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에이브러햄 링컨의 등장(1857년)
1857년 3월 6일, 노에 문제를 둘러싼 남북 간에 대립을 결정적으로 악화시킨 또 하나의 사건이 벌어졌다. 드레드 스콧 사건에 대한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그것이다.
드래드 스콧은 미주리 출신 흑인 노에로, 존 에머슨이라는 군의관(軍醫官)이 그의 소유주였다. 에머슨은 군인이라는 신분상 임지를 따라 옮겨 다닐 수밖에 없었는데, 노예 드레드 스콧을 항상 데리고 다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들이 거처 간 일리노이 주와 위스콘신 주가 자유주였다는 데에 문제의 발단이 있었다. (일리노이 주는 서북영지법에 의해, 위스콘신 주는 미주리 타협안에 의해 노예제를 금지하는 헌법을 채택하고 있었다.) 드레드 스콧은 정작 주인과 함께 자유주에 머물고 있을 때는 가만히 있다가 주인과 함께 고향에 돌아온 후 주인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전에 자유주에 살았기 때문에 자신은 이미 자유인이 되었으며, 따라서 자신을 아직도 노예로 부리는 주인의 행위는 불법이라는 것이 소장의 요지였다. 사실인즉 드레드 스콧은 일자무식이었으나 열성적인 반 노예주의자 몇 사람이 그를 도와주고 있었다.
드레드 스콧의 주장은 아주 어려운 법리문제를 포함하고 있는데다 당시의 분위기도 있고 하여 이내 정치적 문제로 비화했다. 사건은 지방법원을 거쳐 결국 연방대법원에까지 소장이 접수되었다. 온 나라가 대법원의 판결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대법원은 대법원장 로저 테니의 주도로 원고 페소 판결을 내렸다. 흑인은 헌법상 연방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재판을 청구할 자격이 자체가 없고 노예는 헌법에 보장된 재산권의 일부로서 절대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법원의 이러한 판결은 곧 맹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설령 법조문에는 맞을지는 모르지만 대법원의 이러한 판결은 시계바늘을 1세기 이상 거꾸로 돌려놓은 시대착오적 행위인 것이 분명했다. 이미 독립 이전부터 사람들이 노예제의 비도덕성을 인정하고 이를 개선 내지는 폐지하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노예를 신성불가침한 재산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것은 분명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이 사건에서 보여준 대법원의 독단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에 여론이 등을 돌림으로서 이후 얼마동안 연방대법원은 정부에서 그 역할이 크게 위축되는 결과를 낳았다.
다른 한편으로 대법원의 ‘몰상식하고 시대착오적인’ 판결은 반노예주의자들에게 결정적인 반격의 기회를 주었다. 특히 노예제 반대의 기치를 내 걸고 출발한 신생 공화당은 이를 이용하여 크게 정치적 입지를 넓힐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이라는 인물이 혜성과 같이 등장했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그는 출신지 일리노이 주 밖에서는 거의 무명에 가까웠다. 그가 일약 전국적인 유명인사로 등장한 것은 1858년 일리노이 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를 통해서였다. 상대는 유명한 스티븐 더글러스, 몇 번이나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거론된 적이 있고, 1850년의 타협안, 1854년의 캔사스-네브라스카법을 통과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링컨은 신생 공화당 후보로 선출되어 그와 힘겨운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객관적으로 열세인 링컨이 먼저 싸움을 걸었다. “분열된 집은 바로 설수 없다” 이것은 그의 공화당 후보 수락연설인데, 드레드 스콧 판결에 대하여 더글러스가 취한 모호한 태도를 공격한 것이다. 더불어 링컨은 이 연설에서 노예문제에 대한 자신의 단호한 반대 의사를 내외에 천명하는 것이었다.
“---스스로 분열된 집은 바로 설 수 없습니다. 어떤 주는 노예제를 고집하고 어떤 주는 이를 반대하는 한 우리 정부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연방이 해체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집이 분열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분열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
링컨의 이 연설은 물론 노예제에 대한 북부의 의견을 대변한 것이다. 그러나 연방의 존립을 위해서는 어느 쪽으로든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그의 의견은 옳았다. 위험한 줄타기를 언제까지나 계속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문제는 어떤가? 만약 연방정부가 노예제를 금지한다고 하면 그것은 곧 연방의 분열, 나아가 내란을 의미한다. 노예 폐지론자는 곧 인류애를 가장한 전쟁광이요, 비애국자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링컨의 ‘분열된 집’란 연설은 곧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링컨은 다글러스에게 유권자들 앞에서 이 문제에 대한 공개 토론회를 하자고 제의했다. 더글러스는 아주 입장이 난처했다. 토론 결과가 어떻든 그로서는 별로 득이 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도전을 회피하면 애송이 정치가에게 앉아서 한방 당하는 꼴이 됨으로 그는 도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링컨과 더글러스의 논쟁은 일리노이뿐 아니라 전국적인 화젯거리로 떠올랐다. 논제(論題)자체가 아주 민감한 탓도 있었지만 두 사람간의 아주 판이한 성격도 호기심을 부추기는데 한몫했다. 큰 키에 약간 얼빠진 모습의 링컨, 단신임에도 세련된 용모와 화술로 거인의 인상을 풍기는 더글러스, 링컨과 더글러스 사이에 벌어진 일곱 차례의 공개 토론회는 굉장한 구경거리였다. 근처에 사는 사람뿐 아니라 전국에서 사람이 몰려오고 나중에는 가장행렬과 악대도 등장했다.
