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한반도 전쟁 위기론 ◈
새해 들어 김정은의 광기(狂氣)에 찬 발언으로
한반도의 긴장감이 높아졌어요
이러다가 혹시 전쟁 나는 것 아니냐는 걱정도 하게 되지요
여기에 더해 미국 미들베리 국제연구소의 로버트 칼린 연구원과
시그프리드 헤커 교수는 “한반도 상황이 1950년 6월 초반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하다”고 주장했어요
1994년 1차 북핵 위기 당시 미 국무부 북핵 특사로 활동했던
로버트 갈루치 조지타운대 명예교수도
“2024년 동북아시아에서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경고했지요
이 전문가들의 공통점은 과거 북한과의 협상 경험이 있는 분들이지요
반면 2007년 이후 10년 동안 평양에서 근무한 셰퍼 전 독일 대사는
“1950년 이후 한반도 전쟁 위기가 가장 심각하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북한의 강경 태도는 오래된 협상 패턴”이라고 지적했어요
전쟁 위기론과 협상 패턴론이 대립하고 있지요
그럼 과연 2024년 갑진년은
1950년 경인년만큼 혹은 더 위험한지 따져보아야 하지요
우선 남북한의 군사력부터 비교해 보기로해요
1950년 3월 31일부터 4주간 김일성은 박헌영, 홍명희 등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에게 최종 남침 계획을 승인받았어요
모스크바의 러시아 연방 대통령 문서보관소에는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 승인을 집요하게 요청하는
전보 48통이 보관되어 있어요(웨더즈비 ‘다시 본 한국전쟁’ 1999).
당시 최강의 소련제 T-34 탱크 242대 지원도 확약받았지요
북한군은 야포 726문, 전투기 211대와 함께 각종 장비를 지원받아
기갑 전력을 증강하였어요
만주에서 국공(國共) 내전에 참전했던 조선족 병력 4만여 명 등
총병력 20만명이 전차를 앞세워 전면 남침을 감행하였지요
반면 남한은 국토 방위 전력을 전혀 갖추지 못하였어요
당시 남북한의 전력은 완전 비대칭이었지요
해방 후 미국의 대한(對韓) 군사 원조 정책(1948~1950)에 따라
10만명이 안 되는 국군의 기능은 ‘국내 치안 유지’였어요
전차가 단 1대도 없었고, 미국이 원조해 준 M8 장갑차 27대와
M2/M3 병력 수송용 장갑차 24대가 기갑 연대에 배치되어 있었지요
그러다 보니 남침 사흘 만에 북한군 주력 105 전차 부대가 서울을 점령하였어요
무기와 병력 면에서 중과부적이었고 불가항력이었지요
김일성은 1946년 3월 토지개혁으로 군량미를 확보하면서
1948년부터 남침을 단계적으로 준비하였어요
1949년부터는 모스크바를 뻔질나게 드나들며 스탈린의 재가를 채근하였지요
거기다가 1950년 1월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의
한반도 방위 제외 선언으로 남침은 시간문제였어요
미군 참전 시 중공(中共) 마오쩌둥의 참전 약속 확보만이
최종 변수로 남아 있었지요
김일성은 5월 25일 북경에서 인민해방군의 참전을 확약받았어요
이로인해 평양에 대한 중·소의 완벽한 백업이 형성되었지요
당시 서울의 시국은 아수라장이었어요
일부는 서울에서 평양의 김일성과 연락하며 남한 정국을 흔들었지요
남로당 박헌영은 무장 봉기와 테러를 선동하였어요
신생 민주주의 국가가 감당하기 어려운 혼란이었지요
해방 후 정국 혼란 속에서 국군도 체계가 잡히지 않았어요
남침 후 4개월이 지나서야 전차의 필요성을 절감한 국군은
미군의 M36 대전차 6대를 교육용으로 인수받아 전차 부대를 창설하였지요
그것도 전쟁이 발발하고 난뒤에 일이었어요
그러나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남북한의 군사력은 균형을 이루어
일진일퇴를 거듭하였지요
피를 흘리며 미군의 군사 교리에 따라 군령 체계를 구축하고
적을 격퇴할 각종 부대를 창설했어요
1951년 6월 이후 정전협정 체결까지 2년간은 38선을 중심으로 한
고지전(hill battle)이었지요
6·25전쟁에 참전한 미군 중령 페렌 바크는
“힘을 시험한 전쟁이 아니라 의지를 시험한 전쟁이었다”고 했어요
(‘이런 전쟁’, 1963).
