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 집과 내 어릴 적
우리는 안동 김씨 경순왕의 자손이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어떻게 고려
왕 건 태조의 따님 낙랑공주의 부마가 되셔서 우리들의 조상이 되셨는지는
"삼국사기"나 안동 김씨 족보를 보면 알 것이다.
경순왕의 팔세 손이 충렬공, 충렬공의 현손이 익원공인데, 이 어른이 우리 파의
시조요, 나는 익원공의 21대 손이다. 충렬공, 익원공은 다 고려조의 공신이거니와
이조에 들어와서도 우리 조상은 대대로 서울에 살아서 글과 벼슬로 가업을 삼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 방조 김자점이 역적으로 몰려서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매 내게
11대조 되시는 어른이 처자를 끌고 서울을 도망하여 일시 고향에 망명하시더니,
그곳도 서울에서 가까워 안전하지 못하므로 해주 부중에서 서쪽으로 80리 백운방 텃골
팔봉산 양가봉 밑에 숨을 자리를 구하시게 되었다. 그곳 뒷개에 있는 선영에는 11대
조부모의 산소를 비롯하여 역대 선산이 계시고 조모님도 이 선영에 모셨다.
그때에 우리 집이 멸문지화를 피하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었으니, 그것은 양반의
행색을 감추고 상놈 행색으로 묵은장이를 일구어 농사를 짓다가 군역전이라는 땅을
짓게 되면서부터 아주 상놈의 패를 차게 되었다. 이 땅을 부치는 사람은 나라에서
부를 때에는 언제나 군사로 나서는 법이니, 그때에는 나라에서 문을 높이고 무를
낮추어 군사라면 천역 즉 천한 일이었다. 이것이 우리 나라를 쇠약하게 한 큰 원인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리하여 우리는 판에 박힌 상놈으로, 텃골 근동에서 양반
행세하는 진주 강씨, 덕수 이씨들에게 대대로 천대와 제압을 받아왔다. 우리 문중의
딸들이 저들에게 시집가는 일은 있어도 우리가 저들의 딸에게 장가든 일은 없었다.
그러나 중년에는 우리 가문이 꽤 창성하였던 모양이어서 텃골 우리터에는 기와집이
즐비하였고 또 선산에는 석물도 크고 많았으며 내가 여남은 살 적까지도 우리 문중에
혼상대사가 있을 때에는 이정길이란 사람이 언제나 와서 일을 보았는데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집의 종으로서 속량받은 사람이라 생각하니, 그는 우리 같은 상놈의 집에
종으로 태어났던 것이라, 참으로 흉악한 팔자라고 아니할 수 없다.
우리가 해주에 와서 산 뒤로 역대를 상고하여 보면 글하는 이도 없지 아니하였으나
이름난 이는 없었고 매양 불평객이 많았다. 내 증조부는 가어사질을 하다가 해주
영문에 갇혔지만 서울 어느 양반의 청편지를 얻어다 대고 겨우 형벌을 면하셨다는
말을 집안 어른들께 들었다. 암행어사라는 것은 임금이 시골 사정을 알기 위하여
신임하는 젊은 관원에게 무서운 권세를 주어서 순회시키는 벼슬인데, 허름한 과객의
행색을 차리고 다니는 것이 상례이다.
증조항렬 네 분 중에 한 분은 내가 대여섯 살 때까지 생존하셨고 조부 형제는
구존하셨고 아버지 4형제도 다 살아 계시다가 백부 백영은 얼마 아니하여 돌아가셔서
나는 다섯 살 적에 종형들과 함께 곡하던 것이 기억된다.
아버지 휘 순영은 4형제 중에 둘째 분으로서, 집이 가난하여 장가를 못 가고
노총각으로 계시다가 24세 때에 삼각혼인이라는 기괴한 방법으로 장연에 사는 현풍
곽씨의 딸, 열네 살 된 이와 성혼하여 종조부 댁에 붙어 살다가 2, 3년 후에 독립한
살림을 하시게 된 때에 내가 태어났다. 그때 어머님의 나이는 열 일곱이요, 푸른
밤송이 속에서 붉은 밤 한 개를 얻어서 감추어 둔 것이 태몽이라고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병자년 7월 11일(이 날은 조모님 기일이었다) 자시에 텃골에 있는 웅덩이 큰
댁이라고 해서 조부와 백부가 사시는 집에서 태어난 것이 나다. 내 일생이 기구할
예조였는지, 그것은 유례가 없는 난산이었다. 진통이 일어난 지 6, 7일이 되어도 순산은
아니되고, 어머님의 생명이 위태하게 되어 혹은 약으로, 혹은 예방으로 온갖 시험을
다해도 효험이 없어서, 어른들의 강제로 아버지가 소의 길마를 머리에 쓰고 지붕에
올라가서 소의 소리를 내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나왔다고 한다. 겨우 열 일곱 살
되시는 어머님은 내가 귀찮아서 어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짜증을 내셨다는데, 젖이
말라서 암죽을 먹이고 아버지가 나를 품속에 품고 다니시며 동네 아기 있는 어머니
젖을 얻어 먹이셨다. 먼 촌 족대모 핏개댁이 밤중이라도 싫은 빛 없이 내게 젖을
물리셨단 말을 듣고 내가 열 살 갓 넘어 그 어른이 작고하신 뒤에는 나는 그 산소
앞을 지날 때마다 경의를 표하였다. 내가 마마를 치른 것이 세 살 아니면 네 살
적인데 몸에 돋은 것을 어머니가 예사 부스럼 다루듯 죽침으로 따서 고름을
빼었으므로 내 얼굴에 굵은 벼슬 자국이 생긴 것이다.
내가 다섯 살 적에 부모님은 나를 데리고 강령 삼거리로 이사하셨다. 거기는 뒤는
산이요, 앞은 바다였다. 종조, 재종조, 삼종조, 여러 댁이 그리로 떠나가시기 때문에
우리 집도 따라간 것이었다. 여기서 이태를 살았는데 우리 집이 어떻게나 호젓한지
호랑이가 사람을 물고 우리 문전으로 지나갔다. 산 어귀 호랑이 길목에 우리 집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밤이면 한 걸음도 문 밖에는 나가지 못하였다. 낮이면
부모님은 농사하러 나가시거나 혹은 바다에 무엇을 잡으러 가시고, 나는 거기서 그 중
가까운 신풍 이생원 집에 가서 그 집 아이들과 놀다가 오는 것이 일과였다. 그 집
아이들 중에는 나와 동갑 되는 아이도 있었으나 두세 살 위 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
애들이 '이놈 해줏놈 때려 주자'고 공모하여, 나는 무지하게 한 차례 매를 맞았다. 나는
분해서 집으로 돌아와 부엌에서 큰 식칼을 가지고 다시 이생원 집으로 가서 기습으로
그놈들을 다 찔러 죽일 생각으로 울타리를 뜯고 있는 것을 열 여덟 살 된 그 집 딸이
보고 소리소리 질러 오라비들을 불렀기 때문에 나는 목적을 달치 못하고 또 그
놈들에게 붙들려 실컷 얻어 맞고 칼만 빼앗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식칼을 잃은 죄로
부모님께 매를 맞을 것이 두려워서 어머니께서 식칼이 없다고 찾으실 때에도 나는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또 하루는 집에 혼자 있노라니까 엿장수가 문전으로 지나가면서,
"헌 유기나 부러진 수저로 엿들 사시오." 하고 외쳤다.
나는 엿을 먹고 싶으나 엿장수가 아이들의 자지를 잘라 간다는 말을 어른들께 들은
일이 있으므로 방문을 꽉 닫아 걸고 엿장수를 부른 뒤에 아버지의 성한 숟가락을 발로
디디고 분질러서 반은 두고 반만 창구멍으로 내밀었다. 헌 숟가락이라야 엿을 주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엿장수는 내가 내어미는 반 동강 숟가락을 받고 엿을 한 주먹
뭉쳐서 창구멍으로 들이 밀었다. 내가 반 동강 숟가락을 옆에 놓고 한창 맛있게 엿을
먹고 있을 즈음에 아버지께서 돌아오셨다. 나는 사실대로 아뢰었더니, 다시 그런 일을
하면 경을 치겠다고 꾸중만 하시고 때리지는 아니하였다.
또 한 번은, 역시 그때의 일로, 아버지께서 엽전 스무 냥을 방 아랫목 이부자리 속에
두시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가 나가시고 나 혼자만 있을 때에 심심은 하고 동구 밖
거릿집에 가서 떡이나 사 먹으리라 하고 그 스무 냥 꾸러미를 온통 꺼내어 허리에
감고 문을 나섰다. 얼마를 가다가 마침 우리 집으로 오시는 삼종조를 만났다.
