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대종사 생애 <원불교인물과 사상> 교안 중에서
1. 탄생(誕生)
소태산 대종사는 서기 1891년 5월 5일(음 3.27)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 영촌에서 아버지 회산 박회경(晦山 朴晦傾) 대희사와 어머니 정타원 유정천(定陀圓 劉定天) 대희사의 4남 2녀 가운데 3남으로 탄생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밀양 박(朴)씨이며 어릴 때 이름은 진섭(鎭燮), 결혼 후에는 자(字)를 처화(處化)라고 불리어졌고, 진리를 깨달은 후에서 중빈(重彬)이라 썼다.
소태산 대종사의 어릴 때 모습을 《원불교교사》에는 “기상이 늠름(凜凜)하시고 도량(度量)이 활달하시며, 모든 사물을 대함에 주의하는 천성이 있어,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함을 항상 범연히 아니하시며, 매양 어른들을 좇아 그 모든 언행에 묻기를 좋아하시며, 남과의 약속에 한 번 하기로 한 일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실행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소태산 대종사의 어린 나이였던 4~5세 때의 일화가 전해진다.
4살 때 늦은 봄철이었다.
길룡리 사람들은 동학군(東學軍)을 자칭한 난당(亂黨)이 온다는 소문이 들려와 모두가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동학군을 가장한 폭민(暴民)들이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아 가기 때문이었다. 어린 진섭(소태산 대종사)이 어른들의 이런 말들을 귀담아 듣게 되었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진섭은 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하는데 자기의 밥이 부친의 밥보다 적다하여 부친의 밥을 자기 그릇으로 덜어왔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이 하는 짓이 귀엽기도 했지만 버릇이 없어 보여 말을 건넸다.
"네가 어른의 밥을 아무런 말도 없이 가져가니 그 죄로 마땅히 매를 맞아야 하겠다.”
“아버지가 만일 저를 때리기로 하시면 제가 먼저 아버지를 놀라시게 하겠습니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의 말을 귀엽게 여기고 식사를 마치자 집안일을 살폈다. 한동안 집안일을 하던 아버지가 피곤하여 사랑(舍廊)에서 쉬고 있을 때 마루에서 놀던 진섭은 사랑을 향하여 소리를 질렀다.
“저기 노루목에 동학군이 나타났다. 저기 노루목에 동학군이 쳐들어온다.”
사랑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진섭의 아버지는 이 소리에 크게 놀라 자신도 모르게 뛰쳐나와 뒤뜰 대나무 숲으로 몸을 숨겼다.
그런데 많은 시간이 지나도 별스런 기척이 없었다. 이때 어머니 유씨가 그 광경을 보고 불안한 마음으로 마을 안을 돌아보니 동학군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었다.
돌아온 어머니가 진섭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하자, 진섭은 “제가 아침밥을 먹을 때 아버지와 약속한 일을 행하였을 뿐 이예요.”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일방적인 약속이라도 이행하는 습성이 어릴 적부터 굳어 있었던 것이다.
5세 때 여름철이었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동무들과 마을 앞개울 근처에서 놀고 있었다. 그때 두 동무가 갑작스럽게 큰 소리를 지르고 부둥켜안은 채 우는 것이었다.
어린 진섭은 동무들에게 우는 이유를 묻자 동무들은 손으로 부근에 있는 뱀을 가리켰다.
진섭은 가지고 있던 막대기로 뱀의 앞을 가로 막으며 “너 이놈! 뱀인 네가 어찌하여 사람을 놀라게 하느냐!”하면서 호령을 하자 뱀은 머리를 돌려 다시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어린 나이의 이런 대담성은 한 두 차례가 아니었고, 일상생활 속에서 자주 일어난 것이었기에 후인들은 그 성품의 일면을 ‘대담하시고 신의가 있으시었다’라고 표현하였다.
2. 구도(求道)
1) 하늘을 보고 의심
소태산 대종사가 처음 진리에 대한 의심을 갖게 된 것은 7세 때의 일이다.
일기가 화창한 어느 날 문득 ‘저 하늘은 얼마나 높고 큰 것이며, 어찌하여 저렇게 깨끗하게 보이는고’하는 의심을 가진 뒤 이어 ‘저와 같이 깨끗한 하늘에서 우연히 바람이 일고 구름이 일어나니, 그 바람과 구름은 또한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가’하는 천지에 대한 의심을 시작으로 그 의심이 점점 깊어감에 따라 9세경에 이르러는 자신의 일로부터 주변의 인연관계 등 모든 것에 의심이 일기 시작하였다.
‘나는 어떻게 태어났으며, 부모님은 어찌하여 저렇듯 다정히 사랑하시며 살아가시는가?’
‘마을 사람들은 왜 이렇게 모여 살게 되는 것일까?’ 하는 등등의 모든 것이 의심되지 않은 바가 없었다.
이렇듯 많은 의심을 가지고 그 의심을 풀어보고자 노심초사 하던 중 11세 되던 (음)10월, 아버지를 따라 영광군 군서면에 있는 마읍리 선산에서 열리는 묘제(墓祭)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런데 소태산 대종사는 여기에서 또 하나의 의심을 가지게 되었다.
묘제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선조에게 먼저 제사를 지내지 않고 산신(山神)에게 먼저 제사를 지내는 일이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친족 가운데 가장 웃어른을 찾아서 질문을 하였다.
“할아버지, 선조님 제사를 지내지 않고 산신에게 먼저 제사를 지내는 까닭은 무엇이옵니까?”
