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대비 仁粹大妃
소혜왕후(昭惠王后. 1437~1504)라는 시호(諡號)보다 인수대비(仁粹大妃)로 유명한 '한씨'는 실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다간 왕실의 여성이며, 그리고 여성 지식인(知識人)이다. 조선 제9대 임금 성종(成宗)의 어머니이자,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燕山君)의 외할머니로서 더욱 유명한 인수대비는 시아버지 세조(世祖)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몸소 지켜보았고,
남편의 죽음으로 잃어버렸던 왕비(王妃) 자리를 대신하여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으로 만들면서 대비(大妃)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여성이다. 그러나 그녀가 ' 내훈 (內訓) '이라는 여성 교육서를 만든 지식인이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녀의 아버지 한확 ( 韓確 )
인수대비(仁粹大妃) 한씨(韓氏)는 세조(世祖) 때 좌의정을 지낸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확(韓確. 1403~1456)의 여섯 째 막내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유교(儒敎) 교육을 받았고 정치적인 영향력이 막강하였던 '청주 한씨' 가문에서 성장하였는데, 어머니 '홍씨'는 그녀의 나이 13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인수대비의 집안 배경은 그녀가 왕실과 혼인하게 된 결정적 요인이었다.
인수대비의 아버지 한확(韓確)은, 누이가 명나라 성조(成祖 .. 영락제)의 후궁 여비(麗妃)가 되자 명나라에 가서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이라는 벼슬을 하사받았다.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고, 우의정에 올랐다. 그리고 명나라에 가서 세조(世祖)의 왕위 찬탈을 양위(讓位)라고 설득시켰다.
한확의 여동생
중국에서는 수많은 궁녀들을 충당하기 위하여 중국 자체에서 궁녀를 뽑을 뿐만 아니라 주변 여러 나라에서도 궁녀를 공급받았다. 중국이 다른 나라에서 받아들이는 궁녀가 이른바 공녀(貢女)이었다. 조선시대 공녀(貢女) 중에서 가장 극적인 삶을 산 경우는 명나라 제3대 황제인 영락제(永樂帝) 때 들어간 '청주 한씨'이었다.
'한씨'는 한영정(韓永楨)의 큰딸이며, 인수대비의 아버지 한확(韓確)의 여동생이었다. 당시 '한씨'는 '황씨' 처녀와 함께 공녀로 선발되었는데, '한씨'는 고고한 아름다움이 있었고, '황씨'는 수려한 아름다움이 있었다고 한다.
명나라 황제의 궁녀로 선발된 한씨와 황씨는 유모(乳母)와 몸종을 데리고 갈 수 있었다. 이에 '한씨'는 유모 김흑(金黑)과 몸종 다섯을 데리고 1417년 8월 6일 (태종 17년), 한양을 떠나 명나라로 향했다. 이때 '한씨'의 오빠 한확(韓確)도 여동생을 돌보기 위해 명나라까지 따라갔다. 한씨와 황씨를 궁녀로 들인 명나라 황제는 영락제(永樂帝)이었다. 영락제는 한씨와 황씨 중에서 특히 '한씨'를 마음에 들어 했다. 조선으로 귀국하는 사신에게 ' 한씨 여아는 대단히 총명하고 영리하다 '라는 말을 꼭 전하라고 했을 정도이었다.
반면에 황씨는 영 못마땅해했다. 무엇보다도 황씨가 처녀(處女)가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한 듯 하다. 황제인 자신에게 숫처녀가 아닌 공녀(貢女)를 바쳤다며 태종(太宗)에게 항의 문서까지 보내려고 했을 정도로 분개하였다. 이것을 막은 사람이 '한씨'이었다. 다음은 세종실록의 기록이다.
황제가 왜 처녀가 아닌지 꾸짖으며 연유를 묻자, 황씨는 ' 형부 김덕장의 이웃에 있는 남자 관노비(官奴婢)와 간통하였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황제가 화를 내어 우리나라를 문책하려고 칙서까지 작성하였는데, 당시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던 '양씨'가 이 사실을 '한씨'에게 알렸다. '한씨'가 울면서 황제에게 애걸하기를 ' 황씨는 집에 있는 사사로운 사람인데 우리 임금이 어떻게 그것을 알겠습니까 ? '라고 했다. 황제가 감동하여 '한씨'에게 벌을 주라고 명려하자, 한씨는 황씨의 뺨을 때렸다. 세종실록 26. 세종 6년 10월
영락제는 '한씨'의 인품과 미모 모두에 반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으로 칙사를 보낼 때마다 '한씨'의 친정집에 각종 선물을 보내곤 할 정도이었다. 심지어 '한씨'의 오빠 한확(韓確)을 사위로 삼아 곁에 두려고까지 했다. 한확의 거절로 성사되지는 않았다. 비록 고국을 떠나 명나라 황제의 궁녀가 되었지만 '한씨'는 나름대로 행복했다. 무엇보다 황제의 지극한 사랑이 있었다. 이런 후광으로 오빠 한확(韓確)은 조선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훗날 한확은 수양대군을 도운 정난공신으로서 당대를 주름잡는 거물이 되었다.
