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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정균과의 새로왔던 만남을 다소 아쉽게 뒤로 하고 보스톤으로 돌아온 솔희는 토하고 피가 나올 정도의 강행군을 시작했다.
그녀에게 배당된 연주 스케쥴, 출장연주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제이와의 공동연주를 이룰수 있도록 노력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매일같이 개인연습실의 업라이트 피아노 앞에 앉아 연습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를 돌파하려고 노력했다.
“으아아악!!”
중간중간에 그녀는 홀로 있는 고독한 연습실에서 소리를 지르며 악보를 내던진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앉아 있기도 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피아노 주위를 빙빙 돌며 길게 한숨을 내쉬며 주먹을 불끈 쥐고 그녀의 가슴을 쥐어 뜯기도 했다.
“이봐, Everlyn! 아직도 학생인줄 아나? 내 회사가 아무나 들락날락하는데인줄 알았어? 학교 후배라고 써주었더니, 이 따위로 할려면 당장 때려치워!!~”
솔희가 어느날 제이의 회사에 연습을 위해 방문했을 때 젊은 백인여성 피아니스트가 제이에게 꾸중을 들으며 훌쩍거리고 있는 진풍경을 목격했다.
제이가 최근에 설립한 공연기획사는 소속 뮤지션들과 동등한 파트너쉽으로 계약했지만, 제이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휘해 갓 졸업하고 배출된 새내기 뮤지션들에게는 트레이닝을 시킨다는 독특한 방침을 세웠던 모양이다.
한눈에 보아도 20초 중반으로 보이는 미숙한 백인여성이 제이에게 혼나고 눈물을 찔끔대는 있는 모습을 보며, 솔희는 자기만 그런 호통을 듣고 야단맞는게 아니라는데서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제이, 저 여자 아이는 새로 들어온 애야?”
제이는 바로 에벌린이란 여자를 불러세워 솔희에게 인사를 시켜준다.
“아, 에벌린! 여기 선배한테 인사해, 민솔희라고 XX년도 석사과정 졸업생이고 나랑 동기동창이야. 나의 베프고 실질적 음악 파트너니깐 너도 이 여자와 잘 지내”
한눈에 봐도 귀엽고 예쁜 20대 미국여성 에벌린은 이번에 솔희와 제이가 졸업한 같은 콘서바토리 석사를 마치고 제이의 회사와 계약을 맺었는데 미국여자치곤 마음이 여리고 의존적으로 보이는 인상이었다.
(뭐야, 이제 새내기 졸업생이고 여기같은 스타트업에 왔으면 별볼일 없는 애쟎아? 백인 아이라 기회가 더 많을텐데 참 애잔하다)
그 어린 에벌린을 딱 이렇게 파악한 솔희는 시종일관 여유있는 표정으로 그녀의 금발머리에서 발목까지 한번 훝어본뒤 건성으로 인사를 나누고 제이의 연습실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가 제이와 둘만의 연습으로 돌입했다.
이렇게 일주일에 한번씩 제이의 사무실로 가서 공동연습을 할 때 한동안은 연이은 제이의 불호령에 솔희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쏙 빼곤 했다.
역시 제이의 성깔은 누구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에벌린이라는 후배겸 신입 뮤지션이 제이에게 혼나고 울어버린 것처럼 솔희 역시 제이에게 호된 꾸중과 모욕을 감수했다.
하지만 이들은 언제나처럼 정담과 키스로 연습을 마무리하곤했다.
솔희에게는 이렇게 야단칠때 야단치지만 바로 부드럽게 감싸주는 제이의 모습에 더욱 매료되었고 의지하고 싶어가는 마음이 자라났다.
서로 연습실을 방문할때마다 솔희는 제이의 연주를 주시하면서 오감에 육감을 더해 그의 감성을 읽어냈다.
솔희는 제이의 남성적인 파워는 따라갈수 없었지만 반면 타이밍과 감정을 녹여내는 연습을 했다.
제이는 그녀의 연습을 지켜보며 조언과 피드백을 제공해주었고 솔희는 섬세한 연주법을 연마하고, 제이의 연주와 자신의 연주를 하나로 어우르는 방법을 찾아갔다.
