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월 클라이밍의 역사
-Big wall Climbing History-
By Jim Bridwell
번역 - 익스트림라이더 등산학교 이진기
ED.Note(저자 노트): 이 책의 공헌자로서 Jim Bridwell을 소개하는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한다. 그의 빅월 도전기들은 이 책의 다른 저자들의 것 이상이라 할 수 있다. 짐 은 빅월 등반 전성기 이전부터 클라이밍을 해왔고 프래닛의 먼 코너에 대한 테크닉 용어를 정리하였다. 그는 가장 극한 환경의 큰 벽들을 등반하였다. 이장 에서, 짐은 테크닉(technique)과 장비(gear)가 어떻게 발전해왔는가를 설명한다. 장비에 관한 심도 있는 고찰은 다음 장에서 다루기로 한다.
1930-40
빅월 클라이밍은 자연스럽게 유럽의 산들에서 시작되었다. 가파른 주요 정상이 정복된 이후에 알프스와 돌로미테의 돌출단면들이 종종 정복되었다. 그리고 익스트림이스트(extremists)들을 끌어들이게 되었다.1930년 초반에 Comicis와 캐신(Cassins)은 수 백 개의 강철 피톤(soft iron piton)을 가지고 돌로미테 벽을 등반했는데 이 장비들은 뒤틀린 크랙과 석회암 구멍에 아주 적합하였다.
1945-50
클라이밍의 소강상태는 2차 세계대전 동안에 지속되었다. 장비를 위한 메탈이 부족했으며 젊은 클라이머들이 전쟁에 동원되기도 했다. 그러나 몇 가지 중요한 테크닉 발전이 나타났다. 바로 나일론 로프(Nylon Rope) 와 알루미늄 캐러버너(aluminum carabiners)들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발전은 미국인 빅월 클라이밍의 아버지인 존 살라테(John Salathe)에 의해 발명된 강철 합금 피톤(pitons)이다. 대장장이인 존 은 포드 자동차의 차축(axles)인 피톤(pitons)를 유행시켰다. 이전의 강철 피톤(soft iron pitons)과 달리 제거와 재사용을 고려한 견고한 피톤(pitons)이었다. 현재는 큰 루트(big route)와 헌정등반?(commitment rose)시에만 소수 사용되고 있다. 1947년 Salathe는 Axnelson과 함께 요세미테 의 로스트에로우 침니의 첫 등반을 이룩하였다. 그러자 미국에서 최고의 장인과 아주 멋진 해로 둘러싼 벽으로 관심이 옮겨졌다.
장비에 대한 관심이 이슈가 되자 빅월 틀라이밍은 장비의 개선과 혁신에 의존하게 되었다. 더욱 가벼워진 장비(lighter gear) 와 튼튼한 피톤(pitons)은 현저한 발전을 이룩하였으나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발전에 비하면 기초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피톤(Chromemoly pitons)는 알루미늄 카라비너 와 같이 일반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등반이 불가능해 보였던 벽도 지금은 가능하게 되었다.
1950-60
요세미테는 안정적인 기후와 안전한 바위 때문에 빅월 클라이밍의 메카가 되었다. 캘리포니안스 (Californians) 라고 불리는 매우 헌신적이며 핵심적인 소규모 집단의 클라이머들은 빅월아트(big wall art) 를 시작하였다. 하프돔의 북서면 이 바로 그 결과물이다. 이는 로얄 로빈슨과 크루 까지 이어졌다. 그 다음에는 워렌 하딩에 의해 엘켑의 노즈가 정복되었다. 자기 제어하는 등반을 하는 Robbin’s quick과 달리 Harding은 등반원정 스타일을 선택했다. (Unlike Robbin’s quick, self contained ascents, Harding opted for an expedition style of ascent)
노즈의 넓은 클랙들은 하딩에게 낯선 문제로 나타났다. 하딩 은 디딤돌(stoves )로부터 다리를 떼어 갭을 채우고 Bong piton을 앞에 박았다. 긴 거리(stretches)가 다수의 확장 볼트 들에 의해 극복되었다. 3년 후에 엘켑은 정복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기술(technology)과 클라이밍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곳을 정복하려는 결단의 조화였다.
