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구간 산행일시: 2024. 2. 8.(목) - 음력(12. 29.), 일출 07:30~일몰 18:04
●2구간 산행일시: 2024. 2. 9.(금) - 음력(12. 30.), 일출 07:29~일몰 18:05
●산행지: 태행지맥(太行枝脈) 2구간 졸업 (장안대~은장고개~전곡항)
●산행코스: 지맥분기점(145m)-삼봉산1봉(225.2m)-삼봉산(268.2m)-백학고개-오두지맥분기봉(236.7m)-태행산(294.8m)-39번도로/서해안고속도로-145m봉-삼표골재채취장-121.6m봉-염치고개(313번도로)-107.6m봉-77번 도로-112m봉-성고개(2차도로)-115.4m봉-은장고개(322번 도로)-솔티고개(2차도로)-무안산(106.3m)-다락고개(318번 도로)-청원초교-성목재/성북재-135.8m봉-구봉산갈림봉-127m봉-아지미고개(306번도로)-70.5m봉-마산리4거리-이봉산(105.5m)-승학산(109.7m)-와룡산(107.8m)-화량진성/남경두토성-전곡1교
●먹거리: 꿀호떡빵, 게토레이, 콜라 + 파워에이드2, 튀김건빵, 사탕3
●준비물: 원드스토퍼, 바람막이, 상의, 장갑, 스틱, 헤드랜턴, 피부연고, 부직반창고, 충전지2, 충전짹, 손수건, 휴지, 물티슈, 띠지23
●거리: 54.7km (29.1+25.6km)
●소요시간: 17.09h (9.09h+8h)
●누구랑: 나홀로
●경비: 1구간(쟈철,버스, 편의점9,700, 점심9.000, 버스,자철), 2구간(쟈철,버스, 편의점4,400원, 버스,자철), 뒤풀이61,000
●날씨: -5~6, -4~5
●산행경과:
* 2. 8.(목) 29.1km
- 07:02 : 장안대 육교
- 07:18 : 태행지맥분기점
- 08:10 : 삼봉산(225.3m)/ 봉담읍
- 08:59 : 지내산
- 09:29 : 오두지맥분기점
- 09:43~48 : 태행산(294.8m), 8.67km
- 10:34 : 167.8m봉
- 10:48 : 167.7m봉
- 11:07 : 서해안고속도로 암거
- 11:40 : 양노리버스정류장
- 11:43~12:09 : 점심
- 12:39 : 121.6m봉
- 12:51 : 염치고개/ 화성로/ 비봉면
- 13:05 : 107.6m봉
- 13:27 : 107.6m봉
- 14:20 : 삼부실재
- 14:35 : 111.4봉
- 15:07 : 성고개
- 15:26 : 샘실길/ 남양읍
- 15:34 : 성주골길
- 15:43 : 106.8m봉
- 16:48 : 은장고개
* 2. 9.(금) 25.6km
- 07:05 : 은장고개/ 마도면
- 07:45 : 75.1m봉
- 08:00 : 다락고개/ 평택시흥고속도로/ 쌍송리
- 08:40 : 성목재/ 성북재
- 09:25 : 엄나무공원/ 금당리
- 09:41 : 웃소고지
- 09:54 : 135.8m봉
- 10:21 : 해운분맥분기점/ 서신면
- 10:24 : 굴고개
- 10:44~11:00 : 구봉산(158.6m)/ 송산면
- 11:22 : 육도리재/ 칠곡리고개
- 11:35 : 85.8m봉
- 12:17 : 아지미고개/송산포도로/ 중송1리
- 12:31 : 70.5m봉
- 12:43 : 인애농원/ 중송2리
- 12:58 : 57.7m봉
- 13:34 : 마산교차로
- 14:25 : 이봉산(105.7m)
- 14:35 : 지화리고개/ 지화1리
- 14:45 : 승학산
- 14:56 : 화랑교회/ 지화2리
- 15:12 : 와룡산(107.8m)
- 15:20 : 화량진성
- 15:35 : 전곡1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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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행지맥(太行枝脈)은?
한남정맥 오봉산을 지나 수리봉 못 미쳐 감투봉(185m)에서 아산만으로 가는 서봉지맥의 화성시 봉담읍 장안대 뒤쪽 봉우리(145m)에서 서쪽으로 분기해서 삼봉산(271m), 태행산(太行山, 268m), 염티고개, 성고개, 다락고개, 굴고개, 구봉산(159m→0.2km), 매봉산(109m →2.7km), 아지미고개, 천등산(146m →3.1km), 이봉산(106m), 승학산(110m), 와룡산(臥龍山, 107.8m)을 지나 화성시 송산면 지화리 전곡1교에서 선감도를 바라보면서 서해로 그 맥을 다하는 51.4km 되는 화성 지역의 마루금으로 북쪽은 동화천, 쌍학천 등이 황해로 흐르며, 남쪽으로는 발안천, 청룡천, 남양천 등이 황해로 흘러가는 지류를 흐르게 한다.
●태행지맥 개념도
♡ 태행지맥을 지나는 동네
* 화성시(華城市, 봉담읍, 비봉면, 남양읍, 마도면, 송산면, 서신면)
경기도 서남단 해안가에 위치한 시로 동북쪽으로 수원시, 동쪽으로 용인시, 남쪽으로는 오산시·평택시, 북쪽으로 안산시와 접하고, 서북쪽으로 시화호를 사이에 두고 시흥시와 접한다. 서쪽으로는 경기만과 서해가 있다. 경기남부에서 가장 면적이 큰 도시이다. 남양읍을 중심으로 한 화성시 서부의 본래 지명은 남양군(南陽郡)이었고, 서신면에는 백제 및 신라의 대외 무역항이었던 당항성이 있었다. 이 지역의 언어는 경기 방언에 속하는 수원 방언권에 속하여 수원 방언을 사용한다. '화성(華城)'이라는 이름은 조선 정조가 '화봉삼축(華封三祝)' 고사를 인용해 "사도세자의 능침인 '화산(花山)'의 '花(화)'자와 '華(화)'자는 뜻과 음이 통하여 '화성'으로 한다"고 하여 지은 것이다. 한남정맥의 끝이 북부로 뻗어 지나고 있어 동쪽과 북쪽에는 200∼400m의 산지가 솟아 있고 남부와 서부는 낮은 구릉이 넓게 펼쳐져 있다. 해안과 하천 주변에는 해안평야가 있고 해안가에는 간석지가 발달해 있다. 동쪽에는 칠보산(七寶山, 239m)·성화산(439m) 등이 수원시와 접해 있고, 서쪽에는 와룡산(臥龍山, 405m)·창명산(155m)이 해안가에 연해있으며 북쪽에는 해안산(126m)·수리산(475m), 중앙에는 비봉산(185m)·태행산(太行山, 235m)·태봉산(泰峰山, 236m)·성화산(139m) 등 100m 정도의 낮은 구릉이 곳곳에 솟아 있다. 시의 주천(主泉)인 발안천(發安川)이 아오천·두곡천에 합류되고, 이것이 서남진하여 남양호에 흘러들어 가면서 주변에 넓은 해안평야를 만들고 있다. 동쪽에는 진위천(振威川)이 정남향으로 흘러 아산호로 흘러들어 간다. 해안선은 비교적 복잡하고 해안에는 남양(楠楊)·조암(朝巖) 등의 반도와 남양·분향(汾鄕) 등의 만이 발달해 있으며 연해에는 제부도(濟扶島)를 비롯하여 여러 섬들이 있다. 조선시대 1789년(정조 13)에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의 진산인 화산(花山)으로 옮기고, 팔달산 동측으로 수원의 읍치를 이전했다. 1793년(정조 17)에는 수원을 유수부(留守府)로 승격시키고, 1794년부터 수원성 축성을 시작하여 1796년에 완료했다. 수원은 새로운 성곽도시로 변모했으며, 오늘날까지도 옛 읍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별호는 한남(漢南)·수성(隋城)·화성(華城) 등이 있었다. 1896년 도제(道制) 실시로 경기도 수원군이 되었다. 1907년 월경지 정리에 의해 일부 지역이 남양군·진위군·아산군으로 이관되었다. 반면에 양성군의 4개면, 직산군의 3개면, 평택군의 소북면이 수원으로 이속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남양군이 폐지되어 합속되고, 광주군·안산군의 일부가 편입됨으로써 면적이 크게 확장되었다. 1931년에 수원면이 읍으로, 1949년에는 읍에서 시로 승격되었고, 나머지 지역은 화성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63년에 일왕면이 시흥군과 수원시로 이속되고, 태장면·안룡면이 태안면으로 병합되었다. 1985년에 태안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86년에 반월면의 일부가 안산시로 편입되었다. 1989년에 오산읍이 시로 승격되어 화성군에서 분리되었다. 1994년 태안읍 영통리가 수원시 팔달구로 편입되는 한편 반월면이 폐지되어 당수리·입북리는 수원시 권선구로, 건건리·사사리·팔곡일리·심중리는 안산시로, 둔대리·대야미리·속달리·도마교리는 군포시로 각각 편입되어 군역이 축소되었다. 1998년 봉담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2000년 11월에는 군청사가 오산시에서 남양면으로 신축, 이전했다. 2001년 3월 21일 화성시로 승격되었고, 남양면도 남양동으로 전환되었다. 동부출장소가 설치되었다. 2003년 우정면이 우정읍으로 승격되었다. 2006년 동부출장소가 확대, 개편되었고 태안읍이 진안동·병점1동·병점2동·반월동·기배동·화산동 등 6개동으로 분동되었다. 2007년 향남면이 향남읍으로 승격되었고, 동탄동이 분리되었다. 12월에는 화성동탄2지구 택지개발사업이 계획되었다. 2008년 동탄2동이, 2009년 동탄3동이 설치되었다. 2010년에는 시 전체 인구가 50만 명을 돌파했다. 2014년 남양동이 남양읍으로 전환되었다. 2015년 동탄면이 동탄면과 동탄4동으로 분동되는 등 이후 동탄8동까지 늘었다. 전체적으로 인구유입지역이다. 1995년 인구와 비교하여 3배 이상 증가했으며, 읍면별 인구분포를 보면 봉담읍·향남읍에 인구가 많이 거주하고 있으며, 면 단위에서는 인구 1만 명을 넘는 면이 없다. 동탄지구에 속하는 동탄1동에서 8동까지는 동마다 인구가 1만 명을 넘는다. 군포시·수원시·오산시·안산시 등 수도권의 주요 도시에 접해 있고 교통이 편리한 진안동·병점동·화산동·봉담읍·향남면·정남면 등 동부지역과 남양만간척사업이 추진된 장안면, 동탄지구는 지속적으로 인구가 증가했다. [통합포탈에서 발췌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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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행지맥은 서봉지맥에서 분기하여 남양만으로 향하는 지맥으로, 그곳엔 인천 제물포항이 개항하기 이전에 서해로 통하는 마산포구가 있었다. 한남정맥에서 분기하여 남향하던 서봉지맥이 샘골고개 지나 장안대학교 뒤쪽에서 서쪽으로 태행지맥을 재분기하는데, 서해로 향하는 태행지맥은 초종반 이름있는 산 외에는 대부분 100m 전후 야산으로 이뤄진 전형적인 비산비야의 지맥길로 공업지구 개발계획으로 인해 남양읍 북양공단과 마도면 마도산단, 은장공단, 쌍송공단 등 마루금을 무너뜨리고 맥길 위에 공장이 들어앉은 곳이 많고 도로로 끊긴 곳도 많으며 현재에도 송산그린시티 등 공사는 계속 진행중이다. 장수에서 남원으로 향하는 천황지맥을 장수황씨의 지맥이라 말한다면 삼국시대부터 서해로 통하는 해상교통의 요지였던 당성과 남양현에 기반을 둔 태행지맥은 남양홍씨의 쉼터라고 말할 수 있다. 신라의 한강 진출로 당과 교통하는 통로였던 '해문당주계(海門唐州界)'는 1,500여 년 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기 위해 당항성 포구를 찾았던 원효대사가 깨달음을 얻고 돌아선 일체유심조의 길이기도 하다. 태행지맥의 끝은 1985년 계획되어 1994년 완공된 시화방조제간척사업으로 시화호와 화성호가 형성되고 이로 인해 바닷길이 없어져 우음도(牛音島), 형도(衡島), 어도(魚島) 등 많은 섬들이 육지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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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부 구간거리
태행지맥 분기점-2.8km-삼봉산제1봉-3.5km-삼봉산-1.3km-오두지맥분기점-0.8km-태행산-1.8km-172m봉-2km-서해안고속도로굴다리-1.8km-2차선도로-1.6km-북양공단이마트-1.3km-양노3리정류장-1.1km-염치고개-2.2km-107.6m봉-3.2km-삼부실/77번국도동물이동통로-2.4km-성고개-2.9km-117m봉-2km-은장고개-2.7km-다락고개-2.8km-청원초교/성목재-2.4km-금당정미소-2.6km-굴고개-0.8km-구봉산갈림길-0.3km-구봉산-4.3km-아지미고개-2.7km-76.6m봉-2.7km-이봉산-0.9km-승학산-1.6km-와룡산-1km-전곡1교-3.5km-전곡항
* 구간거리
- 접속: 장안대학교 ~ 지맥분기점 1.2km
- 지맥분기점 ~ 은장고개 29.1km
-. 장안대 정문 ~ 염치고개 17.2km
-. 염치고개 ~ 은장고개 11.9km
- 은장고개 ~ 전곡1교 24.8km
-. 은장고개 ~ 구봉산 11.6km
-. 육일고개 ~ 전곡1교 10.7km
- 탈출: 전곡1교 ~ 전곡항 3.5km
* 식수 공급지 및 산행 정보
- 양노리공단 : 식당, 편의점
- 염티고개 : 중국집식당/ 편의점
- 은장교차로 : 편의점
- 솔티고개 뷔페식당
- 성목재 : 편의점 3곳, 식당
- 백곡로 : 편의점
- 아지미고개 : 뷔페, 식당/ 200m 편의점
- 전곡항 : 수산물센터, 식당
* 서울에서 태행지맥 분기점 내려가는 길
- 분기점: 사당역(9번출구) ~ 조암행 8155번 버스 장안대학교 하차, 06:20~, 0.30h, 2,800원
- 은장고개: 사당역(10번출구) ~ 전곡행 1002번 버스 우림아파트 하차, 06:10~, 0.45h, 2,800원
-. 우림아파트 ~ 은장고개: 330, 20-3번 버스로 환승 두 정거장
- 사당역 ~ 수원역: 지하철, 버스 왕복
* 합수점/ 전곡항에서 서울 올라오는 길
- 1004-1번 버스: 전곡항 ~ 수원역 환승센터, 막차 19:10분,
- 1002번 버스: 전곡항 ~ 사당역행, 17, 17:40, 18:30, 19:20, 20:10, 21, 21:40, 1.30h(1일 20회, 1시간 간격)
- 제부여객: 031-356-5979
- 전곡1교 ~ 서신면 남양사거리: 서신택시 → 사당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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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성시 봉담읍
봉담읍은 1831년에 편찬된 『화성지』에 따르면 현재의 봉담면은 삼봉면과 갈담면 관할지역으로 기록되어 있고 갈담면은 이전의 정송면이 폐지되고 그 일부가 갈담면으로 되었다. 또 모지면은 삼봉면에 합쳐졌다고『화성지』에 기록되어 있다. 갓등면의 통폐합에 대해 아무런 기록이 없지만, 이 역시 갈담면에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에 제작된 『1872년지방지도』를 보면, 현재의 봉담읍 왕림리 일대(삼천병마골로 표기)가 삼봉면과 갈담면의 경계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삼봉면과 갈담면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봉담면으로 통합되었다. 1998년에 봉담읍으로 승격하였다. 봉담이라는 면 이름 중에 '봉'은 옛 면 이름 삼봉면에서 따온 것이고 이때 삼봉은 이곳의 산 이름 삼봉산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담' 글자를 따온 '갈담(葛潭)'의 이름 유래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장안대 정문으로 들어서 오른쪽 인문관으로, 인문관 앞에서 오른쪽 돌계단으로, 뒷산을 지나 등로 옆으로 태행지맥에서 빠져나간 건달산이 바라보이기 시작합니다.
♤ 장안대학교 정문
장안대학교는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상리에 위치한 사립 전문대학이다. 1978년 12월 전문대학 설립 인가를 받아, 1979년 3월 장안실업전문대학이란 이름으로 개교하였다. 이후 장안전문대학, 장안대학 등의 교명을 거쳐 2011년 11월 장안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장안대학교는 8개 학부, 44개 학과를 운영 중이다. 2020년 기준 학생 정원은 5,514명이며, 전임교원은 150명이다.
♤ 태행지맥분기점/ 삼리봉(150m, 봉담읍 분천리, 상리 → 왕림리)
장안대에서 약 20분 거리이다. 서봉지맥은 직진(남쪽) 방향이고, 태행지맥은 오른쪽(서쪽)으로 꺾어져 상리와 왕림리의 경계를 따른다.
서거정 선생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왕위찬탈(쿠데타) 세조조에 사육신과 생육신이 등장했지만 시국은 도외시하고 도서관(집현전)에 붙어산 범생이과 늘공이었답니다.^^
♤ 서거정(徐居正, 1420~1488) 묘 :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왕림리 산44-1에 자리한다. 본관은 달성,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정(四佳亭) 또는 정정정(亭亭亭), 권근(權近)의 외손자,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1451년(문종 1) 사가독서 후 집현전박사 등을 거쳐 1457년(세조 3)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 공조참의 등을 지냈다. 1460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헌에 올랐으며, 1464년 조선 최초로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었다. 6조(曹)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1470년(성종 1)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고 달성군(達城君)에 책봉되었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45년간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의 여섯 임금을 모셨으며 신흥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을 일으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원만한 성품의 소유자로 단종 폐위와 사육신의 희생 등의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도 왕을 섬기고 자신의 직책을 지키는 것을 직분으로 삼아 조정을 떠나지 않았다. 당대의 혹독한 비평가였던 김시습과는 목은 이색의 손자 이계전에게서 동문수학한 미묘한 관계를 맺은 것으로 유명하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수많은 편찬사업에 참여했으며, 그 자신도 뛰어난 문학저술을 남겨 조선시대 관인문학이 절정을 이루었던 목릉성세(穆陵盛世)의 디딤돌을 이루었다. 『경국대전』·『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동문선』 편찬에 참여했으며, 왕명으로 『향약집성방』을 언해했다. 그의 저술서로는 『역대연표 歷代年表』, 객관적 비평태도와 주체적 비평안(批評眼)을 확립하여 후대의 시화(詩話)에 큰 영향을 끼친 『동인시화』, 간추린 역사·제도·풍속 등을 서술한 『필원잡기 筆苑雜記』, 설화·수필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한 『태평한화골계전 太平閑話滑稽傳』이 있으며, 관인의 부려호방(富麗豪放)한 시문이 다수 실린 『사가집 四佳集』 등이 있다. 명나라 사신 기순(祁順)과의 시 대결에서 우수한 재능을 보였으며 그를 통한 『황화집 皇華集』의 편찬으로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그의 글씨는 충주의 화산군권근신도비(花山君權近神道碑)에 남아 있다. 시호는 문충이며, 대구 귀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서울 신답역과 그의 생전 거주지 용마터널까지의 사가정로, 서울 지하철 7호선의 사가정역은 그의 호를 딴 이름이다. 묘비는 조선숭정대부 좌찬성 달성군 시문충사가 서공거정묘(朝鮮崇政大夫 達城郡 諡文忠四佳徐公居正墓) 정경부인 선산김씨부貞敬夫人善山金氏附)라 써있고 아래로는 그 후손들의 묘들이 있다. 시문충(諡文忠)의 ‘시(諡)’라는 뜻은 임금이 생전의 공덕을 칭송하여 내려준 시호(諡號)이다. 서거정 선생은 대구 출신으로 원래 묘지는 서울 방이동에 있었으나 서울 도시개발 계획으로 1975년도 이곳으로 이장을 했다.