그러나 '한씨'의 행복은 잠깐이었다. 명나라에 간 지 7년만에 영락제(永樂帝)가 죽고 말았던 것이다. 어린 나이에 명나라로 갔으니 '한씨'는 아직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였음이 분명하다. 불행하게도 이렇듯 꽃다운 나이에 영락제를 따라 순장(殉葬)을 당하고 말았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황제가 죽으면 가까이 모시던 궁녀들을 순장(殉葬)시켰다고 한다. 명나라 궁중에는 동양 각국에서 온 수많은 궁녀들이 있었는데, 비밀을 누설하까봐 이들을 순장시켰다는 것이다. '한씨'도 이국땅 명나라의 자금성(紫禁城)에서 순장을 당하였다. '한씨'가 자금성(紫禁城)에서 순장을 당할 당시의 모습을 '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황제가 죽자 순장(殉葬)된 궁녀가 3여 명이었다. 죽기 전에 모두 뜰에 모아놓고 음식을 먹인 다음 함께 마루로 끌어오리니 울음소리가 전각을 진동시켰다. 마루에 작은 나무 평상을 놓아 그 위에 세워 놓고 머리를 올가미에 넣은 다음 평사을 떼어버리니 모두 목이 매여 죽었다. '한씨'가 죽을 때 유모 김흑(金黑)에게 말하기를 ' 낭(娘)아. 나는 갑니다. 낭아. 나는 갑니다 '라고 했다. 그 말을 마치기 전에 곁에 있던 내시가 평상을 빼자 '최씨'와 함께 죽었다. 세종실록 26. 6년 10월
이 기록은 한씨의 유모 김흑(金黑)이 훗날 조선에 살아 돌아와서 세종(세종)에게 전한 내용이다. '한씨'는 죽으면서 자신의 유모 김흑(金黑)만은 꼭 살려달라고 간청하여 홍제의 허락을 받았다. 이에 김흑(金黑)은 간신히 살아 남았다가 몇 년 후에 조선으로 돌아 올 수있었다. 세종(世宗)은 천신만고 끝에 살아 돌아온 김흑을 만나 그간의 사정을 자세히 들었다. 이로써 한씨 이야기가 '실록'에 자세하게 실릴 수 있었다.
영락제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오른 선종(宣宗) 또한 한영정(韓永楨)의 막내딸 즉, 한확(韓確)의 누이동생을 후궁(后宮)으로 삼았다. '세종실록'에 보면 한확(韓確)이 재산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미모(美貌)가 뛰어난 여동생을 시집보내지 않고 있다가 명나라 황실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확은 청렴결백하고 뛰어난 인품의 소유자라고 전해지지만, 권력욕이 강한 인물이었다는 평판도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인수대비(仁粹大妃)의 고모 두 명이 명나라 황실의 후궁이었던 것이다.
수양대군의 며느리가 되다
인수대비의 아버지 한확(韓確)은 젊은 시절 누이들의 후광을 업고 출세가도를 달렸다,. 명나라 황실과 인척(因戚)이 된 한확(韓確)은 명나라와 조선의 민감한 사안을 도맡아 담당하는 비중있는 인물로 성장하였고, 실제로 1417년(태종 17) 진헌부사(進獻副使)로 명나라에 갔을 때는 명나라 황제가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이라는 벼슬을 내려주기도 하였다. 특히 태종(太宗)이 세종(世宗)에게 왕위를 양위하였을 때에는 조선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황제의 고명(誥命 .. 중국 황제가 주는 임명장)을 받아 오기도 하였다.