마침내 솔희는 제이와의 이중주에서 그의 파트를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녀의 연주는 더 이상 부족함 없는 소리가 되었고, 제이와 함께 연주하는 과정에서 함께 만들어지는 아름다운 음악의 하모니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호흡을 맞추고, 음악적인 대화를 나누며 눈으로 통한 신호조차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솔희는 점차적으로 제이가 원하는 스타일과 수준에 다가갔고 마침내 그녀의 얼굴에 환희의 웃음이 터져나왔고 제이는 큰 소리를 내어 박수를 쳐주었다.
그 둘은 일어서서 바로 서로의 허리를 안고 기나긴 키스를 나누었다.
(이게 바로 사랑이 음악을 만들고 음악이 사랑을 만들어가는거구나)
그녀는 자신의 음악적 발전과 함께 제이와의 사랑도 더욱 깊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서로의 열정과 음악에 대한 사랑을 통해 더욱 가까워지고 있으며, 그것이 리사이틀에 참여하는 큰 동기부여가 되었으며 그녀는 자신의 음악과 사랑을 제이와 함께 무대 위에서 나누게 될 때, 그 감정과 노력이 화려하고 감동적인 연주로 나타날 것임을 확신하며 기쁨에 가득 찼다.
토요일 밤, 솔희가 게스트로 참여하는 제이의 리사이틀을 열흘남긴 날 이들은 제이의 콘도에서 둘만의 자축파티를 정식으로 열기로 했다.
그녀는 제이와 보스턴에서 우연을 가장한 우연으로 만나던날 제이가 사준 웨딩드레스를 연상케하는 연미복을 입고 그녀가 가지고 있는 스킬을 총동원해 풀메이크업을 했다.
촛불을 켜놓고 제이가 준비해 놓은 스테이크와 샐러드와 와인을 곁들인 식사를 한뒤 돌연 제이가 다른 제안을 했다.
“솔희! 노래 한곡하자”
“노래? 새삼스레, 나 노래 못해”
“넌 그냥 반주만 해주면 되, 넌 그러면서 내 노래를 엔조이하기만 하면 되”
솔희가 제이의 그랜드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 이미 슈베르트의 An die Musik(음악에게)라는 악보가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한치의 망설임없이 초견으로 서정적인 인상의 그 짧은 전주를 시작했고 맑고 청아한 음성의 제이는 중간중간에 솔희와 아이 컨택을 해가면서 이 사랑의 가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당신, 아름다운 예술, 얼마나 많은 회색 시간들에서,
내 삶의 엉망진창한 단조로움에 얽매이는 곳에서,
너는 나의 마음을 따뜻한 사랑으로 불태웠어,
나를 더 나은 세상으로 끌어 올려 주었지!]]
완벽한 독일어 딕션과 호흡법을 구사하는 제이의 노래는 성악전공자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솔희는 이 가볍지만 서정적인 곡에 지금껏 제이와 함께 느낀 사랑을 담아 반주를 해주며 중간중간 제이의 얼굴을 살폈다.
그때마다 마주쳐지는 두 사람의 눈빛은 서로를 향한 희망과 기대로 가득차 있는 듯 했다.
제이의 노래와 솔희가 해주는 반주가 끝나는 순간 솔희는 바로 뒤이어 드뷔시의 "Clair de Lune"라는 짧은 곡을 악보도 없이 즉석에서 연주하기 시작했다.
곡의 한국어명은 “달빛”, 유달리도 달이 밝은 이 밤의 사랑에 어울리는 연가였다.
난해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단순하지 않고 변화와 변주가 많이 있고 부분적으로 몽환적이기까지해 솔희의 성격과 맞닿는 곡이기도 했다.
그녀는 길고 하얗고 예쁜 손을 살짝 교차할 듯 말 듯하는 순간마다 제이를 올려다 보았고 그는 연습실에서의 선생같은 태도가 아니라 자기에게 헌정되는 음악에 감동한 표정으로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제이는 솔희에게 가곡을, 솔희는 제이에게 답례로 서정적인 피아노곡을 서로 헌정한뒤 낭만적이고 열정적인 춤을 추었다.
“솔희, 아프니? 내가 좀더 배려해줄걸 그랬지?”
“아냐, 내 표정이 아픈걸로 보여? 너 숫총각이니? 사랑하는 제이랑 하나가 되는 순간의 아픔은 아픔이 아니야”
“이제야 솔희가 섹스를 제대로 즐길줄 아는구나”
“아유, 이 호색한!”