“산신은 산의 주인이시며 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주관하고 신령스런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란다.”
어린 소태산 대종사는 이 대답을 듣고 마음에 큰 설렘과 확신이 일어났다.
‘됐다.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의심을 산신령님에게 물어 본다면 해결할 수 있겠구나’하고 생각하며 다시 질문을 했다.
“할아버지! 산신은 뵈올 수 있사옵니까?”
“정성만 지극하다면 만나 뵈올 수 있단다.”
2) 산신을 만나기 위하여
어린 소태산 대종사는 집에 돌아가면 ‘구수산(九岫山)에 올라 구수산의 산신령님에게 온갖 정성을 다 바쳐 산신령님이 나타나시면 나의 의심된 바를 물어봐야지’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묘제가 있었던 그 후부터 부모님 몰래 집으로부터 3km여 떨어져 있는 구수산 삼밭재 마당바위에 올라 기도를 시작하였다. 그 후 소태산 대종사의 뜻을 안 부모님이 후원을 해주었다.
어린 소태산 대종사는 산신을 만나기 위한 일념으로 쉬지 않고 삼밭재 마당바위를 오르내리며 기도를 하였다. 오랜 세월을 끊임없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철따라 과일을 채집하고 또는 집안에 음식이 있으면 가지고 올라가 기도를 올렸다.
세월이 흘러 15세 되던 해 가을이었다.
무려 5년간을 끊임없이 기도를 했지만 산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소태산 대종사는 이에 절망하지 않고 기도를 계속하던 중 부모님의 뜻에 따라 당시 같은 면내의 홍곡리에 사는 제주 양씨 집안의 딸 ‘하운(夏雲)’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결혼을 한 이후에도 기도를 쉬지 않았다. 모진 추위 속에서도 기도를 쉬지 않았던 소태산 대종사는 결혼한 이듬해 새해를 맞아 부인과 함께 홍곡리에 있는 처가(妻家)에 새해 인사를 갔다.
소태산 대종사는 홍곡리에서 며칠 지내는 동안 사랑방에서 마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태산 대종사의 구도에 하나의 큰 계기가 되는 사건을 만나게 되었다.
마을 사람이 낭랑한 목소리로 밤마다 읽어주는 《조웅전(趙雄傳)》이라는 책의 주인공 조웅이 도사(道士)를 만나 자신의 품었던 뜻을 이루는 내용을 듣고 새로운 마음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조웅전 또는 박태부전이라고 함)
소태산 대종사는 ‘그렇다. 산신은 사실적인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만나기가 어렵지만 도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쉽게 만날 수 있겠지’라는 생각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부터 도사 찾기에 정성을 들이기 시작하였다.
3) 도사를 찾아서
소태산 대종사는 처가의 사랑방에서 들은 《조웅전》속에 나오는 도사는 인간이 생각하기 어려운 신통력이 있고, 모든 것을 모르는 바 없는 신과 같은 존재이며, 그 모습은 마치 걸인과 같아서 보통 사람의 눈에는 잘 띄지 않는 사람으로 그려져 있었다.
날이 갈수록 소태산 대종사의 마음은 도사에 대한 그리움이 크고, 따라서 산신을 만나기 위한 기도는 점점 도사 찾는 데로 돌려져 얼마가 지난 뒤에는 온통 도사 찾는 데에 그 정성을 기울였다.
길을 가다가 마주치는 사람이 보통 사람과 조금만 다른 점이 있어 보이면 곧 물음을 건네어 보고 대화를 나눠 보기를 서슴지 않았다.
도사를 만난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소태산 대종사의 의심을 해결하여 줄 도사는 없었다. 정성도 드렸고, 돈도 많이 들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혈성으로 찾았지만 결과는 의심만 더 깊어질 뿐이었다.
소태산 대종사가 도사를 만나려고 정성을 바치는 가운데 있었던 일화가 몇 가지 전해진다.
어느 날 소태산 대종사가 어느 술집 앞을 지나는데 한 걸인이 주막 벽에 쓰인 제갈공명의 시인 ‘대몽수선각 평생아자지(大夢誰先覺 平生我自知, 큰 꿈을 누가 먼저 깨칠 것인가. 내 평생 스스로 알리라.)’를 큰 소리로 낭독함을 보고, 혹시 저 걸인이 도사가 아닐까 하여 집으로 인도하여 식사를 잘 대접한 뒤 이야기를 건네어 보니 평범한 걸인 이상이 아니었다.
또 한 번은 스스로 도사라 칭하고, 사람들도 도사라고 일컫는 사람을 모시게 되었다. 처사(도사라 자칭한 사람)는 소태산 대종사의 부친과 소태산 대종사를 만나자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스승으로 대하고 예(禮)를 올리라는 것이었고, 또 한 가지는 소태산 대종사의 의심을 풀어 주었을 경우에는 그 대가(代價)로 황소 한 마리를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태산 대종사의 부모님은 처사를 향하여 소태산 대종사의 의심만 풀리면 두 가지 사항을 모두 이행할 것을 약속하고 그 도사가 요구하는 대로 뒷바라지를 하였다.
처사는 이틀 밤낮을 통하여 숨 쉴 틈도 없이 모든 뜻을 이루어 준다는 자신의 신장을 불렀지만 신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당황한 처사는 몇 가지 사항을 더 요구하여 열심히 신장을 불렀지만 종래 신장이 나타나지 않자 3일째 되던 밤에는 어둠을 이용하여 소태산 대종사 몰래 담을 넘어 도주하였다.