지맥을 끊어놓은 43번도로를 우회하여 왕림지하차도 굴다리를 건너서 오른쪽으로..
♤ 43번 국도횡단/ 왕림통로
왕림휴게소에서 북쪽 고개로 향하고, 노유령에서 좌틀하여 포장도로로 올라선다. 국도를 횡단하여 오른쪽으로 이동하면 들머리가 있다. 화인폴리머회사를 지나 좌틀로 삼천병마로 양회임도를 따라 오른다.
♤ 삼천병마골(三千兵馬谷)/ 노유령(老留嶺)
이곳 왕림리 낮은 고개를 중심으로 하여 동쪽으로 뻗어있는 현재의 장안대학 뒷산과 서쪽으로 연결되는 삼보광업소 산까지를 합쳐서 예부터 삼천병마골이라 불러오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오산의 독산성에 권율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다는 첩보를 듣고 공격하였으나 권율장군의 기지로 대패하고 도주하여 이곳 고개를 넘어가게 되었는데 권율장군은 왜군이 이곳을 통하여 도주하리라 미리 알고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공격하니 왜군이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였다고 한다. 이 때 죽은 왜군의 숫자가 무려 3천여 명에 이르러 전후에 마을 주민들이 이 고개를 삼천병마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1794년(정조 18년)에 간행된 '수원부읍지'의 산천 편에서 노유령(老留嶺)이 보이는데 위치나 정황으로 보아 지금의 삼천병마골의 예전 이름으로 보인다.
♤ 88.4m봉/ 삼리봉(봉담읍 상리, 왕림리 → 상기리)/ 상기리갈림길/ 건달산 분기봉
화인 폴리마를 지나 양회임도가 끝나는 지점에서 삼봉산 제1봉 1.6km 이정목을 만나고 테밀리 테니스장으로 올라서며 지맥 왼쪽이 왕림리에서 상기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개발제한구역이라는 말뚝이 있는 상기리 방향은 지맥에서 건달산이 분기하여 나가는 곳이다.
♤ 삼봉산1봉(225.2m)/ 삼각점봉/ 삼리봉(봉담읍 상기리, 상리 → 내리)
장의자 두개가 있는 220m봉에서 급우틀하고 앙증맞은 돌탑이 있는 안부를 지나 다시 오른 봉우리이다. 커다란 암릉과 2층으로 된 팔각정자와 각종 체육시설이 즐비하고 삼봉산 안내판과, 이정표가 있다. 지맥의 오른쪽이 상리에서 내리는 바뀌는 삼리봉이다. 화성시는 이곳을 삼봉산이라 하지만 실제 삼봉산은 이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고 세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삼봉 중에 제1봉이다. 약 10m 앞에 팔각정이 있다. 삼각점은 식별 불가다.
♤ 호연동고개
화성시 봉담읍 호연동과 안골을 잇는 고개이다. 오른쪽으로 봉담읍 내리 장안마을로 이어지는 등로는 거의 보이질 않고 왼쪽은 봉담읍 상기리 장안이 마을로 이어지는 고개인데 지형도상에는 넓은 도로로 표기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아주 좁은 등로이다.
♤ 234.1m봉(헬기장)
호연이고개에서 급경사를 약 10분 오른 넓은 공터가 있는 봉우리이다. 가야할 삼봉산 정상과 그 왼쪽으로 오두지맥 분기봉이 보인다. 우틀로 꺽어져 봉담읍 상기리 안골마을을 잇는 안부고개로 내려선다.
♤ 봉담읍 상기리 호련이 마을
등로에서 호련이 마을이 보인다. 백학과 홀연이, 갓등이는 천주교 박해 시대에 피난해 온 교우들로 이루어진 교우촌으로 교우촌 형성에 모든 조건을 갖춘 곳이며 주위에 질그릇을 만들 수 있는 흙이 있어 옹기 가마를 만들어 그들의 생계를 꾸리는데 더 없는 조건을 갖춘 천혜의 요지다. 태행산과 삼봉산의 깊은 산줄기에 서향으로 쌍학이 있고 동향으로 홀연이며, 앞산 사명산이 앞을 가로 막아 홀연이 계곡 마을은 천혜의 은거처로 안성맞춤이다. 태행산과 삼봉산 사이인 가파른 홀연이 고개를 넘어서 완만하고 긴 산골길을 700m 정도 가면 농장 가옥 한 채가 오른쪽 산골 속에 있는데, 이 계곡 이름이 ‘멍우리’라 하고, 이곳에 점터가 있었다 한다. 그리고 더 아래로 내려오면 왼쪽으로 ‘윗말’이라는 동네가 있고 그 아래 동네가 ‘홀연’이다.
삼봉산 오르는 중간에 헬기장을 지나고 이후부터 삼봉산까지 급경사 오르막 등로입니다.
♤ 삼봉산(三峰山, 270.5m)/ 삼뱅이
화성시 북동쪽에 위치한 삼봉산은 봉담읍 내리와 상기리, 비봉면 쌍학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남서 방향으로 산맥이 형성되어 비봉면 청요리 태행산과 연결된다. 삼봉산은 세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붙여진 이름으로, 지역에서는 삼뱅이라 부른다. 바깥삼뱅이, 안쪽삼뱅이 등 주위 지명들은 삼봉산을 중심으로 명명되었다. 삼봉산은 서봉지맥 능선 분기점에서 시작한 산줄기인 태행지맥에 속하며, 태행지맥은 삼봉산의 남서 방향으로 산맥이 형성되어 비봉면 청요리 태행산과 연결되고, 삼봉산~태행산~구봉산으로 이어지다가 3개의 산줄기로 갈라진다. 화성상리유물산포지는 삼봉산 북사면 완경사지에서 삼봉산으로 이루어진 등산로 주변에 형성되어 있는데, 약간의 삼국시대의 경질 타날문토기편과 조선시대 자기편이 채집되었고, 입지와 채집 유물의 양상으로 볼 때 삼국시대와 조선시대의 분묘유적이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삼봉산의 북쪽에는 리기다소나무 군락이 분포하고, 쌍학리 주변과 계곡부에는 아까시나무 군락이 분포한다. 정상부에는 능선과 구릉지에 졸참나무, 굴참나무, 상수리나무와 같은 낙엽활엽수 군락이 있다. 남쪽 능선과 사면에는 상수리나무 군락이 분포하며 소나무와 참나무 혼효림이 존재한다. 삼봉산에서는 2012년부터 문화예술과 자생특화축제를 위한 목적으로 자연보호와 주민 화합을 내세운 삼봉삼담축제가 시작되었다. ‘삼봉삼담(三峰三潭)’이라는 축제명은 건달산, 삼봉산, 태봉산 등 삼봉(三峰)과 상기리 저수지, 상리저수지, 덕우저수지 등 삼담을 의미하는데, 각종 체험, 교육, 생태 프로그램을 결합한 콘텐츠로 많은 지역 주민들이 참여하고 있다.
♤ 지네산
국토지리원 자료에는 삼봉산이고 화성시에서는 지내산으로 표기하였다. 원래 지네산은 이곳이 아니고 화성시 우정읍 이화리에 있는 산으로 기아자동차 화성공장이 들어서며 2000년에 자동차공장을 확장하면서 산이 통째로 없어졌다고 한다. 지내산의 지명 유래는 임진왜란 때 민관군이 이 산에서 왜병과 접전을 벌이며 불리한 상황에 처했을 때 홀연히 짙은 안개가 피어나 조선군을 돕고 왜군을 물리쳤다 한다. 그런데 그 안개가 피어나는 모습이 마치 지네가 독을 품는 모습 같다 해서 지네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정말 악이 받친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지네산 높이가 300미터가 되지 않으나 충남 당진까지 거침없이 경치를 볼 수 있었다. 삼봉산에서 지네산으로 이동하는 길은 그다지 좋지 않다. 길이 불분명할 뿐더러 삼봉산 줄기에서 내려와 지네산으로 오르는 길은 그 경사가 끔찍하게 높다. 고도는 300미터도 되지 않는데 체감은 500미터인듯 하다. 경사도 가파르고 흙이 부서지고 미끄러웠는데 최근 야자매트가 깔렸다.
지맥이 봉담읍에서 비봉면에 닿는 곳으로 화성비봉TG와 전망데크 갈림길 이정목이 서있습니다.
♡ 삼봉산 갈림길/ 덕고개 갈림길/ 읍면계(봉담읍 상기리- 비봉면 쌍학리)
여기부터 지맥의 오른쪽이 비봉면 쌍학리로 접어들어 봉담읍 상기리와 비봉면 쌍학리의 경계를 따른다. 선답자들 산행기에 덕고개 갈림길로 나오는데 이곳에서 덕고개까지는 꽤나 먼거리이다. 덕고개는 비봉면 쌍학리 개묵동에서 봉담읍 내리 덕고개 마을로 이어지는 고개다. 봉담읍 내리는 예전에 내시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라 붙혀진 지명이다. 화성시에 설치한 이정표에는 삼봉산 갈림길이라 했는데 이게 맞는듯 싶다.
♤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飛鳳面)
비봉면 화성시 북부에 위치한다. 동쪽은 매송면과 봉담면, 남쪽은 팔탄면, 서쪽은 남양동, 북쪽은 바다 건너 광명시와 매송면에 닿아 있다. 고구려시대 당성군, 통일신라시대 당은군, 고려시대 당성군에 속하였다. 비봉면은 조선시대에는 남양부 며지곶면 일대였다. 1906년 비입지(飛入地)와 두입지(斗入地)를 정리할 때 인천부 이포면이 남양군으로 이속되면서 일부가 남양군 며지곶면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남양군이 해체되고 남양군 며지곶면과 저팔리면 일부를 병합하여 수원군 비봉면이 신설되며 비봉산의 이름을 따서 비봉면이라 하였다. 당시 수원군 비봉면은 9개 리를 관할하였다. 1949년 수원군 수원읍이 수원시로 승격되고 수원군의 일부 지역이 화성군으로 신설되면서 화성군 비봉면이 되었다. 1983년 면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비봉면 상기리가 봉담면(현 봉담읍)에 이속되었다. 2001년 화성시 비봉면이 되었다. 2002년 매송면 야목리 일부가 비봉면 구포리에, 비봉면 구포리 일부가 매송면 야목리에 편입되었다. 1954년 6월 8일 11개 리로, 1955년 6월 3일 23개 리로 재조정되었으며 1983년 상기리를 봉담면에 넘겨주어서 8개리가 되었다. 비봉면 북쪽 끝에 시화호가 있다. 비봉면의 하천은 북부 지역에 남전천, 동화천 본류와 지류인 구포천이 흐르고, 남부 지역에 자안천 본류와 지류인 요곡천이 흐른다. 남전천은 비봉면 양노리를 시점으로 하고 시화호를 종점으로 한다. 구포천은 비봉면 구포리를 시점으로 하고 비봉면 동화천을 종점으로 한다. 자안천은 비봉면 청요리를 시점으로 하고 팔탄면 화성호를 종점으로 한다. 요곡천은 비봉면 청요리를 시점으로 하고 팔탄면 자안천을 종점으로 한다. 주요 도로로 서해안고속도로, 국도 제39호, 지방도 제313호가 비봉면 중앙부를 남북으로 가로지른다. 또한 수도권제2순환고속도로와 지방도 제322호가 남쪽 경계부를 동서로 지난다. 비봉면행정복지센터는 양노리에 위치하고 있다.
♤ 화성시 비봉면 쌍학리(雙鶴里)
쌍학리는 비봉면의 동부에 위치한다. 북쪽으로 구포리와 매송면 숙곡리, 동쪽으로 봉담읍 내리, 남쪽으로 청요리와 봉담읍 상기리, 서쪽으로 자안리·양노리와 접하고 있다. 『지명유래집』에 따르면 마을을 지나가던 왕이 산의 형태가 두 마리의 학의 모습과 같다고 하여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또한 백학이 무리 지어 두 곳에 서식하였는데 한 곳은 백학, 또 다른 한 곳은 백학의 동쪽이라고 하여 동학리로 불렀으며, 후에 두 곳을 합쳐 쌍학리가 되었다고도 한다. 쌍학리는 남부의 산지와 북부의 평야지대로 구분된다. 남쪽에 태행산(294.8m), 삼봉산(270.5m)이 있으며, 삼봉산에는 아까시나무 군락이 분포한다. 태행산과 삼봉산 북쪽 사면에서 구포천이 발원하여 쌍학리 일대를 흐르며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저평지를 형성한다. 구포천 주변의 저평지는 주로 농경지로 이용된다. 주요 도로로 비봉매송간도시고속도로가 쌍학리 중부를 동서로 관통하며 화성비봉 요금소가 있다. 또 쌍학리 북서쪽으로 국도 제39호와 지방도 313호가 지나간다. 쌍학2리에 서울대교구의 천주교 비봉 103위 성인 추모공원이 있다.
♤ 백학고개(88m)/ 백합고개/ 백함고개
오른쪽은 비봉면 쌍학리로 향하는 길이고 왼쪽으로는 봉담읍 상기리 호연동으로 향하는 길이다. 조금 전에 지나온 이정표에는 태행산이 1.65km로 되어 있는데 이곳은 630m라고 되어 있다. 이곳에서 630m 거리에 있는 곳은 화성시에서 태행산이라고 부르는 268m봉(오두지맥 분기봉)을 말함이다. 백학고개를 가로질러 태행산으로 향한다.
♤ 백학(白鶴) 교우촌
태행산과 삼봉산 기슭에 위치한 교우촌으로 1866년 병인박해 이전부터 형성되었다. 초기 신앙 선조들은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숨어들어와 삼십여 가구가 신기슭에 자리를 잡고 움막집에 기거하며 화전을 일구어 생활하였다. 오래된 가마터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박해 시대 때 어느 신앙 교우촌이 그러하듯 이곳에서도 생계 유지를 위하여 옹기그릇을 만들어 팔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제2대 교구장인 성 엥베르 주교(1795~1839)의 시목 활동과의 연관성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이곳에 당시 엥베르 주교의 명에 따라 본당 설립을 위해 닦아 놓았던 터가 남아있다.
지맥의 좌우가 봉담읍과의 읍면 경계를 벗어나 완전하게 비봉면으로 들어서는 지점입니다.
♤ 오두지맥 분기점(266.4m)/ 헬기장/ 읍면계/ 삼리봉(비봉면 쌍학리, 봉담읍 상기리 → 비봉면 청요리)
헬기장이 나오고 왼쪽 끝에 글씨가 마모되어 판독이 어려운 3등삼각점과 사격장 표시를 나타내는 깃발도 있다. 헬기장 오른쪽에 준희선생님 오두지맥분기점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이정표(←백학고개 630m ↑등산로 없음 ↓자안리 2km)가 있는데 등산로 없음이라는 곳이 오두지맥길이다. 화성시에서는 이곳을 태행산이라 표기했는데 태행산은 한참을 더 가야 한다. 지맥의 왼쪽이 비봉면 청요리에 접어들어 지맥은 좌우 온전하게 비봉면으로 접어들며 오른쪽으로 진행한다.
♤ 화성시 비봉면 청요리(靑蓼里)
청요리는 화성시 비봉면의 남부에 위치한다. 청요리는 북쪽으로 쌍학리, 동쪽으로 봉담읍 상기리, 남쪽으로 팔탄면 창곡리, 서쪽으로 자안리와 접하고 있다. 청요리는 조선 시대 남양부 저팔리면에 속하였다. 『호구총수』에 저팔리면 소속으로 기록된 청령동(靑令洞)이 청요리 일대에 해당한다. 『지명유래집』에 따른면 푸른(靑) 갈대(蓼)가 많이 자생하였고, 마을에 정착한 사람들이 푸른 갈대를 이용하여 살구지를 만들어 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한 것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남양군 저팔리면 청령동과 요곡동이 병합되어 각 한 글자를 따서 수원군 비봉면 청요리로 개편되었다가 1949년 화성군이 신설되고, 2001년 화성군이 화성시로 승격되면서 화성시 비봉면 청요리가 되었다. 청요리는 북쪽에 태행산(294.8m)이 있으며, 동쪽까지 산능선이 이어진다. 태행산 남사면에서 요곡천이 발원하여 청요리 중앙부를 남서류하다가 자안리에서 자안천에 합류한다. 요곡천 흐르는 청요리의 중앙부와 남부, 서부는 저평지가 발달한다.
♤ 오두지맥이란
오두지맥(漢南烏頭枝脈)은 한남정맥의 수리산 아래쪽의 감투봉(185m)에서 분기한 서봉지맥이 화성시 봉담읍 장안대 뒤에서 서쪽으로 다시 분기한 태행지맥의 태행산(268m)에서 또다시 남서쪽으로 분기해서 오두산(烏頭山, 140.6m), 천덕산(133.5m), 남산(107.3m), 봉화산(61.3m), 불로산(62.1m), 보금산(59.7m)을 지나 화성시 우정읍 매향리 선착장에서 서해바다에 그 맥을 다하는 발안천 왼쪽의 산줄기로 도상거리 31.9km이다. 대부분이 공장지대와 도로의 비산비야 지대로 독도에 어려움이 많고 산행의 묘미는 떨어지나 맥은 살아 있다. 산경표에서는 한북정맥의 끝자락을 장명산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신 산경표에서는 한북정맥의 끝자락을 한강봉에서 개명산~월롱산~오두산으로 이어진다고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산꾼들은 신 산경표 한북정맥 상에서 오두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오두지맥(烏頭枝脈)이라고도 부르고 있는 바, 이와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한남오두지맥(漢南烏頭枝脈)이라 표기하는게 좋을 듯 하다.
♤ 오두지맥 개념도
화성에서는 건달산 다음으로 높다더니 전망이 좋습니다. 가야할 지맥 방향으로 발아래 태행산동원예비군훈련장이 내려다 보이고 그 뒤로 지맥을 깍아먹은 삼표산업 채석장이 흉물스럽게 상처를 내보입니다.
♤ 태행산(泰行山, 294.8m)/ 전망데크/ 삼리봉(비봉면 쌍학리, 청요리 → 자안리)
화성시 비봉면 청요리·쌍학리·자안리에 걸쳐있는 비봉면의 진산이다. 조망이 좋고 정상에 데크목이 설치되어 비박 성지로도 알려져 있는데 주위에 산불이 난 흔적들이 보인다. 명칭 유래를 알 수 없지만 『여지도서』와 『남양부읍지』 등에는 태산(台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조선지지자료』에는 남양군 저팔리면 산 이름에 태산이 수록되어 있으며 언문(諺文)으로 태행산이라 적혀있다. 조선 500년 내력의 풍수비기를 다룬 손감비결에 의하면 화성시 비봉면에 있는 태행산에는 이성계에 얽힌 전설이 있다. 이성계가 자기의 태를 묻기 위해 명산을 찾던 중 이 산의 양지 바른 곳에 태를 묻었다. 그후 이성계 태를 묻은 산이란 뜻에서 태행산이라 이름을 지었다 한다. 태행산 서쪽 계곡에서 발원한 하천은 자안천으로 상류에서는 지류인 요곡천, 하류에서는 무봉천과 합류하여 화성호로 유입된다. 태행산은 화성 시내에서는 비교적 높은 고도를 가진 산이다. 태행산은 산지의 중턱까지 경작지로 이용되었으나 최근 인간의 영향이 감소하여 식물상이 회복되고 있다. 또한 환경부에서 실시하는 2021년도 도시 생태축 복원사업에 화성시가 선정되었으며, 이 사업을 통해 지방도 제322호로 단절되었던 태행산을 포함한 구역들을 연결하는 생태통로가 조성될 계획이다. 정상 데크목 광장을 내려서면 왼쪽으로 일반 등산객들이 내려 가는 등로가 뚜렷하다. 지맥은 계단으로 내려서지 않고 직진으로 이어지며 군부대 민간인 출입금지 표지판이 나오고 좌우로 군부대 시설물이 나타난다.