논쟁의 초점은 연방의회의 결정으로 미국에서 노예제를 금지해야 할 것인가? 또는 과연 연방의회에 그런 권한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링컨은 당연히 그렇다는 입장이었다. 더글러스는 노예문제는 어디까지나 각 주의 주민들이 스스로 결정할 문제이지 여기에 연방정부가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링컨은 더글러스를 비도덕적인 노예제 옹호론자로 몰아세웠다. 더글러스는 링컨이야말로 위험한 극단주의자이고 연방의 분열을 부추기는 인물이라고 맞받아쳤다. 논쟁은 갈수록 열기를 더해 갔으나 결말은 나지 않았다. 아니 날 수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았다.
결국 토론회는 무승부로 끝나고, 세인의 관심 속에 치러진 선거에서 더글러스는 아주 근소한 차이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진정한 승자는 링컨이었다. 풋내기 시골 변호사가 전국적인 인물을 상대로 이만큼 싸운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또한 선거에서는 졌지만 링컨은 이를 계기로 일약 전국적인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그의 용모, 행적, 말 한마디 한마디가 기삿거리였다. 여기에 그의 입지전적 삶에 관한 적당한 허풍까지도 가미되어 링컨은 ‘정직한 에이브’(에이브는 그의 본명 에이브러햄의 애칭), 청교도적 양심과 숭고한 인류애의 화신으로 미국인들의 머리에 깊은 인상을 심었다. 2년 후의 대통령 선거에서 북부의 반노예주의자들은 일치단결하여 그를 대통령에 당선시켰다. 그렇지만 많은 남부인들에게 그는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2) 남북전쟁이 터지다. (1860-남북이 서로에게 총구를)
남북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은 노예제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포악하고 탐욕스러운 남부 농장주들로부터 노예를 해방시키려는 기독교인들의 거룩한 투쟁이 남북전쟁이라는 것이다. 모든 전쟁이 그렇지만, 남북전쟁을 선과 악의 싸움으로 도식화하는 것은 아주 순진하고 위험한 발상이다. 당시 노예제가 아무리 가혹했다고 하지만 솔직히 북부의 공장주들 역시 노동자들을 노예보다 낫게 대우하지는 않았고, 남부의 노예주들 중에는 양심적인 사람도 많았다.
어떻게 보면 노예문제는 표면적이고 상징적인 이유에 불과하다. 남북전쟁의 보다 근원적인 원인을 알려면 노예로 대변되는 남과 북의 생활방식, 특히 경제구조의 근본적인 차이에 주목해야만 한다. 이미 17세기부터 남부는 전원적이며 농업 위주였고, 북부는 도시적이었고 공업 위주였다. 초기에는 그런대로 남과 북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가 커지고 산업이 발달하면서 북부의 생활양식이 남부를 압도하기 시작했고 남부의 입지는 자꾸만 좁아져갔다. 연방의회는 일방적으로 북부에 유리한 법령만을 통과시키고 철도의 대부분은 북부에만 건설되었다. 이민(移民)은 기반잡기가 비교적 쉬운 북부에 집중되었고, 노예들도 ‘지하열차’를 타고 북부로, 서부로 도망쳐 나갔다. 그것도 부족하여 이제 북부는 노예제 폐지를 외치며 남부의 생활기반을 송두리째 파괴하려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남부에는 1850년대 들어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었다. 캘리포니아를 위시한 서부의 여러 주들이 노예제를 금지하고, 최후의 보루로 여겼던 캔사스까지 반노예주의자들의 수중에 들어가면서 남부의 위기감은 극도로 높아졌다. 이대로 가다간 남북의 실력 차이가 갈수록 벌어져 남부는 앉아서 망할 것이 뻔했다. 이런 점에서 1860년의 대통령선거는 남부의 사활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의회는 이미 북부가 다수를 점하고 있으므로 남부출신, 아니면 최소한 남부에 동정적인 인물이 대통령에 당선되지 않으면 남부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미 때가 늦었다. 남부에 동정적인 민주당이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단일후보를 내지 못하는 사이에, 공화당은 혜성처럼 등장한 대중의 우상 링컨을 내세워 전국적인 바람몰이를 시작했다. 링컨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거의 무명에 가까웠으나 1858년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거물 정치인 스티븐 더글러스와 대결하면서 일약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치열한 선거전 끝에 근소한 표차로 지기는 했지만 선거가 끝났을 때 그는 이미 더글러스보다 더 유명하고 인기 있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2년 후 그는 압도적인 지지로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고, 당연히 노예제 폐지를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다.