비록 로빈파는 끊임없고 최소한의 볼트로 등반하는 스타일을 추구했지만, 빅월 클라이밍은 여전히 숙제를 남겨두고 있었다. 식량, 물, 장비 등 많은 짐을 운반할 수 있는 시스템이 요구되었다. 장비는 여전히 원초적이어서 무수한 가능성을 대비할 수 있는 다양한 장비가 필요하였다. Siege climbing은 big route를 등반하는 전형적인 방법이었고 볼트는 장애물을 극복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장비에 있어서 많은 발전은 이 시기에 나타났다. As with the stovelegs for wide cracks the knifebalde was developed by Chuck Wilts to penetrate thin ones. 흥미로운 사실은 요세미테에서 그 오랜 세월 동안 금속성 짧은 사다리가 유행한 적이 없었다는 점과 부드러운 나일론 웨빙 줄사다리의 선호로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1960-70
이 시기는 빅월 클라이밍의 황금기였다. 또한 필요성이 발명의 어머니가 된 시기이기도 하다. 톰 프로스 는 1960년대 초 볼팅의 위험한 성장을 막기 위해 러프를 만들었다. 러프는 바닥과 이전의 피톤으로 불만족스러웠던 썩은 접합부분(seam)에서도 사용할 수 있었다. 이와 유사하게 스탠스의 부족와 리지(ledges)때문에 좀 더 편안하게 매달리게 하는 독창적인 악세서리들을 출연하게 하였다. 빌레이 시트와 해먹은 빠르게 받아들여졌다. 로얄 로빈슨은 유럽에서의 만족할 만한 성과를 이룬 후에 긴거리 홀링 딜레마를 해결하였다. 그는 독특한 방식으로 몸을 끌어 올리는 새로운 스위스 유마(swiss jumar)를 사용하였다.
도르래(pulley)와 협동하여 몸무게를 이용하는 유마는 성가신 홀백을 적당하게 붙들 수 있었다. 1960년 중반에 이르러 기술 완료되었고 siege 기술(tatice)은 없어졌다. 곧 North American wall, the Muir wall은 elegant 스타일로 입증되었다.
1960년 후반에 Hock과 quick 또는 shallow hole aid device라는 두 개의 혁신이 이 시기에 나타났다. 두 개 모두 표준 빅월 장비(gear)가 되었다. 구부러지는 Soft iron ring-angles은 첫 번째 훅의 역할을 하였다. A 1/4” rod of aluminum mushroomed at one end placed in drilled holes became what was known as a dowel.
Dowel은 오로지 몸무게만을 붙잡기 때문에 낙하하지는 않는다. Dawn wall의 초창기 시도에서는 big route의 경우 이러한 사용을 볼 수 있었다. 이 기간 동안 누추한 홀백은 원시적인 군대용 거친 모직물에서 최신식의 대형 여행용 가방으로 진화하였다.
1970-1980
이 시기에는 장비에 있어서의 극적인 발전뿐만 아니라 세계도처에서 강렬한 빅월 활동이 목격되었다. 빅월 기술의 발전은 먼 지역에서의 클라이밍을 변화시키기 시작했었다. 유럽 출신의 클라이머 뿐만 아니라 미국 출신의 클라이머들도 알라스카 파타고니아, 베핀아일랜드 의 개척을 위해 트레이닝 지역으로 요세미테같은 지역을 이용하고 있었다. 요세미테 에서의 클라이밍은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주요한 크랙들이 정복되자 관심은 끊어진 크랙들과 덧장바위 들을 후킹(Hooking)과 앝은 구멍 뚫기 (Shallow Hole drilling)로 연결시키는 것으로 옮겨졌다.
Shallow hole에서 유래된 Machine Bolt들은 곧 불안전한 알루미늄 dowel로 대체되었다. 워렌하딩은 B.A.T(Basically absurd Technology) 훅을 발명하였다. BAT는 구멍낸 가장자리에 사용되었다. 그런데 클라이머들은 훨씬 더 높은 벽에 드릴링을 했고 이는 동료에게 혹독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워렌하딩 의 Wall of The Early Morning Light가 바로 대표적인 케이스다. 28일이 경과하자 등반 루트는 혁신적인 루트발견과 등반기술의 기념물이 되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벽에 너무나 많은 볼트가 사용되었다고 느끼었고, 로얄 로빈슨은 두 번째 등반에서 많은 볼트를 제거하였다. 그러나 로빈슨은 높이 올라갈수록 그의 파괴적인 행동을 후회하면서 등반이란 큰 노력을 요구하면서도 재치가 필요하다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최초로 등반의 윤리적 논의(Climbing ethics controversy)가 탄생하였다. 이는 오늘날에 이어지고 있다.
