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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장 개성과 자아
이제 우리는 개성과 자아의 관계를 검토할 차례이다. 하지만 자아에 대하여 연구하지 않았기에, 우리가 개성과 자아 사이의 관계를 아주 충분하게 조사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본서에서는 자아 관점이 아닌 주로 개성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조사할 것이다.[1]
개성은 진정한 인간, 사고자가 물질계, 아스트랄계 그리고 하위 멘탈계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일시적인 매개체로 구성되어 있다. 즉, 육체, 아스트랄체, 하위 멘탈체 그리고 이 매개체들과 연결된 모든 활동들.
개체성은 코잘체 속에 있는 자아, 즉 사고자 자신을 구성한다. 나무가 봄, 여름 그리고 가을까지 지속하기 위하여 잎을 밀어내는 것처럼, 개체성도 물질계, 아스트랄계 그리고 하위 멘탈계에서 보낸 생명 기간동안 내내 지속하기 위하여 개성들을 내보낸다. 잎이 받아서 동화시켜서 영양분을 수액으로 전하고, 수액은 결국 나무 줄기로 들러가며, 그러면 잎은 떨어져서 사라진다. 마찬가지로 개성이 경험을 얻어서 그것을 부모인 개체성으로 전하고, 결국에는 그 일을 완성했을 때 떨어져서 사라진다.
자아는 명확성을 얻기 위하여 개성 속에서 화신한다. 자신의 계에 있는 자아는 웅대하지만, 진화 상에서 멀리 진보한 사람을 경우를 제외하고 그 웅대함이 애매하다.
인간의 “원리”는 종종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 |||
분류 1 | 분류 2 | ||
불멸의 3개조 개체성 | 아트마 | 불멸 | 아트마 |
붓디 | 붓디 | ||
마나스 | 상위 마나스 | ||
유한한 4중체 개성 | 카마 | 조건적 불멸 | 카마-마나스 |
프라나 | 유한 | 프라나 | |
에텔복체 | 에텔복체 | ||
조밀체 | 조밀체 |
H.P. 블라바츠키 여사가 사용한 분류는 다음과 같다. 그녀는 마인드를 네 가지로 구분한다:
1) “마나스-타이자시,” 진실로 붓디인 눈부신 혹은 빛나는 마나스 혹은 그의 마나스가 붓디와 합쳐서 그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게 될 때의 상태.
2) 순수 마나스, 상위 마나스, 추상적 사고 마인드.
3) 안타카라나; 상위 마나스와 화신 동안 카마-마나스 사이의 다리.
4) 카마-마나스, 여기서는 개성.
그녀는 종종 마나스를 데바-자아(deva-ego) 혹은 개성아와 구별되는 신성 자아로 부른다. 상위 마나스는 신성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크리야샤크티, 적극적 사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일을 하는 힘으로, 실재로 모든 일은 사고력으로 이루어진다. “divine(신성한)”이라는 단어는 빛난다는 의미의 “div”에서 유래한 것으로, 마나스 내면에서 자신의 생명을 가진 빛나는 신성한 특질을 말한다.
하위 마인드는 단순히 반사체로, 나름대로의 빛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을 통하여 빛이 오거나, 그것을 통하여 소리가 오는 것으로, 단순히 가면(persona)이다.
베단타 학자들 사이에서 혹은 스리 샹카라차리아 학파에서, 안타카라나 용어는 가장 온전한 의미에서 마인드를 나타내는데 사용된다. 즉, 가장 내면의 대아와 외부 세계 사이의 내적 도구 혹은 기관을 의미하며, 항상 네 부분으로 묘사된다:
1) 아함카라 | --- | “나(I)”를 만드는 것 |
2) 붓디 | --- | 통찰력, 직관 혹은 순수이성 |
3) 마나스 | --- | 사고, 생각 |
4) 치타 | --- | 사물을 구분하는 분별력 |
서구인은 마인드가 구체적이고 추상적인 사고력을 가진 것으로 부르지만 위의 분류에서 마나스와 치타를 말하는 것이다. 신지학자도 익숙한 아트마, 붓디, 마나스 그리고 하위 마인드를 인식한다.
기독교에서 다음 상징을 보게 된다:
교회 미사에서 요소와 그릇 | 인간 속에 있는 원리 |
호스트 | 모나드 |
쟁반 | 아트마-붓디-마나스 |
와인 | 자아 혹은 개체성 |
성배 | 코잘체 |
물 | 개성 |
자아가 개성을 취하는 것이 마인드 불기둥에서 나온 불꽃의 투사로 비유되어 왔다. 그 불기둥은 그것이 떨어진 물질을 태우며, 그것에서 그것을 발생시킨 것과 본질에서 동일하지만 현현 목적에서 분리되어 있는 새로운 불기둥이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단 하나의 불기둥으로 하나도 줄어들지 않은 채 수 천개 촛불을 밝을 수 있고, 전에는 하나만 볼 수 있는데 이제는 수 천개를 볼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개체성, 사고자만이 지속한다. 그는, 바가바드 기타에서 표현하듯이, 인간이 새로운 옷을 입고 오래된 옷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여러 체를 입고 벗어버리는 영원한 젊은이, “그 시간이 결코 오지 않는” 인간이다. 개성 각각은 불멸의 배우의 새로운 역할이다. 그리고 그는 반복해서 인간의 삶의 단계를 걷는다. 그러나 생의 드라마에서, 그가 취하는 인물 각각은 이전 인물의 어린아이이고, 다음에 올 것의 아버지이며, 이렇게 생의 이야기가 연속되는 것이다.
