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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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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주목(綾州牧) |
동쪽으로 동복현(同福縣) 경계까지 30리 서쪽으로 남평현(南平縣) 경계까지 17리 남쪽으로 장흥부(長興府) 경계까지 44리 북쪽으로 화순현(和順縣) 경계까지 12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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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리(坊里) : 10면 |
주내(州內) : 편호(編戶) 619호(戶)이며, 남자는 1,151명, 여자는 934명이다. 동면(東面) : 관문(官門)으로부터 6리에 있으며, 편호(編戶) 582호이며, 남자는 1,295명, 여자는 1,100명이다. 상동변면(上東邊面) : 관문(官門)으로부터 20리에 있으며, 편호(編戶) 494호이며, 남자는 1,111명, 여자는 897명이다. 하동변면(下東邊面) : 관문(官門)으로부터 40리에 있으며 편호(編戶)는 473호이며, 남자는 932명, 여자는 878명이다. 서변면(西邊面) : 관문(官門)으로부터 17리에 있으며, 편호(編戶)는 468호이며, 남자는 1,001명, 여자는 848명이다. 남일면(南一面) : 관문(官門)으로부터 7리에 있으며, 편호(編戶)는 712호이며, 남자는 1,388명, 여자는 1,122명이다. 서이상면(西二上面) : 관문(官門)으로부터 20리에 있으며, 편호(編戶)는 364호이며, 남자는 715명, 여자는 813명이다. 서이하면(西二下面) : 관문(官門)으로부터 30리에 있으며, 편호(編戶)는 368호이며, 남자는 628명, 여자는 842명이다. 서일면(西一面) : 관문(官門)으로부터 10리에 있으며, 편호(編戶)는 227호이며, 남자는 435명, 여자는 474명이다. 북면(北面) : 관문(官門)으로부터 7리에 있으며, 편호(編戶)는 611호이며, 남자는 1,195명, 여자는 968명이다. 편호(合編)를 모두 합하면 4919호(戶)이며, 남자는 9,851명, 여자는 8,876명이다. 이것은 기유장적(己酉帳籍)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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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道路) |
동쪽은 동복현(同福縣)까지 50리 보성군(寶城郡)까지 70리 서쪽은 남평현(南平縣)까지 30리 남쪽은 장흥부(長興府)까지 100리 북쪽은 화순현(和順縣)까지 20리 북쪽으로 서울(京都)까지 778리 8일 반의 노정(路程) 북쪽으로 감영(監營)까지 280리 3일 노정 남쪽으로 병영(兵營)까지 100리 1일 노정 동쪽으로 좌수영(左水營)까지 240리 2일 반의 노정 서쪽으로 우수영(右水營)까지 230리 2일 반의 노정 동쪽으로 통영(統營)까지 540리 6일의 노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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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치연혁(建置沿革) |
본래 백제(百濟) 이릉부리군(爾陵夫里郡) 혹은 죽수부리(竹樹夫里), 혹은 연주부리(連珠夫里)라고도 하며, 신라(新羅)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고 고려(高麗)초에 나주(羅州)에 소속되었다. 인종(仁宗)21년 현령(縣令)을 두었다. 본조(本朝) 태종(太宗)16년에 화순현을 합쳐서 순성현(順城縣)으로 고쳤다가 얼마 안되어 각각 복구시켰다. 인조(仁祖)10년에 인헌왕후(仁獻王后)의 본향이라고 하여 능주목으로 승격시켰으며, 신사(辛巳)년에는 토포사(討捕使)를 겸하였다. 현종(顯宗) 갑진(甲辰)에 나주 우영장(右營將)으로 이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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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명(郡名) |
이릉(爾陵) 죽수(竹樹) 연주(連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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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승(形勝) |
협곡이 가깝고 벽지(僻地)이나 계곡과 산이 있어 경관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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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官職) |
목사(牧使) : 문관·음서 정3품 순천진영(順天鎭營)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2명 군관(軍官) 15명 아전(衙前) 60명 지인(知印) 18명 사령(使令) 17명 관노(官奴) 25명 비(婢) 2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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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山川) |
운산(雲山) : 화순 천운산(天雲山)에서 나와 능주의 주맥으로 남쪽 1리(里)에 있다. 중조산(中條山) : 화순 천운산 아래 산기슭에 있으며 주의 동쪽 46리에 있다. 여점(呂岾) : 중조산 아래 산기슭에 있으며 주의 동쪽 46리에 있다. 화악산(華岳山) : 여점에서 나와 주의 남쪽 40리에 있다. 천불산(千佛山) : 화악산 아래 산기슭에 있으며 주의 서쪽 25리에 있다. 해망산(海望山) : 망일산(望日山)에서 나와 주의 서쪽 20리에 있다. 망일산(望日山) : 화악산 아래 산기슭에 있으며 주의 서쪽 25리에 있다. 비봉산(飛鳳山) : 해망산에서 나와 주의 서쪽 3리에 있다. 왜성산(倭城山) : 화악산에서 나와 주의 남쪽 15리에 있다. 옛 성터가 있는데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서 쌓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이다. 연주산(連珠山) : 화순 천운산에서 나와 주의 동쪽 2리에 있으며, 주의 안산(案山)이다. 금오산(金鰲山) : 화순 천운산에서 나와 주의 동쪽 7리에 있다. 종가산(鍾加山) : 광산(光山) 무등산(無等山)에서 나와 주의 북쪽 15리에 있다. 석천산(石泉山) : 무등산에서 나와 주의 북쪽 20리에 있다. 차의천(車衣川) : 주의 북쪽 5리에 있으며, 여점(呂岾)에서 근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고을 앞을 지난다. 또한 동북쪽으로 남평의 북쪽을 지나서 나주 광탄(廣灘)으로 흘러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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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姓氏) |
구(具) 능주(綾州) 정(鄭) 하동(河東) 문(文) 남평(南平) 조(曺) 창녕(昌寧) 주(朱) 능주(綾州) 양(梁) 제주(濟州) 민(閔) 여흥(驪興) 이(李) 공주(公州) 이(李) 광산(光山) 이(李) 전주(全州) 이(李) 성주(星州) 송(宋) 신평(新平) 안(安) 죽산(竹山) 남(南) 의령(宜寧) 박(朴) 순천(順天) 박(朴) 함양(咸陽) 박(朴) 충주(忠州) 김(金) 청도(淸道) 김(金) 남해(南海) 김(金) 광산(光山) 김(金) 영광(靈光) 배(裵) 대구(大丘) 장(張) 흥덕(興德) 오(吳) 보성(寶城) 최(崔) 강화(江華) 최(崔) 경주(慶州) 정(鄭) 영광(靈光) 서(徐) 이천(利川) 홍(洪) 나주(羅州) 홍(洪) 풍산(豊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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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風俗) |
