젊은 커플들이 눈에 띠였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이미 세일이 시작되어 시장의 사람 사는 정을 듬뿍 느끼게 한다. 인생의 노년기처럼 모두에게 나누어주는 풍요의 시간을 저녁 시장에서 느끼는 순간이다. 야채가게도 생선가게도 묵히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팔려는 생각인가 보다. 재래시장의 덤 문화가 마치 풍요로운 인생의 황혼기 같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오라고 하는 이도 없고 갈 곳도 없는 황혼기 같은 저녁이지만 모두의 마음이 바쁜 모습들이다. 천천히 미로 같은 시장의 골목을 빠져나오니 아침의 아우성이 들리던 그 자리였다. 땅거미가 내린다. 옛날의 정 많았던 시장은 손님도 줄고 정도 줄어 많이 달랐지만 진짜 사람 사는 진한 풍미를 느낄 수 있는 곳이 재래시장이 아니던가. 점점 어둠이 짙어진다. 내일의 진한 삶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깊은 침묵으로 빠져 들어간다. 서로가 서로에게 나누어 줄 정을 쌓는 순간인가 보다. |
19. 재래시장을 추억하며
재래시장이란 오랜 시간동안에 걸쳐 각 지역별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어온 시장이다. 대형백화점이나 마트가 생기기전 골목이나 주택이 들어선 주변에 5일장이나 구멍가게, 번개시장 등이 주로 형성되어 있다. 현재는 재래시장이나 5일장이 점점 없어지고 예전같이 활성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각 지방 지자체에서도 재래시장을 활성화시키기에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나에게 재래시장을 추억해본다면 대구 칠성시장이 생각난다. 그곳은 전형적인 재래시장이었다. 상인들은 길목마다 고래 고기를 펴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불러 세웠다. 보는 것만으로도 혐오감이 들어 그 길을 지날 때는 고개를 돌리기 일쑤였다. 껍데기가 거무스레하고 기름이 흐르는 것이 입맛이 당기는 음식은 아니었다. 나는 주로 먹자골목으로 다녔다. 시장 길이가 무척 길었는데 식혜, 잡채, 전류 등 셀 수도 없을 정도로 가지 수도 많고 맛있는 것도 많았다. 작은 아이 임신했을 때의 일이 생각난다. 입덧이 심했던 나는 오직 잡채에만 눈이 갔다. 천원이면 잡채 한 접시를 살 수 있었지만 천원이 아까워 발길을 돌려야만 했던 시절이 생각난다. 결국엔 다시 남편과 동행하여 잡채를 먹고 갔었다. 아이 손을 잡고 골목을 들어갈 때면 마수 좀 해달라는 상인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가 싫지는 않았다. 상인들 입장에서는 하루의 판세가 중요한 지라 마수의 의미에 상인도 나도 공감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대구에서는 아이를 임신한 여자가 첫 물건을 팔아주면 장사가 종일 잘 된다며 귀찮을 정도로 불러 세운다. 인기가 연예인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새댁이요 마수 좀 해주고 가이소” 하며 말이다.
집에서 2,30분 거리정도 되는 대구역 근처에는 새벽 번개시장도 있었다. 새벽에 잠깐 장이 서는 곳이다. 이웃 아줌마들과 필요한 것을 사기 위해 서로 팀을 정하고 빨간 고무대야를 가지고 간다. 지금처럼 차가 흔하지 않은 시절이라 대구 근교에서는 농사짓는 사람들이 기차나 버스를 타고 물건을 가져왔다. 여름엔 수박, 토마토가 주를 이루었고 가을이면 대구의 유명한 국광사과가 그 시장의 토박이 노릇을 했다. 물건을 살 때는 흥정도 해야 하고 값도 깎는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난 값을 잘 깍지를 못한다. 덤을 더 달라는 실랑이도 못한다. 그 쪽으로 능숙한 사람은 따로 정해져 있나보다. 그래서 우리일행은 입담도 좋고 비위도 좋아서 물건 값을 잘 깎는 사람을 꼭 데리고 갔었다.
시장에 나와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사연 없는 사람들이 없다. 얘기를 들어보면 구구절절 가지가지 사연도 다양하게 많다. 나도 첫아이 하나 있을 때 잠시 난전에서 장사를 한 적이 있었다. 남편이 일하다 다쳐서 집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돈 들어올 데가 없으니 답답해서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하소연을 했었다. 주인아주머니의 권유로 사과도 떼어다가 팔아보고 김도 떼어다 팔아보았다. 사과는 겨울이 막 지난 초봄이라 얼어서 판 사과도 도로 물리러 와서 장사를 망치고 돈만 까먹었고, 김은 팔리지 않아 들고 다니다 눅어 사는 사람이 없어서 다 버렸다. 장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그때 알았고 그 이후로 장사는 하지 않았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옛말 그대로 좋은 인생 공부를 그때 했다. 수업료가 비싸지 않아 그나마 천만 다행이었다. 나는 지금도 시장을 가면 그때의 일이 생각나 함부로 가격을 깎아달라거나 더 달라고 떼쓰지 않는다.
