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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문보살십주제구단결경 제5권
14. 용맹품(勇猛品)
그때에 최승보살이 나아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찌하여 보살이 처음 발심(發心)한 행(行)은 끊을 수 있는 이가 없으며,
어떻게 보살은 의식(意識)이 안온하여 버리거나 여읠 수 없나이까?”
[처음 뜻을 낸 보살]
이때에 세존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처음 뜻을 낸 보살은 당연히 배울 바를 배우되 생사에 막히지 않고 나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며,
비록 과거ㆍ미래ㆍ현재에 처한다 하더라도 역시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고 곧 용맹하게 사견(邪見)을 헐어 부수며,
처음 듣는 법의 맛[法味]에도 신근(信根)을 성취하여 뜻은 언제나 멸해 다한다는 곳에 매여 있고 언제나 세간의 업을 여의며,
오직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만을 사모하고 경전을 찬탄하면서 듣되 만족해 함이 없을 뿐이니라.
설령 괴로움이나 즐거움을 만난다 하여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나니,
그 까닭에 무엇인가?
그 마음이 견고하여 이전하거나 동요할 수 없기 때문이니,
혹은 한 몸[一身]ㆍ두 몸ㆍ세 몸을 겪되 시기에 상응하여 여래의 정수삼매정의(正受三昧定意)를 체득하고,
다시 불망삼매(不妄三昧)를 믿고 받게 되며,
다시 상지수결(想持受決)삼매를 얻어 점차로 좇아 난 바가 없는 일어나지 않는 법인[無所從生不起法忍]에 이르니,
이 때문에 뜻을 낸 보살이 마음속으로 행하는 바를 끊을 수 있는 이는 없다고 이름하느니라.
보살은 뜻을 오로지 하되 색상(色相)에 집착하지 않고,
이것은 항상 있다거나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거나, 괴로움이 있다거나 즐거움이 있다거나, 또는 곱다거나 추하다거나, 멀다거나 가깝다거나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느니라.
또한 다시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법도 생각하지도 않고,
또한 다시 나는 장차 부처님이 되어 삼천대천세계를 맡아 다스리겠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있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고,
낸다는 생각이나, 집착한다는 생각이나, 물든다는 생각이나, 맺는다[結]는 생각이나, 마음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느니라.
한량없는 문으로 그 미묘한 법을 받아들이고 물러나지 않고 또한 물러나는 것을 보지도 않으며,
싫증을 내지도 않고 또한 싫증을 내는 것을 보지도 않으며,
만족해 하지 않고 또한 만족해 하는 것을 보지도 않느니라.
폐지하지 않고 또한 폐지하는 것을 보지도 않으며,
버리는 것도 없고 파괴하는 것도 없으며,
보는 것도 없고 또한 보는 것이 있지도 않으며,
더하지도 않고 또한 덜하는 것이 있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고 또한 변한 것이 있지도 않으며,
저절로 행해지지도 않고 또한 행이 있지 않는 것도 아니니라.
그렇게 되는 까닭은 자연(自然)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허공이나 법계에 포섭되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은 보살은 제한이 없고 분량없는 큰 서원의 마음으로 스스로 성취하여 싫어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고 또한 물러나지 않고 은혜로이 온갖 중생들을 제도하여 해탈하게 하고자 하나니,
그렇게 하는 까닭은 보살이 온갖 중생들을 제도하여 반열반하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니라.
17겁(劫) 동안 머물러 버리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으며,
삼세의 모든 법은 텅 비고 고요하며 모든 법은 공하고 모든 법은 내가 없다고 분별하나니,
왜냐하면 이것으로부터 저것에 이르고자 하기 때문이니라.
보살 대사는 허공계에 이르러 천안(天眼)으로써,
‘지대(地大)에 의지하여 머물러 있는 중생이 많은가?
허공계에 있는 중생이 많은가?’라고 관찰하느니라.
그러나 허공에 있는 중생들이 헤아릴 수 없고 그지없다고 관하느니라.
천안의 보살은 다시,
‘내가 지금 관찰하는 데는 지극히 아득하고 멀므로 차라리 사천하(四天下)를 따라 수미산(須彌山)을 빙 둘러 있는 그 안의 허공에 있는 바 형상 없는 중생들이 더 많은가, 형상 있는 중생들이 더 많은가를 관해야겠다’라고 생각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천안을 지닌 보살은 오히려 형상 없는 중생들의 많고 적음은 알지 못하나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그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니라.
이제 나는 비유를 인용하여 거듭 이 뜻을 해설하리라. 눈 밝은 이는 이런 비유에 분명히 아느니라.
마치 궁벽한 지방에 8주(肘) 길이로 허공의 위아래가 다 같이 똑같고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그 안에 있는 형상 없는 중생을 세어 본다 할 때,
사천하의 중생이 똑같다 하고서 그 수를 알고자 하면,
하나에서부터 억(億)까지 이르러 그 억으로 하나를 삼고,
다시 그 하나에서부터 억에 이르고는 다시 그 수억으로 하나를 삼되,
이와 같은 수효로 일곱 번까지 이르는 것과 같나니,
형상 없는 허공 중생의 한계를 알고자하면 그 수효는 이와 같으니라.”
다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천안을 지닌 보살이 허공의 형상 없는 중생들을 볼 때에,
마치 사람이 궁벽한 곳에 있는 큰 바위의 위아래가 똑 같고 꽉 차 있어 이지러짐이 없는 것을 볼 적에, 본디 그 수효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라.
뜻을 낸 보살은 처음 배움을 시작해서부터 보살의 지위에 오르기까지 그 많은 중생을 제도해야 하지만,
마음이 옮아가거나 동요하지 않으며,
악마의 요란을 받지도 않고 삼계에 노닐되,
선지식에 의지하여 두려운 재난도 역시 다시는 생기지 않는 줄 알 것이니라.
그 어떤 보살이 여기에 머무르면 지극한 정성으로 기별(記莂)을 받는 것이 또한 그리 오래지도 않나니,
권방편을 행하여 일으키고 권하고, 도와 열반을 지시해 주고, 멸도의 수결(受決)을 연설하며,
4제(諦)인 여래의 인장(印章)을 더 연설하여 하나하나 분별해서 그 길을 보이느니라.
만일 어떤 중생이 깨어나려 하지 않으면, 수없는 방편으로써,
어리석음을 익히면 미혹되면서 모든 고통이 이르게 되고,
애욕을 능히 끊어야 이에 집착이 없는 것과 상응하여 곧 초월하여 바르게 깨달을 수 있으며,
모든 성현이 잠자코 있으면 곧 해탈하게 된다는 것을 크게 외치고 인도하느니라.
해탈이라 하는 것은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으로부터 해탈하는 것이니,
그것은 또한 죽지도 않고 또한 죽게 되지도 않으며,
그것은 또한 해탈하지도 않고 또한 해탈하게 되지도 않느니라.
해탈하는 바는 무엇인가?
집착이 없고 속박이 없으며,
소멸도 없고 생김도 없으며,
이루는 바도 없고 마치는 바도 없으며,
체득한 바도 없어야 비로소 정도(正道)와 상응하느니라.
중생이 미혹되고 막혀서 때에 깨우쳐 알지 못한지라, 여래는 가엾이 여기셔서 세간에 출현하여 노니는 데서마다 곧 길잡이[導師]임을 나타내시니,
법을 듣는 중생은 불퇴전에 이르며,
만일 기뻐하고 바른 법을 받들어 지니면 곧 남이 없는 일어나지 않는 법인(無生不起法忍)을 체득하나니,
뜻을 낸 보살은 언제나 생각하며 눈ㆍ귀ㆍ코ㆍ입ㆍ몸ㆍ뜻을 사유하고,
6쇠는 무엇으로부터 생기고 무엇으로부터 소멸하는가를 분별하며,
법은 스스로 법을 내고 법은 스스로 법을 소멸시키며,
삿된 것[邪]을 보지도 않고 바른 것[正]을 보지도 않으며,
짓지도 않고 만들지도 않으며,
이것이 내 것[我所]이거나 내 것이 아닌 것도 보지 않고,
안의 성품[內性]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관하며 밖의 것에 의지하지 않고 분별하느니라.