수양대군의 며느리
조선정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한확(韓確)의 위치로 볼 때, 왕실과의 사돈관계를 맺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세종 19년인 1437년에, 한확의 둘째 딸이 세종의 후궁 소생인 계양군(桂陽君)과 혼인하였고, 단종 3년인 1455년에는 여섯째 딸인 훗날의 '인수대비(仁粹大妃)'가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아들 도원군(桃源君 .. 성종의 부친으로 덕종으로 추존됨)과 혼인하였다. 야망이 컸던 수양대군은 훗날의 정치적 입지를 고려하여 명나라 황실이라는 막강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한확(韓確)과 사돈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
한씨는 1455년(단종 3)에 19살의 나이로 수양대군(首陽大君)의 맏아들인 도원군(桃源君) 장(暲)과 혼인하여 군부인(郡夫人)이 되었다. 군부인(郡夫人)이란, 조선시대에 왕자군(王子君)이나 종친(宗親)의 아내에게 내리던 외명부(外命府)의 봉작이다. 왕자군이 아내에게는 정일품의 품계를, 종친의 아내에게는 종일품의 품계를 내렸다.
수양대군은 한확(韓確)의 힘과 위상을 잘 이용했다. 한확은 한명회(韓明澮)와 함께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고, 계유정난(癸酉政亂)과 왕위찬탈이 성공하자 그를 비롯한 '청주 한씨'를 대거 공신(功臣)에 책봉되었다. 도원군(桃源君) 또한 의경세자(懿敬世子)로 책봉되었고, '한씨'도 세자빈(世子嬪)으로 책봉되어 수빈(粹嬪)이 되었다.
아버지 '한확'의 죽음
수빈(粹嬪) 한씨가 된 그녀가 왕비(王妃) 자리에 오르는 것은 시간 문제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아버지인 한확(韓確)이 명나라로부터 세자 책봉의 고명(誥命)을 받아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망한 것은 세자빈(世子嬪)이 된 이듬해의 일이었다.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트릴 정도로 위세가 등등했던 한확이었지만, 객사(客死)라는 불운을 피하지는 못했다. '수빈 한씨'는 아버지이자 막강한 정치적 후견인을 하루 아침에 잃고 말았다.
어린 조카를 끌어내리고 왕위에 오른 세조(世祖)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명나라의 승인을 받는 일이었다. 이 일을 무사히 성공시킬 인물은 중국통인 '한확'밖에 없었다. 명나라가 세조의 왕위를 인정하는데 공헌을 세운 '한확'은 세조 2년인 1456년에 고명사은사(誥命謝恩使)로 명나라 조정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병(病)을 얻어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사하포(沙河鋪)에 이르러 죽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고 놀란 세조(世祖)는 압록강으로 관리를 급파하여 그의 시신(屍身)을 호송하였다. '세조실록'에 따르면, 한확은 일찍 세상을 떠난 동생들의 자식들을 거두어 키웠는데 자기 자식과 다름없이 키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부친의 사망에 이어 훗날의 '인수대비' 즉, '수빈 한씨(수빈 한씨)'의 불운은 계속되었다. '수빈 한씨'는 결혼 직후 맏아들 월산대군(月山大君 ... 후에 덕종으로 추존됨)과 명숙공주를 낳았고, 이어서 세조 3년인 1457년에는 둘째 아들이자 훗날 성종(成宗)이 되는 '자을산군(者乙山君)을 출산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러나 남편인 '의경세자(懿敬世子)'가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사망하는 청청벽력과도 같은 불행이 찾와왔다. 이때 의경세자(懿敬世子)의 나이 20세이었고, '소빈 한씨'는 21세에 불과하였다. 두 날개이었던 아버지와 남편이 1년 간격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슬픔에 젖을 사이도 없이 그녀 앞에 닥친 현실은 왕비(王妃)가 될 꿈을 접고 사가(私家)로 물러나야 하는 것이었다.
불과 2년 3개월 밖에 안되는 세자빈(世子嬪) 생활이었다. 남편이 죽지않았더라면, 아니 아버지라도 살아 있었더라면 최소한 세자(世子) 자리는 의경세자(懿敬世子)의 맏아들이자 세조(世祖)의 장손(長孫)인 월산대군(月山大君)에게 주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8살에 불과한 시동생 황(晄 .. 훗날 예종)이 세자로 책봉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세자빈이 바로 대비가 되다
세자 시절 건강하였던 예종(睿宗)은 부친인 세조(世祖)의 병간호와 즉위 후 정무(政務)에 시달려 건강이 좋지못하였다. 죽어서 예종(睿宗)이라는 시호(諡號)를 받고 싶다는 말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종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예종(睿宗)의 아들이 어리자 정희왕후(貞熹王后)는 후계자를 빨리 정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독촉 속에 '한씨'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을 후계자로 지목하였다. 서열상 큰아들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왕위에 올라써야 하나, 월산대군은 병치레가 잦고, 동생인 '자을산군'의 도량이 왕재감이라고 하여 '자을산군'이 왕위에 오른 것이다. 물론 기록에는 없지만, '자을산군'의 장인인 한명회(韓明澮)의 정치적 위상도 '자을산군'이 왕위에 오르게 된 뒷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덕종비 德宗妃
1469년 11월 28일 자을산군, 즉 성종(成宗)이 왕위에 오르자 사가(私家)에 머물고 있던 '한씨'도 다시 궁궐로 돌아왔다. 청상과부가 되어 궁궐을 떠난 지 12년만이었다. 정희왕후(貞熹王后)는 학식이 깊은 '한씨'에게 수렴청정(垂簾聽政)을 수차례 양보하였으나, 재상들이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종(成宗)의 치세 기간에 인수대비 한씨가 끼친 정치적 영향을 매우 컸다.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 의경세자(懿敬世子)의 위호(位號 .. 벼슬의 등급 및 그 이름)와 어머니의 위상(位相) 문제가 대두되어 성종(成宗) 1년에 '의경세자'의 시호(諡號)를 온문의경왕(溫文毅敬王)으로 하고 , 수빈 한씨의 휘호를 인수왕비(仁粹王妃)로 하여 예종비와 인수왕비를 형제의 서열로 차서를 정하였다.