16세부터 도사를 찾아 헤매기 5년, 소태산 대종사가 20세 되던 10월, 가장 큰 후원자이고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여 주었던 부친이 열반을 하고 말았다.
도사를 만나지 못하여 애타하던 소태산 대종사의 구도생활에는 엄청난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어릴 적부터 계속되어 온 의심을 해결하여야 하는 것은 물론 어머님 봉양과 가족을 책임져 가계를 꾸려가야만 하고 물려받은 부채를 갚아야하는 부담을 안아야 했다. 그런가 하면 나라가 일본에 합방(合邦)되어 버렸다.
실로, 구도와 생활의 문제 그리고 외적으로 시대가 안겨 주는 괴로움의 극치 속에 나날을 보내야 했다.
4) 이 일을 어찌할꼬?
소태산 대종사는 구도와 생활의 괴로움 속에서 장사 등을 하였으나 어려움을 면치 못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를 안타깝게 여긴 외숙 유건(칠산)과 이웃마을에 사는 이순순(이산)의 도움으로 신안군 탈이섬에서 열리는 파시(波市, 바다위에서 열리는 생선시장)에 3개월여 장사하여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부채를 청산하였다.
그 후 22세부터는 산신을 만나는 일과 스승을 찾는 일이 한갓 부질없는 것이고 허망한 것임을 느끼기 시작하여 스스로 의심 해결에 대한 걱정이 깊어졌고, ‘내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하는 하나의 의심으로 이어졌다.
구도에 대한 열정으로 고창 연화봉 초당에 가서 한 겨울에 3개월여의 적공을 하고 돌아왔다. 연화봉 적공에서 큰 힘을 얻는 계기도 되었지만 몸에 해수증(咳嗽症)을 얻기도 하였다. 그 후 ‘내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하는 문제가 자신을 엄습하자 소태산 대종사의 생활은 완전히 초점이 없는 사람의 생활처럼 보였다.
길을 가다가 망연히 서 있는가 하면 밥상을 대해도 식사를 하지 않고 정신을 잃은 사람마냥 가만히 앉아 있기가 일쑤였다. 이렇듯 생활이 초점 없는 듯 계속되어질 때 일어난 일화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느 날이었다. 소태산 대종사를 시봉하는 사람이 밭일을 나가기 위하여 아침 일찍 소태산 대종사에게 밥상을 올렸다. 그리고 밭에서 일을 한 후 점심을 올리기 위하여 서둘러 집에 돌아와 방문을 열고 안을 들어다 보았다. 소태산 대종사는 아침 밥상을 올릴 때와 다름없이 묵연히 앉아 있는 상태였고 밥상 위에는 무수한 파리 떼가 들끓고 있었다.
또, 어느 날은 법성포(法聖浦)라는 곳으로 장을 보러 아침 식후에 출발하였다. 장에 가다가 나루터인 선진포(仙津浦)에서 ‘이 일을 장차 어찌 할꼬?’하는 의심과 함께 입정에 들어 망연히 서 있었다. 법성포 장을 다녀오던 마을 사람들이 “여보게! 자네 이곳에서 지금까지 무엇을 하고 있는 게야!”하는 소리에 놀라 깨어 보니 벌써 오후가 되었다.
이와 같이 시간과 장소를 잊고 세월을 보낸 지 몇 년, 25세 되던 해부터는 '내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 하는 의심도 사라지고 오로지 묵연히 앉아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 때부터 몸에 있던 종기와 연화봉에서 부터 얻은 해수증이 더 심해져 심신 간에 괴로움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으나 결코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인근의 주민들은 소태산 대종사의 이런 모습을 보고 몹쓸 병에 들었다고 가까이 하기를 꺼렸고 나중에는 하나같이 폐인으로 낙인찍고 혹 병이 옮지나 않을까 하여 집 주변에 가는 것마저 꺼리는 판국에 이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진리에 대한 의심 하나로 일관된 생활을 하다 보니 가정을 돌보지 못하여 그에 따라 은거하고 살던 집(노루목 집)이 비만 오면 방안에 빗물이 가득 고이기까지 했었다. 실로 의·식·주 모두가 소태산 대종사의 몸과 마음을 조이고 또 조였던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런 생활을 계속하는 가운데 26세 되던 1916년(병진년) 봄이 되었다.
3. 큰 깨달음(大覺)
1916년 4월 28일 새벽이었다. 간밤에도 묵연히 앉아 대정(大定)에 들었던 소태산 대종사는 새벽이 되자 자신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맑아져 왔다.
7세 때 ‘저 하늘은 얼마나 높고 큰 것이며, 어찌하여 저렇게 깨끗하게 보이는고’하는 의심을 가져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하는 과정을 거치고, 시간과 장소를 잊은 채 지내기 몇 년, 의심을 일으킨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느껴보는 정신의 환희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기쁜 마음을 가눌 수 없어 방 밖으로 나오니 동녘 하늘은 여명이 트기 시작하고 있었다. 순간, 전에 없이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게 되었고 따라서 단정하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자신의 어지러운 모습을 느끼고 몸을 씻어야겠다는 마음도 갖게 되었다. 그 후 어릴 적부터 의심되었던 문제를 생각하니 모두가 확연히 알아지는 것이었다.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이른바 20여 년간 온갖 정성을 다하여 얻고자 하셨던 큰 깨달음(大覺)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 날이 바로 1916년(병진년) 소태산 대종사의 26세 되던 4월 28일(음 3.26) 이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그때 깨달음의 진리를 말했다.