다시 ‘색(色)ㆍ통(痛)ㆍ상(想)ㆍ행(行)ㆍ식(識)은 과거의 색이 아니니라.
과거의 색은 안에 있지도 않고 밖에 있지도 않고 그 양쪽 중간에서 얻지도 못하며,
과거의 통ㆍ상ㆍ행ㆍ식도 아니니,
과거의 통ㆍ상ㆍ행ㆍ식은 안에도 있지 않고 밖에도 있지 않고 그 양쪽 중간에서도 얻지 못하며,
과거의 색은 머무르지도 않고 과거의 색은 머무르지 않은 것도 아니며,
가장자리에 있지도 않고 여기[此]에 있지도 않는다’라고 사유해야 하며,
과거의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의 법이 아니니,
과거의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의 법은 안에 있지도 않고 밖에 있지도 않고 그 양쪽 중간에서 얻지도 못하며,
과거 뜻의 생각으로 소멸을 알지도 않나니,
안에 있지도 않고 밖에 있지도 않고 그 양쪽 중간에서도 얻지 못하며,
미래와 현재의 색ㆍ통ㆍ상ㆍ행ㆍ식과 귀ㆍ코ㆍ혀ㆍ몸ㆍ뜻과 뜻의 생각으로 소멸을 아는 것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또 최승아, 보살 대사는 신통의 지혜로써 막힘 없는 도를 닦지만, 모든 부처님의 공덕과 지혜의 업은 다 함께 헤아려도 열 배(倍) 백 배ㆍ천 배ㆍ만 배이며,
뜻을 낸 보살이 한 중생을 편안하게 하고 위없는 도의 마음을 일으켜 일체지를 이루게 하는 것보다는 못하느니라.
온갖 모든 부처님의 법을 완전히 갖추면 허망한 생각이 이미 끊어지고 다시는 의심이 없게 되며,
모든 하늘과 세간 사람이 공경하여 예배하지 않는 이가 없고, 모든 법은 허깨비요 진실이 아님을 통달하여 알며,
온갖 형상 있는 것이 도(道)에 나아간 것은 곧 여래의 신족의 힘을 얻게 되어서이니라.”
이때에 자리에 있던 14억의 대중들이 여래의 신족의 덕을 간절히 우러러 여래께서 나타내시는 그 위력과 변화를 보려고 기다렸다.
부처님께서 모인 대중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아시고 곧 자리 위에서 큰 광명을 놓으셨고 몸의 모든 털구멍으로 광명을 놓았는데 낱낱의 털구멍에서 백천억의 광명이 나왔다.
그 낱낱의 광명에 백천억의 밤에 빛나는 신비한 보배[夜光神寶]가 있었다.
무늬가 아로새겨진 온갖 보배가 뒤섞이었으며, 많은 꽃과 여러 가지 향이 그 위를 덮었고, 보배의 네 귀퉁이에는 4개의 영락이 매달렸으며 낱낱의 보배 위에는 백천억의 장막이 있고 그 낱낱의 장막에는 백천억의 저절로 된 연꽃 사자좌가 있었다.
그 낱낱의 자리 위에는 백천억의 자못 기이한 색깔이 있고,
그 낱낱의 색깔 가운데에는 백천억 개의 마니주보(摩尼珠寶)가 연꽃 위에 있었으며,
그 낱낱의 꽃 위에는 다시 백천억 개의 갖가지 자못 기이한 보배로 된 교로(交露)와 일산[蓋]이 있었고,
그 낱낱의 일산 아래에는 백천억 분의 여래께서 설법하고 계셨으며, 그 한 분 한 분의 여래께는 백천억의 모든 부처님 세계가 있었고,
그 낱낱의 세계에는 백천억 개의 저절로 된 목욕하는 못[浴池]이 있었으며,
그 낱낱의 목욕하는 못에는 백천억 마리의 물오리와 기러기와 원앙새들이 자연스럽고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그때에 보배 교로의 대(臺)에 계신 모든 여래ㆍ무소착ㆍ등정각께서는 다시 백천억의 광명을 놓으셨고 그 낱낱의 광명 속에는 다시 화불이 계셨으며,
그 낱낱의 변화로 된 부처님께서 각각 뜻을 낸 보살로서 행할 공덕과 12인연과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비신(非身)의 법과 열반으로 나아가는 부문을 연설하였고
그 낱낱의 부문 가운데서 백천억의 불퇴전법(不退轉法)을 굴리셨다.
옛날에는 미처 굴리지 않았는데 오늘에야 여래께서 그들을 위해 굴리시고 부처님의 위의와 신족의 변화를 나타내셨으니, 아직 일찍이 보지 못했던 바요 아직 듣지 못했던 바며 불가사의하였고 헤아릴 수도 없었다.
이때에 여기에 모여 있는 이들은 전에 없던 일이라고 찬탄하였다.
“매우 기이하고 기특하도다. 이것은 우리들의 복으로 이에 이런 신족의 변화를 볼 수 있게 되었구나.”
법이 훨훨 타오르고 그지없는 변화로 여래는 마치 여래장(如來藏)과 같아서,
머무를 데에 머무르지 않았으며,
형상도 없고 근본도 없으며,
얻을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으며,
매우 깊고 아득히 멀고 진실하고 헛되지 않았으며,
지혜는 넓디넓었고 어리석음과 미혹을 제거하고 또한 파괴하지 않았으며,
법계를 성취하여 미래ㆍ과거ㆍ현재의 모든 부처님 법이 다 눈앞에 나타났고,
여래의 힘으로 모든 부처님의 국토가 더욱 불어났으며,
부처님의 뜻 도장[意印]으로 보살도를 출생시켰다.
현재의 법 가운데서 청정한 눈의 법왕(法王)이 되어 혜안(慧眼)이 청정하면 종성은 순수하게 성숙하느니라.
불안(佛眼)은 막힘이 없되 혜안을 말미암아 알며 구의(句義)를 분별하여 법문을 열었고,
선지식과 함께 도의 마음[道心]을 성취하였으며,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고 종성을 깨뜨리지 않았으며,
온갖 중생들을 위하여 덮어서 보호하여 세간에 사는[居家] 이들을 성취시켰고,
또 대중에 있는 이면 두렵거나 어려운 바가 없게 하였으며,
여읜 바의 교묘한 방편으로 알맞게 교화하지 않음이 없었고,
이름과 덕이 청정하였으며 다시는 바라는 것이 없었으며,
포태(胞胎)가 고르고 바르게 하였다.
“뛰어난 지혜업으로 가림 없는 구름[無蓋雲]을 일으키고 지혜의 훨훨 타는 맹렬한 불로 의결(疑結)의 무더기를 태우며,
바른 가르침을 드날리면서 도량에 떨치고 자비의 4등(等)과 총지로 자세히 살피며,
9관(觀)과 6업(業)의 용맹스런 힘으로 두려움이 없고,
신(信)ㆍ염(念)ㆍ혜(慧)ㆍ정(定)의 행과 교훈이 그지없으며,
삼매정(三昧定)에 들어가 시방을 살펴보면서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하고 공양올렸으니,
이것이 바로 최승아, 보살 대사가 마음으로 무너뜨리기 어려운 것이 마치 보살의 성품이 공하여 자연(自然)인 것과 같으니라.
