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헌공(諱 又新) 한문비문
[비석 상단 전서(篆書)]
知中樞府事贈左贊成龍陵君諡貞憲尹公墓表
(지중추부사 증좌찬성 용능군 시 정헌 윤공 묘표)
[전측후면]
八世祖貞憲公當 穆陵盛際以經術進官正卿葬從金陵之先兆宜封山刊石以昭
(팔세조정헌공당 목능성제이경술진관정경장종김능지선조의봉산간석이소)
令德而連三世死于 王事家禍薦及未暇以謀也小子行恁始書之碣曰公諱又新
(령덕이연삼세사우 왕사가화천급미가이모야소자행임시서지갈왈공휘우신)
字善修南原尹氏在高麗大顯觀察使諱臨仕本朝三傳至大父諱時英以諫官事
(자선수남원윤씨재고려대현관찰사휘임사본조삼전지대부휘시영이간관사)
中廟將大用忤姦臣沈貞以歿 贈少宗伯父諱澄擧孝廉坐從父兄醉夫禍不仕蚤
(중묘장대용오간신심정이몰 증소종백부휘징거효염좌종부형취부화불사조)
卒 贈上相配草溪卞氏奉貞敬夫人嘉靖甲午公生辛酉擢丙科入立朝三十四年
(졸 증상상배초계변씨봉정경부인가정갑오공생신유탁병과입입조삼십사년)
歷敡華顯享年六十一 贈純忠積德補祚功臣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
(역이화현향년육십일 증순충적덕보조공신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겸판의금)
府事知 經筵春秋館事 世子貳師龍陵君諡曰貞憲始公絶意名塗常杜門謝客
(부사지 경연춘추관사 세자이사용능군시왈정헌시공절의명도상두문사객)
仕 宦每在通塞間庚寅公長子文烈公策光國勳當爲卿請移之父許之遂禮曹參
(사 환매재통색간경인공장자문열공책광국훈당위경청이지부허지수예조참)
判 進資憲大夫知中樞府事尋加正憲壬辰朝 顯皇帝賀聖節及歸文烈公殉倭
(판 진자헌대부지중추부사심가정헌임진조 현황제하성절급귀문열공순왜)
難公夷然不之哭曰死國職耳吾何慽焉於是 昭敬大王狩義州從官多中路散亡
(난공이연불지곡왈사국직이오하척언어시 소경대왕수의주종관다중로산망)
獨公終始執靮八谷具思孟作詩以美之遼東遊擊史游將兵至公與五峰李好閔
(독공종시집적팔곡구사맹작시이미지요동유격사유장병지공여오봉이호민)
晩翠吳億齡充問安使見史游於鴨江言被兵狀因送栢谷鄭崑壽乞靈于京師餞
(만취오억령충문안사견사유어압강언피병장인송백곡정곤수걸영우경사전)
之江上慷慨泣下遂薦李舜臣于 王爲統制使舜臣視師南海每貽書問計以倚重
(지강상강개읍하수천이순신우 왕위통제사순신시사남해매이서문계이의중)
聞公卒撫 劒懷悼不己後世論壬辰事者輒言重興之業始基於王師終成於統制
(문공졸무 검회도불기후세논임진사자첩언중흥지업시기어왕사종성어통제)
而公皆與有 力焉君子以此多之甲申公陞擬內資寺正而文烈公選入史局時人
(이공개여유 역언군자이차다지갑신공승의내자사정이문열공선입사국시인)
禹性傳惡之曰尹某某之子也 與李貴出入叔獻門當是時栗谷李文成牛溪成文
(우성전악지왈윤모모지자야 여이귀출입숙헌문당시시율곡이문성우계성문)
簡慍于 羣小不能安於朝文烈公出位論其事以斥時人也 故性傳之言如此而
(간온우 군소불능안어조문열공출위논기사이척시인야 고성전지언여차이)
公及文烈公俱見擯間有 經筵春秋金吾摠管之 命多不膺朝廷亦不以上卿處