"너 이 녀석, 돈은 가지고 어디를 가느냐?" 하고 내 앞을 막아 서신다.
"떡 사 먹으로 가요." 하고 나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하였다.
"네 애비가 보면 이 녀석 매맞는다. 어서 집으로 들어가거라." 하고 삼종조는 내
몸에 감은 돈을 빼앗아다가 아버지를 주셨다. 먹고 싶은 떡도 못 사
먹고 마음이 자못 불평하여 집에 와 있노라니, 뒤따라 아버지께서 돌아오셔서 아무
말씀도 없이 빨랫줄로 나를 꽁꽁 동여서 들보 위에 매달고 회초리로 후려갈기시니
아파서 죽을 지경이었다. 어머니도 밭에서 아니 돌아오신 때라 말려줄 이도 없이 나는
매를 맞고 달려 있었다. 이때에 마침 장련 할아버지라는 재종조께서 들어오셨다. 이
어른은 의술을 하는 이로서 나를 귀애하시던 이다. 내게는 참말 천행으로 이 어른이
우리 집 앞을 지나시다가 내가 악을 쓰고 우는 소리를 듣고 달려 들어오신
것이었다. 장련 할아버지는 들어오시는 길로 불문곡직하고 들보에 달린 나를 끌러 내려
놓으신 뒤에야 아버지께 까닭을 물으셨다. 아버지가 내 죄를 고하시는 말씀을 다
듣지도 아니하시고 장련 할아버지는, 나이는 아버지와 동갑이시지마는 아저씨의
위엄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치시던 회초리를 빼앗아서 아버지의 머리와 다리를 함부로
한참 동안이나 때리시고 나서야 비로소,
"어린 것을 그렇게 무지하게 때리느냐?" 하고 말씀으로 책망하셨다. 아버지께서
매를 맞으시는 것이 퍽도 고소하고 장련 할아버지가 퍽도 고마웠다. 장련 할아버지는
나를 업고 들로 나가서 참외와 수박을 실컷 사 먹이고 또 그 할아버지 댁으로 업고
가셨다. 장련 할아버지의 어머니 되시는 종증조모께서도 그 아드님으로부터 내가
아버지한테 매맞은 연유를 들으시고,
"네 아비 밉다. 집에 가지 말고 우리 집에서 살자."
하고 아버지의 잘못을 누누이 책망하시고 밥과 반찬을 맛있게 하여 주셨다. 나는 매우
마음이 기쁘고 아버지가 그 할아버지한테 맞던 것을 생각하니 상쾌하기 짝이 없었다.
이 모양으로 이 댁에서 여러 날을 묵어서 집에 돌아왔다.
한 번은 장마비가 많이 와서 근처의 샘들이 넘쳐 여러 갈래 작은 시내를 이루었다.
나는 빨강이 파랑이 물감통을 집에서 꺼내다가 한 시내에는 빨강이를 풀고, 또 한
시내에는 파랑이를 풀어서 붉은 시내, 푸른 시내가 한데 모여서 어울려지는 양을
장난으로 구경하고 좋아하다가 어머니께 몹시 매를 맞았다.
종조께서 이 땅에서 작고하셔서 백여 리나 되는 해주 본향으로 힘들여 행상한 것이
별미가 된 것인지, 내가 일곱 살 되던 해에 이르러서는 여기 와서 살던 바툰 일가들이
한 집 두 집 해주 본향으로 돌아갔다. 우리 집도 이 통에 텃골로 돌아올 때에 나는
어른들의 등에 업혀 오던 것이 기억난다.
고향에 돌아와서 우리 집은 농사로 살아가게 되었으나 아버지께서 비록 기성명
정도이지마는 허위대가 좋고 성정이 호방하고 술이 한량이 없으셔서 강씨 이씨라면
만나는 대로 막 때려 주고는 해주 감영에 잡혀 갇히기를 한 해에도 몇 번씩 하셔서
문중에 소동을 일으키셨다. 인근 양반들이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때 시골 습관에 누가 사람을 때려서 상처를 내면 맞은 사람을 때린
사람의 집에 떠메다가 누이고 그가 죽나 살아나나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한 달에도 몇 번씩 피투성이가 되어서 다 죽게 된 사람을 떠메다가 사랑에
누이곤 하였다. 아버지가 이렇게 사람을 때리시는 것은 비록 취중에 한 일이라
하더라도 다 무슨 불평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버지는 당신께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일지라도 양반이나 강한 자들이 약한 자를 능멸하는 것을 볼 때면 참지 못하시고
"수호지"에 나오는 호걸들식으로 친불친을 막론하고 패어 주었다. 이렇게 아버지가
불같은 성정이신 줄을 알므로, 인근 상놈들은 두려워 공경하고 양반들은 무서워서
피하였다.
해마다 세말이 되면 아버지는 닭의 알, 담배 같은 것을 많이 장만하여서 감영의
영리청, 사령청에 선사를 하였다. 그러면 그 회사로 책력이며 해주먹 같은 것이 왔다.
이것은 강씨 이씨 같은 양반들이 감사나 판관에게 가 붙는 것에 대응하는 수였다.
영리청이나 사령청에 친하게 하는 것을 계방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계방이 되어 두면
감사의 영문이나 본아에 잡혀가서 영리청이나 옥에 갇히는 일이 있더라도 영리와
사령들이 사정을 두기 때문에 갇히는 것은 명색 뿐이요, 기실은 영리, 사령들과 같은
방에서 같은 밥을 먹고 편히 지내며 또 설사 태장, 곤장을 맞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사령들은 매우 치는 시늉만 하고, 맞는 편에서는 죽어가는 엄살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뿐더러 만일 아버지께서 되잡아 양반들을 걸어서 소송을 하여서 그들이
잡혀오게 되면 제아무리 감사나 판관에게 뇌물을 써서 모면한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편인 범 같은 영속들에게 호되게 경을 치고, 많은 재물을 허비하게 된다. 이렇게 망한
부자가 일년 동안에 십여 명이나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인근 양반들은 그를 달래려 함인지 아버지를 도존위에
천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도존위 행공을 할 때에는 다른 도존위와는 반대로 양반에게
용서없이 대하고, 빈천한 사람들에게는 후하였다. 세금을 받는 데도 빈천한 사람의 것은
자담하여 내주기는 하였을망정 그들에게 가혹히 하는 일은 없었다. 이 때문에 3년이
못되어서 아버지는 공전흠포로 면직을 당하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인근에 사는
양반들의 꺼림과 미움을 받아서 그들의 아낙네와 아이들까지도 김순영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차를 떨었다.
아버지의 아이 적 별명은 효자였다. 그것은 할머니께서 돌아가실 때에 아버지가
왼손 무명지를 칼로 잘라 할머니의 입에 피를 흘려 넣으셨기 때문에 소생하셔서
사흘을 더 사셨다는 데서 생긴 것이다.
아버지 4형제 중에 백부(휘백영)는 보통 농군이셨고, 셋째 숙부도 특기할 일이
없으나 넷째 계부(휘준연)가 아버지와 같이 특이한 편이셨다. 계부는 국문을 배우는
데도 한겨울 동안에 가자에 기억자도 못 깨우치고 말았으되, 술은 무량으로 자시고 또
주사가 대단하여서 취하기만 하면 꼭 풍파를 일으키는데 아버지는 양반에게만 주정을
하셨지마는 준영 계부는 아무리 취하여도 양반에게는 감히 손을 못 대고 인가
사람에게만 덤비셨다. 그러다가 조부님께 매를 얻어 맞으시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내가 아홉 살 적에 조부님 상사가 났는데 장례날에 이 삼촌이 상여 메는 사람들에게
야료를 하여서 결국은 그를 결박을 지어 놓고야 장례를 모셨다. 장례를 지낸 뒤에
종증조의 발의로 문회를 열고 이러한 패류는 그대로 둘 수가 없으니 단단히 징치를
하여서 후환을 막아야 한다고 의논한 결과, 준영 삼촌을 앉은뱅이로 만들기로
작정하고 발뒤꿈치를 베었으나, 분김에 한 일이라 힘줄은 다 끊어지지 아니하여서
병신까지는 안 되었다. 그러나 그가 조부댁 사랑에 누워서 호랑이처럼 영각을 하는
바람에 나는 무서워서 그 근처에도 못 가던 것이 생각난다. 지금 생각하니 상놈의
소위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때에 어머니는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의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 때문이니 두고 보아서 네가 또 술을 먹는다면
나는 자살을 하여서 네 꼴을 안 보겠다."