눈이 있는 선비는 이것이 공이라는 것을 알거니와,
공은 스스로, ‘나는 스스로 공하다’고 말할 줄 모르나니,
보살행의 근본도 역시 그와 같아서,
사람들을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이 제도하고 다시 그 항하의 모래 수보다 더 많은 모든 부처님께서 노니시는 세계에 이르러 제도한 중생들을 산수로는 헤아릴 수 없다 하여도,
보살 자신이, ‘나는 이제 그러한 많은 중생을 제도하였고 열반의 고요한 무위(無爲)에 이르게 하였다’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또한 ‘나는 이런 과보로 인연하여 장차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얻을 것이다’라고 말하지도 않느니라.
뜻을 낸 보살은 마음가짐이 견고하여 처음 자취를 일으켜서부터 이에 도량에 이르러 수왕(樹王) 아래 앉아서 악마들을 항복받기에 이르기까지 그 동안에 지은 공조(功祚)와 복된 일은,
모두 다 중생을 위할 뿐이요 자기 자신은 위하지 않는 것이 마치 허공이 예외 없이 두루 다 덮으면서도,
그 자신은 ‘나는 바로 허공이다’라고 말할 줄 모르는 것과 같으니라.
여래의 신령한 덕과 지혜의 광명은 만 백성을 두루 접대하여 법안(法眼)을 이루게 하고,
여읨도 없고 집착도 없으며, 모든 법은 무너뜨릴 수 없으며, 남[人]도 없고 나[我]도 없으며,
지혜의 광명과 선권(善權)의 날카로운 검(劒)으로써 모든 부처님께서 쓰신 바른 가르침의 한량없는 공덕으로 의심 그물을 제거시키나니,
보살 대사(大士)로서 수행할 바이니라.
보살이 행할 바는 3범당(梵堂)을 청정하게 하고, 공(空)하거나 공하지 않은 것도 없고,
공(空)은 또한 생기지도 않고 또한 있는 바도 없으며, 남도 없고 나도 없고 수명도 없고 목숨도 없으며,
또한 나는 것을 보지도 않고 또한 죽는 것을 보지도 않으며,
홀로 거닐되 짝이 없고 헤아리거나 의논할 수도 없으며,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고 생각이 없는 것도 또한 공하여 생기지도 않되,
또한 생기는 것을 보지도 않고 또한 나오는 것을 보지도 않으며,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고 짓는 것도 없고 만드는 것도 없으며,
법계는 한량없으되 도량의 업[道場業]을 이루고,
공계(空界)는 끝이 없어서 속박이나 집착하는 바가 없으며,
중생들을 위하여 짐짓 처소를 짓되, 이것은 내 것[我所]이다, 내 것이 아니다고 하면서 나라는 생각[吾我想]을 일으키나,
보살은 뜻을 붙잡아 선근의 근본에 의지하며, 한량없는 지혜로 그 도를 청정하게 하고, 마음에 묻은 때의 뜻을 버리되 지혜로써 제거시키느니라.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보살은 정관(淨觀)삼매에 들어가 시방의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중생을,
‘누가 법행(法行)에 상응하는가?
누가 지행(智行)에 상응하는가?
누가 정행(淨行)에 상응하는가?’라고 관찰하며,
만일 어떤 중생이 법을 받기에 상응하면, 곧 그에게 25가지 법을 설해 주어야 하느니라.
[25가지 법]
어떤 것이 25가지인가?
모든 법은 모양이 없는 것,
모든 법은 형상이 없는 것,
모든 법은 인(忍),
모든 법은 생각(想),
모든 법은 근(根)이 없는 것,
모든 법은 경계를 얻을 수 없다는 것,
모든 법은 취(取)할 바 없는 것,
모든 법의 둘이 아닌 데 드는 문[不二入門]이라는 것,
모든 법은 제도[度]가 없는 것,
모든 법은 끊을 수 없는 것,
모든 법은 심히 깊어서 뒤쫓아가 찾을 수 없는[不可追尋] 것,
모든 법은 깨닫고 깨닫지 못하는[覺不覺] 것,
모든 법은 힘으로는 파괴할 수 없는 것,
모든 법은 성취하고 성취하지 못하는 것,
모든 법은 헐어짐이 없는데도 헐어지는 것,
모든 법은 무상(無常)하면서 항상 있음을 버리는 것,
모든 법은 염오(染汚)가 없는 것,
모든 법은 행이 청정한 것,
모든 법은 성관(性觀)이며,
모든 법은 무루(無漏)이며,
모든 법은 과거에 이미 버린 것,
모든 법의 의심 그물(疑網)을 뽑아 버리는 것,
모든 법을 따라 생겨남이 없는 지혜[無從生慧]의 수결(受決),
모든 법은 본래부터 없고 고(苦)라는 이름도 없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청정하게 수행할 25가지 법이니라.
[세 가지 인지(忍智)]
또 보살은 세 가지 인지(忍智)를 행하나니,
과지(過智)와 무과지(無過智)와 또한 과(過)도 아니고 무과(無過)도 아닌 지(智)이니라.
무엇을 보살이 수행하는 과지라 하는가?
법계를 파괴하지 않나니, 몸은 본래부터 없어 여래께서 수행하신 바요 연각이나 아라한으로서는 닦아 익힐 바가 아니니라.
무과지란 증상혜(增上慧)의 명(明)이니 현성이나 연각이 수행할 바요, 아라한이 수행할 바는 아니니라.
또한 과지도 아니고 또한 무과지도 아닌 것은 아라한이 수행할 바요, 부처님이나 연각이 수행할 바는 아니니라.
어떤 것이 과지(過智)인가?
이것은 바로 부처님께서 행할 바요 아라한이나 벽지불로서는 행할 바가 아니니,
이에 보살은 손가락을 튀기는 잠깐 동안에 지혜로써 생각하되,
‘나는 마땅히 밑도 없는 중생들과 끝이 없고 가장자리도 없는 인연의 생각과 지혜의 업을 널리 제도하고 금강정수(金剛正受)도 또한 전환(轉還)이 없어야 하며 큰 서원의 마음으로 아라한이나 벽지불보다 위로 뛰어나리라’고 하나니,
이것이 바로 과지이며 이것은 아라한이나 벽지불로서 수행할 바가 아니니라.
어떤 것이 또한 무과지(無過智)인가?
현성이나 벽지불로서 수행할 바이니라.
이에 보살은 마음을 내고 배움을 일으키며,
청정한 법계로 중생을 인도하여 불법을 널리 펴고 감로의 지혜를 연설하며,
위없는 도를 구하기 위해 도량에 나아가느니라.
만일 어떤 중생이 곧장 한 지름길로부터 보살의 처소에 이르러 머리ㆍ눈ㆍ골수ㆍ뇌ㆍ나라ㆍ성(城)ㆍ아내ㆍ아들이나 마음 속에 좋아하는 물건을 모두 보시하고 구걸하는 이에게 준다면 부모와 사장(師長)을 제외하고 보시한 과보의 보답을 구하지도 않느니라.
이와 같이 하여 한 세상에서 백 세상까지 이르고 1겁(劫)에서부터 백 겁까지 이르도록 재물로써 보시하되 또한 재물을 보지도 않느니라.
재물은 누구의 것이며 어디에서 생겼고 본래는 어디로부터 와서 소멸할 때는 어디로 가는가?
그 재물은 근본이 없음을 알고 머물러 살고 있는 집조차 보지 않느니라.
때에 이 보살은 공혜(空慧)의 관(觀)으로써, 또한 몸을 보지도 않고 또한 재물을 보지도 않으며, 또한 사람을 보지도 않고 또한 다시 어느 곳에다 보시하였는가도 보지 않느니라.
그러나 이 보살은 행을 쌓은 지 자못 오래인지라 마음과 뜻이 재빨라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이루어 중생을 제도하고 부처님의 국토를 청정하게 하기를 생각하게 되느니라.
