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최씨 (江陵 崔氏)
1> 시조 : 최흔봉 (崔欣奉)
최문한 (崔文漢)
최필달 (崔必達)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강릉은 강원도에 위치하는 곳으로 313년 고구려 미천왕때에 하서량 또는 하슬라 라 하였고,
685년 태종 무열왕때 하서주로 개편, 경덕왕때 다시 명주로 개편하였으며,
936년 고려때에는 동원경이라 칭하고 940년 다시 영주로 고쳤다. 그후 여러 번쳔을 거쳐
1388년에 교주 강릉도로 하였다가, 공양왕때 대도호부로 승격시키고 별호를 임영이라 하였다.
1395년(조선 태조 4) 강원도로 개칭하고 정조때 도명(道名)을 원춘도로 개칭하였다가
1896년(고종 33) 13도제 실시로 강원도 강릉군이 되었다가 다시 강릉시로 승격되었다.
강릉최씨 (江陵 崔氏)는 본관을 같이 하면서도 상계(上系)를 달리 하는 다음 3계통이 있다.
첫째는 고려 태조의 부마로 통합삼한익찬공신(統合三韓翼贊功臣)이며 고려태조의 따님이신
옥경대주와 혼인하여 태조의 부마 (사위)가 된 완원위(完原尉) 대경(大卿)의 벼슬에 봉해졌던
대경공 최흔봉 (崔欣奉) 의 계통이며,
둘째는 고려 충숙왕의 부마 (사위) 로 충숙왕의 딸 선덕공주와 혼인한 삼중대광 판군기시사에
올랐던 충재공 최문한(崔文漢)을 시조로 하는 계통이다.
셋째는 고려때 삼중대광으로 삼한벽상찬화공신에 책록되어 영첨의좌정승을 역임한 후
경흥부원군에 봉해졌던 충무공 최필달 (崔必達) 의 계통이다.
이들 각 계통별로 가문의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첫째로
고려국 통합삼한익찬공신(統合三韓翊贊功臣)이며 고려 태조의 부마로 대경(大卿)에
올랐던 완원위(完原尉) 대경공 최흔봉 (崔欣奉) 의 후손에서는
11세손 릉(陵)이 상당부원군 (上黨府院君) 에 봉해지고 우정승과 상호군과 평장사를 역임하였다.
12세손 성묵당 입지 (立之) 가 고려 충열왕때 진사로 문과에 올라 광정대부문하평리상호군
(匡靖大夫門下平理上護軍)에 배임(拜任) 되었고, 얼마 아니되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오름.
강릉군(江陵君)으로 봉. 충익사공신(忠翊社功臣)으로 검교태보문하시랑(檢校太保門下侍郞)과
성찬화안사공신(成贊化安社功臣) 개부의삼사상주국(開府儀三司上主國)에 追賜되다.
廣陵 계유년에 수태사태상(守太師太常)으로 증직(贈職)되었고 임금께서 諡號를 충숙(忠淑)이라
주시고 세종 병오년에 영의정(領議政)에 가증(加贈)되다.
그의 아들 13세손 3형제 중 맏아들 문충공 안소(安沼)가 한성부윤과 삼중대신문하좌시랑 평장사에
봉직되었으며,강릉부원군에 봉해졌다.조선조 세종조에 영의정으로 가증(加贈)되었다.
차남 예성군 안영은 한림학사와 정헌대부,예조,이조전서,안동순흥부사를 역임하였으며 당시 치적으로
청백리(淸白吏)를 받고 (고려사 기록) 예성군 (강릉의 옛 이름) 에 봉해졌다.
막내 전서공 안언은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전서,성균관대사성,첨서중추원사,보문각태학사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4세손 문희공 보국숭록대부 의정부찬성사 유련은 고려조 문하시랑 평장사를 역임하였고
정헌대부삼찬문하부사를 역임하였다.
조선개국원종공신이며 고려 충목왕때 3번이나 과거 장원급제를 하였으며, 강릉군에 봉(封)하였다.
유련의 개국원종공신녹권은 국가보물로 지정되어 강릉 최씨 서울종친회 사무실에 보관중이다.
유련의 동생 병판공 유의는 고려조 우왕때 경상안찰사와 집현전 대제학와 전서판서및 밀직부사를 역임하다.
공양왕 폐위시 삼척 수양산에 은거하며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고려조에 대한 충직함을 지키고저
조선조의 벼슬을 받지 않는 충절을 보여주었다.
14세손
호판공 사광은 공민왕시 급제 한림원태상박사,성균관,좌상시 개국원종록에 책봉,판원판서 병마사대호군.
대마도정벌 참여 개선후 호조판서에 오름.
14세손
죽당공 사정은 한림학사,북청부사를 역임후 고려조의 국운이 쇠락함을 슬퍼하여 낙향
( 조선조 태종이 형조전서에 임명코저 하였으나 고려조에 대한 충절을 지키며 거부)
14세손
이판공 운기는 1374년 원나라에 파견 오랑캐를 토벌한후 귀국하여 도병마사에 임명,
후에 삼사좌윤과 이조판서 역임.
15세손 강릉군 희경공 최 이는 자는 유명, 강릉군 최 유련의 아들이다.
1356(공민왕 5)∼1426(세종 8).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초명은 원(遠), 자는 유명(惟明).
