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족史
동래정씨(東萊鄭氏)는 고려 때 보윤호장(甫尹戶長)이었던 정지원(鄭之遠)을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을미보(乙未譜)’에는 안일호장(安逸戶長)이었던 정회문(鄭繪文)을 시조로 하여 기세(起世)하였으나 ‘(丙申譜)’이후부터는 문안공(文安公) 정항(鄭沆)의 묘지(墓誌)가 발견된 이후 묘지문(墓誌文)에 의해 그로부터 3세(世)를 소급하게 되었으므로 정지원(鄭之遠)을 중시도로 하여 기세(起世)하고 있다.
정지원(鄭之遠)과 정회문(鄭繪文) 사이의 세계(世系)는 알 수 없는 실정이다.
동래정씨(東萊鄭氏)는 3세조 정목(鄭穆)이 문과(文科)를 거쳐 상서좌복사(尙書左僕射)에 오르고, 그의 네 아들이 모두 문과에 오름으로써 명족(名族)이 되기 시작했다.
고려조에 이미 대족(大族)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東萊鄭氏)는 조선조 전기간에 걸쳐 17명의 상신(相臣)을 내었다. 이는 전주이씨(全州李氏)의 22명, 안동김씨(安東金氏)의 19명에 이어 세번째로 많은 것이다.
그외에 대제학(大提學) 2, 호당(湖當) 6, 공신 4, 판서 20여 명과 문과급제 1백98명을 배출했다.
왕족 이씨(李氏)와 세도정치의 안동김씨(安東金氏) 다음으로 많은 상신(相臣)을 배출하면서도 외척으로 세력을 얻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동래정씨(東萊鄭氏)의 분파(分派)는 ‘을미보(乙未譜)’편찬 때는 교서랑공파(校書郞公派), 첨사공파(詹事公派),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의 3개파로 나누었다.
그런데 ‘(丙申譜)’를 편찬할 때는 6세조 정보(鄭輔)의 후손을 교서랑공파(校書郞公派), 정필(鄭弼)의 후손을 첨사공파(詹事公派)의 2개파로 나누었는데, 204년 이후 편찬된 ‘경신보(庚申譜)’ 편찬 때에도 분파(分派)는 여기에 의거했다.
그런데 이 2개파는 3세조 정목(鄭穆)의 후손에서 정택(鄭澤)의 후손만으로 된 것으로, 정항(鄭沆)의 후손이나, 정문도(鄭文道)의 둘째 아들로 동래(東萊)에 남아 호장직(戶長職)을 계속해간 정선조(鄭先祚)의 후손은 빠져있다.
교서랑공파(校書郞公派)는 다시 전서공파(典書公派), 설학재공파(雪壑齋公派), 문경공파(文景公派), 참의공파(參議公派), 평리공파(評理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로 나누어지고, 첨사공파(詹事公派)는 다시 윤창파(允昌派), 호군공파(護軍公派), 수찬공파(修撰公派),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 참봉공파(參奉公派),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로 나누어졌다.
보윤호장(甫尹戶長)을 지낸 정지원(鄭之遠),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낸 정문도(鄭文道)의 후손은 3세조인 정목(鄭穆)이 과거를 통해 고려 중앙정부로 진출하게 된 이후 계속 과거를 통해 중앙정계에 나아갔다. 정지원(鄭之遠) 이전에도 정씨(鄭氏)는 동래(東萊)의 토착세력으로 향직(鄕職)에 종사했었을 것이다. 한편 정선조(鄭先祚)의 후손은 계속 동래(東萊)에 남아 향리직(鄕吏職)에 종사했다.
정제(鄭濟), 정점(鄭漸), 정택(鄭澤), 정항(鄭沆)은 정목(鄭穆)의 아들로 모두 문과에 올라 각각 시랑(侍郞), 형부랑중(刑部郞中), 문하급사중(門下給事中) ㆍ 태자찬선대부(太子贊善大夫), 예부상서한림학사(禮部尙書翰林學士)에 이르렀다.
이중에서 정항(鄭沆)은 청백함으로 이름이 높아 ‘고려사’에 입전(立傳)된 인물이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집에는 초상을 치를 한섬의 곡식조차 없었는데, 왕이 그의 청빈함에 놀라 “30년동안 근시(近侍)의 직에 있었고, 11년 동안 승지(承旨)로 있었으면서도 가난함이 이 정도이니 가상하다”고 하며 박미(膊米)로 쌀 1백섬과 베 2백필을 하사하고 친필로 문안(文安)의 시호를 내렸다.