개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하위 세 가지 매개체에 준 인상과 사고자가 그 매개체들과 스스로 동일함으로써 일어난 기억의 연결고리로 묶여 있다. 그렇게 동일함으로써 “아함카라”로 알려진 “나”라는 개성 의식을 세우게 된다. 아함카라는 “나”를 의미하는 “아함”과 “만드는”을 의미하는 “카라”에서 유래된 것으로, “나를 만드는 자”이다.
낮은 단계의 진화에서, 이 “나” 의식이 육체와 아스트랄체 속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다. 나중에 그것이 하위 멘탈체로 넘어가면,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개성은 덧없는 느낌, 욕망, 격정, 생각을 가지고 이렇게 준 독립적인 실체를 형성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을 감싸고 있는 사고자로부터 에너지를 항상 끌어온다.
게다가 하위 세계에 속하는 자질들이 종종 “체 속의 거주자,” 개체성의 영원한 이익과는 직접적으로 종종 대립되기 때문에, 갈등이 시작되고, 승리가 종종 일시적인 쾌락으로 향하고, 가끔 영원한 이익으로 향하기도 한다.
개성을 다룰 때, 극복해야 하는 장애물이 아스미타, “나는 이것이다”하는 생각 혹은 어느 대스승이 한때 “자기-개성”으로 부른 것이다. 우리가 보았듯이, 개성은 생을 통하여 뚜렷한 육체, 아스트랄체 그리고 멘탈 형태, 직업과 습관을 가진 상당히 명확한 어떤 것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그것이 훌륭한 표본이면 그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그 개성이라고 내재하는 생명이 설득될 수 있다면, 영적인 목적의 도구로서 그것을 사용하는 대신에, 개성의 이익에 영합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래서 이런 잘못의 결과로, 우리는 지나친 부, 권력, 명성 등을 추구하는 사람을 보게 된다. “자기-개성”이 상위 자아가 개성을 사용하는데 가능 큰 장애물이며, 그래서 영적인 진보에도 그렇다.
개성의 삶은 당연하 사고자가 새로운 멘탈체를 형성할 때 시작되고 그 멘탈체가 데바찬에서 보낸 기간이 끝날 무렵에 붕괴될 때까지 지속된다.
자아의 목적은 잠재하는 힘을 펼치는 것이며, 그는 연속적인 여러 개성 속으로 자신을 넣음으로써 이것을 한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개성을 진정한 자아로 간주하고, 결과적으로 일시적인 이점처럼 보이는 것을 위해서 그들의 생을 조절하면서 그것만 위해서 산다.
하지만 이해하는 사람은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 자아의 삶이라는 것과 그것의 발전을 위하여 일시적인 개성이 사용되어야 하는 대상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그러면 두 가지 가능한 행동 과정 사이에 선택해야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듯이, 그는 어느 것이 그에게 개성으로서 더 큰 즐거움이나 혜택을 가져올지 고려하지 않고, 어느 것이 자아로서 그에게 더 큰 발전을 가져올지 고려할 것이다. 곧 모두를 위하여 좋은 것이 그에게 혹은 누구에게나 좋을 수 있다는 것을 경험이 가르쳐줄 것이다. 이렇게 그는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을 배우고, 전체로서 인류를 위하여 가장 좋은 것만 생각하는 것을 배운다.
자아를 희생하여 개성을 강렬하게 만드는 것은 학생이 경계해야 하는 실수이다. 예를 들면, 가장 일반적인 실패 즉 이기심의 가능한 결과를 보자. 이것은 주로 멘탈 태도 혹은 상태로, 그 결과를 멘탈계에서 찾아야만 한다. 개체성을 희생해서 개성을 강렬하게 만들면서, 그 결과들 중에 하나가 의심할 여지없이 하위 개성의 강조가 될 것이며, 그래서 이기심이 강화된 형태로 재생되는 경향이 있으며, 점점 더 꾸준하게 강력해질 것이다. 이것은 물론 카르마 법칙의 일반적인 작용의 일부분이고, 이기심을 고집하는 것이 진보에 얼마나 치명적인지 강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의 최고 보상이 발전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듯이, 자연의 가장 무거운 처벌은 항상 발전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보통 사람보다 어느 정도 높은 수준까지 올라가서, 그의 주요 활동이 멘탈적일 때, 그가 마인드와 동일시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위험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자아와 동일시해야 하고, 그 자아가 그의 의식의 가장 강력한 지점으로 만들어야 하며, 이렇게 개성을 그 개체성 속으로 합치게 된다.