솔희와 제이는 침대에 포개어져 있었고 둘이 하나가 되는 순간 솔희가 약간 아픈 티를 냈던 모양이다.
하지만 솔희의 말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심이었다.
어느 누구도 제이의 독특한 그것을 흉내낼수 없었고 솔희는 이제 그것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제이와 밤을 지낼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엘에이에 가서 어쩔수 없이 의무적으로 정균의 품에 안겼을때의 편안함과 안도감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온 몸이 녹아버릴 임팩트였기 때문이다.
솔희는 제이의 겨드랑이 사이에 두 팔을 끼워놓고 두 사람은 서로 맞물린 입술을 떨어뜨리지 않은채 몸을 회전시켰으며 그녀의 그 아름다운 긴 웨이브 펌 머리카락이 흩어지고 있다.
두어차례 천장을 향해 등졌던 솔희는 다시 침대 시트에 누운 자세가 되어 제이를 안고 그의 목과 볼을 어루만져주며 길죽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벌써 쉬는거야, 제이?”
“아니, 그냥......”
“또 선수 수법 나오네, 나 이제 니가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다 알어, 나 애태울려고 그러는거”
“.......그게 아니라, 솔희, 방금 하나되는 순간 아픔은 아픔이 아니라고 한 말을 듣고 넌 참 표현도 찰지고 문학적으로 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어”
“그게 무슨.......! 아유.......하긴 내가 어릴 때 시낭송 대회도 나가고 초등학교 대표로 글짓기 대회도 나가긴 했지. 피아노를 안 했으면 국문과나 문예창작과갔을걸?”
이들은 몸의 행위를 멈춘채 서로의 볼을 만지고 서로의 머릿결을 다듬어 주며 조금 센티해진 대화를 나누고 있다.
솔희는 제이의 뜻밖의 칭찬에 어이가 없어하면서도 어린아이처럼 기세등등해서 자기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제이라는 사내는 솔희가 반하지 않을래야 반할수 없는 사내인것만은 확실한 것이, 제이는 솔희에게 이런 상태에서의 사랑의 시를 부탁했다.
“그럼 나한테 시 하나 헌정해줄수 있니?”
“뭐?! 지금 이 모냥으로?”
“내일 아침이면 너나 나나 정신없이 바쁜 시간일걸? 지금 이 분위기 아니면 평생 못들을 것 같아.”
“참, 별 이상한 포지션에서 별 이상한 요구를 다 받네? 너란 아이는..........알았어, 그대신 이 상태 고대로 고정시키고 있어야된다. 내 몸에서 이탈하거나 섹스를 다시 시작하면 그땐 영영 기회가 없을줄 알어!”
솔희는 포만감과 평안감을 머금은 미소를 짓고 눈을 감았고 그녀의 두 팔을 제이의 등을 가볍게 감쌌다.
그리고 약간 낮은 톤의 말로 즉시 시를 지어내기 시작했다.
[[피아노의 선율이 나를 너에게로 이끌었어
저 달빛 아래 네 눈이 반짝였어
다람쥐가 되어 동굴 속을 세상으로 삼다가
서로의 마음이 하나로 녹아있어
드높은 벽 앞에 서있던 우리 둘
그 벽을 뛰어넘으며 나와 너
음악이 사랑이 되어 빛나는 달밤에
함께 춤을 추며 시간을 멈춰
나만이 그대를 갖고싶어하는 마음
그런데 너의 자유는 너의 생명
우리 둘의 사랑은 자유의 노래
네가 있는 그곳이 내 모든 세상
우연과도 같은 만남이었지만
모든 것이 피아노 선율과 함께
사랑이 되고 운명이 된 순간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아름다워]]
눈을 감은채로 솔희는 그 특유의 아름다운 미소를 제이에게 보내는 것으로 시를 마무리하고 눈을 서서히 뜬다.
제이는 시를 배출하는 아름다운 솔희의 입술에 다시 키스하고 싶은 욕망을 잠시 유보하며 감동받은듯한 표정으로 솔희의 몸 위에서 그녀의 약간 허스키해진 톤의 시를 감상했다.
(제이, 이 남자, 정말 예측을 불허한다. 뻔하다 싶으면 반전이 있고, 내가 스스로 제이를 위해 남편에게도 안해준 음악을 헌정하게 만들고 시까지 지어 바치게 하다니.......)
