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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좌담회어서 참고자료
간효팔번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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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효팔번초(諫曉八幡抄) - 어서사전 26쪽
1280년(홍안3년(弘安3年)) 12월, 日蓮대성인이 59세의 때, 미노부(身延)에서 술작하신 어서. 진필(眞筆)은 일련정종총본산다이세키사(日蓮正宗總本山 大石寺)에 있음.
이 해에 몽고국(蒙古國)은 이미 일본침공(日本侵攻)의 준비를 끝내고 있었으며, 막부(幕府)는 방비(防備)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11월에는 쓰루가오카팔번궁(鶴岡八幡宮)이 소각(燒却)되어, 민심의 동요가 격심했다.
본초(本抄)는 이와 같은 절박한 상황 속에서, 팔번대보살(八幡大菩薩)은 법화경설법의 좌(座)에서 법화경의 행자수호를 기청(起請)했음에도, 행자(行者)를 수호하지 않았기 때문에 범천(梵天)ㆍ제석(帝釋) 등의 책망을 받게 된다고, 팔번대보살(八幡大菩薩)을 간효(諫曉)하고 있다.
다음에 日蓮대성인이 제종(諸宗)을 파절하는 것은 일체중생을 구제하기 위함이며, 팔번대보살(八幡大菩薩)은 법화경의 행자를 수호해야만 한다고 되어 있다.
끝으로 정법(正法)ㆍ상법(像法)시대를 통하여 서(西)로부터 건너온 불교가, 말법(末法)에는 동(東)으로부터 서(西)로 되돌아간다고 말씀하시고, 제자에게 삼대비법(三大秘法)의 홍통(弘通)을 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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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포를 위한 절호의 기회!
자, 불연을 맺는 대화에 도전하자
<본문> 어서 585쪽 1행~3행
지금 니치렌(日蓮)은 지난 건장(建長) 오년(五年) 계축(癸丑) 四月二十八日부터 금년(今年) 홍안(弘安) 삼년(三年) 태세(太歲) 경진(庚辰) 十二月에 이르기까지 이십팔년간(二十八年間) 또한 타사(他事)는 없었다,
다만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칠자(七字) 오자(五字)를 일본국(日本國)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입에 넣으려고 힘쓸 뿐이로다.
이는 즉(卽) 모(母)가 적자(赤子)의 입에 젖을 넣으려고 힘쓰는 자비(慈悲)이니라.
‘절복’이 바로 자비의표현
첫째 포인트는, 니치렌 대성인의 민중구제 정신을 계승하는 곳은 창가학회 이외에는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매일 독송하는 법화경 수량품에 ‘매자작시념(每自作是念)’이라고 있습니다. ‘항상 내 스스로 생각을 한다.’ 라고 읽으며, 항상 마음의 오저에 있는 일념(一念)을 가리킵니다.
부처의 ‘매자작시념’은 일체중생의 성불(成佛)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일에 대해 항상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대성인이 본초에서 “이십팔년간 또한 타사(他事)도 없다.” 라고 말씀하신 그 심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입종(立宗)이래,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는 광선유포라는 대성인의 오저(奧底)의 일념, 이것을 현대에 소생시킨 사람이 바로 창가 삼대의 사제(師弟)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곤란한 상황에 있을 지라도, 오로지 사람들을 위해 행동하는 우리들 학회원의 삶의 방식 속에 그 정신이 맥맥이 흘러 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소설 ‘신․인간혁명’에서 “우리도 오저의 일념에 항상 무엇이 있는가. 무엇을 생각하고 바라고 기원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거기에 자신의 경애가 여실히 나타납니다.
어본불 니치렌대성인의 ‘구원의 제자’인 우리는 대성인의 대원(大願)인 광선유포를, 모든 민중의 행복을 내 일념, 내 사명으로 정합시다. 그리고 날마다 구원의 맹세로 되돌아가 광포를 바라고 기원하며 행동하는 한 사람 한사람이기 바랍니다.
나도 ‘매일이 새해 첫날이다’라고 정하고 청신한 기원으로 올해도 법우(法友)를 위해, 세계평화를 위해 힘껏 동분서주할 결심입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입종이래의 대성인의 마음을 올곧게 계승한 우리들 학회원의 큰 사명을 다시 한 번 확인해 가고자합니다.