학생은 마인드가 아는 자가 아니라 그 아는 자가 지식을 얻기 위하여 사용하는 도구라는 것을 인식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마인드를 아는 자와 동일시하는 것은 정을 그것을 사용하는 조각가와 동일시하는 것과 유사하다. 마인드가 아는 자를 구속한다. 자의식이 계발되면서 그 아는 자는 모든 면에서 방해받는 것을 보게 된다. 두꺼운 장갑을 껴서 촉감의 섬세함을 많이 잃어버리듯이, 마찬가지로 아는 자도 마인드를 입을 때 그렇게 된다. 손이 장갑 속에 있지만, 그 역량이 엄청 줄어들게 된다. 마찬가지로 아는 자도 마인드 속에 실재하지만, 그의 힘이 그 표현에서 제한된다.
멘탈체는 자신의 일부분을 제시된 대상과 유사하게 형성하는 특이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이렇게 수정될 때, 그 사람이 그 대상을 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아는 것은 그 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이 멘탈체 속에 있는 그 대상이 만든 이미지에 불과하다. 더구나 이 미이지는 그 대상의 완전한 재생이 아니라, 그것이 형성되는 특정 마인드의 특이성으로 채색되고 왜곡되기 쉽다.
이런 숙고로 우리의 마인드 혹은 멘탈체 속에서 우리는 “사물 자체”를 모르고, 우리 의식 속에서 만들어진 그것들의 이미지만을 안다는 것이 충분하게 납득된다. 이런 생각에 대하여 명상하면, 학생이 그가 진정한 개체성으로, 자아로서 그가 한 번의 이 지구생을 위하여 일시적으로 취한 개성이 아니라는 것을 점점 더 온전하게 깨닫도록 도와줄 것이다.
개성 속에 악한 특질의 존재는 자아 혹은 개체성 속에 상응하는 선한 특질이 부족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자아는 불완전하지만, 악할 수가 없다. 또한 보통 상황에서, 어떤 종류의 악도 코잘체를 통하여 현현할 수 없다.
이것에 대한 기계적인 이유가 이전에 설명되어 왔다. 악한 특질은 아스트랄 물질 하위 네 부분에서만 표현될 수 있다. 이것이 멘탈계 하위 네 부분에서만 그것의 영향력을 반사한다. 따라서 그것이 자아에게 전혀 영향을 줄 수 없다. 상위 세 가지 아스트랄계에서 나타날 수 있는 감정만이 선한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랑, 연민 그리고 헌신 가은 감정이다. 이것이 코잘체 속에 있는 자아에 영향을 준다. 왜냐하면 그가 멘탈계에 상응하는 하위계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계속된 낮은 유형의 삶으로 코잘체 속에서 일어난 궁극의 결과는 향후 상당 기간 동안 선한 인상을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으로, 일종에 코잘 물질의 마비 혹은 무딤이다. 그것은 반대되는 선한 인상을 거부하는 무의식이다.
자아가 계발하는 특질은 이렇게 선한 특질 밖에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잘 정의되었을 때, 그의 수많은 개성 각각에서 나타나고, 결과적으로 그 개성은 그런 특질에 반대되는 악한 특질 때문에 죄를 지을 수가 없다.
그러나 자아 속에 간격이 있는 곳에는, 개성 속에서 악의 성장을 억제시키는 어떤 것도 내재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그 악을 소유하고 있고, 그가 모방을 잘 하는 사람이라면, 그 악이 그에게서 아마도 빠르게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이 악은 개성의 매개체에 속하는 것이다. 이 여러 매개체 속에서 그것이 반복되어 정복하기 어려운 탄력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자아가 분발해서 반대되는 미덕을 자신 속에서 만든다면, 그러면 그 악이 뿌리에서 잘라져서 이번 생이나 다가오는 모든 생에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실제 삶에서 적용되는 원칙은 그것이 다시 나타날 수 없도록 악한 특질을 제거하는 것이 반대되는 미덕을 계발시켜서 자아 속에 있는 간격을 채우는 것이다. “우리에게 꾸준한 긍정으로 용기를 북돋아주어라”라고 에머슨이 통찰력을 갖고 말했다.
개성은 자아의 한 조각에 불과하다. 자아는 자신의 아주 작은 일부분을 멘탈체, 아스트랄체 그리고 육체 속으로 투사한다. 이 작은 의식의 조각이 인간 속에서 돌아다니는 것을 투시자가 볼 수 있다. 그래서 종종 그것이 심장 속에 거주하는 “엄지 크기의 황금 인간”으로 보인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찬란한 빛의 별로 본다.
어떤 사람은 이 의식의 별을 의지하는 대로, 예를 들면 체의 일곱 차크라 중 어느 곳에서 유지할 수 있다. 이 차크라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인가는 대체로 그 사람의 유형 혹은 “광선”과 인종 그리고 아인종에 달려있다. 이렇게 다섯 번째 근원인종의 다섯 번째 아인종은 거의 항상 그의 의식을 두뇌에, 뇌하수체에 의존하는 차크라에 유지한다. 하지만 그 의식을 심장이나 목 혹은 태양신경총에 습관적으로 두는 사람도 있다.
의식의 별은 하위계에 있는 자아를 대표하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우리가 개성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개성이 자아의 일부분이지만, 그것의 생명과 힘은 자아의 그것이다. 그렇지만 자주 그 사실을 잊어버려서 자신을 완전히 분리된 실체로 간주하게 되어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일한다. 이런 문제를 결코 공부하지 않은 보통 사람의 경우, 개성이 어느 점으로 보나 그 사람이고, 자아는 매우 드물게 부분적으로만 현현하게 된다.
