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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손의왕릉여행◈ 스크랩 제8대, 창릉(昌陵)-송림에 둘러쌓인 아름다운 서오릉에 잠든 젊은 왕, 예종, 안순왕후
길손旅客 추천 2 조회 111 12.06.27 11:36 댓글 8
게시글 본문내용

제8대, 창릉(昌陵)

예종과 안순왕후 한씨의 능

예종(睿宗)와 안순왕후(安順王后)의 동원이강릉(同園異岡陵)

창릉(昌陵)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명릉길(용두동) 475-95 (서오릉西五陵) / 서오릉관리소 02-359-0090

 

예종 이황

1450년(세종32년) 1월 1일~1469년(성종원년) 11월 28일

조선8대왕 (재위 1468~1469)

아버지는 조선7대왕 세조 이유(世朝 李유), 어머니는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로 2남1녀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황(晄)이며, 자는 명조(明照)입니다.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추존 덕종)의 동생으로 세자가 요절하자 그 뒤를 이어 세자에 책봉 되었습니다. 

 

안순왕후 한씨

1445(세종27년) 3월 12일 ~1498년(연산군4년) 12월 23일

조선8대왕 예종의 계비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청천부원군 한백륜(淸川府院君 韓伯倫)의 딸입니다.

세조6년(1460년) 한명회의 딸이 세자빈(장순왕후 한씨)에 간택되고 가례를 올렸으나 이듬해 병사하여,

세조9년(1463년)에 후궁 소훈(昭訓)으로 봉해지고 예종이 즉위하면서 왕비에 책봉되었습니다. 이듬해 예종이 승하하자 인혜대비(仁惠大妃)에 봉해졌고, 연산군3년(1497년)에 명의대비(明懿大妃)로 진봉 되었습니다.

 

예종과 안순왕후사이에는 1남2녀를 두었는데, 제안대군(薺安大君)과 현숙공주(顯淑公主)이며 또 한명의 공주 혜순(惠順)은 요절하였습니다. 그리고 왕위의 승계를 위하여 형(兄) 의경세자(덕종)의 차남 잘산군(?山君, 조선9대왕 성종)을 양자로 들였습니다.

후궁으로 귀인 최씨, 상궁 기씨가 있습니다.    

 

 

 

예종왕릉에서 바라본 풍경

 

 

 

해양대군, 예종은 1450년 정월 1일에 태어난 인물입니다.

수양대군의 둘째 아들로, 형이었던 의경세자가 20살의 나이로 요절하여 8살의 어린 나이임에도 세자로 책봉되었지요. 물론, 적자손의 원칙을 따르자면 의경세자의 장자 월산대군이 있었으나, 당시 그의 나이 4살에 불과하여 세조는 둘째 아들인 해양대군을 왕세자로 봉합니다. 이러한 이면에는 세조 스스로 어린 단종을 폐하고 왕위를 찬탈하던 일련의 과정이 있었기에 이러한 불상사를 피하기 위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해양대군이 왕세자에 오를 당시 세조는 보령 40세로 이제부터 왕세자 교육을 하면 후사 문제는 걱정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던 게지요. 그리하여 세조3년(1457년) 11월, 새로운 왕세자로 해양대군을 책봉하게 됩니다. 세조6년(1460년)에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를 세자빈으로 맞이하였고, 이듬해 인성대군을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17세의 나이로 요절을 합니다. 이에 2년 뒤 한백륜의 딸이 후궁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해양대군이 즉위하면서 왕비로 책봉 되었으니 그녀가 안순왕후 한씨입니다.

 

예종은 효성이 지극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조가 병상에 있을때면 직접 병환을 돌보며 수라상을 보살폈으며, 약을 먼저 맛보았다 합니다. 주야로 세조의 곁을 지키다 보면 한달 엄게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세조14년(1468년) 9월 7일에 병환이 깊어 위급해지자, 세조의 선위로 19세에 왕에 오르니 그가 '조선8대왕 예종'입니다. 세조는 다음날 승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종은 평소 건강이 무척 약한편이었고, 더욱이 20살이 되지 않아 국정을 논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에 모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있었고, 세조의 공신인 한명회, 신숙주, 구치관을 통하여 내린 결정을 형식적으로 결재하는 방식으로, 이는 세조 말년에 세조가 설치해 놓은 '원상제(院相制)'로 3중신을 항상 궁으로 출근을 하도록 하여 왕세자와 함께 국정을 논하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예종 즉위 직후,

예종원년(1468년)에 '남이의 옥사'가 있었으며, 예종2년(1469년)에는 부산지역에서 일본과의 개별적인 무역을 금지 시켰습니다. 또한, 옛 정치의 잘잘못을 적은 '역대세기(歷代世紀)'를 집필 하였고, 최항(崔恒)등과 함께 세조때 부터 편찬했던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 하였으나, 끝내 반포하지 못하고, 성종원년(1469년) 11월 28일, 20세라는 젊은 나이에 경북궁에서 승하 하였습니다.

