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사무엘상 제5강
말씀 : 사무엘상 8:1-22절
요절 : 사무엘상 8:5절
우리에게 왕을 세워주소서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왕을 구하는 문제, 누구를 왕으로 삼을 것인가의 문제는 구약의 핵심 주제입니다. 사사기는 왕 없이 자기 보기에 좋은 대로 살아가는 시대상을, 사무엘서는 누가 왕인가의 모습을, 열왕기서는 사람 왕은 참 왕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사람 왕을 구하는 것이 어떤 점에서 악한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왜 사람 왕을 세우도록 하셨는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사무엘이 늙었습니다. 영원한 지도자는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허락받은 시간만큼 섬기다가 다음 사람에게 바톤을 넘겨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톤을 이어받을 아들들이었습니다.(2) 3절을 보십시오. 자기 아버지처럼 청렴결백하게 살지 아니하고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3) 그들은 왜 아버지처럼 살지 않았을까요! “아버지, 나는 아버지처럼 순수하게 살고 싶어요”라고 해야 하는데, “아버지, 나는 아버지처럼 순진하게 살지 않을래요”로 흘러갔습니다. 한글자만 바꾸어도 해석이 달라집니다. 아무튼 호부무견자(虎父無犬子)라는 말은 사무엘 집안에는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였습니다.
청렴한 아버지와 살다보니 가난에 한 맺혀 그럴 수 있습니다. 성자의 부인은 악처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편이 오직 진리에 빠져 살아가면, 아내 홀로 집안 살림과 아이들 책임져야 합니다. 박윤선목사는 한국교회가 배출한 탁월한 성경주석가이며 경건한 설교자입니다. 17살에 사서삼경 맹자와 논어를 주석까지 외웠습니다. 예수님 믿은 이후에는 영어와 독일어와 화란어를 익히며 신학 공부했던 천재였습니다. 성경 연구에 전심을 쏟았고 말씀대로 살고자 몸부림 쳤습니다. 그가 아내에게 보냈던 편지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같이 하시는 것이 가족을 만나보는 것보다 좋습니다. 당신도 나를 만날 날을 기다리지 마시오. 하나님만 모시고 사십시오.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시고 길이요 생명입니다” 사모가 살림과 아이들 감당하느라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46세의 나이에 음주운전차량에 치여 소천하고 맙니다. 당시 박윤선 목사는 홀로 미국 유학중이었는데, 귀국하자마자 가장 먼저 음주 운전한 미군을 찾아 관대한 처분을 바란다는 탄원서를 써줍니다. 딸이 엄청난 상처를 받고 오랜 시간 방황하며 아버지에게 독설을 퍼붓습니다. 박윤선목사는 평생의 가시로 여길만큼 고통을 받습니다.
윤선사모 어머니는 딸들에게 어릴 때부터 하나님 역사를 절대적으로 섬기도록 가르쳤습니다. 여기도 윤선이네요. 내일 중간고사가 있어도 예배 반주를 빼먹지 말도록 했습니다. 한번은 윤선 학생이 월요일에 있는 시험에 집중하고 싶어 이번만 반주를 거르겠다고 하자, 장모는 밥도 먹지 말고 학교도 가지 말라고 협박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울면서 반주하러 갔는데, 엄청난 반발심에 빠졌습니다. “대학 가면 교회 안갈거야, 내 맘대로 할거야” 가끔식 그런 질문을 던져봅니다. 그때 장모가 딸에게 ‘내일 시험이니까 반주 걱정 말고 공부 열심히 해! 성적이 좋아야 하나님께 영광이지’라고 했다면, 딸은 반발심 대신 은혜 충만했을까?, 도리어 '신앙? 별 거 없네, 하나님보다 성적이 더 중요하네', 냉소적으로 흘러갔을까? 자녀와 양들을 돕다보니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이 어떤 해석을 선택할 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삶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근본적으로 본인의 선택이며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장로들은 아들의 문제를 앞세워 사무엘에게 파고듭니다.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아들에게 문제 있는 것과 왕을 세우는 것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습니까! ‘왕의 아들이 되면 아버지의 말을 잘 듣습니까?’, 그런데도 왕을 요구하는 근거로 사무엘 아들들의 문제를 갖다 붙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음이 좋다고 해서 다음 세대 믿음 좋은 사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니, 이제는 하나님께 맡기지 말고 시스템으로 가자는 요구입니다.
