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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견율비바사 제5권[3]
<성스러움[聖]에 대해서이다.>
“어째서 성스러움이라고 합니까?”
“육안으로써도 성스런 눈과 다름이 없으니, 하늘 사람의 행한 바의 모든 선은 이 눈으로 이룩되며, 모든 육안을 여의고 모든 티끌과 때를 여의어 멀리 비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본에서 말씀한 바인 ‘성스러운 눈으로써 살펴봄’이라 함이 이것입니다.
지혜 눈[慧眼]이라 함은 힘써 부지런히 함에서 얻어지니, 또한 성스런 눈과 다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성스러움에 머무른 연후에 얻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지혜 눈을 성스러운 눈이라 합니다.
왜냐하면 몸으로써 성스러움에 의지하는 까닭에 성스런 광명을 얻어 마음이 광명을 거두는 까닭에 멀리 살펴 볼 수 있어서 석벽을 통한 참된 밝음과 같아서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청정한 지혜 눈으로써 중생들의 남과 떨어짐과 받아 남을 자세히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도 범지는 떨어짐은 보지마는 남은 보지 못하기 때문에 아주 없다[斷]는 견해를 내고,
또 어떤 외도는 남은 보지마는 떨어짐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하다[常]는 견해와 아홉 가지 중생지(衆生居)를 냅니다.
부처님은 항상하다는 견해도 살피시고 아주 없다는 견해도 살피시니, 그러므로 율본에서 말씀하신 바 ‘지혜 눈으로써 중생들이 떨어짐과 남을 보신다’ 함이 그것입니다.
아주 깨끗하다[極淨] 함은 여래는 열한 가지의 번뇌를 여의시니, 그러므로 아주 깨끗하다고 합니다.
경전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부처님이 아누루타에게,
‘의심은 마음의 번뇌이니, 알고 나면 버려버리라. 마음을 잡도리하지 못하면 이것도 번뇌며, 수심(睡心)ㆍ면심(眠心)도 번뇌다.
경희시심(驚喜施心)ㆍ대심(大心)ㆍ과정진심(過精進心)ㆍ극유심(極柔心)ㆍ극다언심(極多言心)ㆍ불분별심(不分別心)ㆍ극관색심(極觀色心)인 이와 같은 것은 번뇌의 마음들이다.
아누루타야, 이 열 한 가지 번뇌는 여래가 극히 힘써 부지런하였기 때문에 이 번뇌를 여의었으며,
그 밖에 나는 물질을 보면서 빛깔을 보지 않았고 빛깔을 보면서 물질을 보지 않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처음으로 삼아서 여래는 이미 열한 가지 번뇌를 넘으셨고, 또한 사람의 눈을 넘으셨나니,
그러므로 율본의 말씀한 바,
‘성스런 눈의 청정함으로써 세간의 육안을 넘어서 보면 중생들의 육안과 같아서 다름 없으며, 중생들의 떨어짐과 받아 남도 본다’고 함이 이것입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부처님은 중생들의 처음에 나고 떨어짐을 보십니까?”
대답하였다.
“처음에 나고 떨어짐은 보시되 중간에서는 보시지 않으시나니,
그러므로 율본(律本)에서 말씀한 바도 이와 같습니다.”
<천(賤)에 대해서이다.>
“무엇을 천하다고 합니까?”
“어리석은 행으로 나쁜 법을 행하는 것을 천하다고 합니다.
또 가난함에 때어남도 천함이요, 사람들이 미워함도 천함입니다.”
<귀(貴)에 대해서이다.>
“무엇을 귀하다고 합니까?”
“지혜로운 마음으로 생을 받으니, 그러므로 귀하다고 합니다.”
좋은 빛깔이라 함은 성내지 않는 가운데서 옴이요, 나쁜 빛깔은 성내는 가운데서 옵니다.
착한 길[善道]이란 살면서 착한 길에 이르름이니, 혹은 많은 금ㆍ은과 값진 보배도 말하여서 착한 길이라고 합니다.
나쁜 길[惡道]이란 간탐에 종사하였으므로 가난하고 하천(下賤)한 데에 나는 것도 나쁜 길이라고 합니다.
하천함이란 음식을 얻기 어려워서 아침 저녁에 이바지 하지 못함입니다.
업을 따라 행한 바를 여래는 다 아시며, 또 중생들이 지옥 가운데서 여러 고통 받음을 보시며, 여래는 보시고 이런 생각을 하십니다.