♤ 재양현성(載陽縣城)
비봉면 청요리 태행산 기슭에 있는 성곽으로 고려시대 속현인 재양현의 소재지를 둘러싸고 있던 성으로 추정된다. 재양현성은 포곡식(성 내부에 계곡을 포용하고 있는 형태) 석축으로 태행산 남쪽 기슭 해발 100∼110m 정도 높이의 경사면을 깎아내 정상부의 사용 면적을 넓히고 이를 최고점으로 하여 계곡을 둘러싸며 성벽을 쌓았다. 성 정상부의 면적은 300평 정도에 이르며, 원래의 성벽 길이는 300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 안쪽 계곡 부위에도 계단식으로 다시 경사면을 깎아 건물터를 두었다. 성내에는 가장자리를 돌로 쌓은 우물이 한곳 있으며, 건물지가 두동, 문터로 추정되는 곳이 한곳 있으며 문터 옆에는 주춧돌로 보이는 큰돌이 놓여 있다.
♤ 230m봉/ 삼리봉(비봉면 자안리, 쌍학리 → 양노리)
태행산에서 약 250m 내려선 지점으로 사격장 방향 통행금지 안내판에서 직진의 뚜렷한 등로를 버리고 좌틀하여 잡목구간을 급경사로 내려서며, 지맥의 오른쪽이 쌍학리에서 양노리로 바뀌어 여기부터 자안리와 양노리의 경계를 따른다.
♤ 화성시 비봉면 양노리(兩老里)
화성시 비봉면 양노리는 비봉면의 서부에 위치하며 북쪽으로 삼화리, 동쪽으로 쌍학리, 남쪽으로 자안리, 서쪽으로 남전리와 남양읍 북양리와 접한다. 양노리는 조선시대 남양부 며지곶면에 속하였다. 『호구총수』에 며지곶면 소속으로 기록된 건노동과 백노동이 양노리 일대에 해당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남양군 며지곶면 건노동과 백노동이 병합되며 두 마을의 이름을 따서 수원군 비봉면 양노리로 개편되었다가 1949년 화성군이 신설되고 2001년 화성군이 화성시로 승격되면서 화성시 비봉면 양노리가 되었다. 『지명유래집』에 따르면 사이 좋은 두 노인이 산을 끼고 서로 다른 마을에 살며 항상 왕래하였는데 어느 날 저녁 귀가 중에 한 노인이 별세하자 다른 노인 또한 저승에 가서 만나야겠다고 세상을 이별하였다는 전설에 따라 지어졌다고 한다. 양노리는 남쪽과 동쪽으로 삼봉산(270.5m)과 태행산(294.8m)이 있어 산지가 넓게 발달한다. 주요 도로로 동부 지역을 서해안고속도로와 국도 제39호가, 서부 지역을 지방도로 제313호가 남북으로 지나간다. 양노리의 서해안고속도로에는 양노나들목과 백학나들목이 있다. 또 북부 지역으로는 비봉매송간도시고속도로가 동서로 지나간다. 남양읍 북양리의 북양산업단지와 인접한 양노3리에는 비봉양노공단이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화성시 기념물로 지정된 평양 조씨 묘역인 ‘조세성 묘, 조동점 묘, 조완 묘’가 있다.
♤ 명우리고개
한참 내려서서 임도가 좌틀하는 곳에서 군참호를 만나는데 이곳을 명우리 고개라고도 한다. 임도 왼쪽 산길로 오른다.
♤ 159.4m봉/ 군초소봉
좌우로 군부대 시설물이 보이는 안부를 지나 30분 정도 내려서면 망가진 군부대 초소와 망루가 보이고 바로 아래는 이동통신탑이 있다. 넓은 임도를 따라 내려선다.
♤ 양로고개/ 푸른들판로
화성시 비봉면 양노리와 자안리를 잇는 군부대 정문 앞 도로로 도로를 가로질러 오른쪽 낙석방지철망 끝에서 배수로를 건너 능선으로 오른다.
♤ 167.8m봉/ 폐망루
그네가 있는 나무가 있고 참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져 있다. 다시 되돌아 나가 우틀로 진행한다.(독도주의) 작은 돌탑이 있는 무명봉을 지나고 밤나무가 많은 능선을 업다운으로 진행한다.
♤ 167.7m봉
평평한 등성이로 준희선생님 산패는 찾지를 못했고 접근금지 군경고 안내판이 서있다. 정상을 내려서면 군부대 각개전투 훈련장 시설로 보이는 타이어가 있는 곳에서 직진방향 타이어계단으로 내려서면 알바이다. 지맥은 좌틀로 꺽어져 내려서며 군부대 통제지역을 벗어난다.
♤ 39번 국도/ 서해안고속도로(암거 통과)
절개지에서 우틀로 내려서서 39번자동차전용국도를 암거로 통과하고 연이어 39번 구도로(푸른들판로)에서 좌틀한다. 늘푸른산업(주) 폐기물 처리장을 지나고 곧바로 (주)비봉폐차산업을 끼고 우틀로 들어서서 15번서해안고속도로(암거)를 통과한다.
♤ 남양개발/ 삼표산업(골재채취장)
서해안고속도로를 암거로 통과하면 삼표산업 들어가는 콘크리트 구조물이 나온다. 철문으로 닫혀있어 배수로 철문 아래로 하단통과 돌파하니 넓은 채석장이 나오고 원지맥길은 오른쪽이지만 지맥길은 채석장이 모조리 해잡수셨다. 채석장 왼쪽편으로 망가진 태행지맥을 걷다가 도로를 버리고 왼쪽으로 145m봉에 올라선다. 지역소식지에 따르면 35년간 화성 비봉면 내 석산에서 골재채취 사업을 해온 삼표그룹이 채석허가가 만료된 일부 부지에 폐기물 매립장 조성을 추진하면서 지역사회의 거센 반발에 부딪히는 상황이다.
♤ 145m봉/ 비봉면 - 남양읍 경계/ 삼리면(비봉면 양노리, 자안리 → 남양읍 북양리)
145m봉을 내려서며 지맥의 왼쪽이 비봉면 자안리에서 남양읍 북양리로 바뀌며 왼쪽으로 화성시 남양읍 소재 북양공단이 자리를 잡고 있어 공단지대를 통과해야 한다. 읍면계를 벗어나 잠시 남양읍 북양리로 들어섰다가 염치고개를 넘어 다시 비봉면과 읍면경계를 따르는 우회 지점이다.
♤ 화성시 남양읍(南陽邑)
남양읍은 화성시 중앙에 위치하며, 화성시청의 소재지이다. 남양읍의 남서쪽은 남양만, 북쪽은 새솔동, 동쪽은 비봉면·팔탄면, 서쪽은 마도면에 접한다. 1290년(충렬왕 16) 남양 출신의 홍다구(洪茶丘)가 원나라에 가서 정동행성우승에 임명되었다고 해서 지익주사로 승격시켰다. 뒤에 강녕도호부(江寧都護府), 익주목으로 바뀌었다. 1310년(충선왕 2) 모든 목(牧)을 없앨 때 남양으로 이름을 고치고 부로 격하되었으며, 1895년(고종 32) 23부제를 실시할 때 인천부 남양군이 되었다가, 1896년 13도제를 실시하면서 경기도의 남양군이 되었다. 1914년 남양군이 해체되면서 남양군 영흥면·대부면은 부천군, 나머지 지역은 수원군에 편입됐다. 이때 남양군 음덕리면·화척지면·둔지곶면이 합쳐져 수원군 은덕면이 되었다. 1949년 수원읍이 수원시로 승격되고, 수원읍을 제외한 수원군이 화성군으로 개칭되면서 은덕면은 화성군 남양면이 되었다. 남양읍은 북동부에 해망산(海望山, 125.8m), 서부에 고초봉, 146.3m), 중앙부에 무봉산(舞鳳山, 201.5m) 등 낮고 완만한 구릉성 산지가 발달한다. 중앙부로 남양천, 남쪽 경계로 자안천이 흐르며 두 하천은 남서쪽에서 합류해 화성호를 이룬다. 남양읍의 주요 산업시설로는 현대자동차 남양기술연구소가 있으며, 산업단지로는 무송공업단지, 화성기계협동공단, 북양산업단지가 있다. 주요 연결도로는 수도권 제2순환고속도로, 평택시흥고속도로, 국도 제77호, 지방도 제313호·제318호·제322호가 있다.
김치찌개로 식사를 하고 채석장 지대를 벗어나 양노리 공단이 있는 곳으로 산 정상부를 깍아내고 양노리공단이 조성된 곳으로 오릅니다. 옆으로 공단 사이를 지나면 되는걸 괜히 고개를 넘어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왔네요.
♤ 북양산업단지/ 비봉면 - 남양읍
남양읍 북양동 삼거리에서 비봉면 양노리로 이어지는 2차선 도로로 내려서면 경동택배가 바로 앞에 있다. 이곳은 남양읍과 비봉면의 경계인데 비봉면의 표지판이 있는 오른쪽으로 간 다음에 도로를 횡단하여 왼쪽으로 오른다. 이곳도 예전 채석장이었던 곳에 공장들이 들어서고 있다. 멀리 121.6m봉을 바라보며 끊어지고 사라진 마루금을 비틀비틀 곡예하듯 걸어간다.
언제적 엄마네 식당인지 만나보질 못했습니다. 마루금에 포진한 양노리 공단을 지나며 만나는 장소인데, 저는 남아있는 봉우리 옆으로 뒤편으로 넘어갔다 다시 올라와 만나질 못했네요. 양노리공단은 담장을 넘어야 하기에 옆으로 진행하진 못하고 아래로 내려왔다 다시 올라가는 식인가봅니다.
♤ 121.6m봉/ 읍면계(비봉면 양노리 - 남양읍 북양리)
공장지대로 내려서서 엄마네 식당매점 골목길로 들어서서 공장지대 뒤쪽으로 월담하여 뒤쪽 산 능선으로 올라선다. 정상에 이르니 전주이씨 가족묘가 나오고 나무 위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달려 있다.
121.6m봉을 우회해서 염치고개로 오르기 전에, 양노리버스정류장 주위에 식당과 편의점이 있고, 사당역(1002번), 수원역(1004-1번, 999번, 400번)에서 제부도로 버스가 부지런히 오갑니다. 수원까지 35분 소요.
♤ 염치(鹽峙)고개/ 염티고개/ 306번 4차선지방도/ 북양리 염지동(念地洞)
화성시 남양읍 북양1동에서 비봉면 양노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가 있다. 소금은 산간벽지에서도 필요로 하는 생활소모품으로 예로부터 소금의 수송은 인간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이다. 소금과 관계되는 이름으로 '염치명(鹽峙名)'이 많이 붙여져 있다. 이 중에서 소금을 지고 넘었던 고개를 염치라 하여 전국 각지에 많은 전설 등과 함께 남아 있다. 이곳의 지명 유래는 남양읍 북양리 염지동 마을 뒷산에 옛날에는 절이 있었으나 폐사가 된 후 한때는 불당골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주민들 이 "그 절을 잊지 말고 염두해 두라"는 뜻에서 염티고개라 부르다가 다시 염치동 또는 염치로 불려졌다고 전한다.
♤ 113.1m봉/ 읍면계(남양읍 북양리 - 비봉면 남전리)/ 판문동갈림봉
염치고개에서 올라서면 만나는 남양홍씨 쉼터를 지나 편안한 등로를 따라 오르며 화성시 비봉면과 남양읍의 경계를 이루는 능선으로 밤나무 단지를 지나서 자작나무 조림지가 나오고 등로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벗어나 있는 113.1m(법광님 띠지)봉에 닿고 다시 되돌아 나와 10여분 걸으면 잠시 후 판문동 갈림봉이 나온다. 편한 등로를 걷다가 뚜렷한 직진 등로를 버리고 왼쪽 10시 방향으로 꺽어져 지맥길을 이어간다. 직진 방향으로는 비봉면 판문동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오른쪽으로 안산시 상록구 시가지와 수리산, 관악산이 보인다.
♤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갈림길
화성시 비봉면 남전2리에는 조선 초기의 무신인 충무공 남이(南怡, 1441∼1468) 장군의 묘소가 있다. 의령 남씨 족보에는 1443년 계해생으로 되어 있다. 고조 할아버지는 개국공신이자 영의정부사인 충경공 남재, 큰할아버지는 문종의 고명대신이자 좌의정을 역임한 충간공 남지, 둘째 할아버지는 세종의 총애를 받은 예문관 직제학(증 대사헌) 남간, 할아버지는 부마도위 의산군 남휘, 할머니는 태종의 딸인 정선공주이고 아버지는 군수 남빈, 어머니는 현감 홍여공의 딸이다. 남이는 개국공신의 후손으로 태종의 외증손이 된다. 아버지까지는 종친 대우를 받았다. 그가 태어난 생가는 낙산 아래로 조선 초기 행정 구역으로는 연화방이었으나 조선 말기에는 '남이탑골' 혹은 '남미탑동'으로 불렸다. 그의 생가는 역적의 생가로서 빈터로 버려졌다. 근처 주민의 꿈에 나타나자 그가 몰래 향을 꽂아 임시방편을 삼았던 것이, 순조 때인 1818년에 사면복권이 되자 정식으로 사당을 세워 그 넋을 달랬다고 한다. 젊은 청년이 거열형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억울하게 죽었다는 당시 세간의 여론과 함께 신으로 모셔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시대 때 연화방과 건덕방을 합쳐 연건동이 됐다. 현재는 대학로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서울대학교병원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있는 연건캠퍼스 이름의 유래가 됐다. 남이와 그의 모친인 남양 홍씨만 처형되고 그의 딸은 노비로 갔다가 1년 후 풀려나고 의령 남씨 족보에 따르면 해주 오씨 참판공파인 양반 오백옹에게 출가한다. 남이의 동생도 귀양으로 그친다. 외가인 남양홍씨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화성에 묻었다고 한다.
전국에 남이장군과 관련한 사당, 지명, 전설이 산재한 가운데 그의 가묘는 가평 남이섬에도 있습니다.
♤ 남이(南怡, 1443~1468)장군
남이장군은 조선 전기 무신으로 여진족 토벌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세조 3년(1457)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남이장군은 세조 13년(1467) 이시애의 난에서 세운 전공으로 26세에 병조판서의 자리에 올랐으나, 훈구대신을 등에 업은 유자광의 고변으로 역모 혐의를 받아 1468년(예종1) 10월 27일, 강순, 변영수, 변자의, 문효량 등과 함께 군기감 앞 저자거리에서 처형되며 26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 뒤 순조 18년(1818)에 복직되었으며, 서울 용산의 용문사 및 충민사에 배향되었다. 순종 3년(1910)에 충무공 시호를 받았다. 현재 묘역에는 장군과 부인이 합장되어 있고 봉분은 2기이며, 봉분 아랫부분은 둘레석이 둘러져 있다. 묘 앞에는 묘비가 세워져 있고, 좌우에는 문인석과 망주석이 1쌍씩 있다. 비극적 삶을 살은 안타까운 무인이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구전 설화도 상당히 많이 남아있다. 조선 초기의 명장 남이에 관한 인물전설로 《연려실기술》 · 《청야만집》(靑野謾集) · 《대동기문》(大東奇聞)에 문헌자료가 전해지고 있으며, 구전설화도 전국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 문헌자료는 순수설화라기보다 여러 문집에 소재하여 있는 남이에 관한 기록을 인용한 것으로서 모두 같은 내용이다. 특기할 것은 《연려실기술》중 《국조기사》(國朝記事)의 자료를 인용한 남이의 결혼과정은 현재 구전되는 설화와 같은 것으로 보아 민간 전승을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설화는 서울특별시 성동구 사근동12길 5-11에 사람을 해치는 백호가 아차산을 거쳐 이 지역까지 나타나자 남이장군이 현 위치에 주둔하며, 맨주먹으로 호랑이를 잡아서 바위에 던져 때려잡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 白頭山石磨刀盡(백두산 돌을 칼을 갈아 없애고)
- 頭滿江水飮馬無(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
- 男兒二十未平國(남아 이십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 後世雖稱大丈夫(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칭하랴)는 시가 전해져 남이장군의 충절과 기백을 엿볼 수 있다.
♤ 107.6m봉/ 삼각점
넓은 길을 버리고 오른쪽 소로로 접어들면 107.6m봉이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나뭇가지에 매어 있고 등로 가운데 판독을 할 수 없는 검은삼각점이 있다. 완만하게 약 2분 진행하여 무명봉(103.3m)에 닿고 이 봉우리를 지나면서 등로는 좌틀이고, 오른쪽은 벌목 능선을 지난다.
♤ 106m봉
벌목능선 끝봉우리에서 오른쪽의 뚜렷한 등로를 버리고 왼쪽의 희미한 길로 꺽어지니 선답자들 시그널이 보인다. 잠시 후 무명봉(101.4m)에 닿고, 우틀로 내려서면 화성G.C 골프장 울타리를 끼고 오른쪽으로 급하게 꺽어져 내려간다.
♤ 101.4m봉/ 삼리봉(비봉면 남전리, 남양읍 북양리 → 송림리)
산패도 없고 띠지도 한장 보이지 않는 무명봉이다. 화성 G.C골프장 울타리에서 지맥의 왼쪽이 남양읍 북양리에서 송림리로 바뀐다. 산길을 내려서면 하니목장 건물이 보이고 목초지가 넓게 펼쳐진다. 목초지 오른쪽 가장자리를 따라 진행한다.
♤ 화성시 남양읍 송림동(松林里)
화성시 남양읍에 속하는 법정동인 송림리는 남양읍의 중앙부에 위치한다. 북쪽으로 시동, 서쪽으로 원천동, 남쪽으로 남양동·북양동, 동쪽으로 비봉면 남전리와 접한다. 송림동은 『한국지명총람』에 따르면 소나무가 울창하고 무성해서 송림으로 불렀다고 한다. 자연마을로는 삼부실·음부골·송림골·가운데골·맨막골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삼부실은 한씨·정씨·이씨의 세 부자가 살아서 이름 지었다고 한다. 송림동은 조선시대 경기도 남양군 화척지면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남양군 화척지면 송림동에서 수원군 은덕면 송림리로 개편되었다. 1949년 화성군이 개설되면서 은덕면이 남양면으로 바뀌어 화성군 남양면 송림리가 되었다. 2001년 화성군이 화성시로 승격하면서 행정동인 남양동의 법정동 송림동이 되었다. 2014년 남양동이 남양읍으로 전환되면서 화성시 남양읍 송림리로 개편되었다. 송림리는 대부분 100m 내외의 구릉성 산지가 발달되어 있고, 자연녹지지역이다. 남양읍 중에서도 다른 지역에 비해 구릉성 산지가 많아 개발 정도가 낮은 편이다. 북쪽의 구릉성 산지에서 남양천 지류가 발원해 남쪽으로 흐르며 곡저지 형성한다. 곡저지를 따라 농경지와 자연마을이 분포한다. 주요 도로는 국도 제77호와 지방도 제322호가 지난다. 주요 문화유적으로는 남양홍씨 열녀정려문(화성시 향토유적)과 정원채고가(경기도 민속문화재)가 있다.
♤ 능말고개/ 남양로/ 양회임도
남양읍 송림리와 비봉면 남전리를 잇는 고개인데 도로옆에 쓰레기가 지저분하다. 커다란 목장이 있고 남전리 방향으로는 인삼포가 보이고 목장의 목초지를 벗어나면 도로가 나오고 도로 건너 과수원 울타리를 따라 진행하다 울타리 끝에서 오른쪽 산길로 올라선다.
이상하리만치 누가 일부러 치운 것처럼 띠지 한장 보이지 않는 구간입니다. 수시로 핸폰을 빼들었네요.
♤ 93.2m봉
잡목들이 자리잡고 있는 93.2m봉으로 오르며 등로 아래로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남양읍지구가 내려다 보인다. 아래에는 묘지가 있고 맥길은 우틀로 내려선다.
비봉면과의 읍면경계를 벗어나 지맥의 좌우가 완전하게 남양읍 내안으로 진입합니다.