많은 사람들의 우려 속에 치러진 1860년 대통령 선거의 결과는 예상대로 링컨의 승리였다. 당시 연방에는 18개의 자유주와 15개의 노예주가 있었는데, 링컨은 모든 자유주에서 압도적 지지를 획득했다. 대신 남부에서는 불과 2만4000표밖에 얻지 못했고, 9개주에서는 단 한 표도 얻지 못했다. 연방은 그의 지지 여부를 둘러싸고 완전히 두 쪽이 났다. 그렇지만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링컨이 과반수를 획득,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진 남부로서는 이제 달리 방법이 없었다. 링컨의 당선이 확정되자마자 지금까지 반연방주의의 선봉에 서 왔던 사우스 캘로라이나 주가 비장한 선언문과 함께 맨 먼저 연방에서 탈퇴했다. 선언문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연방 헌법 제4조의 규정은 이렇다. “어떤 주에서 그 주의 법에 따라 사역이나 노동을 하는 자가 타주로 도망할 경우, 타주의 어떤 법이나 규정도 상기 사역이나 노동을 면제할 수 없으며, 상기 사역이나 노동을 받을 권리가 있는 자의 요구가 있을 경우에는 그에게 즉시 인도되어야 한다. 이 조항은 너무나 중요하여 만약에 그것이 없었다면 연방의 계약은 애초에 이루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헌법상의 계약이 비 노예 소유주들에 의해 고의적으로 위반되고 무시되어 왔다. 따라서 사우스캘로라이나 주는 당연히 그 의무로부터 해방된다.----(비노예주들은) 수많은 우리 노예들이 집을 떠나도록 부추기고 그들에게 원조를 제공하고 있다. 남아있는 노예들에게는 반란을 일으키도록 선동하고 있다.
그럼으로 우리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주민들은 대표자 회의에 모인 우리의 대표자를 통하여 세계의 유식자들에게 우리 취지의 정당함을 호소하면서, 지금까지 본주와 북아메리카 다른 주들 사이에 존재해온 연방은 해체되었고, 본주는 전쟁의 수행, 강화, 동맹체결, 통상 그리고 독립국이 정당하게 취할 수 있는 모든 행동과 사무를 처리하는 완전한 권리를 가진,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국가로서 세계의 국가들 가운데 그 지위를 되찾았음 엄숙히 선언하는 바이다.
한마디로 연방 탈퇴와 독립선언이었다. 경악한 연방의회가 황급히 타협을 제의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다음이었다. 이듬해 2월 1일에는 미시시피, 플로리다, 앨라바마, 조지아, 루이지애나, 택사스가 사우스캘로라이나의 뒤를 따랐다. 2월 4일, 연방을 탈퇴한 주들은 미연합국(Contederate State of America)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독립국가를 결성하고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한편 독자적인 헌법도 만들었다. 주저하던 버지니아가 마침내 남부연합에 가담하자, 아칸소, 테네시, 노스캘로라이나가 뒤를 이었다. 이로써 미국은 건국 84년 만에 공식적으로 분열되었다. 남부연합은 인구 9백만, 11개주, 그리고 북부 연방에는 인구 2천2백만 23개 주가 가담했다.
남은 것은 전쟁뿐이었다. 링컨은 취임 연설에서 남부 연합의 탈퇴를 ‘내란’으로 규정하고 “정부를 유지, 보호, 수호하기 위해‘ 무력 사용도 불사하겠다는 강력한 경고를 했지만 이것은 오히려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되었다. 1861년 4월 12일 새벽 4시 3분, 남부연합군이 연방군의 섬터 요새를 공격함으로서 남북전쟁의 막이 올랐다.
첫댓글 미국 노예제도의 변천사와 남북전쟁의 원인에 대하여 잘 읽고 많은 것을 배우게 되였습니다.
오래 전에 남부 텍사스주에서 한 3개월 간 머물렀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 그곳에서 만났든 흑인들의 온순한 모습과
동부 뉴욕이나 워싱톤에서 만난 흑인들의 활달한 태도로 아주 다른 모습을 느겼었는데 이것이 역사적인 배경이
있었고나 하는 생각을 하게합니다.
좋은 글 흥미 진진하게 잘 읽었습니다.깊은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