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 30분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길을 나선다. 안개가 옅게 끼어있다.
어느새 여주휴게소에 도착했다. 주차장은 물론이고 노변에도 많은 짐차들로 빼곡하다. 우거지해장국을 먹고 서둘러 멱조고개로 간다.
06:05 지난번에 내려온 철계단과 마주보고 있는 곳에 철망이 쳐져있다. 철망에 붙어서 오른쪽으로 가시잡목을 헤치며 산을 오른다. 물기를 머금은 풀은 몸에 감기고 어느새 옷이 젖어들었다. 칡꽃이 짙은 향기를 뿜어낸다.
06:31 지독한 잡목을 헤치며 길도 없는 절개지 왼쪽으로 내려섰다. 현대오일뱅크 정유소마당이다. 홍천화로양념구이 간판이 나란히 서있다. 도로건너로 가야할 곳에는 공사가 한창이다.
06:39 차가 뜸한 틈을 노려 도로를 건넜다. 진흙을 밟으며 공사장 제일 위쪽으로 올라섰다. 표시기가 많이 달려있다. 숲으로 들어섰다. 길이 좋다. 날은 흐리고 온도는 22도이다.
06:43 첫봉우리에 올라섰다. 방향이 왼쪽으로 바뀐다. 작은 봉우리를 넘었다. 경운기 한 대 정도는 충분히 다닐 수 있을 정도의 길이 이어진다.
넓은 임도삼거리에 내려섰다. 표시기가 보이지 않는다. 왼쪽으로 나가본다. 4번철탑을 확인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오른쪽을 살핀다. 길은 거침없이 뻗어있는데 표시기가 안보여서 엉거주춤 멈추고 지도를 본다. 역시 오른쪽으로 뻗어있는 길이 분명한데 왜? 표시기가 없을까? 성봉현님께 실례를 무릅쓰고 전화를 한다. 성봉현님이 반갑게 전화를 받는다. 이곳을 환하게 꿰뚫고 있다. 왼쪽에 보이는 4번철탑 방향으로 가서 1시간 이상 헤맨 곳이라며 오른쪽으로 임도를 따라 가라며 정확하게 안내를 해준다. 오른쪽으로 가는 길은 조금 내리막이다. 표시기를 촘촘히 달면서 간다.
07:07 임도네거리에서 바르게 산으로 들어섰다. 오른쪽에 붉은색과 흰색을 칠한 송전탑이 보인다. 희미하게 자동차 달리는 소리만 들릴 뿐 새도 울지 않는 조용한 숲을 구름에 달 가듯 슬금슬금 나아간다.
길은 서서히 왼쪽으로 굽어지고 65번 철탑아래에서 아침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에게 한남정맥을 설명하고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이어가는데 다시 철탑을 만난다. 또 다른 철탑 두 개가 나란히 서있는 곳을 지난다. 달개비와 개망초가 삭막한 철탑의 모양과 대조적이다. 24번 철탑을 지나고 5분 후 철탑을 지나고 1분 후 또 철탑이다. 여기서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숲으로 들어섰다.
07:39 묘지 앞 돌계단을 내려서면 연이어 도로로 내려서는 철계단이 있다. 차선이 없는 아스팔트도로 건너로 골프연습장이 보인다. 도로건너 철망에 붙어 오른쪽으로 철망을 따른다. 가시잡목이 나를 공격하는 것인지 내가 가시잡목을 공격하는 것인지 하여간 몸은 엉망이다. 숲으로 들어서면서 길은 솔잎에 덮여 푹신하다.
07:57 오늘은 거미줄과의 전투가 나를 지치게 한다. 21번 철탑아래에서 간식을 했다.
08:09 밧줄이 쳐져있어 밧줄을 잡고 그리 가파르지 않은 오르막을 오른다. 철망에 둘러 쌓인 안테나를 지나자 넓은 공터에 정자과 철봉과 벤치가 있는 부아산(402.7m)정상이다. 검은 밧줄을 잡고 나무계단을 내려간다.
벤치가 있는 봉우리를 지나고 운동시설을 지난다. 134번 철탑을 지나 계속 바르게 간다.