나는 이 말씀을 깊이 새겨 들었다.
이때 쯤에는 나도 국문을 배워서 이야기책은 읽을 줄 알았고, 천자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얻어 배워서 다 떼었다. 그러나 내가 글공부를 하리라고 결심한 데는 한
동기가 있었다.
하루는 어른들에게 이러한 말씀을 들었다. 몇 해 전 일이다. 문중에 새로 혼인한
집이 있었는데, 어느 할아버지가 서울 갔던 길에 사다가 두셨던 관을 밤에 내어 쓰고
새사돈을 대하셨던 것이 양반들에게 발각이 되어서 그 관은 열파를 당하고 그로부터
다시는 우리 김씨는 관을 못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몹시 울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어찌해서 양반이 되고, 우리는 어찌해서 상놈이 되었는가고
물었다. 어른들이 대답하는 말은 이러하였다. 방아메 강씨도 그 조상은 우리 조상만
못하였지마는 일문에 진사가 셋이나 살아 있고, 자라소 이씨도 그러하다고, 나는
어떻게 하면 진사가 되느냐고 물었다. 진사나 대과나 다 글을 잘 공부하여 큰 선비가
되어서 과거에 급제를 하면 된다는 대답이었다.
이 말을 들은 뒤로 나는 부쩍 공부할 마음이 생겨서 아버지께 글방에 보내 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아버지도 주저하지 아니할 수 없으셨다. 우리 동네에는 서당이 없으니
이웃 동네 양반네 서당에 가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런데 양반네 서당에서 나를
받아줄지 말지도 알 수 없는 일이거니와, 또 거기 들어간다 하더라도 양반의 자식들의
등살에 견디어 낼 것 같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얼른 결단을 못하다가 마침내 우리
동네 아이들과 이웃 동네 상놈의 아이들을 모아서 새로 서당을 하나 만들고 청수리
이생원이라는 양반 한 분을 선생으로 모셔 오기로 하였다. 이생원은 지체는
양반이지마는 글이 얕아서 양반 서당에서는 데려가는 데가 없기 때문에 우리 서당으로
오신 것이었다.
이 선생이 오신다는 날, 나는 머리를 빗고 새 옷을 갈아입고 아버지를 따라서 마중을
나갔다. 저리로서 쉰 남짓 되어 보이는 키가 후리후리한 노인 한 분이 오시는데
아버지께서 먼저 인사를 하시고 나서 날더러,
"창암아, 선생님께 절하여라."하셨다. 나는 공손하게 너붓이 절을 하고 나서 그 선생을
우러러보니 신인이라 할지 하느님이라 할지 어떻게나 거룩해 보이는지 몰랐다.
우선 우리 사랑을 글방으로 정하고 우리 집에서 선생의 식사를 받들기로 하였다.
그때에 내 나이가 열 두 살이었다.
개학하기 전날 나는 '마상봉한식' 다섯 자를 배웠는데 뜻은 알든 모르든 기쁜 맛에
자꾸 읽었다. 밤에도 어머니께서 밀매가리하시는 것을 도와드리면서 자꾸 외웠다.
새벽에는 일찍 일어나 선생님 방에 나가서 누구보다도 먼저 배워서 밥그릇 망태를
메고 먼 데서 오는 동무들을 가르쳐 주었다.
이 모양으로 우리 집에서 석 달을 지내고는 산골 신 존위 집 사랑으로 글방을
옮기게 되어서 나는 밥그릇 망태를 메고 고개를 넘어서 다녔다. 집에서 서당에
가기까지 서당에서 집에 오기까지 내 입에서는 글 소리가 끊어지는 일이 없었다. 글
동무들 중에는 나보다 정도가 높은 아이도 있었으나 배운 것을 강을 하는 데는 언제나
내가 최우등이었다. 이러한지 반 년 만에 선생과 신 존위 사이에 반목이 생겨서 필경
이 선생을 내보내게 되었는데 신 존위가 말하는 이유는 이 선생이 밥을 너무 많이
자신다는 것이거니와 사실은 그 아들이 둔재여서 공부를 잘 못하는데 내 공부가
일취월장하는 것을 시기함이었다. 한 번은 월강(한 달에 한 번 하는 시험) 때에 선생에
내게 조용히 부탁하신 일이 있었다. 내가 늘 우등을 하였으니 이번에는 일부러
잘못하고 선생이 뜻을 물어도 일부러 모른 체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러하오리다
하고 약속하고 그대로 하였다. 이리하여 이날은 신 존위의 아들이 처음으로 장원을
하였다. 신 존위는 대단히 기뻐서 이날 닭을 잡고 한턱을 잘 내었다. 그러나 번번이
신 존위의 아들을 장원시키지 못한 죄로 이 선생을 물러나게 하였으니 참으로 상놈의
행사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하루는 내가 아침밥을 먹기 전에 선생님이 우리 집에
오셔서 나를 불러 작별 인사를 하실 때에, 나는 정신이 아득하여서 선생님의 품에
매달려 소리를 내어 울었다. 선생님도 눈물이 비오듯 하였다.나는 며칠 동안은 밥도 잘
아니 먹고 울기만 하였다.
그 후에도 어떤 돌림 선생 한 분을 모셔다가 공부를 계속하게 되었으나 이번에는
아버지께서 갑자기 전신불수가 되셔서 자리에 누우셨기 때문에 나는 공부를 전폐하고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게 되었다. 근본 빈한한 살림에 의원이야
약이야 하고 가산을 탕진한 끝에 겨우 아버지는 반신불수로 변하여서 한쪽 팔과
다리를 쓰시게 된 것만도 천행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반신불수로서는 살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하여서라도 병은 고쳐야
하겠다 하여 어머니는 병신 아버지를 모시고 무전여행을 나서시게 되었다. 문전걸식을
하면서 고명 의원을 찾아 남편의 병을 고치자는 것이었다. 집도 가마솥도 다 팔아
없어지고, 나는 백모님 댁에 맡긴 몸이 되어서 종형들과 소 고삐를 끌고 산과 들로
다니며 세월을 보내었다.
부모님은 안악, 신천, 장연 등지로 유리하시는 동안에 아버지 병환이 신기하게도
차도가 있어 못 쓰던 팔다리를 잘은 못해도 쓰셨다. 일가들이 얼마씩 추렴을 내어서
의리를 장만하고, 나는 또 서당에를 다니게 되었다.
책은 남의 것을 빌어서 읽는다 하더라도 지필묵 값이 나올 데가 없었다. 어머니가
김품과 길쌈품을 팔아서 지필묵을 사주실 때에는 어찌나 고마운지 이루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었다.
내 나이가 열 네 살이 되매 선생이라는 이가 모두 고루해서 내 마음에 차지
아니하였다. 벼 열 섬 짜리, 닷 섬 짜리 하고 훈료가 많고 적은 것으로 선생의 학력을
평가하였다. 그들은 다만 글만 부족할 뿐 아니라 그 마음씨나 일하는 것에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때에 아버지는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밥 빌어먹기는 장타령이 제일이라고 큰
글 하려고 애쓰지 말고 행문이나 배우라는 것이었다. '우명문표사단'하는 땅문서 쓰기,
'우근진소지단'하는 소장 쓰기, '유세차감소고우'하는 축문 쓰기,
'복지제기자미유항려'라는 혼서지 쓰기, '복미심차시'하는 편지 쓰기를 배우라 하시므로,
나는 틈틈이 이 공부를 하여서 무식촌 중에 문장이 되어서 문중에서는 내가 장차 존위
하나는 하리라고 촉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 글은 이제 겨우 속문 정도에 지나지
못하지마는 뜻은 한 동네의 존위에 있지 아니하였다. "통감", "사략"을 읽을 때에
'왕후장영유종호(제왕, 제후, 장수, 재상의 씨(혈통)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하는 진승의 말이나 칼을 빼어서 뱀을 베었다는 유방의 일이나 빨래하는
아낙네에게 밥을 빌어먹은 한신의 사적을 볼 때에는 저도 모르게 어깨에서 바람이
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가세로는 고명한 스승을 찾아갈 수가 없어서 아버지께서도 무척 걱정을
하시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마침 공부할 길이 하나 뚫렸다. 우리 동네에서 동북으로
10리쯤 되는 학골이라는 곳에 정문재라는 이가 글을 가르치고 계셨다. 이 이의 문벌은
우리 집과 마찬가지로 상놈이었으나 과문(과거하는 글)으로는 당시에 굴지되는 큰
선비여서 그 문하에는 사처에서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이 정선생이 내 백모와
재종간이므로 아버지께서 그에게 간청하여 훈료(수업료)없이 통학하며 배우는 허락을
얻으셨다. 이에 나는 날마다 밥망태를 메고 험한 산길을 10리나 걸어서 기숙하는
학생들이 일어나기도 전에 가는 일이 많았다.