둘째 포인트는, 우리들의 대화확대의 투쟁은 어디까지나 자비의 절복행이라는 점입니다.
본초에서 대성인은 묘법홍통의 정신은 어머니가 어린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자비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머니라면, 자식의 성장을 위해서는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육성할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무럭무럭 훌륭하게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우인에게 불법(佛法)에 대해 말할 때에도, 그와 똑같은 마음가짐을 가져야합니다.
설령 상대방이 바로 이해해 주지 않을지라도 최선을 다해 계속 관계를 지속해 간다. 함께 행복한 인생을 걸어갈 수 있도록 계속 기원해 간다.
이 자비의 절복행을 관철해 가는 그 자체가 바로 광선유포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절복은 어디까지나 부처의 자비행의 실천입니다. 만인을 존경하는 자비의 마음이 근간에 있어야만 절복행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존경이 없으면 절복은 진전되지 않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절복을 끝까지 실천해온 사람이 강하게 실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처럼 절복의 근간은 만인을 존경하는 자비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자비를 끓어오르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제목을 진지하게 불러 자신의 흉중에 있는 용기를 분기시켜야합니다.
자비와 용기로 홍교를 확대하며 기세 좋게 전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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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7월호 법련
<배경과 대의>
이 어서는 1280년 12월, 니치렌 대성인이 59세 때 미노부에서 쓰셨습니다. 어서의 끝에 “각기 나의 제자 등은 면려하고 면려하실지어다”(어서 589쪽)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 모든 제자에게 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간효팔번초〉라는 제호(題號)에는 “법화경의 행자를 수호한다는 맹세를 이행하지 않은 팔번대보살을 충고하고 타이른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 어서를 쓰셨을 당시는 두 번째 몽고내습의 위기가 닥쳐서 나라 전체가 떠들썩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가마쿠라 막부의 수호신인 팔번대보살을 모셔 놓은 쓰루가오카 팔번궁(八幡宮)이 불타버린 사건이 일어나 사람들의 불안은 더욱더 심해졌습니다.
이 어서에서는 팔번대보살이 제천선신의 맹세를 태만하고 법화경의 행자를 수호하지 않으며, 법화경의 적을 벌하지 않아서 범천·제석에게 벌을 받는 것이라고 엄하게 간효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간효에 대한 일부 제자들의 비판에 답해 “진에(瞋恚)는 선악(善惡)에 통하는 것이니라”(어서 584쪽)고 말씀하시고, 제천선신일지라도 불법(佛法)의 적을 편들었을 때 이를 엄하게 질책하는 것은, 경문(經文)의 말씀대로 선(善)의 행위라고 가르치십니다.
이어서 대난을 각오하고 모든 중생을 근본적인 고뇌에서 구제하는 자비(慈悲)의 절복을 철저히 이행한 법화경 행자의 마음을 밝히시고, 보전(寶殿)을 태우고 국토를 떠난 팔번대보살도 법화경 행자가 있는 곳에 산다고 말씀하십니다.
끝으로 달이 서에서 동으로 향하듯이 석존의 불법(佛法)이 인도에서 일본으로 전해 왔으나, 말법에는 태양이 동에서 서로 향하듯이 대성인이 건립하신 대법(大法)이 일본에서 전 세계로 넓혀진다는 확신을 밝히셨습니다.
<포인트 강의>
절복이야말로 최고의 자비
니치렌 대성인은 1253년 4월 28일 입종(立宗)이래, 광선유포의 서원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셨습니다.
그렇게 싸우시는 동안 법화경에서 설한 대로 삼류의 강적에게 마쓰바가야쓰 법난, 이즈유죄, 고마쓰바라 법난, 다쓰노구치 법난, 사도유죄 등 생명을 위협하는 많은 대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대성인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법화경 여래수량품 제16에 ‘매자작시념(每自作是念: 항상 스스로 이 생각을 일으킨다)’이라고 있습니다. 부처는 중생을 어떻게 하면 무상(無上)의 도(道)에 들게 하여 신속하게 성불시킬 수 있는가, 오직 이것만 원한다는 것입니다.