솔희는 그녀가 스스로 연주곡을 헌정했으며 다시 이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는 포지션에서 서정적인 사랑의 시를 바치고 있는 그녀 스스로를 대견해 했다.
거기에 솔희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피아노 연주와 시가 자연스럽게 나오도록 유도한 제이에게 깊이 매료되었다.
매달리듯, 부탁하듯 남편을 위한 피아노 연주 한번만 해달라고 매달리던 정균이 잠깐 생각났다.
평소같으면 이 시간에 온통 영혼을 의탁하며 남편 따위는 전혀 생각이 안 나야 정상인데, 이 극적으로 행복한 순간에 정균이 떠오르다니.
(정균아, 참한 너의 성실성은 잘 알아. 하지만 당신은 여자를 다룰줄 몰라. 특히 감성적인 아내와 어떻게 소통하고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해 정균이 너는 땅바닥에 머물러 있거든? 네 방법은 날 부담스럽게 할 뿐이야. 그간 너를 그저 훌륭한 가장으로 평가했지만 그것도 아닌것 같아. 무릇 가장이라면 아내의 예민하고 연약한 심기를 살피고 정확한 때와 분위기에 맟추어 스스로 영혼과 몸을 열도록 아내를 다스렸어야 했어.)
솔희는 남편 정균을 순간 떠올리며 그를 향한 독백을 던지고 다시 제이에게 집중한다.
이들은 이 달이 비치는 밤을 본격적으로 불태우기 시작했다.
“Oh, Shit!, 이래서 예술가입네 하는 것들은 예술한것들끼리 살아야 한다니깐!! 아으으"”
경사가 급한 바윗덩어리를 만나는 순간 정균의 뇌리에 다시 솔희가 제이라는 남자와 침대 위를 딍구는 동영상이 자동으로 재생되자 그는 페닯을 있는대로 밟았다.
“나뭇꾼님!! 기어 1x1로 빨리 바꾸세요!”
다급한 동호회원들이 뒤쫓아 오며 정균에게 소리쳤다.
그는 두 엄지손가락으로 기어변속을 한뒤 다시 페닯을 쎄게 밟는다.
“야이 X새끼야, 빨리 겨 올라가!”
그는 큰소리로 외치며 결국 그 바위를 한큐에 넘어버렸다.
“으아하하하하! 넘었다, 넘었어!! 우하하하하하핫”
그는 미친놈처럼 산이 떠나가라고 웃어 재끼고 있었다.
산기슭에서 다들 쉬는 사이에 방금 물을 벌컥벌컥 마신 정균은 호흡을 정돈시키며 담배를 피워물었다.
그 옆에 여러 동료들이 자전거들을 여기저기 널부러 뜨리고 함께들 쉬고 있었다.
그중 동호회의 고참이면서 라이딩 고수를 자처하는 한명이 정균의 옆에 앉으며 담배한대를 청했다.
“어유, 건강살리러 온 양반들이 꼭 이런 찬스에 담배들을 피우실까? 도루묵이라구요, 그러면~~”
남편과 함께 온 여성라이더가 정균과 그 고수를 향해 잔소리를 했다.
그 말에 아랑곳없이 고수라는 자는 정균에게 심각하게 충고를 했다.
”MTB는요, 요령입니다. 물론 기초체력, 힘! 중요하죠. 그런데 나뭇꾼님처럼 힘과 완력으로만 하면 오래 못가요. 이만기나 최홍만이 저희 클럽에 와도 똑같은 조언을 드릴거라고 자신있게 말씀드릴수 있죠“
”그래도 스트레스가 좀 풀리네요. 신기하기도 하구요. 내가 자연을 극복할수 있다는게 말입니다“
”마 그게 바로 사나이들이 살아가는 맛 아니겠습니까?“
”어이, 깡초님! 여기 여성 라이더분들도 계시는데 그렇게 말하면 섭섭해들 하시지, 안그래요?“
정균은 얼마전부터 산악자전거 동호회에 가입해서 값비싼 장비를 구입하고 주말마다 라이딩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산을 타고 넘을 때 자주 넘어져 여기저기 부상을 입기도 했었다.