제작으로는 과문의 초보인 대고풍 십팔구요, 학과로는 한당시와 대학통감 등이요,
습자에서는 분판만을 썼다.
이때에 임진경과를 해주에서 보인다는 공포가 났으니 이것이 우리 나라의 마지막
과거였다. 어떤 날 정선생은 아버지께 이런 말씀을 하시고 나도 과거를 보기 위하여
명지(과거에 글지어 바치는 종이)를 쓰는 연습으로 장지를 좀 쓸 필요가 있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천신만고로 장지 다섯 장을 구해 오셔서 나는 그 다섯 장 종이가
까맣게 되도록 글씨를 익혔다.
과거날이 가까워오매 우리 부자는 돈이 없으므로 과거중에 먹을 좁쌀을 지고
정선생을 쫓아 해주로 갔다. 여관에 들 형편이 못되므로 전에 아버지께서 친해 두셨던
계방에 사처를 정하였다.
과거날이 왔다. 선화당 옆에 있는 관풍각 주위에는 새끼줄을 둘러 늘였다. 정각에
부문을 한다는데 선비들이 접(글방)을 제 접 이름을 쓴 백포기를 장대 끝에 높이 들고
모여들었다. 산동접, 석담접 이 모양이었다. 선비들은 검은 베로 만든 유건을 머리에
쓰고, 도포를 입고 접기를 따라 꾸역꾸역 밀려들어 좋은 자리를 먼저 잡으려고 앞장선
용사패들이 아우성을 하는 것도 볼만하였다. 원래 과장에는 노소도 없고 귀천도 없이
무질서한 것이 유풍이라 한다. 또 가관인 것은 늙은 선비들의 걸과(과거에 급제를
시켜 달라고 비는 것)라는 것이다. 둘러 늘인 새끼 그물 구멍으로 목을 쑥 들이 밀고
이런 소리를 외치는 것이다.
"소생의 성명은 아무이옵는데, 먼 시골에 거행하면서 과거마다 참예하였사옵는데
금년이 일흔 몇 살이올시다. 요 다음은 다시 참가 못하겠사오니 이번에 초시라도
합격이 되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이 모양으로 혹은 큰소리로 부르짖고, 혹은 방성대곡도 하니 한편 비루도 하거니와
또 한편 가련도 하였다.
내 글은 짓기는 정선생이 하시고 쓰기만 내가 하기로 하였으나 내가 과거를 내
이름으로 아니 보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명지를 드린다는 말에 감복하여서 접장 한
분이 내 명지를 써 주기로 하였다. 나보다는 글씨가 낫기 때문이었다. 제 글과 제
글씨로 못하는 것이 유감이었으나 차작으로라도 아버지가 급제를 하셨으면 좋을 것
같았다.
차작으로 말하면 누구나 차작 아닌 것이 없었다. 세력 있고 재산있는 사람들은 다들
글 잘하는 사람에게 글을 빌고 글씨 잘 쓰는 사람에게 글씨를 빌어서 과거를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좋은 편이었다. 어찌 되었던지 서울 권문세가의 청편지 한 장이나
시관의 수청기생에게 주는 명주 한 필이 진사 급제가 되기에는 글 잘하는 큰 선비의
글보다도 빨랐다. 물론 우리 글 따위는 통인의 집 식지감이나 되었을 것이요, 시관의
눈에도 띄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진사 급제는 미리 정해 놓고 과거는 나중 보는
것이었다.
이번 과거에 나는 크게 실망하였다. 아무리 글 공부를 한댔자 그것으로 발천하여
양반이 되기는 그른 세상인 줄을 깨달았다. 모처럼 글을 잘해서 세도 있는 자제들의
대서인이나 되는 것이 상지상일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과거에 실망한 뜻을 아뢰었더니 아버지도 내가 바로 깨달았다고
옳게 여기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 그러면 풍수 공부나 관상 공부를 하여 보아라. 풍수를 잘 배우면 명당을 얻어서
조상님네 산소를 잘 써서 자손이 복록을 누릴 것이요, 관상에 능하면 사람을 잘 알아
보아서 성인 군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을 매우 유리하게 여겨서 아버지께 청하여 "마의상서"를 빌어다가
독방에서 석달 동안 꼼짝 아니하고 공부하였다. 그 방법은 면경을 앞에 놓고 내
얼굴을 보면서 일변 얼굴의 여러 부분의 이름을 배우고 일변 내상의 길흉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내 얼굴을 관찰해 보아도 귀격이나 부격과 같은 좋은 상은 없고
천겨, 빈격, 흉격 뿐이었다. 전자에 과장에서 실망하였던 것을 상서에서나 회복하려
하였더니, 제 상을 보니 그보다도 더욱 낙심이 되었다. 짐승 모양으로 그저 살기
위해서 살다가 죽을까. 세상에 살아 있을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이렇게 절망에 빠진 나에게 오직 한 가지 희망을 주는 것은 "마의상서"중에 있는 이
구절이었다--
(상호불여신호 신호불여심호)
얼굴 좋음이 몸 좋음만 못하고, 몸 좋음이 마음 좋음만 못하다.)
이것을 보고 나는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러나 마음이 좋지
못하던 사람으로 마음이 좋은 사람이 되는 법이 무엇인가. 여기 대하여서는
"마의상서"는 아무 대답도 주지 못하였다. 이래서 상서는 덮어 버리고 지가서를 좀
보았으나 거기도 취미를 얻지 못하고, 이번에는 병서를 읽기 시작하였다. "손무자",
"오기자", "삼략", "육도" 등을 읽어 보았다. 알지 못할 것도 많으나, 장수의 재목을
말한 곳에,
태산이 무너지더라도 마음을 동치 말고,
사졸로 더불어 달고 씀을 같이 하며,
나아가고 물러감을 범과 같이 하며,
남을 알고 저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지지 아니하리라.
(태산복어전 심불망동 여사졸동감고)
(진퇴여호 지피지기 백전불패)
이 구절이 내 마음을 끌었다. 이때에 내 나이가 열 일곱 살, 나는 일가 아이들을
모아서 훈장질을 하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병서를 읽고 일년의 세월을 보냈다.
이때에 사방에는 여러 가지 괴질이 돌았다. 어디서는 진인이 나타나서 바다에
달리는 화륜선을 못 가게 딱 잡아 놓고 세금을 받고야 놓아 주었다는 등, 머지
아니하여 계룡산에 정 도령이 도읍을 할 터이니 바른 목에 가 있어야 새 나라에
양반이 된다 하여 세간을 팔아 가지고 아무개는 계룡산으로 이사를 하였다는 등, 이러한
소리였다.
그런데 우리 동네에서 남쪽으로 20리쯤 가서 갯골이란 곳에 사는 오응선과 그 이웃
동네에 사는 최유현이라는 사람이 충청도 최도명이라는 동학 선생에게서 도를 받아
가지고 공부를 하고 있는데, 방에 들고 나기에 문을 열지 아니하며, 문득 있다가 문득
없어지며, 능히 공중으로 걸어다니므로 충청도 그 선생 최도명한테 밤 동안
다녀온다고 하였다. 나는 이 동학이라는 것에 호기심이 생겨서 이 사람들을
찾아보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남에게 들은 말대로 누린 것, 비린 것을 끊고 목욕하고 새 옷을 입고 나섰다.
이렇게 하여야 받아준다는 것이었다. 내 행색으로 말하면 머리는 빗어서 땋아 늘이고
옥색 도포에 끈목띠를 띠었다. 때는 내가 열 여덟 살 되던 정초였다.
갯골 오씨 집 문전에 다다르니 안에서 무슨 글을 읽는 소리가 나오는데, 그것은
보통 경전이나 시를 외우는 소리와는 달라서 마치 노래를 합창하는 것과 같았다.