(공급문열공구견빈간유 경연춘추금오총관지 명다불응조정역불이상경처)
公也 嘗與淸江李濟臣相友善及 罹文網流北方以死無人白其寃者公述淸江
(공야 상여청강이제신상우선급 이문망유북방이사무인백기원자공술청강)
言行風之廷中其所謂交自齠齕 如弟兄以托心期至老白首不渝則知淸江莫余
(언행풍지정중기소위교자초흘 여제형이탁심기지노백수불투칙지청강막여)
若者志士至今誦而悲之丁 丑拜昌原都護府五年爲政士女伐石以記之曰輟講
(약자지사지금송이비지정 축배창원도호부오년위정사녀벌석이기지왈철강)
師席來試牛刀行鄕約以敦風 養州老以興敎戊子拜光州牧爲治如昌原此公出
(사석래시우도행향약이돈풍 양주노이흥교무자배광주목위치여창원차공출)
處施措之大略焉爾公娶文化柳氏 擧五子男長則文烈公諱暹龍陽府院君次曰
(처시조지대략언이공취문화유씨 거오자남장칙문열공휘섬용양부원군차왈)
辶易監察女適佐郞李蕆直長李濬參奉李惟允文烈公 有子諱衡甲乙科通政就義
(적감찰여적좌랑이천직장이준참봉이유윤문열공 유자휘형갑을과통정취의)
光海君時 贈吏曹判書龍南君諡忠康男忠簡公諱棨忠貞公諱集俱死節進士諱
(광해군시 증이조판서용남군시충강남충간공휘계충정공휘집구사절진사휘)
柔爲皇朝守志而卒 贈掌令其後 縣監諱以明忠簡公之胤也 飮酒悲歌自稱朱
(유위황조수지이졸 증장령기후 현감휘이명충간공지윤야 음주비가자칭주)
氏遺民不出世郡守諱以健掌令之子 與尤翁同己巳之禍都正諱泓與金忠獻同
(씨유민불출세군수휘이건장령지자 여우옹동기사지화도정휘홍여김충헌동)
壬寅之禍小子先君諱琰以志節顯 贈吏曹判書龍恩君都正公爲縣監公之子而
(임인지화소자선군휘염이지절현 증이조판서용은군도정공위현감공지자이)
先君都正公之孫也 有以哉我家之禍薦而公墓之志闕也 尤翁狀文烈公則曰
(선군도정공지손야 유이재아가지화천이공묘지지궐야 우옹장문열공칙왈)
龍陵君好學通經恬靜自守又曰鄭公曄李公貴登炙於龍陵之門一松沈相國
(용능군호학통경념정자수우왈정공엽이공귀등자어용능지문일송심상국)
誄忠康公則曰先王考善良人也 是可以爲公之信史也 顧小子祗誦遺聞不敢
(뢰충강공칙왈선왕고선양인야 시가이위공지신사야 고소자지송유문불감)
贅一辭誠以公守約恥衒 之盛德至善不敢孤也 亦不敢不秖承也
(췌일사성이공수약치현 지성덕지선불감고야 역불감불지승야)
皇朝永曆三丁巳八代孫通政大夫吏曹參議 奎章閣檢校直閣知製 敎行恁撰
(황조영력삼정사팔대손통정대부이조참의 규장각검교직각지제 교행임찬)
通訓大夫行陜川郡守晋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黃運祚書幷篆
(통훈대부행합천군수진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황운조서병전)
[번역문]- 김포문화원 발간 금석문대관 자료
8세조 정헌공께서 목릉(선조의 능호)의 유성한 때를 당하여 경술로서
진출하여 벼슬은 정경(판서)에 이르렀고 장지는 금릉의 선산에 썼으
니 마땅히 산을 봉하고 돌을 깎아 영덕을 밝혀야 하였건만 연 3세가
나라 일에 작고하고 집안의 화는 연이어 닥쳐 도모할 겨를이 없게 되었었다.
소자 행임이 처음 비석에 쓰기를 공의 휘는 우신이요. 자는 선수이다.