대성인은 말법의 법화경 행자로서 언제나 광선유포의 서원을 관철해 왔으므로 이 어서에서 “28년간 또한 타사(他事)는 없었다”(어서 585쪽)라고 말씀하시고, 다른 어서에서도 오랜 세월에 걸친 분투를 회상하시며 “한시 반시(半時)도 마음 편한 일이 없노라”(어서 1514쪽), “니치렌은 한 번도 물러설 마음이 없었노라”(어서 1224쪽)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어서에서 광선유포는 어머니가 갓난아기에게 젖을 먹여 키우는 것과 같이 깊은 자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대성인이 말씀하시는 자비는 단순히 상대방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성인은 “자(慈) 없이 거짓 친(親)함은 즉 이는 그의 원(怨)이요, 그를 위해 악(惡)을 제거함은 즉 이는 그의 어버이로다”(어서 139쪽)라는 장안대사(章安大師)의 말을 여러 번 인용하시고, 자비의 마음 없이 거짓으로 친한 척 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원수이고, 악을 제거하고 바로잡는 것이 진정한 자비라고 가르치십니다.
즉 최고의 자비행은 상대방의 생명에서 악을 타파하고 선(善)을 깨닫게 하는 절복행입니다.
이케다 SGI회장은 “사람의 생명을 파괴하는 무명(無明)을 단절하고 그 사람을 근본적으로 구제하는 것이 진정한 자비입니다. 신심과 자비에서 일어나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행동이 절복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007년 ‘전진·승리의 해’를 맞이하여 결연한 서원(誓願)을 세워 절복과 홍교에 도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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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신년근행회 어서’)
※ ‘간효팔번초’를 배독하며
마사키 마사아키 창가학회 이사장
니치렌 불법은 ‘태양의 불법’
스스로 빛나서 지역을 비추자
“인간을 위한 종교인가. 종교를 위한 인간인가.”
이케다(池田) SGI 회장이 일관해서 주장하는 종교관입니다.
‘간효팔번초’에서, 대성인은 가마쿠라 막부의 수호신이었던 팔번대보살에게 “무슨 이유로 법화수호의 맹세를 지키지 않는가.”하고 크게 꾸짖으셨습니다. 무엇을 위해 신불(神佛)이, 불교가 존재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입니다.
신불은 믿고, 우러르고 의지하는 것이라는 상식에서 보면 매우 동떨어진 태도입니다.
‘불법동점(佛法東漸)’, 이것은 불전(佛典)에서 설하는 ‘오오백세’의 과정임과 동시에 불교가 ‘형해화(形骸化)’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석존(釋尊)의 가르침이 숨 쉬고 모든 사람이 깨달음을 연 ‘해탈견고(解脫堅固)’의 시대, 점차적으로 부처가 신격화하고 절대화해서 수행을 하지만 깨달음을 여는 일이나 부처가 되는 일은 극히 어렵다는 ‘선정견고(禪定堅固)’의 시대, 각종 논서(論書)와 경전을 편찬하지만 성불이라는 목표에서는 멀리 떨어져 수행의 실태도 잃은 ‘독송다문견고(讀誦多聞堅固)’ 시대, 최종적으로 수행의 실태도 구도심도 잃고 다만 사탑의 불보살에 의지하는 ‘다조탑사견고(多調塔寺堅固)’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인간을 위한 종교에서 종교를 위한 인간’으로 변천하는 것이고, 말법의 민중의 처지에서 보면 형해화한 종교는 ‘달’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태양은 스스로 불타며 빛을 발합니다.
달은 태양이라는 ‘외부’의 빛을 받을 뿐이고 스스로 빛나지 않습니다. 어두운 밤을 아침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태양뿐입니다.
니치렌대성인(日蓮大聖人)은 사람들이 불성(佛性)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무명(無明)’에 지배되어 종교의 권위에 조아리는 ‘백법은몰(白法隱沒)’의 시대에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어본존(御本尊)’이라는 대법(大法)을 확립하고, 바로 ‘불법서환(佛法西環)’을 선언하셨습니다.
