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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 신민당 창당
[어제의 오늘]1967년 신민당 창당
ㆍ역대 ‘최고의 야당’
2002년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은 ‘노풍’을 점화시킨 노무현 후보가 ‘대세론’을 업은 이인제 후보를 꺾음으로써 대박을 터뜨렸다. 2007년 한나라당의 대선 경선에서도 이명박·박근혜라는 상품성 높은 두 후보가 치열한 접전을 벌여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두 경선의 승자인 노무현·이명박 후보는 본선에서도 승리해 각각 16대, 17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정당의 대통령후보 경선이 비상한 관심을 끌었던 최초의 사례는 바로 1971년 제1야당이었던 신민당의 전당대회였다. 김영삼·김대중이라는 걸출한 두 스타 정치인이 격돌한 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은 1차 선거에서 패배했으나 이철승의 지원을 얻은 2차 선거에서 역전승을 거두고 대통령 후보가 됐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역전승이 연출되고, 패자가 승자에게 깨끗이 승복한 이 전당대회는 신민당의 역사에서 하이라이트였다.
양김(兩金)이 몸을 담았던 신민당은 흔히 한국 정당사에서 ‘최고의 야당’으로 꼽힌다. 박정희의 공화당·유신체제의 대척점에 서서 13년 동안 투쟁한 유일한 야당이었기 때문이다. 5·16 쿠데타 이후 금지됐던 정치활동이 63년 재개됐으나 야당은 윤보선의 민주당 구파와 박순천의 신파로 대립하는 바람에 각각 민정당과 민주당으로 쪼개져 있었다. 두 당은 65년 5월 민중당으로 합당해 야권통합에 성공하는 듯했으나 한일조약 비준반대투쟁 과정에서 강경파인 윤보선이 탈당해 신한당을 창당하면서 다시 한 번 분열됐다.
여당인 공화당은 행정조직과 당 조직을 전면 재편해 67년 6대 대통령선거와 7대 총선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민중당과 신한당은 각각 윤보선과 유진오를 대통령후보로 내세웠으나 현직 대통령에 맞서기 위해서는 야권의 후보단일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결국 두 야당은 67년 2월7일 윤보선을 대통령후보, 유진오를 당수로 하는 신민당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대선과 총선에서 잇따라 패배함으로써 분열의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유신체제가 기승을 부리던 78년 12월 총선에서 신민당은 공화당보다 1.1% 높은 득표율을 기록해 전성기를 구가하기도 했으나 80년 10월 전두환 신군부가 공포한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자동해산됐다.
손동우 사회에디터 /경향신문 2009-02-06 18:01:3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1966 - 박정희 대통령 동남아 순방 등정
박정희 대통령이 1966년 2월 7일부터 18일까지 12일간 말레이시아를 비롯, 태국과 자유중국 등 동남아 3개국을 공식 순방하고 상대국간의 우의증진과 경제협력문제 등을 논의했다. 박 대통령은 2월 9일 첫 순방국인 말레이시아의 국회의사당 귀빈실에서 라만 수상과 공식회담을 하고 월남사태와 관련된 자유 아시아의 공동방위문제와 양국의 경제협력문제 등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이어 박대통령은 4일간의 태국방문 중 타놈수상과 한 정상회담에서 태국은 통한에 대한 한국정부정책을 지지했다. 또 월남을 지지할 필요성을 재확인하고 문화교류에 관해서도 협의했다. 박 대통령은 마지막 순방국인 자유중국에서 장개석총통을 만나 자유아시아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긴밀한 협조를 통해 유대강화에 최선의 길을 모색할 것에 합의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조선
1965 - 미국, 베트남 '북폭' 개시
미국, 베트남 북폭 개시
베트콩이 플레이쿠에 있는 미군 기지를 공격해 8명의 병사를 사살하고 126명에게 부상을 입히자, 존슨 미대통령이 이에 대한 대응으로 1965년 2월 7일 밤 북베트남에 대한 보복 폭격을 명령했다. 3일 뒤 베트콩은 퀴논에 있는 다른 미군 군사시설을 공격했고, 존슨은 하노이와 남베트남 내 베트콩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에 대한 더 많은 공중폭격을 명령했다. 3월 6일 해군 2개 대대 병력이 포위공격을 받고 있던 다낭市를 구하기 위해 다낭 근처의 해안 지대에 상륙했다. 6월이 되자 미군 5만명이 남베트남 정부군과 함께 싸우기 위해 도착했다. 소규모 부대로 편성된 북베트남군은 캄보디아 국경 서쪽의 호치민루트를 경유해 남베트남에 도착한 후 베트콩과 연합작전을 펴기 시작했다. 당시 사이공 정부는 공군 소장 구옌 카오 키가 이끌었으나, 그는 급속히 악화되어가는 군대 상황을 막을 수 없었다. [ns1965yforch]
[년도별 각종 10대 뉴스] /Shutterstock Stock Images 2008.10.25 (12:37:29)
http://www.subkorea.com/xe/54875
1964 - 한국-케냐 국교 수립
한국은 1963년 8월 15일 주(駐)케냐 대한민국총영사관을 개설하고 12월 12일 케냐 승인 후 1964년 2월 7일 양국간 외교관계 수립과 함께 총영사관을 대사관으로 승격하였다. 1989년 12월에는 주한 케냐명예총영사관이 개설되었다.
케냐는 비동맹주의 온건국가로서 독립 이후 친한적 정책을 추구하여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한 직접 대화, 남북한 UN(United Nations:국제연합) 동시가입, 북한의 IAEA(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국제원자력기구) 핵사찰 수용 등 한국의 기본입장을 지지해왔다.
