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정(鄭)씨 상세(上世)에 대한 고찰(考察)
31세손 수찬공파 정재홍
우리 동래정씨(東萊鄭氏) 시조(始祖)가 휘(諱) 회문(繪文)이라고 하는 문제는 일족 모두가 별다른 이견(異見)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옛 족보 모음인 동래세보(世譜) 모음집 C.D를 동래정씨 대종중에서 2009년 9월에 제작 배부한 사례라든지 “동래정씨 이야기”(정상기) 그 밖의 일부 문중에서 파보(派譜)를 제작함에 경주 정씨의 세보(世譜)를 인용하여 그냥 고증(考證)없이 베끼기 하는 것을 보고 심히 우려되어 감히 붓을 들어 그 부당함을 밝혀 차후라도 세보를 제작하는데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기대감으로 하여 감히 소신을 피력하고자 합니다.
1. 동국정씨 시조 지백호(智伯虎)와 사성(賜姓)
역사 자료에 의하면 기원전(紀元前) 57년에 신라 육부촌장(六部村長)이 한 자리에 모여 박혁거세(朴赫居世)를 합의 추대하여 가장 민주적인 신라의 임금으로 모신 것이 신라 건국이 된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2067년 전에 신라가 건국되고 그런 다음 육부촌장에게 이(李) 최(崔) 정(鄭) 손(孫) 배(裵) 설(薛)의 육성(六姓)이 사성되기에 이르렀고, 따라서 지백호께서 동국의 정(鄭)씨 시조로 호칭(呼稱)되기에 이른 것으로 추측 됩니다.
2. 족보(族譜)의 내력(來歷)
우리나라의 족보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어 지금은 세계적으로도 가장 훌륭한 가계(家系)를 나타내는 족보들을 각 문중마다 제작하여 소유한 것이 대단한 자랑거리이다.
기록에 의하면 중국의 족보가 5세기경 육조시대(六朝時代) 즉 오(吳) 동진(東晉) 송(宋) 제(齊) 양(梁) 진(陳)시대 때부터 시작되었고, 더구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표본으로 삼고 있는 소보(蘇譜)는 10세기에 만들어 졌다. 소보(蘇譜)는 북송(北宋)의 대 문장가인 소순(蘇洵)의 호(號)가 노천(老泉)이고, 그 아들 소식(蘇軾)의 호는 동파(東坡) 소철(蘇轍)의 호(號)는 악성(樂城) 형제 즉 삼부자(三父子)를 모두 일컬어 삼소(三蘇)라 하는데, 이들이 편찬한 족보는 그 규모나 짜임새가 매우 우수하여 그 후로 족보를 편찬하는 사람은 이를 표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소보(蘇譜)라는 말이 붙여졌다.
그렇다면 중국이 족보를 시작한 육조시대를 기점으로 보아도 5세기경에 족보가 시작되었고, 소보를 표준으로 만들었다면 적어도 10세기경에 만들어 져야 한다. 즉 북송은 서기 971년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족보가 만들어 진 연대(年代)를 한 번 살펴보아야 하겠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의종(毅宗)(1146-1170) 때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이라 하여 역대 왕가(王家)의 세보(世譜)가 있었을 뿐이며, 이때에도 사대부(士大夫)의 집에서는 가승(家乘)이 마련되어 왔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가정의 족보는 15세기 초엽에 족보가 인쇄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것은 과거제도가 시행됨에 따라 족보가 있는 양반(兩班)의 자손이라야 벼슬길에 오르는 제도상의 규제(規制)에 의하여 조상의 현달(顯達)을 표현하기 위하여 족보를 만들게 된 것으로 조상의 혜택으로 또 출세를 자랑하기 위함도 있었다.
그러나 족보는 종족의 역사이며 같은 혈통(血統)을 실제로 증명하는 귀중한 문헌이며 동족의 여부와 소목(昭穆)의 서열과 촌수를 분별하는데 불가결한 문헌이다. 역사는 선조들의 흔적이요 선조들의 사적은 우리들의 역사임으로 우리들의 보첩(譜牒)은 선조와 자신의 역사를 후손들에게 전하여 그 후손들에게 귀감(龜鑑)이 되게 하며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하여 꼭 필요하다 하겠다.
그런 연유로 과거제도가 시작된 후로 가승(家乘) 및 보첩(譜牒)이 기록되기 시작하였다고 볼 때 우리나라의 과거제도는 고려 광종9년(958)에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가승(家乘)의 시작은 서기 958년을 기점으로 그 전후에 시작되었다고 유추(類推)된다.