개성과 자아 사이에는 항상 소통선이 있다. 이것을 안타카라나로 부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선을 이용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초기 단계에서 인간의 진화는 이 안타카라나 혹은 소통선을 열어서, 자아가 점점 더 그것을 통하여 자신을 주장하고, 결국에는 개성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취될 때, 개성은 어떤 분리된 생각이나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고, 하위계에서 자아의 표현만 되는 것이다.
자아가 여러 매개체에 대하여 가지는 지배력이 매우 부분적이다. 그리고 안타카라나를 일깨워진 자아의 작은 부분과 내려 뻗은 손 사이에 있는 뻗은 팔로 간주할 수 있다. 그 둘이 완전하게 합칠 때, 이 가늘어진 줄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산스크리트어에서, 안타카라나는 내면의 기관 혹은 내면의 도구를 의미한다. 그것의 파괴는 자아가 더 이상 어떤 도구가 필요하지 않고 개성에 직접 작용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나의 의지가 그 둘에 작용할 때, 이렇게 상위 자아와 하위 자아 사이의 연결고리인 안타카라나가 사라진다.
하지만 자아는 전적으로 상위계에 속하기 때문에 하위계에서 자신을 온전하게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기대할 수 있는 최상은 개성이 자아가 의도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아서, 하위계에서 표현될 있는 만큼 가능한 많이 표현하는 것이다.
전혀 수련받지 않은 사람은 실제적으로 자아와 소통선이 없다. 입문자는 온전한 소통을 한다. 결과적으로 이 두 극단 사이에 수많은 단계의 사람이 있다.
자아 자신도 계발 과정에 있고, 그래서 우리는 서로 다른 단계에 있는 자아를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어떤 경우이건 자아가 많은 방식으로 개성이 가능한 것보다 엄청나게 큰 어떤 것이다.
자아 자신이 모나드의 단편에 불과하지만, 그의 힘이 미계발되었을 때 조차도 그는 코잘체 속에 있는 자아로서 완전하다. 반면에 개성 속에서는 자아의 삶의 감촉만 있을 뿐이다.
진지한 학생은 그의 개성과 자아 사이에 연결고리를 만들어 그것을 적극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이 명백하게 엄청 중요하다. 이것을 하기 위하여, 그는 삶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여러 매개체를 통하여 보기 위하여 자아가 하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미세한 멘탈체와 훌륭한 두뇌를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그것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삶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아가 하위계 속으로 자신의 작은 부분을 넣고, 여러 매개체가 원하는 대로 제멋대로 놓아둔다.
이것의 치료법은 매우 간략하게 다음과 같다: 자아가 원하는 조건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되면, 그는 즉각적으로 자신을 더 충분히 내려서 제공된 조건을 이용할 것이다. 이렇게 만약 그가 애정을 계발하길 원하면, 개성이 애정을 하위계에서 최대로 계발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만약 자아가 지혜를 원하면, 개성은 물질계에서 더 현명해지기 위하여 공부로 노력해야 한다.
자아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으려고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필요한 조건이 제공되면, 그 노력을 고마워할 것이며 즐겁게 반응할 것이다. 개성은 자아가 반응하는 것에 불평한 이유가 없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개성이 자아에 관심을 기울이면, 자아가 개성에게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어부가 그물을 드리우듯이, 자아는 개성 아래로 던진다. 자아는 아래로 던지는 모든 그물이 성공적일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고, 어느 것이 실패하는 것으로 심각하게 문제되지 않는다. 개성을 돌보는 것이 그의 활동들 중에 하나이기에, 다른 활동 영역에서 성공으로 스스로 위안을 받을 것이다. 어느 경우이건, 실패는 하루를 손해본 것이고, 다른 날에 더 잘하기를 기대할 수 있다.
종종 개성이 자아로부터 더 많은 관심을 원하고, 자아가 그럴 자격이 된다고, 그럴 가치가 있다고 보면 그 관심을 확실히 받을 것이다.
기독교 교회에서 확인성사(견신례)가 자아와 개성 사이의 연결고리를 넓히고 강화시키려는 것이다. 이 채널을 예비로 확장시킨 후에, 신성한 힘이 주교의 자아를 통하여 쇄도해서 후보자의 상위 마나스로 들어간다. 십자성호를 그으면서, 그것이 위로 밀고 올라가서 붓디 원리 속으로 들어가고, 거기서 아트마로 들어간다. 아트마에 미치는 영향이 에텔 복체에 반사되고, 붓디에 미치는 영향이 아스트랄체에 반사되며, 상위 마나스에 미친 것은 비슷하게 하위 마나스에 비추게 된다. 그 결과가 단순히 일시적인 건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연결고리를 연 것이 더 넓은 채널을 만들어서 꾸준한 흐름이 계속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말했듯이, 전반적인 영향은 자아가 그의 매개체를 통하여 작용하는 것을 쉽게 해주는 것이다.