도평의사사지인(都評議使司知印)으로 초임된 뒤 1380년(우왕 6) 낭장으로 규정(糾正)을
겸하여 지정선군사(知旌善郡事)를 지냈다.
그뒤 교주도안렴사(交州道按廉使)가 되었다가 판도전법총랑(判圖典法摠郎)을 지냈고, 1390년(공양왕 2)에
사헌부집의를 거쳐 감문비순위대호군(監門備巡尉大護軍)이 되었다.그뒤 삼사우윤(三司右尹)이 되었을 때
삼사좌윤으로 있던 이방원 (李芳遠:뒤의 太宗) 과 함께 조선 개국에 참여하였다.
1392년에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에 오르고 조선 개국 후 중추원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가 되었다.
1394년(태조 3) 중추원부사에 승진하였고, 이듬해 경기좌도도관찰사 겸 병마도절제사가 되었다.
1397년에 완산부윤(完山府尹)이 되고, 1400년(정종 2)에 대사헌에 올랐으며, 좌군총제를 겸하였다.
1402년(태종 2)에 전라도도절제사가 되었고, 1404년에 참찬의정부사에 올랐으며,
이듬해에 공조판서를 거쳐 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를 역임하였다.
1405년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이듬해 왜구가 침범해오자, 형조의 소청(疏請)으로
상중에도 불구하고 장발(奬拔)되어 충청도병마사 겸 수군도절제사에 보직되어 왜구 소탕에 힘썼다.
1408년에 길주도도안무사(吉州道都安撫使)가 되었고, 이듬해 영진주목사(領晋州牧事)가 되었다.
1412년에 형조판서에 올랐고, 이듬해 2월에 하성절사(賀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그해 6월에 돌아왔다.
1413년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로 평양부윤을 겸하였다가 곧 평안도도순문찰리사(平安道都巡問察理使)가
되었는데 변방주민들의 조세를 감면해줄 것을 소청하였다.
1415년에 의정부참찬이 되었고, 이듬해 좌군총제부사와 판우군부사가 되어 왕명에 의하여 흥천사(興天寺)
사리전(舍利殿)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1418년에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가 되었다가 의정부찬성사를 거쳐 호조판서가 되었다.
1420년(세종 2) 경상도도관찰사가 되었으나 부하가 공금을 착복한 것을 관리하지 못하였다는 책임으로 파직되었으나
1424년에 재기용되어 판우군도총제가 되었고, 명나라 태종이 죽자 진향사(進香使)가 되어 명나라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강릉군에 봉해졌으며, 임금께서 시호를 희경(僖景)으로 내리셨다.
최 흔봉 계열은 평장사 네명과 여섯명의 강릉군을 배출하였다. ( 四평장사 六강릉군 )
둘째로
충재공 문한(文漢)의 후손에서는 그의 손자 윤(允)이 사포서 사포(司圃署司圃)를 역임한 후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슬하에 아들 3형제 중둘째 자호(自湖)는 대사간과 이조 판서를 지냈으며,
막내 자점(自霑)은 성종때 등과하여 감찰과 정언을 거쳐 홍문관교리를 지내고 평강,고성,금성 등지의
군수를 지내며 선정을 베풀었고 훌륭한 치적을 남겨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연(자점의 손자)은 중종때 명경과에 급제한후 호당에 선임되어 사가독서 했으며 홍문관 제학과 수찬,장령,
필선등을 거쳐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가 민정을 살폈고 승정원 우부승지를 지낸후 명종 초에 지중추부사와
한성 판윤을지내고 지의금 부사로 동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그의 조카 운우는 명종때 횡성 현감을
역임했고, 인조때 문과에 급제하여 진주목사를 역임했던 응천이 문장과 서예및 음율등에 뛰어났었다.
셋째로
충무공 필달의 증손 숭언(崇彦)이 고려 때 삼중대광으로 명주부원군에 봉해졌으며, 13세손 한주(漢柱)는 고려 충렬왕때
대중대부로 종정경과 정당문학을 지내고 명주군에 봉해졌으므로 필달,숭언,한주는 최필달계가 자랑하는 삼군(三君)이다.
고려말에 정선군수를 지내고 중정대부로 삼사 좌윤을 역임했던 동강 원량(元亮)의 손자 치운(致雲)은 조선 전기의 명신으로
세종때 훌륭한 치적을 남겼다.고려의 국운이 기울어가는 1390년 6월 19일 강릉에서 태어난 조은 치운(致雲)은 세종 원년에 승문원
정자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가 여러 주요관직을 두루 역임하며 덕망과 식견을 인정받아 국정을 논할 때마다 왕의 자문에 응했고,
다섯 차례나 명나라를 다녀오면서 외교적인 업적을 남겼다.
치운의 둘째 아들 응현(應賢)은 승문원 부정자에 임명되었으나 고향에 계신 노모의 봉양을 위하여 강릉 훈도에 머무르다가
세조때 강원도 도사직을 억지로 받게 되자 6년의 의무기간 동안 고향 근방의 수령직을 주청(奏請)하여 영월과 고성을 맡아
목민관의 임무를 다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강릉최씨(江陵崔氏)는 남한에 총 30,940가구, 132,30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처 :한국 참풍수지리학회 / 힌성 :최대영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