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어느 현대작가는 “소설을 영화하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라고 말했다. 그같은 생각에 동의하는가?
주제에 대하여 일러두는 말 :
① 여기서 제기된 관심사는 문학작품을 영화로 <각색>하는 문제다. 그러나 주제는 오직 소설에 국한된 것이다. 따라서 희곡작품의 영화화는 전혀 다른 문제이므로 제외된다. 반면에 단편소설은 소설 장르에 속하는 것이므로 토론의 대상이다.
② 많은 수험생들이 이런 주제를 만나면 몹시 당황한다. 그들의 영화에 대한 소양이 보잘것 없고 특히 자신들이 읽은 소설을 바탕으로 해서 만든 영화를 한번도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의 경우가 그렇다.
독서를 많이 하고 영화를 많이 보는 수험생들 역시 빈번히 저지르는 실수가 한 가지 있다. 너무 많은 예를 들어보임으로써 주의를 산만하게 만드는 실수가 그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본다면 사실 이 논술문은 단 한 작품의 각색에 대한 분석만을 바탕으로 하여 작성될 수도 있다.
③ 설계의 가능성은 여러 가지다. 최선의 해결방법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두세 편의 중요한 작품들의 해석을 중심으로 논술문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소설과 영화라는 두 가지 장르 사이의 전통적인 대립관계를 관심의 축으로 삼아서 토론을 전개해 나갈 수도 있다.
예를 들어서 :
제1부 : 시간(소설)과 공간(영화)의 대립
제2부 : 내면과 외면의 대립, 주관성과 객관성의 대립
제3부 : 말과 영상의 대립
각 부는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말하곤 하는 대립관계의 소개와 그런 견해에 대한 비판을 포함한다.
[논술문의 설계와 초안]
서론
아마도 장터와 어릿광대 판에서 탄생한 것이기 때문인 듯 영화는 오랫동안 지식인 계층 속에서는 업신여김을 당해왔다. 영화인들은 “교양인의 문화”를 위협하는 야만인쯤으로 취급당하기 일쑤여서 그들의 침해를 최소화하는 일이 지식인의 관심사였다.
그러므로 어떤 작가가 “소설을 영화화한다는 것은 큰 잘못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다행하게도 오늘날에 와서는 그같은 보수적 입장이 한결 개방적인 쪽으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문학인들과 영화인들이 서로 협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각색(영화화)은 원작에 충실하지 못한 일종의 배신행위가 아닐까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제1부 : 영화화로 인하여 소설이 변질되는 외재적인 이유들
소설은 장인의 영역에 속한다. 반면에 영화는 기업이다. 영화감독은 그러므로 “좋은 영화는 돈을 많이 벌어들이는 영화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제작진들의 여러 가지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요구는 너무나 여러 가지여서 그것을 일일이 다 들어주면서 성공적인 영화각색을 하기는 매우 어렵다.
① 지나친 단순화 :
많은 대중을 상대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평균적인 수준의 관객”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건 제거해버리게 된다.
그 결과
- 줄거리의 도식화
- 인물들의 심리를 분명하게 드러난 스테레오 타입(전형적 타입)으로 환원한다.
- 선과 악의 대립을 단순화 혹은 강화한다.
- 행동과 직접 관련이 없지만 흔히 소설 속에서는 더 중요한 요소인 것들을 생략한다.
② <해피엔드>의 강요 :
해피엔드(가벼운 행복감)는 예나 지금이나 흔히 볼 수 있는 요구사항이다. 피에르 불은 자신의 소설 <콰이강의 다리>를 각색한 영화가 소설과 마찬가지로 실패로 끝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제작자들이 “행복한” 결말 속에서 호감이 가는 주인공들이 마땅히 받을 수 있는 보상을 받도록 하는 가운데 영화를 끝맺으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③ 강요당한 장면들과 배우들 :
1920년에 어떤 제작자들이 자신이 제작하는 영화마다 관객들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화려한 사교 파티 장면을 하나씩 삽입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오늘날에는 에로틱한 장면이나 폭력적인 싸움 장면을 삽입시켜 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
소설과의 연관성이 항상 자명한 것은 아니다. 제작자는 때로 역할에 맞지 않는 배우를 강요하는 경우가 있다.
④ 검열 :
흔히 검열은 소설에 대해서보다도 영화에 대하여 더 엄격하다.(가령 디드로의 소설 <수녀>는 아무 문제 없이 아무데서나 판매되고 있는데 비하여 그 소설을 각색한 영화는 제작 즉시 상영금지되었다.) 그러므로 감독은 그가 각색하는 작품의 강도를 완화시키고자 하는 유혹을 받을 수 있다.