그러나 비동맹국가라는 입장 때문에 UN 등에서 한국에 대해 소극적으로 동조 입장을 취해오다가 1982년 8월 대통령 전두환의 케냐 방문, 1983년 10월 미얀마 아웅산묘소폭파암살사건 등을 계기로 적극적인 지지 입장으로 선회하였다. 또한 1990년 9월 대통령 다니엘 아랍 모이(Daniel Arap Moi)의 방한으로 양국의 협력관계가 더욱 강화되었다.
(케냐 대한민국대사관) /네이버
1964 - 영국 그룹 비틀스 첫 미국 방문
[오늘의 역사] 64.02.07 비틀즈 미국 상륙. 비틀즈 열풍 시작
1964년 2월 7일 낮 1시 30분, 미국 케네디 공항에서 영국의 4인조 그룹 비틀즈가 모습을 드러냈다. 20세기 청춘문화의 상징이 된 비틀스가 미국 정벌에 나선 것이다.
공항에는 비틀즈를 보기위해 3,000여 명의 소녀들이 몰렸으며 9일 밤 비틀즈가 출연한 TV 프로그램 '에드 설리번쇼'는 7,300만 명의 미국인이 시청할 정도로 대성황을 이뤘다.
포크송과 트위스트에 식상해 하고 케네디 암살 후 새로운 영웅을 원하던 미국은 비틀즈에 열광했다. 영국 가수는 미국에서 성공 할 수 없다는 징크스를 깨며 2월 첫 주에 전미 히트 차트 1위에 오른 비틀즈는 4월 4일의 빌보드 차트 랭킹에서는 1위부터 5위까지 모두 차지할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미국에 상륙한 1964년에만 18주동안 전미 차트 1위를 독점한 비틀즈는 미국 싱글 레코드 판매의 60%를 차지하고 자신들의 헤어스타일, 인형, 기타 등을 유행시켰다.
비틀즈는 1956년 고등학생인 존 레넌이 '퀴리멘'이라는 록그룹을 조직하면서 시작됐다. 존 레넌은 곧 폴 매카트니(1957년), 조지 해리슨(1958년)을 합류시켜 영국 리버풀과 독일 함부르크를 오가며 명성을 쌓았고, 마지막으로 링고 스타가 합류해 멤버가 갖춰졌다. 19~22살의 더벅머리 4인조는 1962년 EMI사와 계약을 맺고 비틀스라는 이름으로 데뷔 싱글 'Love Me Do'를 발표하며 등장했다.
1970년 4월 10일 해체하기까지 9년간 공식적으로 211곡을 발표하며 전 세계의 팬들을 열광과 흥분으로 몰아간 비틀즈는 해체와 함께 전설로 남게 됐다. 앨범 판매량은 20세기 최대 음반판매 기록인 1억 6,000만장이었다.
/문화일보 11.02.07
1960 - 제4대 대통령 선거전 돌입
역사속 오늘[1960년 2월 7일] 제4대 대통령 선거전 돌입
1960년 오늘 3.15 부정선거로 유명한 제4대 대통령선거전이 시작됐다.
이틀 전 자유당은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민의원 의장을 각각 정부통령 후보로 등록했다.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자유당 유세에 6만여 명의 시민이 모였다.
연사들은 자유당이 관권선거를 조장한다는 민주당의 주장을 중상모략이라고 비난했다.
민주당도 이에 맞서 조병옥 박사와 장면 최고위원을 정・부통령 후보로 추대했다.
그러나 일주일 뒤 조병옥 후보가 미국에서 병사함에 따라 민주당은 장면 후보의 단독출마로 선거를 치렀다.
/YTN 2011-02-07 월
http://www.ytn.co.kr/article/article_view.php?key=201102052343074097&s_mcd=0422&s_hcd=
1959 - 남아프리카 연방의 총리 다니엘 F. 말란(Malan, Daniel F.) 사망
말란 [Malan, Daniel François, 1874.5.22~1959.2.7]
[역사 속의 인물] 남아공 인종차별의 기수, 다니엘 F. 말란
1994년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폐지했다. 1948년 다니엘 프랑수아 말란 수상이 공식 채택한 지 46년 만이었다. 말란은 '아파르트헤이트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었다. 1948년부터 1954년까지 6년간 수상으로 집권하면서 아파르트헤이트의 근간이 되는 정책들을 시행했다. 백인과 흑인 간 혼인을 금지하고 인종별 거주 지역을 따로 정하는 집단지구법 등을 만들었다.
말란은 17세기에 종교 박해를 피해 남아공으로 이주한 프랑스 위그노(신교도)의 후손이었다. 1874년에 케이프타운 근처에서 태어난 그는 네덜란드계 보어인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해 개신교 성직자가 됐다. 그의 청년 시절부터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용어가 이미 사용되고 있었으며 뿌리가 되는 정책들이 시행되고 있었다. 흑인의 백인 구역 출입을 제한하고 이동할 때 통행증을 발급받도록 하는 통행법 등이 그것이다.
말란은 이런 환경 속에서 '아프리카너(남아공 태생 백인) 국수주의자'이자 백인 우월주의자가 됐고 아프리칸스(보어인 공용어)의 열렬한 지지자로 활동했다. 40세인 1914년에 정계에 입문, 국민당의 지도자로 큰 후 남아공 역사에 오점을 남기는 길을 걸어갔다. 수상직에서 물러난 지 5년 후인 1959년 오늘, 85세를 일기로 숨졌다.