그러나 이 보살은 마음으로 아무도 없는 고요한 곳을 좋아하여 언제나 산에 처하게 되고, 뜻의 생각은 고요하여 생각을 매어 앞에다 두며, 속으로,
‘앞뒤에 보시한 온갖 덕이 완전히 갖추어져서 의당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이루어 최정각(最正覺)이 되느니라.
그러나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할 적에는 온갖 상호로 몸을 장엄하고 널리 중생을 제도하여 무위의 언덕[無爲岸]에 이르며,
반드시 큰 성인께서 남음 없는 경계[無餘界]에서 멸도하신 것을 기다렸다가 그런 뒤에야 나는 나아가 부처님 도를 이루어야 한다’라고 생각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그 보살은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와 행하는 바의 원(願)은 어긋나거나 잘못되지 않으며,
여래가 세간에 계셔서 교화하여 두루 마치고는 무여열반(無餘涅槃)에서 반열반하고 정법이 멸해 다하여 세간에 부처님이 계시지 않고 1겁, 2겁, 혹은 백 겁이 되었을 적에,
산이나 택지에 있던 보살은 그제야 자신을 엄히 책망하느니라.
‘안타깝도다. 한 일의 그 공이 헛되이 버려졌구나.
부처님께서 세상에서 가신 지 오래이고 상법(像法)도 멸하여 다하였으며, 전생에 인연 있는 중생들도 모두 다 있는 데서마다 마음에 번뇌를 품었구나.’
두루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한 나무 아래로 나아가 오른손의 손톱으로 그 나무 껍질을 베끼는데,
마침 아무도 없는 텅 빈 곳이라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자 마음이 갑자기 환하게 깨어 곧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이루고,
좌우를 돌아보아도 곁에 따르는 이가 보이지 않자 그만 몸을 숨기고서 법륜을 굴리지 않느니라.
마치 보통 사람과 같이 인간에서 그 절반을 지내버리나니,
이것을 바로 무과지(無過智)라고 하느니라.
성현이나 벽지불이 수행할 바요 부처님이나 아라한이 수행할 바는 아니니라.
어떤 것이 또한 과지도 아니고 또한 과지가 아닌 것도 아니라 하는가?
아라한이 수행할 바요 부처님이나 벽지불이 수행할 바는 아니니,
이에 보살은 오랜 옛적부터 행을 쌓아 부지런히 애쓰면서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얻어 최정각이 되고자 하여 보시를 행하고 인욕을 행하고 정진을 행하고 선정을 행하고 지혜를 행하였으며,
혹은 머리ㆍ눈ㆍ나라ㆍ재물ㆍ아내ㆍ아들ㆍ종과 하인들을 보시하나니,
구하고 찾는 이가 있으면 그 사람의 뜻을 거역하지 않았으며,
다만 몸을 찔러서 피를 낸 것만도 사해(四海)보다 많았고,
몸의 뼈를 보시한 것도 사천하에 두루하였으나 그 동안에 그 증득을 얻지 않았으며,
점차로 물러나 범부의 행에 있으면서 생사를 싫어하고 근심하며,
마음으로 용맹하게 정진하지 않고 본래 지었던 일을 기억하며 마음속으로 가만히 후회하다가,
나아가 몸이 해탈하려고 중생을 버리고 오래간만에 방편으로 스승을 찾아 묻고 성문(聲聞)의 법을 받들고서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느니라.
이전의 공로를 추억하고 체득하지 못했음을 생각하고 책망하나니,
이것이 바로 또한 과지도 아니고 또한 무과지도 아니라고 하느니라.
아라한이 닦을 것이요, 부처님과 벽지불이 수행할 바가 아니니라.
어떤 것을 보살이 정행(淨行)과 상응한다고 하는가?
이것은 부처님이나 아라한이나 벽지불이 수행할 바이니라. 이
른바 정행이라 함은 3장(場)을 청정하게 하고 3안(眼)을 청정하게 하며 3취(聚)를 청정하게 하는 것이니라.
계율이 청정하고[戒淨] 선정이 청정하고[定淨] 지혜가 청정하고[慧淨] 해탈이 청정하고[解脫淨] 해탈견해가 청정한[解脫見解淨] 것이며,
세 가지 선법(善法)으로부터 18가지 무루의 법에 이르기까지 도(道)와 세속의 선법이 모두 다 청정하나니,
부처님과 벽지불과 아라한이 이 청정행을 닦아 도(道)를 얻기에 이르고 중간에 물러남이 있지 않느니라.
온갖 생각이 일어나지도 않고 또한 볼 수도 없으며,
생기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고 또한 식의 머무름[識止]도 없으며,
마지막이 있고 시작이 있으면 곧 소굴이 있나니,
마지막이나 시작이 없음을 통달하면 어찌 처소가 있겠느냐?”
[욕심을 여읜 보살의 행]
때에 최승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욕심을 여읜[離欲] 보살은 마음에 더하거나 덜함이 없고,
또한 이것은 괴로운 것이요 이것은 즐거운 것이며, 이것은 고운 것이요 이것은 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또한 다시 앞뒤 중간과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선지삼매(禪止三昧)를 생각하지 않고,
다시 스스로 ‘나는 욕심에 대하여 욕심이 없다’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옵니까?”
그때에 세존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욕심이 없는 보살은 욕계에 놀며 두루 오가고 돌아다니며 설법하고 가르쳐 경계하느니라.
마음에 비록 물듦이 없으나 마치 묻어 놓은 불[煻煨]이 밑 없는 불구덩이에 있는 것과 같아서, 저 중생이 4류(流)에 맺혀 집착하고 12해(海)에 빠져 있는 것을 가엾이 여기느니라.
나오는 길을 구하려 하나 나아가는 데를 모르고 마음속으로 견디고 참되 어렵게 여기지 않느니라.
5음이 흥하고 쇠하는 법과 색ㆍ통ㆍ상ㆍ행ㆍ식을 분별하며,
4대가 나고 없어지는 바는 물거품이요 아지랑이며 파초요 허깨비와 같아서, 텅 비어 진실하지 않고 또한 견고하지 않다고 사유하나니,
왜냐하면 매우 깊은 법은 구경(究竟)이 되기가 어렵기 때문이니라.
색법(色法)은 매우 깊고 도(道)도 그와 같으며,
5음은 매우 깊고 세속의 법도 역시 그러하며,
세속의 법이 매우 깊은지라 허공계도 역시 그러하나니,
허공계와 법계를 잘 살피면 역시 식(識)의 생각이나 아(我)ㆍ인(人)ㆍ수명(壽命)도 없느니라.
이것을 헤아린다면 실로 요술이나 허깨비와 같으며,
세속의 여덟 가지 무한(無閑)의 법과 더럽고 흐림[穢濁]과 더러움에 물듦[染汚]을 사유하면 사람이 도에 나아감을 방해하느니라.
청정한 관으로 사유하면 모두 다 처소가 없나니,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
비상(非常)이요 고(苦)요 공(空)이요 비신(非身)의 법이기 때문이니라.
눈이 있는 선비로서 이것을 능히 통달한 이면 이것이 바로 보살이 마음에 더하거나 덜함이 없고 고락(苦樂)과 선악(善惡)과 호추(好醜)를 보지 않으니,
도무지 삼세는 인연으로 일어나 집착할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니라.
지종(地種)은 딱딱하여 그 경계가 스스로 그러하고 수성(水性)은 축축하며 성품이 스스로 부드러우며 화성(火性)은 활활 타서 성품은 스스로 뜨겁고 풍성(風性)은 나부끼고 흔들리니 움직이고 옮아가며 머무르지 않느니라.
법성은 고요하여 4대가 없고 지ㆍ수ㆍ화ㆍ풍이 어디서부터 생기고 다시 무엇으로부터 소멸하는가를 관찰하느니라.