⑤ <국제적>인 영화의 추구 :
이 역시 원작의 단순화와 변형 쪽으로 나가도록 부추기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문화적으로 너무 한 지역의 특성이 짙은 것은 없애버린다. 그리하여 외국의 구매자들의 마음에 맞는 쪽으로 영화를 만들게 된다.
⑥ 영화의 길이 :
여전히 상업적인 이유때문에 영화는 약 2시간 정도의 길이여야 한다. 3시간 짜리 <보바리 부인>을 만든 르느와르 감독은 결국 그 중 3분의 1을 잘라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작품의 내용이 변질되게 마련이다.
반대로 단편소설을 각색하여 영화를 만들 때도 2시간의 길이를 채우자니 자연히 억지로 추가하는 군더더기 이야기나 장면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제1부의 결론 :
소설의 각색이 실패하게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사실 훌륭한 소설을 각색하여 신통치 못한 영화를 만든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따라서 대다수의 소설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각색하여 만든 영화에 대하여 실망하게 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마치 자기가 아끼며 살던 집을 남이 새로 개조하여 살고 있는 곳을 방문할 때와 같은 인상을 받는다. 그래서 작가들이 영화인들에 대하여 갖게 되는 불만은 어느 소설가의 다음과 같은 말 속에 잘 요약된다. : “문학은 그들에게 저항했지만 그들은 문학을 학살했다.”
제2부 : 영화화로 인하여 소설이 변질하는 “내재적” 이유들
그러나 영화감독이 완전히 자유로와질 경우(꿈 같은 이야기같이 들리겠지만 때로는 그것이 가능해지기도 한다.), 한걸음 나아가서 감독이 소설가와 협력할 경우, 위에서 언급한 모든 제약들은 없어진다. 그런데도 영화각색이 실패하고 소설의 가장 중요한 것이 영화로 표현되지 못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것은 두 가지 장르 사이의 건너뛸 수 없는 장벽들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① 시간의 문제 :
시간은 소설의 재료라고 할 수 있다. 다른 그 어떤 장르도 시간이 사물과 인간들에 끼치는 영향력을 소설만큼 잘 표현해내지는 못한다.
단 2시간 동안 계속되는 영화는(설령 4시간 계속된다 할지라도) 저 포착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소모되는 시간의 흐름을 소설만큼 실감나게 그려보일 수는 없는 것이다. <안나 카레리나>같은 작품은 소설이 아닌 다른 장르로 옮겨놓기가 어렵고 프루스트의 작품들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② 분위기의 문제 :
분위기란 흔히 영상보다는 글을 통해서 암시하기가 더 용이한 미세미묘한 것들로 이루어진다. 가령 심농의 소설들에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를 다른 장르에서 재생시키기는 매우 어렵다. 이 경우 배우의 선정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테스트를 해본 배우들(해리 로우튼, 쟝 가뱅, 쟝 리샤르) 중 그 누구도 심농의 소설에 등장하는 메그레 형사라는 인물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독특한 분위기를 재생해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③ 내면적인 삶의 문제 :
내면적인 삶의 복잡한 양상은 행동과 외관의 묘사에 강한 영화 카메라를 통해서 접근하기가 매우 곤란하다. 무성영화시대나 유성영화시대 초기에는 특히 그러했다.
④ 두 가지 장르의 본질적 차이의 문제 :
두 가지 장르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가장 잘 확인된다. 영화감독이 원작소설에 절대적으로 충실하여 소설의 내용을 그대로 따르고자 할 때마다 그 영화는 원작을 곧이곧대로 존중하려다가 결국에는 원작을 배반하기에 이르렀다. 거장 감독 비스콘티가 영화화한 카뮈의 <이방인>이 그 가장 유명한 예이다.
제2부의 결론 :
그러므로 두 장르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문학작품의 영화화를 반대하는 것은 오직 소설의 옹호자들만이 아니다. 제7예술의 옹호자들 또한 영화의 특수성을 내세우면서 영화를 문학의 가난한 친척으로 비하시키는 것을 반대한다. 그들이 볼 때 영화는 완전히 독자적인 하나의 예술이지 소설이나 연극에 이끌려다니는 예술이 아닌 것이다.
제3부 : 나는 행복한 각색자를 만나보았다.
그러므로 소설가들(영화화는 자기들 예술의 타락이라고 믿는 쪽) 가운데서나 영화인들(영화화로 인하여 영화가 문학에 예속된다고 믿는 쪽) 가운데서나 다같이 소설의 영화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가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들의 주장에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영화화에 대한 반대는 과거에 비하여 훨씬 더 드물어졌다. 그 까닭은 두 가지라고 볼 수 있다. 즉 영화가 전보다 더욱 완전한 예술로 성장했고 각색이라는 개념이 전보다 더 분명하게 규정되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① 영화는 과거보다 더 완전한 예술이 되었다.