인간의 다양한 매개체를 아래에서 보면 하나 위에 다른 것이 있다는 인상을 주지만, 그것들은 실제로 공간 속에서 서로 분리되지 않고, 수많은 섬세한 불의 선 혹은 줄로 연결되어 있다. 진화에 반하는 모든 작용은 이 매개체를 뒤틀고 얽히게 하면서 똑같지 않은 압력을 가한다.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잘못된 길을 갈 때, 상위체와 하위체 사이의 혼란이 심각하게 방해받는다. 그는 더 이상 진정한 자아가 아니고, 그의 인격의 하위 측면망이 자신을 온전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된다.
기독교 교회는 균일성을 더 빠르게 다시 얻도록 돕는 방법을 제공한다. 사제에게 특별하게 부여된 힘들 중에 하나는 상위 물질 속에 있는 이 삼각형을 강화시키는 힘이다. 이것이 “사죄” 뒤에 있는 진리로, “고해”로 먼저 사람의 협력을 얻는다.
자아와 그의 여러 매개체 사이의 연결고리에서 단절이 있으면 정신이상을 낳는다. 만약 두뇌 속에 있는 물질 입자 각각이 그것에 상응하는 아스트랄 입자와 작은 관으로 연결되어야 하고, 아스트랄 입자 각각이 마찬가지로 그것에 상응하는 멘탈 입자에 결합되어야 하며, 멘탈 입자 각각이 그것에 상응하는 코잘 입자와 결합되어야 한다면, 그러면 이 모든 관이 완전한 정렬 상태에 있는 동안에 자아와 두뇌 사이에 명확한 소통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튜브들 중에 어느 하나가 구부러지고 막히거나 부분적으로 덜컹거린다면, 그 소통이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방해받는 다는 것이 분명하다.
오컬트 관점에서 보면, 정신이상인 사람은 네 가지 주된 등급으로 나누어진다:
1) 육체 두뇌 속에 결함으로 정신이 이상한 사람. 두뇌가 너무 작거나, 사고로 부상을 입었거나, 어떤 성장으로 눌려지거나 그 조직이 약하게 된 것이다.
2) 그 결함이 에텔 두뇌 속에 있는 사람으로 에텔 입자들이 더 조밀한 물질 입자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사람.
3) 아스트랄체가 결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그 튜브가 에텔 입자나 멘탈 입자와 정렬되지 않는 것이다.
4) 멘탈체가 고장난 사람이다.
1번과 2번은 수면 상태에서 유체이탈이나 사후에 꽤 정상이다. 3번은 천계에 도달할 때까지 정상을 회복하지 못한다. 4번은 코잘체에 도달할 때까지 정상으로 되지 못하며, 이런 경우 그 화신이 실패한 화신이다. 정신이상인 사람의 약 90%이상이 1번과 2번에 속한다.
사로잡힘 현상은 어떤 다른 실체로 자아가 추방된 것이다. 그의 여러 매개체를 약하게 잡고 있는 자아만이 그런 사로잡힘 현상을 허락할 것이다.
매개체에 대한 자아의 지배력이 어릴 적에 덜 강할지라도, 어른들이 어린이보다 더 사로잡힐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어른이 바람직하지 않은 실체를 끌어당겨서 사로잡힘을 쉽게 만드는 특질을 그 속에 갖고 있기가 훨씬 더 쉽기 때문이다.
간단히 사로잡힘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의지를 사용하는 것이다. 만약 체으 합법적인 소유자가 자신있게 주장하여 그의 의지력을 사용한다면, 어떤 사로잡힘도 일어날 수 없다.
사로잡힘이 일어날 때, 그것은 거의 항상 희생자가 먼저 침입하는 영향력에게 자발적으로 굴복하였기 때문이며, 그래서 첫번째 단계는 그 복종 행위를 파기하여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통제를 강력하게 재개하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개성과 자아 사이의 관계가 너무 중요해서 약간 반복해도 될 것이다. 인간의 여러 매개체들에 대한 연구를 하면, 진정한 인간이 상위의 표현이지, 사람들이 과도하게 중요성을 두려는 경향이 있는 물질의 응집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도와준다. 안에 있는 신성을 우리가 아직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최소한 상위 멘탈 수준에서의 시력이 제공할 수 있는 진정한 인간의 개념에 가장 가까운 코잘체에 대한 어떤 생각을 얻을 수 있다.
하위 멘탈 수준에서 인간을 볼 때, 그의 멘탈체 속에서 표현될 수 있는 만큼만 볼 수 있다. 아스트랄 수준에서 추가적인 베일이 내려오고, 물질계에서 또다른 장벽이 있어서 진정한 인간이 더 효과적으로 숨겨진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 지식은 우리가 우리 동료에 대하여 어느정도 한층 더 고귀한 생각을 형성하게 해준다. 왜냐하면 그들은 육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그 이상이라는 것을 우리가 인식하기 때문이다. 뒤에는 항상 상위의 가능성이 있고, 종종 더 나은 성질을 향한 호소가 잠재 상태에서 그것을 불러일으켜서 우리가 볼 수 있는 현현으로 가져올 것이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 그를 연구한 후에, 조밀한 물질 베일을 꿰뚫고 들어가서 그 뒤에 있는 실재를 그려보는 것이 쉬워진다. 모든 사람 뒤에 있는 그것은 신성한 성질이다. 그래서 이 원리를 이해함으로써, 우리의 태도를 수정하고 재조정해서, 이런 지식이 없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더 잘 도와줄 수 있다.
