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23산악회 정기산행 및 시산제 (2017 .03 .26) 大(太)師摯(태사지)는 適齊(적제)하고, 태사 지(摯)는 齊나라로 가고, 亞飯干(아반간)은 適楚(적초)하고,三飯繚(삼반료)는適蔡(적채)하고, 四飯缺(사반결)은 適秦(적진)하고, 아반 干(간)은 楚나라로 가고, 삼반 繚(요)는 蔡나라로 가고, 사반 缺(결)은 秦나라로 가고, 鼓方叔(고방숙)은 入於河(입어하)하고, 북을 치는 方叔(방숙)은 河內(하내)로 들어가고, 播鼗武(파도무)는 入於漢(입어한)하고, 小鼓(소고)를 흔드는 武(무)는 漢中(한중)으로 들어가고, 少師陽(소사양)과 擊磬襄(격경양)은 入於海(입어해)하니라. 少師(소사) 陽(양)과 경쇠(磬)를 치는 襄(양)은 섬으로 들어갔다. (繚 : 감길 료, 鼗 : 땡땡이 도, 딸랑이북 도, 소고 도) -논어 미자 9장-
今釋(茶山의 해석) 노나라 昭公(소공) 때, 정국이 더욱 쇠하고 혼란하여 禮(예)와 樂(악)이 붕괴되자 악사들은 각자 흩어졌다.“악관장 摯(지)는 제나라로 갔고, 아반의 악장을 연주하던 악사 간(干)은 초나라로 갔고, 삼반 악사 繚(요)는 채나라로 갔고 사반악사 缺(결)은 멀리 秦(진)나라로 갔고, 북을 치던 악사 方叔(방숙)은 황하 가로 옮겨갔고, 작은 북을 흔들던 악사 武(무)는 漢水(한수)유역으로 갔고, 소사陽(양)과 경쇠를 치던 襄(양)은 海島(해도)로 가서 은거했다.”라고 했다. 〇 이 章에 대해 다산은“소공 이십오 년 萬舞(만무) 사건으로 소공이 季氏(계씨)를 치려다가 실패하여 제나라로 도망갔는데, 이때 기미를 보아 樂人(악인)들이 노두 흩어진 일을 기록한 것”이라고 했다.
朱註(朱子의 집주) ①朱子 大師는 魯樂官之長이요 摯는 其名也라. 태사는 노나라 악관의 책임자이다. 摯(지)는 그 이름이다. 亞飯以下는 以樂侑食之官이라 干, 繚, 缺은 皆名也라. 亞飯(아반) 이하는 <군주가 음식을 들 때에>음악을 연주하여 흥을 돋워 식사를 권하는 관직이다. 干(간), 繚(요), 缺(결)은 모두 이름이다. 鼓는 擊鼓者라 方叔은 名이라 河는 河內라 鼓(고)는 북을 치는 자이고 方叔(방숙)은 이름이다. 河(하)는 하내(黃河 以北 땅)이다. 播는 搖也라 鼗는 小鼓니 兩旁有耳하여 持其柄而搖之면 則旁耳還自擊이라 武는 名也라 漢은 漢中이라. 播(파)는 흔듦이다. 鼗(도)는 소고이니, 양쪽으로 귀(딸랑이)가 달려 있어 그 자루를 잡고 흔들면 두 귀가 돌아가며 스스로 치게 된다. 武(무)는 이름이다. 漢(한)은 한중(漢水 以北의 땅으로 황하와 양자강을 연결하는 교통요충지)이다. 少師는 樂官之佐라 陽襄은 二人名이니 襄은 卽孔子所從學琴者라 海는 海島也라. 少師(소사)는 樂官(악관)의 輔佐官(보좌관)이다. 陽(양)과 襄(양)은 두 사람의 이름이니. 襄(양 :사 양자)은 바로 공자께서 찾아가 거문고를 배운 자이다. 해(海)는 海島(해도: 바다 섬)이다. 〇 此는 記賢人之隱遁하여 以附前章이라 然이나 未必夫子之言也니 末章放此하니라. 이는 현인이 은둔한 것을 기록하여 앞장에 붙인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부자의 말씀은 아닐 것이다. 끝장도 이와 같다.
②張子 張子曰 周衰樂廢어늘 夫子 自衛反魯하여 一嘗治之하시니 其後에 伶人賤工도 識樂之正이러니 及魯益衰하여 三桓僭妄한대 自大師以下 皆知散之四方하여 逾河蹈海以去亂이라 聖人 俄頃之助가 功化如此하니 如有用我면 期月而可가 豈虛語哉시리오 장자가 말씀하셨다.“주나라가 쇠하여 음악이 폐해졌는데, 공자께서 위나라로부터 노나라에 돌아오시어 일찍이 한번 (음악을) 다스리시니, 그 후에 광대와 천공들도 음악의 바름을 알게 되었다, 노나라가 더욱 쇠하여 삼환이 참람하고 망령된 짓을 행하게 되자. 태사로부터 이하의 사람들이 다 사방으로 흩어져 가서 황하를 건너고 바다를 건너 어지러운 나라를 떠날 줄을 알았다. 聖人이 잠깐동안 도우심에 功效(공효)가 이와 같았으니,‘만일 나를 써 주는 자가 있으면 일 년이면 可하다(자로편 10장)’고 하신 것이 어찌 빈 말씀이겠는가?”