‘이 중생들은 무슨 죄의 뿌리를 심었기에 이런 고통을 받으며 낮에나 밤에도 쉬지 못하는가?’
여래는 자세히 살피시고는,
‘이 중생들은 나쁜 업을 지었기 때문에 이에 이 갚음을 받는다’고 하십니다.
다시 천상을 살피시며 여러 천인들이 이타원림(難陀園林)ㆍ미사원림(眉沙園林)ㆍ파류사가원림(波留沙迦園林)에서 천인들이 구경하며 즐겁게 놀음을 보십니다.
여래는 보시고,
‘이 중생들은 무슨 복업을 지었기에 이곳에 와서 나서 하늘의 복 자리를 받는가?
여러 선한 업을 심었기에 이와 같은 갚음을 얻느니라’고 하시니,
이는 행업(行業)으로 아시는 바요, 장차 오는 세상을 알음도 그와 같으니,
여래는 성스런 눈의 앎으로써 큰 신통을 얻으셨습니다.”
<몸으로 나쁜 업을 지음에 대해서이다.>
물었다.
“무엇을 몸으로 나쁨을 지음이라 합니까?”
대답하였다.
“나쁨이란 여러 가지 더럽고 깨끗하지 못함이니, 몸으로 나쁜 업을 지음이 그와 같습니다. 여래는 다 아시니, 입으로 나쁜 업을 짓고 뜻으로 나쁜 업을 지음도 다 앞 글귀에서 말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착한 사람을 헐뜯음에 대해서이다.>
“무엇을 착한 사람이라 합니까?”
“부처님ㆍ벽지불ㆍ성문과 내지 속인으로서 수다원의 도도 착한 사람이라 합니다.”
“무엇을 헐뜯음이라 합니까?”
“모든 선한 법을 없애며 욕설을 퍼붓고 꾸짖는 것이니, 이것이 헐뜯는 말입니다. 다시 다른 말도 있습니다.
‘부처님ㆍ벽지불ㆍ성문은 다 나쁜 법이요, 바른 법이 아니며, 선정의 법도 없고, 열반의 법도 없고, 불도의 결과인 법도 없다’고 함이니,
이와 같은 헐뜯고, 이와 같은 말을 하며, 혹은 알고서 헐뜯고 혹은 모르고서도 헐뜯으니, 다 착한 사람들을 헐뜯는 데에 듭니다.
이와 같은 인간들은 무거운 업을 지으니, 무거운 업 때문에 천상의 문은 닫히고 지옥의 문은 열립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나는 이제 증거를 말하겠습니다.
어떤 한 마을에 두 비구가 있었는데 한 분은 늙었고 한 분은 젊었습니다. 두 사람은 마을에 들어가 처음 한 집에 이르러 뜨거운 죽 한 그릇을 얻었습니다. 늙은 비구는 죽을 얻고서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나의 뱃속에 풍병이 있으니 이 죽으로 다시 데우리라. 만약 이 죽을 먹으면 뱃속의 풍병이 없어질 것이다.’
이때 어떤 사람이 나무 한 조각을 가지고 문지방을 만들려고 하여 한 쪽에 던져두었습니다.
이에 늙은 비구는 곧 나무 위에 앉아서 죽을 마셨더니,
나이 젊은 비구는 늙은 비구가 죽을 들이마시는 것을 보고 깔보면서,
‘마가라(摩呵羅)가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구나’고 하였습니다.
늙은 비구는 죽을 들이마신 뒤에 절에 돌아왔습니다.
닿자마자 나이 젊은 비구에게 물었다.
‘장로여, 불법 가운데서 얻은 바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수다원의 도를 얻었습니다.’
늙은 비구가 말하였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다시 나아가 다른 도를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는 애욕이 다한 비구를 비방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나이 젊은 비구는 듣자마자 허물을 뉘우쳤습니다.
‘대덕이시여, 나는 대덕에게 착하지 못한 법을 지었습니다. 원컨대 허물을 참회합니다.’
곧 기쁨을 받고 떠나갔습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어떤 사람이 성인이나 큰 비구를 욕설하고 꾸짖었으면 이렇게 말을 하십시오.
‘장로여, 저는 이제 장로에게 참회하오니, 장로는 받아 주소서.’
만약 젊은이면 땅에 엎드려 발에 예배하고 합장하여 이렇게 말을 하십시오.