그리고 2년 후 인수대비는 남편이 덕종(德宗)으로 추존됨에 따라 덕종비(德宗妃)가 되었다. 사실 '인수대비'는 생전의 존칭이었고, 죽어서는 소혜왕후(昭惠王后)라는 시호를 받았다. 지금까지 인수대비는 소혜왕후라는 시호 외에도 인수왕비, 인수왕대비, 덕종비, 회간왕비(懷簡王妃)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져 왔다.
내훈 內訓
어려서 부모와 남편을 잃은 탓에 인수대비는 불교(佛敎)에 심취하였고, 그녀의 아들 성종(成宗)이 도첩제(度牒制)를 폐지하고 불교를 탄압하자 이에 불만을 품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녀가 하나의 왕실 여인에 그치지 않고 여성 지식인(知識人)으로 각인되는 일을 실천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성리학(性理學)의 이념은 여성의 삶을 크게 변화시켰다. 특히 여성에게 요구된 가장 큰임무중 하나는 남편을 잘 섬기고, 자식을 잘 키우는 것이었다. 여성에게 유교적인 덕목(德目)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일종의 교재(敎材)가 필요하였다. 왕실의 어른으로서 늘어가는 왕실 여성들을 교육시켜야 하겠다는 필요성을 절감한 인수대비는 1475년(성종 6)에 궁중의 비빈(妃嬪)과 부녀자를 훈육하기 위해 ' 내훈(內訓) '이라는 책을 편찬하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 39살이었다.
나는 홀어미인지라 옥(玉)같은 마음의 며느리를 보고 싶구나. 이 때문에 소학(小學), 열녀(烈女), 여교(여교), 명감(명감) 등 지극히 적절하고 명백한 책이 있으나 복잡하고 권수가 많아서 쉽게 알아 볼 수가 없다. 이에 이 책 가운데에서도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을 뽑아 일곱 장으로 만들어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위의 글은 '내훈(內訓)'의 서문이다. 이 글을 보면 인수대비가 왜 내훈(內訓)을 편찬하려 했는지 잘 나타나 있다. 인수대비는 이 책에서 부인들의 모범벅인 사례를 들어 이해도를 높이고 부부(夫婦)의 도리, 형제와 친척 간의 화목 등 여성으로서 갖추어야 할 유교의 덕목(德目)을 실어 유교적 도리를 알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내훈 內訓
인수대비가 1475년, 부녀자이 훈육을 위하여 편찬한 책이다. 3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종(成宗)의 어머니인 '인수대비'는 당시의 부녀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교양서적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중국의 열녀전, 소학, 여교(女敎), 명감(明鑑)의 네 책(冊)에서 부녀자들의 훈육에 요긴한 대목을 뽑아서 이 책을 만들었다.
책머리에 인수대비의 내훈서(內訓書)와 목록, 책 끝에 상의조씨(상의조씨)의 발문이 있다. 권1에는 언행, 효친, 혼례, 권2에는 모의(母儀), 돈목(敦穆), 염검(廉儉) 등 전체를 7장으로 나누어 실었다. 그리고 각 장마다 여교, 예기, 공자 등 40여 종의 경전과 제가설(諸家說)을 인용하였고, 문왕(文王)의 어머니 태임(太任) 등 50여 인의 행장을 인용하여 여성 행실의 실제와 규잠(規箴)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제1장 언행(言行)에서는 부녀자가 말과 행실에서 주의할 점 및 준수사항을 서술하였다. 말은 인간관계를 친밀하게도 하고 멀어지게도 하며, 크게는 한 나라를 망치게 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입을 조심하여야 함을 강조하였다. 행실에 대하여는 음식 먹을 때, 남녀가 함께 있을 때, 남의 방에 들어갈 때의 행동등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특히 현모양처의 교육적 인간상을 그리면서 부덕(婦德), 부언(婦言), 부용(婦容), 부공(婦功)의 여유사행(女有四行)이 있음을 밝혔다.