 

수렴청정과 원상제로 왕권을 행사 해보지 못한 임금으로 재위 14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의 왕이었습니다.

예종이 승하 한 날, 원자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와 예종의 형, 의경세자의 장남은 병약하다는 이유를 들어 의경세자의 두째 아들 잘산군을 양자로 입적시켜 왕위에 오르니 이가 '조선9대왕 성종'입니다.

 

한편, 원비가 산후병으로 17살에 병사하자, 청전부원군의 딸 한씨가 소훈에 봉해졌고,

예종이 즉위하면서 왕비에 책봉되니 그녀가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 韓氏)입니다. 한씨에 관한 특별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훗날 성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양자로 입적이 되었으니 국모가 되었는데, 이는 곧 생모였던 인수대비와의 마찰이 있었을 것으로 예상 됩니다. 그러나 정치적 야심이 있던 인수대비와 달리 안순왕후는 권력에 욕심이 없어 큰 마찰 없이 지냈던것 같습니다.

안순왕후는 예종이 승하하고 성종2년(1471년) 인혜대비(仁惠大妃)로 봉해지고, 연산군3년(1497년)에는 명의대비(明懿大妃)에 진봉 되었습니다. 연산군4년(1498년) 12월 23일 승하하여 예종이 잠들은 창릉에 안장 되었습니다.

 

 

 

창릉 가는길

 

 

여기서, 예종원년(1468년)에 일어난 '남이의 옥사(南怡의 屋事)'를 살펴보고 넘어가겠습니다.

남이는 태종의 딸 정선공주의 손자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였고, 서북의 여진족을 토벌하는등의 공을 세운 인물로 세조는 이러한 남이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일련의 과정없이 27살의 나이임에도 병조판서에 임명하였습니다.

사실 그때부터 해양대군의 눈에 남이장군은 거슬리는 인물이었습니다. 남이는 무예가 출중하고 성격 또한 강직하여 훌륭한 무인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세조에게 신뢰를 받았으나, 그에 비하여 해양대군은 세조의 신뢰면에서 늘 남이보다 한참을 뒤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조가 승하하자 젊은 나이와 세력확장에 대한 염려로 그를 달가워 하지 않던 한명회와 신숙주, 강희맹, 한계회등의 견제를 받았으며, 결국 직무에 대한 능력이 없다 왕에게 고하니, 예종에게는 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었던 터인지라 그의 병조판서직을 해임하고 종2품 겸사복장(兼司僕將)으로 전임시킵니다.

그러던 중, 한 때 남이와 함께 이시애의 난에서 공로를 세운 인물이었던 유자광이 병조에 오른 남이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습니다. 그가 병조판서에서 밀려나자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예종 즉위 후, 어느날 밤 하늘에 혜성이 지나는 것을 보고있던 남이가 "묵은것을 없애고, 새것이 들어설 징조"라 하였는데, 이를 들은 유자광은 '남이가 반역을 도모하려 한다.'며 예종에게 고하였으며, 남이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러한 역모사건은 남이와 강순이 모의한 것으로 왕(예종)이 세조의 능에 행차할 때 거사하여 보성군의 아들 춘양군을 추대하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남이는 거열형(車裂刑)에 처형되면서 부인이 함께 처형 되었으며, 옥사 직후, 딸은 한명회의 노비로, 두 첩역시 노비로 끌려 갔습니다. 또한 이사건과 관련되어 거론 되었던 강순, 조경치, 변영수, 무효랑, 오치권등에게 죄를 묻고 이들 역시도 모두 처형 된 사건입니다. 

 

훗날, 남이의 옥사는 유자광의 모함으로 만들어 진 날조된 옥사라 하여 순조18년(1818년) 복권이 되었습니다.