‘대덕이시여, 이는 저의 허물이니 대덕들 가운데서 저는 이제 참회합니다. 대덕은 받으소서.’
만약 받지 않으면 다른 데로 가되 절에 이르면,
거기의 비구에게 가서 만약 늙은이면 땅에 엎드려 발에 예배하고 합장하여,
‘대덕이시여, 이는 저의 허물이오니 대덕은 받으소서’라고 하십시오.
만약 젊은이면,
‘장로여, 이는 나의 허물이니, 나는 이제 참회합니다. 장로는 받으십시오’라고 하십시오.
만약 열반에 들었으면 열반한 곳에서 참회를 하십시오. 참회를 하고 나면 이와 같은 하늘의 길과 열반의 길의 문은 닫히지 않으리니, 앞과 같아서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삿된 견해에 대해서이다.>
“무엇을 삿된 견해라 합니까?”
“뒤바뀐 견해이니, 이것이 삿된 견해입니다.
이미 삿된 견해의 형상을 받아 다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니, 입의 나쁨 때문에 성인을 비방하며, 뜻의 나쁜 업도 그와 같습니다.
이미 삿된 견해를 지녔으므로 일체의 나쁜 업은 삿된 견해에 포함되어 들어갑니다.
삿된 견해는 큰 죄업이며 역죄(逆罪)를 지은 것입니다.
경전에서 말씀한 바와 같으니, 부처님이 사리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는 계율을 지니되 두루 갖추고 삼매와 지혜를 완전히 갖추라. 자신의 바른 견해로 차츰 딴 사람들을 가르침도 이와 같다.
사리불이여, 삿된 견해도 그와 같나니, 몸과 입과 뜻을 여의지 않음이,
마치 사람이 흙을 뭉쳐서 던져도 땅을 떠나지 않는 것처럼,
삿된 견해인 나쁜 업도 지옥을 여의지 못하느니라. 왜냐하면 큰 죄가 되기 때문이니라.
’
경전에서 말씀한 바와 같으니, 부처님이 비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나쁜 업은 삿된 견해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보니, 아주 으뜸가는 큰 죄이니라.’”
<만약 몸이 죽으면에 대해서이다.>
“무엇을 죽음이라고 합니까?”
“죽음이란 죄로 지옥에 떨어지면 벗어날 수 없는 때요,
또 4대가 무너져 흩어짐이라 하며,
다시 받아서 남이라고도 합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만약 지옥으로 나아가면 하늘 길[天道]과 해탈문이 막힙니다.
또 말하자면 만약 나쁜 길로 나아가면 아귀ㆍ축생ㆍ아수라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 말하자면 지옥이란 아비(阿鼻)를 처음으로 하여 희고 검은 것을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또 말하자면 착[善]한 길이란 인간도 착한 길입니다.”
물었다.
“하늘이란 무슨 뜻입니까?”
대답하였다.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이 가장 훌륭한 것을 하늘이라 합니다.
앎(知)이란 눈으로 앎이니, 나머지 것은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제 간략히 성스런 눈의 품[聖眼品]을 말하여 끝마칩니다.>
무명이 과거의 숙명을 덮은 것을 숙명인 부리로 쪼아 무명으로 덮인 알을 깨뜨리는 것처럼, 현재 타락지(墮落知)도 같습니다.
누진지(漏盡智)라 함은 아라한의 도에서 번뇌[漏]가 없어져 다하는 지혜이니, 이것을 누진지라고 합니다.
과하치심(過下置心)이라 함은 이는 관심(觀心)입니다.
관심으로 괴로움을 알며, 이 사라짐[滅]에서 일체의 고제 모습과 의미를 벗어나지 아니하고 모두 다 통탈하여 압니다.
또 고제를 관하니, 무엇으로부터 일어나는가?
쌓임[集]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며 이것이 집제입니다.
또 괴로움의 사라짐을 관하니 이것이 멸제입니다.
멸제에 이르려고 함이란 곧 도이니, 4제를 관하여 마치면 모습이 이와 같아서 진실로 다름이 없으며 통달하여 다 압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나는 4제를 아니, 이와 같이 보고 이와 같이 아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욕루(欲漏)라 함은 욕루로부터 뛰어남이니, 이는 과(果)를 가리킴이요, 과 안에서 나는 이제 벗어났다고 말합니다.