“만유(萬有)가 한 체성(體性)이며, 만법(萬法)이 한 근원(根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生滅)없는 도(道)와 인과보응(因果報應)되는 이치(理致)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대종경〉 서품 1).”
우주의 이치는 하나이며 그 이치는 생멸이 없고(不生不滅) 인과로 이루어진다(因果報應)는 뜻이다.
그리고 그때 깨달음의 심경을 ‘청풍월상시(淸風月上時)에 만상자연명(萬象自然明)’이라 하였다.
맑은 바람 솔솔 불고 밝은 달 두둥실 떠오르니, 우주의 대소유무와 인생의 시비이해가 저절로 훤히 밝고 밝게 드러나더라는 뜻이다.
4. 새 회상 건설
1) 제자를 얻음
대각(大覺)을 한 후 소태산 대종사의 모습은 옛 모습과 같지 아니하였다.
덕스러움과 위엄이 겸하여졌고 신체의 각 부위에서는 빛을 발하였다.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이렇듯 큰 변화를 본 사람들은 하나 둘 소태산 대종사를 찾게 되었다. 그 중 첫 번째 제자는 12살 연상으로 이웃 범현동에 살며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기 전 생활과 구도에 도움을 준 김광선이다. 그 후 몇 개월이 지나자 휘하에는 40여 명의 제자가 모이게 되었다.
제자를 얻은 소태산 대종사는 그 가운데 진실 되고 믿음이 독실한 여덟 사람을 뽑아 상수제자(上首弟子)로 삼고 깨달음의 세계를 조금씩 펴기 시작하였다.
제자들의 공부 정도로는 소태산 대종사의 깨달음의 세계를 이해하기에 요원하였지만 여덟 제자인 이재철·이순순·김기천·오창건·박세철·박동국·유건·김광선 등은 소태산 대종사에게 마음과 몸을 다하여 혈심(血心)의 신성(信誠)을 바쳤다.
2) 단 조직
원기 2년 (음)7월 26일 소태산 대종사는 이미 선정한 여덟 제자를 중심하여 세계를 건지고 생령을 건지기 위하여 세계 인류를 하나의 조직(組織)으로 엮을 방법을 단(團)으로 할 것을 결정하였다.
단은 소태산 대종사 스스로 단장이 되고 여덟 제자를 단원(團員)으로 하며 중앙(中央)의 한 자리는 비어놓은 채 10인 1단의 단 조직을 마무리 지었다. 이 단이 새 회상의 최초 교화단으로 첫 수위단이 되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단 조직을 끝내며 제자들에게 중앙의 자리를 비워 놓은 이유를 “이 자리(중앙)는 들어설 사람이 있느니라. 머지않아 우리를 크게 도울 사람이 나타나리라.”고 미래를 예측하여 주었다.
단이 조직되자 제자들의 공부는 날이 갈수록 길어졌고 이쯤 되자 소태산 대종사는 제자들과 저축조합(貯蓄組合)을 만들고 손수 조합의 규약을 만듦과 동시에 조합의 운영발전의 방법을 제시하였다.
3) 저축조합을 만들다
원기 2년 (음)8월 소태산 대종사의 뜻은 제자들의 뜻과 하나가 되어 저축조합을 만들었다.
자산을 모으는 방법은 담배와 술을 끊고, 허례를 폐지하며, 식량을 최대한 아끼고, 노는 날을 기하여 공동 작업을 하자고 하였다. 자산을 늘리는 방법과 규약은 잘 지키어져 조합이 발전되어갔다.
조합이 시작된 지 몇 개월이 되자 조합은 튼튼하게 되었고 따라서 소태산 대종사의 위대함이 날로 드러나 믿고 따르는 사람도 더욱 늘어났다.
소태산 대종사는 조합의 자산 2백여 원과 소태산 대종사의 집 가산을 정리하여 희사한 4백여 원을 합하여 6백여 원에 이르자 새로운 사업을 계획하였다. 영산의 앞 바다 한 부분을 막으려는 엄청난 계획이었다.
4) 바다를 막다
소태산 대종사는 저축조합운동을 전개하면서 내적으로 끊임없이 제자들을 훈련(訓練)시켜 훈련을 받은 제자들의 정신은 하나로 뭉쳐졌다.
저축조합의 자산 6백여 원과 이웃 마을 천정리 부호인 김덕일에게 4백 원을 차용하여 조합의 자산이라 할 1천여 원을 모두 목탄(숯)을 사도록 지시 하였다.
당시의 김덕일은 고리대금을 하는 사람이었으며 신용 담보가 없으면 대여를 하지 않는 구두쇠였다. 어느 날 소태산 대종사 한 제자에게 김덕일에게 가서 돈을 차용해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 제자는 가능치 않다고 답변을 하였다. 이에 소태산 대종사는 “아니다. 반기어 맞아 돈을 대여하여 줄 것이다.”라는 말씀에 제자는 반신반의(半信半疑)하고 김덕일에게 갔다. 소태산 대종사의 말씀과 같이 그 구두쇠가 흔연히 4백 원을 서둘러 대여해 주었던 것이다.
조합의 전 자산을 들여 목탄(한 포대에 25~30전을 주고 구입함)을 구입하였다. 그 후 7~8개월이 지나 다시 팔게 됐을 때는 가격이 10여 배에 가깝게 뛰어 있는 상태였다. 그렇듯 가격이 폭등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에 연료가 없어 자동차를 목탄으로 굴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10여 배에 가까운 이익, 이것은 조합원들의 사량(思量)으로써는 도저히 짐작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조합의 자산으로 구입했던 숯 판매에서 8~9천 원의 돈이 마련되자 소태산 대종사는 제자들을 향하여 영산의 앞 바다를 막자고 하였다.