남이장군의 묘소는 화성 남이섬에 있습니다. 그런데 경기도 가평의 남이섬에 '남이묘소'라 하여 또하나의 남이장군 묘가 있습니다. 이는 축령산에서 남이장군이 젊은시절 무예를 연마하던 곳으로, 축령산에는 남이바위가 있으며, 전설이 담긴 돌들을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들어 지금의 '남이장군 묘'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실제 장군이 묻혀 있는지는 알길이 없지요. 그 자리가 유명한 사계절 관광지인 '남이섬'입니다.    

 

 

창릉의 홍살문과 정자각

 

 

서오릉(西五陵)에서도 가장 안쪽에 자리한 왕릉이 '창릉(昌陵)'입니다.

동원 이강릉으로 조영된 창릉은 서오릉 내에서 가장 먼저 조영된 왕릉이지요. 창릉의 조영방식은 여느 왕릉과 같은 양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곡장을 두르고, 병풍석은 두지 않았으며, 12칸의 난간석을 두고 있으며, 석양, 석호 두쌍이 봉분을 지키고 섭니다. 혼유석과 망주석 한쌍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장명등을 중앙에 두고 양쪽으로 문인석 한쌍과 석마가 중계에, 무인석 한쌍과 석마가 하계에 자리를 합니다. 

이 같은 배치는 왕능과 왕비릉이 모두 같은 형식입니다. 

능역공간 아래로 정자각과 비각이 자리하고 차도가 길게 이어져 홍살문에 닿습니다.

 

창릉 가는길은 서오릉 내에서도 가장 깊은 곳으로 수목보호를 위하여 출입에 제한을 두고 있으나, 서오릉 관리소에 말씀드리면 방문 가능합니다.

왕릉 답사길의 참 즐거움은 역사를 배운다는 것도 있지만, 솔직히 요건 좀 고리타분한 대답이고, 실은 넓게 펼쳐진 잔디와 소나무들, 그리고 하늘입니다. 숲길을 따라 걸으며 산새 지저귀을 쉽게 만날수 있는 매력적인 공간입니다. 나무 숲을 지나 홍살문 앞에 서면 탁 트인 하늘과 너른 잔디를 마나게 되니 말 그대로 '신의 정원'입니다.

한가한 어느 오후, 서오릉을 방문하여 넉넉한 봄기운을 만나는 것도 또 다른 여행이 될것입니다.

 

   

 

창릉 정자각

정자각의 왼쪽이 예종왕능이며, 오른쪽이 안순왕후릉입니다.

 

 

 

 

 

예종왕능

 

 

 

 

 

 

 

 

 

왕능과 왕비릉 사이의 풍경, 곡선이 참 아름답습니다.

 

안순왕후릉

 

 

 

 

 

 

창릉 정자각과 그 뒤로 병풍처럼 펼쳐진 송림,

아마도 조선 왕릉 답사의 처음은 이러한 기분에서 였을 것 같습니다. 시원스럽고 푸르도록 맑은 공기가 있음이지요.

 

 

INFO..

창릉 昌陵 / 제향일 매년 (양력) 4월 16일

경기도 덕양구 서오릉로 334-92 / 서오릉관리소 02-359-0090

관람시간 하절기 06:00~18:30 동절기 06:30~17:30

관람요금 대인 1,000원, 소인 500원

정기휴일 매주 월요일

주차요금 무료

 

 

 

by 박수동

www.gilso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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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06.27 13:16

    첫댓글 고양군 살았을때 초등학생 시절 소풍갔던곳
    어른이 되어서 동문들 모임으로 서오릉 앞 식당
    사진으로 다시보니 감회가 깊습니다
    내고향 고양시 서오릉 사진과 설명 감사합니다

  • 작성자 12.06.28 11:24

    아, 서오릉앞에 맛난 식당들이 참 많은듯 합니다.
    배고픈데요?^^

  • 12.06.27 14:07

    역사 공부 많이하고 갑니다.
    좋은 여행 정보 감사합니다.

  • 작성자 12.06.28 11:25

    감사합니다.
    오늘도 행복한 날 되세요.

  • 12.06.27 16:17

    예종의 릉을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자세한 설명 역사공부도 되고 우리의 조상을 알수있는기회가 된듯 합니다
    서오릉하면 인연이 있지요 우측의 산아래 건물에서 근 1년이상을 먹고자고 공부하고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 작성자 12.06.28 11:26

    서오릉은 참 편안하던곳이었는데..
    그 곳에 자리를 하셨었다니 이도 인연이겠지요?
    좋은 날 되세요.

  • 12.12.08 11:22

    감사합니다 즐거운주말 보내세요^^

  • 12.12.08 11:22

    감사합니다 즐거운주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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