검소하고 순박한 기질로 질박하고 사치가 적어 예로부터 순후지향(淳厚之鄕)이라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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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묘(壇廟) |
사직단(社稷壇) : 주의 서쪽 7리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주의 서쪽 5리에 있다. 여단( 壇) : 주의 북쪽 5리에 있다. 죽수서원(竹樹書院) : 주의 동쪽 3리에 있다.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를 배향(配享)하며, 사액(賜額)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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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해(公 ) |
객관(客館) 아사(衙舍) 향사당(鄕射堂) 훈련청(訓練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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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언(堤堰) |
가을제(加乙堤) : 둘레(周圍)는 965척(尺)이고 깊이(深)는 6척(尺)이다. 연지제(蓮池堤) : 둘레는 2263척 8촌(寸)이고 깊이는 6척 5촌이다. 광대촌제(廣大村堤) : 둘레는 756척이고 깊이는 6척이다. 면동제(免洞堤) : 둘레는 693척이고, 깊이는 4척이다. 운주동제(雲住洞堤) : 둘레는 493척 5촌이고, 깊이는 5척이다. 지동제(池洞堤) : 지금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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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倉庫) |
읍창(邑倉) 군기고(軍器庫) 대동고(大同庫) 수미고(需米庫) : 이상은 모두 읍내에 위치하고 있다. 동창(東倉) : 주의 남쪽 25리에 위치하고 있다. 서창(西倉) : 주의 서쪽 25리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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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산(物産) |
석류(石榴), 자기(磁器), 감나무(枾), 꿀(蜂蜜), 대나무(竹), 전죽(箭竹), 차(茶), 송이(松 ), 지황(地黃), 천남성(天南星), 맥문동(麥門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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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량(橋梁) |
대교(大橋) : 주의 북쪽 15리에 있다. 입교(笠橋) : 주의 남쪽 20리에 있다. 둔전교(芚田橋) : 주의 동쪽 5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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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원(驛院) |
인물역(人物驛) : 주의 남쪽 25리에 있다. 노(奴) 48명 비(婢) 7명 마(馬) 10필(匹), 경양(景陽)에 속하였다. 이양원(李陽院) 여점원(呂岾院) 부락암원(浮落巖院) 대림원(大林院) : 이상은 모두 지금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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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정(樓亭) |
봉서루(鳳棲樓) : 객관(客館)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영벽정(映碧亭) : 연주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청흥정(淸興亭) : 주의 북쪽 3리에 있다. 송석정(松石亭) 매화정(梅花亭) : 모두 폐지되었다.
제봉서루(題鳳棲樓) : 봉서루에 부쳐
연주산(連珠山) 위의 달은 소반 같은데 초목에 바람이 불지 않고 이슬이 차구나 천뭉치 솜같은 구름 모두 없어지려 하고 한 무더기 공문서는 볼 필요가 없네 시절은 다시 중추(中秋)의 아름다운 것을 깨닫겠는데 손의 회포 누가 오늘밤 위안 될 줄 알았으리 갈 길은 또 서쪽 바다 따라 돌아가니 손가락 끝으로 장차 게(蟹) 배꼽이나 쪼개리라 【점필제 김종직】
물과 하늘은 아득한데 지세는 평탄하고 날아갈 듯 솟은 누각 바람따라 서늘하다 땡볕 더위라서 갈포적삼이 마땅하고 물과 산은 아득한데 지세는 평탄하고 졸속행정 원성 많아 원님 예우 박약한데 자식처럼 아끼는 마음에 고을백성 편안하네 저 많은 푸른 대나무는 금빛으로 부서지고 나 홀로 서성이며 둥근 달빛을 읊노라 【관찰사(觀察使) 유득일(兪得一)】
동각(東閣) 좁은 길 다시돌아 찾아드니 가을 뜨락에 낙엽소리 쓸쓸도 하다 앞 산 저문 비는 툇마루에 들쳐가고 바람벽에 적힌 시를 촛불 들고 바라보네 몸은 병 들어 거동의 괴로움을 알겠고 감회가 깊으니 술잔으로 달래네 아득히 18년간의 일을 다시 생각하니 풀섶에 맺힌 찬이슬 눈물 섞여 동그랗다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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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寺刹) |
쌍봉사(雙峰寺) : 주의 동쪽 중조산에 위치하고 있다. 운주사(雲住寺) : 지금은 폐사 되었다. 개천사(開天寺) : 주의 남쪽 천불산에 위치하고 있다. 인량사(人良寺) : 지금은 폐사 되었다. 석천사(石泉寺) : 지금은 폐사 되었다. 용암사(聳巖寺) : 지금은 폐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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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적(古跡) |
품평소(品坪所) : 주의 남쪽으로 30리에 있다. 금정(金井) : 주의 동쪽으로 10리 떨어져 있다. 금오산 바위 사이에 두 개의 우물이 있는데, 금색을 띤 자라가 나왔다고 하여 금정이라 하였다. 가물었을 때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내리고, 또한 석성(石城)의 흔적이 남아 있다. 현학정(玄鶴亭) : 주의 남쪽 15리에 있으며, 강 위에 있는 암벽 높이가 수백 척이나 된다. 검은 학이 와서 머문다고 하여 현학암(玄鶴巖)이라 하였고, 암벽 밑면에 "퉁소 소리에 달빛이 휘황하니 학을 찾아 낚시터로 향하네"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운주(雲住) : 주의 남쪽 25리에 있으며, 천불산 좌우의 산마루에 석불과 석탑이 각각 천 개씩 있다. 또한 석실 안에는 석불 2기가 서로 등을 대고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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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人物) |
<고려시대> 구민첨(具民瞻) :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동평장사(同平章事)에이르렀다. 덕이 높아 사람들이 숭앙하였다. 구예(具藝) :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이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에 이르렀다. 주열(朱悅) : 고종(高宗) 때에 과거에 합격하였고, 나주(羅州)·정주(靜州) 두 고을과 승평(昇平)·장흥(長興) 두 부(府)에 나가 다스려 모두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후 충청(忠淸)·경상(慶尙)·전라(全羅)에 연달아 안렴사(按廉使)로 나아가 위명을 날로 떨치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공경했다. 관직이 지도첨의부사(知都僉議府事)에 이르렀다. 성품은 강직하고 엄정하였으며 청렴하고 검소하였다. 문장이 풍부하고 필법이 또한 기이했다. 시호(諡號)는 문절(文節)이다.