또 아는 마음[知心]을 덮는 것이 있으니 관한 뒤에야 알며 나는 다시 태어나지 않으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율본에서 말씀한 바 ‘부처님은 바라문에게 ≺나는 다시 태어나지 않으리라≻고 하셨다’고 함이 이것입니다.”
법사가 물었다.
“이것은 과거에 태어나지 않음입니까, 현재에 태어나지 않음입니까, 장차 오는 세상에 태어나지 않음입니까? 만약 과거에 태어남을 말하면 과거에는 태어났다가 이미 죽었고, 만약 현재의 태어남을 말하면 현재는 태어나서 이미 살고 있고, 만약 장차 오는 세상의 태어남을 말하면 장차 오는 세상의 태어남은 아직 이르지 않았으니 어찌 다시 태어남이 있겠습니까?”
대답하였다.
“인(因)을 끊었기 때문에 이를 태어나지 않음[不生]이라 합니다.
머무름[住]이란 범행(梵行)에 머무르는 것이고 범행(梵行)이란 모든 착한 사람[善人]들과 일곱 가지 배우는 이[七學]들과 함께 머무름입니다.
이는 부처님이 출가한 사람을 지시하신 것입니다.
할 일을 다 하였다 함이란, 4제ㆍ4도(道)에서 할 일을 이미 끝냈다 함이니,
그러므로 부처님은 바라문에게,
‘나는 할 일을 이미 끝냈으므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느니라’고 하심이 그것입니다.”
“무엇을 돌아오지 않음[不還]이라 합니까?”
“모든 번뇌가 나의 곳에 돌아와 이르지 않으니, 그러므로 돌아오지 않으며, 다시 힘써서 부지런히 할 것이 없습니다. 여래는 관하여 아심이 이와 같으므로 이를 누진지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래는 바라문에게 열어 보이려 하기 때문이었고, 부처님은 이미 3달지인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지혜를 얻으셨습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이와 같은 말로 스스로 칭찬하지 않으셔야 하는데 왜 여래로서 스스로 칭찬하십니까?”
“부처님은 세간과 바라문들을 가엾이 여기시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니,
‘나는 성인이다. 나는 으뜸가는 어른이며 위없는 높은 이다. 일체지(一切智)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예배를 하지 아니한다’고 하십니다.
바라문은 부처님의 갖가지 말씀을 듣고 마음에 기쁨을 내어 곧 부처님 앞에서 허물을 뉘우치고,
‘구담 사문은 이와 같은 거룩한 이익이 만족하셨는데 나는 진실로 몰랐구나.
구담 사문이야 말로 전생의 공덕이 두루 갖추었도다’하고,
바라문은 스스로를 몹시 꾸짖었습니다.
꾸짖은 뒤에 설법을 듣고 곧 찬탄하였습니다.
‘훌륭하십니다, 훌륭하십니다, 구담 사문이시여. 법의 맛[法味]을 지시하셨습니다’고 하였습니다.”
법사가 물었다.
“무엇 때문에 두 번이나 ‘훌륭하십니다’라고 찬탄하였습니까?”
다시 게송으로 말하였다.
성냄[瞋]ㆍ사라짐[滅]ㆍ급함[急]
찬탄[讚歎]ㆍ은근[慇懃]ㆍ아주 놀람[極警]
웃음[笑]ㆍ믿는 마음[信心]ㆍ근심[愁]
만족함[足]ㆍ아름다움[美]의
구절구절을 거듭 말씀하소서.
“이 가운데의 찬탄은 무슨 까닭인가?
바라문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마음이 기쁘면서 사례할만한 대답이 없었으므로 스스로 노래로써 읊었기 때문입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바라문은 마음에 이런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하신 법은 그 뜻이 깊고도 멀며 그 말씀은 좋은 맛이어서 사람들의 마음에 잘 들며 큰 자비를 내고 심히 기쁘게 하신다.’
바라문은 부처님을 향하여 말하였습니다.