정월 대보름을 앞두고 있었던 일이다. 시골에서 먹던 나물이 먹고 싶어 취나물을 사왔는데 집에 와서 삶아보니 잎이 붙은 고구마줄기로 말린 것이었다. 속은 것이다. 참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렇게 속이고 속고 덤도 주고 물건 값도 깎아주는 재미가 있는 그런 시장이야말로 재래시장이 아닐까 싶다.
또 명절이 돌아오거나 장날이 되면 사람들이 많아 걸어 다니기도 힘들 지경이었던 그 시절엔 웃지 못 할 일들이 많았다. 아이를 안고 걸어가던 중 소매치기를 당했던 일이 생각난다. 어깨에 멘 가방이 집에 와서 보면 찢어져 있을 때도 있었다. 명절을 앞두고 동서와 시장을 갔을 때였다. 조카를 내가 안고 동서가 물건을 들고 가던 중에 발생한 일이었다. 옆구리에 이상한 감촉을 느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낯선 남자와 나는 눈이 마주친 것이다. 나도 놀라 소리를 지르고 내 눈과 마주친 그 남자도 놀라서 도망을 갔다. 지금 와 생각해보니 모두가 없었던 시절이 빚어낸 씁쓸한 기억이다.
회충약을 파는 약 장수도 시장 한 자리를 차지하고 호객을 하며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기막힌 말솜씨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회유를 한다. 유리병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큰 회충도 들어있었다. 젊을 때라서 그런지 보는 눈이 민망하고 무섭기까지 했다.
예전의 재래시장은 정이 많았었다. 값을 깍지 않으면 덤도 더 주고 구지 빼앗듯 물건을 집어오지 않아도 되었다. 뭐라도 하나 더 주면 좋고, 안줘도 좋았다. 사람냄새가 났고 생기도 있었다. 시장을 다녀오면 돈은 많이 쓰지 않았어도 마음은 채워져 돌아오는 그런 시장이었다.
요즘 나이가 들어가며 가끔 깜박할 때가 있다. 물건 값을 주고 거스름돈을 건네받지 않고 돌아서면 불러서 주기도 한다. 한번은 물건을 사놓고 다른 거 사다가 잊고 집에 온 적도 있었다. 집에 와서 짐정리를 하다 보니 빠뜨린 물건이 생각이 났다. 다시 가서 사정을 이야기 했더니 한쪽에 놔두고 오기를 기다렸다고 하며 물건을 내어주었다. 그런 일 없다고 하면 어쩌나 하고 갔는데 너무 고마웠다.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구나 생각하니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20. 재 래 시 장 1964년 봄 대학 초년생이 되었다. 부모님께서 그동안 간판도 없이 장사를 하셨는데 작은 점포지만 항상 오늘의 뜻으로 금일상회(今日商會) 라는 간판을 손수 만들어 걸었다, 점포앞을 남북으로 지나는 36번 국도는 자갈과 모래로 다져진 비포장이었다. 이따금 지나는 군용트럭이 일으키는 흙먼지는 얼굴에 쌓여 손바닥으로 문지르면 버적소리가 들린다. 소가 끄는 달구지는 주인에 이끌리어 덜커덩 소리 내며 지나간다. 자전거 탈 때도 주먹 만한 돌에 걸려 중심을 잃고 뒤뚱거리기가 일상이다. 평일에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지 않아 한가롭다. 내수 장날은 오일장이다. 장이 열리는 날에는 골목골목 난전(亂廛)이 펼쳐지고 물건 팔고 사는 흥정이 요즈음 선거 토론장 모습처럼 몹시도 북적였다. 사려는 물건을 터무니없는 비싼 값을 요구하는 장사꾼이 있는가 하면, 값을 턱 없이 깍는 소비자가 있으니 바가지 씌우는 상인이 있는 것이다, 닭이 먼저인지 알이 먼저인지 모른다, 이런 상거래가 늘상 이루어져 쌍방이 불편할 수 밖에 없다 당시 마진률이 40%ㅡ50% 인 것을 20%이하로 정하고 내나름 대로 정찰제 시행을 했다, 막무가내로 깍는 손님을 그냥 보내면 배가 부른가 비아냥 해도 못 들은 걸로 했다 몇 개월 지나고 나서는 많은 손님들이 이해를 하고, 매상고를 올려주어 나만의 정찰제를 성공 시켰다. 육십년대 농촌은 새참 나갈 때 바가지를 밥그릇으로 쓰고, 젓가락은 나뭇가지를 꺽어 사용하던 시절이였다, 장날 돈이 될 만한 것으로 갖고 오는 물건은 삭다리 나무 한짐, 산나물, 짚으로싼 계란 한두줄, 장닭 한 마리, 형편이 좀 나은 사람은 쌀 한말이나 콩이나 팥 두어되였다. 