재주와 총명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야 부덕이 있는 것이 아니요, 언변이 좋아서 언사가 유창한 것이 부언(婦言)이 아니며, 얼굴이 아름답고 예쁜 것이 부용(婦容)이라 함이 아니요, 솜씨가 남보다 뛰어난 것을 부공(婦孔)이라 함이 아니다. 인(仁) 속에 사행(四行)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다.
제2장 효친(孝親)은 어버이에 대한 올바른 효도방법이 무엇인가를 밝혔다. 친가의 부모뿐 아니라 시가(媤家) 부모를 모시는 법, 부모가 살아 있을 때와 죽은 뒤의 효도법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제 3장 혼례(婚禮)는 혼인의 예절을 밝힌 부분으로, 혼례의 뜻과 혼수감에 대한 기본자세, 혼인 뒤의 마음가짐 등을 설명하였다. 제 4장 부부(夫婦)는 부부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를 밝힌 부분으로, 부부의 도(道)를 음양(陰陽)의 이치로써 설명하고, 남편에 대한 예의와 마음가짐 등을 정의한 뒤 역사적인 사실을 특별히 많이 인용하여 아내의 도리를 강조하고 있다.
제5장 모의(母儀)는 어머니로서의 예의범절을 밝힌 부분이다. 유모의 선택에서부터 자식의 연령에 따른 교육방법, 시어머니로서의 마음가짐과 며느리에 대한 교육 등을 설명하였다. 제 6장 돈목(敦穆)은 정애(情愛)와 화목에 대한 것으로서 동서 또는 친척들과 화목하게 지내는 방법을 밝혔다. 제7장 염검(廉儉)은 청렴과 검소의 정신으로 어떻게 생활하고 손님을 대접하며, 관직에 있는 남편을 어떻게 보필할 것인가 등을 밝히고 있다.
인수대비의 일생에 있어서 며느리 윤비(尹妃 ... 연산군의 생모)와의 관계는 불행 중의 불행이었다. 높은 여성상을 목표로 하고 있는 인수대비에게 윤비(尹妃)는 성에 차지 않는 며느리이었다. 원래 인수대비의 아들 성종(成宗)의 비(妃)는 한명회(韓明澮)의 딸인 공혜왕후(恭惠王后)이었으나, 그녀가 1474년 후사(後嗣) 없이 사망하는 바람에 연산군(燕山君)을 잉태한 후궁 '윤씨(尹氏)'가 중전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물과 기름
인수대비 '한씨'와 왕비 '윤씨(尹氏)'는 물과 기름같이 섞일 수 없는 생각과 배경을 지니고 있는 여성이었다. 인수대비에게 막강한 친정 세력이 있었다면, 윤비는 그러지 못하였다. 가난한 대간(臺諫) 집안 출신의 딸로 그를 후원해 줄 부친도 없는 신세이었다. 또한 유교적(儒敎的) 부덕(婦德)을 완벽하게 실천하고 강요하였던 인수대비와는 달리 윤비는 자유 분방하고 사랑을 중요시하였다.
내훈(內訓)의 저자 인수대비는 자신의 책에서 ' 며느리가 잘못하면 이를 가르칠 것이고 가르쳐도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릴 것이고, 때려도 고치지 않으면 쫓아내야 한다 ... ' 고 하였다. 인수대비는 이를 그대로 실천하였다. 유학적 소양을 갖춘 엄격한 성격의 인수대비는 '윤비'의 행동이 자신이 강조하는 '내훈(內訓)'의 내용에 저촉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인수대비는 '윤비(尹妃)'의 폐출(廢出)과 사사(賜死)에 깊이 관여하였고, 이는 평탄하지 않은 불행한 노후(老後)를 예고한 것이었다.
성종과 윤비
성종(成宗) 주변에는 많은 여인들이 있었고, 윤비는 이를 참지 못하였다. 성종(成宗)이 엄귀인(嚴貴人)과 정귀인(鄭貴人)을 총애하자, 윤비(尹妃)는 왕의 사랑을 되찾고자 노력하였다. 왕실 여인들 사이에서는 이른바 압승(壓勝)이라 불리는 이른바 저주(咀呪) 행위가 있었는데, 들키게 되면 큰 화(禍)가 되었다.
