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신라 건국의 모체인 사로(斯盧)의 6부 중 알천 양산촌을 다스렸던 표암공 휘 알평(謁平)을 시조로 받든다.
신라 말에 소판 벼슬을 지낸 진골(眞骨) 출신의 소판공 휘 거명(居明)을 1세조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여 왔다.
표암공이라는 호칭은 알평이 애초에 경주 박바위에 강림했다는 전설에서 취해진 것이다.
기원전 117년 한무제 원수6년 갑자에 하늘로부터 진한 땅의 표암봉인 박바위로 처음 내려오셨고 양산촌장으로 부족들을 다스리며 혁거세를 양육시켜고 신라 초대왕으로 추대하셨다.
6부 촌장의 의장으로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화백회의제도를 시행하셔서 오늘날의 민주주의 제도를 구현시키신 선구자였음을 호언 할 수 있다.
서기 32년 신라 3대왕인 유리왕 9년에는 진한 6촌을 6부로 개칭할 때 지금의 경주시 일원에 해당되는 양산촌을 급량부라 부르고 성씨를 이씨라고 사성하였다.
뒤에 경주라는 지명을 붙여서 경주 이씨(慶州李氏)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 * 당시에는 '경주' 라는 지명이 아니니까 아마 '사로' 나 '계림'이나 '월성'이라고 했으니까 '사로 이씨' 나 '계림 이씨' 나 '월성 이씨'라고 했을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서기 32년(신라 유리왕 9년) 유리왕이 다른 다섯 촌장들과 함께 사성하여 양산촌을 급량부로 개칭하고 그에게 이씨의 성을 내려 주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은 알평의 36세손으로 신라 진골 출신인 소판공 휘 거명을 중시조로 하고, 시조의 발상지인 경주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소판공 휘 거명은 신라말 때의 인물로 진골(眞骨) 출신이며 시조 휘 알평으로 부터 1000여년의 세계 실전으로 경주 이씨의 계대를 밝힐 수 없다가 고려말 익재 휘 제현의 묘비명에서 소판공부터 후대의 휘가 기록된 것을 알고 난 후부터 중시조로 하고 세수도 중시조부터 헤아리고 있다.
시조께서 박혁거세를 왕으로 옹립하여 신라를 건국한 해가 기원전 57년이고 지금이 2007년이니 모두 2064년이고 여기에 시조의 연세를 감안한다면 2100여년 전후의 내력이 우리 경주 이씨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