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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다이제스트
| | | 어느 날 당신의 삶에 알 수 없는 고통이 찾아든다. 그것은 실체를 알 수 없지만, 점점 막막한 상태로 자신을 몰고 나간다. 짜증이 나고, 무엇에도 신경이 곤두서고, 공연히 가족들에게 화풀이를 해댄다.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고립되어 가고 알 수 없는 공포의 예감은 현실이 된다. "뭔가 몸에 큰 변화가 오고 있다는 걸 예감했습니다. 왼쪽 귀가 점점 그 청력을 잃어가고, 코를 풀 때마다 코피가 나고, 늘 두통에 시달렸습니다. 그렇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병원은 가기가 싫었습니다. 무서워하던 것이 현실이 될까봐, 혹시나 하는 마음이 실제가 될까봐 더욱 그랬습니다." 김종환 씨가 앓았던 병은 이름도 생소한 비인강암. 비인강암이란 콧속의 뒤쪽부분에 있는 공간인 비인강 안에서 암세포가 발견되는 것을 말한다. 비인강암은 비인강의 깊은 곳에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증상들이 늦게 나타난다. 일단 증상이 나타나면 대부분 초기를 넘긴 상태라 조기에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회피하고 회피하다 초기에 발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좋은 병 비인강암. 그러나 김종환 씨는 끝까지 자신의 상태를 회피했다. "귓속이 점점 멍해져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조차 힘들어질 지경이 되자, 이비인후과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는 귀에 기구를 넣고 작은 홀을 만들어 끊임없이 귀에 고인 이물질을 빼냈습니다. 물론 집사람은 계속 큰 병원에 갈 것을 고집하고, 건강과 관련된 책이면 모두 사다가 읽어보라고 저에게 안겼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당시 모든 것이 싫었습니다. 귀찮고, 화나고, 점점 성격은 불같아지기만 했죠." 오랜 시간을 임시방편적인 조치만 취하다가 큰 병원을 찾게 된 것은 97년 8월 무렵. 결국 고통을 참지 못한 김종환 씨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기 때문에 그마저도 가능한 일이었다. "고통스럽더라도 그렇게, 그렇게 삶을 견뎌내는 저를 보며 아내의 슬픔은 극에 달했을 겁니다. 결론이 어떻게 나든 제대로 된 검사를 받아봤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을 텐데, 정작 당사자인 제가 계속 거부를 했으니까요.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아내에게 많이 미안합니다." 그러나 병원에서도 처음엔 그것이 암임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고통이 너무 심하다는 김종환 씨의 하소연 이후에야 내시경 검사를 받게 되었고, 암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한다.
방사선 치료가 가져온 상흔들 "암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까 고통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상태가 심각해져서 그랬던 건지, 정신적인 문제였는지 어쨌든 정말 견딜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우선, 숨을 제대로 쉴 수조차 없었고, 머리는 쪼개지는 듯 아파 정신이 다 멍했습니다. 코에서는 항상 코피가 흘러나오고, 그런 상태니 무엇을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참 경솔한 말이지만 딱 죽어버리면 속이 편하겠더라구요." 그냥 그 순간, 모든 것이 정지해 버리고 모든 것이 끝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김종환 씨였지만 결국 방사선 치료에 매달리게 되었다. 처음 방사선 치료를 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이미 자포자기 상태였고, 식음을 전폐하고 링겔만 맞았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히려 암세포가 점점 커졌다고 한다. 나중에는 목까지 암세포가 자라나 물조차도 넘길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다행히 방사선 치료 15회 정도를 넘기자 암세포가 점점 줄어드는 기미가 보였고, 40회의 방사선 치료 후 항암치료를 권유받았지만 김종환 씨는 이를 거부하고 병원 문을 나왔다. "방사선 치료를 하면서 상처로 목에 진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느 정도 암의 크기가 줄어들고, 좀 살만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병원의 하얀 벽이 너무나 싫어졌습니다. 이젠 내 의지로 이 병을 견뎌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했고 부천에 있던 집을 팔고 경남 창영으로 삶의 터전을 바꾸었습니다." 인터뷰 중간, 중간에도 많은 물을 마시는 김종환 씨는 방사선 치료의 후유증으로 침이 나오지 않는 구강 건조증을 앓고 있었다. 말 그대로 입이 바싹바싹 타는 삶의 연속인 셈이다. 그러나 그는 침착했고, 조리있게 말을 잘했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김종환 씨는 첫인상만 보더라도 그리 호락호락한 성격의 소유자는 아닐 거라는 짐작을 할 수 있다. 두 발을 땅에 딛고 서서 자신의 삶을 최대한 성실히, 열심히 살아내는 한 가정 가장의 모범답안. 그리고 도저히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삶의 이지러짐에 대해서는 답을 찾아내기 위해 모든 가능성을 타진해 보는 치열함. 그에게는 그런 요소들이 복합적인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투병생활을 하면서 김종환 씨는 전문가 못지 않은 건강정보를 수집했다. 건강서적을 닥치는 대로 찾아서 읽었고, 유명한 식이요법의 방법들을 모두 찾아서 시행해 보았다. "사실 암환자에게는 절대 완치라는 말은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병이 나았다고 하더라도 결코 병이 생기기 전 그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철저한 식이요법을 해야 하고, 의식적으로 운동을 해야 하고, 절제된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김종환 씨이기에 암환자들이 ?현미식이 좋습니까?"라는 질문을 할 때마다 어리둥절해진다고. "환자 자신이 스스로의 병에 대한 정보를 찾아다니지 않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결국 암이라는 병을 물리치는 것은 환자 자신의 의지입니다. 투병을 하면서 만난 많은 사람들 중 암을 극복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주관과 의지가 뚜렷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스스로 찾아다니지 않고 간단한 식이요법 수칙조차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다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뭐 앞으로는 이런 것도 국가에서 일정부분 같이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이 수집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 옳은 정보인지를 검증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입니다. 국가가 그런 부분을 맡아줘야 합니다." 비인강암이라는 암을 발견하고 6년. 일절 육류는 입에 대지 않는다는 김종환 씨의 철저한 건강수칙 두 가지는 채소 많이 섭취하기, 냉온욕 시행하기이다. 채소는 가능하면 전혀 요리되지 않은 날 것의 상태로 섭취한다는 김종환 씨. "현미밥과 생채소 위주의 식단은 소화력의 증대를 가져왔습니다. 또한 냉온욕도 정말 권하고 싶은 방법입니다. 병 때문에 항상 두통에 시달리는 저조차도 냉탕과 온탕을 번갈아 각각 1분, 2분씩 머무르는 목욕법을 시행하자 혈액순환이 좋아져 두통이 사라지는 효과를 보았습니다." 급하고, 심각했던 성격이 투병을 통해 오히려 느긋하고, 유쾌해졌다는 김종환 씨. 투병을 통해 남은 생이 더 풍요로워졌다는 그에게 힘든 삶이란, 고통스러운 삶이란 자기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