공문에 나아가 주인을 찾았더니 통천관을 쓴 말쑥한 젊은 선비 한 사람이 나와서 나를
맞는다. 내가 공손히 절을 한즉 그도 공손히 맞절을 하기로, 나는 황공하여서 내
성명과 문벌을 말하고 내가 비록 성관을 하였더라도 양반댁 서방님인 주인의 맞절을
받을 수 없거늘, 하물며 편발 아이에게 이런 대우가 과도한 것을 말하였다. 그랬더니
선비는 감동하는 빛을 보이면서, 그는 동학도인이라 선생의 훈계를 지켜 빈부귀천에
차별이 없고 누구나 평등으로 대접하는 것이니 미안해 할 것 없다고 말하고 내가
찾아온 뜻을 물었다. 나는 이 말을 들으매 별세계에 온 것 같았다. 내가 도를 들으러
온 뜻을 고하니 그는 쾌히 동학의 내력과 도리의 요령을 설명하였다. 이 도는 용담
최수운 선생께서 천명하신 것이나, 그 어른은 이미 순교하셨고 지금은 그 조카님
최해월 선생이 대도주가 되셔서 포교를 하신다는 것이며, 이 도의 종지로 말하면
말세의 간사한 인류로 하여금 개과천선하여서 새 백성이 되어 가지고 장래에
진주(참진 임금주:참 임금)를 뫼시어 계룡산에 새 나라를 세우는 것이라 하는 것 등을
말하였다. 나는 한 번 들으매 심히 환희심이 발하였다. 내 상호가 나쁜 것을 깨닫고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맹세한 나에게는 하느님을 몸에 모시고 하늘도를 행하는
것이 가장 요긴한 일일 뿐더러 상놈된 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로서는 동학의 평등주의가
더할 수 없이 고마웠고, 또 이씨의 운수가 다하였으니 새 나라를 세운다는 말도
해주의 과거에서 본 바와 같이 정치의 부패함에 실망한 나에게는 적절하게 들리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입도할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서 입도절차를 물은 즉 쌀 한
말, 백지 세 권, 황초 한 쌍을 가지고 오면 입도식을 행하여 준다고 하였다.
"동경대전", "팔편가사", "궁을가" 등 동학의 서적을 열람하고 집에 돌아왔다. 아버지께
오씨에게서 들은 말을 여쭙고 입도할 의사를 품하였더니 아버지께서는 곧 허락하시고
입도식에 쓸 예물을 준비하여 주셨다. 이렇게 하여서 내가 동학에 입도한 것이었다.
동학에 입도한 나는 열심히 공부를 하는 동시에 포덕(전도)에 힘을 썼다.
아버지께서도 입도하셨다. 이때의 형편으로 말하면 양반은 동학에 오는 이가 적고
나와 같은 상놈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내가 입도한 지 불과 몇 개월만에
연비(포덕하여 얻은 신자라는 뜻)가 수백 명에 달하였다. 이렇게 하여 내 이름이 널리
소문이 나서 도를 물으러 찾아오는 이도 있고 내게 대한 무근지설을 전파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대가 동학을 하여 보니 무슨 조화가 나던가?"
하는 것이 가장 흔히 내게 와서 묻는 말이었다. 사람들은 도를 구하지 아니하고
요술과 같은 조화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에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악을 짓지 말고 선을 행하는 것이 이 도의 조화이니라."
이것이 나의 솔직하고 정당한 대답이건마는 듣는 이는 내가 조화를 감추고
자기네에게 아니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김창수(창암이라던
아이명을 이때부터 이 이름을 썼다)는 한 길이나 떠서 걸어 다니는 것을 보았노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모양으로 있는 소리, 없는 소리 섞어 전하여서 내 명성이
황해도 일대 뿐만 아니라 멀리 평안남도에까지 퍼져서 당년에 내 밑에 연비가 무려
수천에 달하였다. 당시 황평 양서 동학당 중에서 내가 나이가 어린 사람으로서 많은
연비를 가졌다 하여 나를 아기 접주라고 별명 지었다. 접주라는 것은 한 접의 수령이란
말로서 위에서 내리는 직함이다.
이듬해인 계사년 가을에 해월(최시형) 대도주로부터 오응선, 최유현 등에게 각기
연비의 성명 단자(명부)를 보고하라는 경통(공함이라는 뜻)이 왔으므로 황해도 내에서
직접 대도주를 찾아갈 인망 높은 도유 열 다섯 명을 뽑을 때에 나도 뽑혔다. 편발로는
불편하다 하여 성관하고 떠나게 되었다. 연비들이 내 노자를 모아 내고 또 도주님께
올릴 예물로는 해주 향목도 특제로 맞추어 가지고 육로, 수로를 거쳐서 충청도 보은군
장안이라는 해월선생 계신 데 다다랐다. 동네에 쑥 들어서니 이 집에서도 저 집에서도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하는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리고 또 일변으로는 해월 대도주를 찾아서 오는 무리,
일변으로는 뵈옵고 가는 무리가 연락부절하고 집이란 집은 어디나 가득 찼었다.
우리는 접대인에게 우리 일행 15명의 명단을 부탁하여 대도주께 우리가 온 것을
통하였더니, 한 시간이나 지나서 황해도에서 온 도인을 부르신다는 통지가 왔다. 우리
일행 열 다섯은 인도자를 따라서 해월 선생의 처소에 이르러 선생 앞에 한꺼번에 절을
드리니 선생은 앉으신 채로 상체를 굽히고 두 손을 방바닥에 짚어 답배를 하시고 먼
길에 오느라고 수고가 많았다며 간단히 위로하는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가지고 온
예물과 도인의 명단을 드리니, 선생은 맡은 소임을 부르셔서 처리하라고 명하셨다.
우리가 불원천리하고 온 뜻은 선생의 선풍도골도 뵈오려니와, 선생께 무슨 신통한
조화 줌치나 받을까 함이었으나 그런 것은 없었다. 선생은 연기가 육십은 되어
보이는데 구레나룻이 보기 좋게 났으며 약간 검게 보이고 얼굴은 여위었으나 맑은
맵시다. 크고 검은 갓을 쓰시고 동저고리 바람으로 일을 보고 계셨다. 방문 앞에 놓인
수철 화로에서 약탕관이 김이 나며 끓고 있었는데 독삼탕 냄새가 났다. 선생이
잡수시는 것이라고 했다. 방 내외에는 여러 제자들이 옹위하고 있었다. 그 중에도 가장
친근하게 모시는 이는 손응구, 김연구, 박인호 같은 이들인데, 손응구는 장차 해월
선생의 후계자로 대도주가 될 의암 손병희로서 깨끗한 청년이었고, 김은 연기가
사십은 되어 보이는데 순실한 농부와 같았다. 이 두 사람은 다 해월 선생의 사위라고
들었다. 손씨는 유식해 보이고 '천을천수'라고 쓴 부적을 보건대 글씨 재주도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 일행이 해월 선생 앞에 있을 때에 보고가 들어왔다.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이가 벌써 군사를 일으켰다는 것이었다. 뒤이어 또 후보가 들어왔다. 어떤 고을
원이 도유(동학 도를 닦는 선비)의 전가족을 잡아 가두고 가산을 강탈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를 들으신 선생은 진노하는 낯빛을 띠고 순경상도 사투리로,
"호랑이가 몰려 들어오면 가만히 앉아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서서
싸우지."
하시니 선생의 이 말씀이 곧 동원령이었다. 각지에서 와서 대령하던 대접주들이
물끓듯 살기를 띠고 물러가기 시작하였다. 각각 제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싸우자는
것이었다.
우리 황해도에서 온 일행도 각각 접주라는 첩지를 받았다. 거기에는 두건 속에
'해월인'이라고 전자로 새긴 인이 찍혀 있었다.
선생께 하직하는 절을 하고 물러나와 잠시 속리산을 구경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벌써 곳곳에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모이고 평복에 칼 찬 사람을 가끔 만나게
되었다. 광혜원 장거리에 오니 만 명이나 됨직한 동학군이 진을 치고 행인을 검사하고
있었다. 가관인 것은 평시에 동학당을 학대하던 양반들을 잡아다가 길가에 앉혀 놓고
짚신을 삼기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은 증거를 보이고 무사히 통과하였다. 부근
촌락에서 밥을 짐으로 지어 가지고 도소(이를테면 사령부)로 날라 오는 것을 무수히
길에서 만났다. 논에서 벼를 베던 농민들이 동학군이 물밀 듯 모여드는 것을 보고 낫을
버리고 달아나는 것도 보았고, 서울에 이르러서는 경군(서울 군사)이 삼남을 향해서
행군하는 것도 만났다. 해주에 돌아왔을 때는 9월이었다.
