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종 10타 >
< 개회 >
< 입정 >
< 영주 >
천지영기 아심정(天地靈氣 我心定)
만사여의 아심통(萬事如意 我心通)
천지여아 동일체(天地與我 同一體)
아여천지 동심정(我與天地 同心正)
< 기원문 >
< 불전헌배 >
< 묵상심고 >
< 독경 >
.일원상 서원문
일원은 언어도단의 입정처이요 유무초월의 생사문인바,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의 본원이요 제불조사 범부 중생의 성품으로 능이성 유상하고 능이성 무상하여 유상으로 보면 상주 불멸로 여여자연하여 무량세계를 전개하였고,무상으로 보면 우주의 성주괴공과 만물의 생로병사와 사생의 심신 작용을 따라 육도로 변화를 시켜 혹은 진급으로 혹은 강급으로 혹은 은생어해로 혹은 해생어은으로 이와 같이 무량 세계를 전개하였나니, 우리 어리석은 중생은 이 법신불 일원상을 체받아서 심신을 원만하게 수호하는 공부를 하며, 또는 사리를 원만하게 아는 공부를 하며, 또는 심신을 원만하게 사용하는 공부를 지성으로 하여 진급이 되고 은혜는 입을지언정 강급이 되고 해독은 입지 아니하기로써 일원의 위력을 얻도록까지 서원하고 일원의 체성에 합하도록까지 서원함....
.반야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시고공중 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내지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과애 무과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제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제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제사바하
.청정주
법신청정 본무애(法身淸淨 本無碍)
아득회광 역부여(我得廻光 亦復如)
태화원기 성일단(太和元氣 成一團)
사마악취 자소멸(邪魔惡趣 自消滅)
< 9인 선진 이야기4 >
삼산 김기천
1916년 김광선의 인도로 대종사에게 귀의 하였고 교단 창립에 공헌하였다. 6세 서당에서 한문 배움, 12세 한문의 文理를 깨쳤으며, 詩律을 배워 16세 때 서당 훈장이 되었다. 출가하여 현실생활에 등한한듯 했으나 성리연마가 깊었다.(성리품 22장) 1935(원기 20)년 당리교당에서 순직 법위는 출가위로 추존되어 종사위에 올랐다. <철자집> <교리송> <사은찬송가> <단원의 노래> <심월송> 등을 비롯하여 많은 저술과 감각 감상문을 발표하였다.(회보 20호 참고) <인도품 9장, 전망품 8장>
① 17세 서당훈장 삼산 김기천 종사는 1890년 2월 5일 전남 영광군 백수면 천정리에서 부친 김다유(金多有)선생의 1남2녀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함평서 5대조까지 살다 천정리 천기동에 들어와 살았다. 천기동은 구수산에서 버금으로 높은 수리봉 아래 있는 부락이다. 7세때 한문사숙에 입학하여 수학하였으며, 재예(才藝)가 출중하여 13세때는 학문에 문리를 얻어 시율(詩律)공부에 들어갔다. 15세시 영광군 군서면 마읍리 사는 김순천과 결혼을 하였고, 한달 뒤 부친 상을 당하였다. 이때 삼산종사는 장례를 치르는데 조금도 예법에 어긋남이 없었고, 어른스럽게 처사하였다.