남원윤씨는 고려 때에 크게 현달하였고 관찰사 휘 임은 본조에서 벼
슬하였으며 3대를 전하여 공의 조부 휘 시영은 간관으로 중종을 섬겨
장차 크게 쓰이게 되었는데 간신 심정의 비위를 거슬러 돌아가시니
소종백(예조참판에 해당)에 증직 되었다. 아버지 휘 징은 효렴(효행
과 문학이 뛰어난 사람을 천거하던 漢나라 제도)으로 천거되었으나
종형(*註 從弟라고도 함)인 취부(홍문관 수찬 潔공의 호)에 연좌되어
벼슬을 하지 못하고 일찍 졸하니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배위 초계 변씨는 정경부인에 봉해졌는데 가정 갑오년 중종 29년
1534년 공을 낳았다. 공은 신유년 명종 16년 1561년에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조정에 나선지 34년에 화려한 현직을 두루 거치고 61세에
졸하니 순충적덕보조공신에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 춘추관사 세자이사 용능군에 증직되고 시호는 정헌이다.
처음에 공은 벼슬길에 뜻이 없어 항상 문을 닫아걸고 손님도 사절하
고 지내니 벼슬이 매양 통하다 막히다 하였다. 경인년(1590)에 공의
장자 문열공이 광국훈에 책록 되어 공은 마땅히 경(卿)이 되어야 하
기에 아버지에게 옮겨주기를 청하니 허락하여 드디어 예조참판으로
자헌대부 지중추부사에 진직(進職)시켰다가 바로 정헌대부로 올랐다.
임진년에는 현황제(명나라 신종)를 가서 보고 황제의 탄생일을 하례
하고 돌아와 보니 문열공이 왜란에 순절하였으나 공은 태연하여 곡
도 하지 않고 이르기를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직분인데 내가 어찌
슬퍼할 것인가?”하였다.
이때에 선조께서는 의주에 파천해 있었는데 종관들이 중도에서 도망
친 자가 많았으나 홀로 공이 말고삐를 잡고 골짜기를 들어가시니 팔
곡 구사맹이 시를 지어 찬미하였다. 요동의 유격장 사유(史游)가 군
병을 거느리고 나왔는데 공은 오봉 이호민 만취 오억령과 함께 문안
사가 되어 사유를 압록강에서 만나 병화를 입은 상황을 말하였고 인
하여 백곡 정곤수를 명나라 서울에 보내서 청병을 하는데 강상에서
전별하면서 강개하여 눈물을 흘렸다. 또 이순신(충무공)을 임금에게
천거하여 통제사로 삼으니 이순신이 남해에서 군병을 훈련시키면서
매양 서신을 보내서 계략을 묻는 등 공에게 의중(믿고 의지함)하였는
데 공이 돌아가시자 칼을 어루만지면서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한다.
후세에 임진년의 일을 말하는 사람은 선뜻 말하기를 중흥의 위업은
처음에는 왕사(王師=명나라 구원병)에서 기초하고 끝내는 통제사에
게서 이루어졌다 하는데 공은 모두 참여하여 힘을 썼으니 군자들은
이것으로 공을 장하게 여겼다.
갑신년(1584년) 때에는 공이 품계가 올라 내자시정에 승직되고 문열
공은 사국(史局)에 들어가시었는데 시배(時輩)인 우성전이 미워하여
이르기를 “윤모는 아무개의 아들로서 이귀와 함께 숙헌(율곡 선생
字) 의 문하에 출입하고 있다” 하였다. 그 때의 율곡 이문성과 우계
성문간은 군소들에게 미움을 받아 조정에서 위치가 불안했는데 문열
공이 나서서 그 일을 논하고 시배들을 지척(지적하여 배척함)했기 때
문에 우성전의 말이 이와 같았던 것이고 공과 문열공이 배척받았던
것이다.
간혹 춘추관이나 의금부나 총관 등의 제수가 있기는 하였으나 조정
에서도 공을 상경(판서급)으로 처우하지는 않았다. 공은 일찍이 청강
이제신과 친하게 지냈는데 그가 문망(글로 죄에 걸림)에 걸려 북방
에 유배되어 죽었으나 아무도 그의 억울함을 말하는 이가 없었다.