윤비의 처소(處所)에 극약인 비상(砒霜)과 이를 바른 곶감이 발견되자 인수대비와 성종(成宗)은 이 곶감이 왕과 후궁을 죽이려는 의도가 있다고 여겼다. 야사(野史)에는 윤비가 성종과 다투면서 얼굴에 손톱자국을 냈다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결국 윤비는 왕비가 된 지 8개월 만에 폐비(廢妃)가 되어 사가(私家)로 쫓겨났고, 여전히 반성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받아 결국 1482년(성종 13) 8월에 사약(賜藥)을 받고 사사(賜死)되기에 이르렀다. 대신(大臣)들은 윤비의 폐비(廢妃)와 사사(賜死) 문제를 원자(元子)의 친모라는 이유로 반대하였으나, 성종(成宗)의 입장은 단호하였다.
인수대비 또한 '폐비 윤씨'가 살아 있으면 화근(禍根)의 불씨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폐비 윤씨를 대신하여 윤호(尹昊)의 딸 '파평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파평 윤씨는 대비(大妃)들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고, 인수대비는 ' 이렇게 중궁다운 사람이 들어왔으니 낮이나 밤이나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 '고 하며 기뻐하였다.
며느리를 죽이면 후환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 인수대비의 판단은 오판(誤判)이었다. 윤씨를 죽인 이듬해 인수대비는 정희왕후(貞熹王后)와 함께 온양(溫陽)을 갔었는데, 여기서 정희왕후가 죽고, 성종(成宗) 또한 재위(在位) 25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 성종(成宗)은 자신이 사후(死後) 100년동안 '폐비 윤씨'의 사사 사건을 공론화하지 못하도록 유언(遺言)을 남겼다.
인수대비는 손자(孫子) 연산군(燕山君)으로부터 많은 원망을 받았다. 어머니 '폐비 윤씨 (廢妃尹氏)'의 죽음을 알게 된 연산군은 폭군(暴君)으로 변해갔고, 방탕한 생활로 국정(國政)을 파멸로 몰아갔다. 인수대비(仁粹大妃)는 연산군의 광폭(狂暴)함을 누차 지적하고 타일렀으나 오히려 원망만 더 살 뿐이었다.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成宗)의 후궁이자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간 엄숙의(嚴叔儀)와 정숙의(鄭叔宜)를 궁 안뜰에 결박하고서는 아들인 안양군 항(伉)과 봉안군 봉(棒)을 불러 모친들을 때리게 만들었다. 이어서 분이 풀리지 않은 연산군은 '항'과 '봉'의 머리채를 쥐고 인수대비의 침전으로 가 방문을 열고 ' 이것은 대비(大妃)의 사랑하는 손자가 드리는 술잔이니 한번 맛보시오 '하며 '항'을 독촉하여 술잔을 드리게 하니 , 인수대비가 놀라 잔을 받았다. 연산군은 큰소리로 '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 ?' 하며 분노하였다. 연산군은 엄숙의, 정숙의 를 죽인 뒤 시신(屍身)을 가져다 찢어 젓을 담그고 산과 들에 흩어 버렸다.
이 모든 것을 지켜 본 인수대비는 병들어 자리에 누웠다. 어느날 연산군(燕山君)이 찾아오자 갑자기 일어나 바로 앉으면서 ' 이 사람들이 모두 부왕의 후궁인데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 ' 분노하였다. 이 말에 흥분한 연산군은 자신의 머리로 할머니 인수대비의 몸을 들이 받았다. 충격을 받은 인수대비는 ' 흉악하구나 ' 하며 자리에 누운 뒤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결국 노약(老弱)한 인수대비는 연산군과의 갈등과 마찰 속에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연산군(燕山君)은 할머니이 죽음에 이르러서도 슬퍼하기는 커녕 3년상(三年喪)까지 폐지할 정도로 원한을 품었다.
조선의 임금 중 풍수(風水)에 관한 한 최고의 실력을 가졌던 세조(世祖)가 이 경릉(敬陵)을 잡을 때 얼마나 열성이었는지 몇 차례 올라온 그의 아들, 의경세자(懿敬世子) 택지(擇地)를 직접 보러 다녔다. 그리고 크게 만족하고 선택한 곳이 이곳이고 후에 서오릉(西五陵)의 경역이 된다.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西五陵) 안에 있는 인수대비의 경릉(敬陵)이다. 남편인 덕종(德宗)과 같은곳에 묻혔으나, 덕종의 무덤보다 훨씬 화려하다. 왕릉은 승하할 당시의 신분 차이에 따라 축조(築造)되는 데, 인수대비의 경우 왕실 최고 어른이었던 대왕대비(大王大妃)로서 승하하였기 때문에 세자(世子) 신분이었던 남편의 능(陵)보다 크고 격식있는 것이 되었다.