삼산종사는 부친을 여의고 독자의 몸으로 가정사를 꾸려나가야 할 형편이었으나 도무지 살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골방을 마련해 놓고 거기서 책을 읽고 소일하였다. 논밭일이 바빠 안식구들이 마당에 나락을 널어 놓고 일을 나간새 비가 와서 곡식을 다 적시는 줄도 모르고 책 읽는데만 재미를 붙였다. 이렇게 가정사에 무심하고 태평이었지만 학문에 있어서는 근동의 아이들을 가르칠 지경에 이르러 벌써 17세 나이에 아이들의 훈장이 되었고 학동들을 가르치는 데에는 또 그렇게 열심일 수가 없었다. 한번은 학동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그릇된 일을 저지른 적이 있었다. 그는 학동들을 불러놓고 회초리를 준비해 오게 했다. [내가 못나고 잘못 가르친 까닭이니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하고 자신의 종아리를 호되게 내려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학동들을 훈도해 갔으므로 어떤 아이든 감화를 받지 않을수 없었고 좋은 길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②소태산의 제자되어 : 삼산종사는 소태산 대종사 보다 한살 연상으로 이웃동제에 사는 관계로 서로 알고 지내던 처지였다. 소태산이 대각한 1916년에는 삼산종사가 스물일곱살 되던 해였다. 이때 삼산종사는 벌써 두딸의 아버지가 되었고 22살에 모친상마저 당하여 한가정의 가장으로 처자를 거느리고 가사를 경영할 책임이 있었다. 이러한 때에 그는 누이 동생(김순진화)의 시숙 팔산 김광선 종사의 인도로 길룡리 범현동 전주이씨 제각에서 소태산 대종사를 만났다. [정말 이렇게 변할 수가 있을까]삼산종사는 소태산 대종사의 체상을 우러러 보고, 말씀을 듣고, 과연 [소문대로 도통을 하긴 했구나]감복을 한후 즉석에서 사제지의를 맺었다.
원기 2년(1917)7월 소태산 대종사가 남자정수위단인 기성단을 조직할때 삼산종사는 간방(艮方) 단원이 되었다.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소태산 대종사의 일언일귀는 헛됨이 없고 거짓이 없음을 알고 심중에 경탄하여 그 지도에 복종하게 되었다. 이후 영산에서 저축조합 방언공사 혈인기도에 9인단원과 함께 참여, 교단창업에 혈성을 다했다.
법인성사때 삼산종사가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봉수받은 법명이 김기천이었다. 속명을 성구(聖久)영산에서 교단창업에 조력하는 가운데 원기 7년(1922)33세때에는 출생지인 천정리에서 천정조합(天定組合)을 설시하고 주민들에게 근검절약을 장려하는 한편 대종사로부터 받들었던 법설로써 도덕교화에 전력하였던바 불과 삼년안에 많은 동지와 자본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삼산종사가 전무출신하여 정신을 그곳으로만 주력할 수 없게 되고, 따라서 동지중에 불충실한 일이 생기게 되므로 조합을 해체하고 각자 자원에 따라 그 자산을 영산지부에 편입시키는 동시에 조합원들을 대종사에게 인도하였다.
원기 8년(1923) 34세때에는 옥녀봉 아래 있던 구간도실을 현 영산원 위치로 옮기게 되었는데 몸소 동지들과 함께 지게지고 돌과 나무를 운반하여 육신에는 고통을 받지마는 정신에는 항상 일맥의 낙도심이 끊이지 않았다. 원기 9년(1924) 35세부터 영광지부(현 영산교당) 살림을 전담하여 내치외무에 전력하며 산가수려(山佳秀麗)한 성지 영역에서 정신과 육체를 정양하며 만 4년간 동지부의 서무부장겸 지부장격으로 근무하였다. 원기 13년(1928)39세때에는 익산총부 서무부장에 피임되어 2년간 근무하였으며, 동년 4월 제1대 제1회 기념총회에서는 공부등위 특신부, 사업등급 제2등 제1호의 명예로운 상장을 봉수하였다. 원기 15년(1930)41세때에는 총부 교무부장에 피선되어 1년간 근무하였고, 이듬해에는 각처에서 집합하는 선원을 훈련하기 위해 선원교무가 되어 해박한 지식과 명철한 지혜로써 선원을 일깨웠다.