이에 공이 청강의 언행을 적어서 조정에 흘렸다. 이른바 어려서부터
형제간처럼 지내면서 마음을 의탁하고 늙어 백수가 되도록 변함이
없었다면 청강을 아는 이는 공만 한 이가 없었다 한 것이니 지사들
이 지금까지 되 뇌이면서 비탄해 하고 있다.
정축년(1577년)에는 창원도호부사에 제수되어 5년을 다스리니 사림
이 돌을 다듬어 기록하기를 “스승 자리에서 학문을 강구하던 것을 거
두고 이곳에 와서 우도(牛刀=소를 잡는 칼: 큰 인재가 작은 고을을 다
스렸다는 말)를 시험하였으며 향약을 행하여 풍속을 순박하게 하고
늙은이를 공양하면서 교육을 일으켰다.”하였다.
무자년(1588년)에는 광주(光州)목을 맡아 다스리기를 창원에 있을 때
와 같이 하였는데 이것이 공의 벼슬길에 나서서와 집안에 있어서 시
행하였던 바의 대략이다.
공은 문화 유씨를 부인으로 맞았는데 5남매를 두니 아들로 맏이는 문
열공 휘 섬으로 용양부원군이요 다음은 휘 적으로 감찰이며 딸은 좌
랑 이 천, 직장 이 준, 참봉 이유윤에게 출가하였다.
문열공의 아들은 형갑이니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통정인데 광해군
때에 광해군이 폐모하니 나라가 망한다고 통곡하다가 돌아가시니
이조판서 용남군에 증직되고 시호는 충강이며 아들 충간공 휘 계와
충정공 휘 집은 모두 사절하였고 진사 휘 유는 황조(명나라)를 위하
여 절의를 지키다가 졸하여 장령에 증직되었다. 그 뒤에 현감 휘 이
명은 충간공의 아들로서 술을 마시면 슬피 노래하며 자칭 주씨(명나
라 황실이 주씨)의 유민(遺民)이라 하고 출세하지 않았고 군수 휘 이
건은 장령의 아들로서 우옹(우암 송시열)과 더불어 기사(1689년 송시
열 사사한 기사사화)년의 화를 함께 당하였으며 도정 휘 홍은 김충헌
(충헌은 김창집의 호, 노론4대신으로 1722년 壬寅 사화 당시 사사)과
더불어 임인사화를 같이 당하였고 소자의 돌아가신 아버님 휘 염은
지절(志節)로 드러나 이조판서 용은군에 증직되었는데 도정공은 현
감공의 아들이고 선군은 도정공의 손자이다. 우리 집안의 재앙이 거
듭되어 공의 묘소에 기록이 없음을 까닭이 있다 하겠다.
우옹은 문열공의 행장에서 이르기를 “용능군은 학문을 좋아하고 경
사에 통하였으나 염정(*편안하고 고요하여 스스로 의리를 지키는 것)
으로 스스로를 지켰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정공 엽과 이공 귀는 용
능의 문하에서 등자(문하에 들어와 공부)하였다” 하였으며 일송 심상
국(沈喜壽)이 충강공(형갑) 제문에 말하기를 “선왕고(정헌공)는 선량
인이라”고 하였으니 이로써 족히 공의 믿을 만한 역사가 된다 하겠다.
돌이켜보면 소자는 다만 유문(遺聞=전해온 이야기)을 칭송 할뿐 감히
한마디도 덧붙이지 못하였는데 참으로 공의 간약(簡約)을 지키고 자
랑함을 부끄럽게 여긴 성덕과 지선을 저버릴 수 없기 때문이며 또 감
히 지성스럽게 받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명나라 영력 세 번째 정사년(서기 1797년 정조 21년)
8대손 통정대부 이조참의 규장각 검교직각지제교 행임 글을 지음.
통훈대부 행 합천군수 진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 황운조 글을 썼고 전
서(篆書)도 함께 씀.
첫댓글 훌룡하신 직계조상님의 음과덕을 기림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