家苑 註(가원 이윤숙 선생의 집주) <家苑 註 1> 공자는 제나라에서 순임금이 만든 韶(소)를 접하고 깊은 감명을 받아 3개월 동안이나 침식을 잊은 채 익혔고(술이편 13장), 마침내 노나라로 돌아와서는 음악을 정리하여 바르게 연주되도록 하였다(자한편 14장). 이때 악관인 태사 摯(지)와 함께 자주 음악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연주하였는데(팔일편 23장), 摯(지)의 關雎(관저)장 연주가 후일에까지 ‘귀에 넘실넘실 차더라(洋洋乎盈耳哉:태백편 15장).’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삼환씨가 권력을 전횡하면서 나라의 기강과 질서가 무너지자 예악 또한 무너져 종묘와 조정에서 연주되어야 할 음악들이 그대로 대부의 집으로 옮겨져 연주되었다(팔일편 1장, 2장). 대부와 가신들에 의해 음악과 악사들이 농단당하는 지경에 이르자 정악을 담당하는 악사들이 마침내 하나 둘씩 노나라를 떠났다. 악사들이 노나라를 떠난 것은 아마도 공자 사후에 일어난 일인 것 같다. 晉 (진)나라에서 높은 벼슬을 했던 거문고의 달인 伯牙(백아)가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는 鍾子期(종자기)가 죽자 거문고 줄을 끊어버리고 죽을 때까지 다시는 거문고를 연주하지 않았다는 伯牙絶絃(백아절현)의 고사처럼, 공자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음악을 제대로 알아줄 사람이 없자 공자와 함께 했던 노나라의 악사들이 더 이상 연주를 하지 않고 모두 떠난 것으로 보인다. <家苑 註 2> 위에서 亞飯(아반) 三飯(삼반) 四飯(사반)은 아래 주석과 주례와 백호통을 종합해보면 식사할 때의 연주라고 했는데 일반적인 식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초하루와 보름(朔望삭망)에 드리는 小祀(소사)의 종묘제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곧 천자와 제후와 대부의 제사 때 연주하는 初獻(초헌) 亞獻(아헌) 終獻(종헌)으로 천자의 경우는 네 번의 식사에 모두 연주하고, 제후는 세 번, 대부는 두 번의 식사에만 연주를 하는데, 노나라는 천자의 나라가 아니고 제후의 나라이므로, 初獻(초헌)을 一飯(일반)이라고 하지 않고 亞飯(아반)으로 시작하여 三飯(亞獻) 四飯(終獻)으로 했음을 볼 수 있다. 참고로 종묘제례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四孟朔(사맹삭)의 上旬(상순:음력 1월 4월 7월 10월의 첫 10일 이내)과 臘日(납일) 곧 동지 후 셋째 戌日(술일)에 드리는 大享(대향)과, 매월 朔望(삭망:초하루와 보름날)과 五俗日(5속일:正朝정조 寒食한식 端午단오 秋夕추석 冬至동지)에 드리는 小祀(소사)이다. <家苑 註 3> 주례 春官(춘관) 宗伯(종백)편을 보면, 大司樂(대사악)은 왕의 大食日(대식일)인 초하룻날과 보름날에 왕이 식사할 때에 세 번에 걸쳐 鐘鼓(종고)를 연주하여 음식을 맛있게 드실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周禮春官宗伯에 大司樂이 王大食에 三宥한대 皆令奏鐘鼓라 註에 大食은 朔日與月半에 以樂으로 宥食時也라 宥는 勸也라.) 〇 白虎通曰王者 平旦食晝食晡食暮食에 凡四飯이요 諸侯는 三飯이요 大夫는 再飯이라 故로 魯之師官은 自亞飯以下로 蓋三飯也라. 백호통(후한 때 班固 등이 章帝의 명에 따라 五經의 여러 해석들을 논의하여 통합한 책)에 이르기를, 왕은 평일의 아침 점심 간식 저녁 식사에 네 번 다 연주하고, 제후는 세 번의 식사에 연주하고 대부는 두 번의 식사에만 연주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노나라의 사관이 아반부터 이하로 대개 세 번의 식사에 연주하였다. <家苑 註 4> 공자와 師襄子(사양자) 史記孔子世家(사기공자세가)를 보면 공자께서 사양자에게 칠현금을 배우고 곡조를 익히면서 그 곡에 심취해 마침내 그 곡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까지를 알아내는 과정이 적혀 있다. 공자께서 음악에 대한 조예가 얼마나 깊었는가를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기에 意譯(의역)하여 소개한다. 공자께서 사양자에게 칠현금의 곡을 배우고 열흘 동안 연습한 뒤에 사양자를 찾아갔더니 가히 훌륭하다고 했다. 