‘저는 엎어진 바리와 같았는데 부처님께서 이제 설법하시어 저에게 들을 수 있게 하셨으니,
바리가 똑바로 놓여 단 이슬을 받을 수 있는 것과 같고,
사람이 풀과 나무로 값진 보배를 덮어 감춘 것을 어떤 사람이 지시하여 알게 하는 것과 같으며,
사람이 길을 잃어 헤매는데 어떤 사람이 손을 잡고 착한 길을 지시해 준 것과 같고,
크게 어두운 곳에 있는데 어떤 사람이 등불과 촛불을 주어 길을 볼 수 있게 하는 것과 같으니, 저도 그와 같습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바라문은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나는 이제 다시 이 뜻을 펴겠습니다. 바라문의 마음은 엎어진 바리와 같아서 단 이슬 맛을 받을 수 없었는데 부처님이 이제 열어 보이시어 단 이슬을 받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풀과 나무로 덮어 감춰진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가섭 부처님으로부터 뒤에는 삿된 견해가 풀과 나무가 되어 바른 법을 덮고 감추어서 지시하는 사람이 없었으나, 이제 부처님의 지시로 알게 한 것입니다.
길을 잃어 헤맴이란 외도와 삿된 견해가 길이 되어 묘한 도 가운데에서 헷갈려 헤매면서 착한 길을 보지 못했는데, 부처님은 법을 손으로 삼아 길을 가리켜 제도 해탈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어리석고 어둠으로 삼계를 보지 못하였는데, 부처님은 법을 등불과 촛불로 삼아 베풀어 주어서 광명을 얻게 한 것입니다.
비란야 바라문은 찬탄을 하고 마음이 극히 청정하여 세존에게,
‘나는 이제 구담 사문께 귀의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귀의함이란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또 의지함을 말하니, 부처님은 번뇌를 죽이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음에 귀의법(歸依法)과 귀의승(歸依僧)에서 귀의법이란 여래는 수행을 쌓으셔서 이 법을 얻으셨으므로 다시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만일 사람이 법을 따라 법을 곧 느끼면 지옥ㆍ아귀ㆍ축생에 떨어지지 않으니, 법이란 뜻의 느낌[受]입니다. 또 성인의 도와 열반을 말합니다.
도(道)라 함은 법입니다. 경전에서 말씀한 바와 같습니다.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법은 지음이 아니요[不作], 8지도(支道)는 여러 가지 법에서 으뜸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나는 이제 간략히 해설하였습니다.
또 바라문이 있었으니, 차다마나바(車多摩那婆)라고 하는데, 노래로 읊으면서 부처님을 찬탄하고 칭송하였습니다.
욕(欲)이 떠나가매 욕이 움직이지 않고
근심 걱정되는 법은 짓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맛을 거슬리지 않고
지극히 잘 분별하여 아시고
뭇 법에서 가장 높으니
귀의를 받아야 하옵니다.
4향인(向人)에게 보시를 하되
만약 분별하면 여덟이 있으니
상가 중에서 맨 위이며
큰 과보를 얻으셨나니
여기에 스스로 귀의함이
참된 우바새라고 하옵니다.
이와 같이 바라문은 말하였습니다.
‘부처님은 제가 이미 3귀의를 받았는 줄 아옵소서.’”
법사가 말하였다.
“만약 여기에서 3귀(歸)를 해설하면 복잡해질 것입니다. 만약 알려고 하면 『아비담비바사(阿毘曇毘婆沙)』에서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구담 사문이시여, 저가 이미 우바새가 된 줄로 아소서. 부처님은 제가 바로 부처님의 우바새라고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물었다.
“무엇을 우바새라고 합니까?
누가 우바새이며, 누가 우바새가 아닙니까?
어떠한 계율이 있기에 우바새가 되며 마음이 있기에 우바새가 됩니까?
어째서 우바새라 하며, 어째서 우바새라 하지 않습니까?”
법사가 말하였다.
“이 뜻은 심히 많아서 이 가운데서는 말할 수 없으므로 『수다니비바사(修陀尼毘婆沙)』에서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이후라고 함은,
‘지금으로부터 목숨을 마치기까지 딴 스승을 받들지 않음을 부처님은 아소서.
만약 어떤 사람이 칼로 저의 머리를 끊으면서 저에게 부처님을 비난하고 법을 비난하고 비구승을 비난하는 말을 하게 하여도 저의 머리가 차라리 땅에 떨어질지언정 이런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라문은 몸과 목숨으로써 여래에게 받들어 의탁하며 스스로 공양하려고 이와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세존은 저의 청을 받으소서. 비란야국에서 전 여름 석달은 비구승들과 함께 계시옵소서.’
바라문이 말하였습니다.
‘저는 이제 이미 우바새가 되었습니다. 여래는 저를 가엾이 여기시어 저의 청을 비란야국에서 받으시옵소서.’
여래는 잠자코 청을 받으셨습니다.”
법사가 물었다.