물론 체제를 갖춘 족보는 그 시작이 안동권(權)씨의 성화세보(成化世譜)가 최초이며 1516년(중종11년.丙子)에 인쇄 된 것이 시초이다.
3. 위의 논술을 편년식으로 정리
① 기원전 57년에 신라 건국
② 중국의 족보 시작은 5세기부터이고, 소보(蘇譜)는 10세기에 만들어 졌음.
③ 고려의 왕대종록(王代宗錄)은 11세기에 만들어 집.
④ 우리나라 아직까지 밝혀 진 보첩이나 가첩은 없지만 귀족 양반가의 가첩은 과거시험이 시행된 958년 이후에 시작 되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성립된다.
⑤ 공식적으로 우리나라 족보로 체체를 갖추고 발간한 안동권씨의 성화세보(成化世譜)는 1516년에 간행되었다.
4. 문제점
위와 같은 조사 결과로 볼 때 우리 정씨의 상세(上世)를 밝힌 부분에 몇 가지 문제가 발생된다.
그것은 사성(賜姓)이 지백호(智伯虎)의 현손(玄孫) 동충(東沖)에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어찌 되었든 그 계대(系代)가 기원전부터 정(鄭)씨의 각 본관(本貫) 별로 나누어 질 때 까지 확연히 기록되었다면 무슨 책에 누가 기록 하였는가 무슨 책을 인용하였는가 하는 문제점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경주정씨 문정공(文正公) 진후(珍厚) 파보(派譜)와 하동정씨(河東鄭氏) 문절공(文節公) 수충파보(守忠派譜)의 기록을 근거로 동래정씨(東萊鄭氏) 집의공파(執義公派) 파보를 편집하신 청고(靑皐)공 인황(寅晃)께서 1958년 “동국정씨원류상세기”를 공간한 바 있어 그 이래로 이 상세기를 인용한 인쇄물 및 파보들이 발간되기에 이르렀다. 책이란 자기의 지식과 뜻한 바를 기록물로 남기지만 책이라고 모두 정확한 것은 아니다.
만약 그 기록의 근거가 확실하다면 5세기 경 중국의 육조시대로 거슬러 올라 갈 것이 아니라 세계의 족보 역사는 우리나라 정(鄭)씨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고쳐 써야 할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지백호의 현손 동충(東冲)부터 기록했다 하더라도 서기 150년 내지 200년경에 시작 되었다는 추측이 가능해 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기록이 옳다고 가정할 때 우리 동래정씨의 시조이신 휘(諱) 회문(繪文)공은 33세(世) 완(琓)의 아드님이고, 경주정(鄭)씨의 시조는 41세(世) 극중(克中)의 아드님 휘(諱) 진후(珍厚)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시조(始祖)의 기준을 어디에 두었다는 말인가? 아버지와 그 이상의 조상이 있는데 어찌하여 시조가 된다는 말인가.
그런 점에서 이 기록이 경주정씨 가계에서 전해져 내려 왔다는 그 자체에 신빙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경주 정씨의 시조는 42세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우리 동래정씨의 기록이 선계(先系)를 문안(文安)공 묘의 지석에서 찾았듯이 경주정씨도 42세 시조 진후(珍厚)공의 기록 또한 어렵게 찾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경주정씨의 족보에 그 상계(上系)인 동국정씨의 기록이 어떻게 무슨 책의 기록에 의하여 만들어졌는가를 밝혀야 하겠습니다.
또한 경주정씨의 세보(世譜)가 여러 종류가 있어서 그 상계를 각기 다르게 기술(記述)하고 있음도 그 전사(轉寫) 과정이나 편찬자들의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5. 결론
① 기원전으로 소급되는 보첩의 기록은 그 신빙성이 없다.
② 동국정씨(東國鄭氏) 상계(上系)의 기록이 출처 불명이므로 보완이 없이는 믿을 수 없다.
③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발췌하여 계대를 짜 맞춘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풀 수가 없고, 아버지 완(琓) 조부 교림(僑林) 증조부 종은(宗殷) 그 위의 수많은 상계(上系)를 두고 회문(繪文)을 시조로 삼은 이유를 밝혀야 하겠습니다.
④ 따라서 상세를 밝힌 분들의 노고는 알 길이 없으나 앞으로 이와 같은 무작정적 베끼기는 하지 말아야 하지 않을 까 하여 감히 몇 자 적어 소신을 밝혀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