구치관(具致寬) : 구예(具藝)의 후손으로 과거에 합격하였다. 세조(世祖)때 좌익공신(左翼功臣)으로 능성부원군(綾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성품은 바르고 엄하며 맑고 근신하여 산업(産業)을 일삼지 안았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정여해(鄭汝諧) : 호는 둔재(遯齋)이며, 문충공(文忠公) 지연(芝衍)의 후손이다. 점필재 김종직에게 사사(師事)했으며 한훤(寒暄)·일두(一 ) 등과 더불어 서로 학문을 강마(講磨)하였다. 성종 경자(庚子 : 1480)에 성균관 진사가 되었고, 효렴(孝廉)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지평(持平)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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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孝子) |
구두남(具斗南) : 성균진사(成均進士)를 지낸 민첨(民瞻)의 후손이다. 어버이를 극진히 섬겨 효도를 다하였으며, 상(喪)을 당해서는 예절에 따라 장사를 지냈기 때문에 고향사람들이 천거하여, 중종(中宗) 갑진(甲辰:1544)에 공릉참봉(恭陵參奉)에 제수되어 광흥봉사(廣興奉事)에 이르렀다. 배윤덕(裵允德) : 성품은 인정이 많고 효성스러웠다. 일찍이 모친이 병이 들자 슬퍼함이 도에 지나칠 정도였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져 선조(宣祖)가 어필(御筆)로 이름을 벽위(壁上)에 써 주었다. 삼년의 상(喪)이 끝나기를 기다려 특별히 중부참봉(中部參奉)에 제수하였다. 양위남(梁渭南) : 성균진사(成均進士)이며 팽손(彭孫)의 손자이다. 부친이 병환이 있자 극진하게 보살폈고, 상(喪)을 당하자 예(禮)로서 하였다. 또한 일찍이 모친이 병이 들자 극진히 봉양하였다.인조(仁祖)가 특별히 음식물을 하사하였고, 중부참봉(中部參奉)에 제수하였다. 모친이 죽자 여막에 거처하면서 예(禮)를 지켰는데, 하루는 비바람이 크게 일어 여막이 무너지려 하였으나, 여막에 누워 끝내 위패를 안은채 슬프게 통곡하였다. 마침내 병에 크게걸려 묘소 옆에서 죽으니, 특별히 정려(旌閭)를 세우도록 하였다. 이동혁(李東赫) : 판중추(判中樞) 명덕(明德)의 후손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부친이 병일 들자 손가락을 깨물어 수혈하였다. 상(喪)을 당하여 산소 옆에 초막을 짓고 예를 다한 바 명을 얻어 쓰러졌다. 이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천거하여, 숙종(肅宗) 계사(癸巳:1713)에 호역(戶役)을 면제받았다. 정은하(鄭殷河) : 호는 육송(六松)이며, 돈재(遯齋) 여해(汝諧)의 5대손 이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부모를 섬김에 정성을 다하였다. 어버이가 병환이 들자 산 닭과 들판의 야생오리(山鷄野鴨)가 스스로 부엌으로 들어 약으로 올려졌으며, 호랑이가 시묘살이 하는 여막을 지켜주었다. 조석(朝夕)으로 어버이의 은혜를 추모함이 하늘과 사람을 감동하게 하였다. 향인(鄕人)들이 이 사실을 알게되어 그가 시묘살이를 하였던 산의 명칭을 거려산(居廬山)으로 불렀다. 영조 때에 두 번 단지(斷指)를 하여 수명을 4년이나 늘렸다 하여 정려(旌閭)를 세우도록 특별히 명하였다. 그러나 무신년의 변란을 당하여 세우지 못하였다가, 헌종 신해(辛亥:1851)에 건립하였다. 정권렬(鄭權烈)·양렬(亮烈) : 하동부원군 학역재 인지(河東府院君 學易齋麟趾之)의 후손이다. 형제 두 사람 모두가 지극히 효성스러워, 약을 올릴 때는 차례로 손가락을 잘라 피와 섞어서 하였다. 초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할 때는 거적을 덮었으며, 뜰의 나무가 3년 동안 꽃을 피지 않았고, 새끼 까마귀가 세 번씩 슬피 울었다. 당시의 사람들이 그들이 거주한 마을을 효자동(孝子洞), 시묘살이를 하였던 산을 효자산(孝子山)이라 하였다. 도(道)에서 조정에 장계를 올리니, 철종(哲宗)이 쌍효각(雙孝閭)을 짓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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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烈女) |
양씨(梁氏) : 사인(士人) 문구용(文九容)의 처(妻)이며, 참의(參議)응태(應台)의 딸이다. 남편이 죽자 음식을 끊고 슬피 울부짖는 것 이 지나쳐서 병기 생기고 말았다. 남편의 첫 기일(朞日)을 맞이하 여 목욕재계(沐浴齋戒)을 한 후에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자진(自盡)한 일이 알려져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윤씨(尹氏) : 사인(士人) 김명홍(金命弘)의 처(妻)이며, 생원(生員) 대임大任)의 딸이었다. 남편이 큰 병(重疾)에 걸리자 항상 하늘에 빌어 남편의 병을 자신이 대신하기를 원하였다. 남편이 죽자 시체를 안고 통곡하니, 사람들이 풀어놓을 수가 없었다. 다음날 기력이 다하여 죽었다. 이후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김씨(金氏) : 사인(士人) 배광임(裵光 )의 처(妻)이다. 남편과 시어머니가 전염병( 疾)에 걸려 죽음에 이르자, 혼자서 빈소를 지키며 밤낮으로 홀로 슬피 울었다. 전염병의 기운이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친정 어머니를 뵙고 울면서 자결할 뜻을 아뢰었다. 그 남편이 임종한 자리에 들어가 스스로 목을 메고 죽었다. 집안에서 기르던 개(狗)도 역시 스스로 김씨(金氏)의 곁에서 죽으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이 일이 알려져 정려(旌閭)가 내렸다. 정씨(鄭氏) : 서리(書吏) 조사응(曺士膺)의 처(妻)로 남편이 죽자 시체를 안고 통곡하였다. 남편을 시신을 입관(入棺)하는 날에 스스로 목을 메어 죽었다. 이후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이씨(李氏) : 사인(士人) 고설(高楔)의 처이며, 진사(進士) 정식(廷植)의 딸이었다. 성품이 매우 정숙하였고, 일찍이 남편이 죽자 하늘에 통곡하고 한이 골수에 맺혔다. 남편의 장례일에 자결하였다. 이 일이 알려져, 영조 때에 정려(旌閭)가 내렸다. 조씨(曺姓) : 나주 한량(閑良) 조상래의 딸이며, 사인(士人) 손봉첨의 처이다. 남편이 색리(色吏)를 대동하고 서울로 향하다가 전염병에 걸렸는데, 이 소식을 듣고 밤낮으로 목욕재계한 후에 자신이 그 병을 대신할 수 있도록 하늘에 기도하였다. 그 후 남편의 죽음을 듣고 말하기를, "남편이 객지에서 죽었으니 내가 살아서 무엇하리오"라고 한탄하면서 남편의 시신을 염하였다. 장례일에 두 아들을 시부모에게 맡기면서 말하기를, "아이들은 이미 품속을 떠났기 때문에 다 잘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한 후, 남편의 장지에 가서 몰래 독약을 먹고 죽으니, 남편과 함께 묻혔다. 이에 정려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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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旱田) |