“부처님은 어째서 바라문의 청을 대답으로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미 세간 사람들은 몸과 입으로써 대답해야 하나 세존은 인정하는 마음으로 대답하심은 바라문을 가엾이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청을 받으신 줄로 알았다에 대해서이다.>
“무엇을 청을 받으셨다고 합니까?”
“만약 청을 받지 않으셨다면 입과 몸으로 대답하실 것이나 세존은 잠자코 얼굴빛이 기쁘셨으므로 부처님께서 청을 받으신 줄 알았습니다.
바라문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을 세 번 돌고 사방에서 예배하고 떠나가되, 손을 합장하여 정수리 위에 놓고 물러나며 걷다가 여래가 아주 보이지 않자 다시 예배하고 앞으로 돌아서 떠나갔습니다.
‘이때 비란야국에서 극도로 크게 흉년이 들었다’에서 이때란 부처님께서 비란야 바라문에게서 전 여름 석달 동안의 (청을) 받은 때입니다. 흉년이란 음식을 얻기 어려움이요, 혹은 사람이 청정하고 지극한 마음이 아니면 바로 음식이 있지마는 주지 않는 것도 흉년이라고는 하나 비란야국에서는 그렇지 않았으니, 오곡(五穀)이 결실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두 가지 의심에 대해서이다.>
“무엇을 두 가지 의심이라 합니까?”
“두 가지 의심이란 두 가지 마음의 의심입니다.”
“무엇을 두 가지 마음의 의심이라 합니까?”
“마음에 의심됨이니, 여기의 여름 석 달 동안에 걸식하면 얻을 수 있을까를 의심하기도 하고, 얻지 못할까를 의심하기도 하며,
생활할 수 있으리라고 의심하기도 하고, 생활할 수 없으리라고 의심하기도 하는 것이니,
이것이 두 가지 마음의 의심입니다.
흰 뼈라 함은 가난하고 하천한 사람들이 밥을 빌었으되 얻지 못하여 굶어서 죽었으므로 버린 시체의 뼈가 넓은 들에 낭자하였으니 이것을 흰 뼈라고 합니다.
또 오곡의 결실이 잘되지 아니하여 희어서 뼈와 같았으니 역시 흰 뼈라고 한 것입니다.
산가지와 같다 함이란 벼가 비로소 패다가 큰 가뭄을 만났으므로 뿌리와 줄기가 꼿꼿이 서서 산가지와 같았으니 이것을 산가지와 같다고 합니다.
또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흉년일 때에는 저자에서 산가지를 쓰는데 이것을 산가지와 같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저자에 다달았을 때에 강한 이는 들어갈 수 있되 약한 이는 들어 갈 수 없으므로 밖에서 크게 부르짖습니다. 쌀을 파는 사람이 그 약한 이들을 보고 가엾이 여기며 평등한 마음을 내어 문을 열어서 들게 하면 차례로 앉고 먼저 값을 받은 연후에 쌀을 주며 그 많고 적음에 따라 산가지를 써서 셈합니다.
비구들은 ‘여기서는 흉년에 모두 다 산가지를 이용하여 셈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합니다.
때에 그 비구들은 일곱 여덟 마을을 지나면서도 조금씩 얻기도 하고 얻지 못하는 이가 있기도 하였습니다.
그때에 상인이 북쪽에서 말 5백 마리를 몰고 남쪽을 향하여 가면서 화물을 팔았는데 혹은 두세 배의 이익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이익을 구한 까닭에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다가 차례로 비란야국에 이르러서 여름 넉 달을 머물렀습니다.”
물었다.
“말을 파는 상인이 어째서 떠나지 않고 넉 달을 머물렀습니까?”
“비와 물이 많았기 때문에 말이 통행할 수 없어서 성 밖에 마굿간을 세우고 아울러 자기들의 집을 짓고 울타리로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이에 비구들은 상인의 처소에 가서 걸식하였는데, 사람마다 말이 먹는 보리를 각각 다섯 되씩을 얻은 것입니다.”
“보리를 비구들에게 준 것은 믿음 때문입니까, 믿지 않음 때문입니까?”
“믿음 때문입니다. 말을 파는 상인들이 마을에 들어가서 날마다 비구들이 걸식하되 빈 바리로 돌아감을 보았습니다. 본 뒤에 상인들은 돌아가 그 동무들을 향하여 위와 같은 일을 말하였으므로 각자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비구들은 걸식에 몹시 피곤하고 괴로운데도 도무지 얻는 거의 없으니, 함께 논의해 봐야겠구나. 우리들 상인이 만약 날마다 공양하면 아마 그 아침 나절은 돌면서 우두커니 서 있지는 않으리라.