만일 보살이 법계를 분별할 때 가령 지대(地大)가 증가하면 수ㆍ화ㆍ풍의 성품은 각각 그보다 못하여, 신식(神識)이 저절로 빠져들면서 점점 상응하지 않으며, 지대가 무겁고 신식이 가벼우면 저마다 서로 떨어지려고 하느니라.
만일 수대(水大)가 증가하면 지ㆍ화ㆍ풍의 요소[界]가 점차로 쇠약하고 미미해져 신식이 곧 옮아가려 하고 그 집[宅]이 편안하지 못하느니라.
마치 어떤 사람이 고요한 방에 있다가 출행(出行)하고 싶어 다른 촌락으로 나아가려면 먼저 오른 다리를 문지방 밖에다 딛는 것과 같나니, 이것이 바로 지대가 증가한 것이니라.
그 다음에는 오른손을 내어서 다시 문 밖에 있게 하나니, 이른바 수성이 증가한 것이니라.
그 다음에는 왼 다리를 내면서 문지방 밖에다 딛는 것이니, 이것은 바로 화성이 증가한 것이니라.
다시 왼손을 내어서 문 밖에 있게 하나니, 이것은 풍성이 증가한 것이라 말할 수 있느니라.
앞으로 나아가 길로 나아가면 이것은 신식이 떠나간 것이니라.
촌락으로 나아가면 5도(道)에 나아가는 것과 같나니, 그는 이것을 알아야 비로소 법계를 분명히 아는 것이니라.
견고하지도 않고 부드럽지도 않으며 뜨겁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나니,
딱딱한 것은 있는[在] 바가 되고 부드러운 것은 이르는[至] 바가 되며,
뜨거운 것은 나아가는[趣] 바가 되고 가벼운 것은 향하는[向] 바가 되느니라.
이와 같이 보살은 법계를 분별하여 하나하나 관하되 또한 처소가 없는 줄 분명히 알고,
법계는 성품이 스스로 동일하지 않다고 사유하나니,
신식을 기르고 몸을 자라게 하는 것은 저마다 스스로 다르느니라.
4대 가운데서 화대가 왕성하여 독하게 되면 나머지 세 가지 요소는 성품이 저절로 상응하게 되나니,
그렇게 되는 까닭은 보살은 마땅히 안팎의 4대도 역시 그와 같다고 관해야 하느니라.
삼계 중생들의 4대는 동일하지 않나니, 그 근원을 찾으려 해도 그 처소를 알지 못하느니라.
다시 6정(情)이 나아간 바 그 눈도 또한 공하고 안식(眼識)도 또한 공하다고 사유하나니, 공인 줄 알아야 비로소 법계가 되느니라.
보살 대사(大士)는 다시 6쇠를 알고 눈으로 빛깔을 보되 빛깔 또한 있는 것이 없고,
앞의 물질이 빛깔에 들어가는 것도 역시 있는 것이 없으며,
귀코ㆍ입ㆍ몸ㆍ뜻도 역시 그와 같은 줄 사유해야 하느니라.
[진리ㆍ도ㆍ공의 모양과 모양 아닌 것]
보살은 다시 진리의 모양[諦相]과 진리의 모양이 아닌 것과, 도의 모양[道相]과 도의 모양이 아닌 것과, 공한 모양[空相]과 공한 모양이 아닌 것을 배워야 하느니라.
무엇을 보살이 진리의 모양과 진리의 모양이 아닌 것을 배운다고 이르는가?
이에 보살은 본래부터 없다는 것을 자세히 이해하고 본래부터 없는 것은 하나이어서 둘이 있지 않으며,
또한 도증(道證)을 알지만 그러나 증득함이 없고,
받아 증득함[受證]을 보지 않고 받아 증득하지 않은 것도 보지 않으며,
또한 상응함을 보지 않고 상응하지 않는 것도 보지 않나니,
상응하고 상응하지 않은 것을 분명히 아는 이것을 바로 진리의 모양이라 하느니라.
보살의 진리 모양은 공(空)에 있어도 또한 진리요 공을 멀리할 때에도 역시 진리이며 또한 있지도 않고 또한 있지 않은 것도 아니니라.
이것이 바로 진리의 모양이며 금강정수(金剛正受)이니,
공에 의지하여 근본을 익히고 취하여 지키며 얻어 다하게 되는 것이니라.
이 세 가지 일을 이해하는 것이 또한 진리의 모양이니라.
보살의 진리 모양은 안으로 진실이 없음을 통달하고 밖으로 들어감이 없음을 알며,
좋아하는 것을 보지도 않고 좋아하지 않는 것을 보지도 않으며,
옳다는 것과 그르다는 것도 보지 않나니,
또한 이것이 바로 진리의 모양이니라.
안에서는 바른 소견을 끊지 않고 밖에서는 나타내 보이며,
또 한적한 데에 있으면 마음이 언제나 고요하고,
바깥이 만일 심란하면 고(苦)를 알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적당한 바에서도 역시 평등하느니라.
그 진리의 모양은 도의 증득으로 밝게 징험하며 5음은 공하여 주인이 없으며,
인연으로부터 생기는 것도 역시 공하며 머물지도 않고 보지도 않으며,
지혜에 머물러 생각을 다하고 의심 있는 데에 머무르지도 않고 그 번뇌[結]에도 또한 머무르지 않으며,
다섯 가지 일에 있지 않고 열 가지 선(善)과 열 가지 악한 세간의 본말을 따르지도 않나니,
이것을 바로 진리의 모양이라 하느니라.
이와 같이 보살이 진리의 모양을 행하면 곧 물러나지 않느니라.
진리의 모양이 아니라 함은 허공계의 맨 첫째가는 이치[最等一義]이니,
그것을 알면 고요하게 되고 아는 것을 반연하여 속박이 없게 되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의 진리의 모양이 아닌 것이니라.
어떻게 보살은 도의 모양과 도의 모양이 아닌 것을 배우는가?
망설임과 결의(結疑)의 세간에서 애욕의 오염으로 자기 자신이 함부로 해치고 마음이 포악하며 고통에 떨어지지 말아야 하나니,
이것이 바로 도의 모양이며,
현재의 몸으로써 미래 세상에 받을 과보를 짓되 스승에 의지하지도 않고 선지식을 향하지도 않는 이것도 역시 도의 모양이니라.
어떤 것이 보살에게 또한 도의 모양이 아닌가?
도의 모양이 아니라고 함은 37품(品)이니 유위와 무위의 법은 나아가고 들어갈 바요,
두 가지[二]에 있지도 않고 또한 두 가지에서 멀지도 않으며,
인연을 좇지도 않고 인연을 여의지도 않으며,
인연에 머무르지도 않고 인연을 따르지도 않으며,
제도하지도 않고 제도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결과도 아니고 결과가 아닌 것도 아니며,
일ㆍ이ㆍ삼ㆍ사에서 나아가 십에 이르되 십이 아닌 것도 아니며,
생기는 바도 아니고 생기지 않은 것도 아니며,
멸하여 다한 것도 아니고 멸하여 다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생기거나 소멸하는 것도 아니고 생기거나 소멸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언교도 아니고 언교가 아닌 것도 아니며,
공을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 공을 이해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생각이 멈추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멈추지 않은 것도 아니니라.
만일 보살이 24가지 일을 잘 살펴 본말을 관하여 분명히 알되 분별하며 마음에 두면,
생사에 처하지 않고 속박이나 집착에서 떠나며,
이기고 진다는 마음이 없고 또한 강한 것도 없으며,
스스로 뽐내지도 않고 남을 낮추지도 않으며,
곧 몸이 부서지도록 산삼매(散三昧)에 노닐면 백억의 정(定)에서 맨 우두머리가 되어 높은 이가 되고 귀한 이가 되며 그보다 지난 이가 없어야 하나니,
이것은 바로 아라한이나 벽지불의 경계가 아니니라.”