1235결(結) 42부(負) 2속(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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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水田) |
2006결(結) 43부(負) 4속(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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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進貢) |
생치(生雉) 건치(乾雉) 건시(乾枾) 홍시(紅枾) 생리(生梨) 호도(胡桃) 신도미(新稻米) 대맥미(大麥米) 소맥미(小麥米) 청(淸) 석류(石榴) 생죽순(生竹 ) 작설(雀舌) 백첩선(白貼扇) 칠첩선(漆貼扇) 백유별선(白油別扇) 칠별선(漆別扇) 청대죽(靑大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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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적( ) |
군자창(軍資倉) 미(米) 25석(石) 1두(斗) 6승(升) 9합(合) 6석(夕) 조(租) 1석(石) 13두 4승 3석(夕) 대맥(大麥) 2석 13두 1승 3합 4석 상진청(常 廳) 미(米) 90석12두 5승 2합 태(太:콩) 745석 1두 3승 조(租) 8031석 4두 8승 4합 메밀(大麥) 76석 7두 8승 5합 겉보리(皮牟) 13,162석 8두 5승 쌀보리(眞麥) 106석 10두 1승 비국구관(備局勾管) 미(米) 1653석 6두 3승 2합 콩(太) 245석 11두 7승 조(租) 803석 12두 8승 대맥(大麥) 11두 2승 겉보리(皮牟) 753석 5두 4승 5합 순영구관(巡營句管) 미(米) 1155석 2두 2승 1합 콩(太) 28석 12두 1승 1합 3석 조(租) 460석 1두 4승 5합 8석 겉보리(皮牟) 1098석 6두 8승 6석 병영구관(兵營句管) 미(米) 57석 7승 2석 통영구관(統營句管) 미(米) 292석 3두 1승 콩(太) 1,631석 9두 6승 5합 조(租) 15,532석 5두 3승 1합 쌀·콩·조(米太租)는 창고를 10월에 열고 11월에 닫는다. 그리고 보리와 밀은 5월에 창고를 열고 6월에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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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田稅) |
쌀(元米) 686석(石) 콩(太) 238석(石) 9승(升) 8합(合) 콩(太) 238석 9승 8합 위미(位米) 59석 3두(斗) 콩(太) 155석 2두 5승 삼수량미(三手糧米) 259석 12두 2승 4합 7석(夕). 풍년이나 흉년에따라 증가 또는 감소하기도 한다. 2월에 수납하여 3월에 싣고 나주의 영산포에서 무안현(務安縣)·목포진(木浦鎭)의 앞 바다를 지나 충청도(忠淸道) 비인현(庇仁縣)·홍주목(洪州牧)·원산진(元山鎭)을 경유하여 경강(京江)의 광흥창(廣興倉)에 도달하는데, 13일정도 소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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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大同) |
저치미(儲置米) 251석 3두 1승 8합 상납미(上納米) 39동(同) 전(錢) 3900량(兩). 3월에 거두어서 4월에 육로로 선혜청에 상납되는 것이 8일 반의 여정이다. 풍년이나 흉년에 따라 증가하거나 감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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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세(均稅) |
선무포(選武布) 1동(同) 46필(疋)을 10월에 거두어서 11월에 상납한다. 결전(結錢) 1705량(兩) 9전( ) 4립(立) 면세작미(免稅作米) 6필(疋) 전(錢) 15량(兩) 2월에 거두어서 3월에 상납하였다. 면세결전세미(免稅結田稅米) 1석 6승 삼수량미(三手糧米) 10두 8승 콩(太) 1석 5두 4승 세선(稅船)에 함께 실어서 전세(田稅)와 더불어 기한 내에 상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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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름(俸 ) |
관수미(官需米) 240석 사객지공미(使客支供米) 50석 아록공수위미(衙祿公須位米) 34석 10두 치계가미(雉鷄價米) 137석 시탄가미(柴炭價米) 149석 5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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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병(軍兵) |
훈련도감포수보(訓練都監砲手保) 249명 어영청정군(御營廳正軍) 47명 정군자보(正軍資保) 50명 관납보(官納保) 161명 금위영 관납보(禁衛營官納保) 107명 병조기병(兵曹騎兵) 98명 보병(步兵) 27명 금군보(禁軍保) 176명 복직( 直) 8명 호위대보(扈衛隊保) 7명 경기보(京騎保) 8명 장낙원악생(掌樂院樂生) 1명 낙생보(樂生保) 8명 악공보(樂工保) 26명 사복시제원(司僕寺諸員) 32명 감영아병군뢰(監營牙兵軍牢) 4명 진상배지보(進上陪持保) 4명 영장인(營匠人) 46명 병영보병(兵營步兵) 3명 차비군(差備軍) 2명 진군(鎭軍) 10명 신선(新選) 33명 군뢰(軍牢) 20명 기수군(旗手軍) 20명 취타수(吹打手) 20명 수용군(需用軍) 30명 입암산성사부(笠巖山城射夫) 1명 좌수영수용군(左水營需用軍) 38명 수군(水軍) 684명 우수영수군(右水營水軍) 294명 우영진속오파총(右營鎭束伍把摠) 1명 초관(哨官) 4명 기패관(旗牌官) 6명 대포교사(大砲敎師) 1명 별대(別隊) 22명 별대보(別隊保) 44명 보군수솔병(步軍隨率兵) 572명 보군수솔보(步軍隨率保) 78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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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판(冊版) |