원기 17년(1932)43세때에는 부산 하단지부 (현 당리교당)가 창설되어 교무로 임명되었다. 초창이라 가옥과 장소가 협착할뿐아니라 이해없는 자들의 비평도 많았으며 여러가지 역경이 속출하였다. 그러나 삼산종사는 견인불발의 수양력으로 능히 이를 초월하여 자기 할일만 충실하였다. 그랬더니 처음에는 반대하던 사람들도 차차 이해가 생겨나고 정법에 훈련받은 사람이 생겨 남을 따라 지부의 토대가 점점 견고하게 되었다. 이 해에 부산 남부민동에서도 삼산종사의 노력으로 수십명이 입교하여 교당을 설치할수 있게 되었다. 삼산종사는 회원훈련과 지방발전에 노력하느라고 홀망(忽忙)함에도 불구하고 틈틈이 심오한 진리의 감각감상과 가사등을 제작하여 본관에서 발행하는 [회보]에 기고를 하여 일반회원의 신성을 장려하고 공부와 사업을 하는데에 길을 얻게 하였으며, 야학을 실시하여 지역사회 무산 아동들의 문맹을 퇴치시키는등 순일무사의 정성으로써 본교의 교화발전에 헌신하였다. 원기 20년(1935) 46세때에는 삼산종사의 교화에 힘입어 정법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초량등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입교하여 바야흐로 부산지방에 큰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전망이 보였다.
삼산종사가 부산에서 교화하던 시절에 읊었던 아래와 같은 내용의 [하단회가]는 그 당시 생활 모습을 알려준다. 승학산 높은 밑에 강선대가 나직고/제석골 장생수는 평림속에 흐르네/낙동강 짐대 노래 구도선자 실은 듯/고대봉 그림자는 명호에 잠겼네/ 가려한 이 강산에 우리 회관 종소리/울리고 울리어서 잠든 동포 꿈깨네/이 강산 회운인지 사중은의 덕인지/대성인,우리 종사 도덕풍이 불었네 진세에 맛든 낙 좋아 말고 착 마소/그낙이 극한 끝에 죄가 오고 苦오네/죄고를 해탈하고 생사 바다 건널랑 /대자비 우리 종사 법선 우에 실어보 반갑고 반갑도다 입도자는 반갑다/혜복을 갖춰 닦아 자신 제도해가네/장하고 장하도다 득도자는 장하다/도덕을 잡아들고 일체세계 건지네 신미 8월16일은 우리 회의 창설 날/이 도덕과 이 사업을 힘쓰고 힘써서/거룩하신 동지들의 희생한 공일세/영광스런 이 날을 영원히 기리세(삼산종사 유고집중에서)
삼산종사는 회원들을 능동적으로 회중 일에 참예하도록 하였다. 예회 때 사회는 언제나 회원들이 주관하도록 하였고 수시로 윤회강연을 실하여 그들의 감각감상과 발표력을 길렀다. 회중의 유일한 기관지인 [월보]와 [회보]를 소개하여 회중 일에 적극 참예하도록 하였고, 회원들로 하여금 회보에 글을 발표하도록 하였다. 청년회원 장보석은 총부 동선(원기17년)을 나고서 [잡은수제]를 발표하였고, 양혜성은 [구도자여[]부산지부자]를 발표하였다. 삼산종사는 예회 때 반드시 월말통신(또는 회보) 을 소개하여 회중 전반에 걸쳐 회원들로 하여금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그들이 발표하는 감각 감상을 소재로 작품을 만들어 회보에 소개하였다. 이것은 자신이 월말통신 초기에 몇몇 젊은이의 기록에 의해 발표되었던 4편에 비해 배가 넘는 9편의 감상담을 꼼꼼하게 정리하여 지상발표하였던 것이다.