수천 년 동안 누구 한 사람 감히 그런 생각을 하여 본 일이 없는 문제를 제시받은 제자들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소태산 대종사의 위대하심이 능히 바다를 막고도 남음이 있으라는 사실을 믿는 제자들은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간척사업(干拓事業)에 적극 참여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때가 소태산 대종사 대각을 이룬 후 3년이 되는 해 (음)4월이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 간척사업을 위하여 손수 배를 타고 바다에 나아가 측량의 위치를 잡아 소나무를 꽂게 하고 그 소나무와 새끼줄을 연결토록 하여 바다를 막기 시작하였다.
간척공사는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날이면 날마다 모여 앉아 조소와 비방을 일삼았던 것이다.
어느 날 모 신흥종교의 신도 한 사람이 소태산 대종사를 찾아와 “어리석은 일을 하지 마시고 우리 교회에 그 돈을 희사하라.”는 충고를 한 일이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만약 박중빈(소태산 대종사)이가 바다를 막는다면 내가 손가락에 불을 붙이고 하늘로 올라가겠네”라고까지 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여보게, 그렇게 얘기만 하지 말게. 저들이 저축조합을 하고 숯 장사를 하는 모습을 볼 때 그 가능성이 없지도 않네”라고 믿어 주는 사람도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저들이 저축조합을 하여 모은 돈을 바다에 몰아넣고 말 것이야. 그러면 저들은 쪽박을 차고 빌어먹으러 사방으로 흩어질 게 아닌가? 내 그때를 대비하여 옥녀봉에 박을 심고 촛대봉에 대나무를 심어 빌어먹으러 나설 하나씩 나누어 줄 걸세”하기도 했다.
간척사업은 여러 사람의 비방과 조소 속에서도 잘 진척되어 공사를 시작한 1년 만인 원기 4년 (음) 3월에 2만 6천여 평의 농토가 만들어졌다. 이 논을 후에 정관평(貞觀坪)이라 이름하였다.
간척사업을 진행하며 원기 3년 (음)10월 옥녀봉 아래에 도실(道室)건축을 착수하여 12월에 준공하였다. 이것이 곧 새 회상의 첫 교당인 구간도실(九間道室)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첫 교당을 준공한 후 이름을 ‘대명국영성소좌우통달만물건판양생소(大明局靈性巢左右通達萬物建判養生所, 크게 밝은 판국인 영성의 집이며 만사 만물을 좌우 통달하게 판별하고 양생하는 곳)’이라 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제자들에게 단을 조직하며 비워둔 중앙을 찾게도 하고 기다리게 하던 중 원기 3년 (음)3월 김광선을 앞세우고 정읍 화해리 김해운의 집을 찾아 경상도에서 온 송규(宋奎)를 만나 제자로 삼고, 그해 (음)7월에 약속대로 영산으로 온 송규를 10인 1단의 중앙(中央)으로 삼아 단 조직을 완성하였다.
새로 맞이한 중앙 송규를 중심으로 원불교 창건의 진리적 인증을 받기 위한 법인기도(法認祈禱)에 들어가게 되었다.
5) 진리의 뜻에 맡기다
1919년 방언공사(防堰工事)가 마쳐질 즈음에 전국적으로 독립을 외치는 기미년 만세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제자들은 소태산 대종사께 “우리는 이때를 당하여 어떤 일을 하여야 하겠습니까?”하고 물음을 올리자 소태산 대종사는 “저 만세 소리는 새 세계를 여는 개벽(開闢)의 상두소리이니 만 생령을 제도하기로 뜻을 세운 우리는 기도를 하여 전 세계의 생령을 구원하도록 하자.”고 제자들로 하여금 심신을 재계(齋戒)하고 목숨을 다하는 정성으로 기도에 들어가게 하니 원기 4년 (음)3월 26일이었다.
9인 제자는 집회장소인 ‘구간도실(九間道室)’에 모여 마음을 모으고 소태산 대종사가 지정하여 준 산봉우리에 올라 같은 시간에 기도를 올렸다.
기도의 장소는 중앙봉을 중심으로 여덟 봉우리가 구간도실로 부터 몇 백 미터에서 3km까지 떨어져 있었고, 매월 3회 (음)6일, 16일, 26일에 기도하였다.
기도를 시작한 지 12회 기도를 마치고 소태산 대종사는 제자들을 향하여 “그대들이 지금까지 기도해온 정성은 심히 장한 바 있으나 아직 천의(天意)를 움직이는 데는 거리가 먼 듯하니 그대들의 몸이 죽어 없어지더라도 창생을 위하여 그리 하겠는가.”하고 물은 후 “더욱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고 7월 26일(양8.21) 에는 모두 자결하도록 하라.”고 하였고 제자들은 이 말씀에 한 사람도 의혹을 갖지 않고 큰 보람으로 여기고 7월 26일이 되자 구간도실에 모였다.
소태산 대종사 앞에 마련된 상에는 청수와 흰 종이와 각자의 예리한 칼(단도)이 놓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9인 제자에게 “창생(蒼生)을 위하여 죽으러 가는 길, 미련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였다.