황해도 동학당들도 들먹들먹하고 있었다. 첫째로는 양반과 관리의 압박으로
도인들의 생활이 불안하였고 둘째로는 삼남(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으로부터
향응하라는 경통이 빗발치듯 왔다. 그래서 15접주를 위시하여 여러 두목들이 회의한
결과 거사하기로 작정하고, 제1회 총소집의 위치를 해주 죽천장으로 정하고 각처
도인에게 경통을 발하였다. 나는 팔봉산 밑에 산다고 하여서 접 이름을 팔봉이라고
짓고 푸른 갑사에 팔봉도소라고 크게 쓴 기를 만들고 표어로는 척양척왜 넉 자를 써서
높이 달았다. 그리고는 서울서 토벌하러 내려올 경군과 왜병과 싸우기 위하여 연비
중에서 총기를 가진 이를 모아서 군대를 편재하기로 하였다. 나는 본시 산협장쟁이요,
또 상놈인 까닭에 산포수 연비가 많아서 다 모아본즉 총을 가진 군사가 7백명이나
되어 무력으로는 누구의 접보다도 나았다. 인근 부호의 집에 간직하였던 약간의
호신용 무기도 모아들였다.
최고회의에서 작정한 전략으로는 우선 황해도의 수부인 해주성을 빼앗아 탐관오리와
왜놈을 다 잡아 죽이기로 하고 팔봉 접주 김창수로 선봉장을 삼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내가 평소에 병서에 소양이 있고 내 부대에 산 포수가 많은 것도 이유겠지마는
자기네가 앞장을 서서 총알받이가 되기 싫은 것이 아마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쾌히 선봉이 되기를 허락하고 다른 부대더러 따라 오라 하고 나는
'선봉'이라고 쓴 사령기를 들고 말을 타고 선두에 서서 해주성을 향하여 전진하였다.
해주성 서문 밖 선녀산에 진을 치고 총공격이 내리기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이윽고 총지휘부에서 총공격령이 내리고 작전 계획은 선봉장인 나에게 일임한다는
명령이 왔다. 나는 이렇게 계획을 세워서 본부에 아뢰고 곧 작전을 개시하였다. 지금
성내에 아직 경군은 도착하지 아니하고 오합지중으로 된 수성군 2백 명과 왜병 일곱
명이 있을 뿐이니,. 선발대로 하여금 먼저 남문을 엄습케 하여 수성군의 힘을 그리로
끌게 한 후에 나는 서문을 깨뜨릴 터인즉 총소(도소에 대한 말이니 총사령부라는
뜻)에서 형세를 보아서 허약한 편을 도우라는 것이었다. 총소에서는 내 계획을
채용하여 한 부대를 남문으로 향하여 행진케 하였다.
이때에 수명의 왜병이 성 위에 올라 대여섯 방이나 시험 사격을 하는 바람에
남문으로 향하던 선발대는 도망하기 시작하였다. 왜병은 이것을 보고 돌아와서
달아나는 무리에게 총을 연발하였다. 나는 이에 전군을 지휘하여서 서문을 향하여
맹렬한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돌연 총소에서 퇴각하라는 명령이 내리고 우리 선봉대는
머리도 돌리기 전에 따르던 군사가 산으로 들로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한 군사를
붙들어 퇴각하는 까닭을 물으니 남문밖에 도유 서너 명이 총에 맞아 죽은
까닭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니 선봉대만 혼자 머물 수도 없어서 비교적 질서 있게 퇴각하여 해주에서
서쪽으로 80리 되는 회학동 곽감역 댁에 유진하기로 하였다. 무장한 군사는 축이 안
나고 거의 전부 따라와 있는 것이 대견하였다.
나는 이번의 실패에 분개하여서 잘 훈련된 군대를 만들기에 힘을 다하기로 하였다.
동학 도유거나 아니거나 전에 장교의 경험이 있는 자는 비사후폐로 초빙하여 군사를
훈련하는 교관을 삼았다. 총 쏘기는 말할 것도 없고 행보하는 법이며 체조며 온갖
조련을 다하였다. 좋은 군대를 만드는 것이 싸움에 이기는 비결이라고 믿은 것이다.
하루는 어떤 사람 둘이 내게 면회를 청하였다. 구월산 밑에 사는 정덕현, 우종서라는
사람들이었다. 찾아온 까닭을 물었더니 그 대답이 놀라웠다. 동학군이란 한 놈도 쓸
것이 없는데 들은즉 내가 좀 낫단 말을 듣고 한 번 보러 왔다는 것이다. 옆에 있던 내
부하들이 두 사람의 말이 심히 불공함을 분개하였다. 나는 도리어 부하를 책망하여
밖으로 내보내고 이상한 손님과 셋이서 마주 앉았다. 나는 공손히 두 사람을 향하여,
'선생'이라 존칭하고 이처럼 찾아와 주시니 무슨 좋은 계책을 가르쳐 주시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런즉 정씨가 더욱 교만한 태도로 말하기를 비록 계책을
말하기로니 네가 알아듣기나 할까, 실행할 자격이 없으리라고 비웃은 뒤에, 더욱
호기 있는 어성으로, 동학 접주나 하는 자들은 어줍지 않게 호기가 충천하여 선비를
초개와 같이 보니 너도 그런 사람이 아니냐고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더욱 공손한
태도로,
"이 접주는 다른 접주와는 다르다는 것을 선생께서 한 번 가르쳐 보신 뒤에야 알
것이 아닙니까?"하였다. 그들은 둘 다 나보다 십년은 연상일 것 같았다.
그제야 정씨가 혼연히 내 손을 잡으며 계책을 말하였다. 그것은 이러하였다.
1. 군기를 정숙히 하되 비록 병졸을 대하더라도 하대하지 아니하고 경어를 쓸 것.
2. 인심을 얻을 것이니, 동학군이 총을 가지고 민가로 다니며 집곡이니 집전이니
하고 강도적 행위를 하는 것을 엄금할 것.
3. 초현이니, 어진 이를 구하는 글을 돌려 널리 좋은 사람을 모을 것.
4. 전군을 구월산에 모으고 훈련할 것.
5. 재령, 신천 두 고을에 왜가 사서 쌓아 둔 쌀 2천 석을 몰수하여 구월산 패엽사에
쌓아 두고 군량으로 쓸 것.
나는 곧 이 계획을 실시하기로 하고 즉시 전군을 집합장에 모아 정씨를 모주라,
우씨를 종사라고 공포하고 전군을 지휘하여 두 사람에게 최경례를 시켰다. 그리고는
구월산으로 진을 옮길 준비를 하던 차에, 어느 날 밤 신천 청계동 안진사로부터
밀사가 왔다. 안진사의 이름은 태훈이니 그의 맏아들 중근은 나중에 이등박문을 죽인
안중근이다. 그는 글씨 잘 쓰기로 이름이 서울에까지 떨치고, 또 지략도 있어 당시
조정의 대관들까지도 그를 무섭게 대우하였다. 동학당이 일어나매 안진사를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그의 고향인 청계동 자택에 의려소를 두고 그의 자제들로 하여금
모두 의병이 되게 하고 포수 3백명을 모집하여서 벌써 신천 지경 안에 있는 동학당을
토벌하기에 많은 성공을 하여서 각 접이 다 이를 두려워하고 경계하던 터였다.
나는 정 모주로 하여금 이 밀사를 만나게 하였다. 그의 보고에 의하면, 나의 본진이
있는 회학동과 안진사의 청계동이 불과 20리 상거이나 만일 내가 무모하게 청계동을
치려다가 패하면 내 생명과 명성을 보장하기 어려울 것이니 그러하면 좋은 인재를
하나 잃어버리게 될 것인즉 안진사가 나를 위하는 호의로 이 밀사를 보냈다는
것이었다. 이에 곧 나는 참모회의를 열어서 의논한 결과 저편에서 나를 치지 아니하면
나도 저편을 치지 아니할 것, 피차에 어려운 지경에 빠질 경우에 서로 도울 것이라는
밀약이 성립되었다.
예정대로 나의 군사는 구월산으로 집결하였다. 재령, 신천에 있던 쌀도 패엽사로
옮겨왔다. 한 섬을 져오면 서 말을 준다고 하였더니 당일로 다 옮겨졌다. 날마다 군사
훈련도 여행하였다. 또 인근 각동에 훈령하여 동학당이라고 자칭하고 민간에 행패하는
자를 적발하여 엄벌하였더니 며칠이 안 지나서 질서가 회복되고 백성이 안도하였다.
또 초현문을 발표하여 널리 인재도 수탐하여 송종호, 허곤 같은 유식한 사람을 얻었다.
패엽사에는 하온당이라는 도승이 있어서 수백 명 남녀 승도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나는
가끔 그의 법설을 들었다.