08:38 서울공원묘지 맨 위쪽 줄지어 있는 무덤을 따라 절개지 앞에 섰다. 이 절개지를 내려서면 333번 지방도 위 하고개인데 터널이 뚫려있어 터널 위로 하고개를 지나야 한다. 터널 위는 상당히 넓은데 잡목이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다. 절개지 오른쪽으로 내려서서 건너편 절개지를 오른다. 왼쪽에 용인대학교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송전철탑을 지난다. 절벽에 가까운 경사도에 묘지가 있다. 이런 절벽에 묘지를 쓰는 것 보다는 화장이 깨끗하지 아니한가? 뚜렷한 봉우리(338m)는 아니지만 삼각점이 박혀있다. 삼각점을 지나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소나무 숲으로 들어선다. 푹신한 길은 잠시이고 철탑이 나오고 칡넝쿨이 길을 막는 방화선 지역이 잠시 나온다. 숲으로 들어섰다가 왼쪽 오른쪽으로 방향이 바뀐다.
09:11 송전철탑을 지나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봉우리에서 갈 방향을 본다. 철탑과 철탑이 겹으로 이어진다. 수많은 철탑을 따라 왔고 또 철탑을 향해 가야한다. 명지대학교를 보면서 철탑을 머리 속에서 지우려고 애써보지만 그래도 철탑과 철탑에 포위된 느낌이다.
09:31 왼쪽에 철탑이 있는 T자 길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왼쪽 철탑이 서있는 곳이 함박산 정상이다. 오른쪽으로 내려서는데 흐릿한 글씨(무네미고개)가 적힌 나무이정표가 붙어있다.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함박산의 높이는 해발 349m이고, 이곳 이정표에는 424m로 적혀있다. 조금의 오차가 있다.
09:36 내리막길을 따라 철탑을 지나고 공동묘지(평안남도 대동군 면민회에서 조성한 공동묘지)가 나온다. 임도삼거리에서 묘지를 끼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큰 비석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임도를 따른다. 방향은 동쪽이다. 곧이어 전봇대와 임도가 이어지고 철탑을 지난다. 오른쪽에 집 두 채가 있고 왼쪽으로 마을이 보이는 곳에서 길을 건너 밧줄을 쳐 놓은 곳으로 들어간다. 망두석이 세워져 있는 묘지들을 중앙으로 지나서 소나무 숲으로 들어간다. 작은 재를 지나고 봉우리에 올라섰다. 차소리가 요란하다. 건너편에 은화삼골프장이 보인다.
09:57 절개지 오른쪽으로 내려가서 4차선 도로를 건너지 않고 왼쪽으로 도로를 따르면서 건너를 살핀다. 표시기가 반짝인다. 위험하지만 무단횡단을 감행한다. 도로를 건너 절개지를 올랐다. 가시잡목과 거미줄이 심하다. 무덤이 나온다. 무덤 끝까지 가서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좁은 길을 따라 내려간다. 다시 도로가 나온다. 45번 지방도이다. 건너에 시골집쌈밥정식 식당이 보인다. 일단 들어가서 밥을 먹어야겠다.
10:40 밥에 구수한 청국장을 비벼서 먹고 서비스로 나오는 커피까지 먹었다. 든든하다.
은화삼골프장으로 들어가는 도로가까이 다가가면서 왼쪽 산을 살핀다. 표시기가 많이 달려있어 일단 산으로 올라붙었다. 철망을 따라 조금 가보지만 잡목이 심하고 길이 없다. 산길을 포기하고 오른쪽 아래에 보이는 골프장진입도로로 내려선다. 골프장 수위실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수위가 나와서 길을 막는다. 들어가서 일 보시라고 하고 오른쪽 아래 주차장 옆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간다. 조금 전 수위는 수위실로 들어가면서 건너편에 보이는 철탑이 있는 능선으로 올라가라고 했지만 그건 너무 돌아가는 길이다. 골프장 외곽을 따라 돌아가는 좁은 포장길로 걸어간다. 이곳은 골프를 치는 사람들의 이동통로이다. 이 길은 산마루까지 이어진다. 산마루가 가까워질 즈음 젊은 직원이 골퍼를 태우는 작은 차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타라고 한다. 20m정도 남은 거리지만 그의 걱정된 눈빛을 외면할 수 없어 20m를 차로 이동한다. 산마루 오른쪽으로 방향이 바뀌는 곳에 표시기가 주렁주렁 달려있다.(11:07)
11:15 철망아래 골프장이 펼쳐지는 능선을 따라간다. 흙만 드러난 곳에 햇빛이 부딪히자 누런 색 빛을 내며 반짝인다. 사금이다. 무척 많다. 조용한 길이 이어진다.
