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선배 도반님과 오랫만에 순례하는 일요일 아침, 이른시간(07:30)에 마산을 출발하여 쌍계사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남해 고속도로를 지나 하동 섬진강을 따라 송림 부근에 이르니 차가 많아 길이 막혔다. 평소에는 막히지 않는 도로인데 아직 매화 축제도 멀었고 왠일일까하고 궁금해하고 있는데 오늘따라 송림에서 출발하는 섬진강 마라톤 대회가 있다고 하여 쌍계사 사시 예불은 건너 띄기로 하고 발걸음을 재촉하여 도착한 시간이 10:00였다.
쌍계사 석문
맨처음 화개천을 가로지르는 쌍계교를 지나 늘어선 상가들을 지나면, 큰 바위 두개가 석문처럼 우뚝 서 있다. 우측에는 '雙磎'와 좌측에는 '石門'이라는 글자가 각각 쓰여 있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운 최치원선생이 이 곳에 들렀다가 지팡이 끝으로 쓴 것이라 한다.
삼신산 쌍계사
삼심산이란, 중국의 사기에 나오는 산입니다.
봉래산:금강산, 방장산:지리산, 영주산:한라산을 말하는데,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불노초를 구하기 위하여 서복과 동남동녀 3천명을 바다 건너 삼신산으로 보낸데서 유명해졌습니다.
쌍계사는 지리산(지리산은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불리움)의 장엄함과 섬진강의 평화스러움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곳에 자리하고 있다. 지리산은 금강산, 한라산과 함께 삼신산(三神山)이라 하여 옛부터 영산으로 숭배되어 왔다. 724년(신라 성덕왕23년) 의상대사의 제자인 삼법(三法)화상이 당나라에서 육조혜능의 정상(頂相)을 모시고 눈 속에 칡꽃이 핀 곳에 봉안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이후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진감혜소국사(眞鑑慧昭國師)가 지리산에 내려와 머물 곳을 찾던 중 범 몇 마리가 옛 삼법스님이 세운 절터로 인도하여 840년(신라 문성왕 2년) 이곳에 대가람을 중창하고 절 주위에는 중국에서 가져온 차를 심고 옥천사(玉泉寺)라 하였다. 정강왕 때, 바위 사이를 흐르는 두 계곡물이 절 입구에서 만나므로 쌍계사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최치원으로 하여금 "쌍계석문(雙磎石門)을 쓰게 하여 바위에 새겼다.
쌍계사는 도의국사와 동시대에 활약한 진감국사가 육조 혜능선사의 남종 돈오선을 신라에 최초로 전법한 도량이자 차의 발상지이며 해동범패(梵唄:불교음악)의 연원이다. 그러므로 쌍계사는 선(禪)ㆍ다(茶)ㆍ음(音)의 성지로 일컬으지며 국사암, 불일암, 도원암 등의 암자가 있으며 조계종 제 13교구 본사이다.
서산대사의 중창기를 보면 중섬(中暹), 혜수(惠修)스님의 대대적인 중창이 있었으나,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었다. 임진왜란 후 벽암(碧巖), 소요(逍遙), 인계(印戒), 백암(栢庵), 법훈(法訓), 용담(龍潭)스님 등이 중창을 하였고, 1975년부터 고산스님에 의해 복원, 중수 중창을 거쳐 현재와 같은 대가람의 사격을 갖추고 있다.
쌍계사는 진감선사에 의해 이루어진 금당영역과 임진왜란 이후 벽암 각성스님에 의해 중수된 대웅전 영역으로 금당은 남향을, 대웅전은 서향을 향하여 각을 이루는 파격적인 구도를 나타내고 있다. 산내 암자로는 국사암과 불일암이 있고, 문화재로는 국보 1점, 보물 6종(20점), 지방문화재 12점, 문화재자료 5첨, 천연기념물 2곳 등을 보유하고 있다.
쌍계사 마애삼존불
쌍계사 마애삼존불은 최근에 조성한 듯 조성날짜 등의 안내가 전혀 없어 아쉽다. 다만 서울 이태원에 거주하는 신춘호 거사님과 김덕성화 보살님 부부의 시주로 조성된 것만 확인되고 있다.
마애불
대웅전과 명부전 사이에 있는 자연암석을 깊게 파서 약사여래불을 모신 것으로 늦은 오후 서쪽 햇빛이 비추면 천진하게 미소 짓는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다고 하는데 우리 일행은 일정상 . . .