Chrome molly로 생산된 다양한 훅이 사용되었다. 이본 슈나이더(Yvon Chouinard)은 다시 한 번 선도자가 되었다. 혁신자격인 슈나이더는 1970년 초 너트 혁명을 일으켰다. 스토퍼로 알려진 Aluminum wedges와 hexcentric 은 요세미테의 세밀한 부분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졌다. 이는 반복되는 장착과 제거에 의해 발생하는 피톤이 망가지는 것을 막아주었다. 다양한 사이즈와 모양의 Aluminum wedges와 hexcentric가 곧 시장에 쏟아져 나왔는데 아주 작은 크랙을 위한 믿을 수 없는 정도의 Crack’n’up도 포함되었다. 크린 크리아밍 과 해머 없이 하는 크라이밍이 새로운 유행이었는데, 많은 루트들이 너트 만을 사용하여 정복되었다.
얼마 안되어서 빌 포레스트(Bill Forrest)에 의해 가장 간단한 알루미늄 너트인 코퍼헤드가 소개되었다. 이것은 피톤 이래로 그 어느 것 보다 극한의 빅월등반에 혁신을 일으켰다. 실질적으로도 어려운 얕은곳에 피톤박는 기술을 없앴다.
70년대 중반에 캐밍 장치라는 하드웨어적 기술의 양적 도약이 있었다. 천재적인 그렉 로우(Greg Lowe)의 등장으로 오버행 크랙에서부터 덧장바위(flake)에 이르기 까지 등반이 가능하게 되었다 . 슬라이딩 너트는 거이 비슷한 시기에 기능적인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슬라이더 한 특성은 얇은(thinner) 크랙에 사용될 수 있으나 다른 캠에 비하면 완전성은 부족하였다.
만약 극심하게 어려운 루트가 70년대 유행이었다면 또한 편안한 인공루트도 유행이었다. 마이크 그래함(Mike Graham)은 절벽(cliff) 거주용인 접을 수 있는 야영침대(sleeping cot)는 이상적인 저녁 휴식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는 클라이머들이 에너지를 유지하도록 하고 테라스가 없는 극한의 루트들에서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빅월 등반가 들은 자기 자신에게 관대한 프리마돈나로 변하고 있었다. 즉 이전세대의 담력 같은 것이 없어 보였다. 가령, 이것이 사실이었다면, 위대한 산의 혹독한 환경에 기술을 적용한 사람들이 소수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전에 파타고니아, 파키스탄, 배핀아일랜드, 알라스카의 벽은 등반 불가한 대상이었지만 현재는우리의 발아래 있다. Fitzroy, Cerro Torre, Trango Tower, Uli Biaho, Asgaard, Mount Thor도 해당된다.
1980-90
이러한 화려한 장비(paraphernalia)이외에 그 밖에 무엇이 추가되어야 하는가? 유행은 크고 작은 장비 사용으로 옮겨졌다. 과거의 큰 oppsing cam 장비를 토대로 훨씬 작은 T.C.U.와 Triple Cam Unit가 범용화되었다. 스프링 작동 장금 장치 로써 관모양의 새 고안물인 빅브로 모두 off width cracks을 줄였고, 세로로 갈라진 틈(Chimney)을 쉽게 전환(diversion)되도록 압착한다. 그 밖에 현재까지 소개되고 있는 유용하고 새로운 툴은 다음과 같다. : A5 어드벤쳐에 의해 만들어진 버드빅. 이는 피톤과 같은 러프의 컨셉을 후킹 기능과 결합시켰다. 멍키파우(Monkey Paw)라 불리는 슬라이드 너트 또한 A5가 제작하였으면 이 시기에 출연하였다. 두 개의 소프트웨어 아이템이 예이츠 에 의해 소개되었는데, 등반시 Clip-in을 위해 sling하기 적당하고, 부실한 aid 장착이 풀어지는 것을 줄이는 것이었다.