사무엘은 장로들의 요청을 기뻐하지 않습니다.(6) ‘당신 집안 꼴을 보니, 더 이상 사사제도를 가기에는 불안하다’, 자기와 자기 집안에 대한 공격으로 들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상처받은 사무엘을 아셨습니다. 하지만 정작 상처받아야 할 분은 사무엘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7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사람 왕을 요구하는 것이 어떤 점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믿음을 버리는 것입니까!
첫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저들이 왕을 요구하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길에 믿고 맡기는 것이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사사제도는 신속성이 떨어지고 불확실한 제도로만 보일 수 있습니다. 사사의 주요 업무는 가르치고 판결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전쟁이 닥치면 12지파 연합군을 결성하여 전쟁터로 갑니다. 연합군을 만들려면 12지파 리더들을 모아 의논해야 합니다. 그 후에 군사들이 모아 지휘체계 짜고 전장으로 이동하는데 시간이 또 걸립니다. 왕정에 비하면 엄청 신속성이 떨어집니다. 한미연합훈련처럼 평소 훈련해야 전투력이 올라가는데, 임시로 만들어진 군대이기에 전투력도 떨어집니다. 결국 하나님의 도움을 받느냐 못받느냐가 전쟁의 승패에 결정적인 요소가 됩니다. 그 점에서 사사의 영성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엘리처럼 많은 허물과 약점을 가진 사람이 사사로 있을 때도 있고, 설령 사무엘같은 좋은 사사라 할지라도 그의 믿음이 다음 세대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사사를 세우는 일정한 법칙이나 패턴도 없습니다. 이 지파에서 사사가 나왔다가 저 지파에서 사사가 나왔습니다. 당신의 주권적인 손길로 때마다 기름을 부어 누군가를 사사로 세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은 그것을 매우 불안하고 막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보다 보이는 사람을 왕으로 세우는 시스템이 더 확실하고 계산가능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왕정을 해야만 나라가 강해진다는 생각은 진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의자왕처럼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어 갈 수도 있고 연산군이나 인조처럼 백성들의 삶을 폐허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로마처럼 오랜 시간 공화정을 했는데도 패권국가로 떠오른 나라들도 있습니다. 믿음편에서 사사제도를 본다면, 많은 장점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파의 자율권을 보장받을 수 있고 왕정에 비해 가성비가 좋습니다. 사사가 왕보다 더 겸손하게 백성들을 대할 확률이 높습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개입하여 리더쉽을 교체할 수 있기에 권력집중으로 인한 부작용을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시스템을 문제해결의 근본 대책으로 주장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제도를 바꿈으로 두려움을 해결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해야 했습니다.