이러는 동안에 경군과 왜병이 해주로 접령하고 옹진, 강령 등지를 평정하고 학령을
넘어온다는 기별이 들렸다. 그들의 목표가 구월산일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화근은 경군이나 왜병에 있지 아니하고 나와 같은 동학당인 이동엽의 군사에
있었다. 이동엽은 구월산 부근 일대에 가장 큰 세력을 잡은 접주로서 그의 부하는
나의 본진 가까이까지 침입하여 노략질을 함부로 하였다. 우리 군에서는 사정없이
그들을 체포하여 처벌하였기 때문에 피차간에 반목이 깊어진데다가, 우리 군사들 중에
우리 군율에 의한 형벌을 받고 앙심을 품은 자와, 노략질을 마음대로 하고 싶은
자들이 이동엽의 군대로 달아나는 일이 날로 늘었다. 이리하여 이동엽의 세력은 날로
커지고 내 세력은 날로 줄었다. 이에 나는 최고회의를 열어 의논한 결과, 나는
동학접주인 칭호를 버리기로 하고 군대를 허곤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이는 나의
병권을 빼앗으려 함이 아니요, 나를 살려내고자 하는 계책이었다. 이에 허곤은
송종호로 평양에 있는 장호민에게 보내는 소개 편지를 가지고 평양으로 떠났으니,
이것은 황주 병사의 양해를 얻어서 일을 정치적으로 해결하려 함이었다.
이때는 내 나이가 열 아홉, 갑오년 섣달이었다. 나는 몸에 열이 나고 두통이
심하여서 자리에 눕게 되었다. 하은당 대사는 나를 그의 사처인 조실에 혼자 있게
하고 몸소 병구완을 하였다. 며칠 후에 내 병이 홍역인 것이 판명되어서 하은당은,
"홍역도 못한 대장이로군.'
하고 웃었다. 그리고는 홍역을 다스린 경험이 있는 늙은 승수자 한 분을 가리어 내
조리를 맡게 하였다.
이렇게 병석에 누워 있노라니, 하루는 이동엽이 전군을 이끌고 패엽사로
쳐들어온다는 급보가 있고, 뒤이어 어지러이 총소리가 나며 순식간에 절 경내에는
양군의 육박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원래 사기가 저상한 데다가 장수를 잃은 나의
군사들은 불의의 습격을 받아서 일패도지하고, 나의 본진은 적의 제압한 바 되고
말았다. 나의 군사들은 보기도 흉하게 도망하여 흩어지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이동엽의 호령이 들렸다.
"김접주에게 손을 대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영장 이종선 이놈 막 잡아 죽여라."
이 말을 듣고 나는 이불을 차고 마루 끝에 뛰어나서서,
"이종선은 내 명령을 받아서 무슨 일이나 한 사람이니 만일 이종선이가 죽을 죄를
지었거든 나를 죽여라."
하고 외쳤다.
이동엽이 부하에게 명하여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게 하고 이종선만을 끌고
나가더니, 이윽고 동구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이동엽의 부하는 다 물러가고 말았다.
이종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동구로 달려 내려갔다. 과연 그는 총에 맞아
쓰러졌고 그의 옷에서는 아직도 불이 붙어 타고 있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안고
통곡하다가 내 저고리를 벗어 그 머리를 싸주었다. 그 저고리는 내가 남의 웃사람이
되었다 하여 어머니께서 지어 보내선 평생에 처음 입어 보는 명주 저고리였다.
동민들은 백설 위에 내가 벌거벗고 통곡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의복을 가져다가 입혀
주었다. 나는 동민들을 지휘하여 이종선의 시체를 매장하였다.
이종선은 함경도 정평 사람으로, 장사차 황해도에 와서 살던 사람이다. 총사냥을
잘하고, 비록 무식하나 사람을 거느리는 재주가 있어서 내가 그를 화포령장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종선을 매장한 나는 패엽사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부산동 정덕현 집으로 갔다.
내게서 그동안 지낸 일을 들은 정씨는 태연한 태도로,
"이제 형은 할 일 다한 사람이니 나와 함께 평안히 유람이나 떠나자."
하고 내가 이종선의 원수 갚을 말까지도 눌러 버리고 말았다. 이동엽이가 패엽사를
친 것은 제 손으로 저를 친 것과 마찬가지다. 경군과 왜병이 이동엽을 치기를 재촉한
것이라고 하던 정씨의 말이 그대로 맞아서 정씨와 내가 몽금포 근처에 숨어 있는
동안에 이동엽은 잡혀가서 사형을 당하였다. 구월산의 내 군사와 이동엽의 군사가
소탕되니 황해도의 동학당은 전멸이 된 셈이었다.
몽금포 근동에 석 달을 숨어 있다가 나는 정씨와 작반하여 텃골에 부모를 찾아
뵈옵고 정씨의 의견을 안진사를 찾아 몸을 의탁하기로 하였다. 나는 패군지장으로
일찍 적군이던 안진사의 밑에 들어가 포로 신세가 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였으나,
정씨는 안진사의 위인이 그렇지 아니하며 심히 인재를 사랑한다는 말과, 전에
안진사가 밀사를 보낸 것도 이런 경우를 당하면 자기에게 오라는 뜻이라고 역설함에
나는 그 말대로 한 것이었다.
텃골 본향에서 부모님을 뵈온 이튿날, 정씨와 나는 곧 천봉산을 넘어 청계동에
다다랐다. 청계동은 사면이 험준하고 수령한 봉란으로 에워 있고, 동네에는 띄엄띄엄
4, 50호의 인가가 있으며, 동구 앞으로 한 줄기 개울이 흐르고 그곳 바위 위에는
'청계동천'이라는 안진사의 자필 각자가 있었다. 동구를 막을 듯이 작은 봉우리 하나가
있었는데 그 위에는 포대가 있고 길 어귀에 파수병이 있어서 우리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명함을 내주고 얼마 있노라니 의려장의 허가가 있다 하여 한 군사가 우리를
안내하여 의려소인 안진사 댁으로 갔다. 문전에는 연당이 있고 그 가운데는, 작은
정자가 있었는데, 이것은 안진사 6형제가 평일에 술을 마시고 시를 읊는 곳이라고
했다. 대청 벽상에는 의려소 석 자를 횡액으로 써 붙였다. 안진사는 우리를 정청에
영접하여 수인사를 한 후에 첫 말이,
"김 석사가 패엽사에서 위험을 면하신 줄은 알았으나 그 후 사람을 놓아서
수탐하여도 계신 곳을 몰라서 우려하였더니 오늘 이처럼 찾아 주시니 감사하외다."
하고 다시,
"들으니 구경하시던데 양위분은 안접하실 곳이 있으시오?"
하고 내 부모에 관한 것을 물으신다.
내가 별로 안접하실 곳이 없는 뜻을 말하였더니 안진사는 즉시 오일선에게 총멘
군사 30명을 맡기며,
"오늘 안으로 텃골로 가서 김 석사 부모 양위를 뫼셔 오되, 근동에 있는 우마를
징발하여 그 댁 가산 전부를 반이 해 오렷다."
하고 영을 내렸다.
이리하여 우리 집이 청계동에 우접하게 되니 내가 스무 살 되던 을미년 2월
일이었다.
내가 청계동에 머문 것은 불과 4, 5개월이었지만, 그동안은 내게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것은 첫째로는 내가 안진사와 같은 큰 인격에 접한 것이요, 둘째로는 고
산림과 같은 의기 있는 학자의 훈도를 받게 된 것이었다.
안진사는 해주 부중에 10여 대나 살아 오던 구가의 자제였다. 그 조부 인수가 진해
현감을 지내고는 세상이 차차 어지러워짐을 보고 세상에서 몸을 숨기고자 하여, 많은
재산을 가난한 일가에게 나누어 주고 약 3백석 추수하는 재산을 가지고 청계동으로
들어오니 이는 산천이 수려하고 족히 피난처가 될 만한 것을 취함이었다. 이때는
장손인 중근이 두 살 때였다. 안진사는 과거를 하려고 서울 김종한의 문객이 되어
다년 유경하다가 진사가 되고는 벼슬할 뜻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형제 여섯
사람이 술과 시로 세월을 보내고 뜻 있는 벗을 사귀기로 낙을 삼고 있었다. 안씨
6형제가 다 문장재사라 할 만하지마는 그 중에서도 셋째인 안진사가 눈에 정기가
있어 사람을 누르는 힘이 있고 기상이 뇌락하여 비록 조정의 대관이라도 그와
면대하면 자연 경외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는 내가 보기에도 퍽 소탈하여서 비록
무식한 하류들에게까지도 조금도 교만한 빛이 없이 친절하고 정녕하여서 상류나
하류나 다 그에게 호감을 가졌었다. 얼굴이 매우 청수하나 술이 과하여 코끝이 붉은
것이 흠이었다. 그는 율을 잘하여서 당시에도 그의 시가 많이 전송되었고 내게도 그가
득의의 작을 흥있게 읊어 주는 일이 있었다. 그는 '황석공소서'를 자필로 써서
벽장문에 붙이고 취흥이 나면 소리를 높여서 그것을 낭독하였다.