쌍계사 석탑
이 탑은 제작연대 등에 대한 기록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쌍계사 대웅전(보물 제 500호)
성덕왕 22년(723년)에 신라의 대비화상과 삼법화상이 옥천사를 세운 것이 기원이다. 정강왕(886-887)이 두 계곡이 만나는 절의 지형을 보고 이름을 쌍계사로 고쳤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탔던 것을 1632년에 벽암대사가 다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쌍계사의 중심인 대웅전은 부처(여래)를 모신 법당으로 정면 5칸,측면 3칸 규모이다. 팔자 모양의 팔작지붕은 얹었고, 지붕과 기둥사이는 3단의 목조장식으로 받쳤는데, 밖으로 드러난 목재들이 복잡하면서도 우아한 곡선이 오래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내부의 천정은 모난 우물모양으로 꾸몄고, 부처의 하늘을 상징하는 닫집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직선에 가깝고 비교적 높은 기둥은 건물을 규모를 느끼게 한다. 기둥 사이에는 위에 장방형 창과 아래에 4짝의 여닫이문을 달았다. 여닫이문의 아래에 있는 8각의 창은 대개 조선시대 말부터 대웅전에 채용되기 시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시기적으로 200년 이상 빠른 예에 속하고 있다. 기둥의 전면을 가득 채운 용과 구름무늬, 내부를 빈틈없이 꾸미고 있는 비단무늬, 회화적인 단청 등이 보물로서의 가치를 더하고 있다. 이 대웅전은 조선시대 불교건축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어, 우리나라 건축사와 미술사 연구에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진감국사탑비(眞鑑國師塔碑,국보 제 47호)
신라말의 명승 진감선사의 높은 덕과 법력을 앙모하여 도를 닦은 옥천사를 쌍계사로 고친 뒤 정강왕 2년(887)년에 건립한 것으로 고운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썻으며, 승려 빈영이 새겼다. 고운 최치원의 사산비의 하나로 유명하다. 진감선사는 애장왕 5년(804년)에 입당하여 신감대사(神鑑大師) 아래에서 계를 받았고, 각지를 만행한 뒤 흥덕왕 5년(830년)에 귀국하여 역대의 왕에게 숭앙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옥천사에서 입적하였다. 선사의 업적은 선(禪)과 차(茶)와 범패(梵唄)를 선양한 것이다.
비의 높이는 3m 63cm, 탑신의 높이는 2m 2cm, 폭은 1m, 귀부와 이수는 화강암이고, 비신은 흑대리석이다. 현재 비신은 우측 상부에 크게 흠락된 부분이 있고, 또 균열이 상당히 심하다. 중앙에 높직한 비좌를 마련하였는데 4면에는 운문이 있고, 상면에는 비신에 맞게 구멍이 뚫어져 있다. 귀두는 짧고 추상적인 동물의 머리로 표현되어 신라 후기의 특징을 잘 보이고 있다. 이수는 양측을 비스듬히 자른 오각형으로 4면에 쟁주하는 용이 있고, 전면 중앙에 방형으로 깊이 판 제액이 마련되어 있으며 비문의 자격은 2.3cm, 자수는 2.323자이다.
사산비명 : 최치원 선생이 4군데 산에 세운 비석 글씨만수산 성주사 남혜화상 백월보광탑비, 초월산 대승복사지비, 회양산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이다.
범패 * 절에서 제를 지낼때 부르는 노래
* 가곡, 판소리와 함께 한국의 전통 3대 성악곡
* 불교 음악 전체를 총칭하기도 합니다
* 반드시 범패승만이 부르는 전문적인 음악입니다.
머릿돌 이수에는 진서로 해동고승 진감선사비라고 세겨져 있는데 왕명이 있어야 세길 수 있다고 한다.
