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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화요일(3월 26일),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 부활 논쟁, 가장 큰 계명
마태복음 22장 15~46절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것
마 22: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7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18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19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20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21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2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바리새인들은 어떻게든지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로마인들 앞에 끌고가 처형하는데 써먹을 수 있도록 예수님이 스스로 함정에 빠질 만한 말을 하기를 바랍니다.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의 조직에 완전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 훈련중인 자들이고 아마도 그들의 스승들보다 덜 위협적으로 보이도록 기만적으로 보내졌을 것입니다. '헤롯 당원들' 헤롯 가문(주전 37년경~주후 93년)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증진시키려 애쓴 느슨하게 조직된 집단입니다. 헤롯 당원들과 바리새인들은 여러 정치적, 종교적 문제에 있어서 원수지간이었지만 여기서는 자신들의 권세와 지위를 위협할 것으로 인식되는 대상인 예수님과 싸우는데 힘을 합칩니다.
17절에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세금은 이스라엘에서 폭발력 있는 쟁점이었습니다. 로마의 모든 신민은 이스라엘 백성을 포함해서 제국의 무거운 과세 아래 신음했습니다. 일부 유대인은 이방인 통치자에게 세금을 내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통치와 모순된다고 믿었습니다.
18절에서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예수님께 질문한 자들은 예수님이 세금을 내는 것이 옳다고 대답하면 세금에 짓눌린 백성들에게 민심을 잃을 것이고, 납세는 잘못된 일이라고 대답하면 예수님을 반란죄로 고소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19절에서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데나리온 은화의 한쪽 면에는 디베료 황제의 측면상과 함께 은화의 둘레를 따라 "신격 아구스도의 아들 디베료 황제" 라는 라틴어 문구가 있었습니다. 또 그 반대편에는 로마의 평화의 여신인 픽스가 "대제사장"이라는 라틴어 문구가 함께 그려져 있었습니다.
21절에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예수님은 황제에 대항하는 정치적 왕국을 세우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금을 내고 시민법에 복종해야 합니다. 이 문제는 세속 정부의 영역에 속한 문제이며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다른 문제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어떤 문제가 어떤 영역에 속하는지 밝히시지는 않지만 오늘날 많은 기독교 윤리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세속 정부는 종교적 교리, 예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문제에 있어서 자유를 허용해야 하며 교회는 정부의 힘을 특정한 종교적 관점에 대한 헌신을 강요하는 데 이용하려 해선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오늘날 전 세계에 있는 모든 형태의 기독교회는 교회의 문제와 국가의 문제 사이의 일종의 분리를 지지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전체주의 정부(러시아 중국 북한 등)는 보통 교회를 억압하고 모든 것을 국가의 영역 아래 두려합니다. 또한 일부 극단적인 이슬람 운동은 독립적인 세속 정부를 폐지하고 모든 것을 이슬람 종교 지도자들의 통제 아래 두려고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교회와 국가가 너무 가까이 제휴하게 되었을 때 그 결과는 대부분 교회 타락으로 이어졌습니다. 여러분 지금 어느 목사가 정치한다고 나대는게 얼마나 잘못된 것이고, 이단인지를 성경 말씀에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하나님을 떠나서 세속적인 정치하는곳이 아닙니다. 개혁파교회는 천주교도 아니고 이슬람도 아닙니다. 이런 정치하는 교회 집단에 속해있다면 신속히 나와서 회개하고 개인적인 구원을 이루어 나가기를 바랍니다. 세상 통치권자는 하나님이시고 세상의 지도자들 역시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라의 지도자가 잘못된 길을가면 교인들은 하나님께 모든것 의탁하고 지도자를 위해 기도해야할 것입니다.