김지석 논설위원 /매일신문 2013년 02월 07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388&yy=2013
1948 - 미군정 시기 2·7 사건 발생
2·7 사건은 1948년 2월 7일에 훗날의 대한민국 영역에서 일어난 파업 및 봉기 사건이다. 비판하는 측에서는 2·7 파업이나 2·7 폭동, 옹호하는 측에서는 2·7 구국투쟁으로 부른다.
개요
1948년 5월로 예정된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을 앞두고 미군정 지역에서 단독 선거가 실시되어 단독 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반대하여 총선에 반대하는 흐름이 형성되었다. 남조선로동당이 이같은 여론을 선도했고, 이 사건 이틀 후인 1948년 2월 9일 백범 김구가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한다〉라는 제목으로 단선단정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는 등 이승만 계열 외에는 이에 동조하는 파벌이 적지 않았다.
미군정에 의해 불법화된 남로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총선 일정이 발표되자 단선단정을 반대하며 2월 7일을 기해 전국적인 대규모 파업을 일으켰고, 이 파업 중 일부가 과격화 되어 경찰과 물리적 충돌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두 달 뒤에 큰 인명 피해를 가져온 제주 4·3 항쟁의 전초전이 되었다. 제주 4·3 항쟁과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등 더 규모와 파급 효과가 큰 사건이 연이어 터졌기 때문에, 대한민국 현대사 학계에서는 상대적으로 연구가 깊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개
1948년 2월 5일에 군정장관 A.L. 러치가 미군 철수설을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한 이틀 후에 발생했다. 남로당의 단선반대 구국투쟁위원회가 지휘한 노동자 파업을 중심으로, 전기 노동자들이 송전을 중단하고 철도 노동자들은 철도 운행을 중지하며 통신 노동자들은 통신 설비를 파괴하는 방식을 통해 미군정을 압박하며 이루어졌다. 이에 호응한 농민들의 가두 시위와 학생들의 동맹휴학이 더해졌다. 이들의 주장들은 다음과같다.
1. 조선의 분할 침략 계획을 실시하는 유엔 한국 위원단을 반대한다.
2. 남조선의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한다.
3. 양군 동시 철퇴로 조선 통일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우리 조선 인민에게 맡기라.
4. 국제 제국주의 앞잡이 이승만, 김성수 등 친일 반동파를 타도하라.
경상남도 밀양군에서는 2월 7일 이른 아침에 농민들이 지서 두 곳을 습격하여 경찰이 발포로 맞서면서 10여 명이 사살되고 100여 명이 검거되었다. 합천군에서는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농민들이 지서를 공격하여 역시 100여 명이 검거되었다.
이와 유사한 충돌이 전국에 걸쳐서 일어나면 2월 20일까지 2주 동안 진행되었다. 약 전체 참가 인원은 약 200만 명이며, 이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은 100여 명, 투옥된 사람은 8,500 명 정도로 추산된다.
의의 및 영향
2·7 사건은 자연발생적이며 우발적인 요소가 많았던 대구 10·1 사건과 달리 사전에 충분히 계획되고 준비되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미군정 지배 하에 있던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시에 사건에 돌입할 수 있었다. '단선단정 반대'라는 이해와 공감이 쉬운 구호와 함께 투쟁의 목표 또한 분명히 통일되어 있었다.
2·7 사건을 계기로 미군정 지역에서 미국에 반대하는 세력은 지구전 태세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는 각 지역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조선인민유격대의 초보적 형태를 구성하면서 결국 제주 4·3 사건이라는 무장 봉기로 이어졌다. /위키백과
1928 - 호주 비행사 힝클러, 영국-호주 단독비행 (2.7~2.22)
역사속 오늘[1928년 2월 7일] 힝클러, 영국-호주 단독비행
1928년 오늘,
호주의 비행사 버트 힝클러(Bert Hinkler)가 사상 처음으로 영국 런던에서 호주로 가는 단독(solo)비행을 시작했다.
힝클러는 영국을 이륙한 지 15일 만에 호주 포트다윈에 도착한다.
힝클러는 앞서 린드버그에 이어 대서양을 두번째로 단독(solo)횡단하는 기록도 세웠다.
힝클러는 1933년 다시 영국-호주 간 단독비행을 시도하다 알프스산에 추락해 숨졌다.
/YTN 2011-02-07 월
http://www.ytn.co.kr/article/article_view.php?key=201102052345333810&s_mcd=0422&s_hcd=
He flew the first solo flight between England and Australia, departing England on 7 February 1928 and arriving in Darwin on 22 February 1928 and back in his hometown of Bundaberg, Queensland on 27 February 1928. This reduced the England-Australia record from 28 days to just under 15½ days. The aircraft used was an Avro Avian, registration G-EBOV. He is quoted as telling Australian Prime Minister Stanley Bruce at this time You know, one day, people will fly by night and use the daylight for sightseeing. (In 1998 Australian Lang Kidby recreated this flight in a similar 1927 Avro Avian). After visiting the principal cities of Australia and returning to England, he was awarded the Air Cross for the finest aerial exploit of the year.