둘째로, 지금까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애굽의 노예였던 이스라엘이 지금 가나안에서 자유민으로 살고 있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무엘이 사사로 있는 동안 블레셋을 물리치고 빼앗긴 영토도 회복했습니다. 그럼에도 왕을 세워달라는 것은 주변의 잘 나가는 왕국에 대한 비교의식에 빠진 것 같습니다. 망해버린 나라들과 비교하며 감사하기보다 제일 잘 나가는 암몬 왕국과 비교하며 왕을 세워달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잊고 비교의식에 빠져 감사하지 않는 것은 큰 죄입니다. 드라마에서 가끔씩 자식이 부모에게 대드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를 왜 돈도 없고 능력도 없는 집구석에 낳았어! 누가 낳아 달랬나! 돈 없으면 낳지를 말든지!” 대부분 당장 굶어 죽을 상황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돈 많은 누구와 비교하여 내뱉는 말입니다. 말 자체는 맞을 수 있으나, 부모 가슴에 못을 박는 악한 말입니다. ‘후레자식’이라 말합니다. 생명을 받고 양육을 받고 사랑을 받으며 살아온 은혜를 몇 푼의 돈보다 쓸모없이 여기는 것입니다.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장로들의 내적 동기도 그러합니다. 본래 이스라엘의 처지가 어떠했습니까! 애굽의 종으로 살면서 고기 몇 점 주워 먹는 것으로 삶의 의미를 삼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랬던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구원받고 가나안을 기업으로 받고 율법과 언약을 받았습니다. 엄청난 은혜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자기보다 좀 더 사는 나라에 눈이 돌아가서 감사함을 모르고 비교의식과 부러움에 빠졌습니다. ‘후레신자’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끄럽게도 이런 말을 내뱉다니, 정말 밑바닥까지 내려왔구나!’, 애통하며 회개해야 하는데, 부끄러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상기후를 많이 겪다보니 당연하게만 여겼던 사시사철의 기후변화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자연 만물이 어쩌다보니 우당탕탕 맞추어진 것이 아니라 오묘한 손길로 지어진 하나님의 작품이었음을 기억케 됩니다. 어항을 돌보는 손길이 있기에 물고기가 살아가듯이, 하나님의 주권아래 하루하루를 살고 있음을 잊지 않고자 기도하게 됩니다. 또한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이 피부로 다가옵니다. 인간은 세상의 주인이 아니었으며, 얼마든지 멸망하여 퇴출당할 수 있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 것도 아닌 죄인들을 환경오염과 죄로 오염된 세상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불안한 인생, 허무한 인생이 아니라 영생과 성령의 열매를 약속받은 자들입니다. 지금 잘 나가는 자들과 비교하면 불평과 원망을 향해 눈이 돌아갈 것이 아닙니다. 최고의 복을 받은 자임을 알고 지금 오늘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부족한 문제만 생각하며 원망과 불평을 내뱉는 것은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자가 성적과 인간관계로 힘들어하는 중학생 사춘기 자녀를 어떻게 도울까 고민했는데, 동료 목자의 조언을 받아 아프리카 수양회를 데리고 갔습니다. 아프리카를 다녀오더니 많이 달라졌습니다. 한가지 생각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내가 제일 힘들게 사는 것이 아니구나, 오히려 많은 것을 받은 사람이구나’, 감사의 눈이 생기자, 부모와의 관계도 많이 좋아졌습니다. 오늘 지금에 담겨있는 은혜를 감사하고 거기에서 출발하는 것,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생의 출발점입니다.
셋째, 방향이 잘못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시고 시내산으로 인도하신 후에 말씀했습니다. 출애굽기 19:6절입니다. “너희가 내게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소망이었습니다. 만민구원역사의 통로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본이 되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장로들은 반복하여 ‘모든 나라와 같이’ 되기 원한다고 말합니다. 다른 나라들이 왕을 세우는 것은 잘 먹고 잘 살아 보기 위해서입니다. 누가 잘 먹고 잘 사는 나라가 되어야 하는가? ‘누가’에 대해서는 왕과 백성의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공통된 목적은 폼 나게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살 수만 있다면 누구의 종이 되어 어떤 모습으로 살아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왕을 세워달라는 요구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 영광을 향해 달려가자는 요구입니다.
이 충돌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충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길을 가겠다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절대로 안된다’며 화를 냈습니다. 만민구원역사 완성이 아닌 이스라엘 회복을 위해 가기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 무섭게 책망했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막8:33)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 장로들처럼 마땅히 구해야 할 것을 알지 못하고 정욕을 위해 구하는 자들이 되고 맙니다.