하지만 공자께서는‘나는 이미 그 가락(曲)을 익혔으나 그 빠르기(數, 내용상으로 보면 박자의 수를 말하므로 ’數‘는 ’빠를 삭‘이 됨)를 얻지 못했다.’고 하며 며칠을 연주하며 궁리했다가 사양자에게 가서 다시 연주했다. 사양자는 이미 그 빠르기를 익혔으니 훌륭하다고 했다. 그러나 공자는 한걸음 더 나아가 ‘구는 아직 그 뜻(志)을 얻지 못했노라.’고 하며 다시 며칠을 더 연주하며 궁리한 뒤에 갔더니 사양자가 이미 그 뜻을 익혔으니 또한 가히 훌륭하다고 했다. 공자께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그 사람됨(其爲人)을 얻지 못했노라.’고 하면서 다시 며칠을 연구한 뒤에 사양자에게 가서 연주했더니 사양자가 듣고 “화목한 듯하면서 깊이 생각하는 바가 있고, 기쁜 듯하면서 높이 바라보며 먼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그랬더니 공자께서“구는 그 사람됨을 얻었으니 거무스름한 흑빛이고, 헌걸차면서도 크고, 눈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함이 마치 사방을 다스리는 왕과 같으니 문왕이 아니면 그 누가 능히 이를 지었으랴!”고 말했다. 깜짝 놀란 사양자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거듭 절하면서, “바로 문왕이 지으신 곡조입니다.”라고 말했다. <家苑 註 5> 黯然而黑(암연이흑) 幾然而長(기연이장) 眼如望羊(안여망양) 如王四國(여왕사국) 非文王其誰能爲此也(비문왕기수능위차야) 은나라 말기에 정국은 포악무도한 자들이 장악하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기에 늘 이를 걱정하는 문왕의 마음이 그대로 음악에 투영되었다. 이에 음악이 장중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깊은 심연에 빠진 듯 슬픔이 배어 있었다. 이를 공자께서는 黯然(암연)하다고 표현하면서 이 음악을 지은 사람의 얼굴빛을 흑빛으로 나타냈고, 한편으로는 굳세면서도 크게 뻗어가는 기상이 담긴 음악 속에서 공자는 세상을 구하려는 강인한 의지가 담긴 큰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그러면서 조화로운 음악 속에서 공자는 백성들의 평화롭고 안정된 삶을 구현하겠다는 의지를 헤아려보고, 칠현금에 이런 음악을 담아낸 사람은 아마도 얼굴은 거무스름한 흑빛이고, 몸은 헌걸차면서도 크고, 눈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함이 마치 사방을 다스리는 왕과 같으니 문왕이 아니면 누가 이런 음악을 지었겠는가? 하고 생각한 것이다. * 文王操(문왕조)를 단순히 문왕이 지었다는 곡조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前漢書(전한서) 禮樂志(예악지)에 “黃帝(황제)의 음악을 咸池(함지), 顓頊(전욱)의 음악을 六莖(육경), 帝嚳(제곡)의 음악을 五英(오영), 堯(요)임금의 음악을 大章(대장), 舜(순)임금의 음악을 招(=韶, 소), 禹(우)임금의 음악을 夏(하), 탕임금의 음악을 濩(호), 무왕의 음악을 武(무), 주공의 음악을 勺(작)”이라 하듯이 문왕이 지은 음악을 操(조)라고 불러야 할지는 정확하지 않다. 문왕의 경우 공식적으로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西伯(서백)으로 있다가 추존되었기에 그가 지은 음악은 공식적으로 연주되지 않고 악사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다가 師襄子(사양자)에 의해 공자에게 알려진 것이 아닐까? 그러나 한편으로 주공의 勺(작)은 거론되는데 문왕의 操(조)가 거론되지 않는 것 또한 이상하다. 사마천이 잘못 기록한 것인가?
1, 亞飯干(아반간) : 공안국 註(주)에“亞(아)는 ‘다음’이라는 말로, 次飯(차반)은 악사이다”라 했다. 《예기》<왕제>에 의하면 고대에 천자나 제후가 식사를 들 때에 음악을 연주하는 禮가 있었는데, 이는 음악으로써 식사의 흥을 돋우는 것이다. 亞飯(아반 : 2회 식사), 三飯(삼반 : 3회 식사), 四飯(사반 : 4회 식사)은 모두 천자나 제후가 식사할 때 음악을 연주하는 官樂(관악) 이름이다.
오늘도 고운 날 되시고 행복하십시오~ -푸른솔(碧 松)-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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