♤ 77번도로/ 삼부실(三富室)고개(65m, 동물이동통로)/ 삼리봉(남양읍 송림동, 비봉면 남전리 → 남양읍 시동)
삼부실고개 동물이동통로를 지나기 직전 무명봉에서 좌우 모두 온전하게 남양읍으로 접어든다. 화성시 남양읍 송전리 삼부실마을과 송림동을 잇는 고개로 77번 도로가 지나가는데 기존의 2차선 도로 옆에 새로운 4차선 도로를 건설하면서 공기 단축인지 공사비 절감인진 몰라도 터널로 뚫으면 고개가 유지되는데 굳이 고개를 파내고 다시 동물이동통로를 만들어 덮었다. 삼부실의 지명유래는 이 마을에 산 韓·鄭·李씨 성을 가진 세 사람의 내시가 부유한 생활을 했다는 데서 삼부실 또는 삼부실동이라 불려졌다고 한다. 생태통로를 지나면 절개지 위에서 왼쪽으로 울타리를 따라 진행하고 그 끝에서 시멘트 계단을 따라 산으로 오른다.
♤ 111.4m봉/ 삼리봉(남양읍 송림동, 시동 → 원천동)
서레아선배님은 이곳을 삼부실봉이라고 코팅지를 붙였고 맨발대선배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이곳부터는 태행지맥에서 악명높은 고행길이 시작된다. 길은 전혀 보이질 않고 태행지맥은 전체적으로 길은 나쁘지 않은데 가시잡목이 아주 심한 곳이 몇 군데 있다. 바로 그 몇 군데 때문에 태행지맥은 여름철에 하기에 부적합한 지맥군에 든다. 급좌틀로 꺾어서 내려선다.
♤ 118.6m봉
송전탑을 지나 오르는 무명봉으로 왼쪽의 뚜렷한 등로를 버리고 오른쪽으로 꺽어진다.
♤ 양회임도
아카시아 군락과 드센 잡목지대를 지나고 묘지 끝에서 좌틀로 내려서면 나오는 남양읍 원천동 원막마을과 송림동 양지말을 잇는 농로이다.
♤ 62.3m봉
백두산악회 띠지가 붙어 있다. 잡목 저항을 뚫고 임도로 내려서서, 성고개로 내려가는 임도를 버리고 우틀로 꺽어져 황토밭으로 향한다. 임도를 따르면 편안하고 마루금을 따른다면 고개 정상 도로를 무단횡단 해야 한다.
농장에서 키우는 똥개들이 맥꾼들을 반긴다던 지점입니다. 지금은 조용하네요.
♤ 성고개/ 4번군도/ 잔다리길/ 2차선도로
화성시 남양읍 원천동에서 송림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2차선의 4번 군도가 지나고 있고 오른쪽으로 원막마을이 보인다. 도로를 가로질러 묘지가 있는 왼쪽 비포장임도를 따라 고갯마루에 올라 좌틀로 산길에 들어선다. 원천동은 조선조 중엽부터 원실(遠室)이라 불려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기왕의 마을 곧 원모동(遠暮洞)의 원자와 천곡동(천곡동)의 천자를 따서 원천리(遠泉里)라 했다고 한다. 원모동(遠暮洞 )은 옛부터 원실(遠室)이라 불려 왔으나, 日暮가 되면 서쪽 산이 마치 병풍과도 같고 포장친 것처럼 장관을 이룬다는 뜻에서 원실의 원자와 일모의 모자를 따서 원모동(遠暮洞)이라 했다고 한다.
♤ 샘실고개/ 잔다리고개/ 삼리봉(남양읍 원천동, 송림동 → 남양동)
성고개를 지난 임도사거리에서 간벌지를 지나 길이 없는 아카시아군락지와 각종 가시가 도사리는 잡목지를 지나서 만나는 고개이다. 고개 아래에 있는 잔다리마을과 중곡마을 이름을 따와 잔다리고개 또는 중곡고개라고도 부른다. 고개 옆에는 꽤나 큰 목장이 보이고 젖소들이 많이 보인다. 잔다리는 팔탄면 서근리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 성주골길/ 수작(壽爵)이 마을
무명봉(70m)에서 좌틀로 내려선 비포장 도로가 지나는 고개이다. 안부 왼쪽 아래는 성주골 마을이 보이고 그 아래로는 수작이 마을도 보인다. 오른쪽으로는 축사가 보이는데 고개의 지명은 바로 아래의 마을에서 따온듯 싶다. 수작(壽爵)마을은 남양 소재지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고 하여 북동(北洞)이라고도 했고, 이 마을에서 원님이 두 사람 나왔다고 해서 수작동(壽爵洞) 또는 수작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 106.8m봉/ 읍면계/ 삼리봉(남양읍 남양동, 원천동 → 마도면 송정리)
준희선생님 106.8m봉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고, 알아먹을 수 없는 삼각점이 있다. 화성시 마도면 송정리와 만나는 지점으로 여기부터 솔티고개 직전 98.6m봉까지 마도면과 남양읍 남양동의 경계를 따른다. 길은 그다지 좋지 않다.
지인분이 마도에 가서 맛조개를 맛있게 먹었다고 했는데,, 마도면이 남쪽은 바다와 접한 곳이었군요.
♤ 화성시 마도면(麻道面)
마도면은 화성시 북서부에 위치하며 동쪽은 남양읍, 북쪽은 송산면, 서쪽은 서신면, 남쪽은 남양만에 접해있다. 조선시대 경기도 남양군 마도면과 쌍수리면 지역이었다. 마도면은 『지명유래집』에 따르면 과거 중국 사신이 배를 타고 건너오던 길로, 중국 사신이 삼베(麻)로 된 옷을 입고 지나간 길(道)이라고 하여 마도(麻道)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남양군을 해체하고 마도면과 쌍수리면을 병합해 수원군 마도면으로 개편했다. 1949년 수원읍이 수원시로 승격되고, 수원읍을 제외한 수원군이 화성군으로 개칭되면서 화성군 마도면이 되었고 2001년 화성군이 화성시로 승격되면서 화성시 마도면이 되었다. 마도면의 서쪽과 동북쪽으로 청명산(157.1m), 박석고개 등 100m 내외의 저산성 구릉지가 분포한다. 남쪽은 남양천이 화성호로 유입되며, 북쪽은 시화호로 유입되는 하천이 흘러 저습지와 간척지가 형성되어 있다. 마도면은 대부분 화강암질 편마암이 분포하며, 바다와 접한 지역은 충적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도면의 주요 도로는 평택시흥고속도로와 수도권제2순환고속도로가 마도분기점에서 만나며, 수도권제2순환고속도로의 마도IC와 톨게이트가 쌍송리에 있다. 지방도 제318호가 동서로 지나가고, 지방도 제322호가 북쪽을 지나간다. 마도면 행정복지센터가 석교리에 있는 등 지방도 제322호가 지나는 석교리와 두곡리 일대에 행정 및 도심 기능이 밀집해 있다. 마도면은 비봉면·팔탄면과 함께 화성시에서 공단이 많은 지역으로 경기화성바이오밸리 일반산업단지, 마도 일반산업단지, 송정산업단지, 청원공단, 쌍송공단, 은장공단, 금당공단, 고모리 공단 등이 있다.
♤ 음실고개/ 금강푸르뫼마을/ 남양읍 - 마도면
인근에 음실 마을이 있고 왼쪽으로 지맥길 턱밑까지 아파트가 밀고 올라와 있고 묵밭 절개지 사면으로 가파르게 오른다. 직전에 남양읍을 지난 지맥의 오른쪽이 마도면 송정리에 접어들어 남양읍-마도면 읍면계를 따른다.
♤ 114.6m봉
맥길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114.6m봉을 다녀온다.
선답자들 산행기에 높다란 공사장 가림막이 쳐져 있던 곳인데 공사가 멈췄어요. 흐마 다행~~^^
♤ 117m봉
등로에서 오른쪽으로 약간 벗어나 있는 장의자가 있는 114.6m봉에 다녀와 직진으로 진행한다. 117m봉으로 오르며 능선을 따라 드넓은 안부를 지나니 화성시 남양읍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삼국시대부터 당항성·당성 등으로 불린 이곳은 남양반도의 길목으로서 국제무역항의 구실을 하던 곳이며, 후한 때 제갈량의 고향인 남양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고 전해지는데, 그 뒤 음덕리(陰德里)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남양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렀으며, 이어 2001. 3. 21일 화성시 승격에 따라 동으로 전환되었다. 커다란 소나무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117m봉에서 내려서니 지맥길이 완전히 끊겨 길이 없어지고 공단이 들어설 곳을 지난다. 공사장 울타리가 가로막고 있는 117m봉 아래는 "6만 세대(15만 명) 주택 계획 송산그린시티공사"로 2030년까지 예정되어 있다. 은장고개로 가기 위해서는 터를 닦아놓은 절개지의 좌우측으로 우회하여 내려갈 수밖에 없다.
♤ 92.3m봉/ 공장지대(남양읍 남양동, 마도면 송정리 → 두곡리)
맨발대선배님 띠지가 자리를 지키는 92.3m봉을 지나니 은장고개로 향하는 맥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또 공장지대가 들어서 있다. 사라진 공장지대 지점에서 지맥의 오른쪽이 마도면 송정리 → 두곡리로 바뀌는데 이제 우회하는 노선이 되었다. 대산공업 공장 마당으로 내려서서 원지맥길을 우회한다. 대산공업 공장 마당을 빠져나오니 322번 지방도가 나온다. 은장고개 약 1.4km 직전에서 토목공사로 마루금이 완전히 사라져 현진인쇄 후문으로 들어가 정문으로 나와 은장고개에 도착하는데 이제 그마저도 어렵다.
도로를 따라서 은장고개로 향합니다. 은장고개 도로건너편 주유소 앞 버스정류장에서 제부도-수원역, 제부도-금정역을 오가는 1004-1, 330번 버스가 빈번히 있습니다. 1002번 버스는 330번이나 20-3번을 타고 두 정거장 가서 우림아파트에서 버스를 환승하면 됩니다.
♤ 은장고개/ 322번지방도/ 편의점/ 남양읍 - 마도면
화성시 남양읍 남양동과 마도면 쌍송리와 두곡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버스 정류장이 있고 306번 4차선 도로가 지나가는데 주위 은장공단에 공장들이 많아서 차량통행이 엄청나다. 횡단보도를 건너 왼쪽으로 진행하여 화성프라자 뒤의 능선으로 진행해야 하지만 절개지이고 뒤에 공장이 있어 횡단보도를 건너 오른쪽으로 쌍송리로 통하는 화성 장례식장 앞을 지나는 도로를 따른다.
꾸역꾸역 아침을 밀어넣고 집에서 145번을 타고 강남역에서 쟈철 2호선으로 환승해 사당역에 도착하고, 10번출구로 나가 06:10분 1002번 첫차를 타고 우림아파트에 내려 곧바로 20-3번으로 갈아타고 은장고개에 도착하니 07시입니다. 아무 생각없이 배수지까지 걸었네요. 여기는 화성장례식장에서 솔티고개로 도로를 따르며 생략되는 구간입니다. 지맥이 잠시 따르던 남양읍과 마도면의 경계를 벗어나 완전하게 마도면 내안으로 들어섭니다.
♤ 98.6m봉/ 삼리봉(마도면 두곡리, 남양읍 남양동 → 마도면 쌍송리)
화성장례식장에서 지맥길은 바로 앞에 있는 GS주유소가 보이는 곳에서 올라선다. 주유소 옆 절개지로 능선에 오르는데 길이 없어서 만들어서 가야한다. 등로가 보이지 않는 잡목 지대 정상에는 맨발선배님 띠지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절개지를 내려서면 또다시 공장지대가 기다린다. 극동철강 마당을 지나 공장문을 열고 도로로 내려선다. 지맥의 왼쪽이 남양읍 남양동에서 마도면 쌍송리로 바뀌면서 좌우 모두 온전하게 마도면으로 들어선다.
♤ 화성시 마도면 쌍송리(雙松里)
화성시 마도면 쌍송리는 마도면 동쪽에 위치하며 북쪽으로 석교리와 두곡리, 동쪽으로 남양동, 남쪽으로 신남리, 서쪽으로 청원리와 접한다. 자연마을로는 쌍봉, 송치, 거적리, 방죽암말, 송리동, 해광동이 있다. 쌍송리는 조선시대 남양군 마도면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남양군 마도면 쌍봉동과 송치동을 병합하여 각각의 머리글자를 따서 수원군 마도면 쌍송리로 개편하였다가 1949년 화성군이 신설되고 이후 2001년 화성군이 화성시로 승격되면서 화성시 마도면 쌍송리가 되었다. 쌍봉동은 『화성시사』에 따르면 마을 뒷산의 산봉우리가 두 개가 있어서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송치동은 솔티라고도 하는데 『한국지명총람』에 따르면 소나무 정자가 있어서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쌍송리의 자연마을 중 거적리는 거석동이라고도 하며, 과거 기와집을 짓고 부유하게 살던 박씨들의 집성촌이었는데, 노적가리를 쌓으면 다른 마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서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방죽암말은 거적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 방조제 구축으로 제방 내부에 있게 되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쌍송리의 동쪽은 본래 서해와 맞닿은 곳으로 염전이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경기염전(京畿鹽田), 해광염전(海光鹽田), 화남염전(華南鹽田) 등이 있었다. 그중에서 경기염전은 1957년에 준공되어 1980년대까지 운영되었지만, 시화방조제 건설로 화성의 다른 염전들과 함께 폐업하였다. 해광염전은 1919년에 만들어진 염전이었다. 폐염전에 1994년부터 2004년까지 마도 일반산업단지가 조성되었다. 주요 도로는 수도권제2순환고속도로(봉담-송산고속도로)가 쌍송리를 동서로 관통하며, 서쪽의 쌍송리와 청원리 경계부로 제2서해안고속도로인 평택시흥고속도로가 지나간다. 두 고속도로가 만나는 지점에 마도분기점이 있으며 마도일반산업단지 북쪽으로 수도권제2순환고속도로의 마도분기점과 마도요금소가 있다. 그 밖에도 마도 일반산업단지 서쪽으로 마도공단로가 지나간다. 주요 시설로 쌍송리 북쪽에 쌍송공단과 은장공단이, 남쪽에 마도 일반산업단지가 있다.
♤ 솔티고개/ 송정한식뷔페
화성시 마도면 쌍송리와 두곡리 사이에 있는 고개로 소나무는 사라지고 주위에는 온통 공장밖에 보이질 않는다. 솔티고개 도로를 가로지르니 맞은편에 송정한식뷔페란 식당이 보이고, 이곳에서 식당 왼쪽 에이엠텍 공장 옹벽을 따라서 아슬아슬 지맥길을 이어갔다는데 지금은 배수지까지 도로를 따라 편하게 간다.
♤ 무안산(106.3m)/ 삼리봉(마도면 쌍송리, 두곡리 → 석교리)/ 삼각점봉
마곡배수지 울타리를 따라 올라선 무명봉이다. 맨발대선배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고 식별이 어려운 2등삼각점은 오른쪽 50m에 있어 삼각점을 보고 지맥길로 되돌아 온다. 삼각점봉을 지나 뚜렷한 왼쪽길로 조금 내려서서 직진 길을 버리고 우틀해야 마루금이다. 왼쪽 뚜렷한 길은 쌍송공단으로 하산하는 길이다. 무안산 갈림길을 지나 다락고개까지 1시간 가량 본격적인 잡목지대로 들어선다.
♤ 다락봉(75.1m)
서레야대선배님이 75.1m 무명봉에 다락봉 코팅지를 붙여둔 곳이다. 전후로 잡목지대는 계속된다. 왼쪽으로 쌍송공단이 보이기 시작하고, 지독한 잡목지대 끝에 이번에도 공장지대가 기다린다. 왼쪽으로 내려가면 커다란 회사건물(Hydro-Tak)이 보이는 곳에 닿고, 울타리 오른쪽을 따라 내려가, 왼쪽 회사안으로 들어가 정문으로 빠져나가야 한다.
고속도로를 건너는 도로 아래로 원래는 지맥길이었다는 설명입니다.
♤ 다락고개/ 317번지방도/ Q-마트?
화성시 마도면 쌍송리와 청원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제2서해안고속도로(평택시흥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고개 정상에서 맥꾼들 단골 게시물 포스트가 되던 Q-마트는 보이지 않는다. 맞은편에는 박석공단 이정표가 있다. 도로가 나오면 콘크리트 옹벽좌측(이정표 317번도로, 지도상 318번도로)으로 조금 진행한다. 오른쪽으로 Q마트 간판이 보이는 고물상이 보이고, 왼쪽 전방에 조은자동차운전학원이 보이는 사거리에서 직진하여 능선 오른쪽(시계방향)으로 돌아야 하지만 공장들이 위치하고 있어 오른쪽으로 도로따라 진행하여 평택시흥고속도로 위를 지난다.
♤ 쌍송지하차도/ 삼리경계면(마도면 석교리, 쌍송리 → 청원리)
Q-마트에서 우틀로 도로를 따르는데 이때부터는 청원리 내로 진입한다. 이 도로 아래로는 제2서해안고속도로(평택시흥고속도로)가 지나가는 쌍송지하차도이다. 쌍송지하차도를 지나자마자 좌틀로 꺽어지니 남양가스 대리점과 우진 케미칼이 나온다. 쌍송지하차도 위를 건너서 남양자원을 오른쪽에 끼고 유독물저장시설을 지나서 남쪽 둔덕을 오르니 절개지 아래 동문공단의 공장들이 막아서고 있다. 분비나무인지 가문비나무인지 빽빽한 무명봉에 올라 절개지로 아슬아슬하게 동문공단을 내려서서 앞에 잘 가꾸어진 묘지로 올라선다.
♤ 57.9m봉/ 마도면 청원리
송전탑이 있는 57.9m봉을 보고 오른다. 묘지를 조성하느라 파헤쳐진 산위에 57.9m봉 일부가 남아있다. 정상에서 NO28, NO58 송전탑을 지나 내려서면 임도를 만나고 임도따라 우틀로 내려선다. 등로에서 마도면 쌍송리가 바라다 보인다.
버스정류장을 사진을 박을까 하다 말았는데 찍을걸 그랬네요. 지맥은 두시 방향 공장 안쪽으로 우틀합니다. 직진해서 알바를 좀 하고 돌아왔습니다.^^
♤ 막산(幕山)공원/ 하늘교회/ 청원초교
왕복 2차선 도로가 지나가는 고개인데 사거리가 아닌 오거리이다. 고개 정상에는 청원4리(막상공원) 버스 정류장이 있다. 도로를 가로질러 오른쪽 비포장 소로(임도)로 접어든다. 하늘교회를 지나 맥길을 가로막는 초등학교 후문으로 들어가 정문으로 나오면 317번 도로와 53번 도로가 지나는 성목재다.
♤ 성목재/ 성북재/ 24시편의점
화성시 마도면 청원리와 금당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청원초교와 GS25마트가 있다. 고개 아래에는 막산마을이 보이며 55번 2차선 도로가 지나는 곳이다. 성목재(또는 성북재)는 마도 서쪽의 송산과 서신을 동쪽의 남양과 구분짓는 고개이며 서쪽 주민들이 수원 등을 가려면 이 재를 넘어야 했으나 남동쪽의 우정면과는 말투가 틀릴 정도로 교류가 없었으며 이 곳에서 우정으로 가려면 수원의 오목천을 거쳐 우회해야 하므로 실제보다 서로 훨씬 떨어져 있고 또한 과거에 서신이 남양부 관할인데 반해 우정은 수원에 속해 있었다.
♤ 금당리(錦堂里) 마을회관/ 경계(청원리 - 금당리)
317번 도로를 따라 서신방향으로 청원교회를 지나 금당리로 접어들며 경계를 따라 오른쪽 도로로 빠진다. 금당리(錦堂里) 마을회관으로 내려가는 길 옆에 사각정자가 있다. 금당리 엄나무공원을 지나 오른쪽 우회길이 편하지만 남양홍씨 묘역으로 오르는게 마루금이다.
