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배경
유 인 순 -강원대명예교수 이대평생교육원 수필지도교수-
때로 우리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확실한 하나는, 조만간 우리 또한 ‘죽을 것’이라는 사실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고마워해야 하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러나 그들에게 감사해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우리에게 고마운 존재들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겠다. 가깝게는 가족과 이웃 나라와 같은 존재가 있다. 그런가 하면 하늘 땅 공기 물, 그리고 해 달 별같은 자연적인 존재도 있다. 그들은 우리 존재의 든든한 배경들인 까닭이다. 그렇다면 이들 외에도 내가 고마워해야 할 존재, 내 생활의 배경이 되어주고 있는 것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몇 년 전 동남아프리카의 몇 개 나라에서 실크로드 답사를 하던 중, 탄자니아의 잔지바르에서 며칠을 보내게 되었다. 어느 날 잔지바르의 올드 타운, 소위 스톤 타운으로 불리는 곳으로 답사를 나갔다. 말 그대로 좁은 골목들로 구획된, 고층의 석재건물들(17~19C, 백인들이 세운 평균 3층인 건물), 그러나 지금은 상가(商街)를 이룬 곳이었다. 어느 상가의 한 골목, 제법 보기 좋은 건물 입구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 건물 벽에 록 사운드 '퀸'의 보컬리스트 '프레드릭 머큐리'의 사진과 그를 소개하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머큐리가 부모와 살며 중고등 학창시절을 보내던 집이라고 했다. 함께 간 일행들은 머큐리의 사진을 보고 환호하는데 나만 혼자 멀뚱히 서 있었다. 영문 안내판을 통해 그가 유명한 록 사운드의 리더라는 사실만 알게 되었을 뿐, 내가 그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민망하고 무안했다. 가만히만 있어도 평균은 되는 것을 “머큐리가 누구에요.” 했더니 동행자 한 분이 한숨을 쉬고 나서, 나를 위해 머큐리가 불렀던 노래 한 곡조를 불러주었다. 귀국하는 대로 머큐리에 대한 정보를, 그리고 그가 불렀던 노래의 동영상들을 찾아보았다. 그는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그가 참 열심히 온몸으로 노래 부르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이던가 신문에서 머큐리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티브이를 틀어도 라디오를 틀어도 온통 머큐리 이야기, 머큐리 노래였다. 사람들은 저마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 ‘감동 먹었다’고 했고, 나의 올케언니는 그 감동을 혼자 삭이기 힘들어서, 세 번이나 극장을 바꾸어가며 같은 영화를 보았노라고 했다. 올케언니가 아직 새댁이었던 50 년 가까운 옛날 일이다. 모처럼 오빠 집에 다니러 갔더니 젖먹이 첫째를 키우던 올케언니가 내게 남편의 흉을 보았다. 도대체 멋대가리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마침 라디오에서 웬 외국인 혼성 보컬 팀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올케언니는 내게 그 노래가 어떠냐고 물었다. 그리고 올케언니는 오빠가 그 노래를 듣고도 전혀 감동을 하지 않는 것이 정말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자신은 그 팀의 노래를 들으면 언제나 눈물이 나올 만큼 감동한다고 했다. 귀 기울여 열심히 듣는 척했지만 나는 그 노래가 썩 마음에 닿지는 않았다. 올케언니는 음악적 감수성이 없는 남편에 대해 몹시 실망하고, 실망을 넘어 분노와 슬픔까지 느끼던 중이었다. 그래서 그 답답함을 시누이에게 털어놓은 것인데 나는 그저 미안해할 따름이었다. 올케언니는 당시 시누이가 현직 고교 교사인 만큼 음악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감수성을 갖고 있으리라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 사실 올케로서는 시누이에 대해 그런 오해를 할만도 했다. 대개 그렇듯이 나도 초교시절부터 고교시절까지 합창반 출신이었다. 음악선생님들께 과분할 정도의 사랑을 받았었다. 중학시절 음악선생님은 특별히 나를 지목하시고, 선생님 댁으로 불러다가 날마다 직접 바이올린 교습을 해주셨다. 비록 반년 만에 그만두고는 말았지만…. 대학시절, 어쩌다보니 내게는 피아노가 한 대 생겼다(피아노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피아노를 둥당대며 겉멋이 들어 있었다. 그러니 음악적 감수성이 있는 것처럼 남들에게 오해받기 쉬운 처지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야기가 잠시 빗나갔다. 어떻든 음악에 있어서 사람들은 나를 오해하고 있었다. 올케언니도 나를 오해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외국인 가수들의 노래에, 특히 팝송 같은 것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산레모 가요제에서 수상(受賞)한 몇 곡이 계속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때였다. 그 노래들에 공감하지는 않았지만 계속 듣다 보니 익숙해져서 그 노래를 따라 흥얼거릴 때가 있기는 했다. 그런가 하면 노랫말도 모르면서 샹송 같은 것은 그런대로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러나 그때 당시 그렇게도 유명하던 비틀즈의 노래는 나의 취향이 아니었다. 비틀즈의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면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채널을 돌려버리고는 했다. 비틀즈 보다는 오히려 패티킴이나 조영남의 노래를 좋아했다. 언제였던가 마이클 잭슨이 한창 줏가를 올리고, 대중매체를 장악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때 나는 가르치고 잠자고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오롯이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티브이나 라디오와도 담을 쌓고 살았다. 어쩌다가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듣기는 했을 것이다. 언젠가 학생들이 엠티를 가서 공연을 하는데 마이클 잭슨 분장에 그 독특한 스텝을 보여주었다. 그때 내가 놀라서 마이클 잭슨이 남자였어? 했더니 학생들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침 옆에 있던 조교 선생이 ‘그렇지요, 마이클 잭슨은 중성의 소리를 내니까요’ 하며 내가 무안 타지 않도록 옆에서 챙겨주었다.