쌍계사 구층석탑
이 탑은 고산스님이 인도성지 순례를 마치고 돌아올 때 스리랑카에서 직접 모셔온 석가여래 진신사리 삼과를 산내 국사암 후불탱화에서 출현한 부처님의 진신사리 이과와 전단나무 부처님 일위를 모셨다. 불기 2531년(서기 1987년)에 시공하여 불기 2534년(1990년) 3월 15일에 백창기 부부의발심으로 9층탑을 세우고 모셔져있다
쌍계사 일주문(경남 유형문화재 제 86호)
일주문은 속세를 떠나 부처의 세계로 들어서는 첫 관문으로, 항상 한결같은 마음으로 수도하고 교화하라는 뜻으로 세운 문이다. 양쪽에 하나씩의 기둥을 세워 지붕을 받치게 한다 하여 '일주문(日柱門)'이라 한다. 그러나 쌍계사 일주문은 보조기둥을 세워 일주문으로서의 성격을 잃어버렸다. 이 문은 1641년(인조 19)에 벽암스님이 지었다고 하며, 1977년 고산스님에 의해 중수되었다
쌍계사 일주문은 겹처마로 이루어진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이다. 처마를 받쳐주는 기둥머리의 장식은 역삼각형의 거대한 모습을 하면서도, 출목의 간격이 넓고 가늘어 섬세하고 화려한 느낌을 준다. 넓은 지붕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받침기둥(活柱)을 하지 않고, 대신 기둥을 전후에 보조기둥을 설치함으로써 지붕의 안전성을 유지하였다. 일주문으로서는 드물게 팔작지붕인데다가 기둥머리 장식의 부재가 가늘고 섬세하여 장식성이 강하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의 양식보다는 근대적 성격의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쌍계사 천왕문(경남 유형문화재 제 126호)
천왕문은 절 안으로 들어올 때 일주문과 금강문 다음으로 통과하는 세 번 째 문으로, 사천왕상을 모신 전각이다. 사천왕은 부처에 귀의하여 불법을 수호하고, 수도승과 불자들을 돕는 4명의 수호신이다. 수미산을 중심으로 동쪽은 지국천왕, 서쪽은 광목천왕, 남쪽은 증장천왕, 북쪽은 다문천왕이 다스린다. 수미산이 부처가 거처하는 이상의 세계이고 사찰이 수미산을 이 땅에 재현한 것이라면, 천왕문을 통과했다는 것은 이미 부처의 세계에 들어서게 되었다는 뜻이다.쌍계사 천왕문은 1704년(숙종 30)에 백봉스님이 창건하였고, 1825년(순조 25)과 1978년에 다시 중수되었다. 정만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건물로, 공포를 간략하게 처리하여 소박하고 단아한 느낌을 준다. 천왕문 안에 봉안되어 있는 사천왕상은 조성 기법이 뛰어나 천왕문의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고 있다.
금당으로 가는 돈오문입구에서
금당
쌍계사에는 법당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대웅전이고 다른 하나는 금당입니다. 금당은 중국불교의 6조이신 혜능스님의 탑비가 모셔진 곳입니다. 흔히들 우리가 쌍계사에 가면 진감국사 탑비(고운 최치원 글씨)와 대웅전만 보고 오는데 그에 못지 않게 아주 귀중한 금당이 있습니다. 금당의 위치는 절 마당에서 불일폭포 가는 첫머리에 위치 합니다. 평소에는 금당을 개방하지 않지만 특별한 일이 있을 시는 개방합니다. 우리가 흔히 육조단경이란 불교 경전을 많이 이야기하고 또 들어 왔습니다. 바로 이 육조단경이 우리불교의 대중불교화에 엄청난 기여를 한 경전입니다. 6조이신 혜능스님은 중국불교의 초조이신 달마의 禪佛敎를 더욱 대중불교화, 평등불교화 이루었습니다. 바로 이 금당에 혜능스님의 두상이(진신)이 탑비되어 있다고 전합니다. 쌍계사에 가시면 꼭 보시기 바랍니다.
현판은 추사 김정희선생의 글씨라고 합니다.
쌍계사 팔상전
팔상전에는 팔상전 영상회상도가 보물 925호로 지정 되어 있고, 팔상 8폭의 탱화는 보물 136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팔상전 영산 회상도는 석가 부처님께서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내용의 그림으로 높이 410M, 폭273M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사천왕상, 8대보살, 10대제자 등이 에워 싸고 있는 모습이다. 팔상8폭탱화는 1725년 순천 송광사 팔상도와 색채만 약간 다를 뿐 똑같아 동일본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며, 1728년 일선등 8명의 승려가 그렸다고 합니다.