언젠가는 실수로 자전거와 함께 계곡에서 심연을 알수 없는 바닥으로 굴러 몇바퀴를 통나무처럼 굴렀을때, 그 순간 차라리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솔희가 동부에서 다른 놈과 나뒹굴고 있으리라는 상상을 산과 바위를 타고 넘는 희열을 느끼는 순간에는 잊을수가 있었고 분노와 무력감도 한동안 날려 버릴수가 있었다.
산을 타는 사람들을 만나니 그들의 인심도 좋아서 라이딩후 그들과 조촐한 식당에서 부글거리는 전골과 소맥을 마실때의 기분은 더 이상 부러울 것 없었다.
산악자전거를 타고 극한의 피로도에 휩쌓일때 생각나는건 오직 지글거리고 기름진 라면이나 짬뽕, 부대찌개 밖에 없었다.
”자, 한잔 합시다!! 오늘의 성공적인 라이딩을 자축하면서!“
정균과 10여명의 라이더들 앞에는 부대찌개 전골과 곱창전골이 각각 두 개씩 놓여 있었고, 종업원에 의하여 소주와 맥주들이 서브되고 있다.
”근데 신입이지만 너무 열심히 타시는 나뭇꾼님, 저희 충고 새겨 들으세요. 소싯때 태권도하신 생각으로 이거 하면 큰일납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스트레스 받을 일들이 좀 있어서요“
”하하......자, 일단 한잔 받으시고! 다들 그런 사연들이 있으세요. 몸적으로 당뇨나 혈압, 콜레스트롤 있으셨던 분들 이곳에 오셔서 나으시지만 우울증 있는분도 치료되셨어요. 고민있는 분들은 라이딩 후에 문제 해결 방안이 생기는 경험이 있으셨거나 아니면 문제에서 초탈하게 되셨다는 분들도 있구요“
정균은 소맥을 받아 마시면서 오랜만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뒤늦게 도착해서 가게 앞에 차를 바로 주차한 부부 라이더가 바깥 유리를 통과해서 보인다.
아무렇지도 않게 교대로 서로의 옷과 얼굴에 묻어난 흙을 털어주는 모습.........
다들 그들 부부에게 빨리 들어와 앉으라고 소리치지만 그는 그 부부의 행위를 멍하니 지켜보았다.
부부 라이더는 솔을 준비해서 서로의 신발까지 털어준다.
(이것이 부부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이군.......)
정균은 음악가 솔희를 그녀의 호화로운 콘서트장에 데리고 다니며 턱시도 차림으로 오픈디너나 뒷풀이 행사에서 칵테일잔을 들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인사받는 그녀의 옆시중을 드는 것, 이것이 그의 결혼생활의 보람이며 자신의 성취지위라 여겨왔었다.
하지만 저들 부부 라이더처럼 아무렇지도 않고 극히 평범해 보이는 곳에 결혼생활의 보람과 사랑의 아름다움, 부부의 정이 숨길수 없이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저들의 저 모습은 나는 가질수 없는거겠지. 내 선택이었으니깐, 내 허영심 때문이었으니깐)
볼일을 마친 부부가 비워둔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을 때, 정균의 왼쪽 옆자리에 앉게 된 그 여성 라이더가 정균에게 호기심이 있는 듯이 그의 닉네임을 물었다.
”나뭇꾼님, 왜 닉을 나무꾼으로 지으신건가요?“
”그냥요. 자연을 생업삼아 즐기는 사나이가 부러웠다고나 할까요?“
”그런 의미가 있었군요? 웬지 나뭇꾼이라면 선녀와 나뭇꾼 이미지가 생각이 나서요, 호호“
그녀는 정균의 마음속 깊은 곳을 바로 찔렀다.
그가 아이디를 나뭇꾼으로 설정한 것은 깊은 생각을 해서 정한 것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솔희에게 보스톤행 허락을 한 것부터가 선녀에게 날개옷을 준 것이고, 지금 그의 처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울부짖는 수탉으로 변한 나뭇꾼이 된 것이다.
다들 운전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음주는 간단한 반주로 마시는대신 그 남편은 아내를 믿고 꽤 과음을 하고 있었다.
엉뚱하게도 정균은 저 남편의 주정부림부터가 부러워진다.
부부동반으로 술마시는 자리 같이 가서 양껏 마시고 아내가 운전해주는 상황은 고사하고 정균 인맥 쪽의 모임엔 아예 아내 솔희가 참석을 안해 왔으니깐.