[갖가지 삼매]
그때에 세존께서는 곧 자리에서 삼매정수에 드셨으니, 그 삼매의 이름은 일의무외(一意無畏)였다.
4부 대중으로 하여금 위아래가 똑같이 가지런하게 되어 저마다 다른 생각이 없고 또한 산란한 생각도 없었다.
이때에 세존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서 잘 생각하여라. 나는 이제 너희들을 위하여 삼매를 분별하여 와서 모여 있는 이로 하여금 저마다 의심이 없게 하겠느니라.”
최승이 대답하였다.
“그러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즐거이 듣고자 하오며 즐거워하는 이는 안온함을 얻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삼매가 있나니, 이름은 산제결(散諸結)이라 하며 한이 없고 수없는 국토의 형상 있는 중생으로 하여금 고통을 제거하고 다시는 온갖 번뇌가 없게 하느니라.
또 삼매가 있나니, 이름은 용자명(勇慈明)이라 하며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저마다 원수가 없게 하느니라.
또 삼매가 있나니, 이름은 덕충(德充)이라 하며 여래는 이 삼매에 들어가서 중생의 무리로 하여금 배고프거나 목마르다는 생각이 없게 하느니라.
또 삼매가 있나니, 이름은 청정(淸淨)이라 하며 여래는 이 삼매에 들어가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법안(法眼)을 얻어서 청정하게 하느니라.
또 삼매가 있나니, 이름은 이근청정(耳根淸淨)이라 하며 여래는 이 삼매에 들어가서 중생들로 하여금 천이(天耳)를 얻어서 듣게 하느니라.
또 의적삼매(意寂三昧)가 있나니, 여래는 이 삼매에 들어가서 중생들로 하여금 삿된 것을 돌리어 세상에 나아가게 하느니라.
또 제악(除惡)삼매가 있나니, 여래는 이 삼매에 들어가서 중생의 무리로 하여금 열 가지 선행(善行)의 자취를 닦게 하느니라.
또 삼매가 있나니, 이름은 독보(獨步)라 하며 여래는 이 삼매에 들어가서 중생의 무리로 하여금 사견(邪見)을 품지 않고 바른 도를 받게 하느니라.
또 취로경(趣路徑)삼매가 있나니, 여래는 이 삼매에 들어가서 중생들로 하여금 도에 나아가되 미혹하지 않게 하느니라.
또 삼매가 있나니, 이름은 성판(成辦)이라 하며 여래는 이 삼매에 들어가서 중생의 무리로 하여금 나쁜 계율을 버리고 청정한 계율로 나아가게 하느니라.
또 삼매가 있나니, 이름은 참괴락(慚愧樂)이라 하며 여래는 이 삼매에 들어가서 중생의 무리로 하여금 인욕을 받들어 지니게 하느니라.
또 삼매가 있나니, 이름은 진덕(進德)이라 하며 여래는 이 삼매에 들어가서 중생의 무리로서 게으름을 피우는 이로 하여금 용맹스런 뜻을 일으키게 하느니라.
또 삼매가 있나니, 이름은 일기무려(一己無侶)라 하며 여래는 이 삼매에 들어가서 망령되기 좋아하는 중생으로 하여금 속히 선정(禪定)에 들어가게 하느니라.
또 삼매가 있나니, 이름은 항복(降伏)이라 하며 어리석음을 고집하는 중생으로 하여금 지혜로써 스스로 장식하게 하느니라.
또 삼매가 있나니, 이름은 무천루(無穿漏)라고 하며 믿음이 없는 중생으로 하여금 신근(信根)에 편히 있게 하느니라.
또 삼매가 있나니, 이름은 총지덕(摠持德)이라 하며 여래는 이 삼매에 들어가서 견문이 적은 중생으로 하여금 많은 견문을 얻게 하느니라.
또 삼매가 있나니, 이름은 위의칙(威儀則)이라 하며 여래는 이 삼매에 들어가서 중생의 무리로 하여금 위의와 용모를 바로잡아 예절을 잃지 않게 하느니라.
또 삼매가 있나니, 이름은 시은(施恩)이라 하며 여래는 이 삼매에 들어가서 애욕에 집착하는 중생으로 하여금 영원히 애욕이 없게 하느니라.
또 삼매가 있나니, 이름은 이도(以度)라 하며 여래는 이 삼매에 들어가서 성을 내는 중생으로 하여금 성냄을 끊어 없어지게 하느니라.
또 삼매가 있나니, 이름은 무혹(無惑)이라 하며 여래는 이 삼매에 들어가서 어리석은 중생으로 하여금 지혜의 업을 친히 익히게 하느니라.
또 변지(遍至)삼매가 있나니, 여래는 이 삼매에 들어가서 중생의 무리로 하여금 3유(有)에 집착하지 않게 하느니라.
또 삼매가 있나니, 이름은 일체신체형색(一切身體形色)삼매라 하며 여래는 이 삼매에 들어가서 시방 국토의 온갖 중생들로 하여금 변화로 백천억의 형색이 되게 하되 그러나 그 중생들은 저마다 서로 알지 못하게 하느니라.
나는 이제 최승아, 간략하게 그 요긴한 것만을 해설하였느니라.
가령 여래가 겁(劫)으로부터 겁에 이르고 이에 백 겁에 이르기까지 여래가 드는 삼매를 설한다 하여도 다할 수 없으며, 오직 부처님 세존만이 널리 펼 수 있을 따름이니라.”
이때에 최승이 앞에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매우 기이하옵고 매우 특별하나이다. 여래의 몸[身相]으로 지으신 변화는 불가사의하여 측량할 수 없사온데 형상이 없는 선권(善權)으로써 스스로 장식하였으며,
여래께서 말씀하신 삼매에 들어가는 것은 옛날에는 보지 못했던 것이요, 옛날에는 듣지 못했던 것이옵니다.
만일 어떤 보살이 이 삼매의 이름이나 정의(定意)를 듣고 지녀 읊고 외우면 노닐고 있는 데서마다 언제나 자재(自在)를 얻을 것이며,
만일 다시 권하고 도와 그를 대신하여 기뻐하거나 그를 위하여 모든 부처님의 법에 공양올리거나 하면, 모든 성문의 경계가 아니요 연각의 승(乘)으로도 다시 미칠 수 없겠습니다.
만일 어떤 이가 이 정삼매(定三昧)를 비방하면 언제나 캄캄한 데 있으면서 일찍이 결단하여 알지 못하며,
설령 다시 사람 몸이 된다 하여도 구제할 수 없는 지옥에 들어가지만 그 죄는 오히려 작아서 아마 말할 거리조차 못 되옵니다.
만일 어떤 이가 정의삼매(定意三昧)를 미워하거나 시새우면 그 죄는 헤아리기조차 어려워서 자칫 겁수 동안 귀머거리ㆍ소경ㆍ벙어리로 있으면서 끝내 법을 듣지 못하며,
비록 사람이 된다 하더라도 항시 고통이 많고 이간질과 속임수는 말로 다할 수 없으며
스스로 보살이 아니라면 견문(見聞)이 넓고 많아야 비로소 이 정정(正定)삼매를 들을 수 있겠습니다.
만일 어떤 이가 권유하여 일으켜서 이 정(定)을 외고 익히면 즉시 모든 시방의 부처님을 뵈올 수 있을 것이며,
또 저희도 오늘날 정의(定意)를 강하고 해설하면서 뜻이 바뀌거나 고쳐지지 않아야 비로소 정정(正定)과 상응하겠습니다.”