우리들은 다 함께 말 몫을 가져다 각기 다섯 되씩을 비구들에게 주면, 비구들은 이 말이 먹는 보리를 얻어서 피로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들의 말에도 심한 손해가 되지도 않으리라.’
상인들은 비구들에게 가서 예배하고 아뢰었다.
‘대덕들이여, 저희의 보리를 받으십시오. 나날이 사람마다 다섯 되씩으로 잡식을 뜻대로 만드셔서 잡수소서.’
그러므로 율본에서,
‘날마다 비구에게 보리를 보시하였으므로 의복을 입고 아침에 가서 걸식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을 아침이라고 합니까?”
“새벽부터 한낮[中]까지를 아침이라고 합니다. 의복을 입는다 함은 가사로 몸을 싸는 것입니다.
분위(分衛)라 함은 비란야 마을에서 걸식을 하되 얻지 못하였으니, 마을을 두루 다녔으나 도무지 나와서 응대한 이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보리를 가지고 절에 돌아옴이란 가서 걸식하는 곳곳마다 보리를 얻어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보리를 가져다 찧어서 먹는다 함은 늙은 비구에게 정인(淨人)이 없고, 또 지어 줄 이가 없으므로 몸소 가서 갈아 밥을 지으니, 혹은 여덟 혹은 열씩 같이 지은 뒤에 나누어서 먹었습니다.
어진이 아난은 여래의 몫을 가져다 손수 갈았습니다.
아난은 지혜가 구족하여 밥을 아주 맛있게 지었는데, 여러 하늘이 다시 단 이슬을 넣어서 만들기를 마치니, 부처님은 받아서 잡수시고 곧 삼매에 드셨습니다. 이로부터 이후는 다시 걸식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대덕 아난이 부처님을 모셨습니까?”
“모셨습니다. 여래가 보리수 아래로부터 일어나신지 20년 동안에 부처님을 모신 이는 모두 한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때는 대덕 나가(那伽)였고, 혹은 대덕 나기다(那耆多)였고, 혹은 대덕 미기야(彌耆耶)였고, 혹은 대덕 우가바(優伽婆)였고, 혹은 대덕 사가다(沙伽多)였고, 혹은 대덕 수나가다(須那訶多)였습니다.
이와 같은 대덕들은 뜻에 즐거우면 모시고 왔다가 즐겁지 않으면 떠나갔고, 혹은 죄다 가버렸으니 때에 대덕 아난이 와서 모셨습니다.”
“나라 안이 흉년이었다고 해도 어째서 적은 밥이라도 나누어서 뭇 상가들을 공양하여 공덕을 짓는 사람이 한 분도 없었으며, 또 바라문이 세존을 청하였으면서 전 여름 석 달을 공양조차 안 하였습니까?”
“왜냐하면 하늘의 악마 파순이 1유순 안을 덮어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서 도무지 공양하는 마음이 없게 하고는 가리고 떠났기 때문입니다.”
“여래는 마음에 과연 악마가 가린 줄 모르셨습니까?”
“아셨습니다.”
또 물었다.
“여래는 어째서 사위의 왕사성이나 딴 나라에 가셔서 안거를 맺으시지 않고 이 나라에 오셨습니까?”
“사위의 왕사성 나라는 그만두고 바로 울단월(鬱單越)에 가서 닿거나, 혹은 도리천(忉利天)에 오르더라도 악마왕은 역시 와서 가릴 것이므로 숨거나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해에 악마왕은 크게 성을 내고 있었으므로 여래는 이미 스스로 두루 살피시어 오직 비란야국의 말을 파는 상인들만을 의지하여 안거할 만하셨기 때문입니다.”
“악마왕은 이미 다른 사람들은 가릴 수 있었으면서 무슨 뜻에서 말을 파는 상인을 가려서 부처님과 뭇 상가들이 밥을 얻지 못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역시 가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악마왕이 이미 떠나간 뒤에 말을 파는 상인이 뒤에 이르렀기 때문이니 이로써 가리지 못한 것입니다.”
“악마왕은 왜 다시 말을 파는 상인을 가리지 않았습니까?”