우(牛)시장 한편에는 이제 막 젖을 뗀 송아지들이 어미 소를 찿느라 목이 쉬도록 울어대고 있다. 똥과 오줌이 범벅된 우시장은 큰돈이 오고 가는데 가슴에 매단 전대를 조심하느라 막걸리 한잔 하고 싶어도 꾹 참는 것이 보통인데 하루는 아내가 난리법석을 한다. 가게에서 두툼한 돈뭉치를 발견한 것이다. 소 판돈은 그냥 놓고 차례 지낼 물건만 챙겨 집에가는 할머니를 찿아 전해 주었다. 할머니는 정말 고맙다며 두손을 꼬옥 잡으며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그후로는 장날만 되면 손수 지은 농산물을 답레로 가져오시곤 했다. 60년대는 물물교환을 겨우 면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더러는 필요에 의해 물건을 교환하고 있었다. 그렇치 않으면 외상거래를 많이 했다. 가을걷이를 해야만 돈이 생기는 농촌의 현실은 어쩔 수가 없다. 봄부터 초가을까지 외상거래이다. 공책에는 외상값이 빽빽하게 적혀있다. 외상이 늘어날수록 밑전이 모자라 전전긍긍해야 했다. 아내는 이집 저집으로돈을 빌리러 다녔다. 당시 금융조합은 있었으나 그림의 떡이었다. 장리쌀 얻어 고리를 주고야 돈을 빌리는 시절이었다. 달덩이 같이 환한 얼굴에 서글 서글한 모습의 아내는 신용을 철저하게 지켜 돈을 빌리는데 무리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고맙고 미안했다. 그리고 은행이 가까워야 함을 절실히 느꼈다. 언덕이 없으면 언덕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은행에 1년적금 계약으로 언덕을 만들었다. 설 대목까지는 외상값을 갚아야 새해에 재수가 있고 마음도 맑아진다는 시골 인심이었다. 수금이 않된 외상값이 아직도 기억되는 것이 있다. 눈깔사탕 하나에 일원이었다. 귀여운 자식사랑에 외상을 하는 것은 좋은데 만날 때마다 외상값 얘기를 해도 주질 않는다. 그 아들이 이제 이순이 되었다. 초복이 얼마남지 않은 장날이었다. 한참 바쁜 중에 중년 남자가 장닭 한마리를 들고 와서 맏기고는 장닭을 찿으러올 때 계산하겠다고 물건을 싸달라고 한다. 그런데 저녘때가 되어도 찿으러 오지않는데 아침부터 점포밖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던 할머니가 울상이 되어 들어온다. 장닭을 가리키며 하는 말이“ 팔아서 줄테니 기다리라”고 하고는 오질 않는다는 것이다. 어이가없고 기가막힌다. 하는 수없이 할머니에게 장닭을 돌려주고는 씁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선술집에서 왕소금을 안주로 막걸리를 한잔하며 마음을 달랬다. 북적이는 5일 장날이 되면 사기꾼, 소매치기, 건달, 술주정뱅이들이 있게 마련인데 그와중에도 아끼고 아낀 쌈지돈으로 꽁치 몇 마리 사들고 집으로 향하는 정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자주본다. 장터 난전에서는 아버지는 탁배기 한잔을 아들은 돼지국밥을 앞에 놓고 정담을 나누며 인자하게 웃는 주름진 얼굴을 보니 내마음도 저절로 웃음 지어진다.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상가 중심에 새도읍 가꾸기 사업을 성공리에 마친 후에 승강장 장소를 물색 중인데 청소 문제, 사람들이 모여들면 시끄러워진다는 명목으로 서로 미루고 있다. 나는 그럼 우리 가게 앞에 세워 달라며 솔선수범하였다. 몇 달이 지나고 나니 사람이 많이 찿아들어 오히려 장사가 잘되었다. 초정약수와 미원 사이에는 새티 재와 이티 재가 있다. 늦게까지 장사를 하다 보니 살인 사건이 있던 새티 재를 밤중에 넘어가기 무서워 가끔 우리 집에서 잠을 자곤 했다. 친숙해지다 보니 누가 주인이고 객인지 모를 정도로 가까워졌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주인은 나 자신이다’ 라는 생각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신나는일, 즐거운일, 어려운일들을 겪으며 지나온 산수(傘壽)의 세월, 어느새 미수 (米壽)를 바라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