나는 음악에 대해서 우호적이지 않았다. 완벽한 침묵의 세계에서만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던 때였다. 그리고 그런 경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나는 지금도 정독(精讀)을 하거나 원고를 쓰려고 하면 일단은 주변 정리, 소리 정리부터 한다. 글을 쓸 때는 더 철저하게 소리의 원인 제공이 되는 것들을 멀리 밀어낸다. 그나마 음악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90년대 중반, 교환교수로 1년간의 외국 생활을 하면서부터였다. 이른바 원어민 교수로 그곳에 가서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강의해야 했다. 가족을 떠나 교수아파트의 휑한 방에서 혼자 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시절, 아침에 눈을 뜨면 세상에 나 혼자라는 생각에 막막해지곤 했다. FM 방송에서 클래식 방송을 찾아 채널을 고정시켜 놓았다. 그리고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라디오 스위치부터 켰다. 그렇게 습관처럼 클래식 음악을 듣다 보니 음악이 귀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외로움이 절실해질 때 클래식 음악은 내게 다가와 내 생활의 배경이 되어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다. 요즘도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라디오 스위치를 켜는 것이다. 우리 집에 라디오는 침실과 거실 그리고 서재에 각각 한 대씩 있다. 그 외에도 오래된 여벌의 라디오가 2대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라디오의 채널은 FM 클래식 방송에 고정되어 있다. 독서할 때와 글을 쓸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 음악을 듣는다. 우리 올케언니가 그 노래를 듣기만 해도 감동의 눈물이 나온다던 그 노래를 부른 그룹은 누구였더라? 여기저기 찾아보기 시작했다. 한동안 찾아보고 나서야 '아바'라는 팀 이름을 찾아냈다. 곧이어 '아바'에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냈다. 그들은 스웨덴 출신들이었고 남녀 혼성 4인, 그들은 부부 두 팀이 모여서 만든 그룹이었다. 유튜브에서 ‘아바’를 찾아서 그들의 노래를 들었다. 70년대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않고도 들을 수 있었던, 어디에서나 흘러나오던 귀에 익은 곡들이었다. 5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아바'가 어떤 구성원들이고 그들이 어떤 노래를 불러왔는지, 그리고 그들의 노래를 연속해서 들으면서,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었던 멜로디, 그들 노래의 익숙함에 마음 편한 향수를 느꼈다. 왜 그때는 음악에 대해서 특히 외국인들의 팝송에 대해서 무관심이라기보다는 거부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을까…. 예전에는 두 쌍의 부부가 모여서 이루어진 그룹이었지만 이젠 두 부부팀 모두 이혼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아바'라는 이름으로 그룹 활동은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사람끼리는 헤어질 수 있어도 음악과 사람들과는 분리불가 관계라고 보아야 하나. 돌아보니 나에게 고마운 존재들, 자연과 혈연을 제외하고 인간의 손으로 만든 존재 가운데 가장 많이 지속적으로 내 생활의 배경이 되어주고 있는 것, 바로 음악이 아닌가. 음악이 내 생활공간을 채우고 있는 동안, 그가 나의 생활의 배경이 되어 주고 있는 동안, 나는 무료하지도 외롭지도 않았다. 가끔은 계절과 날씨에 따라, 그때의 기분에 따라 적당한 음반을 골라 들으면서, 혹은 FM 라디오 음악을 들으면서 나는 내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데서 안도의 숨을 쉬기도 한다. 때로 마음에 꼭 드는 곡이 나오면 나는 작곡가와 연주가를 모두 나의 상상의 공간으로 초대하여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곤 한다. 아직은 음악 장르에서 편식경향을 보이고 있지만, 마음을 비우고 듣게 되면 모든 장르의 음악으로 나를 채우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빈다. 흔히 음악을 좋아한다고 하면 누구의 어떤 작품을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게 된다. 그러나 나는 그저 추상명사로서의 음악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는 수준이다. 라디오에 클래식 FM을 고정해놓고 있다는 것은 내가 곧 수동적인 음악애호가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여기에서 내가 좋아하는 특정 작곡가나 특정 곡에 대해서, 절절하게 감동적인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만든 생활의 배경 가운데 최상의 것은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 음악에게 감사한다.
--원석문학회 동인지 11집 초대수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