니치렌불법은 “여아등무이(如我等無異)라 해서 석존과 같은 부처로 손쉽게 되느니라.”(어서 1443쪽)입니다.
‘부처의 권위’라는 외부의 빛에 의지해 빛을 받을 뿐, 자신의 빛이 없는 ‘달의 불법’이 아닙니다. 오히려 ‘손쉽게’ 부처가 된 후에 ‘지니는 것’을 중요시합니다.
‘지닌다’란 자신이 빛의 근원이 되어 계속 빛나면서 주위사람들을 비추고 지역과 사회에 계속 비추는 것입니다.
“구름 사이로 / 달을 보려고 / 원하는 / 아시아 민중에게 / 빛을 보내리라.” 라는 은사의 유명(遺命)을 이케다 SGI 회장은 사신홍법으로 실현하셨습니다. 제자인 우리도 또한 자신이 빛나는 존재가 되어 이 위업을 계속해서 이루어 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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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광신문 : 99/10/15 366호)
※ ‘간효팔번초’에서 배운다
유연의 천지로부터 정의의 파동을
10월의 상쾌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온다. ‘지금이야말로’라는 결의로 우호확대(友好擴大)를 위해 불법대화(佛法對話)에 힘쓰는 황금의 나날을 만들어 가도록 하자.
이달의 배독어서 <간효팔번초(諫曉八幡抄)>는 1280년(홍안3년) 12월에 쓰신 것이다. 당시는 몽고(蒙古)의 내습으로부터 6년이 되었고 재차 내습의 위기(危機)속에 사회는 소연(騷然)해져 있었다.
막부(幕府)는 방비를 단단히 하기 위해 하카다(博多)만(灣)연안(沿岸)에 연(延)20km에 이르는 방루(防壘)를 쌓고 막부에 직속돼있는 인사를 경비(警備)임무를 맡도록 파견. 또 조정에서는 모든 사원에 대해 기원할 것을 명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막부와 일본의 수호신(守護神)을 받든 가마쿠라(鎌倉)의 쓰루가오카팔번궁(鶴岡八幡宮)이 두 차례의 화재로 소실(燒失)돼 버리는 사태가 일어났다.
본초(本抄)를 쓰신 직접적 계기로도 된 이 화재에 대해서 신불(神佛)에 매달릴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던 당시의 사람들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불안만을 더하고 있었을 것이다.
니치렌(日蓮)대성인은 제천선신(諸天善神)인 팔번대보살(八幡大菩薩)이 법화경(法華經)의 적을 처벌하지 않기 때문에 반대로 범천(梵天) 제석(帝釋)에 의해 벌(罰)을 받은 모습이라고 하시고 있다.
이달의 배독범위에서는 오로지 일체중생에게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권하고 성불(成佛)의 경애(境涯)를 열게 하기 위해 행동해 오신 자신의 심경(心境)을 말씀하시고 있다.
1253년(건장5년) 4월28일, 고향 아와(安房)에서 입교개종(立敎開宗)이 선언되었다. 32세 때였다. 그 이래 본초(本抄)를 집필하실 때까지 28년간 오로지 광선유포를 위해 행동해 왔다고 말씀하시고 있다.
광포의 대투쟁으로 자신을 단련하는 나날을
대성인(大聖人)은 법화최제일(法華最第一)이라고 높이 내걸으시고 제종(諸宗)의 잘못을 엄하게 책하셨다. 그 때문에 경문(經文)에 설해진 대로 각종의 박해가 일어났다.
마쓰바가야쓰법난(松葉谷法難), 이즈 이토유죄(伊豆 伊東流罪), 고마쓰바라법난(小松原法難), 다쓰노구치법난(龍口法難), 사도유죄(佐渡流罪)등 위난(危難)이 신명(身命)에 미치는 대난(大難)만도 4번.
이 밖에도 대성인뿐 아니라 문하(門下)에게도 수많은 박해가 가해졌다. 그러나 다른 그릇된 사상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의 불행을 돌보지 않는 것으로 되어 결과적으로 사회와 국가의 불행을 초래하는 일로 되는 것이다.