<부활 논쟁,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
22: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 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 26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7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28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31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33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 사두개인들은 교리에 있어서 주로 또는 절대적으로 모세오경에 의존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구약의 후대 책들 예컨대 이사야 26,19, 다니엘 12:2절에서 보다 분명하게 발전된 주제인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신학적으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그들은 부활 이후의 삶을 믿는 자들은 그 삶이 현재의 삶과 비슷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가정하면서, 죽은 남편의 형제와 결혼한 여자는 남편 형제들이 모두 부활하면 근친상간의 판결을 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이를 통해 부활 개념은 정말로 어리석은 것임을 입증하기를 희망했습니다.
24절에서 '모세가 일렀으되', 사두개인들은 구약에서 후대의 '형사취수혼'이라는 불리는 내용을 인용하는데 이에 따르면 자식 없이 죽은 남자의 살아있는 동생은 그의 형수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죽은 형제의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 그녀와 결혼해야 했습니다.
29~30절에서 사두개인들은 두 가지 오류를 범합니다. 첫째, 그들은 성경이 부활의 실재를 가르친다는 점을 잘 모를 만큼 성경을 알지 못합니다. 둘째, 그들은 현재 상상할 수 있는 수준보다 훨씬 더 놀라운 세상을 창조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합니다.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라는 말은 현재의 결혼 제도가 천국에서는 지속되지 않을 것임을 뜻합니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이는 한 사람에게 배타적인 평생에 걸친 혼인의 의무를 지지 않고 사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가르침은 언뜻 보면 이 세상에서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결혼한 부부에게는 실망스럽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사람들은 분명 천국에서 자신이 사랑한 사람들을 알아볼 것이며(마 8:11; 눅 9:30, 33) 가까운 관계의 기쁨과 사랑은 이 지상에서보다 더 클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예수님의 언급은 하나님이 내세에 훨씬 더 깊은 우정, 기쁨, 사랑의 관계를 세우실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성경은 구속받은 이들을 기다리는 영원한 영광이 아무도 구하거나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찬란한 것임을 암시하지만(고전 2:9; 엡 3:20)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계시되지 않습니다.
32절에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이는 출애굽기 3장6절의 인용구에 담긴 현재 시제는 논리적으로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 말씀을 하셨을 때 비록 족장들이 죽은 지 수백 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그들과 언약 관계에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만일 오경이 이처럼 족장들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의미하며 구약의 나머지 내용이 실제로 그렇듯이 부활을 가리킨다면 사두개인들은 현세 너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을 누릴 수 있도록 족장들과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부활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느 계명이 큰가, 가장 큰 계명>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35절에서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율법사는 율법의 전문가입니다. 이는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을 뜻하는 또 다른 표현입니다.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랍비들은 어느 계명이 가볍고 어느 계명이 무거운지 결정하려는 지속적인 논쟁에 참여했습니다. 율법은 여기서 구약 전체를 가리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신실한 유대인들은 하루 두 번씩 되풀이하는 신명기 6장5절의 이 명령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의 개념을 요약하며 하나님의 나머지 계명에도 순종할 의무를 포함합니다. "마음", "목숨", "뜻"은 인간 존재의 엄격하게 구분된 부분들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종합적으로 전인격을 지칭합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레 19:18, 34) 사랑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이웃의 가장 큰 유익을 추구해야 할 구체적 책임을 뜻합니다. 이 두 계명으로 요약되는 예수님이 시작하신 천국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가장 깊은 갈망을 성취합니다.