삼강행실(三綱行實) 정암집(靜菴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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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안(先生案) |
임옥산(林玉山)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홍치(弘治) 5년 임자(壬子)에 효행(孝行)으로 특채되었다. 민계안(閔繼安)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송세림(宋世琳) 문반(文班)으로 조봉(朝奉)이었다. 신공제(申公濟) 문반(文班)으로 조산(朝散)이었다. 박광우(朴光佑) 문반(文班)으로 조봉(朝奉)이었다. 장응성(張應聖) 문반(文班)으로 조봉(朝奉)이었다. 정만종(鄭萬鐘) 문반(文班)으로 중훈(中訓)이었다.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으로 승격되었다. 김 선(金 璿)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윤 행(尹 行) 문반(文班)으로 봉직랑(奉直郞)이었다. 이 홍(李 弘)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이 적(李 績) 남행(南行)으로 통덕랑(通德郞)이었다. 홍봉세(洪奉世) 남행(南行)으로 통선랑(通善郞)이었다. 조 옥(趙 玉)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김종수(金從壽)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이증화(李曾華) 남행(南行)으로 통정(通正)이었다. 양 홍(楊 洪)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신희남(愼喜男)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이 황(李 璜)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소 해(蘇 邂)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전 도(丁 ) 문반(文班)으로 중훈(中訓)이었다. 윤존성(尹存性) 문반(文班)으로 조산(朝散)이었다. 이언양(李彦讓) 문반(文班)으로 봉렬(奉列)이었다. 선정비가 있다 이담룡(李聃龍) 문반(文班)으로 조산(朝散)이었다. 김영남(金潁男) 문반(文班)으로 조산(朝散)이었다. 황승헌(黃承憲) 문반(文班)으로 봉직랑(奉直郞)이었다. 안묵지(安默智) 문반(文班)으로 봉열(奉列)이었다. 김익복(金益福) 문반(文班)으로 조산(朝散)이었다. 박이룡(朴以龍) 문반(文班)으로 봉정(奉正)이었다. 조공근(趙公瑾) 남행(南行)으로 조산(朝散)이었다. 이계명(李繼命) 무반(武班)으로 조산(朝散)이었다. 이희간(李喜幹) 남행(南行)으로 조산(朝散)이었다. 나대용(羅大用) 무반(武班)으로 조봉(朝奉)이었다. 하응도(河應圖) 남행(南行)으로 조봉(朝奉)이었다. 정상철(鄭象哲)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유석증(兪昔曾) 문반(文班)으로 조산(朝散)이었다. 구 심(具 瀋) 남행(南行)으로 통선랑(通善郞)이었다. 이언좌(李彦佐) 남행(南行)으로 조봉(朝奉)이었다. 홍 우(洪 遇)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김효남(金孝男)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이인민(李仁民)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윤 수(尹 燧)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한여직(韓汝稷)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류 광(柳 洸)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류 도(柳 塗)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윤홍업(尹弘業)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신수무(愼守武)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허 한(許 )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양 양(梁 讓)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이순명(李順命) 무반(武班)으로 통정(通政)이었다. 심기주(沈器周) 남행(南行)으로 조산(朝散)이었다. 김의립(金毅立)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정 연(鄭 沇) 문반(文班)으로 봉열(奉列)이었다. 조국빈(趙國賓) 문반(文班)으로 통정(通政)이었다. 이후천(李後天)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정양필(鄭良弼) 문반(文班)으로 통정(通政)이었다. 김원립(金元立)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유성증(兪省曾) 문반(文班)으로 통정(通政)이었다. 류 석(柳 碩)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김광혁(金光爀) 문반(文班)으로 통정(通政)이었다. 임효달(任孝達) 문반(文班)으로 통정(通政)이었다. 최래길(崔來吉) 문반(文班)으로 가의(嘉義)이었다. 완천군(完川君) 에 올랐다. 이시담(李時聃) 남행(南行)으로 통정(通政)이었다. 김경항(金慶恒) 남행(南行)으로 통정(通政)이었다. 장중인(張仲仁) 문반(文班)으로 통정(通政)이었다. 곽성구(郭聖龜)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신총도(申摠道)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임성익(林聖翊)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한진기(韓震琦)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노문한(盧文漢)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정시성(鄭始成)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이성징(李星徵) 문반(文班)으로 통정(通政)이었다. 이휘진(李彙晉)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민여로(閔汝老)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이유상(李有相)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이 정(李 晸) 남행(南行)으로 통정(通政)이었다. 윤 진(尹 搢)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조위봉(趙威鳳)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이세익(李世翊) 문반(文班)으로 통정(通政)이었다. 