♤ 화성시 마도면 금당리(錦堂里)/ 금달, 금당, 금당곡, 금당동, 금당골
화성시 마도면 금당리는 마도면 중서부에 위치한다. 북쪽으로 해문리, 동쪽으로 청원리, 남쪽으로 고모리, 서쪽으로 백곡리에 접한다. 자연마을로는 금당곡, 대촌(大村), 소고지 등이 있다. 금당리는 조선시대 남양군 마도면(麻道面)에 속하였다. 『호구총수』에는 마도면 금당곡동(錦堂谷洞)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이후 금당동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수원군 마도면 금당리로 개편되었고 1949년 화성군이, 이후 2001년 화성군이 화성시로 승격되면서 화성시 마도면 금당리가 되었다. 금당리는 『화성시사』에 따르면 이곳에 있었던 산제당(山祭堂)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설과 고려시대부터 부자가 많아서 가옥을 화려하게 짓고 살던 곳이라 하여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금당리의 자연마을 중 대촌은 금당리 동쪽에 있는 큰 마을이어서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소고지는 소곶(蘇串), 소곡리(蘇谷里)라고도 하며 마을의 지형이 곳(串)으로 되어 있다. 『구비전승 및 민속자료 조사집』에 따르면 산천이 수려하고 사람들의 재주가 풍부하며 오래도록 무병장수하여 소곶(蘇串)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한편으로 작은 골짜기라는 의미의 소곡(小谷)이 소고지로 변했다는 설도 있다. 금당리의 서쪽으로 100m 이하의 저산성 구릉지가 나타나며 이곳에서 발원한 소하천이 금당리 중앙부를 흐른다. 남쪽으로는 고모리의 청명산에서 발원한 소하천이, 동쪽으로는 백곡리에서 발원한 소하천이 흐른다. 주요 도로 북부지역을 동서로 지방도 제318호가 지나간다. 금당리에는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가 있다. 나무의 수령은 약 440년으로 추정된다. 또한, 2007년에 보호수로 지정된 음나무도 있다. 나무의 수령은 약 530년으로 추정된다. 금당리에는 금당공단, 금당리 협동화단지 등 소규모 공단이 있다. 두 공단은 금당리 북쪽에 100m 간격으로 인접하여 위치한다.
삼리봉에는 아무런 표지도 없습니다.
♤ 삼리봉(마도면 금당리, 청원리 → 해문리)/ 고압송전탑
고물상처럼 폐중장비와 각종기계들을 모아둔 곳을 지나 임도를 따라 철탑이 있는 봉우리에 오른다. 정상에는 아무것도 없다. 지맥의 오른쪽이 청원리에서 해문리로 바뀐다. 송전탑 왼쪽으로 묘지 뒤의 능선으로 진행한다.
해문리는 바다로 통하는 문, 즉 항구입니다. 통일신라시대 당과 교역하던 항구에서부터 출발하네요.
♤ 화성시 마도면 해문리(海門里)
화성시 마도면 해문리는 마도면 북서부에 위치하며 남쪽으로 금당리, 동쪽으로 슬항리, 북쪽으로 송산면 봉가리, 서쪽으로 송산면 육일리와 접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중간리(中間里), 꽃부리, 관굴, 쑥가지 등이 있다. 해문리는 조선시대 남양군 마도면에 속하였다. 『호구총수』에 마도면 해문동(海門洞)이 기재되어 있다. 조선시대 해문구화역 또는 해문역으로 불리는 역(驛)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수원군 마도면 해문리로 개편되었다. 1949년 화성군이 신설되고, 이후 2001년 화성군이 화성시로 승격되면서 화성시 마도면 해문리가 되었다. 해문리는 『화성시사』에 따르면 약 500여 년 전에 조수 간만의 차를 이용하여, 산간 저지대에 자리한 마을 입구를 배로 출입한 것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 해문구화역(海門仇火驛)이 있었기 때문에 이름이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해문리의 자연마을 중 중간리는 중간지(中間地)라고도 하며, 해문리 중앙에 있는 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쑥가지는 제방이 쑥이 많이 나서 여러가지 음식을 만들어 이웃 동네와 나누어 먹었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마을이다. 주요 도로는 북동쪽으로 봉가리와 슬항리로 이어지는 마도북로가 있으며, 남쪽의 금당리로 이어지는 금해로가 있다.
소고지마을에서 금해로45번길을 따라 금당정미소를 지나고 수령이 자그마치 500년이 넘는다는 엄나무공원 정자를 지나 계속 임도를 따릅니다.
♤ 웃소고지/ 마도면 해문리(海門里)/ 삼리봉(마도면 해문리, 금당리 → 백곡리)
화성시 마도면 금당리와 해문리를 잇는 고개로 금당리 소고지는 곶으로 되어 붙은 이름이다. 마도면의 마도(麻道)는 마을 지명중 해문리(海門里)라는 지명이 지금도 있는데, 지금은 화성호 방조제에(서신면 궁평리~우정읍 매향리 사이) 막혀 바닷물이 들어오고 있지 않지만 해문 포구(항구)를 통해 아주 먼 옛날부터 중국과 해상무역이 이루어진 관문이었다. 또한 중국의 사신들 일행이 해문 바닷 포구에 내려 한양으로 향하였던 길목으로 황토흙이 많이 산재하고 비가오면 길이 질고 빠져 걷기가 불편하며 포장도로가 없던 시절에 조상님들의 지혜로 베틀에 거친 삼베를 짜서 일정한 폭으로 길에 깔아 걷기 불편함을 다소 해소한 데에서 유래되어 마도면(麻道: 즉 삼베길)이라 지칭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135.8m봉/ 4등삼각점(대부 418/ 1990 재설)/ 마도면 백곡리, 해문리 → 송산면 육일리)
정상에 준희선생님 산패와 4등삼각점이 있다. 오른쪽으로도 길이 있지만 지맥은 좌틀하여 백곡리 향기실(香氣室) 마을로 내려서며 오른쪽이 마도면 해문리에서 송산면 육일리로 접어들고 지맥은 여기부터 마도면 백곡리와 송산면 육일리의 면계를 따른다.
♤ 화성시 송산면(松山面)
송산면은 화성시의 북서쪽 남양반도에 위치하여 시화권역에 속한다. 본래 남양군 송산면의 지역으로서, 8개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수산면의 5개 동리와 세곶면(細串面)의 10개 동리를 병합하여 송산면이라 하여 수원군에 편입 되어 14개 리로 개편 관할하게 되었다. 1933년 자연마을을 구분, 행정리 28개리로 되었고 1949년 화성군 송산면에 편입된 후 법정리 15개, 행정리 28개리를 관할해오고 있다. 송산면 지명의 유래는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중송리에 있던 솔뫼포구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말인 솔뫼를 한자로 옮기면 송산(松山)이다. 민간에서는 솔뫼포구라 불렀고, 이를 한자로 옮겨 표기하여 송산포구라 하였다. 서해안과 인접하여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으나, 시화방조제 준공으로 내륙지역이 되었다. 동쪽은 마도면과 남양읍, 남쪽은 마도면과 서신면, 북쪽으로 시화호와 안산시, 서쪽으로 마산수로를 경계로 안산시와 접한다. 문산강 유역을 비롯한 동쪽 해안지역은 어업이 활발하고 염전이 많았으나 간척사업으로 농지화되어 쌀농사가 이루어지고 특산물로 포도를 많이 생산한다. 해안에 있는 형도, 우음도, 어섬 등은 연륙되었고 북쪽 시화호에 면한 곳은 해수면이 육지화되어, 송산신도시가 건설될 예정이다. 유적지로는 송산공룡알화석지가 유명하다. 송산면 지명 유래 구전 내용 중 특이한 점은 백제를 침공하려고 들어온 나당연합군의 당나라 군대가 가장 먼저 가격한 곳이 솔뫼포구 일대라고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당연합군의 침공 당시 당항성 일대는 이미 신라의 영토에 속해 있었다. 그러므로 당나라 군대는 동맹관계인 신라의 영토에 속하는 당항성 일대를 공격하면 안 되는 것이다. 설령 전쟁 상대국에 대한 침공이 아닌 당나라 군사들의 식량 충족을 위한 침범 행위가 일어났을 지라도 이에 대한 사실 여부는 가리기 어렵다. 역사 기록에 나당연합군 전쟁의 모든 전투 침략 행위가 자세하게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당항성 일대의 소속 국가의 변천을 살펴보면 먼저 마한의 소국에서 백제의 영토로 편입되었다가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고, 이후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이 연합하여 한강 유역을 침공했을 때 한강 하류 지역을 탈환한 백제에 잠시 속했다가 동맹을 깬 진흥왕의 공격으로 신라의 차지가 되었다. 이후 백제는 당나라로 통하는 신라의 바닷길을 끊고자 당항성 탈환에 여러 번 시도하나 신라는 끝끝내 당항성을 지켜냈다. 이로 보면 당항성 일대의 침공은 고구려 장수왕과 백제 성왕, 그리고 신라 진흥왕에 의해 일어났다. 이렇듯 나당연합군의 백제 침공 첫 가격 장소라는 구연은 실제 역사적 흐름과 맞지 않다. 그러나 백제 침공을 위해 덕물도로 온 12만의 당나라 군대를 맞이하러 태종무열왕이 아들 법민(문무왕)을 보냈고, 법민은 신라의 당항성에 주둔하던 군선을 이끌고 덕물도로 가 소정방과 작전 회담을 하고 돌아온다. 이렇듯 나당연합군의 백제 침공 사건과 당항성 지역은 전혀 무관하지 않으며 오히려 중요한 군사 거점 기지로 사용되었다. 신라 군대 주둔지이자 바닷길로 이동한 당나라 군대에게 접근성이 좋은 송산면 일대는 다양한 사건의 변수가 존재할 수 있다. 이에 향후 지역사 연구를 위한 보조적 자료로 참고할 수 있음에 의의를 둔다. 송산포도가 지역 특산물로 유명하며, 생산량이 매우 많아 전국으로 유통되고, 최근에는 미국, 캐나다 각지에 수출도 시작하였다.
♤ 화성군 송산면 육일리(六一里)
육일리는 송산면의 남쪽 끝에 위치한다. 북쪽은 사강리, 동쪽은 봉가리, 서쪽은 칠곡리, 남쪽은 마도면 백곡리와 맞닿아 있다. 육일리는 조선 시대 남양부 수산면(水山面)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남양군 수산면 육교동(六校洞)과 북일동(北一洞)을 합쳐 하나의 리를 만들면서 각각 한 글자씩 따서 수원군 송산면 육일리로 개편되었다. 북일동은 자연마을이었던 창말 북쪽에 있었으므로 북일동이라 불렸으며, 육교동은 조선시대에 6명의 교리(校理)가 배출된 것으로부터 마을 명칭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1949년 화성군이 신설되면서 화성군 송산면 육일리가 되었다. 2001년 화성군이 화성시로 승격되어 화성시 송산면 육일리가 되었다. 육일리의 남서쪽은 구봉산(158.5m) 자락에 걸쳐있다. 중송리의 중심부에 뒷골들이 있다. 중송리와의 경계에 야생동물을 위한 생태 통로인 당성터널과 굴고개터널이 조성되어 있는데 2020년에 멸종위기종 2급인 삵이 관찰되었다.
♤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 향기실(香氣室)/ 행기실마을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에 있는 행기실도로에서 우틀하여 원룸토토쪽으로 향한다. 백곡리 행기실마을 뒤의 해발 90m 내외에 화성백곡리고분(華城白谷里古墳)이 야산 정상부 능선과 사면에 분포하고 있으며, 수원에서 서남쪽으로 약 30㎞ 떨어져 있다. 해발 100m 내외의 야산이 발달하여 있는 곳으로서 유적의 서쪽에도 해발 250m의 야산이 해안을 병풍처럼 막아주고 있으며, 그 산 정상부에는 토성이 있다. 화성시지역사 연구자들은 ‘송고승전(宋高僧傳)’의 기록 중 ‘본국 해문당주계(本國 海門唐州界)는 현재 당성(唐城) 부근이라고 못 박았다. ‘(의상이)원효법사와 뜻을 같이 하여 서유(西遊)했다. 본국 해문당주계 (本國 海門唐州界)에 이르러 큰 배를 구해 창파를 건너려 했다. 갑자기 도중에 심한 폭우를 만나... 곧 길 곁 토감(土龕:땅막, 흙막) 사이에 의지해 은신했다’는 기록의 당주는 오늘날 경기도 화성 당성 일대이며 백곡리 백제고분 옆의 ‘해문리’는 백곡리 백제고분군이 있는 산을 뒤로 끼고 있는 마을로서 보통명사가 아닌 고유명사로서 전국에 단 1곳의 지명만 남아 있다는 것이다’ 원효성사가 깨달음을 얻은 오도처는 백곡리가 확실하다며 여러 가지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 원효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1,500여 년 전 당나라로 유학길에 올랐던 의상대사와 원효성사가 걸었던 길이기도 한 곳이다. 원효스님은 어릴 때 황룡사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34세가 되던 해에 여덟 살 아래인 의상과 함께 공부를 좀 더 하기 위해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고구려 땅을 거쳐 중국으로 가려고 하다가 고구려 군사들에게 붙들리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1년 뒤 두 번째 유학을 떠나기 위해 의상과 함께 백제의 옛 땅을 거쳐 바닷길로 중국에 가려고 했다. 서라벌(지금의 경주)을 떠나 당나라로 가던 길에 남양반도의 '남양'을 거쳐 송산면 사강을 지나 상안리 어디쯤에서 밤이 어두워져 어느 공동묘지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물을 찾다가 바가지에 있는 물을 아주 맛있게 마시고 다시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간밤에 마신 물은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 원효스님은 너무 놀랍고 역겨운 나머지 구역질을 하였고, 그 순간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해골에 담긴 물은 어제 달게 마실 때나 오늘 구역질이 날 때나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어제와 오늘 달라진 것은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고 “마음이 생겨나므로 모든 것이 생긴다.” 라고 읊었다고 한다.
- 心生卽種種心生: 한 생각이 일어나니 갖가지 마음이 일어나고,
- 心滅卽種種心滅: 한 생각이 사라지니 갖가지 마음이 사라진다.
- 如來大師云 三界虛僞: 여래께서 이르시되, 삼계가 허위이니
- 唯心所作 '一切唯心造': 오직 마음만이 짓는 것이다.
세상만사 마음 먹기 달렸을 뿐 "무엇을 구하고 어디에 가서 무엇을 배운단 말인가. 신라에 없는 진리가 당나라에는 있으며 당나라에 있는 진리가 신라에는 없겠는가"라고 반문하며 원효스님은 유학을 포기하고 서라벌로 돌아 갔다.
지맥이 마도면을 벗어나 구봉산갈림길삼거리까지 송산면과 서신면의 경계를 따르는 지점입니다.
♤ 해운분맥 분기봉(121m)/ 궁평항능선 분기점/ 삼면봉(송산면, 마도면 → 서신면)
유명한 송산포도 생산지라 포도밭이 많이 보인다. 고압선송전탑이 있는 곳에서 망해버린 포도밭을 지나 당성터널쪽으로 오르니 묘지 한기가 있고 왼쪽엔 121m봉이 보인다. 지맥의 왼쪽이 마도면 백곡리에서 서신면 상안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이곳은 예전의 굴고개로 왼쪽 방향은 태행지맥에서 해운분맥이 분기하여 청명산, 해운산을 거쳐 궁평항으로 가는 분기점이다. 지맥은 우틀하여 굴고개터널 위를 지난다.
♤ 굴고개(75m)/ 당성터널/ 309번지방도로/ 송산면 육일리(六一里)
굴고개는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와 송산면 육일리를 잇는 고개로 지금은 고개밑에 당성터널이 개통되어 4차선의 309번 지방도가 지나가고 있는 곳이다. 당성터널 위에서 송산면 육일리가 바라다 보인다. 육일리는 ‘교리’라는 벼슬을 한 사람 여섯명과 한명의 영의정을 배출했다고 해서 유래된 지명이다.
♤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尙安里)
상안리는 서신면의 북쪽에 위치한다. 북쪽으로 송산면 칠곡리·육일리, 동쪽으로 마도면 백곡리, 남쪽으로 매화리, 서쪽으로 광평리·전곡리와 접하고 있다. 상안리는 1914년 상림동(尙林洞)과 대안동(代安洞)의 이름을 따서 상안리라 하였다. 『지명유래집』에 따르면 상림동은 고려 시대 나라에서 양잠업을 장려하여 뽕나무가 많아 상림원(桑林園)이라 불리었는데, 양잠업 정책이 소홀해지자 뽕나무보다는 산림이 우거져 ‘뽕나무 상(桑)’자를 상(尙)으로 개칭하여 상림동(尙林洞)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한국지명총람』에 따르면 조선시대 상림원(尙林院)이 있어서 상림동이 되었다고도 한다. 주요 도로로 지방도 제305호와 지방도 제318호가 지나간다. 문화유산으로 안곡서원과 화성 당성이 있다. 안곡서원은 화성시 향토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1616년 남양 현감 민기중이 기묘명현 박세희(朴世熹)를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이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위패는 서원부근에 매안(埋安)하였다. 그 뒤 지방 유림과 문중의 협력으로 1976년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6칸의 사우(祠宇), 신문(神門), 동서 협문(夾門)과 4칸의 강당 등이 있으며, 사우에는 박세희(朴世熹)를 주벽(主壁)으로 박세훈과 홍섬(洪暹)의 위패가 배향되어 있다.
구봉산은 왼쪽으로 약 300m거리에 있고, 지맥은 오른쪽으로 향하며 송산면 내안으로 들어섭니다. 당근 다녀와야죠.^^
♤ 구봉산갈림길삼거리/ 이면삼리경계면(송산면 육일리, 서신면 상안리 → 송산면 칠곡리)
태행지맥은 삼봉산, 태행산, 구봉산까지는 같이 가나 날머리는 세 군데로 갈라진다. 태행지맥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갈림길이며 분란의 소지가 있는 곳이지만 딱히 어느 곳으로 가야만 맞다는 결론이 나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 산행 고수들도 어떤 분들은 오른쪽의 송산면으로 가서 승학산과 와룡산을 걸쳐 전곡항으로 가는게 맞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계시고 어떤 분들은 구봉산, 봉화산(烽火山, 164m), 함경산(咸鏡山, 137.2m)을 걸쳐서 서신면 송교리 살곶이에서 남양만을 만나 그 맥을 다하는 방향이 맞다고 하지만 정확히 규명은 안된다. 하나는 굴고개 직전 121m봉(해운분맥분기봉)에서 청명산, 해운산(海雲山, 43m)을 만날 수가 있는 화성시 서신면 궁평리 궁평항에서 끝나는 산줄기가 있다. 이 세곳 중 어느쪽으로 날머리를 잡느냐에 따라 산행의 종착점이 달라지는데 선택은 순전히 맥꾼들의 자유 의지에 따르는 부분이나 왼쪽으로 구봉산, 봉화산 등의 뚜렷한 산이 많지만 신 산경표의 '산줄기세력의법칙'으로 따지자면 오른쪽이 맞다는 의견이다. 지맥은 삼거리 갈림길에서 우틀하여 송산면 내안으로 들어서며 전곡1교에 내려서기까지 송산면 내안을 휘젓는다.
♤ 화성시 송산면 칠곡리(漆谷里)
칠곡리는 송산면 남쪽에 위치하며 본래 남양군 서여제면의 지역으로서 『지명유래집』에 따르면 구봉산(九峯山)의 9개 봉우리 가운데 7개의 봉우리가 이 마을 쪽을 향해있다고 하여 칠곡(七谷)으로 불려졌다. 그런데 마을 뒷산에는 옻나무가 많았으므로 옻골 또는 칠(七)자를 칠(漆)자로 바꿔 칠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칠곡리라 해서 수원군 서신면에 편입되었다. 왼편으로 보이는 평야는 시화간척지이며 칠곡리는 간척지 위에 생긴 마을이라고 한다. 자연마을로는 양지말 (陽地村), 속말, 응짓말, 큰말 등이 있다. 양지말은 산을 등지고 정남향으로 되어 있어 온종일 햇볕이 드는 따뜻한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고 속말은 옻골 동쪽 속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큰말은 옻골의 큰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칠곡리 남동쪽으로 구봉산(158.5m), 서쪽에 작은밤섬산이 있다. 구봉산 북서쪽 사면에서 소하천이 발원해 모즐저수지를 이루고 북쪽으로 흘러간다. 중송리의 중심부와 북서부 지역에는 뒷방죽들·옥들 등 평야지대가 넓게 발달하였다.