누구도 창생을 위하여 죽는 일에 미련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중앙인 송규가 “저희들은 창생을 위하여 기쁘게 죽겠습니다. 그러나 남은 스승님께서 저희들의 일로 인하여 혹시 관헌과 사회로부터 괴로운 일을 당하지 않으실까 두렵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소태산 대종사는 “떠나는 마당에서까지 나를 염려하여 주니 그대들의 마음이 고맙기 그지없다. 허나 아무런 걱정을 안 해도 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스승과 제자들 간의 일문일답(一問一答)이 끝나고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소태산 대종사는 제자들에게 백지 위에 ‘사무여한(死無餘恨)’ 곧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글을 쓰게 한 후 그 밑에 손으로 각자의 지장(指章)을 찍게 하고 사심 없는 심고(心告)를 올리게 하였다.
심고가 끝나자 큰 기적이 일어났다. 백지에 찍은 지장이 선명하게 핏빛으로 변하는 백지혈인(白指血印)이 된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기쁨을 감추지 않고 “이것은 진리가 여러분의 지극한 정성에 감응하여 나타내준 기적이며 이것으로 창생구원의 길은 열렸다. 진리의 인증(認證)을 받은 것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소태산대종사는 백지혈인의 증서를 불살라(燒火)라 하늘에 고하고(告天), 제자들에게 기도장소에 가서 자결하도록 명령하자, 제자들은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기도장소로 향했다. 떠나는 제자들을 배웅하던 소태산 대종사는 큰 소리로 제자들을 불러 세웠다.
“내 그대들에게 할 말이 있으니 그대들은 다시 구간도실에 모이라!”
제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자 소태산 대종사는 “그대들의 마음은 천지신명(天地神明)이 이미 감응하였고, 음부공사(陰府公事)가 이제 판결이 났다. 오늘 그대들의 생명을 기어이 희생하지 않아도 우리의 성공은 이로부터 비롯하였다.”라고 한 뒤 “그대들은 몸은 이미 시방세계에 바친 몸이니 앞으로 어떤 일을 당하여도 오늘 모두가 죽은 셈치고 희생 봉사하도록 해라.”고 명한 후 모두가 중앙봉(中央峰) 기도터에 가서 함께 기도하고 오도록 하였다.
제자들이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자 소태산 대종사는 제자들에게 각각 법호와 법명을 내리고 “이제 세계 공명(公名)인 새 이름을 주어 다시 살리는 바이니 많은 창생을 제도하라.”한 뒤 기도를 계속 올리게 하였다가 그해 (음)10월 26일에 변산 쌍선봉에서 해제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를 모시고 뜻을 받들어 기도올린 9인 제자의 방위와 법명과 법호는 다음과 같다.
방위 | 법호 | 법명 | 속명 |
건방(乾方) | 일산(一山) | 이재철(李載喆) | 재풍(載馮) |
감방(坎方) | 이산(二山) | 이순순(李旬旬) | 인명(仁明) |
간방(艮方) | 삼산(三山) | 김기천(金幾千) | 성구(聖久) |
진방(震方) | 사산(四山) | 오창건(吳昌建) | 재겸(在謙) |
손방(巽方) | 오산(五山) | 박세철(朴世喆) | 경문(京文) |
이방(離方) | 육산(大山) | 박동국(朴東局) | 한석(漢碩) |
곤방(坤方) | 칠산(七山) | 유 건(劉 巾) | 성국(成國) |
태방(兌方) | 팔산(八山) | 김광선(金光族) | 성섭(成燮) |
중앙(中央) | 정산(鼎山) | 송 규(宋 奎) | 도군(道君) |
5. 만대의 교법
7월 26일(양 8.21) 진리의 이적이 나타난 후 소태산 대종사는 제자 정산 송규(鼎山 宋圭)를 변산(邊山) 월명암(月明庵) 학명선사(鶴鳴禪師) 에게 보내고 김제 모악산 금산사에서 잠시 머물며 거처하던 송대 방문 위에 ◯(일원상)을 그려 보이고 얼마 후 월명암을 찾았다.
변산에 들어간 소태산 대종사는 월명암에서 2개월여를 머문 후 월명암에서 3km여 떨어진 실상사(實相寺) 옆 실상초당으로 내려와 제자들과 생활하며 원기 5년 (음)4월에 새 회상 교법의 강령인 인생의 요도 사은사요와 공부의 요도 삼학팔조를 제정 발표하였다. 또한 새 회상의 첫 교서인 《수양연구요론》과 《조선불교혁신론》을 초안한 후 김남천·송적벽 등 제자들과 함께 실상초당 위에 초가 3칸을 짓고 ‘석두암(石頭庵)’이라 하였다.
석두암으로 자리를 옮긴 소태산 대종사는 정산 송규를 월명암에서 돌아오게 하였고 교법을 제정하며 제자들을 지도하였다.
이때 봉래정사(실상초당과 석두암을 합해서 이름 함)로 김제·전주 등지에서 소태산 대종사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인연 가운데 김제에 사는 서중안(徐中安)의 하산(下山)권유에 하산을 허락하고 정식 회상을 열 준비를 하여 현 익산총부로 자리를 옮겨 정식으로 새 회상의 문을 열게 되었다. 이때가 원기 9년(1924)이었다.