마인드를 관심의 태도 속에 유지하면서, 그 관심을 어느 것으로도 향하지 않은 채, 상위 마인드 의식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위 마인드를 고요하게 해서, 자아의 의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이 방법으로 자아에서 오는 개념(생각)이 눈부신 빛을 내면서 하위 마인드 속으로 섬광처럼 내려오며, 이것이 천재의 영감이다.
천재는 이렇게 진정한 인간, 자아의 거대한 의식이 두뇌를 일시적으로 움켜쥐는 것이다. 그것은 그 전율에 답하여 진동할 수 있는 유기체 속으로 더 거대한 의식을 내려놓는 것이다. 천재의 번뜩임이 인간 속에 있는 살아 있는 영의 목소리이다. 그것인 인간의 체 속에서 말하는 내면의 신의 목소리이다.
“양심”이라는 용어 속에 포함되어 있는 현상은 두 가지로 구분되는 것처럼 보인다. 양심은 때때로 자아의 목소리를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고, 다른 때에는 도덕성의 영역에서 의지로 말한다. 그것이 자아의 목소리인 경우에, 그것이 항상 절대적으로 옳지 않고 종종 잘못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아는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기 전에 경험에 달려 있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은 문제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지에서 오는 그런 형태의 양심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하지 않고, 마인드가 다른 방식으로 하려는 어떤 핑계를 만들려고 할 때, 오히려 우리가 이미 최선이라고 아는 그것을 따를 것을 명령한다. 그것은 삶에서 우리의 길을 결정하는 영적 의지의 권위를 갖고 말한다.
하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자아의 특질인 그 의지가 하위 매개체 속에 있는 개성의 욕망과 혼동되지 말아야 한다. 욕망은 외적 사물의 매력으로 방향이 결정되는, 외부로 향하는 사고자의 에너지이다. 의지는 과거 경험에 의한 이성으로 내려진 결론 혹은 사고자 자신의 직관으로 내려진 결론으로 방향이 결정되는, 외부로 향하는 사고자의 에너지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욕망은 외부로부터 안내되고, 의지는 내부에서 안내된다.
진화 초기 단계에는 욕망이 완전한 통치권을 가져서, 사람을 이리저리 허둥지둥 하게 만든다. 그는 아스트랄체에 지배된다. 진화 중간 단계에서는 욕망과 의지 사이게 계속되는 갈등이 있다. 그는 카마-마나스와 싸우고 있다. 진화 나중 단계에서 욕망이 죽고, 의지가 경쟁사 없이 지배한다. 자아가 명령한다.
요약하면, 자아 혹은 상위 자아의 목소리가 아트마에서 올 때 그것은 진정한 양심이다. 붓디에서 올 때, 그것은 옳고 그름 사이의 직관 지식이다. 상위 마나스에서 올 때, 그것은 영감이다. 영감이 정상적으로 될 만큼 지속적일 때, 그것이 천재이다.
천재는 자아에 속하는 것으로 논쟁하기 보다 그냥 본다(이해한다). 이성이 하위 마인드의 방법이듯이, 진정한 직관이 그 능력 중에 하나이다. 직관은 단순히 통찰력이다. 멘탈계에 제시된 어떤 진리를 조금도 틀리지 않고 알아보는 것, 지성의 눈을 사용하는 것으로 묘사될 수 있다. 그것은 확실하게 본다. 그러나 그것의 확신에 대한 어떤 추론된 증거를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성 너머 그 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관을 통하여 말하는 자아의 목소리를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기 전에, 신중하고 장기간의 자기 수련이 필요하다.
직관이라는 단어가 어느정도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사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일상 생활에서 신뢰할 수 있는 직관을 성취하는 것은 붓디체와 아스트랄체 사이의 직접 채널을 여는 것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직관은 마인드를 통하여 작용하기 보다 심장 센터를 통하여 작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 상위 의식에서 하위 의식으로 두 가지 방식의 직관의 전달을 구분하였다. 하나는 상위 멘탈계에서 하위 멘탈계로 온다. 다른 하나는 붓디에서 아스트랄체로 직접 온다.
코잘체의 직관은 외적인 것을 인식하는 직관으로 묘사되어왔다. 붓디에서 오는 직관은 내적인 것을 인식하는 직관이다. 붓디 직관으로, 우리는 사물을 내면에서 본다. 지성적 직관으로, 자신 밖의 사물을 인식한다.
어느 선이 더 쉬운 것인지는 개체화 방법에 달려 있다. 심오한 이해를 통하여 개체화한 사람들은 하위 멘탈계에서 유체이탈 상태나 이전 생에서 그것을 이해했을지라도, 현재 그 진리를 정립하는 데 어떤 추론이 필요하지 않은 채 직관을 확신으로 받을 것이다.
헌신의 분출로 개체화에 도달한 사람들은 그들이 직관을 붓디계에서 아스트랄계로 받을 것이다. 물론 두 경우 다, 직관을 받는 수용성의 조건은 하위 매개체의 견실함이다.