http://en.wikipedia.org/wiki/Bert_Hinkler
- Vladimir Komarov, Konstantin Feoktistov, Boris Yegorov
1926 - 소련의 우주선 설계자, 우주비행사 페옥티스토프(Feoktistov, Konstantin) 출생
페옥티스토프 [Feoktistov, Konstantin Petrovich, 1926.2.7~ ]
세계 최초로 여러 명을 태운 보스호트 1호(1964) 우주비행에 V. M. 코마로프, B. B. 예고로프와 함께 참여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보로네슈가 점령당했을 당시 16세였던 그는 정찰병으로 근무했다. 그는 독일군에게 체포된 뒤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총알이 목을 관통했으나 그는 죽지 않고 죽은 체했다가 시체 매장 구덩이에서 탈출했다. 나중에 모스크바의 바우만 고등기술학교에 입학했으며, 한때는 공장의 기사로도 근무했다. 1955년 박사학위와 동등한 자격을 얻은 뒤부터 소련의 우주계획에 참여하여 우주선과 우주장비를 설계했다.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1957. 10. 4)한 뒤 노동 적색기 훈장(Order of the Red Banner of Labor)을 받았으며, 1961년 4월 12일 Y.A. 가가린이 유인 우주비행에 처음으로 성공한 뒤 이 훈장을 다시 받았다. 1964년 10월 12~13일 보스호트 1호에 타고 이전의 우주비행사들이 할 수 없었던 여러 과학 실험 및 관측을 수행했다. 보스호트 1호는 최초로 1명 이상 태운 우주선이었을 뿐만 아니라 최초로 전문가(의사와 공학자)들을 태웠고 최초로 지상에 연착륙(軟着陸)했다. 그후 공학자로서 샬류트 우주정거장의 설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브리태니커
1906 - 중국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 출생
푸이 [溥儀, 1906.2.7~1967.10.17]
중국 청나라 마지막 황제.
광서제(光緖帝)의 동생 순친왕(醇親王) 재풍(載灃)의 아들. 1908년 3세로 아이신줴뤄가[愛新覺羅家]의 제12대 황제가 되어 선통제(宣統帝)라 하였으나,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1912년에 퇴위하였다. 1924년 펑위샹[馮玉祥]에게 쫓겨 베이징[北京]을 빠져나와 일본 공사관(公使館)에 피하였으며, 나중에 톈진[天津]의 일본 조계(租界)에 한거(閑居)하였다. 만주사변(滿洲事變) 때 일본군에 의해 몰래 끌려나와 1932년 만주국을 집정(執政), 1934년 왕이 되었다. 1935년과 1940년에 일본을 방문하였으며, 1945년에 만주국이 붕괴됨으로써 퇴위하였다.
일본으로 가는 도중에 소련군에게 체포되어 하바로프스크에 억류되었으며, 1946년 극동국제군사재판 때 증인으로 출두하였다. 1950년 공산정권하의 중국에 송환되어 수감되었다가, 1959년 특사로 풀려나와 식물원 정원사로 일했다. 1964년 인민정치협상회의(人民政治協商會議) 전국위원(全國委員)이 되었으며, 저서 《나의 전반생(前半生)》을 출판하였다.
1967년 10월 16일 사망 후 베이징 시내의 팔보산(八寶山) 공동묘지의 인민납골당에 유해가 안치되었다가, 1980년 5월 팔보산 혁명공묘(革命公墓)로 옮겨졌고, 1995년 1월 26일 베이징 남서쪽 허베이성[河北省] 이현[易縣]에 있는 청나라 황릉(皇陵)으로 이장되었다. 이로써 사망한 지 28년 만에 청나라 황제로 복권되었다. 한편, 그의 저서 《나의 전반생》이 감독 B.베르톨루치의《마지막 황제》로 영화화되어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네이버
1905 - 스웨덴의 생리학자 울프 폰 오일러(Euler, Ulf von) 출생
오일러 [Euler(-Chelpin), Ulf (Svante) von, 1905.2.7~1983.3.9]
스웨덴의 생리학자.
1970년 영국의 생물리학자인 버나드 카츠 경과 미국의 생화학자인 줄리어스 액설로드와 함께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는데, 이 3명의 학자는 모두 신경충격의 메커니즘을 독립적으로 연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오일러는 1929년의 노벨상 수상자인 한스 폰 오일러 켈핀의 아들이다. 스톡홀름에 있는 카롤린스카 연구소를 졸업한 후 오일러는 1930~71년 이 연구소의 교수로 재직했다. 1953년 생리학·의학 분야의 노벨 위원회에 참가했고 1965~75년 노벨 재단의 책임자였다. 오일러의 가장 뛰어난 업적은 교감신경계의 중요한 신경전달물질(충격전달체)인 노르에피네프린을 알아낸 것이다. 또한 노르에피네프린이 신경섬유 자체 안에 저장되어 있음을 밝혔다. 이러한 발견들은 액설로드가 신경활동에서 효소의 역할을 밝히는 데 기초가 되었다. 노벨상 이외에도 오일러는 고혈압 및 동맥경화증과 관련된 연구로 스웨덴 북극성훈장과 스투퍼상을 받았다. /브리태니커
1885 - 미국의 소설가 싱클레어 루이스(Lewis, Sinclair) 출생
루이스 [Lewis, (Harry) Sinclair, 1885.2.7~1951.1.10]
미국의 소설가.
1885년 2월 7일 미네소타주(州) 소크센터에서 출생하였다. 예일대학교 재학 중 U.싱클레어를 중심으로 시작된 실험적 사회주의 공동생활체인 헬리컨 홈 콜로니(Helicon Home Colony)에 참가하였다. 졸업 후 편집 조수, 파나마에서는 운하공사장·건축공사장·신문사 등에서 일하면서 각지를 전전하다가 드디어 최초의 장편소설 《우리 회사 사원 렌 Our Mr.Wrenn》(1914)을 발표하여, 사실주의 수법·유머·풍자 등을 개성적인 재능으로 잘 표현함으로써 알려졌다. 이어서 3편 정도의 장편소설을 발표한 후 이상주의 기질의 젊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중서부의 시골 특유의 인습적이고 독선적인 사고방식 및 규격화된 미국생활을 풍자한 문제작 《메인 스트리트 Main Street》(1920)를 발표하여 일약 유명해졌다.
