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국으로 이행한 로마
역사가 리비우스는 공화정 시대의 로마를 보고 ‘로마사’ 제2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앞으로는 자유를 얻은 로마인이 평화시와 전시에 어떻게 살았는가를 이야기 하게 될 것이다.
로마는 해마다 선거를 통해 뽑히는 자들에 의해 다스려지고, 개인보다 법이 지배하는 국가가 되었다”
사적인 추문을 교모히 이용하여 왕정 타도까지 끌고간 공로자는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였다.
그는 그후 500년 동안 이어지는 로마공화국의 창시자가 되었다.
왕을 추방한 직후에 브루투스는 포로 로마노에 시민들을 모아놓고,
앞으로 로마는 어떤 인물도 왕위에 오르느 것을 허용하지 않겠으며,
어떤 인물도 로마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게 했다.
해마다 민회에서 왕을 대신할 국가의 최고 지도자인 집정관 2명을 선출하는 제도를 창설했다.
초대 집정관으로는 브루투스와 자결한 루크레티아 남편인 콜라티누스가 선출되었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역사에 이따금 등장하는,
선견지명과 실행력을 겸비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원래 이 브루투스라는 성은 조상한테서 물려받은 성이 아니라 바보를 뜻하는 말에서 생겨난 별명이다.
그는 바보로 멸시당하면서 제멋대로 전횡을 휘두른 타르퀴니우스 시대를 참고 견디며 은인자중해 왔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초상집 개 행세를 하며 돌아다닌 고종 아버지 대원이 대감 생각이 난다).
그 별명이 결국 성이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추방된 타르퀴니우스 왕의 누이니까,
왕과 브루투스는 외숙부와 생질의 사이다.
바보 취급은 받아도 왕의 조카인 이상 그는 권력 주변에 있게 마련이고 모든 것을 냉철하게 관찰할 기회가 많았을 게 분명하다.
또한 정보도 풍부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왕이 해온 일을 두 명의 집정관이 맡게 된 것은 개인의 전횡을 막기 위한 제도였지만, 재선이 허용된다 해도 집정관의 임기는 불과 1년밖에 안된다.
이런 제도가 유효하게 기능을 발휘하려면, 권위와 함께 권력도 갖는 안정된 기관이 필요하다.
그는 왕정때부터 존재한 원로원을 강화했다.
왕정 출발시 100명의 원로원이 중간에 200명으로 늘어났는데 다시 300명으로 늘였다.
당연히 새로 임명된 의원에는 신흥세력에 속하는 유력한 가부장이 많았다.
로마 시민권을 가지면 누구나 참여 할 수 있는 민회가 있어서 원래 로마를 지탱하는 세 개의 삼각구조 권력( 원로원, 집정관, 민회) 그대로 존속하게 되었다.
공화정 로마에서는 원로원에서 연설할 때,
“ 원로원 의원 여러분” 하고 부르는 대신,
“ 파트레스, 콘스크리프티”라는 호칭으로 연설을 시작하는것이 관례가 되었다.
직역하면,
‘아버지들이여, 신참자들이여‘가 되는데,
이 호칭이 관용구가 된 것은 공화정이 시작된 기원전 509년 부터다.
브루투스의 개혁으로 많은 신참자가 원로원에 자리를 얻었기 때문이다.
교모한 방식이었다.
‘파트레스’라고 하여 일단 구세력을 띄워서 먼저 대우한다( 나이 들면 공경 안해도 공경 하는척만 해주면 오케이 아니든가).
그런다음 신흥세력인 ‘신참자들이여’라는 호칭을 계속하는 한 신참자가 새로 들어올 가능성은 영원히 존재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로마 원로원은 사실 원로원이라는 우리말 번역에서 연상하기 쉬운 완고한 노인들의 집단은 결코 아니었다.
모든 의원들이 ‘파트레스, 콘스크리프티“라는 호칭으로 연설을 시작하는것이 관례로 되고,
그러는 동안 원로원의 문호를 신참자에게 개방하는 데 대한 저항감도 누구러진게 아닐까.
물론 이것은 사료의 뒷받침이 없는 단순한 상상에 불과하지만 말의 힘은 얕볼 것은 아니다.
그렇긴 하지만 250년 동안 익숙해진 왕정에서 공화정으로의 전환은 대 변혁이었고 변혁기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잇따라 일어난다.
변혁이 또 다른 변혁을 부르기 때문이다.
로마의 유력가문에 속하는 젊은이들 사이에 불만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어른들은 좋다.
새로운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도 되고 집정관이 되는 가능성도 열렸지만 원로원 의원은 종신이다.
그래서 집안의 가부장이 되어 원로원에 들어갈려면 기존의 가부장이 죽을 때 까지 기다려야 한다.