6. 전법(傳法)
1) 익산에 총부건설
원기 9년 4월 29일(양 6.1) 이리 보광사(普光寺)에서 새 회상의 창립총회를 갖게 되었다. 이 창립총회에서 ‘불법연구회(佛法硏究會)’라는 임시 교명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창립총회에서 소태산 대종사를 불법연구회 총재로, 서중안을 회장으로, 김광선을 서기로 선출하였다. 창립총회를 끝낸 후 소태산 대종사는 진안 만덕산 김씨 소유의 산제당(山祭堂, 만덕암)에 들어가 12제자와 함께 1개월 초선회(初禪會)를 갖고 내려와 이리부근 각처를 답사하여 그해 (음)8월에 익산군 북일1주면 신룡리(현 중앙총부 위치)를 총부건설의 기지로 확정하였다.
(음)9월부터 총부건설을 위한 건축을 10여 명의 전무출신과 후원자의 노력으로 시작하여 그해 겨울초가 2동 17칸을 지었다. 이것이 곧 익산총부의 첫 건설이며 불법연구회 간판을 세상에 드러내는 처음이었다.
총부건설 당년의 회세는 영산·신흥·김제·전주·부안·서울·진안 각지의 회원이 남자 60여 명, 여자 70여 명으로 도합 130여 명이었고, 전무출신은 13명이었다.
총부를 건설하였으나 전무출신들의 공동생활은 많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의·식·주를 해결하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엿 장사·소작농사로 시작하여 고무공장·제사공장의 직공생활과 산업부 경영 등의 험난한 길을 걷게 되었다. 어려운 생활 속에도 교단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운영되었다.
2) 교서와 간행물 간행
새 회상의 창립과정에 있어서 특징 중 하나인 교서가 소태산 대종사의 당대에 발행되어 교리체계가 거의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원기 12년 《수양연구요론》, 원기 17년 《보경육대요론》을 비롯하여 소태산 대종사의 열반 해인 원기 28년 《불교정전》에 이르기까지 각종 교서를 발행하여 창립 초기부터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교육과 교화활동이 이루어졌다.
그런가하면 원기 13년 정기간행물인 〈월말통신>을 발행하여 교단의 소식과 소태산 대종사의 법문을 제자들이 수필(受筆) 하여 실음으로써 각지의 회원들이 교단의 소식과 소태산 대종사의 법문을 접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기간행물은 〈월보〉, 〈회보〉로 이름을 바꾸어 발행하면서 일경에 압수·폐간을 당하기도 하고 경제적인 사정으로 자진 휴간하기도 하였으나 초기 교단의 현황과 소태산 대종사의 법문과 동정, 선진들의 동정이 수록되어 있어 〈대종경〉 편찬과 초기 교단사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3) 일원상을 정식 봉안
소태산 대종사는 원기 20년 봄에 ‘총부 대각전’을 신축하여 그 정면 불단에 법신불 일원상(◯)을 봉안(奉安)하고,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을 확정하였다. 그 후로부터 각지의 법당과 가정에 법신불 일원상을 봉안하게 되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깨달음을 통하여 우주와 인생의 궁극적 진리를 ‘일원상’으로 표현하였으나,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확정하기까지는 20여 년의 세월에 걸친 변천과 인식의 과정이 있었다.
과거 많은 사람들이 일원상을 진리의 상징으로 표현하였지만 소태산 대종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깨달음의 경지를 근거로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확정하게 된 것이다.
교단이 소태산 대종사의 지도 아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발전해 나가자 일제의 감시는 더욱 심해지기 시작되었다.
4) 일제의 감시
이리경찰서에서는 교단을 해체 시킬 목적으로 총부 구내에 있는 청하원에 ‘북일순사주재소’를 원기 21년 설치하고 경찰을 상주시켰다. 그들은 소태산 대종사와 제자들을 감시하며 숙소까지 몰래 숨어들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색하였고, 때로는 조선총독부에서 직접 내려와 소태산 대종사를 취조하기도 하였다. 모든 집회는 경찰서의 허가를 얻도록 하고 법회도 경찰 임석(臨度)하에 보도록 하는 등 일제의 학정은 교단의 명맥을 바람 앞에 등불처럼 만들었다.
그러나 소태산 대종사의 탁월한 지도력과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으로 교단은 감시 아래서도 나날이 그 교화가 확장되어 이미 영광·서울·부산·개성·전북 등지에 상당한 자리를 굳혔다.
일제는 감시의 눈을 떼지 않아도 교단의 발전이 지속되자 혈안이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종국에 이를 무렵에는 조선총독부가 교단해체와 소태산 대종사의 제거를 결정짓고 그 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자신이 세상을 뜨지 않으면 교단의 장래가 보장될 수 없을 것임을 혜안(慧眼)으로 내다보았다.
7. 열반
1) 일원상 게송
소태산 대종사는 열반(涅槃)에 들기 수년 전부터 틈이 있는 대로 제자들에게 “나는 머지않아 수양의 길을 떠난다.”라는 말씀을 많이 하였다. 그러나 제자 누구도 이 말씀을 소태산 대종사의 열반과 관계시켜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든 제자들은 ‘소태산 대종사는 곧 진리요 생사를 떠난 위대한 성자이시며 영원한 존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열반 3년여 전인 원기 26년 1월 28일에 제자들에게 26년간의 대 경륜과 깨달음의 세계를 하나로 묶어 게송(偈頌)을 내리니 그것이 바로 일원상의 게송이었으며 열반을 위한 준비였다.
"유(有)는 무(無)로 무는 유로 돌고 돌아 지극(至極)하면 유와 무가 구공(俱空)이나 구공 역시 구족(具足)이라.”
소태산 대종사는 이 게송을 내린 후 부연설명을 하였다.