이후 중서부의 전형적인 도시를 무대로 인습적인 분위기에 한때 반역하지만 결국은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던 토지·가옥 중개업자를 묘사한 《배빗 Babbitt》(1922), 주위의 상업주의와 싸워가면서 끝까지 과학정신으로 살려고 하는 세균학자를 다루어 퓰리처상을 받은(루이스 자신은 상을 거절하였다) 《애로스미스 Arrowsmith》(1925), 종교계의 위선을 폭로한 《엘머 갠트리 Elmer Gantry》(1927), 어느 자동차 제조업자의 전통과 예술에의 각성을 소재로 한 《도즈워스 Dodsworth》(1929) 등의 역작을 잇달아 발표하여 1930년 미국작가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 후의 주요작품에는 여류 사회사업가를 주인공으로 한 《앤 비커즈 Ann Vickers》(1933), 호텔업자를 호의적으로 그린 《예술작품》(1934), 파시즘의 위협에 대하여 경고를 던진 《그것은 이곳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1935), 중년의 재판관과 그의 젊은 아내를 중심으로 부부생활의 문제를 취급한 《캐스 팀벌렌 Cass Timberlane》(1945), 흑인문제를 다룬 《피의 선언 Kingsblood Royal》(1947), 《단편집》(1935) 등이 있고, 사후(死後)에 《서간집》(1952) 등이 출판되었다. 루이스는 미국생활은 물질적 ·정신적으로 모두 규격화되어 있다고 하여 일상용어를 교묘하게 활용하며 미국생활의 이모저모를 풍자적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동시에 미국인의 형태를 희화적(戱畵的)으로 그려냄으로써 새로운 미국문학을 힘차게 대변하였다. /네이버
1883 - 미국의 피아니스트, 작곡가 유비 블레이크(Blake, Eubie) 출생
블레이크 [Blake, Eubie, 1883.2.7~1983.2.12]
본명은 James Hubert Blake.
미국의 피아니스트, 래그타임·쇼 음악 작곡가.
블레이크는 6세 때 가정용 펌프 오르간을 연주하여 건반악기에 천부적 재능이 있음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10대 시절 카페와 유흥가에서 피아노를 연주했고 1899년 그의 최초의 래그타임 음악인 〈아프리카의 소리 Sounds of Africa〉를 연주했고, 그것을 1919년 〈찰스턴 래그 Charleston Rag〉라는 제목으로 음반을 냈다. 1915년 작사가 겸 가수인 노블 시슬리와 만나 오랫동안 함께 활동했다. 이들은 분장 없이 무대에 섰던 첫 흑인 연예인이기도 했다. 이들의 쇼 〈셔플 얼롱 Shuffle Along〉(1912)은 흑인들이 작곡·제작·감독한 최초의 뮤지컬 가운데 하나였다. 이 뮤지컬에는 블레이크의 노래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I'm Just Wild About Harry〉가 나오며, 훗날 유명해진 폴 로베슨, 플로렌스 밀스, 조세핀 베이커가 출연했다. 1925년 시슬리와 결별한 후 작사가 앤디 라자프와 팀을 이루어 〈1930년의 검은 새 Blackbirds of 1930〉를 만들었다. 이 작품에는 유명한 노래 〈Memories of You〉가 포함되어 있다. 이후 블레이크는 계속 연예인으로서의 경력을 쌓으며 피아노 곡도 만들고 음반 녹음도 하며, 연주회에도 출연했다. 세련되고 섬세하며 위트 넘치는 음악으로 활동하는 동안 내내 인기를 얻었다. 그는 63세에 작곡을 공부하여 자신이 만든 노래를 악보로 옮기고 새로운 노래를 작곡하기 위해 은퇴했다. 그러나 1969년 다시 복귀하여 새 앨범을 제작했다. 이후 계속 연주활동을 했으며 1982년 6월 청중을 위한 마지막 연주회를 열었다. 그의 노래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 〈유비 Eubie〉가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어(1978) 최고의 명성을 얻었으며 1981년 자유의 메달 훈장을 받았다. 1973년 로버트 킴벌과 윌리엄 발콤에 의해 사진으로 된 자서전 〈시슬리와 블레이크의 추억 Reminiscing with Sissle and Blake〉이 출판되었다. /브리태니커
1867 - 미국의 아동문학작가 로라 잉걸스 와일더(Wilder, Laura Ingalls) 출생
와일더 [Wilder, Laura Ingalls, 1867.2.7∼1957.1.10]
미국의 아동소설가.
미국 중서부지방에서 보낸 자신의 어린시절을 토대로 한 작품을 썼다. 그녀는 12년 동안 〈미주리 루럴리스트 Missouri Ruralist〉지를 편집하다가 딸의 성화에 못이겨 글을 쓰기 시작했다. 와일더의 작품은 1800년대 중반의 개척자들을 다루면서 남자들의 동요와 여자들의 인내심에 초점을 맞추는 동시에, 개척자들이 보인 미국 정신과 자립정신을 찬양하고 있다. 이 작품들은 〈커다란 숲속의 작은 집 Little House in the Big Woods〉(1932)·〈소년 농부 Farmer Boy〉(1933)·〈초원의 집 Little House on the Prairie〉(1935)·〈플럼 강변에서 On the Banks of Plum Creek〉(1937)·〈실버레이크 기슭에서 By the Shores of Silver Lake〉(1939)·〈긴 겨울 The Long Winter〉(1940)·〈초원의 작은 마을 Little Town on the Prairie〉(1941)·〈행복한 황금기 These Happy Golden Years〉(1943) 등으로 엮어져 나왔다. 1970년대 중반에는 그녀의 작품들을 토대로 한 텔레비전 연속극 〈초원의 집〉이 방영되어 인기를 모 았다. /브리태니커
1862 - 미국의 건축가 버나드 메이벡(Maybeck, Bernard) 출생
메이벡 [Maybeck, Bernard (Ralph), 1862.2.7~1957.10.3]
미국의 건축가.