윤지선(尹趾善)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김재현(金載顯)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류지발(柳之發)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박진규(朴鎭圭)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유 창(兪 ) 문반(文班)으로 통정(通政)이었다. 김두명(金斗明)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엄 집(嚴 緝)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박태손(朴泰遜)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이수악(李壽 )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정재후(鄭載厚)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임 환(林 渙)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류 지(柳 )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배정휘(裵正徽)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이악저(李 著)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박명의(朴明義)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박치도(朴致道) 문반(文班)으로 통정(通政)이었다. 류성운(柳成運)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이익태(李益泰) 문반(文班)으로 통정(通政)이었다. 조지항(趙持恒)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남정중(南正重) 문반(文班)으로 통정(通政)이었다. 이이만(李 晩)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이민영(李敏英)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송유룡(宋儒龍)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이구령(李龜齡)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정일령(鄭一寧)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조정만(趙正萬)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조태흥(趙泰興) 남행(南行)으로 통정(通政)이었다. 임상덕(林象德)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윤 홍(尹 泓)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홍용록(洪龍祿)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이승원(李承源)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신유익(愼惟益)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김종연(金宗衍)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채성윤(蔡成胤) 문반(文班)으로 통정(通政)이었다. 민치용(閔致龍)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최창민(崔昌閔) 남행(南行)으로 통정(通政)이었다. 박 당(朴 ) 남행(南行)으로 통정(通政)이었다. 손경석(孫景錫)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심봉휘(沈鳳輝)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정석주(鄭錫疇)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윤동설(尹東卨)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한덕필(韓德弼)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김동정(金東鼎) 음서(蔭敍)로 통훈(通訓)이었다. 엄경하(嚴慶遐) 문반(文班)으로 통정(通政)이었다. 이광의(李廣義) 음서(蔭敍)로 통훈(通訓)이었다. 윤무교(尹懋敎) 남행(南行)으로 통정(通政)이었다. 홍윤보(洪允輔)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조명겸(趙明謙) 문반(文班)으로 가선(嘉善)이었다. 신경보(申慶普) 남행(南行)으로 통정(通政)이었다. 김상열(金相說)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유직기(兪直基)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박사눌(朴師訥) 문반(文班)으로 통정(通政)이었다. 이후달(李厚達)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홍중효(洪重孝) 문반(文班)으로 통정(通政)이었다. 민광우(閔光遇) 문반(文班)으로 통정(通政)이었다. 박창윤(朴昌潤) 문반(文班)으로 통정(通政)이었다. 정하언(鄭夏彦) 문반(文班)으로 통정(通政)이었다. 한필수(韓必壽) 문반(文班)으로 통정(通政)이었다. 민 숙(閔 塾) 문반(文班)으로 통정(通政)이었다. 조 혜(趙 惠) 문반(文班)으로 통정(通政)이었다. 김광태(金光泰) 무반(武班)으로 통정(通政)이었다. 홍 륜(洪 ) 문반(文班)으로 통정(通政)이었다. 구수국(具壽國) 문반(文班)으로 통정(通政)이었다. 박성환(朴聖煥) 무반(武班)으로 통정(通政)이었다. 박종익(朴宗益) 무반(武班)으로 통정(通政)이었다. 이행원(李行源)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오현주(吳鉉胄)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이 육(李 堉) 문반(文班)으로 통정(通政)이었다. 여선덕(呂善德) 문반(文班)으로 통정(通政)이었다. 홍주만(洪周萬)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조사충(趙思忠)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주중순(朱重純) 문반(文班)으로 통훈(通訓)이었다. 김이기(金履基)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김항주(金恒柱)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유한돈(兪漢敦)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임중원(林重遠)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이악배(李樂培)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윤기동(尹耆東)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박좌원(朴左源)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이대영(李大永) 남행(南行)으로 가선(嘉善)이었다. 