“모두 가리지는 못합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네 가지 악마가 가릴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아침과 점심의 공양이요,
둘째는 탕약(湯藥)의 넉넉함이요,
셋째는 여래의 수명이요,
넷째는 여래의 광명입니다.
해와 달의 법왕도 여래에 이르면 광명이 숨고 가려져서 나타나지 않으므로 악마 왕은 가지가지의 방편으로서도 가려버릴 수 없습니다.
‘어느 때 부처님은 절구를 찧는 소리를 들으셨다’ 함은 비구들이 말이 먹는 보리를 얻어서 돌아와 찧었으므로 소리가 있었습니다.
‘알면서도 일부러 물으셨다, 알면서도 묻지 않으셨다’에서 알면서도 일부러 물으심이란 부처님은 인연이 있어서 중생을 이롭게 할 줄 아셨으므로 물으신 것이요, 알면서도 묻지 않으심이란 이익이 없으므로 묻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때여야 물으셨다’ 함은 만약 물으시면 바로 그때여야 물으셨으므로 때여야 물으셨습니다.
‘묻지 않으셨다’ 함은 여래는 때가 아닌 줄 알면 묻지 않으셨으며, 뜻이 있어야 물으셨고 뜻이 없으면 묻지 않으셨습니다.
두 가지의 일이 있으면 물으셨으니,
첫째는 설법을 하려고 하기 위하여,
둘째는 성문 제자들을 위하여 계율을 제정하는 인연이 혹은 가볍고 혹은 무거웠어야 하셨으니, 이 때문에 물으셨습니다.
‘아난아, 이 소리는 무슨 물건의 소리냐?’
아난이 대답하였습니다.
‘이는 비구들이 보리를 찧는 소리이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좋구나, 좋구나, 아난아.’
무엇 때문에 부처님은 찬탄하시며 ‘좋구나’라고 하셨겠습니까?
계율을 제정하고 설법을 하시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착한 사람이요, 이미 훌륭하니라. 미래의 비구들은 벼의 알맹이를 찾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나는 아직 이 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래는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어야 합니다.
‘아난아, 너희들은 착한 사람이로다.
흉년일 때에는 걸식하되 얻기가 어렵거늘, 이미 족한 줄을 알기 때문에 바른 법을 보호하고 지녔으므로 훌륭하니라.
흉년일 때에 탐심을 눌렀으므로 훌륭하니라.
다른 마을 가운데는 벼와 쌀이 넉넉하며 단 과일과 특이한 맛이 심히 많거늘 가는 이도 없으며,
대중 가운데서는 도무지 한 사람도 생각하는 이ㆍ성내는 이ㆍ원망하는 말을 하는 이가 없으며,
≺무엇 때문에 여기에 머무르실까?
세존은 어째서 저 넉넉한 마을에 나아가시어 음식을 얻기 쉽게 하시지 않으실까?≻라고 하는 이런 말은 도무지 없고,
또한 원망하지도 않으며,
≺비란야 바라문은 무엇 때문에 우리들 청하여 여기에 와서 여름에 앉아 있게 하고 공양하지 않을까?≻,
또한 다른 마음과 생각으로 이끗을 행하며 구하려고 하는 이가 없고,
또한 서로가 찬탄하며,
≺이 사람은 도를 얻어서 남에게 알 수 있게 하고 공양을 희망한다≻고 하는 이와 같은 말이 없고,
각자가 입을 다물어 잠잠하며 다만 일심으로 여래를 의지하여 머무를 뿐이므로 훌륭하니라.’
미래의 비구들은 절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음식을 얻기가 쉬우면 교만한 마음을 내며,
‘밥이 거친 곡식이다’라고 말하고,
혹은 ‘너무 물렀다’라고 하고,
혹은 ‘너무 되다’라고 하고,
혹은 ‘싸라기다’라고 하고,
혹은 ‘시고 짜다’라고 하니,
이와 같은 말은 벼의 알맹이를 찾는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착한 사람들이다. 후세의 비구들을 위하여 선한 법의 인연을 지었느니라. 너희들의 법으로써 미래의 비구들이 만약 음식을 얻으면 좋거나 나쁘거나 이렇다 저렇다 하지 않고,
≺옛날 법왕께서 세상에 계실 적에 큰 아라한들도 오히려 말이 먹는 보리를 잡수셨는데 하물며 우리들이 이런 음식에서 싫어하고 가벼이 여기겠는가≻라고 말하리라’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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