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장로들에게 왕정제도에 담겨있는 위험성을 엄히 경고하고 가르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왕정은 매우 신속하게 나라 곳곳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처럼 보이는데, 백성들의 희생을 기초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10-18절에서 반복하여 나오는 표현이 ‘데려다가, 가져다가’입니다. 왕은 보호하고 막아주고 돌보는 자가 아니라 착취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백성의 아들들은 왕을 위해 병역의 의무를 져야 합니다.(11) 인생의 황금기인 청년의 때에만 충성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비군, 민방위까지 봉사해야 합니다.(12) 백성의 딸들은 향료 만드는 자, 요리하는 자, 떡 굽는 자로 봉사해야 합니다.(13) 몸으로 때우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왕이 임의로 백성들의 밭과 포도원,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빼앗아 자기 말 잘 듣는 신하에게 줄 것입니다.(4)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 관리와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15), 노비와 소년들과 나귀들을 징발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입니다.(16) 양떼의 십분의 일도 가져갈 것입니다.(17) 한마디로 왕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왕의 통치로 인해 고통하다가 하나님께 부르짖겠지만, 이미 사람의 다스림에 익숙해진 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18)
그러나 백성들은 경고를 듣고도 돌이키지 않습니다.(19) 20절을 보십시오. “우리도 다른 나라들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원하는 싸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번영을 위한 싸움, 다른 나라에 쳐들어가서 사람을 노예로 잡아오고 은과 금을 약탈해오는 싸움을 원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사람의 종이 되는 희생 정도는 기꺼이 감당하겠다고 각오합니다. 그들은 왕이 다른 나라의 부를 빼앗아 올지라도 그것을 백성들과 공평하게 나누지 않을 것임을 몰랐습니다. 나눔은 조금이요 헌신은 무한으로 늘어날 것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부와 권력을 위한 싸움은 백성들의 삶과 생명을 파괴할 것입니다. 진정으로 백성들을 위하는 왕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재앙을 내려 어리석은 이스라엘 장로들을 징계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2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 하시니 사무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성읍으로 돌아가라 하니라” 왕이 세워지면 하나님보다 사람 왕에 주목할 것입니다. 이전보다 더 사람에 매이고 사람에 따라 움직일 수 있습니다. 악한 왕이 나와서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이상한 곳으로 끌고 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다 알면서도 왕을 세워주라니,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도 그러합니다. 자유의지를 주면 하나님을 반역할 수 있으니, 처음부터 로봇처럼 창조해야 할 터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가나안땅을 주신 것도 그러합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잘 먹고 잘 살게 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쉽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신명기 마지막 기록을 보면, 우상숭배에 빠져 나라를 잃어버릴 지경까지 갈 것도 아셨습니다. 그렇다면 광야에서 영원히 뺑뺑이 돌려야 할 것 같은데, 가나안을 주십니다. 참으로 어렵습니다. 저는 누가복음 15장의 탕자비유를 공부할 때마다 의문점을 갖습니다. ‘아버지는 왜 둘째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었을까?’ 그저 비유이니까라고 말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요. 다리를 분질러서라도 집을 떠나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다리를 분질러 막았다면, 아버지와 둘째의 관계는 어찌 되었을까요? 사랑의 관계이기에 딜레마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좋은 것을 주고 싶은데, 좋은 것에 담겨있는 위험성을 알게 될 때입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가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신형폰을 사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합니다. 자녀들의 폼나는 사회생활을 생각하면 좋은 것을 사주고 싶은데, 유혹에 약한 내면을 생각하면 고민스럽습니다. 고민이 커지다보면 피곤하기까지 합니다. 사랑에 매여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어느 선택을 하든지, 지금 사주든지 혹은 지금 안된다고 하든지 사랑의 관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왕을 세워주라는 하나님의 말씀 또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에게 좋은 것을 주고자 늘 고민하십니다. 만왕의 왕, 만유의 주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로 충만하십니다. 강철 같은 사자왕일 때도 있지만, 약한 자식으로 잠 못 이루는 부모왕이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치명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항상 좋은 것을 주시려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 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경배하며 순종하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