쌍계사 국사암(國師菴)
산내 암자인 국사암은 삼법화상이 신라 성덕왕 722년(21년)에 건립하여 수도했던 곳이다. 그로부터 110년 정도의 세월이 경과했을 무렵 진감국사가 중건한 후 입적할 때가지 머물면서 국사암으로 불려지게 된 것이다. 입구의 진감선사가 심었다는 사방으로 뻗은 네 가지로 된 거목인 사천왕수가 특이하다. 선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가 살아 나무가 되었다는 사연이다.
국사암 아미타후불탱화는 주색 바탕의 화면에 황색선으로 도상을 묘사한 선묘불화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86호로 지정된 국사암의 얼굴이다. 1781년 제작된 이 탱화의 화면 상단 중앙에는 아미타여래좌상이 높은 연화좌대에 결가좌하고 그 아래쪽 좌우에는 팔대보살상이 시립하고 있으며, 그 위쪽에는 십대제자상이 좌우측에 각각 5구씩 배치되어 있다.
인법당의 오른쪽은 부엌과 주지실이고, 왼쪽은 칠성전과 명부전, 그리고 진영각이다. 작은 암자에 비해 굴뚝이 많은 것도 국사암의 특징이다. 인법당 뒤의 굴뚝은 참 후리후리한 멋쟁이. 얼핏 보면 탑의 모양을 본뜬 것 같다. 5층 높이로 쌓아 올린 기와장과 진흙의 조합이 매우 아름답고 암키와와 숫키와의 조화 등 전체적으로 구조가 뛰어나고 안정감이 보이는 걸작이다.
이 일대가 ‘화개(花開)’, 곧 ‘꽃이 피는’ 동네고 여기에다 금상첨화로 법계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으로 지덕(智德)이 높아 ‘국사(國師)’의 암자라는 이름을 간직하고 있다. 굴뚝은 곧 헐즉보리(歇卽菩提)라! 쉬는 것이 곧 깨달음을 나타냄으로. 특히 잘난 척하는 마음 내려 놓는 가장 좋은 방법은 뭐니뭐니해도 하심(下心)같다. ‘하심’이란 ‘나’라는 상(相)과 집착을 버리고 겸손한 자세로 돌아가는 일. 그러나 매 순간 하심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을 터이다.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려면 “연기사상과 하심하는 자세, 탐냄과 질투가 없다면 곧 일체 중생이 서로 해치지 않을 것”이라다.
월호스님이 계신 곳 천년고찰 국사암.............
국사암 입구엔 천년을 넘게 국사암을 지켜온 사천왕수가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네 가지가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고 하던데... 진감선사가 직접 심었다고 하니 천년이 훨씬 넘었을 것이다. 사천왕처럼 국사암을 지키고 서있다.
건물에 들어서면 아기자기한 ㄷ자 건물이 나온다. 거기에 부처님이 인자롭게 앉아있다. 약수한잔으로 목을 축여보길......시원다.
환학대
쌍계사에서 불일폭포 오르는 길목에 있는 환학대는 신라 말 고운 최치원 선생은 속세를 떠나 이상향(理想鄕)인 청학동을 다녔다고 하는 곳입니다. 이곳 환학대는 선생이 청학동을 찾아 학을 불러 타고 다녔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바위이다 .쌍계사에는 통일신라시대 당나라의 범패(불교음악의 일종)를 신라로 도입하여 대중화시킨 승려 진감선사를 기리는 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제47호)가 있는데, 선생이 이곳 환학대에서 그 비문을 지었다고 합니다
불일평전
쌍계사를 뒤로하고 1시간쯤 올라가면 1만 평 규모의 평전이 하나 나타난다. 그게 ‘불일평전’이다. 여기도 청학동이다. 쌍계사에서 불일평전 올라가는 중간쯤에는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고, ‘환학대’(喚鶴臺)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바위언덕이 있다. ‘학을 부르는 언덕’이라는 뜻이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말기의 최치원이 여기에서 학을 불렀다고 한다. 최치원이 환학대에서 학을 불러 타고 가야산 홍류동으로 날아가곤 했다는 전설이다.
산장에서 판매하는 메뉴
원두커피 3,000원, 일회용 커피 1,500원, 표고버섯차 4,000원, 매실차 3,000원, 우리밀라면 4,500원 사발면 2,500원
불일암에 오르다가 시장기를 달래는 우리밀 라면 한그릇에 피로를 싹 . . .
불일암 대웅전은 암자 뒤에 있다.