그때에 최승은 부처님의 위신력을 이어받아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오늘 이 대중에 와서 모여 있는 이들로서 보살과 4부(部)와 천ㆍ용ㆍ귀신들은 두루 여래의 정의를 얻어 감동하는 바를 보려 하면 혹은 이를 무릅쓰게 되어 윤택하는 바가 많고 성취하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세존이시여, 가엾이 여기시어 큰 광명을 놓으셔서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국토를 비추시고 그 안에 있는 순숙(純淑)한 중생들이 광명을 받아 교화되어 두루 제도되고 해탈하게 하소서.”
그때에 세존께서는 그가 하는 말을 옳다고 여기시어 곧 그 자리 위에서 그 형상 그대로 계시면서 삼매정수에 드셨으니, 그 삼매의 이름은 우족지륜정의(右足指輪定意)였다.
큰 광명을 놓으니, 그 광명은 이 인세계(忍世界)를 비춘 뒤에 다시 시방 모든 부처님의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국토를 비추시자, 시방 국토에 있는 모든 보살들로서 백천억 대중이 그 광명을 찾아 이 인세계로 왔다.
여기서 동방으로 96강[江河]의 모래 수만큼 많은 모든 부처님 세계를 지나고 이 수보다 더 초과한 뒤에 해보(海寶)라는 나라에 부처님이 계셨으니,
명호는 보정(寶淨) 여래ㆍ지진ㆍ등정각ㆍ명행성위ㆍ선서ㆍ세간해ㆍ무상사ㆍ도법어ㆍ천인사ㆍ불세존이시다.
현재 설법하고 계시며 거기에 변총(辯聰)이라는 보살은 불퇴전의 대사(大士)인데 이 광명을 보고는 곧 보정 여래께로 가서 머리 조아려 발에 예배하고 한 쪽에 가서 서 있었다.
그때에 보정여래께서 변총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저 세계에 가되 위의를 가다듬어 마땅한 법칙을 잃지 말아라.
그렇게 하는 까닭은 그 세계는 뜻과 성질이 억세고 하는 일이 졸포(卒暴)하여 고락(苦樂)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저 세계 중생은 교만스러워 바른 법을 수순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만일 단점이 있는 것을 보거든 부디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이와 같이만 할 수 있다면 마땅히 알아라. 지금이 적당한 때이니라.”
그 부처님 세계의 많은 보살들은 각자 그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희들은 좋은 이익을 쾌히 얻었나이다. 전생의 복으로 자신이 그 인토(忍土)에 태어나지 않은 것을 경하하나이다.”
이때에 변총보살은 십천의 보살들을 데리고 앞뒤로 둘러싸여 마치 역사(力士)가 팔을 구부렸다 펴는 잠깐 사이에 인토세계에 이르러 석가문(釋迦文)부처님의 처소에 이르러 서 있었다.
그때에 세존께서는 아시면서도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변총보살과 그 밖의 보살들을 보느냐?”
대답하였다.
“그러하옵니다. 이미 보았나이다.”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이 보살은 의변(義辯)이 첫째가고 자(慈)ㆍ비(悲)ㆍ희(喜)ㆍ호(護)하며 언어가 부드럽고 뜻하는 행이 높고 멀며 먼저 웃고 나중에 말을 하며,
얼굴빛이 온화하고 거듭 묻지 않고 말한 바는 간략하며,
중생을 접하여 제도하되 마치 부처님의 제도와 같고 불퇴전을 이루어 보살도를 세웠느니라.”
이때에 변총보살과 십천의 보살은 세존의 발에 예배하고 오른편으로 세 바퀴 돌고는 차수(叉手)하고 부처님을 향하여 게송으로 찬탄하였다.
명성은 시방(十方)에 떨치시고
공덕과 명성으로 가르치고 칭찬하시네.
인존(人尊)께서 계신 방소에 나아가면
그 제도 받지 않은 이 없나이다.
부처님 세계는 지경이 청정하여
5도(道)라는 이름은 들리지도 않사온데
그 곳을 버리고 여기 나오셨으니,
그 자비는 비유 등으론 견줄 수 없나이다.
세존께서 지금 나타내신 바는
인간 세상에서는 진실로 있기 어렵사옵니다.
덕이 쌓여 마치 수미산(須彌山) 같사오니
저희들은 발 아래 몸을 던지옵니다.
정사(正使)로 정진을 수행하되
1겁에서 백 겁에 이르렀다 하여도
잠시 동안 이 인토의 세계에서
비심(悲心)을 수행함만 못하나이다.
모든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실 때는
먼저 청정한 국토를 선택하십니다.
세존께선 이 5탁(濁)의 세간에서
홀로 능히 참으시옵니다.
장하시옵니다. 심히 있기 어렵사온데
돕고 보호하시고 평등하게 제도하시네.
가르침을 유포하여 삼승에 미치시니
몸과 입과 뜻을 청정하게 하나이다.
이미 보살도를 이루었사옵고
또한 퇴전(退轉)하는 마음이 없사오며
뜻은 갑절 정진에 나아가셨기에
이제 짐짓 머리 조아려 예배하나이다.
모든 의심과 번뇌를 끊으시고
쾌히 10선(善)의 행을 닦으셨으며
모든 부처님의 법 구족하시니
말씀하시는 바 지혜 바다[智海]보다 깊사옵니다.
본래 있는 국토에서 억백 겁 동안
길잡이[導師]로서 있었다 하여도
이 국토에서 한 겁 동안 있으면서
한 사람을 제도한 것보다 못하옵니다.
또한 한량없는 세계에 다니셨으니,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고뇌와 8무한처(無閑處)가
있다는 것조차 듣지 못하였습니다.
여기의 사람들은 거의가 억세고
온갖 때[衆垢]로 몸을 이루었는데
네 가지 진리[四諦]와 진여의 물로써
안팎을 씻어 깨끗하게 하나이다.
저희들은 신심(信心)이 지극한 까닭에
멀리서부터 와서 귀명하오며
정의(正意)의 법을 듣고자 하오니
원컨대 때에 맞게 연설하여 주옵소서.
그때에 변총보살은 게송으로써 부처님을 찬탄하고 나서 나아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무엇을 보살의 뜻이 견고하고 정의(正意)를 받아 낼 수 있으며 들은 교계(敎誡)에도 만족해 함이 없다고 합니까?
어떻게 하면 보살이 말과 행이 상응하고 안의 성품이 부드러워지나이까?”
그때에 세존께서 변총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 잘 생각하여라. 내가 너를 위하여 그 뜻을 분별하리라.”
대답하였다.
“그러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변총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네 가지 법의 갖가지]
“정의 마음[定心]을 닦아 네 가지 법을 성취하면 보살의 뜻이 견고하여지고 정을 받아 낼 수 있게 하며 들은 바 교계(敎誡)에서도 또한 만족해 함이 없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 법인가?
이른바 자비(慈悲)의 4등(等)에서 마음이 게으르지 않으며,
제도한 인민들은 마치 요술과 같고 허깨비와 같으며,
모든 부처님의 지혜는 같을 이가 없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변총아, 네 가지 법을 성취하면 뜻이 견고하여지고 정을 받아 낼 수 있는 것이니라.”
“어떻게 보살은 한 뜻으로 향해 나아가되 말[言]에 착란이 없나이까?”
부처님께서 변총에게 말씀하셨다.
“이에 보살은 다시 네 가지 법을 성취해야 하느니라.
무엇을 네 가지 법이라 하느냐?
보살은 한결같이 중생이 공함을 연설하고 모든 법이 공함을 연설하며,
모든 받고 들어감에도 도무지 집착하는 바가 없으며,
보살이 짓는 공덕을 찬탄하며,
선악과 유위와 무위의 법을 분별하되 선권(善權)을 생각하고 행하나니,
이것이 바로 네 가지 법이니라.”
“어떻게 하면 보살은 선근을 더욱더 늘리며 갈수록 많아지고 줄어들지 않나이까?”
