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청년과의 재회
드디어
택시를 타고 렙테리가 준 이모 집 주소로 찾아갔다. 렙테리로부터 내가 올 것이라는 연락을 받고 기다리던
이모네 식구들은 나를 따뜻하게 맞이해주었다. 짐이라고는 달랑 조그만 여행 가방에 옷 몇 가지 뿐인 나에게
실내화, 잠옷, 심지어 생리대까지 필요한 물건들을 사다 주었다. 이모는 돌아가시고 딸 둘과 아들 둘 그리고 장의사를 하는 아버지 다섯 식구가 무료하게 살다가 외국 여자가 집에
오니 집안에 활기가 돌았던 것 같다..
함께
생활하면서 가장 놀란 것은 아버지와 자녀들이 대화하는 방법이었다. 어른 앞에서는 눈도 크게 못 뜨는
완고한 유교 사회의 엄격한 집안 분위기에서 자라난 나로서는 아버지와 삿대질을 하며 싸움을 하는 것 같은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가도 금방 웃고 하는 것이 그리스 말을 모르는 내게는 미쳤거나 불량한 자식들 같은데 나한테는 친절한 것이
이상한 사람들은 아닌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은 그렇게 하는 것은 싸우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일상적인 대화 방법이었다. 일상생활에서 토론이
흔하게 벌어지고 나이 성별 차이 없이 자기의 의견을 마음껏 표현하는 사회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들의
정서를 모르는 나는 싸우는 것으로 생각하고 노인인 아버지를 토닥거리면서 자녀들에게는 그러면 안 된다는 시늉을 하니까 노인이 매우 좋아했다. 그러나 상황을 잘 모르고 했던 이런 나의 태도가 결과적으로는 나중에 크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이모
집에서 연락을 받고 달려온 렙테리를 만나자 반가워서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때부터
렙테리와 나는 애정이 생길 사이도 없이 자연스럽게 연인 관계가 되어 버렸다. 한국에서는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 통성명을 하고 난 다음에는 의례 나이를 물어보지만 그리스에서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나이를 물어보지 않는다. 렙테리는 상냥하고 발랄한 내 모습을 보고 20대 초반으로 알았고
내 눈에는 키가 큰 그가 어려 보이질 않았다. 그가 결혼하자고 할 때서야 나이를 물었더니 무려 10살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내가 결혼을 해야 합법적인
신분을 취득할 수 있었지만, 나이 차이가 너무 나서 "후회하지
않겠느냐?"고 물으니까 랩테리는 철이 없었던 것이지 내가 너무 좋아서인지 "Too late!"이라고 대답했다. 마음을 돌리기엔
너무 늦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결혼 후에 나는 나이 차이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그가 나를 귀여운 어린아이에게
대하듯 해서 그가 나보다 나이 많은 아저씨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리스
말을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온 집안 식구들이 선생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큰 아들 요르 고가 퇴근해서
집에 올 때 무언가를 사가지고 와서는 ‘찬다챤다’ 라고 하며
가방을 주고, 둘째 아들 앤터니는 식사시간에 물을 가리키며 ‘네로’ 하고, 둘째 딸 스마그라다는 '닉띠꼬' 하면서 잠옷을 내게 주곤 했으니 학생 하나에 다섯 선생님이 특별 과외를 하는 셈이었다.
렙테리는
퇴근하면 매일 이모네 집에 와서 함께 놀다 갔다. 서로 말이 잘 통하지 않아서인지 툭툭 치며 장난을
걸어오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가 가볍고 철이 없어 보여 “이렇게
고민도 없고 진지하지 못한 사람과 결혼해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찬 밥 더운 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지만, 인생의 중요한
결정이니 이만 저만 고민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친구들과 이모네 형제들이 나를 위한 파티를
해준다고 한국의 나이트클럽과 비슷한 음악을 뜻하는 ‘뮤주까’ 라고
하는 곳에 갔다. 가수들이 나와서 노래를 하고 사람들은 넓은 홀에서 춤을 추었다. 특이한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가 나와서 노래를 부르면 업소에서 파는 접시를 사서 가수 앞에서 접시를 깨뜨리는
모습이었다. 또 ‘집떼떼리’가
나오면 여자들의 율동이 빨라지는데 가슴을 흔들며 추는 춤이 매우 관능적으로 보였다. 또 다른 느린 박자의
하사비꼬가 나오면 이번엔 남자가 담배를 입에 물고 서서히 느릿느릿 흡사 한국의 승무처럼 춤을 추었다. 천천히
돌다가 껑충 몸을 날려 발바닥을 한번 탁 차고는 또 다시 느린 동작으로 추는 춤이었다. 실제로 그들의
춤을 보고 오히려 영화 ‘희랍인 조르바’에서 앤서니 퀸이
추던 춤이 서툴렀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었다. 그리스 남자들의 춤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의 아픔이나 고뇌, 기쁨 등의 내면이 들여다보이는 듯해서 춤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했다. 그런데
렙테리가 갑자기 크리스털 술잔을 으스러지게 꽉 쥐어 잔을 깨뜨렸다. 그의 손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나에게 그의 친구가 말했다.
“걱정 말아요. 당신 돌아온 것이 너무 기뻐 감격해서 그런 것이니.”
사실
나로서는 그와의 결혼이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기는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과연 잘 될 수 있을 것인가?”하는 불안감이 깔렸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런 불안감이 살아지고”아! 이 남자의 아내가 되어서 헌신하며 살아야겠구나.”하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