유일한 여상 상위 왕릉
서오릉(西五陵)의 다섯 개 능(陵)은 다 흥미롭지만 그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곳은 인수대비와 그녀의 남편 의경세자(懿敬世子 ..세조의 아들, 훗날 덕종으로 추존된다) 의 경릉(敬陵)이다. 세조(世祖)가 아들 '의경세자'를 위해 최고의 명당으로 잡은 이 곳, 그리고 왕의 자리인 오른쪽에 아내인 인수대비(仁粹大妃)가 묻혀 있는 ' 여성 상위 (女性 上位) ' 왕릉이기 때문이다.
조선 왕릉의 왕과 왕비의 무덤 매김질은, 살아서는 왼쪽을 높이고, 죽어서는 오른쪽을 높이는 우상좌하(右上左下)이다. 동원이강릉(同原二降陵)이든, 쌍릉(雙陵)이든, 삼연릉(三聯陵 .. 왕과 원비, 계비 3명이 나란히 묻힌 현종의 경릉)이든, 오른쪽은 어김없이 왕(王)의 자리를 고수하였다. 이 자리가 바뀐 유일한 왕릉이 이 곳 경릉(敬陵)이다.
세조(世祖)와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맏아들인 의경세자(懿敬世子. 1438~1457)는 세조가 즉위하던 1454년 세자로 책봉되고 1457년 9월 2일 갑자기 죽는다. 5일간 조회와 장을 파할 정도이었고, 30일 간 소복(소복)을 입었다.
의경세자(懿敬世子)의 습(襲)에는 7벌을 입혔고 소렴에 19벌, 대렴에 70벌을 입혔으니 거의 왕의 국장(國葬)과 비슷할 정도이었다. 오죽해야 세조(世祖)가 왕의 장례도 아닌데 모든 일이 정도에 지나친 듯하니 소박하게 하라는 말까지 했을까. 대렴(大殮)을 마친 다음날인 9월 5일, 세조는 왕세자 묘지를 택지하라는 어명을 내린다.
세조의 명당 열성이 얼마나 지극하였는지, 이 택지 과정에서 사방에서 쏟아져 들어온 천거(薦擧) 택지 중 이곳으로 결정하던 10월14일까지 친히 거동한 곳이 5차례에 이르렀다. 풍수도사인 세조(世曺)가 크게 만족한 명당 자리가 이 경릉(敬陵)이고, 세조는 후손들의 왕릉 경역을 마련한 셈이다. 문종(文宗)의 왕비 현덕왕후(顯德王后)가 저주하여 의경세자가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던 때였고,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단종 복위 운동을 하다가 발각되어 사사(賜死)되던 해이었다.
10월 24일 세조(世祖)는 왕도 아닌 왕세자의 장례에는 석물(石物)을 간소하게 하라는 어명을 내렸고, 그 날 단종(端宗)은 유배지인 영월(寧越)에서 17세의 어린 나이로 죽임을 당한다. 단종 복귀운동이 단종의 목숨을 단축시켰지만, 의경세자가 갑자기 죽은 것에 대한 세조의 분노(憤怒)도 단종의 죽음을 앞당긴 원인이 되었다.
덕종의 릉
왕세자의 신분으로 죽은 것은 조선 개국 이래 '의경세자'가 처음이었고, 왕이 아닌지라 석물(石物)과 묘지 배치도는 세조가 한명회, 신숙주 등과 의논해서 결정한 것이다. 왕릉에서는 무인석(武人石)까지 3단계이던 장대석은 무인석이 서 있는 3단계를 생략하고 문인석(文人石)만 세운 것도 세자(世子)이었기 때문이다.
인수대비의 릉
인수대비의 능상은 남편 덕종(德宗)보다 낮다. 그러나 무인석과 문인석, 망주석, 난간석이 둘러져 왕릉의 격식을 제대로 갖춰 석물(石物)이 단출한 덕종(德宗)의 능상과 비교가 된다. 덕종(德宗)은 아들 성종(成宗)에 의하여 왕(王)으로 추존되었지만, 인수대비(仁粹大妃)는 조선의 남존여비를 무시하고 남편보다 우위(優位)인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다.