귀가한 정균은 자전거를 거라지에 걸어 놓고 찬물로 샤워를 했다.
새벽에 솔희에게 한차례 전화를 했지만 보이스모드로 바로 넘어갔고, 정균은 그녀에게 10일후 보스톤으로 간다는 메시지를 카톡으로 넣은채 아침 라이딩을 다녀왔다.
스마트폰을 체크해 보니 아직 읽지 않은 상태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일요일 아침이고 하니 그 제이라는 놈과 같이 있을 것이 뻔했다.
정균은 아까 운전 때문에 소맥 딱 두컵을 했던 것이 억울해서 간단한 마른 안주를 꺼내고 냉장고에 보관중인 21도짜리 빨간 라벨 소주를 꺼냈다.
하지만 이번 음주는 절망과 고독 속에 퍼부어 마시는 술이 아닌 자신을 거울로 비추어보며 자신의 잠재의식을 이끌어내기 위한 조용한 의식이었다.
원래 정균은 상당히 지적이고 논리적이고 경우에 따라 냉철한 사내였다.
오직 솔희 앞에서만 모든 사고회로와 언변이 마비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아내 솔희와 떨어져 있는 기간에 고독과 싸우며 진정한 자기 자신을 대면해 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의 춘계 휴가겸 보스톤행이 10일 남아 있다.
그가 달라진 것은 그전처럼 보스톤행을 앞두고 흥분되고 기대되던게 아니라 정말 초탈한 사람이 된듯하다.
한잔 술에 비친 그의 모습, 못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솔희의 이상과 기대에 미치던 훈남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안다.
(얘! 결혼전에 키스하자고 해서 어쩔수 없이 눈 질끈 감고 웃는 모습으로 연기하면서 입술 내주긴 했어. 결혼하면 습관처럼 키스해야 되는데 앞이 깜깜하더라고. 그래도 내성이 생겨서 적응은 되더라. 얼굴이랑 키부터가 원래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어쩌겠니? 결혼은 현실이니깐)
신혼초에 우연히 엿들었던 솔희와 그녀 절친과의 통화였다.
정균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결혼생활 속에 모든 것이 녹아들 것이라는 근거없는 신념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녀의 의무를 최소화한 결혼생활, 혼외정사, 이제는 장기별거와 장기외도 그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었던 대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정균은 또 다시 솔희를 마음 속으로 비난하기를 멈춘다.
솔희를 감싸기 위해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정균 자신에게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찾아 내었기 때문이다.
부부라이더의 자연스럽고 소박한 모습을 목격한후, 그가 추구했던 결혼생활은 외모가 화려한 음악가 아내의 옆에 서 있는 것이었다는 것을 인정안할래야 안할수가 없었다.
그런 결혼생활에는 댓가가 따르는 법, 그런 여성이 과연 남편에게 헌신할 것인가? 하다못해 정조라도 지킬 것인가?
정균은 자신이 헌신하고 관리하면 그럴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람은 태엽로봇이 아니라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솔희는 성공하면 헌신적인 아내가 되겠다고 수차례 다짐했지만, 그는 결혼당시 음악가로서 새출발을 하던 솔희의 트로피 허즈번드에 불과했다.
그녀가 인지도를 획득한 피아니스트가 된다면 그녀 옆자리의 대형 트로피로써 정균은 어울리지 않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가 그녀에게 보스톤행을 허락한 것도, 솔희의 나이와 실력으로 분명 현실을 깨닫고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실제로 솔희는 실력이 향상되고 있는건 사실이었고 더 높은 가능성에 직면해 있다는 것도 알수 있었다.
그 제이라는 남자는 아마도 성공가도로 가는 도중의 일시적인 길벗일지, 아니면 그녀의 결혼후 만난 진정한 인연일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제이와의 남자와의 관계 여부를 떠나 곧 정균 그 자신의 쓰임새가 다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독하지도 연하지도 않은 21도의 술은 정균이 흥분상태나 어두운 상태로 치닫는 것을 막아주며, 얼마 남지 않았을 사랑과 결혼의 종말을 담담이 앉아서 기다리는 그를 위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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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또 다시 감사드려요
잘 보았습니다
감사 합니다
늘 잘 보아 주셔서 저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