대성인(大聖人)은 박해가 있을 것이라고 충분히 아시면서도 “법화경의 행자(行者)이니라”라는 대확신으로 불법(佛法)의 정의를 관철하셨던 것이다. 대성인(大聖人)의 생애를 생각할 때 ‘잠자코 있을 수는 없다’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어쩔 수 없는 대성인(大聖人)의 마음을 느끼게 된다.
“타사(他事)는 없었다”라는 말씀은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광포(廣布)를 위해 언제나 ‘바로 지금이야말로 싸울 때다!’라는 광포(廣布)에 거는 열렬(烈烈)한 정열이라고 하겠다.
얼마전 국립 페루중앙대학으로부터 동양인 최초의 명예 박사학위를 받은 이케다(池田)SGI회장은 사사(謝辭)에서 감동적인 시(詩) 한수를 소개하였다.
“강하게 되어라! / 강하게 되어라! / 절대로 강하게 되어라! / 강한 것이 행복이다. / 승리이다. / 강한 사람은 / 모두를 행복과 평화를 위한 / 가치 있는 정의의 인생으로 / 전환시켜갈 수가 있다.”
반대로 ‘약함은 불행이고 무서워 겁내는 것이며 조소(嘲笑)받고 매도(罵倒)되는 패배자이다’라고.
우리들은 악과 싸움으로써 자신이 강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용기를 가지고 벗에게 정의를 이야기하는 데에 이해와 공감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약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외치지 못한다. 자신의 약함을 극복하고 강하게 되기 위한 신심이고 수행이며 투쟁인 것이다. 그렇기에 싸우는 가운데 진정한 공덕이 빛나는 것이다.
우리들은 어디까지나 강한 마음으로 절복정신(折伏精神)을 불태워가면서 21세기를 여는 싸움에 매진해 가야겠다.
‘용기’의 실천은 ‘자비’에 통한다
대성인(大聖人)은 일체중생의 성불(成佛)을 원하는 마음을 ‘모(母)가 적자(赤子)의 입에 젖을 넣으려고 힘쓰는 자비(慈悲)’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어머니의 사랑은 어떠한 대상(代償)도 요구하지 않는다.
오로지 생명을 키우고 지키며 사랑한다. 어머니의 사랑은 그 누구에게 있어서도 그립고 또 사랑스러운 것이다. 이것은 전인류에게 공통되는 실감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있어 어머니는 ‘돌아가야 할 대지(大地)’인 것이다.
그 어머니의 사랑은 ‘자비(慈悲)’ 이외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일체중생을 사랑스럽게 생각하고 상냥하여 때로는 정사(正邪)에 엄격하게 그리고 한 사람 한사람에게 자안(慈眼)을 보내주시는 대성인(大聖人)의 거동 -.
“모든 사람에게 묘법(妙法)을 전하고 성불(成佛)의 경애를 열어주고 싶다” - 이를 위해 대성인(大聖人)은 어본존(御本尊)을 도현(圖顯)하신 것이다.
우리들에게 있어 이 대성인의 자비에 보답해 가는 길은 오로지 신심(信心)을 분기시켜서 대성인 직결의 신심으로 자타 함께 위대한 경애를 쌓아올려 실수 없이 행복의 궤도를 전진해 간다는 것이다.
대성인이 어본존(御本尊)의 도현(圖顯)을 시작하신 것은 다쓰노구치법난(龍口法難) 이후부터였다. 잠시도 마음을 늦출 수 없는 대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도현하신 어본존에는 대성인의 싸우는 정신, 싸우는 신심(信心)의 혼백(魂魄)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대난(大難)의 와중에서 전인류에게 큰 희망을 발(發)하신 것에 큰 의의를 느낄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나 광포(廣布)의 대투쟁 속에 어본존(御本尊)을 배견하면서 자행화타(自行化他)에 걸친 불도수행(佛道修行)을 행하고 있기에 무한한 용기를 일으켜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용기가 자비로 되고 벗의 마음에도 희망의 등불을 밝히는 것으로 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우리들은 영예(榮譽)로운 대성인 문하의 한사람으로서 대성인(大聖人)의 정신 그대로 나의 인생을 정의와 용기와 승리로 훌륭히 장식해 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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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화경 방편품·수량품 강의 (2)
말법(末法) 만년의 민중을 구제하는 어본불(御本佛)의 위대한 ‘경애(境涯)의 서(書)’, 그것이 어서다. 그리고 어서의 한 구절, 한 구절은 모두 남묘호렌게쿄라는 ‘일법(一法)’을 가르치기 위한 말씀으로 되어 있다.