원래 불일암은 진감국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쌍계사를 짓기 전에 수도하던 암자 터가 아닌가 추정한다. 그만큼 혼자서 도를 닦는 터로는 이상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불일’(佛日)이라는 명칭이 붙게 된 계기는 고려 후기의 불일(佛日)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여기에서 수도한 인연 때문이라 한다.
물론 옛날에는 불일암에 터만 있었지, 암자는 없었다. 근래에 암자를 복원한 것이다. 불일암 마당에서 보면 오른쪽에 바가지처럼 둥그런 바위 봉우리가 하나 서 있다. 왼쪽을 보니 역시 바위 봉우리가 하나 뭉쳐서 터를 받쳐 주고 있다. 암자 스님에게 물으니 왼쪽의 봉우리는 청학봉(靑鶴峰)이고, 오른쪽의 봉우리는 백학봉(白鶴峰)이라고 한다. 암자를 좌우로 청학봉과 백학봉이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좌청룡, 우백호가 아니라 좌청학, 우백학인 셈이다. 암자의 마당에서 멀리 바라다 보이는 산봉우리들은 광양의 백운산 자락이다. 1,000m가 넘는 백운산의 봉우리들이 멀리서 이 터를 받쳐 주고 있다. 저 멀리 보이는 백운산은 나는 비학(飛鶴)이라고 한다. 청학, 백학, 비학이 모두 이 터를 옹위하고 있는 것이다. 풍수의 대가 청곡선생의 주장에 의하면 불일평전과 불일암이야말로 원조 청학동이라고 한다.
불일암 앞 마당에서 멀리 광양의 백운산을 마주 하고 . . .
불일암에서 보면 불일암 왼쪽의 봉우리는 청학봉, 오른쪽은 백학봉, 앞으로는 섬진강에서 올라온 하얀 순백색의 띠가 백운산을 감싸며 불일암을 둘러싸고 있다. 이 터가 바로 신선이 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폭포에 작별을 고하고 위쪽에 있는 불일암에 올라선다. 잡초 속에 주춧돌만이 나뒹굴고 있다.. 보조국사 지눌이 수양을 쌓았다는 불일암은 소실된 후 이런 터만 남았는데 ‘불일’이라는 명칭도 지눌이 이곳에서 입적했을 때 희종대사가 시호를 내린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비록 폐사가 되었지만 이곳에서 본 지리산 자락의 절경은 결코 잊지 못한다. 깊은 계곡의 속내가 한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과연 이곳에 앉아 계신 불상은 어떤 모습을 하고 계셨을까? 설굴암 본존불 모습은 아니었을까? 쌍계사에 들러 날렵한 대웅전 지붕도 보고, 진감선사 부도비도 만나고, 마애불의 할머니도 뵈었다. 쌍계사는 4계절이 아름다운 절집니다.
지리산의 도사들 사이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불일폭포 밑에는 호룡대(虎龍臺)라는 터가 있는데, 바위 절벽 속에 있어서 도를 닦기에 좋은 곳이라 한다. 반야봉 밑에 있는 금강대(金剛臺)는 개운조사가 공부했다는 전설이 있고, 영신대(靈神臺)는 기도하기에 아주 좋은 터라고 한다. 호룡대는 험한 바위 절벽 속에 숨어 있어 일반인의 눈에 전혀 안 뜨이는 지점이므로 숨어서 신선공부하기에 좋은 터라고 전해진다.
보살님 하산하는 길이십니까?. . .