그는 공산주의자들은 우세한 군사력으로
남한을 적화하려는 야망이 강했다고 평가했지요
특히 훈련받지 못하고 기강이 부족한 한국군과 미군의 피해가
적지 않았다고 한탄하고, 군(軍)은 내일 축구 시합에 나가는 선수들처럼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어요
그나마 미국을 비롯한 자유주의 세계가 지상군을 파견하여
즉각 대응한 것은 대한민국을 수호하려는 신의 가호였지요
전쟁 발발 후 70년이 지나면서 남북한 간에 다양한 변화가 일어났어요
미국 군사력 평가 업체 글로벌파이어파워(GFP)의
2024년 세계 군사력 평가 순위에서 한국은 5위에 올랐지요
반면 북한은 36위를 기록했어요
국방 예산 항목에서 한국은 약 53조원으로 11위,
북한은 4조6000억원으로 58위이지요
여기까지는 남한의 군사력이 북한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하지만 이 평가는 북한의 핵무기를 포함하지 않았어요
재래식 무기에서는 남한이 앞서지만 핵무기를 포함하면 이야기는 달라지지요
핵무기의 비대칭성(asymmetric)은 재래식 무기의 우세를 무력화하지요
한미 동맹의 확장 억제 전략으로 북한군의 핵 공격을 방어해야 하는 과제는
우리 안보의 심각한 취약점 이지요
핵에 대한 대응수단은 오로지 핵뿐이 없어요
이런 취약점을 보완하는 길은 굳건한 한미동맹으로
미군의 전술핵을 비치하는 길이지요
그래서 한미일 외교라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요
전쟁 수행 능력에서도 남한의 경제력은 북한을 압도하지요
최근 김정은은 묘향산에서 북한 지도부에게 지방 경제의 고난과
기본적인 물자 부족 등을 질책했어요
군수산업에 주력하고 인민 경제를 경시한 결과이지요
북한은 1946년 토지개혁 결과로 6·25 남침 직전 식량 생산량이
해방 당시와 비교해서 2배에 달하는 240만톤에 달했어요
전쟁 수행 능력이 구비된 1950년과 기초 생활 물자도
제대로 공급되지 못하는 2024년은 상황이 다르지요
한마디로 전쟁 수행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다만 작금의 국내 정치 분열은 해방 정국 당시 못지않게 우려스러워요
눈에 안 보이는 안보(安保)에서 정치권의 분열은 국가의 방어능력을
약화시키고 있어요
더욱이 종북 주사파가 의회권력을 쥐고있는 현 시점은
안보에 크나큰 허점일수 있지요
그런 와중에 김정은은 남한 영토 점령, 수복의 헌법 명기를 선언했어요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처럼 기습 공격에 그치지 않고
서해 취약 도서를 공격적으로 점령하는 비상사태가 발생할 수 있어요
이를 빌미로 핵 위협을 노골화 하면 회복하기 어렵지요
서해 지도를 펼쳐 놓고 꼼꼼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전쟁은 억지(deterrence)가 최우선이지요
싸우지 않고 이기는 전략이 상책(上策)이라 했어요
다만 ‘싸울 수밖에 없다면 이겨야 한다’는 것이
클라우제비츠 전쟁론의 핵심이지요
그래서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 했어요
평양은 모스크바와 베이징을 한 묶음으로 엮어서
한미일과 북중러의 신냉전 구도를 형성하고자 하고 있어요
철저히 훈련된 군사력을 바탕으로 스마트 외교를 추진한다면
적은 ‘치명적 타격’은 물론 국지적 도발도 감행하지 못할 것이지요
-* 언제나 변함없는 조동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