왕정시대에는 왕의 기분에 따라 언제든지 젊은이들이 발탁 될 기회가 있었지만 공화정시대에 들어 와서는 자기들이 활약할 기회가 그만큼 줄어 들었다.
그게 불만이었다.
급기야는 젊은이들 몇 명이 어느 집에 모여서 모의를 했는데,
쫒겨난 왕 타르퀴니우스를 도로 불러들이기로 결의했다.
왕정 복고였다.
각자가 피로 서약서까지 만들었다.
그런데 이 집의 하인이 엿듣고는 집정관에게 밀고해 버렸다.
음모에 가담한 자들은 당장 체포되고, 증거물인 서약서도 압수되었다.
이들을 심문한 집정관 2명에게는 엄청난 타격이 된 것이다.
그들이 모인집은 집정관 클라티누스의 친척집이었고 왕정복고를 모의한 젊은이들 중에는 또 한명의 집정관 브루투스의 두 아들도 포함돼 있었다.
당장 소집된 민회에서 젊은이들이 서명한 서약서가 낭독되었다. 모두 국가 반역죄로 고발된 것에 대한 의의를 제기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민중들 중에는 브루투스의 속마음을 읽었는지,추방형에 처할 것을 제안했다.
또 한 명의 집정관 콜라티누스의 빰에 흐르는 눈물을 보고 사람들은 사형이 아니라 추방형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집정관의 결정이라 해도 두 집정관 중에 한 명이 반대하면 효력을 갖지 못하는 것으로 규졍돼 있기 때문이다.
이때 브루투스는 집정관으로서가 아니라 (당시 로마의 관습으로) 자식에 대한 생살여탈권까지 인정받고 있는 로마 가문의 가부장으로서 행동했다.
그는 피고석에 서 있는 두 아들에게 말했다.
“ 티투스! 티베리우스! 네놈들은 왜 너희들에 대한 고발에 대해 자신을 지키려 하지 않느냐?‘
두 젊은이는 묵묵부답이었다.
애비의 질문이 세 번이나 되풀이 되었지만 대답이 없었다.(인생은 어떻게 보면 끝없는 자기선택의 연속이 아니든가)
브루투스는 경비병에게 말했다.
” 앞으로의 일은 그대들 몴이다.“
형 집행은 그 자리에서 당장 이루어졌다.
우선 주모자라는 이유로 브루투스의 두 아들이 옷을 벗기우고 두 손을 결박당했다.
채찍질이 시작되었다.
그 자리에 있었든 사람들 가운데 이 잔혹한 광경을 똑바로 바라 볼 수 있었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애비인 브루투스만이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쓰러질 때 까지 채찍질을 당한 두 젊은이는 한 사람씩 끌려가서 도끼로 목이 잘렸다.
그기까지 입회한 뒤에야 비로소 아버지는 자리를 떴다.
브루투스에 대한 칭찬이 자자한것과 대조로 그 뒤 한 명의 집정관은 스스로 자진해서 가족과 함께 이웃 나라로 망명했다.
브루투스가 단지 가부장의 권한을 과시하고 싶어서 그런 비인간적인 행위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걱정하고 있었고 그 우려가 적중한 것이었다.
선왕 타르퀴니우스는 왕위 복귀의 야심을 포기하지 않았고 망명지 에트루리아에서 여러곳을 돌아다니며 병력을 빌려 달라고 설득하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에트루리아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두 명의 집정관 브루투스와 발레리우스가 각각 기병대와 보병군단을 지휘해서 맞아 싸운다.
에트루리아군 기병대는 타르퀴니우스의 맏아들 아룬테스가 지휘하고 로마군 기병대는 브루투스. 사촌형제끼리의 싸움이다.
여기서도 아룬테스는 지휘관끼리 싸우자고 제의했고 마다하지 않았다.
두 지휘관 사이에는 작전이고 뭐고 서로 분노와 환멸 그 자체였다.
둘의 실력은 막상막하였다.
두 사람의 창이 거의 동시에 상대의 가슴을 깊히 찔렀다.
둘은 가슴에 창을 꽃은채 공중제비로 돌아 말에서 떨어졌다.
동시에 양군의 병력은 적을 향해 돌진했고 보병군단도 함께 합류한 근접전투가 시작 되었다.
양군 세력은 막상막하였고 전투는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날 밤 자기 영토로 후퇴한 양군 진영에서 기묘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는데 로마군 전사자보다 에트루리아군 전사자가 한 사람 더 많고 싸움은 로마군 승리로 끝난다는 풍문이었다.
병사들은 그것이 신의 목소리로 믿었다.
이틑날 아침 로마군은 다시 전쟁터로 돌아갔지만 에트루리아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발레리우스는 브루투스의 유해와 함께 로마로 개선했다.
그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졌고 로마 여인들은 아버지가 죽었을 때처럼 1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 공자가 태어나고 어린 시기인데 그가 없어도 이런 추모의 예는 저절로 생겨나나 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