회자정리 거자필반
쌍계사를 나와 칠불사로 향하기 직전 하산길에서 만난 도반님들
칠불사(七佛寺) 경남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1605 ☎ 055-883-1869
칠불사는 지리산 계곡에 자리 잡은 고찰로, 금관가야 김수로왕의 일곱 아들이 이곳에서 수도한 뒤 모두 성불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 숱한 선승들이 머물렀는데, 조신시대 서산대사를 비롯하여 부휴 선수, 백암 성총 등의 고승들이 주석하였고, 근세에서는 용성ㆍ석우ㆍ효봉ㆍ금오ㆍ서암ㆍ일타ㆍ청화 스님 등이 안거를 지낸 바 있다. 이로 인해 예로부터 금강산 마하연 선원과 함께 2대 선원으로 부르던 유서 깊은 참선도량이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한국 다도의 중흥조 초의선사가 머물며 차에 관한 명저 『다신전』을 짓기도 했다 선방인 아자방은 우리나라 온돌의 시초로, 한 번 때면 한 달 동안 온기가 지속될 정도로 교묘한 구조로 유명하다. 김왕광불(金王光佛), 왕상불(王相佛), 왕행불(王行佛), 왕향불(王香佛), 왕성불(王性佛), 왕공불(王空佛) 등 일곱 생불(生佛)이 출현했다 하여 칠불사라 불리운 이 절은 한 번 불을 때면 49일간 따뜻했다는 아자방(亞字房)으로 유명하다. 절 대부분이이 여순반란 사건 때 소실되어 최근 중창 불사가 한창인데 불자 화백 손연칠씨가 요즘 일곱 왕자의 전설을 벽화로 묘사하고 있다. 칠불사는 지리산의 중심봉인 반야봉(1,732m)의 남쪽 800m 고지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말 도선국사가 지은『옥룡자결』(玉龍子訣)에 의하면 지리산 칠불사는 와우형(臥牛形)의 명당으로, 제일의 양택이라고 했다. 임진란에 퇴락한 가람을 서산대사와 부휴대사가 중수하였다. 그 후 1800년에 큰 화재가 나서 보광전, 약사전, 미타전, 벽안당(亞字房), 칠불각, 설선당, 보설루, 요사 등 10여 동의 건물이 전소되었는데 대은율사와 금담율사에 의해 모두 복구되었다. 그러나 6·25전란으로 인해 1951년 1월경에 전소되었다. 27년간 폐허로 남아 있던 것을 제월통광(霽月通光) 스님이 1978년부터 15여년에 걸쳐 대웅전, 문수전, 아자방, 운상원, 설선당, 보설루, 원음각, 요사, 영지, 일주문 등을 복원 중창했고, 이 외에 선다원, 사적비, 다신탑비 등을 세웠다.
동국제일선원
지리산 칠불사는 아자방 선원과 운상선원이 있어 무수한 도승을 배출한 동국제일선원이다.아자방은 신라 효공왕 당시 담공(曇空)선사가 축조한 선원으로서, 방안 네 귀퉁이에 50cm씩 높은 곳은 좌선처이고 가운데 십자 모양의 낮은 곳은 경행처이다. 담공선사의 축조 당시에는 한번 불을 지피면 100일간 따뜻하였으므로 신비한 온돌방이라 하여 세계 건축사에 기록되었으며, 현재는 경남유형문화재 제144호로 지정되어 있다. 운상선원은 옥보대라고도 하는데, 장유보옥선사의 이름을 따서 옥보대라고 한다는 설과 거문고 전승자인 옥보고의 이름을 따랐다는 설이 있다. 현재는 운상선원을 대중 선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칠불사의 아자방과 운상선원에서 고려시대의 정명선사, 조선시대의 서산대사(1520-1604), 부휴대사(1543-1615), 초의선사(1786-1866), 이외에 백암, 무가, 인허, 월송선사 등 선승들이 주석하며 수선안거했다. 근현대에는 용성선사, 금오선사, 서암선사 등 큰스님들이 수선안거 했다. 칠불사 경내에는 임진란으로 인해 퇴락한 전각을 중수한 부휴 선수 대사의 부도탑비가 있다. 그리고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께서 임진란으로 퇴락한 칠불암을 중수하고 지은 칠불암개와낙성시(七佛庵盖瓦落成詩)가 있다.
대웅전의 천정화
오대산 상원사의 세조대왕과 문수보살이 칠불사 대웅전의 천정에도 . . .
석가모니불과 문수 보현보살
문수전에 모셔진 문수보살
칠불사 원음각
부처님의 음성을 원음(圓音)이라고 한다. 종소리는 부처님의 음성을 상징하기 때문에 종각을 원음각이라고도 한다. 지옥고를 받는 중생들이 종소리를 들으면 고통을 쉰다고 한다. 그러므로 “종소리를 들으면 번뇌가 끊어지고, 지옥을 깨뜨리고 삼계에서 벗어난다”는 게송이 있다.