그때에 안진사의 맏아들 중근은 열 세 살로 상투를 짜고 있었는데 머리를 자주색
수건으로 질끈 동이고 돔방총이라는 짧은 총을 메고 날마다 사냥을 일삼고 있어,.
보기에도 영기가 발발하고 청계동 군사들 중에 사격술이 제일이어서 짐승이나 새나
그가 겨눈 것은 놓치는 일이 없기로 유명하였다. 그의 계부 태건과 언제나 함께
사냥을 다니고 있었다. 그들이 잡아오는 노루와 고라니로는 군사들을 먹이고 또 진사
6형제의 주연의 안주를 삼았다. 진사의 둘째 아들 정근과 셋째 공근은 다 붉은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를 땋아 늘인 도련님들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진사는 이 두
아들에 대해서는 글을 읽지 않는다고 걱정도 하였으나 중근에 대해서는 아무 간섭도
아니하는 모양이었다.
고 산림의 이름은 능선인데 그는 해주 서문 밖 비동에 세거하던 사람으로서, 중암
조중교의 문인이요, 의암 유인석과 동문으로서, 해서에서는 행검으로 굴지 되는
학자였다. 이도 안진사의 초청으로 이 청계동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내가 고 산림을 처음 대한 것은 안진사의 사랑에서였다. 그런데 내게 자기의 사랑에
놀러 오라는 그의 말에 나는 크게 감복하여 이튿날 그의 집에 찾아갔다. 선생은
늙으신 낯에 기쁨을 띠우시고 친절하게 나를 영접하시며 맏아들인 원명을 불러 나와
상면케 하였다. 원명은 나이 서른 살쯤 되어 보였는데 자품은 명민한 듯하나 크고
넓음이 그 부친의 뒤를 이을 것 같지는 아니하였다. 원명에게는 15, 6세나 된 맏딸이
있었다.
고 선생이 거처하시는 방은 작은 사랑이었는데, 방 안에는 책이 가득 쌓여 있고 네
벽에는 옛날에 이름난 사람들의 좌우명과 선생 자신의 심득 같은 것을 둘러 붙였으며,
선생은 가만히 꿇어 앉아서 마음을 가다듬는 공부를 하시며 간간이 "손무자",
"삼략" 같은 병서도 읽으셨다.
고 선생은 날더러, 내가 매일 안진사의 사랑에 가서 놀더라도 정신 수양에는
효과가 적을 듯하니, 매일 선생의 사랑에 와서 같이 세상사도 말하고 학문도 토론함이
어떠냐고 하였다. 나는 이러한 대선생이 내게 대하여 이처럼 특별한 지우를 주시는
것을 눈물겹게 황송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나는 좋은 마음 가진 사람이 되려던
소원을 말씀드리고 모든 것을 고 선생의 지도에 맡긴다는 성의를 표하였다. 과거에
낙심하고 관상에 낙심하고 동학에 실패한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리를 가지게
되었었는데 나 같은 것도 고 선생과 같으신 큰 학자의 지도로 한 사람 구실을 할 수가
있을까? 스스로 의심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런 말씀을 아뢰었더니 고 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쉬운 일이 아닌데 하물며 남의 일을 어찌 알랴. 그러므로
내가 그대의 장래를 판단할 힘은 없으나 내가 한 가지 그대에게 확실히 말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성현을 목표로 하고 성현의 자취를 밟으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힘써
가노라면 성현의 지경에 달하는 자도 있고 못 미치는 자도 있거니와, 이왕 그대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될 뜻을 가졌으니 몇 번 길을 잘못 들더라도 본심만 변치 말고
고치고 또 고치고 나아가고 또 나아가면 목적지에 달할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니
괴로워하지 말고 행하기만 힘쓰라."
이로부터 나는 매일 고 선생 사랑에 갔다. 선생은 내게 고금의 위인을 비평하여
주고 당신이 연구하여 깨달은 바를 가르쳐 주고, "화서아언"이며 "주자백선"에서
긴요한 절구를 보여 주셨다. 선생이 특히 역설하시는 바는 의리에 관해서였다. 비록
뛰어난 재능이 있더라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그 재능이 도리어 화단이 된다고 하셨다.
선생은 경서를 차례로 가르치는 방법을 취하지 아니하고 내 정신과 재질을 보셔서
뚫어진 곳은 깁고 빈 구석을 채워 주는 구전심수의 첩경을 택하셨다. 선생은 나를
결단력이 부족하다고 보셨음인지, 아무리 많이 알고 잘 판단하였더라도 실행할
과단력이 없으면 다 쓸데없다고 말씀을 하시고,
득수반지무족기 현애철수장부아
'나뭇가지를 잡아도 발에는 힘주지 않고 언덕에 매달려도 손에 힘주지 않는 것이
장부이다.'
라는 글구를 힘있게 설명하셨다.
가끔 안진사가 고 선생을 찾아 오셔서 두 분이 고금의 일을 강론하심을 옆에서
듣는 것은 참으로 비할 데 없이 재미있는 일이었다.
나는 가끔 그 선생 댁에서 놀다가 저녁밥을 선생과 같이 먹고 밤이 깊고 인적이
고요할 때까지 국사를 논하는 일이 있었다.
고 선생은 이런 말씀도 하셨다."예로부터 천하에, 흥하여 보지 아니한 나라도 없고
망해 보지 아니한 나라도 없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는 데도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
있고,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다. 어느 나라 국민이 의로써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망하는
것은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요, 그와는 반대로 백성이 여러 패로 갈라져 한편은
이 나라에 붙고 한편은 저 나라에 붙어서 외국에는 아첨하고 제 동포와는 싸워서
망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이다. 이제 왜의 세력이 전국에 충만하여 궐내에까지
침입하여서 대신도 적의 마음대로 내고 들이게 되었으니 우리 나라가 제2왜국이
아니고 무엇인가. 만고에 망하지 아니한 나라가 없고 천하에 죽지 아니한 사람 있던가.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일사보국의 일건사가 남아 있을 뿐이다.
선생은 비감한 낯으로 나를 보시며 이 말씀을 하셨다. 나는 비분을 못 이겨 울었다.
망하는 우리 나라를 망하지 않도록 붙들 도리는 없는가 하는 내 물음에 대해서
청국과 서로 맺는 것이 좋다 하시고 그 이유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청국이 갑오년 싸움(청일전쟁. 1894년)에 진 원수를 반드시 갚으려 할 것이니 우리
중에서 상당한 사람이 그 나라에 가서 그 국정도 조사하고 그 나라 인물과도 교의를
맺어 두었다가 훗일에 기회가 오거든 서로 응할 준비를 하여 두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선생의 이 말씀에 감동하여 청국으로 갈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나와 같이
어린 것이 한 사람 간다고 해서 무슨 일이 되랴 하는 뜻을 말씀드린즉 선생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책망하시고, 누구나 제가 옳다고 믿는 것을 혼자만이라도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니 저마다 남이 하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저마다 제 일을 하면 자연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라. 어떤 사람은 정계에 또 어떤 사람은 학계나
상계에 이처럼 자기가 합당한 방면으로 활동하여서 그 결과가 모이면 큰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에 나는 청국으로 갈 결심을 하고 그 뜻을 고 선생께 아뢰었다. 선생은 크게
기뻐하셔서 내가 떠난 뒤에는 내 부모까지도 염려 말라 하셨다.
나는 의리로 보아 이 뜻을 안진사에게 통함이 옳을까 하였으나, 고 선생은 이에
반대하셨다. 안진사가 천주학을 믿을 의향이 있는 모양인데, 만일 그렇다면 이는
양이(서양 오랑캐)를 의뢰하려 함이니 대의에 어긋나는 일인즉 지금 이런 큰일을
의논할 수 없다. 그러나 안진사는 확실한 인재니, 내가 청국을 유력한 뒤에 좋은 일이
있을 때에 서로 의논하는 것도 늦지 아니하니 이번에는 말없이 떠나라는 것이었다.
나는 무엇이나 고 선생의 지시대로 하기로 결심하고 먼 길을 떠날 준비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