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구만 초상 南九萬 肖像
작가모름 보물 제 1484호
18세기
축 비단에 채색
162.8x88.5 ㎝
국립중앙박물관
남구만南九萬(1629~1711)은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의령宜寧이며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 또는 미재美齋이다. 송준길宋浚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효종 7년(1684)에 문과에 급제한 이후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유배등의 정치적 부침을 겪기도 하였다. 1684년에 우의정, 이듬해에 좌의정, 1687녕에는 영의정에까지 올랐는데 이즈음 송시열의 훈척勳戚 비호를 공격하는 소장파를 주도해 소론의 영수로 지목되었다. 1707녕에 관직에서 물러난 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남구만 초상>의 오른쪽 위에는“領議政致仕藥泉南先生眞 門人領議政崔錫鼎贊 영의정치사약천남선생진 문인영의정최석정찬”이라고 쓰여 있고 화면 왼쪽 위에는 대사성大司成 최창대崔昌大(1669~1720)가 쓴 긴 찬문이 쓰여 있다. 이를 토대로 하여 이 상이 남구만의 초상임을 알 수 있다. 최석정崔錫鼎(1646~1715)은 소론의 영수로 1701년에 처음 영의정이 된 후 여러 번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최창대는 최석정의 아들로 1711년에 대사성이 되었고 같은 해에 개성 부유수가 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아 파직당했다고 한다. 최석정과 최창대의 관직명을 참고하여 보면, 최창대가 대사성으로 있었던 때는 1711년뿐이고 이후에는 더 높은 관직을 역임하였으므로 이 작품은 1711년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초상은 관복을 입고 교의에 앉은 전신교의좌상으로 얼굴이 정면상으로 묘사되었다는 점이 이채롭다. 오사모에 녹포단령 錄袍團領을 착용하고 쌍학문 흉배와 서대犀帶를 착용하고 있다. 관복은 비수肥膄의 변화가 없는 예리한 먹선으로 윤곽선을 그렸는데, 날카로운 각이 있는 선묘이다. 관복의 운보문雲寶紋은 옷 주름과 상관없이 그려져 평면적으로 보이며, 전체적으로 채색이 얇고 문양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의습 선 주변에는 선염 처리가 없어 평면적이지만 전체 윤곽선이 풍부하게 표현되어 옷 자체는 풍성한 입체감이 느껴진다. 흉배의 운문에는 니금으로 윤곽선을 둘렀고, 수를 놓은 듯한 사실감을 자아내도록 정교하게 표현하였다. 교의는 검은색을 균일한 색조로 칠하여 다소 평면적으로 보이며, 족좌대는 아래 변이 넓은 평행사변형에 가까운 모양으로 공간적 깊이감을 전달하려는 시도가 보인다. 족좌대 위의 돗자리는 민무늬이며 그 위에 호피가 깔려 있다. 두 발은 흑피혜를 신고 팔자형으로 벌렸으나 반 이상이 관복에 가리어 있다. 족좌대 아래에는 돗자리나 채전이 보이지 않는다.
이 초상에서 가장 특이한 요소는 얼굴 표현에 있다. 정면으로 그려진 얼굴은 윤곽선이 거의 없어 몰골 기법에 가까워 보이며, 얼굴 전체적으로 미묘한 선염을 구사하며 높낮이를 드러내는 수법을 사용하였다. 정면상이란 점에서 새로우며 얼굴의 입체감을 드러내기 위하여 선묘의 효과를 극소화하고 선염 처리를 활용한 점도 이채롭다. 정면관과 호피가 깔린 교의좌상의 형식, 서양화풍의 수법을 반영한 표현 기법은 17세기말 18세기 초 중국 초상화의 영향으로 도입된 수법이다. 이 작품은 18세기 초 외래의 수법을 도입하여 형성된 조선 초상의 새로운 유형과 기법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남구만 초상의 흉배부분
남구만 초상의 하단부분
글: 조인수
출처 : 한국의 초상화- 역사 속의 인물과 조우하다.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