문수기도 도량 문수전
지리산은 예로부터 문수보살이 일만 권속을 거느리고 상주하는 곳이다. 지리산이라는 이름도 문수보살의 갖춘 이름인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에서 ‘지(智)’자와 ‘리(利)’자를 각각 따온 것이다. 지리산은 상봉인 천왕봉과 주봉인 반야봉으로 연결되는데, 반야봉은 곧 문수보살의 대지혜를 상징한다. 이와 같이 지리산은 문수도량인데, 특히 칠불사는 생문수(生文殊) 도량으로서, 칠불사에서 참선을 하거나 기도를 하면 문수보살이 근기에 맞추어 화현하여 기도를 성취시켜 주고, 또한 공부인을 보살펴서 견성오도케 하는 영험있는 도량이다. 특히 칠불사에 문수보살이 화현하시어 기도를 성취시키고 공부인을 보살펴 견성오도케 하셨다는 말씀들이 많이 전한다. 그러므로 칠불사에서는 매월 음력 4일 문수재일을 기하여 특별히 문수보살께 공양 올리고 법회를 열어 법문을 한다. 또한 칠불사에서는 칠일 문수기도, 백일 문수기도, 천일 문수기도를 한다.
칠불사 아자방지(亞字房地) - 경남 유형문화재 제 144호
1세기경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그들의 외삼촌인 범승 장유보옥선사(長有寶玉禪師)를 따라 이 곳에 와서 수도한 지 2년만에 모두 성불하였으므로 칠불사(七佛寺)라 이름하였다. 그 후 신라 효공왕(897~911) 때 김해에서 온 담공선사(曇空禪師)가 선방인 벽안당 건물을 아자형으로 구들을 놓아 길이 약 8m의 이중 온동방을 축조하였는데, 그 방 모양이 아자(亞字)와 같아, 아자방이라 하였다. 초기에는 불을 때면 3개월 이상 따뜻했다고 한다. 1951년 소실되어, 초가로 복원하였다가 현재와 같이 신축하였다. 아자방(亞字房)은 스님들이 참선수행하는 선방이다. 벽안당(碧眼堂)이라고도 한다. 신라 효공왕 때 담공선사가 축조 하였는데, 방안 네 귀퉁이의 50cm씩 높은 곳은 좌선처이고, 가운데 십자 모양의 낮은 곳은 경행처이다. 축조 당시에는 한 번 불을 지피면 100일 동안 고루 따뜻하였으므로, 신비한 온돌방이라 하여 세계 건축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현재 경남유형문화재 제14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아자방에서 참선공부 할 때는 장좌불와(長坐不臥, 늘 앉아만 있고 눕지 않는 것), 일종식(一種食, 하루 巳時에 한 끼만 먹는 것), 묵언(言, 말하지 않는 것)의 세 가지 규칙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규칙을 지키면서 애써서 공부하였기 때문에 이 아자방에서 무수한 도승들이 배출되었다.그리고 아자방에 문수보살이 화현하여 스님들이 발심정진케 한 이야기가 여러 가지 전해 오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한다. 조선 중엽 어느 해 음력 10월 14일 동안거 결제를 하려고 하는데 어린 사미승이 걸망을 지고 조실스님을 찾아와 아자방에 방부를 들여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조실스님이 보아하니 나이가 어려 도저히 아자방에 방부를 받아줄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아자방에서 정진하는 데는 장좌불와, 일종식, 묵언의 세 가지 엄한 규칙이 있는데, 어린 사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힘겨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조실스님은 그 사미승에게 더 커서 오면 방부를 받아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 사미승이 “부처님 말씀에 생사가 호흡하는 사이에 있다고 하셨는데, 어찌 클 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했다. 조실스님은 매우 기특하게 여겨 방부를 받아 주셨다. 아자방에서 참선하는 대중들이 한방중이 되어 마구 졸면 그 사미승은 뒤로 벌렁 자빠져 꿍 소리를 내고, 그리고 땅을 치고 울면서 넋두리 하기를 “생사의 괴로움이 아니라면 왜 자고 싶은 잠도 못자고, 먹고 싶은 밥도 제대로 못먹고,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하는가”라고 했다. 그러면 졸던 스님들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정진하였다. 한 철 내내 이렇게 되풀이 하며 해제를 맞이하였다. 해제날 조실스님의 해제 법문이 끝나자 그 사미가 대중 앞에 나와 세 번 절을 하고 “조실스님께서 방부를 들여 주셔서 한 철 공부를 잘 하였습니다.”라고 했다. 그 말이 끝나자말자 그 사미는 온데간데 없었다. 그때야 비로소 대중 스님네들은 그 사미는 문수보살이 화현하여 나타나신줄 알고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더욱 발심정진 하였고 한다.칠불사에는 이 외에도 문수보살의 화현에 관한 말씀들이 많이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