광기는 천재와 유사하다고 표현되듯이, 천재와 연관된 심리적 불안정이 있다는 사실로 움츠러들 필요가 없다. 자주 성자와 공상가가 두뇌를 너무 긴장시켜서 육체 도구가 왜곡되거나 불안정하게 된다.
게다가 불안정성이 영감의 조건이라는 것이 종종 맞다. 윌리엄 제임스 교수가 말한다: “상위 영역에서 오는 영감 같은 것이 있다면, 신경증 기질이 필수적인 수용성의 주된 조건을 제공할 것이다.”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19페이지.) 천재는 이렇게 불안정한 두뇌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상위 의식이 그 도구를 개선시키기 위하여 그것에 압박을 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뇌가 긴장 상태에 있게 되고, 그런 상황 하에서 그 구조가 스트레스 하에서 무너질 때까지 과도하게 갈 수도 있다. 그러나 비정상이 잘못된 편이 아닌 올바른 편에 있으며, 인간 진화의 정상의 최전방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질병에 의한 불안정성이 아닌 성장에 의한 불안정성이다.
기독교 교회에서 복음서 읽기에서 심장 센터를 자극하려는 시도를 한다. 엄지로 십자가 성호를 심장 센터뿐만 아니라 미간과 목센터 위에 그린다. 이렇게 엄지를 사용하는 것이 메즈머리즘에서 손의 움직임에 상응하며, 센터를 여는 것 같은 작지만 강력한 힘의 흐름이 필요할 때 사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심장은 상위 삼개조, 아트마, 붓디, 마나스를 위한 체 속에 있는 센터로, 명상 동안 의식이 심장에 집중될 때, 상위 자아의 영향을 가장 쉽게 받을 수 있다. 머리는 심령-지성 인간의 자리이다. 그것은 뇌하수체와 송과선을 포함하여 일곱 공동(빈곳)에서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집중 속에서 의식을 두뇌에서 심장으로 가져갈 수 있는 사람은 하위 마나스를 통하여 카마-마나스와 상위 마나스를 결합시킬 수 있다. 하위 마나스가 순수하게 될 때 안타카라나가 된다. 그러면 그는 상위 삼개조의 충동의 어떤 부분을 잡을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될 것이다.
인도인의 요가 방법에서, 상위계와 접촉하게 되는 사람들에게 있는 히스테리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를 취한다. 체의 수련과 정화, 마인드의 수련과 통제가 강하게 강조된다.
자아는 상징 형태로 하위 의식 속으로 개념을 자주 넣는다. 자아 각자는 나름대로의 상징 체계를 가지고 있다. 어떤 형태는 꿈 속에서 일반적인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물에 대하여 꿈을 꾸는 것이 어떤 종류의 문제를 나타낸다고 말한다. 물과 문젯거리가 실제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을 수 있지만, 개성이 물과 관련해서 그런 특정한 믿음을 간직하는 것을 자아가 알았다면, 그가 개성에게 당면한 불운을 경고하기 위하여 그런 상징 형태를 선택할 수가 있다.
어떤 경우에는 자아가 기묘한 외적인 방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예를 들면, 애니 베산트 박사가 이렇게 말했다. 그녀가 강연에서 한 문장을 말하는 동안, 다음 문장이 실제로 그녀 앞 공기 중에서 세 가지 서로 다른 형태로 물현화하는 것을 습관적으로 보고, 거기서 그녀가 의식적으로 가장 좋게 생각하는 것을 선택한다. 자아가 유체 두뇌에 생각을 직접 각인시키는 대신에 왜 그런 특정한 소통방법을 선택하는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것이 자아의 작업임에 틀림없다.
개성과 자아 사이의 관계가 침묵의 소리에서 그림처럼 묘사된다: “언제나 견디는 자처럼 인내하라. 그대의 그림자(개성)는 살고 사라진다. 그러나 그대 속에 영원히 사는 그것, 그대 속에서 아는 그것은 지식이기 때문에 덧없는 생명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했고, 존재할 인간으로, 그 시간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자아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블라바츠키 여사의 “신지학의 열쇠”에서 제시된다: “어떤 ‘영’을 상상해보세요. 그것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건, 본질적인 성질이 신성하지만, 전체(ALL)와 하나가 될 수 있을 만큼 아직 순수하지 않으며, 이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신의 성질을 정화시켜서 목표를 성취해야 하는 천상의 존재를 상상해보세요. 그것은 분화된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경험과 모든 느낌을 개체적으로 그리고 개성적으로, 즉 영적으로 그리고 물리적으로 경험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위계에서 그런 경험을 얻은 후에, 존재의 사다리 모든 계단을 점점 더 높이 상승하면서, 인간계에서 모든 경험을 지나가야 합니다. 그 본질은 사고(생각)이고, 그러므로 복수형으로 “마나스푸트라,” “(보편) 마인드의 아들들”로 부릅니다. 이 개체화된 ‘사고’가 신지학자들이 진정한 인간의 자아, 육체와 뼈 속에 갇힌 사고하는 실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확실히 물질이 아닌 영적 실체입니다. 그리고 그런 실체가 인류라고 부르는 동물 물질 덩어리에 활기를 채우는 화신하는 자아이며, 그 이름이 마나사 혹은 마인드들입니다.”