그의 아들 정서(鄭叙)는 임금을 그리는 노래 ‘정과정곡(鄭瓜亭曲)’을 남긴 인물로 국문학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는 고려 인종과 동서간으로 내시중랑(內侍中郞)의 벼슬까지 지냈으나 의종이 즉위한 뒤 모함으로 동래(東萊)로 귀양길에 오른다. 그가 귀양갈 때 왕(王)이 곧 다시 부르겠다고 약속했으나, 오래도록 부름이 없자 그곳에서 임금을 그리는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후대 사람들이 이 노래에 그의 호를 붙여서 ‘정과정곡(鄭瓜亭曲)’이라 불렀다.
“내 님을 그리사와 우니나니/산졉동새 난 이슷하요이다/아니시며 거츠르신 아으 잔월 효성이 아르시리이다/넋이라도 님을 한데 녀져라/아으/벼기시더니 뉘러시니잇가/과도 허물도 천만 없소이다/무흰 말이신져 슬읍뿐더/아으/님이 나를 마 잊어시니이까/아소 아 도람도르샤 계오쇼셔”
교서랑공(校書郞公)의 5세손인 정량생(鄭良生)은 단성보리찬화공신(端誠輔理贊化功臣)에 책록되고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정구(鄭矩)는 우왕3년 문과에 급제하고 조선개국 후 고관에 올랐다.
조선 개국 후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다. 1394년 왕명(王命)으로 한리(韓理), 조서(曺庶) 등과 함께 ‘법화경(法華經)’ 4부(部)를 금니(金泥)로 썼다. 정종 때 도승지(都承旨) ㆍ 대사헌(大司憲), 태종 때 예문관학사(藝文館學士)를 거쳐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공조판서(工曹判書), 호조판서(戶曹判書),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개성류후(開城留後) 등을 역임하고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明)나라 태조(太祖) 때 만든 각궁(角弓)을 수입해 왔다. 후에 의정부찬성(議政府贊成)이 되었으나 병(病)으로 사퇴했다. 글씨를 잘 썼는데 ‘건원릉신도비(健元陵神道碑)’의 제액(題額)을 쓴 것이 남아있다.
정량생(鄭良生)의 세째 아들인 정부(鄭符)의 집안은 그의 아들 정흠지(鄭欽之)와 손자 정갑손(鄭甲孫), 정창손(鄭昌孫)의 의해 크게 이름을 날렸다.
정흠지(鄭欽之)는 음보로 지평(持平)이 된 후 태종 1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했다. 이조(吏曹), 병조정랑(兵曹正郞), 좌헌납(左獻納)을 거쳐 집의(執義), 지신사(知申事), 이조참판(吏曹參判) 등을 역임하고 1430년 대사헌(大司憲)에 승진, 이듬해 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되었다. 1433년 황보인(皇甫仁) 등과 ‘계축진설(癸丑陣說)’을 찬진(撰進)하고, 이어 충청(忠淸) ㆍ 전라(全羅) ㆍ 경상삼도도순무사(慶尙三道都巡撫使)가 되어 주군(州郡)의 성(城)터를 심정(審定)했다. 경사(經史)와 천문(天文)에 밝았다.
세종 때 벼슬길에 오른 정갑손(鄭甲孫)은 청렴결백과 대쪽같은 성품, 서슴지 않은 직언으로 이름이 있었다. 함경도(咸鏡道)관찰사 시절 아들 정오(鄭烏)가 향시에 합격한 것을 보고 시험관을 불러 “내 아들이 학문에 등한한 것을 아는데 아첨을 하려고 임금을 속이느냐”고 대노하며 시험관을 퇴직시켰다는 일화가 전하고 있다.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다.
그의 동생 정창손(鄭昌孫)은 세조의 집권에 참여한 공으로 세조~성종대에 벼슬이 크게 올라 집현전저작랑(集賢殿著作郞), 교리(校理) 등을 역임했다. 1444년 집현전응교(集賢殿應敎)로 최만리(崔萬理) 등과 함께 한글제저에 반대했다가 투옥되고, 1446년 집의(執義)로 있으면서 불교숭상(佛敎崇尙)을 반대하다가 다시 파직되었다.