11:23 39번 철탑을 지나고 3분 후 작은 재를 지난다. 길이 좋다.
11:37 운동시설이 있고 벤치가 있는 217.2m봉이다. 벤치에 앉아 간식을 먹는다. 휴식을 하면서 운동 나온 부부와 대화를 나누었다. 지도를 보면 숙명여대가 오른쪽 어디이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도토리를 줍는 아줌마를 만나 인사를 나누고 바르게 나있는 좋은 길을 버리고 철탑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간다. 조심할 지역이다.
11:49 개와 돼지가 악을 쓰는 소리를 들으며 포장도로에 내려섰다. 오른쪽에 통나무집이 보이고 축사도 보인다. 물봉선은 화려함과 단아함을 겸비한 아름다운 꽃이다. 가시잡목을 헤치고 좋은 길로 올라섰다. 노란 말뚝(한강수변구역, 경안천)이 눈길을 잡는다. 잡목과 거미줄로 가득한 송전철탑을 지나고 칡꽃 향이 그윽한 무덤을 지난다. Y형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들어서는데 또 철탑이다.
12:12 철탑이 서있는 봉우리를 지난다. 해가 구름에 덮여있지만 조금 덥다.
12:22 봉우리에 올라 왼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12:35 목이버섯을 사진에 담고 철탑을 지난다.
12:44 베어진 나무들이 즐비하다. 묘지 앞에서 뒤를 돌아본다. 지나온 길에는 송전탑이 줄지어 서있다. 높이 서있는 십자가를 힐껏 쳐다보고 올라간다.
송전철탑이 있는 344.6m봉이다. 삼각점이 한쪽에 보인다. 여기도 무덤이 있다. 건너편 산이 눈길을 당긴다. 골재채취장이다. 산은 흉측하게 상처를 입었다.
13:19 쇠말뚝이 박혀있는 삼거리이다. 여기서 왼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조용히 아무생각 없이 걷는다.
13:24 웅웅 소리를 내는 고압선 철탑을 지난다.
13:25 김대건 신부의 생전 사목활동 길, 순교 후 유해운구 길이라는 글이 새겨진 비석이 있는 망덕고개이다. 큰 비석 옆에는 애덕고개(3,872m), 미리내성지(4,372m)라고 새긴 표석이 있다.
* 망덕고개 비석 뒷면에 새겨져 있는 글.
오늘 울고 내일 울어도 오직 이 같을 따름이요
때리든지 죽이든지 또한 이 같을 따름이니
어서 때리고 어서 죽이시오
이제 죽는 것도 천주를 위하여 하는 것이니,
바야흐로 나를 위하여
영원한 생명이 시작하려 합니다.
(감옥에서 하신 김대건 신부님 말씀)
* 망덕고개 비석 옆면에 새겨져 있는 글.
망덕(望德)
망덕은 천주 태워주신 초성덕행(超性德行)이니
천주 예수의 공로를 보사 허락하신 천당명복을 바라고
그 복을 얻기에 요긴한 모든 성총을
천주의 성실하심과 자비하심을 인하여 굳이 바라는 덕이니라.
망덕고개를 지나면 콘크리트길이 나오지만 이 길을 따르면 안된다. 왼쪽 산으로 올라서야 한다.
13:50 바래기산(368.2m)정상이다. 삼각점이 나뭇잎 속에 숨어있다. 4분을 걸었다. 4각 정자와 벤치가 있는 곳이다. 이정표(문수산, 묵리 학일리, 묵리 고초골)도 서있다. 문수산 방향이다.
14:10 고초골낚시터와 문수봉 갈림길이다. 벤치에 앉아 간식을 하며 한 숨 돌리고 문수봉으로 간다. 나무계단이 이어진다. 4분 후 나무계단을 밟고 올라섰다. 참호가 오른쪽에 띄엄띄엄 나타난다. 왼쪽은 철망이 쳐져있고 산아래 엄청난 규모의 기름탱크가 여러 개 보인다. 지도에는 이 시설이 나타나지 않는다. 한국석유공사 석유 저장탱크이다.
14:33 위험 표시판에 문수봉 정상이라고 표시가 되어있다. 삼각점이 있고 팔각정이 있다. 문수봉에서 내려서는 길은 가파르다. 붉은 황토와 나무계단, 밧줄, 조릿대가 함께 한다.