하위 마나스의 “광선”은 언제나 그 근원이자 부모인 상위 마나스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이중성이 지속하는 동안, 즉 의식이 코잘 수준까지 올려져서 거기서 “상위 자아와 하위 자아들이 경험할 때까지,” 계속되는 열망이 있게 되며, 가장 고귀하고 순수한 성질이 그것이 느껴진다. 내적인 삶의 가장 두드러진 사실들 중에 하나로서 가장 고귀하고 순수한 성질을 가진 사람들이 느끼는 것이다. 바로 이런 열망이 기도로, 영감으로, “신을 구하는 것으로,” 신성과의 합일을 갈망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나의 혼이 신을, 살아있는 신을 갈망한다”고 열렬한 기독교인이 외친다.
오컬티스트는 이런 외침 속에서 상위 자아를 향한 하위 자아의 꺼지지 않는 충동을 알아본다. 하위자아가 상위 자아에서 분리되어 나왔지만, 그것의 인력을 생생하게 느낀다. 사람이 붓다, 비쉬누, 크리스트, 성모 혹은 성부에게 기도하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것은 사실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방언에 대한 질문이다. 어느 시대나 어느 인종이 어떤 이름을 제시하건, 모든 기도에서 붓디 및 아트마와 결합된 상위 마나스가 진정한 목적이다. 그것은 모든 종교에서 발견되는 “신-인간,” “인격신,” 이상적인 인류이다. 그것은 “신이 화신한 것”이고, “말씀이 육화한 것”이며, 믿는 사람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 각자 속에서 “태어나야 하는” 크리스트이다.
전문적으로 표현하면, 각자 속에 있는 개체화된 “신,” 하늘에 계신 성부가 모나드이고, 자아와 모나드의 관계는 개성과 자아의 관계와 같다.
경고가 되는 힌트 한 가지가 여기서 적절할 것이다. 과거에는 “상위 자아를 우러러보는 것”과 “상위 자아의 격려를 듣는 것” 같은 표현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심지어 상위 자아가 하위계에서 대신에 고군분투하는 불행한 개성에 더 흥미를 가져야 한다고 암시되어왔다. 학생은 하위계에서 우리가 보는 개성은 진정한 인간의 아주 작은 일부분이고, 그 상위 자아가 인간이라는 것을 점차로 깨닫게 되었다. 왜냐하면 오직 한 가지 의식이 있고, 하위는 상위의 불완전한 대표지만 그것과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가 영광된 상위 자아와 결합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들”을 올린다고 생각하는 대신에, 우리는 오리려 상위 자아가 진정한 자아이고, 상위 자아와 하위 자아를 결합하는 것은 하위 자아에게 열어서 상위가 그것을 통하여 그리고 그 속에서 더 자유롭게 온전히 작업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사람은 이렇게 의심의 여지없이 그가 상위 자아의 영이고, 그 자신의 힘 속에서 자아로서 확신과 그 힘을 자유롭게 사용할 용기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확신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일상적인 의식 상태를 자연스럽고 정상인 것으로 보는 대신에 그리고 계속된 엄청난 노력으로 도달해야 하는 고귀한 존재로서 자아를 향해서 위로 보는 대신에, 그의 일상의 의식 상태가 비정상적이자 부자연스러운 것을 보는 것을 배워야 하고, 영의 삶을 자신의 진정한 삶으로 보고, 지속된 노력으로 그가 그 진정한 삶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형태로 표현되어서, 하위 매개체가 온전하게 자아와 조화를 이울 때, 그것들이 오고에이데스를 닮게 된다. 그러면 그것들이 한 생 한 생 거의 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아가 점점 더 모나드의 완전한 반사체가 될 때, 계속 성장하지만 그것도 거의 변하지 않는다.
상위 의식을 두되 속으로 가져오는 작업을 의도적으로 시작하는 사람들은 하위 마인드와 인격을 신중하게 수련시키고, 꾸준하고 잘 지시된 노력으로 그렇게 랄 수 있다. 세속적이지 않는 주제, 명상, 공부를 향한 조용하고 한결 같은 연속적인 생각의 습관도 멘탈체를 계발시켜서 더 나은 도구로 만들게 된다. 추상적 사고를 배양하려는 노력도 유용해서, 하위 마인드를 상위 마인드로 올리고 멘탈체로 하위 멘탈계의 가장 섬세한 물질을 끌어오게 한다.
이 그림은 자아와 그의 하위 매개체 사이의 관계에 대한 어떤 생각을 주려는 시도이다. 자신의 계에 있는 자자의 힘, 능력 그리고 지식에 대하여, 아주 작은 부분만 멘탈체로 전달될 수 있다. 이것에서 한층 더 작은 양이 아스트랄체로 들어가고, 이것에서 작은 조각이 육체 속에 있는 의식에 도달한다. 사람의 목표들 중에 하나가 자아와 하위 여러 체 사이의 연결고리를 넓히고 강화시켜서 자자의 힘이 점점 더 개성의 하위 매개체 속에서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1] 자아 관점에서 보는 관계는 부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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