이종섭(李宗燮)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심 주(沈 銖) 종부정(宗簿正)이었다. 양주익(梁周翊) 문반(文班)으로 통정(通政)이었다. 이항연(李恒演)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이상정(李象鼎)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조용진(趙用鎭)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남인구(南麟耉)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박종민(朴宗民)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이낙수(李洛秀)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윤치혁(尹致赫)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서흥보(徐興輔)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홍용묵(洪容默)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이덕수(李德秀)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홍철영(洪徹榮)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이광도(李廣度)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이광승(李光承)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이형재(李衡在)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이회석(李羲碩)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이규헌(李奎憲)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이현오(李玄五)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김진화(金鎭華)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이장우(李章愚)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이병례(李秉禮)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이 해(李 奚)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조병문(趙秉文)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이충익(李忠翼)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조명하(趙命夏)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윤규석(尹奎錫)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여중섭(呂重燮)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이교영(李喬榮) 남행(南行)으로 통훈(通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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湖南邑誌 第二冊, 綾州牧邑誌 |
湖南邑誌 第二冊, 綾州牧邑誌 綾州牧 東距同福縣界三十里西距南平縣界十七里南距長興府界四十四里北距和順縣界十二里 坊里 十面 州內編戶六百十九戶男一千一百五十一口女九百三十四口 東面自官門六里編戶五百八十二戶男一千二百九十五口女一千一百口 上東邊面自官門二十里編戶四百九十四戶男一千一百十一口女八百九十七口 下東邊面自官門四十里編戶四百七十三戶男九百三十二口女八百七十八口 西邊面自官門十七里編戶四百六十八戶男一千一口女八百四十八口 南一面自官門七里編戶七百十二戶男一千三百八十八口女一千一百二十二口 西二上面自官門二十里編戶三百六十四戶男七百十五口女八百十三口 西二下面自官門三十里編戶三百六十八戶男六百二十八口女八百四十二口 西一面自官門十里編戶二百二十七戶男四百三十五口女四百七十四口 北面自官門七里編戶六百十一戶男一千一百九十五口女九百六十八口 合編戶四千九百十九戶男九千八百五十一口女八千八百七十六口己酉帳籍爲率 道路東至同福縣五十里寶城郡七十里西至南平縣三十里南至長興府一百里北至和順縣二十 里北距京都七百七十八里八日半程北距監營二百八十里三日程南距兵營一百里一日程東距左水營二百四十里二日半程西距右水營二百三十里二日半程東距統營五百士十里六日程 建置沿革本百濟爾陵夫里郡一云竹樹夫里一云連珠夫里新羅改今名高麗初屬羅 州仁宗二十一年置縣令 本朝 太宗十六年合和順縣改順城縣未幾各復舊 仁祖十年以仁獻王后姓鄕陞陵州牧辛巳兼討捕使 顯宗甲辰移屬羅州右營將 郡名 爾陵 竹樹 連珠 形勝 近峽而僻頗有溪山之趣 官職 牧使文蔭正三品順天鎭管 座首一 別監二 軍官十五 衙前六十 知印十八 使令十七 官奴二十五 婢二十一 山川雲山自和順天雲山來爲州主 在南一里中條山和順天雲山下麓在州東四十六里呂岾中條山下麓在州東四十六里華岳山呂岾來在州南四十里千佛山華岳山下麓在州西二十五里海望山望日山來在州西二十里望日山華岳山下麓在州西二十五里飛鳳山海望山來在州西三里倭城山華岳山來在州南十五里有古城址回坊倭而築故名連珠山和順天雲山來在州東二里州之案山金鰲山和順天雲山來在州東七里種加山光山無等山來在州北十五里石泉山無等山來在州北二十里車衣川在州北五里源出呂岾東流過邑前又東北過南平北八羅州廣灘 姓氏具綾州鄭河東文南平曺昌寧朱綾州梁濟州閔驪興李公州李光山李全州李星州宋新平安竹山南宜寧朴順天朴咸陽朴忠州金淸道金南海金光山金靈光裵大丘張興德吳寶城崔江華崔慶州丁靈光徐利川洪羅州洪豊山 風俗 儉嗇朴野質多文少古稱淳厚之鄕 壇廟社稷壇在州西七里文廟在鄕校城隍祠在州西五里 壇在州北五里竹樹書院在州東三里享趙靜菴光祖賜額 公 客館 衙舍 鄕射堂 訓練廳 堤堰加乙堤周圍九百六十五尺深六尺蓮池堤周圍二千二百六十三尺八寸深六尺五寸廣大村堤周圍七百五十六尺深六尺免洞堤周圍六百九十三尺深四尺雲住洞堤周圍四百九十三尺五寸深五尺池洞堤今廢 倉庫 邑倉 軍器庫 大同庫 需米庫俱在邑內 東倉在州南二十五里 西倉在州西二十五里 物産 石榴 磁器 枾 蜂蜜 竹 箭竹 茶 松 地黃 天南星 麥門冬 橋梁 大橋在州北十五里 笠橋在州南二十里 芚田橋在州東五里 驛院 人物驛在州南二十五里奴四十八婢七馬十匹景陽屬 李陽院 呂岾院 浮落巖院大林院等皆今廢 樓亭 鳳棲樓在客館東 映碧亭在連珠山下 淸興亭在州北三里 松石亭 題鳳棲樓 連珠山上月如盤草樹無風露氣寒千陣瑞雲渾欲盡一堆鈐牒不須看年華更覺 中秋勝客況誰知此夜寬旌 又遵西海轉指尖將擘蟹臍團 畢齋金宗直 水遠山長地勢盤危樓亂起引風寒最宜朱夏單 坐更捉晴川白鳥看政拙催科官酒薄心勞字撫縣民寬千竿綠竹金初碎岸 孤吟月影團 觀察使兪得一 東閣重來峽路盤九秋庭畔葉聲寒山前暮兩侵軒過壁上遺詩秉燭看衰炳漸知行役苦感懷無賴酒盃寬追思十八年間事草露冷冷和淚團 三淵金昌翕 寺刹 雙峰寺在州東中條山 雲住寺今廢 開天寺在州南千佛山 人良寺今廢 石泉寺今廢 聳巖寺今廢 古跡品坪所在州南三十里 金井在州東十里金鰲山巖開有二井金色鰲浮出故因名焉早則析雨有應且在城遺址存焉 玄鶴亭在州南十五里有巖壁立江上數百尺有玄鶴來棲故名焉巖下面有刻詩曰吹簫乘月下尋鶴向漁幾云 雲住在州南二十五里千佛山左右山 石佛石榻又一千又有石室二石佛相背而坐 