14:42 내리받이 길에서 옆으로 10m정도 떨어져 있는 문수산 마애보살상은 두 개의 큰 바위에 각각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새겨놓았다. 일부러 들어가서 참배를 한다.
약수터 갈림길에서 백구를 만났다. 오르락내리락하며 안절부절 한다. 일단 약수부터 한 사발 마시고 돌아 나오는데 병색이 완연한 중년의 여자가 백구와 함께 다가온다. "아직 어려서 겁이 많아요." 하지만, 산중에서 개를 만나면 기분은 좋지 않다.
넓은 길을 따라 계속 내려간다.
14:59 이정표(중소기업개발원, 매봉재)를 지나 개발원 방향으로 넓은 길을 간다.
15:06 이정표(사암리, 매봉재)가 있는 삼거리이다. 여기서 능선을 버리고 왼쪽 사암리 방향으로 내려선다.
15:12 오른쪽 아래에 신축중인 신가사 파란 지붕이 나무사이로 보인다. 왼쪽 아래에는 넓은 터에 띄엄띄엄 원두막이 서있다. 곧이어 나오는 갈림길에서 신가사 방향을 버리고 왼쪽으로 내려간다. 3분 후 미리내마을 간판이 서있는 2차선 도로에 내려섰다. 용인시 원삼면 고당리 안골이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가 많이 밀려 아직 용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57번 지방도에서 만나자고 한다. 도로에 주저앉아 마지막 먹을 것을 끄집어내어 먹는다.
15:22 달콤한 휴식을 마치고 다시 길을 이어간다. 건너편 전원주택 뒤쪽으로 보이는 능선에 올랐다. 표시기가 많다. 전원주택들이 이어진다. 맨 끝에 있는 집 마당에 매어져있는 개가 짖어댄다. 짧은 철책 끝에서 왼쪽으로 내려섰다. 묘지 두 기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오른쪽 집 앞으로 나있는 도로를 따라 곧바로 나간다. 길가에 매인 개가 또 짖는다. 전원주택 조성지 끝까지 도로가 나있다. 도로 끝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숲으로 들어섰다. 가시잡목이 대단하다. 왼쪽에 도로를 두고 좁은 숲길을 따라 계속 이어간다.
15:35 도로와 무덤이 마주하고 있는 곳에서 다시 숲으로 쏙 들어갔다가 내려서니 시멘트포장도로이다. V자 포장도로에서 오른쪽으로 들어선다. 왼쪽에 건축자재가 쌓여있고 오른쪽에는 흰색 2층 주택이 있다.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간다. 비포장도로가 나오고 오른쪽에 작은 밭이 있다. 공장 앞 수도를 틀어놓고 마음껏 물을 머리에 쏟아 붓는다. 시원하다.
15:48 장수농원 표석이 서있는 57번 2차선 도로에서 산행을 마친다.
산행을 마치고 : 옷만 갈아입고 가까이 있는 연화산 와우정사를 둘러봤다. 많은 불상들을 보고, 용인 방향으로 막 달려가는데 한국석유공사 표시판이 서있다. 산 위에서 본 그 저장탱크는 한국석유공사에서 건설해 놓은 것이다. 여기서 용인까지는 8km이다.
영동고속도로 용인나들목 가까이에 있는 유림24시불가마사우나(유림해피랜드)에 들어가서 목욕을 하고 저녁을 먹었다. 저녁 8시 30분, 인간극장을 통해 유명해진 가수 허송씨, 그는 불우한 아이를 돌보는 착한 사람이다. 그 허송씨가 공연을 한다. 1시간 동안 열창을 하는데 절로 박수가 나왔다. 아줌마들은 신이 나서 춤도 추고 음악에 맞춰 박수도 신나게 쳤다. 그는 조용필의 노래를 잘 불렀다.
◎ 2005. 08. 27(토) 흐림
◎ 산행 기점과 종점 : 용인시 구성읍과 용인의 경계지점 5번지방도 위 멱조고개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경기도 원삼면 57번 지방도 위 장수농원 앞에서 마침
◎ 홀로 걸음(지원 : 임채미)
◎ 도상거리 : 약 22km
◎ 산행시간 : 약 9시간 40분.