부처님께서 변총에게 말씀하셨다.
“또 네 가지 법이 있어 선근을 더욱더 늘리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 믿음이요,
둘째 들음이며,
셋째 보시함이요,
넷째 벗어남[出要]이니라.
이것이 바로 네 가지 법이니 보살로 하여금 선근을 더욱더 늘어나게 하느니라.”
“어떻게 하면 보살은 마음이 착란하지 않고 또한 의심하지도 않나이까?”
부처님께서 변총에게 말씀하셨다.
“또 네 가지 법을 사유하여 뜻을 오로지한다면 착란하지 않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이른바 마음은 언제나 거기에만 전념하며,
금하면서 예절을 지니며,
이끗[利養]을 바라지 않고,
명칭(名稱)을 구하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네 가지 법으로써 뜻에 착란이 있지 않게 하는 것이니라.
또 네 가지 법이 있어 선근을 더욱더 늘리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이른바 네 가지 법이란,
다른 이로 하여금 믿음이 서게 하며,
이미 보시한 뒤에는 그 보답을 바라지 않으며,
법을 보호하는 임금에게 미치며,
보살은 언교로 가르쳐 주되 어긋나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네 가지 법으로써 수행하는 것이니라.
또 네 가지 법이 있나니,
보살은 마땅히 사유하되 한 지위[地]에서 다시 한 지위에 이르기까지 혹은 물러나기도 하고 혹은 나아가기도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 법인가?
중생들을 가르쳐서 그 선근을 익히게 하며,
모든 악(惡)을 멀리 여의게 하며,
어리석고 미혹한 일을 행하지 않게 하며,
큰 서원을 버림이 없어 뜻에 겁내거나 나약하지 않게 하나니,
이것이 바로 네 가지 법으로써 보살이 수행하는 바이니라.
또 네 가지 법이 있나니, 보살이 받들고 지닐 바이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이른바 중생을 교화하되 권방편(權方便)으로써 하며,
범부의 사람을 믿음의 자리[信地]에서 있게 하며,
제도하는 바에 허망함이 없으며,
부처님의 거룩한 상호[威相]를 나타내어 중생을 대하나니,
이것이 바로 네 가지 법으로써 보살이 받들고 지닐 바이니라.
또 네 가지 법이 있나니, 보살은 의당 사유해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이른바 마땅함에 따라 나아가고 그치며,
옷을 입되 장식하지 않으며,
그때에 맞추어 마땅함에 따르며,
항시 고락(苦樂)을 참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네 가지 법으로써 수행할 바이니라.
또 네 가지 법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 법인가?
이른바 스스로 뜻의 성품을 조복하며,
언제나 도의 마음을 일으키며,
선권(善權)을 여의지 않으며,
오로지 염불(念佛)에만 뜻을 두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네 가지 법이니라.
또 네 가지 법이 있나니, 보살은 마땅히 사유해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보살은 혼자 처할 것을 생각해야 하며,
성문의 마음이나 벽지불의 뜻을 멀리하며,
법을 구하되 만족해 함이 없으며,
들은 바의 바른 법은 널리 사람들에게 연설하여 주나니,
이것이 바로 네 가지 법이니라.
또 네 가지 법이 있나니, 보살은 마땅히 사유해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보배를 구하여 궁핍한 이에게 주며,
의약으로 병든 이들을 치료하며,
이치[義]를 구하되 싫증냄이 없으며,
온갖 고통을 참아 내나니,
이것이 바로 네 가지 법이니라.
또 네 가지 법이 있나니, 보살은 마땅히 사유해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불기인(不起忍)을 행하며,
멸진인(滅盡忍)을 초월하며,
근본이 되는 12인연을 사유하며,
인(忍)에 집착하지 않고 인으로 저마다 여의나니,
이것이 바로 네 가지 법이니라.
또 네 가지 법이 있나니, 보살은 마땅히 사유해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오로(惡露)의 부정관(不淨觀)을 사유하며,
들숨ㆍ날숨을 세며,
맑고 깨끗한 법[淸白法]을 행하며,
스스로 겸손하고 낮추어야 하나니,
이것이 바로 네 가지 법이니라.
또 네 가지 법이 있나니, 보살은 의당 사유해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법에 상응하는 중생을 관찰하고 그러한 뒤에야 약을 주며,
언제나 공경하는 생각을 지니고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 것이며,
만일 대중에 있으면 이끗에 집착하지 않으며,
권방편으로 행하되 나아갈 바에 거리낌이 없나니,
이것이 바로 네 가지 법이니라.
[다섯 가지 법의 갖가지]
또 다섯 가지 법이 있나니, 보살은 마땅히 사유해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평등한 법을 받되 빠뜨리거나 없애지 않아야 하며,
자기 자신과 그의 몸은 평등하여 다름이 없다고 관하며,
선지식과 함께 종사(從事)하며,
영원히 결사(結使)를 끊고 남음이 없게 하나니,
이것이 바로 다섯 가지이니라.
또 다섯 가지 법이 있나니, 보살은 마땅히 사유해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스스로 자기의 허물을 반성하고 남의 단점을 보지 말며,
만일 나쁜 부류에 있어도 인자한 마음을 행하게 하며,
왕성한 모든 법에 그 연(緣)이나 집착을 버리며,
도의 마음이 견고하여 끝내 잊어버리지 않으며,
또한 앞 사람으로 하여금 그 도의 뜻을 행하게 하나니,
이것이 바로 다섯 가지이니라.
또 다섯 가지 일이 있나니, 보살은 마땅히 사유해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보시하는 일이 항시 눈앞에 나타나 있으며,
다음에는 다시 사람들을 가르쳐 보시를 행하게 하며,
마음을 붙잡아 보시할 적에 또한 선택하되 중생의 옳고 그름을 보지 않으며,
모든 법이 매우 깊어 모두가 해탈을 얻으며,
성불하기에 이르기까지 도수(道樹)를 장엄하나니,
이것이 바로 다섯 가지 법이니라.
또 다섯 가지 법이 있나니, 보살은 마땅히 사유해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행(行)이 일어나고 소멸하는 것을 알며,
힘과 두려움 없음으로 중생을 버리지 않으며,
온갖 지혜를 분별하며,
또한 증상지(增上智)를 알며,
서로 어기거나 저버리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다섯 가지 법이니라.
또 다섯 가지 법이 있나니, 보살은 마땅히 사유해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5도 중에 있되 영원히 저 언덕에 건너가며,
모든 부처님께 공양올리고 예배하고 섬기고 공경하며,
자삼매(慈三昧)에 들어가 스스로 재미있게 즐기며,
부처님의 지혜가 한량없이 눈앞에 나타나 있으며,
한량없는 삼매(三昧)에 또한 의심하거나 어려워하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다섯 가지이니라.
또 다섯 가지 법이 있나니, 보살은 마땅히 사유해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큰 서원의 마음을 일으켜 마침내 중도에 뉘우치지 않으며,
말은 말을 따라 쓰되 망발(妄發)하지 않으며,
선(禪)에 의지하나 선에 집착하지 않으며,
생각하고 지녀도 집착하지 않으며,
처소에서 노닐되 좋아하지는 않나니,
이것이 바로 다섯 가지 법이니라.
변총보살이여, 보살마하살이 이 정의(定意)의 근본된 행을 닦으면 곧 여래의 정수(定受)를 얻느니라.”
그때 세존께서 이 법을 말씀하실 때에, 2억의 모든 하늘과 세간 사람들이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의 뜻을 내었고, 다시 5천의 천자들이 불기법인(不起法忍)을 얻었다.
이때 모든 부처님 국토의 모든 보살들은 저마다 꽃과 향을 가지고 공양을 올렸는데 그 꽃이 무릎까지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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