人物高麗具民瞻登第官至同平章事有碩德中望 具藝登第官至沔城府院君 朱悅高宗時登第出守二州府按節三道皆著威績歷事三朝官至知都僉議府事性剛直嚴正淸白儉素文章富贍筆法亦奇卒諡文節公 本朝具致寬藝之後登第 世祖朝左翼功臣封綾城府院君官至領議政性方嚴淸謹不治産業 卒諡忠烈 鄭汝諧遯齋文忠公芝衍之后師事 畢金先生之門與寒暄一 諸賢相爲講磨 成宗庚子成均進士以孝廉官至持平 孝子具斗南成均進士卽民瞻之後事親盡孝居喪葬克遵禮節鄕人薦 聞 中宗朝甲辰 除恭陵參奉薦至廣興奉事 裵允德性篤孝嘗侍母病致孝感母死哀毁踰制事 聞 宣祖以御筆識名壁上待其服閱特 命除中部參奉 梁渭南成均進士卽彭孫之孫丁父憂以禮居喪且嘗侍母炳致孝感事 聞 仁祖特賜食物 除中部參奉母死居廬執禮一日大風雨撓其廬寢而終不去抱時神主露坐哀哭疾遂大作奄歿于墓所特 命旌閭 李東赫判中樞明德後性至孝父病血指居喪廬墓克遵禮節老而靡懈鄕人薦 聞肅宗朝命給復 鄭殷河號六松遯齋汝諧之五世孫天性至孝事親克誠山鷄野鴨入廚供指虎衛墓廬晨夕追遠格天感物鄕人名其所廬山曰居廬山薦聞而 英宗朝以血指兩度延壽四年特命旌閭時値戊申變閼不擧 憲宗辛亥因鄕道立閭 鄭權烈亮烈卽河東府院君學易齋麟趾之後裔兄弟二人俱以誠孝格天感物侍湯而折手代命居喪廬墓 隧庭樹三年不花哺烏三時告哀時人指其所居之村曰孝子洞指其廬之山曰孝子山因道狀曺啓 哲宗送特 命雙孝閭 烈女梁氏士人文九容妻參議應台女夫死絶食哀毁初朞日浴沐自盡而死事 聞 旌閭 尹氏士人金命弘之妻生員大任之女夫 疾祝天願代夫死抱尸呼哭翌日氣盡以死事聞 旌閭 金氏士人裵光任之妻其夫及姑覲 疾致殞獨守殯筵晝夜號哭 氣旣息歸 其毋哭陳自決之意入夫殯筵自縊而死其所畜之狗亦自斃於金氏之側人皆異之事聞旌閭 鄭氏書吏曺士膺妻夫死抱尸號哭及入棺之日自縊死事 聞旌閭 李氏士人高楔之妻進士廷植之女至性貞淑早遭其夫終天之痛漸毁骨立恨未身代矢以從夫於地下自縊於葬日而死事聞 英宗朝 特命旌閭 曺姓羅州閑良相來之女人吏孫鳳瞻之妻其夫以大同色吏上京 隔以 曺姓初聞病報晝夜號泣齋沐祝天願以身代及其聞訃則曰夫死客地吾生何爲特其返屍之日更以新衣親自改飮當於葬日以二子托其姑母曰兒旣免懷可以年育仍往其夫葬潛服砒毒而死同穴而葬事 聞旌閭 旱田 一千二百三十五結四十二負二束 水田 二千六結四十三負四束 進貢 生雉 乾雉 乾枾 紅枾 生梨 胡桃 新稻米 大麥米 小麥米 淸 石生竹 雀舌 白貼扇 漆貼扇 白油別扇 漆別扇 靑大竹 軍資倉米二十五石一斗六升九合六夕租一石十三斗四升三夕大麥二石十三斗一升三合四夕常 廳米九十石十二斗五升二合太七百四十五石一斗三升租八千三十一石四斗八升四合大麥七十六石七斗八升五合皮牟一萬三千一百六十二石八斗五升眞麥一百六石十斗一夕備局管米一千六百五十三石六斗三升二合太二百四十五石十一斗七升租八百三石十二斗八升大麥十一斗二升皮牟七百五十三石五斗四升五合巡營句管米一千一百五十五石二斗二升一合太二十八石十二斗一升一合三夕租四百六十石十斗四升五合八夕皮牟一千九十八石六斗八升六夕兵營句管米五十七石七升二夕統營句管米二百九十二石三斗一升太一千六百三十一石九斗六升五合租一萬五千五百三十二石五斗三升一合米太租十月開倉十一月封庫兩麥五月開倉六月封庫 田稅元米六百八十六石太二百三十八石九升八合位米五十九石三斗太一百五十五石二斗 五升三手糧米二百五十九石十二斗二升四合七石隨歲豊斂或增或減二月收捧三月茅載自羅州榮江浦過務安縣木浦鎭前洋歷忠淸道庇仁縣洪州牧元山鎭達子京江廣興倉前十三日程 大同儲置米二百五十一石三斗一升八合上納米三十九同錢三千九百兩三月收捧四月陸路上納于宣惠廳八日半程隨歲豊斂或增或減 均稅選武布一同四十六疋十月收捧十一月上納納錢一千七百五兩九 四立免稅作米六疋錢十五兩二月收捧三月上納免稅結田稅米一石六升三手糧米十斗八升太一石五斗四升稅船添載上納期限與田稅同 俸 官需米二百四十石使客支供米五十石衙祿公須位米三十四石十斗雉鷄價米一百三十七石紫炭價米一百四十九石五斗 軍兵訓練都監砲手保二百四十九御營廳正軍四十七正軍資保五十官納保一百六十一禁衛營官納保一百七兵曹騎兵九十八步兵二十七禁軍保一百七十六 直八扈輦隊保七京騎保八掌樂院樂生一樂生保八樂工保二十六司僕寺諸員三十二監營牙兵軍牢四進上陪持保四營匠人四十六兵營步兵三差備軍二鎭軍十新選三十三軍牢二十旗手軍二十吹打手二十需用軍三十笠巖山城射夫一左水營需用軍三十八水軍六百八十四右水營水軍二百九十四右營鎭束伍把摠一哨官四旗牌官六大砲敎師一別隊二十二別隊保四十四步軍隨率幷五百七十二步軍隨率保七十八 冊板 三綱行實
先生案 林玉山 南通訓弘治五年壬子以孝行特 除 閔繼安 南通訓 宋世琳 文朝奉 申公濟 文朝散 朴光佑 文朝奉 張應聖 文朝奉 鄭萬鐘 文中訓以司憲府掌令承 召 金 璿 南通訓 尹 行 文奉直郞 李 弘 南通訓 李 績 南通德郞 洪奉世 南通善郞 趙 玉 南通訓 金從壽 南通訓 李曾華 南通正 楊 洪 文通訓 愼喜男 文通訓 李 璜 南通訓 蘇 邂 南通訓 丁 文中訓 尹存性 文朝散 李彦讓 文奉列有善政碑 李聃龍 文朝散 金潁男 文朝散 黃承憲 文奉直郞 安默智 文奉列 金益福 文朝散 朴以龍 文奉正 趙公瑾 南朝散 李繼命 武朝散 李喜幹 南朝散 羅大用 武朝奉 河應圖 南朝奉 鄭象哲 南通訓 兪昔曾 文朝散 具 瀋 南通善郞 李彦佐 南朝奉 洪 遇 南通訓 金孝男 南通訓 李仁民 南通訓 尹 燧 文通訓 韓汝稷 文通訓 柳 洸 文通訓 柳 塗 文通訓 尹弘業 南通訓 愼守武 南通訓 許 南通訓 梁 讓 南通訓 李順命 武通政 沈器周 南朝散 金毅立 南通訓 鄭 沇 文奉列 趙國賓 文通政 李後天 文通訓 鄭良弼 文通政 金元立 文通訓 兪省曾 文通政 柳 碩 文通訓 金光爀 文通政 任孝達 文通政 崔來吉 文嘉義 完川君 李時聃 南通政 金慶恒 南通政 張仲仁 文通政 郭聖龜 文通訓 申摠道 文通訓 林聖翊 文通訓 韓震琦 文通訓 盧文漢 文通訓 鄭始成 文通訓 李星徵 文通政 李彙晉 文通訓 閔汝老 文通訓 李有相 文通訓 李 晸 南通政 尹 搢 文通訓 趙威鳳 文通訓 李世翊 文通政 尹趾善 文通訓 金載顯 文通訓 柳之發 文通訓 朴鎭圭 文通訓 兪 文通政 金斗明 文通訓 嚴 緝 文通訓 朴泰遜 文通訓 李壽 文通訓 鄭載厚 南通訓 林 渙 文通訓 柳 文通訓 裵正徽 文通訓 李 著 南通訓 朴明義 文通訓 朴致道 文通政 柳成運 文通訓 李益泰 文通政 趙持恒 南通訓 南正重 文通政 李 晩 文通訓 李敏英 文通訓 宋儒龍 文通訓 李龜齡 文通訓 鄭一寧 文通訓 趙正萬 南通訓 趙泰興 南通政 林象德 文通訓 尹 泓 南通訓 洪龍祿 文通訓 李承源 文通訓 愼惟益 文通訓 金宗衍 南通訓 蔡成胤 文通政 閔致龍 文通訓 崔昌閔 南通政 朴 南通政 孫景錫 文通訓 沈鳳輝 南通訓 鄭錫疇 南通訓 尹東卨 南通訓 韓德弼 南通訓 金東鼎 蔭通訓 嚴慶遐 文通政 李廣義 蔭通訓 尹懋敎 南通政 洪允輔 南通訓 趙明謙 文嘉善 申慶普 南通政 金相說 南通訓 兪直基 南通訓 朴師訥 文通政 李厚達 文通訓 洪重孝 文通政 閔光遇 文通政 朴昌潤 文通政 鄭夏彦 文通政 韓必壽 文通政 閔 塾 文通政 趙 惠 文通政 金光泰 武通政 洪 文通政 具壽國 文通政 朴聖煥 武通政 朴宗益 武通政 李行源 文通訓 吳鉉胄 文通訓 李 堉 文通政 呂善德 文通政 洪周萬 文通訓 趙思忠 文通訓 朱重純 文通訓 金履基 南通訓 金恒柱 南通訓 兪漢敦 南通訓 林重遠 南通訓 李樂培 南通訓 尹耆東 南通訓 朴左源 南通訓 李大永 南嘉善 李宗燮 文通訓 沈 銖 宗簿正 梁周翊 文通政 李恒演 南通訓 李象鼎 南通訓 趙用鎭 南通訓 南麟耉 南通訓 朴宗民 南通訓 李洛秀 南通訓 尹致赫 南通訓 徐興輔 南通訓 洪容默 南通訓 李德秀 南通訓 洪徹榮 南通訓 李廣度 南通訓 李光承 南通訓 李衡在 南通訓 李羲碩 南通訓 李奎憲 南通訓 李玄五 南通訓 金鎭華 南通訓 李章愚 南通訓 李秉禮 南通訓 李 奚 南通訓 趙秉文 南通訓 李忠翼 南通訓 趙命夏 南通訓 尹奎錫 南通訓 呂重燮 南通訓 李喬榮 南通訓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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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풍천임씨 諱孝達 선조님 사적을 찾다가 화순군에 집거하신 자료인것 같아서 올려 봅니다. 풍천임씨 任孝達 (승지공) 선조님에 사적을 알고 싶어요. 연계되신분은 글 남겨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