** 멱조현(覓祖峴, 멱조고개)과 부아산(負兒山)에 얽힌 전설
옛날 삼가리에 홀로된 시아버지를 모시고 외아들을 키우며 사는 한 시골 부부가 있었다. 이들 부부는 비록 가난하였지만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부친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친 역시 손자를 끔찍하게 아껴주었기에 이들의 집안은 항상 화기가 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관가에서 시키는 부역에 나가게 되어 여러 날 집을 비우게 되었다. 남편이 없는 동안에도 며느리는 시아버지를 극진히 모셨고, 시아버지는 아들 대신 나무를 해서 시장에 내다 팔았다. 또한 며느리는 시아버지가 시장에서 돌아올 때쯤이면 늘 아이를 등에 업고 고갯마루에서 시아버지를 기다리곤 했다. 그런데 하루는 밤이 깊었는데도 웬일인지 시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등에 아이를 업고 기다리던 며느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장 쪽으로 조금씩 나아가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길을 헤매게 되었다. 한참을 헤매다가 가까운 곳에서 사람의 비명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혹시나 시아버지가 짐승에게 해를 입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그 곳으로 달려가 보았다. 과연 그곳에서는 시아버지가 호랑이와 죽음을 무릅쓴 채 다투고 있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본 며느리는 호랑이를 크게 꾸짖으며 "네가 정말 배가 고파서 그렇다면 내 등에 업힌 아이라도 줄 터이니 우리 시아버님은 상하게 하지 말아라"라고 하면서 어린 아들을 호랑이 앞에 내려놓자 호랑이는 아이를 물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겨우 정신을 차린 시아버지는 손자를 잃은 슬픔에 오열을 참지 못하였으나, 며느리의 간곡한 애원으로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며느리에게 "나는 이미 늙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을 터인데, 어쩌자고 어린아이를 대신 죽게 하였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며느리는 "어린아이는 다시 낳을 수도 있으나 부모님은 한 번 돌아가시면 어찌 다시 모실 수 있겠습니까"하며 마음 상하지 않으시기를 재삼 부탁드렸다. 이후 시아버지도 며느리가 더욱 마음 아파할 것을 걱정하여 겉으로는 슬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
부아산은(질 부負, 아이 아兒) 부인이 아이를 업고 헤매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으며, 멱조현은 할아버지를 찾아 넘던 고개라는 뜻에서 연유하였다.
** 함박산의 유래 : 함박산은 용인시 남동과 이동면 서리에 접해 있는 산으로 명지대학교를 품고 있다. 아주 오랜 옛날 무너미고개까지 물이 넘쳐 이 일대 봉우리가 모두 물에 잠겼을 때 이 산 봉우리만 함지박만큼 남았다 하여 함박산이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 김대건 신부와 망덕고개
김대건 신부는 신유(1801년), 기해(1839년) 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이 신앙 때문에 이곳으로 숨어들어 여기저기 흩어져 화전을 일구고 살았는데, 밤이면 달빛 아래 불빛이 은하수처럼 보여 미리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병오(1846년) 박해 때 순교하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유해가 안장되면서 미리내는 박해시 주요 교우촌으로, 또 교우들의 정신적 안식처로서 주목을 받으며 성지로 부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1846년 9월 16일 사학괴수라는 죄목 하에 군문효수형을 받고 서울 새남터에서 망나니가 여덟 번씩이나 내려치는 칼에 순교하셨는데, 신부님의 전교길을 돕던 이민식 빈첸시오(당년 17세)가 관헌들의 눈길을 피해 성인의 시신을 200여 리 떨어진 미리내로 모셔와 1846년 10월 30일 자신의 선산인 지금의 자리에 안장하였다.