새로운 빅월 루트는 자주 가는 지역 에서는 드문 것이었고, 소수의 독립적인 등반선이 출현하게 되었다. 루트들은 십자모양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또는 다른 루트의 일부를 사용하였다. 먼 지역의 빅월은 모험의 대상이 되었다. 중요한 등반은 파키스탄의 발토로 타워, 베핀아일랜드 의 거대벽, 인도의 산 단면에서 이뤄졌고, 파타고니아의 거대한 침봉에서 이뤄졌다.
The Future
스포츠 클라이밍의 인기가 더해감에 따라 많은 활동가들이 빅월 등반가의 기술영역으로 침투할 것이다. 참가자의 양적 확장이 기대된다. 이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빅월 로직의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한 편 전위적인 등반가에 의해 극한의 대상지가 개척되어질 것이며, 척박한 환경, 훨씬 더 높은 고도, 먼 지역 등 불가능하게 보였던 영역에 도전할 수 있는 기술을 완벽하게 만들 것이다. 풍부한 최신기술은 단지 유용한 것이 아니라 필수적인 것이다.
The rating system
인공 등반의 어려움을 가늠하기 위해 형태와 방법론의 변천사를 고찰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1960년 이전, 유럽 시스템 A1-5이 소개되었을 무렵 미국에서는 free climbing rating에 가까운 소수점을 사용하였다. 6.0을 가장 쉬운 것으로 6.9를 가장 어려운 것으로 범주화했다. 이 방법은 불필요하게 복잡했으며 유럽방식이 즉각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우선, A1은 격렬하지도 않고 서툴지도(awkward) 않은 완벽한 크랙(Perfect Clack)이었다. A2는 서투르고 격렬한 좋은(good crack)이었다. A3는 좀더 어려운 장비사용을 요구하였는데, 이는 추락의 영향력을 측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A4-5는 다소 까다로운 측면이 있었다. A4는 보편적으로 채택되었는데 몸무게만 지탱할 수 있는 1에서 3까지 장비 사용이다. A5에 대한 정의는 세계적인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이에 대한 두 가지 이론이 있다. 그 중 하나의 이론은 A5는 연속적으로 A4이상이라는 것이며, 나머지는 똑같이 측정된(weighted) 두 개의 장비 설치가 클라이머의 몸무게를 지탱하는데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자가 좀 더 많이 사용되었고 후자는 실행된 적이 거이 없다. 1974년 정도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출현하였는데, 60 foot fall (발길이 *60 약 15~18미터로 생각됨 60보정도 )이 A5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판도라 상자를 열었다. 몇몇 자기 중심적으로 운명을 정하는 평가 기준은 100 또는 150 foot fall이 A5를 구성한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A5+는 death fall이라고 했다. 이러한 평가 시스템은 이것을 적용하기 전에 사람이 사망한 이후로는 완벽히 불합리한 것이 되었다.
늦은 1980년에 이 척도의 파행적 운영에 대한 해결책이 등장하였는데 매우 일반적이고, 간단하면서도, 유머러스한 표현으로 문자축약(letter abbreviation) 형태였다: N.B.D.의 의미는 큰 문제 아님, 가장 쉬운 인공등반 임으로 해석된다(No Big Deal, Would cover all easy aid). N.T.B.의 의미는 서있기에 나쁘지 않다. 중간 정도이다 뜻으로 해석된다(stood for not to bed, the middle ground). P.D.H.는 매우 어렵다로 (Pretty Dam Hard)로 어려운 인공등반에 해당한다. 이 시스템은 어려움만을 측정할 뿐 피치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제외시키고 있다. 따라서 R.H.U Real Head Up (속어로 재수 없는 의미가 있는 것 같음. 역자)이 추가되었다.
이 시스템은 실용적이고 종합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찮은 측면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렇기도 했다. 이 척도를 사용한 첫 번째 테스트 루트에서 두 번째 등반 팀에서도 A1-A4로 회귀하는 등 새로운 컨셉을 무시했다. 이는 전체적인 아이디어는 부정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