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시와소금 신인추천 시부문 당선작] 박여름 홍성주
■달빛카페 외 2편 / 박여름
달빛카페
하늘을 보는 사람들이 사는 대저동
비행기는 낮게 뜨고 낮게 가라앉는다
어둠을 몰고 오는 풀벌레는 암청색을 덧칠한다
둥근 소리를 밟으며 공장 사람들, 집으로 돌아간다
지붕이 낮거나, 더운 온기가 방 안 가득한 사람들은
신발에 달빛 묻힌 채 하나둘 카페로 모여든다
주홍서나물꽃이 주인 없는 담장에 군락을 이룬다
꽃이 모로코에서 따라왔다며 수줍게 웃는 모하메르
여자친구 사라를 닮았다고 볼이 꽃빛으로 물든다
고향 풍경을 속보가 전한다
거대한 6.8 흔들림이 마을을 무너뜨린다
‘지진이 나던 밤, 식탁에 둘러앉아 늦은 저녁을 먹던 하미드 씨 가족,
부엌에 과도를 가지러 갔던 여덟 살 아들은 결국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속보에도 생사조차 알 수 없는 가족들
달빛 속에 손 흔들며 다가왔다 사라졌다 반복한다
냉커피 얼음이 다 녹아도 컵 안에 담겨있다
핏빛 십자가 보다 더 핏빛인 24시 달빛카페에서
여진은 이어진다
눈물이 많은 사람들
달빛에 발목이 빠진다
유산
물려받은 주머니에는 마당 가 하얀 작약이 만개해요
휘모리장단에 맞추어진 하루는
쉼표조차 에누리가 없어요
아이들은 큐브처럼 자주 돌려줘야 해요
자칫 한눈팔면 구름으로 흘러가지요
꼭 쥔 손금은 우리를 매일 기록하고
가족은 주목 마냥 천 년을 건실해야 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할매가 던진 ‘지독한 년’은
어둠에 매달려도 쏟아지지 않아요
“얘들아, 학교 갈 때 냉장고에 ‘오늘’은 꼭 넣어야 해,
‘시간’은 쉽게 상한단다”
나는 상한 ‘어제’를 먹고 설사를 해요
엄마를 밀어내야 해요
아버지를 따라가지 못한 어린 엄마는 침대에만 누워지내요
“손톱이 빨리 자라는구나.”
가늘고 뽀얀 엄마 손에는 초승달이 자주 걸려요
간호사는 낙상주의 푯말을 붙여놓고 나가지만
절벽은 없어요
나를 낳지 못한 나는
하얀 작약꽃 위로 하혈해요
꽃이 붉어요
푸른 구토
창궐한 홍가시나무가 교문을 들어선다
바닥과 벽과 칠판만 서 있는
무표정한 교실
어젯밤 꿈자리는 사나웠다
꿈을 지우기 위해 국화 몇 송이 띄워 우려낸다
발령받고 첫가을, 반 아이들과 함께 간 말죽거리공원
모차르트는 매일 마술피리를 분다
아이들 함성이 꽃잎으로 떠오른다
모든 길이 꽃길 같았다. 그때는
목울대에서 몇 번 국화향이 멈추다 흐른다
꽃이 다시 올까?
언제부턴가 교실은 방향 잃은 외줄 타기다
해리성을 가진 창밖 구경꾼들
아침부터 가시화살 문자를 날린다
칠판은 강아지풀처럼 자꾸 흔들린다
쓰다만 메모장에 다시 쓴다
교실은 더이상 화원이 아니다
벗어나야 한다
교정의 사과는 마지막 태양에 몸을 뒤집는다
봄부터 똬리를 틀며 수없이 반복하던 푸른 구토
모서리가 둥글다
무덤이다
박여름(본명 박금숙)_강원 태백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과 졸업. 2005년 방송대 문학상 수상
■누에잠을 앓다 외 2편 / 홍성주
누에잠을 앓다
남쪽으로 내려가요
삼팔선을 넘어가면 온통 지뢰밭이지요
이빨 사이로 새는 신음 소리
철책을 넘나들었죠
아, 개구멍은 안 돼요
따닥따닥 심장 볶는 소리에
콩닥콩닥 머리가 울려요
저절로 온몸에 잔뜩
힘이 쥐어지네요
떨리지 않는 척은 무척 힘이 들어요
방공호 밖으로 나가면 안 되겠죠
선은 넘지 말라고요, 제발
분계선은 37도이지요
실수로 넘은 거면 셋 셀 동안
다시 넘어가 버려요
하나, 둘, 셋
빵야!
타이레놀 두 발
쏴버리고 말았네요
체온계인들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잘 때마다 껍질 벗는 누에잠처럼
사락사락 허탈한 만큼 낙엽이었어요, 며칠
자정의 스위치
잠시 묵념, 한 소절 레퀴엠도 없이
매일 죽는 오늘에게
슬금슬금 어스름 저녁이 불빛을 데려온다
잠을 여는 찰나에 꾹꾹
침 발라 써 내린
몽유의 그림자가 유리처럼 굳는다
구부정한 하루
눕지도 못한 채 자근자근 밟힌다
밟고 두드려도
펴지지 않는 속옷의 깊이
아무도 모르리라 쓴다
다시 깨어나지 못해도 언제나 오늘
내일은 별책 부록쯤으로 남겨둬야지
흐르는 기억이
자정의 스위치를 내린다
어제는 잠깐 졸다 만난 환영일지도 몰라
내일은
말쑥이 다려놓은 슈트를 입을 거야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로
다가오는 초침
접힌 기지개가 젖은 햇살을 들어 올린다
차렷
오늘인 거야, 내일도
바람에 아니 흔들리고
대학병원 긴 복도가 한가롭다
창 너머 엎드린 산
단풍이 초록에 업혀 가을로 다가선다
등 뒤 불투명한 말소리
저벅저벅 걸어간다
유리창엔 순서 없는 생의 그림자
사다리를 타고 있다
시간은 빈 껍질로 돌아앉은 채
그늘진 불빛으로 다가온다
아득한 수액 줄, 길이 따라
흔들리는 희망을 막막히 땋아내린다
낯선 곳 여기 한 점으로 왔다가
한 점으로 되돌아가는 호흡기의
인공적인 고요
고요가 나비처럼 앉아있다
계절이 계절에 업혀간다
뿌리끼리 줄다리기를 한다
메마른 땅에서 얼마나 더
겨울을 견딜 수 있을까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봄이
복도 끝에 서 있다
홍성주_충북 청주 출생. 2023년 《시조시학》 시조 신인상 당선. 대한시문학협회 수필문학 대상 수상. 수필집 <바람이 두고 간 풍경>
첫댓글 제가 아는 박여름님(문길?) 같군요.
신인상 당선 축하드립니다.
푸른 구토가 무척 땡기는군요.
특히 마지막 4줄이 압권입니다!
제가 아는 니체님, 어디서든 향기가 납니다.~^^ 길은 멀고... 멧비둘기 소리, 꾹꾹 눌러 꾹꾹 써라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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