그가 1889년부터 캘리포니아에 지은 건물들은 20세기초에 유행했던 건축양식의 다양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파리에 있는 에콜 데 보자르에서 공부했고(1880~86), 잠시 뉴욕 시와 미주리 주에 있는 캔자스시티에서 일한 뒤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1894년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교 건축제도담당 강사가 되었고 1898년~1903년 이 대학 최초의 건축학교수를 역임했다. 이 대학에 있는 건물인 허스트 홀(1899, 1922년의 화재로 소실)을 설계하면서 처음으로 합판재로 된 아치를 도입했다. 또한 내민 목재 코니스를 두른 벽돌건물인 타운 가운 클럽(1899)과 스페인 미션 양식을 자유로이 구사한 남자교수단 클럽(1900) 건물을 설계했다. 공공건물로는 고딕 양식을 자유로이 사용한 버클리의 ' 크리스천사이언스 모교회(母敎會)'(1910)와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파나마 퍼시픽 박람회 때 설계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미술궁(1915)이 있다. 그가 마지막으로 맡은 대형 작품은 1938년부터 건설하기 시작한 일리노이 주 엘사에 있는 프린시피아대학 캠퍼스이다.
그가 설계한 저택에서는 높이가 강조되었고, 목조가옥의 지붕은 대개 경사가 급하다. 1907년부터 철근 콘크리트 주택을 짓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외부 마감재용으로, 성긴 천에 콘크리트를 입힌 가볍고 싸고 내화성이 강한 버블 스톤을 실험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브리태니커
- Peru 10 Intis (Banknote)
1833 - 페루의 소설가 리카르도 팔마(Palma, Ricardo) 출생
팔마 [Palma, Ricardo, 1833.2.7~1919.10.6]
페루의 작가.
스페인계 중남미 문학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집의 하나인 식민지 페루의 전설집으로 유명하다. 20세 때 페루 해군에 들어갔지만, 1860년 정치적 긴급 사태 때문에 칠레로 도피해야만 했다. 칠레에서는 언론계에 종사했으며, 6년 뒤 리마로 귀국하여 스페인에 저항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또한 태평양전쟁(1881)에도 참여했고, 칠레가 페루를 점령했을 때는 칠레 군대가 유명한 페루 국립도서관을 악랄하게 파괴한 것에 용감하게 항의했다. 전쟁이 끝난 뒤, 팔마는 국립도서관을 재건하는 일을 맡았고 죽을 때까지 국립도서관장으로 일했다. 1887년에 페루 아카데미를 창설했다.
팔마는 젊은시절에 가벼운 운문과 낭만적인 희곡을 쓰고 빅토르 위고의 작품을 번역하는 일로 문학생활을 시작하여 〈리마 종교재판 연대기 Anales de la inquisición de Lima〉(1863)에 이어 여러 권의 시집을 발표했다. 그는 주로 솔직담백한 문체로 쓴 〈페루의 전통 Tradiciones peruanas〉(1872)으로 명성을 쌓았다. 이 책에 수록된 짧은 산문에는 식민지 페루의 허식과 음모에 대한 사실과 공상이 뒤섞여 있다. 그가 모은 자료는 민간 설화, 전설, 연장자들에 대한 통쾌한 험담, 국립도서관에서 주워 모은 역사적 단편 등이다. 이 총서의 처음 6권은 1872~83년에 출판되었고, 이어서 〈낡은 옷 Ropa vieja〉(1889)·〈좀먹은 옷 Ropa apolillada〉(1891)·〈나의 마지막 전통 Mis últimas tradiciones〉(1906)·〈나의 마지막 전통의 부록 Apéndice a mis últimas tradiciones〉(1910)이 출판되었다. /브리태니커
1817 - 미국의 노예해방운동가 프레더릭 더글러스(Douglass, Frederick) 출생
더글러스 [Douglass, Frederick, 1817.2.7~1895.2.20]
미국의 노예폐지운동가.
도망 노예 출신으로 연설 솜씨와 문필력이 뛰어나 미국 노예폐지운동의 최전선에 나섰다. 미국 정부 고위직에 임명된 최초의 흑인 시민이며, 19세기 인권운동의 뛰어난 지도자였다.