의경세자가 죽을 때 인수대비는 그저 세자빈(世子嬪)의 신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세자빈은 소혜왕후(昭惠王后)로 추존되고, 인수대비를 거쳐 연산군(燕山君) 시절에는 대왕대비(大王大妃)까지 올라간다.
추존왕(追尊王)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왕세자로 죽고 그 아들이 왕위에 오를 때 별다른 이의 없이 자연스럽게 추존왕(追尊王)이 된다. 또 하나는 왕의 아버지 (왕세자가 아닌 왕의 종친)일 경우이다. 그러나 추존왕은 예의상 왕일 뿐, 살아 생전의 지위는 아내이었던 인수대비가 더 높기에 오른쪽을차지한 것이다. 이것은 조선이 남녀(男女) 서열보다 벼슬 서열을 우선으로 했다는 증거이다.
인수대비는 연산군 10년인 1504년 4월 27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승하하였고, 5월1일에 발인하여 경릉(敬陵)의 오른쪽 산줄기에 장사지냈다. 중간에 윤사월이 끼어 잇지만 겨우 1달 정도가 국장 기간이 된다. 국장(國葬) 기간이 5달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 짧고 성급하게 장사를 치른 것이다.
이 인수대비의 릉(陵)을 잘 살펴보면 연산군(燕山君)이 국장(國葬)에 무성의하였다는 속셈이 보인다. 어머니를 내쫓아 사약을 내려 죽인 할머니가 고울 리도 없고, 자신이 머리로 받아 죽였으니 장사를 잘 치러줄 이유도 없었다. 이러한 연산군(燕山君)의 내심은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 석물(石物)만 보아도 나타난다. 혼유석(魂遊石)의 북석은 아예 아무런 문양도 없고, 다듬다 만 돌덩이처럼 거칠기 짝이 없다. 인수대비의 혼유석은 문양마저 생략할 정도로 무성의한 점이 드러난다. 연산군이 마지못해 아무렇게나 치른 인수대비의 국장이지만 왕릉의 격식을 갖춰 주고 오른쪽에 묻을 정도로, 인수대비의 서열이 남편 덕종보다 높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여성 지식인으로서의 인수대비
남편의 죽음으로 잃어버렸던 왕비(王妃)자리를 아들인 성종(成宗)을 통해 대비(大妃) 자리로 보상받은 인수대비 '한씨'는 시부모인 세조(世祖) 내외로부터 '효부 (孝婦) '라는 글귀가 새겨진 도장을 받을 정도로 부덕(婦德)을 갖춘 여성이었다.
폭빈 暴嬪
21살에 청상과부가 된 이후로 자식교육과 아랫사람을 경계함에 추호의 빈틈도 없어 폭빈(暴嬪)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완벽함을 추구하였다. 그녀의 강한 집념은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을 왕위에 올리는 동력이되었으나, 한편으로는 '폐비 윤씨'를 부덕(不德)한 여성으로 몰아 사사(賜死)에 이르게 함으로써 조선 왕실 최대 비극(悲劇)이라 할 수 있는 연산군의 폭정을 잉태하게 하였다.
그러나 여성지식인으로서의 그녀의 업적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틈틈이 부녀자의 교양을 위하여 열녀전(列女傳), 여교명감(女敎明鑑), 소학(小學) 등 서적 중에서 귀감이 될만한 부분을 뽑아 '내훈 (內訓)'을 편찬한 것은 그녀의 대표적인 업적이다. 아울러 불교 경전에도 조예가 깊어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교서적을 읽고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여성 교양서가 없었던 시절에 여성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진보적인 생각을 한 인수대비이었지만, 그녀가 생각한 여성의 교양은 남성을 우위에 둔 여성의 부덕(婦德)이었다. 또한 유교적 부덕(婦德)을 갖추지 못한 여성은 비록 왕비라 할지라도 내칠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조선 성종(成宗) 시절에는 우리 역사에서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시기이었다. 여성의 유교적 부덕(婦德)이 국가적 차원에서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사가(私家)에서는 어우동이, 왕실에서는 폐비 윤씨가 그 희생양이 되었다.
출처 : 김규봉의 사는 이야기
첫댓글 고대국가 부여에서는 순장제도가 성행했다 주인이 죽으면 노비등을 모두 함께 살아있는체로 곁에 묻었다. 그런 순장제도가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지증왕때 폐지가 되었다 하는데 우리나라 조선초기에 해당하는 시기인 명나라 제3대황제인 영락제 때도 그의 부인 한확의 누이동생과 그의 몸종들을 같이 순장하였다하니 놀랍지않을 수 없다. 인명은 재천이거늘 어찌 .... 그기록이 우리나라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어 중국에는 그때까지 순장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수 있는 근거가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