1449년 집현전부제학(集賢殿副提學)으로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 ㆍ 수사관(修史官)을 겸직,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世宗實錄)’, ‘치평요람(治平要覽)’ 편찬에 참여했다. 대사헌(大司憲), 대제학(大提學),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고, 단종 원년(元年)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거쳐 세조가 즉위하자 우찬성(右贊成)으로 좌익공신2등(佐翼功臣2等)이 되어 봉원군(蓬原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단종(端宗) 복위(復位) 음모를 선변(先變)한 공(功)으로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대사성(大司成) ㆍ 대제학(大提學) 등을 겸직,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1457년 좌의정(左議政), 이듬해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그후 익대공신3등(翊戴功臣3等)에 오르고,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이 되고, 1471년 좌이공신2등(佐理功臣2等)이 되었으며 70세에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았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고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정창손(鄭昌孫)의 아들 정괄(鄭佸)은 좌의정에까지 올랐는데, 강직하기로 이름이 있었다. 사은사(謝恩使)로 명(明)에 다녀오다가 죽었다.
조선전기에 동래정씨(東萊鄭氏)의 가세는 정란종(鄭蘭宗)과 그의 아들 정광필(鄭光弼)에 의해 더욱 굳게 되었다.
정란종(鄭蘭宗)은 세조 2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1469년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로서 ‘세조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성종 2년 좌리공신4등(佐理功臣4등)으로 동래군(東萊君)에 봉해졌다. 호조판서(戶曹判書), 우참찬(右參贊)을 역임했다. 성리학에 밝았고 서예에도 능했는데, 글씨로는 ‘원각사비(圓覺寺碑)’, ‘낙산사종명(洛山寺鐘銘)’ 드이 남아 전한다.
정광필(鄭光弼)은 성종 2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되고, 부제학(副提學),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역임했다.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왕(王)에게 극간(極諫)하다가 아산(牙山)으로 귀양갔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부제학(副提學)에 복직되고, 그후 우의정(右議政),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기묘(己卯)사화가 일어나 유가(儒家)의 왕도(王道)정치 이상을 실현하려던 조광조(趙光祖) 중심의 사림세력이 모두 화를 입을 때 그는 임금의 노염을 사면서도 이들 이상파 소장학자들을 두둔, 희생을 막았다. 그러나 그는 파면당했다. 그후 김안로(金安老)의 무고(誣告)로 김해(金海)에 귀양갔다가 김안로(金安老)가 사사(賜死)되자 풀려나와 영의정(領議政) 윤은보(尹殷輔) 등에 의해 영의정(領議政)에 추천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죽은 뒤 중종(中宗)묘정에 배향되고 문익공(文翼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그의 집은 당시 서울 남산 아래 회동(會洞) (지금의 회현동(會賢洞))에 있었는데 이곳을 근거지로 정(鄭)씨 일문(一門)이 모여 살기 시작, 그후 이들을 회동정씨(會洞鄭氏)라 부르기도 했다.
정광필(鄭光弼) 이후 그의 후손들은 계속 고관에 나아갔다.
특히 정광필(鄭光弼)의 손자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 (대제학(大提學) ㆍ 좌의정)의 자손에서 벼슬이 많이 배출됐다. 우선 외아들 정창연(鄭昌衍)이 좌의정, 큰손자 정광성(鄭廣成)이 형조판서, 작은손자 정광경(鄭廣敬)이 이조판서를 지냈다. 증손대에서는 정광성(鄭廣成)의 아들 정치화(鄭致和) (좌의정), 정광경(鄭廣敬)의 아들 정지화(鄭知和) (좌의정)가 각기 정승을 지내 동래정씨(東萊鄭氏) 집안에 삼정승(三政丞)이 났다고 일컫는다. 그 다음 대에서는 정태화(鄭太和)의 아들 정재숭(鄭載嵩)이 우의정, 정지화(鄭知和)의 아들 정재희(鄭載禧)가 예조판서로서 벼슬의 맥을 이어갔다.
6대손에서 정석오(鄭錫五) (좌의정), 정형익(鄭亨益) (예판(禮判)), 7대손에서 정홍순(鄭弘淳) (우의정), 정상순(鄭尙淳) (이판(吏判)), 정경순(鄭景淳) (형판(刑判)), 정일상(鄭一祥) (호판(戶判)), 8대손에서 정존겸(鄭存謙) (영의정), 정존중(鄭存中) (공판(工判)), 9대손에서 정원용(鄭元容) (영의정), 정시용(鄭始容) (형판(刑判)), 정헌용(鄭憲容) (공판(工判)), 정대용(鄭大容) (이판(吏判)), 10손에서 정기회(鄭基會) (이판(吏判)), 정기세(鄭基世) (이판(吏判)), 정기선(鄭基善) (예판(禮判)), 11대손에서 정범조(鄭範朝) (좌의정), 정건조(鄭健朝) (이판(吏判)) 등 선조에서 고종대에 이르는 동안 정유길(鄭惟吉)의 집안은 12대에 걸쳐 정승(政丞) ㆍ 판서(判書)의 성좌를 고루 오르내렸다.