그는 노예인 어머니와 백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며 어머니와도 아주 어려서 생이별한 뒤 메릴랜드 주의 농장에서 할머니와 살았다. 8세 되던 해에 볼티모어로 보내져서 휴 올드 집안의 하인으로 지냈는데, 올드 부인은 주(州) 법을 어겨가면서 그에게 읽는 법을 가르쳤다. 그러나 올드 씨가 배우는 것은 노예 신분에 걸맞지 않다고 하는 바람에 길거리에서 어린 학생들의 도움으로 몰래 공부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주인이 죽자 16세에 원래의 농장으로 되돌아가 농장 일꾼으로 일하게 되었고, 얼마 후 다시 볼티모어에서 뱃사람이 되었다. 1833년 다른 3명의 노예와 함께 탈출을 시도했지만 실행에 옮기기 전에 발각되었다. 5년 뒤에 뉴욕 시로, 그리고 매사추세츠 주의 뉴베드퍼드로 탈출, 그곳에서 3년 동안 노동자 생활을 했다. 이때 노예 사냥꾼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더글러스로 성을 바꿨다. 1841년 매사추세츠 주 낸터킷에서 열린 노예제 반대 집회에서 더글러스는 노예로서의 체험과 느낌을 말하도록 초청받았다. 그때 한 연설이 매우 통렬하고 감동적이어서 그는 매사추세츠 노예제반대협회의 운동가로 활약하게 되었다. 더글러스는 그때부터 줄곧 야유와 조롱, 모욕과 폭력에 조금도 굽히지 않고 노예폐지운동에 헌신했다.
그렇게 말을 잘하는 사람이 노예였을 리가 없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자 이에 대한 반박으로 자서전을 써야겠다고 생각하여 1845년에 쓴 자서전이 1882년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생애와 시대 Life and Times of Frederick Douglass〉라는 제호로 개정·보완되어 다시 출판되었다. 이 자서전은 미국 문학의 고전이 되었을 뿐 아니라 노예의 입장에서 노예제를 묘사한 중요한 자료이다. 그는 작품에서 전 주인의 이름과 거처를 밝혔기 때문에 다시 잡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 2년 동안 영국과 아일랜드로 강연 여행을 떠났다. 해외 여행에서는 새로 사귄 많은 친구들을 노예폐지운동에 참여시켜 아메리카와 유럽 사이에 인도주의적 개혁의 유대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이 여행에서 많은 기금을 모아 돌아와서 자유를 되찾았고, 1847~60년에는 직접 뉴욕 주 로체스터에서 노예제 반대 신문 〈노스 스타 North Star〉(후에 〈프레더릭 더글러스 신문〉으로 개칭)을 창간했다. 노예폐지운동의 지도자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은 독자적인 흑인 신문의 필요성에 대해 반대했고 도덕적 권고를 정치적 행동으로 보완하려는 더글러스의 입장에 대해서도 의견을 달리했다. 그리하여 1851년 이후로 더글러스는 제임스 G. 버니가 지도하는 운동 그룹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폭력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특히 1859년 10월 버지니아 주 하퍼스페리 무력기습에 반대했다.
남북전쟁 기간(1861~65)에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자문위원이 되었는데, 예전의 노예들을 북군으로 무장시켜 노예제에 반대해서 직접적으로 대결하는 전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부의 주들을 미합중국으로 재통합하던 기간(1865~77)에는 해방 노예의 완전한 시민권 획득을 위해 투쟁했으며 여성의 권익 운동을 강력히 지원했다. 산토도밍고 위원회의 간사보(1871)로 일하기도 했으며, 재통합기 이후에는 워싱턴 D. C.에서 연방재판소 집행관(1877~81)과 공훈기록관(1881~86)으로 공직생활을 했다. 마지막에는 아이티 주재 미국 공사 겸 총영사(1889~91)로 임명되었다. /브리태니커
1812 - 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스(Dickens, Charles) 출생
디킨스 [Dickens, Charles (John Huffam), 1812.2.7~1870.6.9]
[책갈피 속의 오늘]1812년 찰스 디킨스 출생
“그 어떤 충고도, 격려도, 위로도, 도움도 나에게 줄 사람은 떠오르지 않는다. 신이시여. 나를 구하소서!”
20대에 이미 셰익스피어의 명성에 비견됐던 찰스 디킨스. 그의 10대는 불우했다. 철저히 밑바닥 인생을 훑었다.
디킨스는 채무관계로 감옥에 갇힌 아버지를 대신해 열두 살 때에 공장에 나갔다. 런던의 구두약 공장에서 하루 10시간씩 육체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19세기 전반 번영을 구가하던 영국 대도시의 또 다른 얼굴이었던 빈곤과 노동착취의 그늘은 그의 소년기와 그대로 겹쳐진다.
런던의 뒷골목에서 ‘구두를 닦으면서 희망을 닦았다’는 그에게 소설은 구원의 빛이었다.
빈민가에 버려진 아이들을 그린 ‘올리버 트위스트’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수전노의 대명사이자 성탄절의 상징인 스크루지 영감을 세상에 내보낸다.
소설의 역사에서 디킨스만큼 인기를 누린 작가는 흔치 않다. 빅토리아 여왕에서부터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두루두루 사랑을 받았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그의 작품이 출간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는 위대하기도 하고 대중적이기도 하다거나, 대중적임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것이 아니라 대중적이기 때문에 위대한 극소수의 작가에 속한다.”(아널드 하우저)
그의 소설은 그대로 ‘고발(告發)’이었다. 시대의 빈곤과 부패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다. 그러나 그는 늘 따스한 시선을 간직했고 유머를 잃지 않았다.
귀족의 속물근성에 대한 풍자는 익살맞다 못해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하다. “디킨스의 소설을 읽을 때는 경련이 이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 얼음장 같은 가슴을 갖고 있어야 한다.”(오스카 와일드)
악(惡) 중에서도 가장 흔한 인간의 이기심이 어떻게 전파되는지를, 얼마나 음울하게 거인으로 자라나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던 디킨스. 그는 빅토리아 시대의 진정한 문호였다.