정상에 서면 전망이 멋지게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곳입니다. 당성과 화량진성은 마주보고 있으며 시대에 따라 군사적 관점에서 두 곳의 지형상 위치를 달리 평가했나 봅니다.
♤ 구봉산(九峰山, 158.6m)
화성시 마도면, 송산면, 서신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남양반도 중앙부에서 서남쪽의 바다 방향으로 비스듬하고 길게 늘어서 있는데, 구봉산이란 산 이름도 길게 늘어선 산줄기의 봉우리가 아홉 개 있는 데서 유래한다고 하며 삼국시대의 당성(唐城)을 품고 있으며 지금은 당성을 보수하느라 완전히 공사판이다. 남양홍씨의 시조는 삼국시대에 중국 당나라에서 건너온 8명의 재사(才士) 중에 한명이 이곳에 정착하여 남양홍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그래서 이 성이 당나라 홍씨들이 쌓은 성이라 하여 당성이라 불렀다고 한다. 당성에서 송산면 사강리(沙江里)가 내려다 보인다. 사강리는 예전에 바닷물이 주변까지 들어와 모래가 많아서 붙혀진 지명이며 남양반도의 끝자락에 있는 사강리는 송산면, 서신면, 마도면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망해루지 추정 안내판이 서 있는 구봉산 정상 망해루지에서 태행지맥 종착지 전곡1교도 보이고, 와룡산 오른쪽 옆으로 영흥도 국사봉, 승학산과 이봉산 사이로 무의도 호룡곡산도 보인다. 인천의 계양산도 보이고, 시화호 안산반월공단도 가까이 조망된다. 내륙쪽으로 수리산과 광교산도 보이고, 지나온 태행산과 그 옆의 건달산도 조망된다.
♤ 당성과 고운(孤雲) 최치원
<당성>자료집에는 신라의 문호 최치원(879~?)에 대한 이야기와 시도 한 수 적혀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한 수재였지만, 고국에 돌아와 봉사하려 했으나 현실은 따돌림을 당했던 모양이다. 그는 여생을 전국을 유랑하며 살았는데, 그 유랑시기의 어느날 당성에 왔다가 알고 지내던 악관(樂官)을 만난다. 그도 최치원처럼 따돌림을 당하다 당나라로 돌아가던 중이었고, 둘은 술자리를 벌였고, 악공이 두어 곡을 연주하더니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슬피 울기 시작하였다. 최치원은 그의 재주와 이런 인재가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버림 받는 현실이 안타까워 하는 심정을 담은 시를 지어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 인생이란 성했다가도 쇠퇴하니 덧없는 인생이 참으로 서럽구나 글쎄, 저 천상의 곡을 뉘 알았으리,
이 해변에 와서 볼 줄이야 물가 궁전(안압지?)에서 꽃을 보며서 늘한 난간에서 달을 보며 불기도 했었지
선왕을 이제 뵈올 수 없으니이 몸도 그대 더불어 눈물 줄줄 흘리네 (동문선권9, 오언율시)
♤ 당항성(黨項城)/ 화성 당성(黨城)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구봉산에 위치한 산성으로 당항성(黨項城) 또는 화성 당성(黨城)으로 불리운다. 1971년 사적 제217호로 지정되었다. 당성이 항구라면 아마도 당성 아래에 사는 사람들조차 입을 쩍 벌릴 주장이다. 산꼭대기에 있는 고대 산성을 항구도시라고 주장한다면 엉터리라고 손가락질할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오늘날 경기 화성시 구봉산 위에 자리잡은 당성은 분명히 삼국시대에 항구도시를 다스리던 관청이 있던 산성이다. 성터에서는 고대 신전이었을 '팔각건물지'가 발굴된 바 있다. 원효 대사의 유명한 설화를 기억해보자. 의상대사와 중국 유학을 위해 이곳으로 오는 중에 어느 굴 속에서 잠 자다 목이 말라 물을 아주 달게 마셨는데, 아침에 보니 해골바가지에 고인 물이었음을 발견한다. ‘세상 모든 것이 마음에 따라서 달라지는구나’라는 부처의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경주로 돌아가고 의상만 중국으로 향했다는 이 이야기에서 당시 신라 사람들이 중국을 가려면 이 항구를 통했음을 알 수 있다. 서해안고속도로에서 비봉나들목에 내린 뒤 서쪽으로 난 지방도를 따라 서신 방향으로 오면, 이 지역의 거점도시였던 남양(南陽)을 지난다. 남양은 홍(洪)씨의 본향이다. 시조가 중국에서 와서 당성을 쌓았다는 팔학사의 한 사람으로 전해지고, 선덕여왕 때에 당성백(唐城伯)으로 봉해진 기록이 있다. 남양에서 활어시장으로 유명했던 사강을 지나면서 제부도로 향하는 삼거리에서 왼쪽 길을 따라가면 구봉산 자락을 마주한다. 완만한 산 언덕을 지나 짧은 터널을 통과하면 곧바로 오른쪽에 최근에 개설된 당성 안내소가 보인다. 당성은 1971년 국가사적 217호로 지정됐지만 그 역사적 실체는 2000년대 초부터 2021년까지 7차에 걸친 조사가 진행되면서 조금씩 확인되었다. 구봉산 정상에 위치한 망해루(望海樓)를 중심으로 테뫼식 1차성을 쌓고 이후 확장해서 성의 동문이 있는 골짜기를 둘러싼 2차성을 구축한 포곡식(抱谷式) 산성이다. 토성과 석성으로 연결된 산성의 총 길이는 1차성과 2차성을 합쳐 1,500m가 넘는다. 테뫼형(山頂式 : 산봉을 중심으로 산정 외곽부를 돌로 쌓은)과 포곡형(包谷形 : 봉우리와 계곡 주위를 둘러쌓은)을 결합한 복합식 산성이다. 계곡을 둘러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남북으로 길다란 네모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경기도 해안지역 일대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산성이고, 겹배수통로가 깔린 동문지의 구조를 볼 때 탄탄하게 만들어진 성이다. 현재는 동문·남문·북문 터와 우물터, 건물터가 남아있으며, 성의 내벽은 흙으로 쌓고, 외벽은 돌로 쌓았다. 당성 내부에 저수지가 있고, 관아 건물과 온돌이 깔린 큰 집터가 발굴된 것을 보면 상시 거주인원이 꽤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은 쌓은 벽이 무너져 마치 흙과 돌을 합쳐서 쌓은 것처럼 보이지만, 흙성의 성벽을 돌로 쌓아 올린 흔적이 남벽 쪽에 약간 남아있다. 당성이 소재하는 남양지역은 지금은 화성시이지만 신라 경덕왕 때는 당은군으로서, 중국과의 교통로로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으며, 신라 후기에는 이곳에 당성진을 설치해서 청해진과 함께 신라 해군의 근거지로 중요시되었던 곳이다. 이곳은 당항성과 관련되는 가장 중요한 유적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당성(唐城)은, 그 아래에 위치한 당은포(唐恩浦)에서 당나라로 가는 성이라는 뜻일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에 보이는 당항성(黨項城)이 바로 이 성이다. 그동안 당항성의 위치에 대해 학자들 간에 논란이 있었지만, 발굴된 유물로 미뤄 볼 때 당성이 바로 당항성일 것이다. 삼국의 역사를 바꾼 바로 그 성이다. 삼국이 이 좁은 한반도에서 경쟁할 때는 치열하게 목숨을 걸고 싸웠다. 당항성은 산둥반도 동저우 항과 최단거리인 교역항으로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가기 위한 최적의 관문이었고 그래서 삼국은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다. 이곳은 원래 마한 54개국 중 원양국(爰襄國)에 속하였다가 마한의 소국에서 성장한 백제의 강역으로 편입되었고, 그 후 고구려의 장수왕이 남진 정책을 펴 백제의 한강 유역을 쳐서 빼앗은 뒤 이곳에 당성군을 설치하였다. 백제는 아신왕 때 고구려의 남방 지역을 끊임없이 공격하였으며, 396년 군사를 끌고 온 광개토왕에게 동생까지 볼모로 내주는 등 호되게 당하였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472년 개로왕은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남북으로 협공하자고 제의하였지만 북위의 반응이 좋지 않아 실패하였다. 더구나 백제의 이 계획이 장수왕의 귀에도 들어가는 바람에 백제 침공에 좋은 빌미를 만들어주었다. 475년, 장수왕은 3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수도 한성을 비롯한 백제의 한강 유역을 빼앗고 개로왕을 살해하였다. 이때 백제는 남쪽으로 밀려나 수도까지 웅진성(충청남도 공주시)으로 옮기게 되었고, 고구려는 이때 빼앗은 당성에 당성군을 설치하였다. 551년 백제 성왕이 신라 진흥왕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 백제가 한강 하류 6군, 신라가 한강 상류 10군을 차지한다. 이때 잠시 백제가 당성군을 탈환했으나, 진흥왕이 동맹을 깨고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 지방까지 몽땅 빼앗아 신라의 강역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때 당성군도 속절없이 신라에게 넘어가고 만다. 성왕 시절, 신라에게 배신당해 겨우 수복한 한강 유역을 모조리 빼앗긴 성왕은 554년 복수하기 위해 신라를 공격했으나 관산성 전투에서 패해 전장 한복판에서 신라군에 의해 최후를 맞았다. 신라가 한강을 차지하고 백제는 멸망 직전까지 신라와 국운을 걸고 치열한 혈투를 벌였다. 거기에 왜는 당연히 동참했고 고구려와 말갈도 가세해 신라를 괴롭혔다. 하지만 신라는 끝까지 한강 유역을 뺏기지 않았고 당성진도 계속 신라의 영토로 남을 수 있었다. 이후 백제는 신라와 완전히 틀어져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치열하게 혈전을 치뤘다. 삼국이 항쟁하면서 백제와 황산벌 전투의 화랑 관창의 이야기, 대야성 성주 김품석의 죽음, 바둑으로 망한 개로왕의 이야기, 그리고 성왕의 관산성 전투의 전사 등은 각 나라로서는 잊을 수 없는 사건들이다. 생존을 위한 처절한 싸움이었고 잊지 못한 회한을 품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광개토대왕비 등의 기록에 '형제'라는 표현을 남긴 걸 보면 핏줄이 당기기도 했던 필연적 운명의 고대 삼국이었다. 신라는 대륙과의 교류로 본다면 한반도에서 가장 후미진 곳이라 할 수 있는 영남 지역에서 발흥했다. 잦은 왜구의 침략 때문에 문무왕이 죽으면서도 ‘왜구로부터 신라를 지키겠다’며 감포 바닷속에 묻힌 것 아닌가. 오늘날 반일과 극일을 부르짖지만 신라시대에도 도움을 받고서도 약탈하러 오는 왜구에 치를 떨었던 것 같다. 신라는 나라를 현대화하기 위해 당나라에 가려 해도 지리적 여건으로 갈 수가 없었다. 백제나 고구려 사신을 따라서 다녀왔는데 2등 사신이라는 서러움이 사무쳤을 것이다. 정복 군주로 알려진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년)이 한강 하류 유역을 점령한 것은 당나라와의 교역로 개척을 위해서라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신라의 명운을 쥔 건곤일척의 전략이었을 것이다. 당항성이 있던 이 지역은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 땅이었으나 이후 고구려가 취하여 그 명칭을 '장항구현(獐項口縣)'이라 적고 있다. 시화만의 모양을 노루 주둥이에 빗댄 지명으로 보이는데, 정작 고구려 흔적이라고는 기와의 문양에서 힐끗 보이는 정도이다. 이 지역은 처음에는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한때 고구려의 영토로 당성군이라 하였으나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하게 되자 당항성이라 하고, 바다를 건너 중국과 통하는 길목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642년엔 의자왕이 직접 출정해서 미후성을 비롯한 40여성을 점령하였다. 또한 윤충을 시켜 대야성 전투를 벌여서 성주 김품석과 그의 아내이자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를 죽이고 대야성까지 빼앗았다. 643년 의자왕은 당항성을 공격해 신라가 당나라로 가는 길을 막고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려고 시도했으나 신라가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에 당나라가 개입하면 골치 아파질 것을 우려한 의자왕이 군대를 거두어 물러났다. 신라는 하이에나와 같이 한번 물었던 것을 통일 때까지 놓지 않았다. 당성을 차지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를 지키기 위해 엄청난 공력을 들였다. 국가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절박함이 있었던 것이다. 영남에서 이곳으로 오는 교통로상의 모든 큰 성들, 보은의 삼년산성, 청주의 상당산성, 죽산의 죽주산성, 용인의 할미산성 등을 엄청난 인력을 동원해 새로 쌓음으로써 경주와 당성을 잇던 길의 안전성을 확보했다. 북으로는 고구려 침공에 대비해 멀리 임진강을 건너는 길목에 칠중성을 쌓았고, 당성 주변 곳곳에도 성을 쌓았다. 역사 기록에도 없는 안산의 성태산성 역시 이 즈음에 축조됐다. 요즘 이스라엘이 언 돔을 만든 것과 비슷하게 이 성으로 가는 모든 교통로에 방어망을 구축한 것이다. 그만큼 당성은 신라인들에게 중요했으며, 그것이 바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원동력이 되었다. 세상을 통일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원대한 계획과 치밀한 전략을 세우고 경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 우리가 남북으로 갈라져 싸우는 현실에서 국제적인 감각이 뒤떨어졌던 신라의 진흥왕이 세웠던 한반도 통일 경영전략은 새삼 시대적인 화두가 될 만하다. 당성은 중국 당나라를 이용해 삼국을 통일하고 당나라와의 일전 후에 한반도를 제패한 전략의 출발점에 해당한다. 또한 당성은 국제 학자들에게 유네스코 세계유산적인 가치로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당성에서 중국의 산동지방과 낙양, 시안까지 연결되는 동아시아 실크로드, 즉 고대 동아시아의 정치문화 교류 현장으로서의 가치가 새롭게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삼국이 다투는 시기 중요한 전략적 위치를 가진 성이었지만, 정작 이 당시 성의 규모는 중대 규모 병력만 주둔할 정도로 코딱지만했다고 한다. 당시 이 성이 위치한 지역인 화성시 서신면 자체가 좁디좁은 육로로 연결된 섬이나 다름없는 반도였기 때문에 아무생각 없이 성의 규모만 키웠다간 주둔군 식량보급에 큰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또한 위치 자체가 반도 정중앙 가까이 있어 방어가 용이해 굳이 무리해서 키울 필요도 없었다. 현재의 해안선은 천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퇴적작용 및 간척으로 삼국이 각축전을 벌이던 당시보다 후퇴한 상태이다. 삼국 통일 후 경덕왕 때 당은군(唐恩郡)으로 바꿨다가 829년(흥덕왕 4년)에 당성진(唐城鎭)을 설치하여 해안 방어를 위해 군사 기지화 하였다. 이후 후삼국시대가 개막하고 900년(효공왕 4년)에 궁예 휘하의 장수 왕건에 의해 정복되어 태봉의 영향권 안에 들어왔고, 태봉의 영역을 그대로 계승한 고려에 이르러서도 별다른 분쟁 없이 쭉 고려의 영역으로 남게 된다. 고려 초에 당성군으로 개칭하였고, 그 뒤 수주(水州 : 지금의 경기도 수원시), 인주(仁州 : 지금의 인천광역시)에 속하였다가 1290년(충렬왕 16) 익주지사(益州知事)의 행정 구역에 편입되었다. 강녕도호부(江寧都護府)를 거쳐 1308년 익주목(益州牧), 1310년(충선왕 2년) 남양부가 되었다가 1413년(조선 태종 13년) 남양도호부가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남양군으로 인천부 밑으로 예속되었다. 일제강점기 시절인 1914년에 수원군에 편입되었다가 1949년 수원군이 화성군으로 개칭되고 2001년 화성시가 되었으며, 당성은 현재 남양읍 일대의 땅이다. 당성 정상에 위치한 망해루는 고려 말 남양부사였던 정을경(鄭乙卿)이 신축하고 스승이었던 목은(牧隱) 선생의 글을 받아 망해루기를 남겼다. 그러나 발굴을 통해 신라 점령 초기부터 망해루 위치에 건물이 있던 것이 확인되었다. 망해루지에 서면 왜 이 성을 항구라고 했는지, 왜 과거에 최치원이 방문하여 선대왕을 회고하며 눈물을 흘리며 시를 남기게 됐는지 알 만하다. 서해안의 고대 성터의 꼭대기에 서면 북으로는 서울의 자락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서해 위에 제부도 같은 섬들이 떠 있다. 옛날 같으면 넓은 갯벌 사이의 수로 곳곳에 자리 잡은 포구들, 대원군의 한이 서린 마산포, 당은포, 은수포와 성 바로 맞은편의 화량진에 사람들이 붐볐을 것이다. 이제 그 수로는 땅으로 변해 공장이 들어서 있다. 다만 서남쪽에는 멀리 제부도의 바다 풍경이 아련하게 보인다. 신라 시대 중국으로 떠나는 이를 송별할 때는 이곳 망해루에서 바다를 보며 흙으로 만든 말을 깨트리면서 장도(壯途)를 빌었을 것이다. 반대로 중국에서 귀한 손님이 들어오면 1차성지에서 발견된 전면 9칸의 기와집 영빈 숙소에 머물렀을 것이다. 몇 해 전 성안 건물지에서 8세기경의 중국 형요(刑窯)산의 백자 대접과 차 대접 두 점이 겹쳐 출토됐는데, 당시 손님이 가지고 온 귀했던 중국 도자 접시일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종류의 접시가 익산 미륵사지나 경주 황룡사지에서도 발굴된 바 있다. 서해 제부도의 낙조를 내려다보며 차를 음미하면서 바다 건너 등주에서 요동과 황해도 끝 장산곶을 돌아온 기나긴 황해 여정의 여독을 풀었으리라. /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한양대 명예교수 글 참조
♤ 망해루지(望海樓址)
서해 도서와 해안이 조망되는 당성의 가장 높은 지점인 구봉산 정상에 위치해 있던 누각인 망해루(望海樓)가 있었던 옛 터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이 지은 “남양부 망해루기(南陽府 望海樓記)”에 의하면 고려말 남양부사 정을경(鄭乙卿)이 고을의 치소에 외관을 웅장하게 하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2001년 발굴 조사 결과,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된 건물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계단및 담장지가 확인되었다. 확인된 장방형의 장축 11m, 단축 8m이며 조선시대 유물이 함께 출토되었다. 한편 유구 노출과정에서 인화문 토기류와 고식(古式)의 기와들이 확인되어 1차 성벽(석축성벽:통일신라)과 관련된 건물지가 중복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 남양부 망해루기
- 당성인(唐城引) /문정공(文正公) 목은(牧隱) 이색(李穡) 지음
당성 해안은 화개와 같으니 포구는 이를 둘러 안팎으로 나뉘었네
영령이 모인 곳에 인물이 나고 곧고 웅위한 큰 인재 다 당대에 뛰어났네
덕산 촌주는 강남에서 자라 요동에서 백모 쓰고 처음 가서 참여하였네
학야에 양과 개가 가까이 하는 것을 혐오하네
해외에 삼신산을 찾고자 하며 배를 경랑에 뛰워 딴 세상을 만나니
두 눈을 움직이지 않은 채 나는 돋을 멈추고 해안에 내려 해를 점치고 세대를 점쳐보니
남마다 동방을 도와 천만년 길이 가리
신라 이래 우리 고려에 이르기 까지 예악과 시 서로 군자를 내었네
수재는 강도 말에 독보적인 존재여서 반란 기운 쓸어 없애 대궐 문을 열었네
기강이 다시 떨쳐도 벼슬을 사직하였고 쥐들이 다시 설치는 것을 따르는 자가 없었다
태사가 탄생하사 왕실에 배필 되니 성자 신손이 오늘에 이르렀네
아 덕산은 출중한 인물이어라
저절로 어울러져 좋은 일만 이루어지고 푸른 솔 뜬구름은 젖은 듯이 푸르구나
내 일찍 말을 세워 멀리서 우러러 읍했어라
양파 선생은 어디에 계시는가
높은 위풍은 천년가도 미칠 자 없으니 뛰어남을 본받지 않는 것은 자손 없는 것과 같고
문하에 사람이 있으나 부질없이 눈물만 흘리네
127m봉을 향해 가며 왼편으로 시화간척지가 조망되고 멀리 왼편부터 가야할 와룡산, 승학산, 이봉산이 보인다.