정유길(鄭惟吉)은 안동김씨(安東金氏)에게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길을 가다 우연히 만난 안동김씨(安東金氏)인 김극효(金克孝)의 관형을 보니 그의 몸에서 정승 ㆍ 판서가 나올 상이어서 사위로 맞았다. 김극효(金克孝) 자신은 큰 벼슬자리에 오르지 못했지만 역시 그의 아들 형제 중 두 아들이 정승을 지내 안동김씨(安東金氏) 세도정치의 뿌리가 여기서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정광필(鄭光弼)의 아들 정창연(鄭昌衍)은 광해군 때 좌의정에 있으면서 생질녀(임당(林塘)의 외손녀)인 광해군비(光海君妃) 류(柳)씨를 억울하게 옥사(獄事)의 고초를 당훈 숱한 사람들을 은밀히 구해주어 칭송을 들었다.
그의 장손 정태화(鄭太和)는 인도~효종대에 걸쳐 6차례나 여의정을 지낸 명상으로 37번이나 사직하기를 청원한 끝에 간신히 왕의 허락을 받을 정도로 신망이 두터웠다. 중은 후 현종묘정에 배향되었다. 그의 아우 정치화(鄭致和)는 병자호란 후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보덕(輔德)으로 봉림대군을 심양에 호종했다. 그는 서인(西人)이면서도 성품이 원만해 숙종 1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로 서인(西人)몰락 때 화를 면했는데, 그 역시 11번이나 사직을 간청한 끝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영조 대에 우의정으로 일등 재정관이던 정홍순(鄭弘淳)은 분수를 알고 절약하는 것을 신조로 삼아 나라 살림을 자기 살림 아끼듯 했으며 그의 딸을 시집보내면서 입은 옷에 먹던 밥으로 혼례를 치룰 정도였다.
영조 21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였다. 호조판서(戶曹判書)로 10년간 재직하면서 재정에 재능을 발휘했다.
그는 파전(破錢) 한 푼을 땜질하는 데 두 푼을 들였다. 이를 본 이가 “두 푼을 들여 한 푼을 얻으면 손해가 아니냐”고 묻자 “나 개인은 한 푼을 잃어도 나라에는 한 푼이 이익이 되니 공익(公益)이 아니냐”고 했다는 일화가 전하고 있다.
정문일가(鄭門一家)는 선조 때 정여립(鄭汝立)의 음모사건으로 된서리를 맞고 한때 몰락의 길을 걷기도 했으나, 조선조를 통해 대표적인 가문으로 계속 그 세력을 유지, 발전해 왔다.
구한말, 한일합병 이후의 인물로는 정숙조(鄭肅朝)와 정인보(鄭寅普)를 들 수 있다.
정숙조(鄭肅朝)는 집이 가난했으나 독서를 즐겼고 집안에 예절이 있었다. 김명진(金明鎭)의 추천으로 고종이 태자(太子)를 받들게 하려고 세마(洗馬)를 제수하여 오래도록 동궁시종관(東宮侍從官)에 종사토록 하였다. 만년에 국사가 날로 그릇되어감을 보고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다가, 한일합병 후에는 아예 두문불출, 세상를 떠났다.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는 나라가 망한 난세에서 5천년간 이어온 조선의 얼을 통해 민족혼을 일깨우고자 한 지사였다.
1910년 중국에 유학하여 동양학을 전공하면서, 동지들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광복운동에 종사하였다. 1919년 귀국하여 주로 연희전문학교를 비록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중앙불교전문학교에서 국학, 동양학을 강의하는 한편, ‘시대일보’, ‘동아일보’의 논설위원으로 민중들에게 국혼(國魂)을 환기시켰다.
광복 후 1948년 국학대학장에 취임, 1951년에는 초대 감찰위원장에 취임하였으나 6 ㆍ 25때 납북되었다.
그는 “그러므로 학문이 얼이 아니면 헛것이 되고, 문학이 얼이 아니면 달(達)할 것이 없고, 역사도 얼이 아니면 말할 데가 없다”며 조선의 얼을 강조했다.
국문학사, 한문학, 국사학에 연구가 깊었으며 시조 ㆍ 한시에도 능했다. 저서로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 ‘담원문존(薝園文存)’, ‘월남이상재선생전(月南李商在先生傳)’, ‘조선문학원류고(朝鮮文學源流考)’, ‘담원시조집’, ‘담원국학산고(薝園國學散藁)’ 등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