“그의 대담하고 왕성한 창작력에서 셰익스피어를 느끼고, 언어 자체가 주제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조이스를 연상한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동아닷컴 2004-02-06 19:01:00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40206/8027299/1
- 'Napoléon on the field of Eylau' by Antoine-Jean Gros
1807 - 나폴레옹의 아일라우 전투 (2.7~8)
아일라우 전투 [Battle of Eylau]
나폴레옹 전쟁중 러시아의 제3차 대(對) 프랑스 동맹 때 벌어진 전투(1807. 2. 7~8).
쾨니히스베르크(지금의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서 남쪽으로 37㎞ 떨어진 도시 아일라우(지금의 러시아 바그라티오노프스크) 근처에서 벌어졌으며 나폴레옹이 처음으로 고전한 전투이다. 러시아군이 기습적인 겨울 공세를 벌인 직후 레온티 레온티예비치 베니히센이 이끄는 7만 6,000명의 러시아 - 프로이센 동맹군은 나폴레옹군 7만 4,000명과 맞섰다. 첫번째 전투는 2월 7일 갑자기 벌어져 양쪽이 각각 사상자 4,000명 정도를 냈을 뿐 성과없이 끝났다. 2월 8일 아침 나폴레옹은 병사 4만 1,000명만 거느린 채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지연작전을 쓰면서 러시아군 6만 3,000명과 싸웠다. 나폴레옹은 기병대의 공격으로 러시아군의 진격을 막으려 했으나 눈보라로 앞이 안 보여 제1차 공격은 엄청난 손실을 입고 실패했다. 한편 러시아군 3개 대열이 프랑스군의 취약한 방어선으로 진격해오자 프랑스군은 심각한 위험에 빠졌다. 나폴레옹은 조아생 뮈라가 이끄는 기병 예비병력 1만 700명에게 진격해오는 대열과 러시아군 중심부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 기병대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것으로 꼽힐 만한 돌격전을 벌여 러시아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2개 대열로 나누어 러시아 전열의 중앙을 돌파한 뒤 러시아군 후미에서 단일 대열로 재편성하여 전열을 가다듬은 러시아군을 향해 다시 쳐들어갔다. 이 공격으로 나폴레옹은 중앙부대를 지키고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다음 6시간 동안 양쪽 모두 증원군을 받아 오후 10시경 서로 지칠 때까지 전투를 계속했다. 양쪽은 각각 병사 1만 8,000~2만 5,000명 가량을 잃었고 밤이 되자 베니히센은 퇴각했다. /브리태니커
1804 - 미국의 농기구 제작자 존 디어(Deere, John) 출생
디어 [Deere, John, 1804.2.7~1886.5.17]
미국의 농기구 제작자.
17세 때 대장장이의 견습공으로 들어가서 나중에 자신의 대장간을 세웠다. 1837년 일리노이 주 그랜드디투어에서 앤드러스와 함께 강철쟁기를 개발·제조하여 크게 성공했다. 1847년 가게의 소유권을 앤드러스에게 팔고 일리노이 주 몰린으로 이주하여 1868년 디어사(Deere & Company)를 설립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이 회사의 사장으로 지냈다. /브리태니커
- 'Education', etching
1801 - 폴란드 태생의 독일 화가, 판화가 호도비에츠키(Chodowiecki, Daniel) 사망
호도비에츠키 [Chodowiecki, Daniel Nikolaus, 1726.10.16~1801.2.7]
폴란드 태생의 독일 풍속화가, 판화가.
독일 중산층의 생활 및 풍습을 그린 작품들이 빼어나다. 주로 독학으로 미술을 배웠으며 그뢰즈의 영향을 보여주는 감상적인 그림인 〈장 칼라스와 가족의 이별 The Parting of Jean Calas From His Family〉(1767, 베를린 달렘 박물관)로 처음 인기를 얻었다. 1758년에는 판화를 시작하여 7년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새긴 연작 판화와 유명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History of the Life of Jesus Christ〉를 제작했다. 프로이센에서는 그의 작품의 도판이나 비네트를 이용하여 많은 책을 출간했다. 2,000여 점에 이르는 그의 에칭은 쾌적한 실내의 18세기 생활상을 보여준다. 그 자신은 부인했지만 때때로 윌리엄 호가스의 작품과 비교되었는데, 호도비에츠키의 작품은 호가스의 신랄함 대신 온화한 유머가 특징이었다. 1797년 베를린 아카데미의 원장이 되었다. /브리태니커
1477 - 영국의 인문주의자, 정치가, 대법관 토머스 모어(More, Thomas) 출생
모어 [More, Thomas, 1477.2.7~1535.7.6]
토머스 모어(영어:Thomas More, 1478년2월 7일 - 1535년6월 6일)는 잉글랜드 왕국 시기의 법률가, 저술가, 사상가, 정치가이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인이다. 그는 평생 스콜라주의적 인문주의자로서 덕망이 높았으며, 1529년부터 1532년까지 대법관을 포함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모어는 1516년에 자신이 저술한 책에서 묘사한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지닌 상상의 섬나라에 주었던 이름인 유토피아(Utopia)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그는 주로 헨리 8세가 주장한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령을 받아들일 것을 거부한 죄로 정치 경력이 끝남과 동시에 반역죄로 처형당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가 죽은 후 400년이 지난 1935년, 교황 비오 11세는 토머스 모어를 시성하였으며, 이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정치가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가톨릭교회의 성인력에서 토머스 모어의 축일은 존 피셔와 같은 날인 6월 22일이다. 모어는 1980년 영국 성공회의 성인력에도 그의 이름이 올라갔다. 그는 100명의 위대한 영국인 투표 조사에서 37표를 받았다.
토머스 모어는 종교개혁을 부정하고 적극적으로 탄압하였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를 통한 평화와 사회정의를 주장하였다.
생애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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