1901년(성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 55주년) 5월 18일, 시복식 준비를 위해 발굴된 성인의 유해는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 성당으로 옮겼으나 미리내 묘소는 그대로 보존되어 순례자들이 계속 찾아들었으며, 성인께 기도하여 은혜 입은 이들이 속출하자 성인의 무덤에 잔디가 남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 김대건 신부 : 성인. 본관 김해. 세례명 안드레아. 아명(兒名) 재복(再福)·보명(譜名)·지식(芝植). 충청남도 당진군 우강면(牛江面) 출생. 증조부 진후(震厚)가 10년 동안의 옥고 끝에 1814년 순교하고, 아버지 제준(濟俊)도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순교하는 등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7세 때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內四面)으로 이사함에 따라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1836년(헌종 2) 프랑스 신부 모방(P.Maubant)에게서 세례를 받고 예비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상경하였다. 역관(譯官) 유진길(劉進吉)에게 중국어를 배운 후, 모방의 소개장을 가지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조선 전교(傳敎)의 책임을 진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칼레리 신부로부터 신학을 비롯한 여러 가지 새로운 서양 학문과 프랑스어·중국어·라틴어를 배웠다. 1842년 수업을 끝낸 다음 기해박해 이후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고 있는 고국에 밀입국을 시도하였다. 처음 의주를 거쳐 서울로 향하다가 감시가 심하여 되돌아갔고, 얼마 후 페레올 주교로부터 고국에 잠입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번에는 두만강변 경원을 거쳐 입국하려다가 또 실패하고, 바쯔자[八家子]로 돌아가 매스트르 신부 문하에서 신학을 연구하였다. 1845년(헌종 11) 단신으로 국경을 넘어 서울 잠입에 성공, 천주교 대탄압 이후 위축된 교세확장에 전력을 기울이다가 다시 프랑스 외방전교회에 지원을 요청하기 위하여 쪽배를 타고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금가항(金家港) 신학교에서 탁덕(鐸德)으로 승품(陞品), 한국사람으로서는 최초로 신부가 되어 미사를 집전(執典)하였다. 8월 페레올 주교, 다블뤼 주교와 함께 상하이를 떠나 충청남도 강경에 잠입하여, 서울을 향하여 각지를 순방하면서 비밀리에 신도들을 격려하고 전도하였다. 1846년 선교사의 입국과 선교부와의 연락을 위한 비밀항로 개설을 위하여 백령도 부근을 답사하다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전후 6회에 걸친 혹독한 고문 끝에 선교부와 신부들에게 보내는 편지 및 교우들에게 보내는 유서를 쓴 후 25세로 순교, 경기 안성군 양성면(陽城面) 미산리(美山里)에 안장되었다. 1857년(철종 8) 교황청에 의하여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되고, 1925년 교황청에서 시복(諡福)되어 복자위(福者位)에 오르고 1984년 4월 내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다시 시성(諡聖)되어 성인위(聖人位)에 올랐다.
** 문수산 마애보살상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문촌리 산 25번지에 있다. 1984년 9월 12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20호로 지정되었다. 2구의 마애석불로, 제작연대는 신라 말, 고려 초로 추정된다. 바위를 잘 다듬어 양쪽으로 대칭되게 선 두 보살상을 얕게 부조한 후 선각기법을 함께 사용한 뛰어난 마애보살상이다. 연꽃 위에 선 두 보살상 중 왼쪽 보살상은 정면으로 향한 얼굴을 오른쪽으로 약간 기울였으며, 왼손을 들고 오른손을 내려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있다. 옷을 걸치지 않은 상체는 단순한 모양의 목걸이와 팔찌만으로 꾸며져 있으며, 하체는 신체의 윤곽선이 뚜렷이 드러난 투명한 상의(裳衣)를 입고 있다. 오른쪽 보살상은 웃는 듯한 얼굴 표정을 하고 있다. 대담하게 단순화한 형태 묘사가 돋보이며, 신체의 비례에 견주어 큰 얼굴, 어깨가 올라간 움추린 자세, 손과 발의 섬세한 표현 등은 앞 시대의 선각마애불상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두 보살상만이 새겨진 희귀한 도상으로 도상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마애석불은 암벽이나 구릉에 새긴 불상, 또는 동굴을 뚫고 그 안에 조각한 불상이다. 한국을 비롯하여 인도·중국·일본 등에 퍼져 있으며 수법도 양각·음각·선각 등 다양하다. 한국은 7세기경 백제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수많은 마애석불이 전국에 퍼져 있다.
첫댓글 잡목과 가시넝쿨이무성한 길을 가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멱조고개를 넘어 만나는 넓은 임도 삼거리에서 저도 처음에는 방향감각을 잃어버려 막막할 때 선답자의 표지기가 아쉬웠던 지점인데 다행히 권재형님이 표지기를 매달아 주셨으니 후답자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리라 생각됩니다. 한남에 이어 한남금북까지 아자아자~~
성봉현님 덕분에 고비를 넘겼습니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망설였는데 전화 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먼저 가신길 더구나 뺑뺑 힘들게 이어간 구간. 확실한 기억. 덕택에 저는 수월하게 갈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구~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