♤ 127m봉/ 경계(송산면 육일리 - 칠곡리)
정상이 마구 파헤쳐진 공사장이었다는데 그 자리에 고압선철탑이 자리하고 있다. 등로에 오래된 군용삼각점이 있다. 127m봉에서 2분 정도 내려서다가 뚜렷한 직진의 임도를 버리고 희미한 소로길인 좌틀로 꺽어지는데 알바 주의 구간이다.
♤ 칠곡리고개/ 육도리재/ 2차선도로
화성시 송산면 육일리와 칠곡리를 잇는 고개로 ‘칠곡리(옻골마을)’ 표시석이 서 있고 주변은 온통 공장지대다. 도로를 가로질러 올라야하나 절개지가 너무 높아 왼쪽으로 간 다음에 전봇대가 있는 곳에서 절개지로 올라서기도 한다. 절개지의 장미과 가시덤불을 헤치고 밟으며 포도밭으로 직상으로 올라섰다. 통덕랑 삭령최공 묘지와 포도밭을 지난 등로 묘지에서 사강리가 바라다 보인다.
♤ 86.9m봉/ 삼리봉(송산면 육일리, 칠곡리 → 중송리)
지맥의 왼쪽이 칠곡리에서 중송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정상은 잡목지이고 선답자님들 띠지가 두 곳에 주렁주렁 하다. 왼편에 묘가 있다. 우틀로 꺽어져 급하게 내려서는데 가시범벅인 엄나무가 많아 위험해 보인다. 컨테이너가 있는 농로에 닿고, 앞에 보이는 포도밭 뒤쪽 능선으로 지맥이 이어진다.
♤ 화성시 송산면 중송리(中松里)
본래 남양군 송산면의 지역으로서 예부터 마을 주변에 노송이 우거져 있어 그 한 가운데 위치한 마을이라고 하여 중송골 또는 중성동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1914년 주송리라 하여 수원군 송산면에 편입되었다. 사강 아지미고개 너머에 위치해 있다. 화성시 송산면에 있는 중송리는 바닷가에 인접하였으나 시화방조제 준공으로 내륙지역이 되었고 자연마을로는 뚝미, 뒷골, 솔뫼, 못골 등이 있다. 뚝미는 옛날 바닷물이 이 곳까지 들어왔었으나 제방을 쌓아 농경지를 만든 이후 ‘뚝미’ 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뒷골은 마을의 지형이 소가 누워있는 모습과 비슷하고 특히 이 마을이 소의 꼬리 부분에 위치해 있다 하여 '뒷꼬리'라 부르다가 붙은 이름이다. 솔뫼(솔미)는 중송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소나무가 많고 노송이 우거져 붙은 이름이다.
낼이 설인데 묘지에 삼형제분이 성묘를 오셔서 제주를 따르고 계시네요.
♤ 60m봉/ 삼리봉(송산면 중송리, 육일리 → 사강리)
송전탑을 지나 절반이 날아간 봉우리이다. 지맥의 오른쪽이 육일리에서 사강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왼쪽에 나주정공 묘지가 있고 예전엔 위험을 무릅쓰고 공장이 갉아먹은 절개지를 내려서서 공사장 정문으로 나갔다는데 이젠 공단쪽은 절벽이라 삥 돌아 우회하여 아지매고개로 향한다.
♤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沙江里)
본래 남양군 수산면의 지역으로서 예부터 농산물의 집산지일 뿐만 아니라 전에는 마을 앞까지 조수가 드나들어서 강처럼 되었으며 바다와 연결된 갯강에는 유난히 모래가 많았다고 해서 사강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1914년 지구말, 정도리를 병합하여 사강리라 해서 수원군 송산면에 편입되어 송산면 중심지가 되었고 시화방조제 준공으로 내륙지역이 되었다. 사강리는 화성시의 서북쪽 송산면 중남부에 위치한 송산, 서신, 마도면의 중심지로 수산물 시장으로 유명한 사강시장이 있고 국민가수 조용필(趙容弼)도 이 지역 출신이라고 한다. 사강시장은 원래 조수가 드나들어 사강(沙江), 즉 모래강이라는 명칭이 붙을 정도로 뱃길이 닿는 데 위치하였다. 지금처럼 이름이 무색하게 육지화 된 것은 일제 이후다. 장을 이용하는 주민들은 송산면, 서신면, 마도면 일대의 사람들이고, 대부도, 형도, 엇섬, 우음도, 불도, 제부도, 선감도 등 7개 섬 주민들도 모두 이곳 장을 이용하였다. 자연마을로는 안사강, 바깥사강, 정도, 저구말 등이 있다. 사강은 마을이 산등성이를 두고 남북으로 갈라져 있어 사강 안에 생긴 마을을 안사강, 밖에 생긴 마을을 바깥 사강으로 나누어 불렀다. 정도는 조선 때 양반에게 불손한 상민은 볼기를 맞고 정을 쳤다는 데서 붙은 이름이다. 저구말은 전에 갯물이 드나들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 아지미고개/ 322번지방도(송산포도로)/ 식당, 한식뷔페
송산면 사강리에서 고포리로 넘어가는 322번 지방도가 지나가는 고개인데 고개 정상에는 스위스 모텔과 오른쪽으로 두영금속파일 공장과 신축 공장이 보인다. 신축 공장 옆길로 직진으로 올라선다. 도로 왼쪽에 장명등 모양의 중송1리 마을 표시석이 보이고 통합표준기준점도 있다.
♤ 69.9m봉/ 삼각점봉
아지미고개에서 도로를 따라 지맥길을 우회한다는데, 안양목장과 은진화학 뒤쪽에 있는 삼각점봉을 다녀와야 한다. 직진하여 축대로 올라서니 커다란 계성 왕공 묘지가 있다. 묘지 옆 공사장으로 내려섰다가 곧바로 70.5m봉으로 오른다.
♤ 70.5m봉
많은 분들이 아지미고개에서 69.9m봉을 생략하고, 도로를 따라 안양목장을 우회하다가 마도포장중기를 지나 오른쪽 능선으로 올라선다. 절개지 왼쪽으로 공장이 보이고 잡목을 헤치고 지나는 봉우리이다. 직상으로 오르면 가시잡목으로 힘들고 약간 오른쪽으로 돌아서 오르니 편하다.
♤ 사강리 마을길/ 송산로
송산면 사강리와 천등리를 잇는 도로인데 다른 도로에 비해 교통량은 뜸하다. 주택을 끼고 왼쪽의 도로를 따라서 걷는다. 인애농원 버스정류장이 나오고 원 지맥길은 인애농원으로 들어가 능선으로 진행해야 하지만 사유지라 갈 수가 없기에 왼쪽 도로로 우회하는 경우가 많다. 왼쪽으로 중송2리 마을 표시석이 보인다. 중송2리 입구를 지나자마자 오른쪽 농로로 접어들어 마루금으로 복귀한다.
올라서는 들머리가 애매합니다 공장지대 안으론 절벽이라 올라서지 못하겠고 도로 옆 공장 담장으로 올라서니 묘지가 나오네요. 장미과 가시에 찔리며 올라섰습니다.
♤ 57m봉/ 삼리봉(송산면 중송리, 사강리 → 천등리)
양주김공 묘지를 지나 57m봉이 나온다. 지맥의 오른쪽이 사강리에서 천등리로 바뀌며 57m봉에서 좌틀로 꺽어지는데 오른쪽 아래에 초계정씨 숭모당과 중종묘지가 넓게 조성되어 있다. 배밭을 지나 조금전 인애농원 앞에서 헤어졌던 도로와 다시 만난다.
♤ 55m봉/ 삼리봉(송산면 중송리, 천등리 → 마산리)
각골버스정류장을 지나 도로를 따라 50m 정도 가다가 왼쪽 임도로 접어든다. 칡넝쿨이 올라탄 매화밭을 지나 오른 55m봉에는 선답자의 띠지가 지키고 있다. 지맥이 오른쪽이 천등리에서 마산리로 바뀐다. 등로에서 서쪽으로 고포리(古浦里)가 바라다 보인다. 송산면 마산리에 있는 고포리는 서해안과 인접하여 삼면이 바다와 인접하였으나, 시화방조제 준공으로 내륙지역이 되었으며 자연마을로는 고잔동, 포막동, 대두리 등이 있다. 고잔동은 고포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뒷산이 말처럼 생겨 마산포라고도 부르며 곶으로 되어 고잔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포막동은 고개가 목이져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대두리는 산맥이 이어져 내려와 바다와 맞붙은 곳에 형성된 부락으로 산의 머리부분이 크다고 하여 큰머리라 한데서 대두리라는 명칭이 생겼다. 고잔동과 포막동의 이름을 따서 고포라는 명칭이 생겼다. 예전에 의상대사가 당나라로 불교 유학을 갈때 이곳에서 갔다는 설이 있다.
♤ 화성시 송산면 마산리(馬山里)
마산리는 송산면 서쪽에 위치하며 본래 남양군 송산면의 지역으로 이 지역을 통틀어 마산포라 하였는데 1914년 원마산포는 고포리라 하고 장문, 갓마루, 도말을 병합하여 마산리라 해서 수원군 송산면에 편입되었다. 북쪽은 독지리, 동쪽은 천등리, 남쪽은 지화리·중송리, 서쪽은 고포리에 접한다. 서해안과 인접하여 삼면이 바다와 인접하였으나, 시화방조제 준공으로 내륙지역이 되었다. 지형이 말처럼 생겼다고 하여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자연마을로 갓마루(冠峴洞)는 마산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지형이 마치 갓을 쓴 것과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도말(道井洞)은 마을의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물이 깨끗하여 선비들이 몸과 마음을 수양하기 위해 이 곳을 자주 찾았다는 데서 붙은 이름이고 장문(長門洞)은 옛날에 서신면 전곡리 앞 바다에서 이곳까지 좁고 긴 갯골이 나고 또한 포구가 있어 배들이 많이 출입하였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시화호방조제가 건설되기 이전에는 바닷물이 들어온 마산포구였다. 임오군란이 일어난 구한말(1882년 7월) 흥선대원군이 청나라 군사에 의해 천진으로 압송되어 갔던 장소가 이곳 남양반도 마산포였다. 마산리는 미국과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수출되는 송산포도의 생산지로 변모하였다.
♤ 76.6m봉
잡목이 우거진 76.6m봉에는 선답자 표지기만 휘날리고 오른쪽으로 내려서니 남양홍씨 대호군파 묘역이 나온다. 남양홍씨 묘지에서 마산리가 내려다 보인다.
♤ 마산교차로/ 322번지방도
아지매고개에서 헤어졌던 322번 지방도로와 다시 만난다. 지맥은 아지매고개에서 마산리 내안을 지난다. 마산1리 포도마을 표시석을 지나 횡단보도가 있는 삼거리에서 좌틀로 꺽어진다. 장문마을 입구 표시석에서 우틀로 꺽어지는데 오른쪽에 대경테크란 공장 건물이 보인다. 좌우 양쪽의 포도밭 사이의 포장도로를 따라 걷다가 포도밭을 가로질러 능선으로 오른다.
♤ 장문마을
다루개마을 진입로 삼거리에서 양회임도를 버리고 오른쪽 무덤들이 보이는 숲으로 올라야하지만 얼마 가지않아 다시 도로로 내려서니 그냥 마루금을 오른쪽으로 보면서 장문마을 길을 따른다. 마루금이 포도밭이나 공장으로 변해있다. 장문마을 가운데 도로로 지나 오른쪽으로 계속 걸어간다. 송산면과 서신면은 송산포도의 생산지라 포도밭이 천지삐까리다. 요즘은 블루베리와 체리도 특용작물로 가세했다.
♤ 23m봉
도로옆 23m봉에 삼각점이 있다는 박종율대선배님 산행기를 보고 삼각점을 찾아보지만 포도밭과 가시 잡목이 얽혀있어 빠르게 포기하고 다시 도로로 내려서서 이봉산 방향으로 향한다.
♤ Y자 갈림길
황해농원, 용진농원을 지나고 만나는 Y자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편하게 이봉산으로 오를 수 있지만 지맥상의 50m봉을 놓치게 된다. 마산리와 지화리의 경계인 왼쪽 능선을 향해 전봇대 옆으로 능선에 달라 붙는다. 장문마을이 바라다 보이고 능선으로 접어들자마자 심한 잡목의 저항을 받으며 걷는데 잠시 후에 맥길은 끊어지고 야적장이 나오고 야적장 왼쪽으로 돌아서 절개지 위로 올라선다.
♤ 50m봉/ 마산리 - 지화리
50m봉 바로 아래에는 기독교인이었던 거창신공과 부인 청주한씨의 묘지가 있다. 50m봉에서 동쪽으로 지나온 아지매고개 위에 화성시 송산면의 공단의 모습이 바라다 보이고 길이 없는 잡목지대를 헤치고 농로로 내려서며 지화리로 들어서고 초계정공 판사의 묘지에서 직상하면, Y자 갈림길에서 헤어진 이봉산 오르는 등로와 다시 만난다.
♤ 거지(居芝) 마을/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지화리(芝花里)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법정리인 지화리(芝花里)는 송산면의 서남쪽 끝에 위치한다. 본래 남양군 송산면의 지역인데 삼국시대부터 당항진(唐項鎭)포구와 군진이 있던 곳이다. 1914년 거지동, 매화동, 방죽머리, 채경동, 화량동을 병합하여 거지와 화량의 이름을 따서 지화리라 하여 수원군 송산면에 편입되었다. 북쪽으로 마산리, 동쪽으로 중송리, 남쪽으로 서신면 전곡리, 서쪽으로 시화호 마산수로를 사이에 두고 안산시 단원구에 접한다. 행정리는 2개이다. 지화리는 1914년 거지동(居芝洞)과 화량동(花梁洞)을 합쳐 새로운 리를 만들면서 각각 한 글자씩을 따서 만들었다고 한다. 또 자연마을이었던 거지동과 채화동(彩花洞)의 이름을 따서 지화리로 하였다고도 한다. 지화리의 중앙부에 승학산(109.7m), 남서쪽에 와룡산(107.8m), 북쪽에 이봉산(105.7m)이 있다. 지화리 북쪽과 남쪽 경계부로 수로가 흘러가다 서쪽의 마산수로에 유입된다. 지화리의 평야지대는 북서부와 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명구리들·거지들·장아리들·돌방죽들·중들·도완두들 등이 있다. 지화리는 조선 시대 남양부 송산면(松山面)에 속하였다. 『호구총수』에 송산면 소속으로 기록된 화량동(花梁洞)이 지화리 일대에 해당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남양군 송산면 거지동(居芝洞)과 화량동이 병합되어 수원군 송산면 지화리로 개편되었다. 1949년 화성군이 신설되었고 2001년 화성군이 화성시로 승격되어 화성시 송산면 지화리가 되었다.
이봉산은 들머리와 날머리 모두 초계정공 묘지입니다.
♤ 이봉산(二峰山, 105.7m)/ 삼각점
화성시 송산면 마산리와 지화리 경계에 있는 이봉산은 원래 마산(馬山)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산 동쪽 아래 동네의 마산리의 형세가 말의 모습과 같다고 하여 생긴 명칭이라니 말이다. 다음(Daum)지도와 몇몇 지도에는 삼봉산이라 표시된 곳도 많지만 화성시의 거리명이나 국토지리정보원 자료에도 이봉산으로 표기되어 있으니 이봉산이라 불리우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 정상에는 나무로 만든 의자가 있고 맨발 여영대선배님의 산패가 보이며 식별이 어려운 삼각점이 있다. 정상에 띠지들이 보이고 좌틀로 꺽어 내려선다.
지화리고개로 내려서며 오른쪽에 있는 민가에 수도가 보입니다. 민가 뒤쪽에 있는 묘지 주인은 부인을 둘 거느린 초계정공입니다.
♤ 지화리(芝花里) 고개
이봉산에서 내려선 화성시 송산면에 위치한 지화리고개는 정상에 지화리버스정류장이 있고 2차선 도로(송산서로)가 지나간다. 포구가 있던 곳이었으나 시화방조제 준공으로 내륙지역이 되었고 자연마을 거지는 지화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인근 마을 중 가장 먼저 부락이 형성되었던 곳으로 구한말 때는 거지동으로 불렸으며 화량은 화량진터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고 방죽머리는 마을 앞에 방죽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거지와 화량의 이름을 따서 지화라는 명칭이 생겼다. 도로건너편의 승학산을 오르는데 오른쪽 서전(주)회사 직전의 울타리옆으로 오른다.
♤ 승학산(乘鶴山, 109.7m)
승학산 산패가 나무 높이 매어져 있다. 화성시 송산면 지화리에 있는 산으로 이곳의 유래에 대한 자료는 찾을 길이 없다. 잡목을 헤치고 승학산 아래로 내려서다 갈림길에서 왼쪽 지화리로 이어지는 뚜렷한 등로를 버리고 오른쪽의 희미한 길로 걸어간다. 잠시후에 조망이 트이면서 지화리가 보이고 그 너머로 바다 가운데에 선감도가 보인다. 능선을 향해 수로를 타고 내려오니 묘지가 나오고 비문에 성도라 적힌 기독교인 묘지도 나온다.
♤ 2차선도로
성도 비석이 서있는 기독교인 묘지에서 2차선 도로로 내려서서 화랑교회 버스정류장을 지나 화랑교회, 꽃다리마을 컨테이너, 지화2리버스정류장, 마을회관을 차례로 지나고 양회임도로 변한 황톳길 방향으로 직진하여 황톳길 끄트머리 포도밭에서 우틀로 꺽어진다. 비포장 임도를 따르면 慶州金氏 雞林君 京波 비석이 보였다는데 지금은 이장했는지 없어졌다. 지맥은 비석 뒤의 희미한 등로를 따른다.
♤ 와룡산(臥龍山, 107.8m)/ 삼각점
준희선생님 와룡산 산패가 나무에 매어 있다. 화성시 송산면 지화리에 있는 산으로 정상 바로 옆에는 상주박씨 묘지 한기가 있는데 전망은 없다. 동쪽으로는 구봉산과 봉화산이 보이고 나뭇가지 사이로 선감도와 전곡항이 보인다. 와룡산에 대한 자료는 찾을 길이 없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중국과의 뱃길로 이용되던 곳이었는데 지금이야 화성방조제로 인하여 농경지로 변해있지만 방조제 완공전 까지만해도 구봉산의 당성(당항성)과 와룡산의 남경성(화량진성)사이는 바닷물이 드나들었다. 당성은 6세기부터 10세기에 이르기까지 대중국 교역항이자 군사요충지로 역사에 많이 노출되어 일부 성곽도 보수되어 있고 사적 제217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와룡산에서 잡목의 능선길로 약 5분정도 내려서면 작은 돌들이 쌓여져 있는 남경성에 도착하고, 남경성 정상부에서 우틀로 전곡항과 제부도를 바라보면서 내려선다. 남경성을 내려서면 군사훈련용 시설물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는 화량진성을 지나 지맥은 왼쪽의 능선을 따라 전곡1교로 내려간다.