도다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대성인은 南無妙法蓮華經라는 것만을 보시고 설하셨다.
“대성인님, 최고의 간심간요의 설법을 들려주십시오.”
“그래그래, 거기에 앉아라. 南無妙法蓮華經. 끝”
대성인의 30년 동안의 설법은 단지 한마디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어본존을 믿고, 제목을 봉창하고 절복을 하면 반드시 구제된다라고. (도다조세이 전집 제5권)
이 인류를 구제하는 ‘근원의 일법’을 실천하는 것이 여러분이다.
대성인은 말씀하셨다. “다만 묘호렌게쿄의 칠자(七字) 오자(五字)를 일본국(日本國)의 일체중생의 입에 넣으려고 힘쓸 뿐이로다. 이는 즉 모(母)가 적자(赤子)의 입에 젖을 넣으려고 힘쓰는 자비이니라”(어서 585쪽)라고.
대성인의 정신을 배견하고 ‘자비’의 행동에 힘쓰는 여러분의 매일은 실제로는 고뇌와 노고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여러분의 그 존귀한 고투를 나는 누구보다도 깊이 알고 있다.
그러나 일체를 ‘혹시기신 혹시타신’이라는 ‘불(佛)·보살의 행동’으로 빛내갈 수 있는 것이 신심이다. 고뇌한 만큼, 싸운 만큼 공덕은 전부 자신에게 돌아온다.
“모두 실이며 헛되지 않느니라.”이다.
불법에는 절대로 헛됨이 없다. 어떤 때는 고뇌하고, 어떤 때는 개가(凱歌)의 소리를 울리면서 부디 나와 함께 광선유포의 영광의 이야기를 끝까지 연출해 가지 않겠는가.
※ 소설 <인간혁명 제5권> ‘뜨거운 태양’
현대에 부처와 동등한 경애에 서서 이 세계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길에 철저하려 한다면 오직 절복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각자의 행복을 위한 최고 수단이며 세계평화에 다다를 최단거리이고 한 나라가 융성하는 일대 비결입니다.
그러므로 절복행이야말로 불법수행 중 최고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절복행은 인류행복을 위한 지름길이며, 불법에서 말하는 중생제도 문제이기 때문에 부처의 경애와 일치합니다. 따라서 절복하는 사람은 자비의 경애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중략) 어본불 니치렌 대성인의 자비를 행하는 일이며 부처를 대신하는 부처의 일임을 꿈에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이 일념에 서서 드디어 대절복을 과감하게 실천하려고 합니다. 때는 이미 무르익었습니다. 니치렌 대성인께서 입종선언을 하신 지 700년, 그 날을 앞두고 생각하건대 창가학회 같은 단체의 출현이 과거 700년 동안 도대체 어디에, 어느 시대에 있었습니까. 크나큰 긍지를 가져 주시기 바랍니다.
※ 개목초 강의 (17)
절복은 어디까지나 부처의 자비행의 실천입니다.
최고로 열린 만인을 존경하는 일념이 근본을 이루고 있으므로 절복행이 성립됩니다. 절복은 상대방에 대한 존경이 없으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절복을 해 본 사람일수록 깊이 실감할 것입니다.
이처럼 절복에는 철두철미하게 ‘다투는 마음’ 등은 없습니다. 따라서 절복이란 배타주의, 독선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절복의 근간은 어디까지나 ‘자비’입니다. 또 자비를 용기로 바꿔 악과 싸우는 ‘파절 정신’입니다.
인간의 가장 기초가 되는 종교 자체가 혼란할 때, 인간의 정신을 파괴하려는 잘못된 사상과 종교의 횡포에 대해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그것은 불법의 자비와 거리가 먼 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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