<그리스도와 다윗의 자손>
41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46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대적들의 악의에 찬 질문에 답변하신 뒤 예수님은 이제 오래도록 기다려 온 메시아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그들의 대답은 메시아가 다윗의 왕 같은 후손일 것이라는 일반적인 이해를 반영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아 본문 중 하나이자 신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본문인 시 110:1을 인용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다윗의 시편을 신적인 영감으로 된 메시아 예언으로 인식했을 것입니다. 이 시편에서 다윗은 오실 메시아 즉, 다윗의 "자손"이 단지 다윗의 혈통인 특별한 인간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가 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시편의 메시아적인 의미를 인정했기 때문에 감히 예수님께 더 이상 묻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자손(예수)이 그 조상(다윗)보다 더 탁월한 역할과 호칭을 갖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메시아의 독특성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합당한 더 큰 영예를 더욱 더 잘 보여줍니다. 마태는 예수님이라는 인물이 시 110:1를 인용하면서 자신이 어떻게 높아진다고 주장했는지를 말하지 않지만, 이 시편 자체가 아마도 메시아의 신성(시 110:5), 즉 메시아의 성육신하신 여호와 되심을 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리키는 시편 110:1~5절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
시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5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이 시편은 하나님이 다윗 왕가의 왕에게 주시는 예언으로 시작됩니다.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이것은 인간 왕이 차지하는 존귀의 자리입니다. 다윗 왕가의 왕은 여호와께서 주신 왕위에 앉았습니다.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기까지'(왕상 5:3) 하나님은 이 원수들을 다윗 왕가의 왕의 권세에 굴복시킴으로써 정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이(이 시편의 저자) "내 주"로 부르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키는데, 이것은 왕(모두가 메시아로 동의하는 왕)이 다윗보다 더 크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부활하신 주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메시아 왕이라는 개념이 신약의 여러 구절에 나타나 있습니다(행 2:32~35; 고전 15:25; 엡 1:20).
왕은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릴 것입니다. 적대 세력의 위협 아래서도 다윗 왕가의 왕이 하나님의 백성을 효과적으로 다스릴 것입니다.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하나님의 백성은 '주의 권능의 날에', 즉 하나님이 자신의 권능으로 이방인을 정복하시는 날에 즐거이 헌신할 것입니다.
'거룩한 옷을 입고', 중대한 의미가 있는 시간에 축제 옷을 입고 '새벽(ESV, '아침의 태에서')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 도다' "아침에 태"는 아마 동쪽 또는 새벽 이슬이 나오는 때를 가리키는 시적 표현일 것입니다. '주의 청년들의 이슬'은 새로운 활력을 가리키는 시적 용어일 것이고, 왕이 새로운 힘의 지속적 원천을 갖고 있다는 점을 함축할 것입니다. 또는 이슬방울처럼 자원하는 주의 군사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암시할 수도 있습니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일단 하나님께서 맹세하시면 절대로 취소되지 않습니다.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멜기세덱은 "살렘 왕" 즉 예루살렘의 왕이었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창14:18~20) 전투 후에 아브라함을 만나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아브라함의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받았습니다. 다윗 왕가의 왕은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야 합니다. 즉, 멜기세덱가 같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다윗 왕가의 왕이 왕과 제사장이 되어 (이스라엘에서 이 두 직분은 구별된 직분) 예루살렘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지자 스가라는 메시아 곧 "가지"의 인격속에 이 두 직분의 결합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슥 6:9~14). 구약성경은 다윗 왕가의 다른 왕에 대해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지 않으므로, 이것은 이 시편이 주로 메시아 왕 곧 메시아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히브리서 저자는(히 5:6) 히브리서 곳곳에서 시 110:1를 인용함으로써, 이 구절을 유대인 신자에게 지금 통치하고 계시는 다윗의 후사인 예수님(히 1:3, 5:5)이 왜 궁극적인 제사장도 되시는지를 설명하는데 사용합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한 번 기독교인이 된 유대인들은 박해를 피하기 위해 옛 속죄 제사가 계속 "유효"할 것처럼 기대하고, '전통적' 유대교로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멜기세덱을 하늘의 심판자와 구원자로 예언하는 또 다른 자료도 있습니다.
다윗의 궁극적 후사는 이방인에게 승리하는 정복자가 되실 것입니다. 여기서 싸움의 승리 장면은 최후의 심판을 묘사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이방인 지도자를 정복하는 것을 묘사한 것으로 보는 게 더 낫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그들의 새로운 왕,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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