“유는 변하는 자리요 무는 불변하는 자리이나 유라고도 할 수 없고 무라고도 할 수 없는 자리가 이 자리이다. 돌고 돈다 지극하다 하였으나 이도 또한 가르치기 위하여 강연히 표현한 말에 불과한 것이다. 구공이다 구족하다를 논할 여지가 어디 있을 것인가. 이 자리가 곧 성품의 진체(眞體)이니 사량(思量)으로써 이 자리를 알아내려고 하지 말고 관조(觀照)로써 깨쳐 얻으라. 유와 무가 돌고 돌아 구공이 되고 구족이 되는 이치를 깨치면 천하가 다 내 것이요 세상에 걸릴 것이 하나도 없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임운등등 등등임운(任運騰騰 騰騰任運: 심신작용이 아무런 거리낌 없는 것) 한다. 성현이 게송 법문을 내릴 때에는 중음신(中陰神)들이 천도 받으려 꽉 둘러선다. 이럴 때에는 문고리만 잡아도 제도를 받게 된다.”
2) 최후의 법설
소태산 대종사는 열반 16일을 앞두고 원기 28년 5월 16일 총부 예회에서 공식석상 최후의 법문을 설했다. 〈대종경〉 부촉품 14장에 밝혀진 바와 같이 최후의 법문 내용은 몇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참다운 실력을 갖추도록 하라. 그리하여 제생의세(濟生醫世)의 사업에 나서라.
둘째, 생사거래(生死去來)에 매(味)하지 말고 자유를 얻도록 하라.
셋째, 공왕공래(空在空來)하지 말아라.
넷째, 사람만 믿지 말고 그 법을 믿어라.
좀 더 간추린다면 참 실력을 갖추어 생사를 자유하고, 사람만이 아닌 법을 믿으며 생령을 위하여 희생 봉사하는 일에 힘을 다하라는 것이다.
3) 열반(涅槃)
많은 사람들은 죽음이 자칫 모든 것의 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은 죽음을 끝이라 생각지 않고 오히려 시작이라 한다.
5월 16일 예회에서 최후의 법문을 내린 소태산 대종사는 점심을 상추쌈으로 평소와 다름없이 맛있게 들었지만 밥상을 물린 후 곧 자리에 눕게 되었다.
제자들은 평범한 자리 누움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15일 후 열반에 들 줄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6월 1일 오후, 비운에 휩싸인 나라에 탄생하여 20여 년의 구도로 깨달음을 얻어 28년간 생령과 세계를 위하여 교화 전법하신 소태산 대종사는 세수 53세로 여러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열반에 든 지 6일째 되는 6월 6일, 소태산 대종사는 제자들에 의하여 총부 대각전에서 발인식이 이루어졌고, 유해는 총부로부터 멀지 않은 이리 화장장에서 다비(茶毘)되었다.
소태산 대종사가 열반에 들자 제자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죽음을 같이하려 하였고 따라서 총부는 연일통곡이 끊이지 않는 절망의 늪처럼 되고 말았다.
이런 제자들의 슬픔을 조금이나마 달래고, 멀리서 찾아드는 교도와 조객을 위하여 며칠만 더 발인을 미룰 수 있도록 경찰서에 허가를 요청했으나 일제는 열반한 다음에까지도 압제의 사슬을 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발인 당일에는 많은 대중이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마지막 가는 길을 뒤 따라 가고자 했다.
일제는 혹시 민중의 시위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여 마지막 요청까지도 묵살해 버리고 뒤따르는 조객의 수를 2백여 명으로 한정시켜 오열에 찬 대중을 더욱 큰 오열속으로 빠지게 하였다.
소태산 대종사의 열반이 이 민족의 슬픔이요. 우리 중생의 슬픔이라는 사실을 아랑곳없이 일본 경찰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한국의 간디가 떠났다. 이제 불법연구회는 자연적으로 망하게 된다’고 즐거워하였다.
소태산 대종사의 열반은 많은 이적(異蹟)을 남겼다.
그 무더운 여름날 6일 장례를 하였지만 열반에 든 모습은 6월 1일의 그 모습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고 오히려 법체(法體)에서는 향기로운 향 내음이 끊이지 않았다.
일본 경찰들은 부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에 평소보다 더욱 신경을 곤두세웠고 한시도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발인 날에는 화장터까지 따라와 법체가 화구로 들어가는 일을 확인함은 물론 한 줌의 재로 변화된 모습을 지켜보고 매장이 될 때까지 감시의 눈을 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열반한 소태산 대종사를 마음만이라도 가깝게 느끼고 추모하고 싶어 묘지를 찾는 제자들에게 그 발길을 돌리도록 하였고 후일에는 금족령(禁足令)을 내리기까지 하였으니 남아 있는 제자들의 슬픔은 그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었다.
소태산 대종사 열반에 들어 총부에 5일간 모셔져 있는 동안 총부는 방광(放光)이 끊이지 않았고 발인이 끝난 뒤 10여 일 후에는 총부가 마치 불속에 잠기어 있는 듯하여 총부에 화재가 난 것으로 착각한 제자들이 이리역(총부에서 4km 거리)에서 총부로 달려오기까지 한 일이 있었다.
소태산 대종사 열반에 든 지 2년 후 나라는 광복을 맞이했고 소태산 대종사의 뒤를 계승한 정산 송규 종법사는 원기 33년 소태산 대종사가 일제의 압제 때문에 내걸지 못했던 원불교의 교명을 국가의 공인을 받아 만천하에 공포하여 민족의 광복과 더불어 새로운 장을 열고 출범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