♤ 화성 화량진성(花梁鎭城)/ 남경성/ 남경두토성/ 남경도목쟁아/ 화량성/ 지화리산성/ 와룡산성
무너진 토성 흔적이 나오는 남경두토성 갈림길에서 선감도와 전곡항의 모습이 바라다 보인다. 이곳에서 지맥은 뚜렷한 직진길을 버리고 등로가 전혀 보이질 않는 오른쪽으로 치고 들어간다. 남양반도의 지형은 굽이마다 곶이다. 땅의 생김새가 입을 내밀듯 바닷가로 삐죽이 뻗어 있기 때문이다. 화성시 송산면 지화리와 건너편 전곡리까지 300m 거리는 해안과 맞닿아 있다. 입구는 좁지만 내륙으로 들어서면 칠곡리, 중송리까지 포함해 3km가 호리병처럼 드넓다. 현재는 농토가 됐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바다와 연결됐던 곳이다. 이곳으로 수많은 배가 드나들던 포구 어귀를 한눈에 감시하던 와룡산(107.8m)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산성이 하나 있는데 남경두토성(화량성)이다. 화성시 송산면에 지화리 산90번지 일대에 있는 조선시대 석축의 포곡식 평산성으로, 평면은 남북이 길쭉한 타원형이다. 산성뿌리까지 바닷물이 출렁거렸고, 뱃길이 트이자 포구에는 아득한 옛날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중국 대륙문화가 한반도로 들어오는 뱃길 중 가장 빠른 곳이어서 이 지역을 차지하려는 삼국들의 쟁탈전도 치열했다. 백제가 터를 닦고, 고구려가 왔다갔다. 신라는 국운을 걸고 이곳에 깃발을 세웠다. 영토사수의 결의를 다짐하며 진흥왕(564년)은 이곳에 수군기지 화량진을 설치하고 당나라와 동맹협상을 추진하면서 삼국통일의 발판을 마련했다.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는 당나라로 유학을 떠날 때 당항성에 이르러 한 무덤에서 잠을 자게 되는데, 잠결에 목이 말라 마신 물이, 아침에 보니 해골에 괸 물이었음을 알고 사물 자체에는 정(淨)도 부정(不淨)도 없고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음을 크게 깨닫고 그냥 돌아왔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화량은 서해안 신라 최대의 항구였다. 왕건도 후삼국을 통일할 때 이 지역을 가장 먼저 차지한 후, 나주 무안을 점령했다. 조선 태종은 1413년 남양도호부를 설치할 정도로 행정과 군사적으로 중요시했다. 산성 앞은 탄도가 앞을 막고, 대부도와 제부도 사이는 마산수로가 형성돼 있어 육지로 들어오는 왜구를 막는 군사요충지였다. 이런 지형지물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곳에 쌓은 것이 화량진성이다. 천수백년에 걸쳐 화려한 영화를 누렸던 화성일대는 크고 작은 성터 20여 개소를 쌓을 만큼 우리역사에서 늘 긴장을 풀 수 없었던 지역이다. 화성 화량진성은 조선 전기에 경기도 지역 수군을 총괄하는 경기수영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수군절도사 혹은 수군첨절제사가 파견되었으며, 선조 8년(1575)에는 수군절도사가 영종포(永宗浦)·초지량(草芝梁)·제물량(濟物梁)을 관할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하지만 청나라의 침략이 두려웠던 인조는 1629년 도성방어를 위해 강화도 교동으로 수군절도사를 옮기면서 화량진성은 수군기지로서 막을 내렸고, 산성기능만 유지하다가 폐성되고 말았다. 화량진성은 와룡산 정상에서 남쪽 산줄기를 타고 내려온 산등성이에 있다. 서신 당성에 비해 유명하지 않지만 화성시 관할의 석축 산성으로서는 유일하다. 2013년 한신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지표 조사에 의하면 잔존 성벽의 길이는 약 776m이고, 훼손된 추정 동벽 및 동남 구역을 포함하면 1,176m이다. 성벽은 협축과 편축을 혼용하여 축조하였고, 성 밖으로는 외황(外隍, 성벽 바깥에 조성한 물 없는 도랑)을 조성한 후 2~6단의 유단 시설을 지형 조건에 맞추어 설치하였다고 보고하였다. 북벽과 서벽 일부에서만 석축이 확인되며, 동벽은 석축이 많이 붕괴된 상태이다. 남벽은 마을 진입로와 경작지 조성으로 인해 대부분 파괴되었지만, 도로 단면에서 뒤채움석이 확인되어 석축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2013~2014년에 한신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서문 터 시굴 조사에서 문 터 내측에 시설된 'ㅁ'자형 내옹성이 확인되었는데, 충북 청주시 상당산성 남문과 동북암문, 부산광역시 기장산성 남문 터 등에서도 나타나는 형식이다. 17세기를 전후한 시점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며, 6·25전쟁 때 폐쇄되었다. 2018년 한울문화재연구원 발굴 조사 결과, 서측과 서남측 성벽 축조 방식이 편축으로 확인되었다. 서측 성벽은 허튼층쌓기와 바른층쌓기가 보여 최소 1~2차례 이상 수·개축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서남측 곡성부는 선대 성벽의 치성이거나 왜성에서 보이는 횡시(橫矢)일 가능성이 있다. 지표 조사에서 외황과 토루의 흔적으로 보고된 곳은 발굴 결과 해자로 밝혀졌으며, 양안에는 호안석축을 쌓았다. 2020년에도 한울문화재연구원에서 북측 성벽과 해자를 발굴하였다. 북측 성벽은 서측과 마찬가지로 편축으로 확인되었다. 면석은 최대 5단이며, 105㎝ 정도 잔존한다. 북측 해자도 양안에 호안석축이 확인되어 모든 성벽 바깥에 같은 양식의 해자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북측 성벽 내측에서 건물터가 확인되었는데, 장대로 추정된다. 화성 화량진성은 2016년 5월 30일에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화성 화량진성은 지표 조사에서 채집된 도기, 자기, 기와 등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운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고려사』에서 화지량이란 지명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고려 시대부터 관방 관련 시설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8세기경의 인화문 토기 편도 채집되어 통일 신라까지 올라갈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태행지맥은 바다가 들어왔던 전곡1교에서 끝내고, 전곡항 구경하고 요기도 할겸 서울로 들어오는 버스를 타기위해 전곡1교 앞에서 뚝방길을 따라 약 3.5km(약 45분 소요) 떨어진 전곡항으로 나갑니다. 걸어가며 세번만에 탄도에 가신다는 귀인분을 만나 차를 얻어탔네요.
♤ 전곡1교/ 화성시 송산면 지화리
성곽이 끝나는 지점부터는 등로는 아예없고 길을 만들어 내려간다. 급경사 절개지를 내려서니 비포장 도로가 보이고 도로에 내려서니 바로 앞에 전곡1교 다리가 보인다. 이곳에서 태행지맥을 마무리 한다. 이곳은 예전에 바다였는데 시화지구 간척사업으로 인해 육지로 변한 곳이다. 버스를 타기 위해서 전곡리 방향으로 30분 정도 걸어 나간다. 전곡리의 자연마을로는 노가리, 무두리, 은쟁이 등이 있다. 노가리는 갈대꽃이 많이 피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무두리는 갯물이 드나들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은쟁이는 산이 둘러싸서 숨은 것같은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 전곡리(엠보트) 버스정류장
전곡1교에서 전곡항으로 약 20분 걸으면 301번도로의 전곡리(엠보트)정류장이 나온다. 전곡항 입구와 탄도방조제 다리위를 건너는 교차로 삼거리, 전곡항 입구의 버스정류장에 있는 버스노선 안내도에 사당역으로 가는 1002번 버스는 정차하지 않아 전곡항까지 가야한다. 다음 정류장이 전곡항이다.
바깥고렴섬과 연결하여 관광지를 만들었고, 서해랑제부도해상케이블카도 운행하네요.
♤ 전곡항(前谷港)/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
전곡항 일대는 원래 백제의 영역이었으나 한때 고구려의 당성군이 되었다가 6세기 이후 신라의 영역이 된 후에는 당나라와의 문화 및 무역교류에 유일한 창구로서 큰 역할을 했다. 그 당시 이름은 당항진이다. 당항진은 당성의 포구 이름이며 현재 당성은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32번지 구봉산에 위치해 있고 3중의 성벽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라가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흐름에 휩싸여 있던 중 원효와 의상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중국 유학길에 오르게 됐고, 중국으로 가기 위해 당성을 찾았다. 661년, 원효와 의상은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중 전곡항 근처 토굴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된다. 그 날 해골에 괸 물을 마신 원효는 세상 만사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는 득도를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고 한다.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에 있는 항구이다. 전곡리(前谷里)란 지명은 벼슬아치가 많아 부잣집이 많고 세도가문이 주를 이루고 있어 구봉산 앞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산 앞 골짜기에 있다하여 앞실(前室)이라 불리었으나, 한일합방 이후 앞실의 전(前)자와 계곡이 많았다는 뜻에서 곡(谷)자를 합하여 전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항구의 등급은 지방어항이며 원래 전곡포구이던 것을 1996년 지방어항으로 지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기도 5개 (전곡항, 탄도항, 대명항, 제부항, 풍도항)밖에 되지 않는 지방어항 중 가장 큰 규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의 경기도 대표적인 지방어항이라고 볼 수 있다. 10여년 전 시화방조제가 생기면서 시화호 내 이주민들을 위해 조성된 신생 어항으로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인근의 제부도, 화성호, 궁평항 등과 함께 서해안 관광벨트 개발계획에 따라 전곡항도 함께 개발되었다. 전곡항은 전국 최초로 레저어항 시범지역으로 선정된 곳이다. 전곡항은 항구 옆 방파제가 있어 밀물과 썰물의 영향을 받지 않아 배가 드나들기 수월하다. 탄도방조제로 이루어진 만 덕분에 전곡항은 서해안인데도 불구하고 조수간만의 차이와 관계없이 24시간 내내 항구의 운영이 가능하다는 장점을 살려 다기능 테마어항으로 조성되었다. 요트와 보트가 접안할 수 있는 마리나 시설이 있으며, 매년 경기국제보트쇼와 코리아메치컵 세계요트대회가 개최되는 아름답고 이국적인 어항이다. 고렴산 전곡항은 튀어나온 지형에 위치하고 있어 마리나, 항구 반대편 안고렴섬은 갯벌이 펼쳐져 있는데, 평시에는 지역 어촌계에서 종패를 뿌리고 관리하는 낙지, 어패류 양식장으로 쓰여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다. 다만 매년 5월경 전곡항에서 열리는 망둑어 축제 때에는 개방하여 망둑어 잡기 대회를 연다. 전곡항 쪽에서도 낚시를 할 수 있는데, 조황은 좋은 편이 아니다. 고기를 잡으려면 전곡항에서 출발하는 고깃배를 타고 배낚시를 나가는 것이 좋다. 전곡항에서 매시간 출발하는 유람선이 있다.
전곡항에서는 선감도가 탄도에 가려 보이지 않습니다.
♤ 선감도(仙甘島)
선감도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에 있던 섬이었다. 명칭 유래를 보면 고려시대부터 선감미도(仙甘彌島)로 표기되어 왔으며, 속세를 떠나 선경에 살며 구름과 학을 벗삼아 지내던 사람이 내려와서 맑은 정한수로 목욕을 하였다는 전설이 있어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간척사업을 통해 시화호 개발사업을 실시함으로써 주변의 섬들을 연결하는 방조제가 건설되었고 도로를 개설하여 동쪽의 화성시 서신면에서부터 탄도·불도·선감도를 거쳐 대부도까지 모두 연륙되었다. 대부도와 선감도는 하나의 섬으로 통합되었다. 섬의 최고봉은 125m의 대흥산이다. 선감학원(仙甘學園)은 일제강점기 시절, 선감도에 위치한 소년들의 수용시설이다. 일제 말엽인 1941년 10월 조선총독부 지시로 세워진 이 시설은 1942년 4월에 처음으로 200명의 소년이 수용되면서 본격적인 비극의 서막이 태동되기 시작했다. 그 이후에도 1982년 제5공화국 초기까지 40년 동안 운영되었다. 선감학원이 설립된 목적은 불량소년들을 교화시킨다는 명분이었다. 일본은 1924년 10월에 함경남도 영흥에 감화원(感化院)으로 영흥학교(永興學校)를 설립했다. 그 다음은 1938년 10월에 전라남도 목포 고하도(古下島)에도 목포학원(木浦學園)이라는 감화원을 추가로 설치했고, 1942년 안산의 선감도에 선감학원이라는 감화원을 설치했다. 그 당시 일제의 수탈로 인해 몰락하는 농민이 점차로 늘어나고 이들은 도시의 빈민으로 전락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거리에서 걸식하는 숫자도 점차 늘어만 갔다. 이에 일제는 1942년 감화령을 보다 강화시킨 「조선소년령(朝鮮少年令)」을 발표하면서 청소년 수용시설인 감화원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가 운영하는 사업에 도움을 줄 수 있는 15가구 70여 명만을 남긴 채 주민 400여 명을 강제로 이주시킨 다음 선감학원을 설치했다. 이 시설은 해방 이후 1946년 2월 경기도로 이관되었다. 1954년 새로운 건물을 지은 다음 부랑아들을 수용하는 시설로 변모되어 1982년까지 존속되었다. 모든 물자가 부족하던 시절, 선감학원의 수용 시설도 매우 열악했고, 외부와의 접촉을 할 수 없는 섬 지역이어서 인권을 유린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들은 교관들의 엄격한 통제를 받으면서 군대식으로 강제노역을 당하기도 했다. 매 맞고, 병들고, 배고프고, 마침내 죽기도 했다. 일부는 고문과 학대, 노역에 시달리다가 탈출했지만 갯벌에 빠지고 밀물과 거센 조류에 휩쓸려 죽기도 했다. 자급자족이란 명분 아래 소년들을 강제로 노동시켰으며 이곳에서 탈출을 막기 위해 여러 가지 비열한 방법을 쓰기도 했다. 결국 소년들은 구타와 굶주림 때문에 영양실조와 병으로 이어졌으며, 굶주림에 못 이겨 멋모르고 독버섯을 먹고 죽는 등 많은 어린 소년들이 희생되었다. 어린 생명들은 그렇게 국가적인 목표 아래 시달리다 죽어갔고, 비석 하나 없는 선감원 시설 인근 야산에 매장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세상에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일제 당시 선감원 부원장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8살 때 선감도에서 2년간 생활을 했던 이하라 히로미츠씨가(井原 廣光) “아! 선감도(1989년)”라는 소설을 발표하면서부터다. 그는 당시 소년들의 참혹함을 직접 목격하고 이 소설을 쓴 것이다. 그는 “당시 눈으로 보이는 육지는 불과 300여 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썰물 때 많은 소년들이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물살이 빨라 대부분 익사하거나 육지에 닿았다 하더라도 곧 잡혀 왔다. 물론 잡혀 와서는 지하실에 감금되어 잔혹한 체벌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이런 사실을 폭로한 이하라 씨는 여러 번 한국을 방문해 일본이 저지른 일에 대해 사과했으며, 희생당한 어린 아이들을 위해 추모식도 열었다. 현재는 경기창작센터로 바뀌었다. 인근에는 당 시설의 비극적인 역사를 엿볼 수 있는 선감역사박물관이 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감옥이나 체벌 등 물리적인 방법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물은 가능하지만 영혼을 가진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완전히 다르다. 끊임없는 사랑과 관심, 정의와 인간 존중속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성장하는 것이다.
♤ 에필로그
게으름을 핑계로 곶감 빼먹듯 하나하나 가까이에 있는 쉬운 지맥을 찾게 됩니다. 봉대산님과 태청지맥을 같이하기로 하였고 서둘러 동밖에대장님도 만나볼 이유가 있는데 설 전후로 내려갈렸더니 글쎄 오가는 교통편이 매진 사례네요. 오가기 편한 태행지맥으로 급선회하였습니다. 첫날 산행 마치고 집에 와서 자고, 둘쨋날 4시에 일어나 사당역에서 06:10분 1002번 첫차를 타고 우림아파트에서 내려, 20-3번 버스로 두 정거장을 가니 운장고갭니다. 선배님들 산행기를 읽고 자료를 정리 요약해 두었지만 그새 또 많이 변했어요. 길이 많이 다듬어져 여름에 진행해도 무난하다 싶은데 지맥치곤 가시덤불은 그다지 많지 않지만 그늘이 없다는게 흠일 수도 있겠군요. 후기 중에 원효와 관련한 내용이 반복되어 나타나네요. 화성시에서 태행지맥을 원효의 깨달음길로 조성 중인데 특히나 남양읍으로 들어서며 지맥 띠지를 제거하고 원효길 띠지로 대체되어 있습니다. 지역 명물 길을 조성하는거야 달리 말할 수는 없지만 의욕이 과해 새로운 동북공정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당항성은 복원을 하였다지만 쉴만한 그늘막 하나 없어 망해루라도 복원했음 싶은데 고증할 자료가 있어야죠. 옛 우물터에 관정이라도 파서 식수라도 나오게 하면 좋겠는데 문화재관련 법령을 바꿔야 되니 그것도 불가능한 일이겠죠. 화량진성은 발굴 복원 중이니 연계해서 와룡산에 전망대 하나 멋지게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1구간 은장고개 직전 92.3m봉으로 막 오르고 있는데 멀리서 지맥꾼 한분이 열심히 달려오시네요. 어찌나 반갑던지 순간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날뻔 했네요. 봉산악회 도비산선배님이셨습니다.^^ 항상 느끼는 감정이지만 이 길을 먼저 걸으신 선배님들의 족적, 띠지, 남겨주신 트랙과 트레일이 있어 가능했습니다. 이번에도 방장님을 비롯 준희선생님, 조고문님, 아름다운강산님, 박종율선배님, 비실이부부선배님, 광인선배님, 돌구선배님, 묵언선배님, 금곡선배님, 부뜰이선배님, 와룡산선배님, 산객님, 무영객님, 세르파선배님 후상님 그리고 백두사랑산악회, J3클럽 솔별님, 무한도전, 인천조은산악회 등등등 많은 띠지들의 도움을 받으며 갔습니다. 두 구간에 걸쳐 태행지맥을 여유있게 마무리 하고 처음 가본 전곡항에서 고렴산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고 1002번을 기다리며 전곡항 수산물센터에서 회를 시켜 소주 한잔으로 뒤풀이를 했네요.
홀대모선후배님들 모두 가족과 함께 따뜻한 설명절 보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태행지맥 완주 축하 축하 드립니다
늘 홀산 하시는 모습이 이제 저와 닮아 가네요
지나온 구간이라 다시 생각을 나게 하네요
마지막 회 한접시에 피로도 풀리고 고생한 보람도 잊어지겠지요
늘 안산 즐산하시고 행복한 지맥 이어가시기를 바랍니다
늘 응원 합니다^-^
와룡산선배님!
마지막에 바닷가라 무리해서 회 한잔했습니다.
단 몇초 차이로 차를 놓쳐 다시 들어가 서덜탕에 소주 한병 더 시켰더니 그 바람에 45+16이 나왔습니다.^^
이른 시간에 태청에 붙을려고 하는데요.
금적, 팔봉, 성지, 변산, 칠봉, 선암, 오토, 성수, 병풍, 사자, 백룡, 옥룡, 철성, 식장, 장령, 구암, 갈라, 쌍령, 노목, 죽렴, 갑산, 천마, 백덕, 웅석, 독조, 명성 등등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퐁라라운영자님의 태행지맥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이틀간의 짧지 않았던 지맥 여정을 전곡항에서 마무리하셨네요.
태행지맥은 마루금을 점유한 공장시대 통과로 고심하던 기억이 납니다.
쓰레기하치장으로 변모되는 황폐화된 마루금 모습도 여실히 드러나네요.
기억이 가물거려 어떻게 저곳을 통과했을지 생각이 나질 않네요.
전곡항 횟집에서 여유로운 만찬도 구미가 당깁니다요.~ ㅎ
수고많으셨습니다.
네, 방장님!
거기 양노리공단을 지나는 대락님과 함께 진행하신 방장님 트랙을 캡쳐해서 가져갔는데도 알바를 했어요.^^
방향감각을 잃어가지고 공단을 가로질러 횡으로 가야는데 뒤쪽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올라왔습니다.
그 외에는 그런대로 잘 진행한 것 같습니다.
지맥을 하나 또 출발할려는데 봄비가 넘 자주 내려서 택일하기가 어려워 망설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