두 가지 장르 사이에 가로놓인 장벽에 대하여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점들은 특히 무성영화시대나 유성영화시대 초기에 절실했었다. 그러나 영화의 제작기술과 기법이 발전되고 세련된 오늘날에 있어서 영화는 무엇이나 다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영화는 “문자언어라는 수단 못지 않게 유연하고도 세련된 표현도구”(아스트뤽)로 변한 것이다.
예 :
● 시간의 표현 : 오손 웰스의 <시민케인>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으려는 노력, 펠리니의 경우 되찾은 시간의 표현;모파상의 단편소설들을 각색한 막스 오필스의 영화 속에서 표현한 시간의 반복;<히로시마, 나의 사랑>에서 볼 수 있는 과거시간의 중압감 등 영화도 얼마든지 시간의 예술, 잡을 수 없게 지나가버리는 시간을 표현하는 예술이 될 수 있다.
● 내면적인 삶의 표현 : 내적 독백은 “화면 밖의 목소리”, “플래시 백”, “오버 랩”, 몽타쥬 효과, 음악의 개입 등의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영화는 또한 분위기도 아주 잘 살려낼 수 있다.(베르코르 원작을 영화화한 <바다의 침묵>이 그 좋은 예이다.)
영화감독은 카메라의 움직임, 화면구성, 화면깊이, 촬영각도조절, 조명, 화면절단, 몽타쥬, 무대장치의 구성과 선택, 배우선택과 연기지도 등을 활용하여 두 가지 표현 수단 사이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다. 감독은 이야기를 이해하기 쉽도록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다른 차원으로 옮겨서 표현하는 것이다.
예 :
고다르 감독이 만든 모라비아 원작의 <모멸>;루이 말 감독이 맡은 레몽 크노 원작의 <지하철 속의 자지>, 스크린에 옮겨 표현한 니코스 카잔자키스 원작소설 <희랍인 조르바>.
그러므로 작품을 영화언어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라신느는 말했다. : “나의 비극은 완성되었다. 이제 그것을 쓰는 일만 남았다.” 그와 비슷하게 각색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나의 영화는 다 쓰여져 있다. 이제 그것을 만드는 일만 남았다.”
② 영화화의 넓은 의미
오늘날에 우리는 원작을 배반하는 경우는 두 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
- 원작의 내용도 정신도 다 존중하지 않은 경우
- 그저 원작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도록 그림으로 보여준 경우
“비록 좋은-그냥 나쁘지 않은- 작품이라 하더라도 원작인 책의 알기 쉬운 그림에 불과한 영화란 구태여 만들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럴 경우 나는 영화화에 반대다.”(폴 기마르)
소설을 각색하여 영화화할 때 용납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① 소설과 동등한 작품을 만든다.
영상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통해서 목표하는 바는 책에 쓰여진 글 그대로를 재생시켜 놓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을 번역해 보이고, 책을 불러일으키는 감흥과 유사한 효과를 얻어낼 수 있는 영화적 스타일을 찾아내는 데 있다.
예:
브레송 감독의 <시골 사제의 일기>(조르쥬 베르나노스 원작); 에릭 롬메르 감독의 <오 백작부인>(폰 클라이스트 원작)
② 독창적인 배반
원작의 내용 그 자체에 충실하지도 않고 그 정신을 존중하지도 않지만 독창적인 창조에 이른 경우.
“도대체 소설에 의거해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소설을 출발점으로 삼되 전혀 아무런 구속감없이, 작품의 내용을 존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없이 전혀 딴판인 영화작품을 만든다면 모르지만 말이다. 비스콘티처럼 <이방인>을 가지고 원작에 아주 충실한 영화를 만들겠다고 나서는 것은 명백한 넌센스이다. 카뮈가 불어의 복합과거시제를 미묘하게 사용함으로써 거둔 효과에 어떻게 충실할 수가 있단 말인가?”(로브-그리예)
한편 폴 기마르는 때때로 “기적”같은 일이 이 분야에서도 생길 수 있으므로 한 편의 영화가 책의 정신을 제대로 살려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타르탕프엥씨가 제목 이외에는 나의 소설과는 그다지 비슷한 점이 없는 한 편의 걸작 영화를 만들어냈다면 나는 그것도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자신의 소설 <인생의 잡사>의 각색에 대하여 )
결론
소설 작품을 영화로 각색할 때 생기는 문제들과 문학작품을 번역할 때 생기는 문제들 사이에는 몇 가지 유사한 점이 발견된다.
양쪽 다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아갈 때 생기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번역자들이 내리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결론들에 이르게 된다.
정신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불가피한 배반은 감수해야 한다. 구태여 선택을 해야 한다면 김빠진 충실함보다는 “창조적인 배반”이 차라리 낫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