③ 최초의 見性認可 : 삼산종사는 키가 아주 크고 몸은 좀 후리후리한 편이었으나 견성후에는 몸이 부담해졌고 人相은 달마대사와 비슷하였다. 외관상으로도 훌륭한 용모를 타고난 삼산종사는 차차 도가 성숙됨에 따라 온몸에는 사람을 누르는 엄숙한 기운이 넘쳐 흘러 실로 태산교악과도 같은 중후성이 드러나는 대도인의 상이었다. 삼산종사는 천성이 관유정직하고 행동이 침착 신중하여 매사에 유유자적하는 기풍이 있었으며, 견인불발의 의지력은 중인의 시범이 되었다. 항상 책을 가까이 하고 전생애를 학문연마와 진리탐구에 열중하는 그 천성으로 인하여 가정사에 곤란함에 많았다 한다. 현실문제는 다소 등한시했으나 밝은 성리연구로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원불교 최초의 견성인가를 받았다.
삼산종사는 석가모니불의 십대제자중 성리에 밝기로 유명한 解空 제일 수보리 존자와 동등시되기도 한다. 침착 정중 관유한 삼산종사는 비가 와도 뛰지 않고 걸었고 평생에 질언거색이 없었으며, 언행이 항상 일치하였고, 아무리 화가 날 일이라도 결코 화를 내는 법이 없었고 심중에는 시비가 명확하나 사람들과 버둘어 겉으로 그 시비를 지나치게 밝히지 않았다. 세상의 조그마한 시비를 초월하여 초연하게 살았으나 대의에는 조금도 어그러짐이 없었다. 희노애락에 초연,오직 공중사에만 열중하였고, 무슨 일이든지 모난 적이 없었으며, 어느 누구에게도 미운 생각을 조금치도 갖지 않았다. 삼산종사는 지혜가 출중하고 겸하여 수양력이 풍부하며 또한 계행이 청정하여 만인으로부터 존모를 받았고 [시비를 초월하고 희노애락에 끌리지 않는 부처]라고 소태산 대종사도 극착하였다.
외관상으로 훌륭한 용모를 타고 났을뿐 아니라 내적인 면에서도 인격 지식 덕행을 두루 갖춘 훌륭한 대공심가요, 원만한 지도자로서 사표적 인물이었다. 원기 13년(1928)은 삼산종사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해(당시39세)였다.
어느 가을 날이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하루는 강당(현 구종법실)에 법좌를 차리라 하고 종을 쳐 대중을 불러 모았다. [수도하는 사람이 견성을 하려는 것은 성품의 본래 자리를 알아,그와 같이 결함 없게 심신을 사용하여 원만한 부처를 이루는 데에 그 목적이 있나니, 이는 목수가 목수노릇을 잘하려면 잣대가 있어야 하고, 용이 승천을 하려면 여의주를 얻어야 하는 것과 같다. 견성을 하려면 성리공부를 하여야 하나니, 성리는 내가 손을 내놔라 하면 손을 내놔야지 발을 내면 안되는 것이다. 이제 내가 그대들에게 성리를 물어야겠다.]하고 의두요목을 하나씩 놓고 물었다. 제자들이 번번이 대답은 하나 갈수록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나중까지 대답하는 사람은 삼산뿐이었다.
삼산종사가 성리 설하는 것을 듣고 소태산 대종사 흡족한 웃음을 머금고 말하였다. [오늘 내가 비몽 사몽간에 여의주를 얻어 삼산에게 주었더니 받아 먹고 즉시 환골 탈태하는 것을 보았는데, 실지로 삼산의 성리 설하는 것을 들으니 정신이 상쾌하다.] 이어 말하기를 [법은 사정으로 주고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저의 혜안이 열려야 그 법을 받아 들이나니, 용은 여의주를 얻어야 조화가 나고 수도인은 성품을 보아서 단련할 줄 알아야 능력이 나나니라.] 이것이 새 회상이 생긴 이래 공식적으로 제자에게 내린 최초의 견성 인가였다. 대중의 찬탄과 선망을 한몸에 받으며 삼산은 견성인가를 받았다. 우뢰와 같은 박수와 아울러 이청춘 정사등 몇몇 여인들은 벌떡 일어나 [우리 회상에 견성도인 나섰다.] 며 덩실덩실 춤을 추고 분위기는 법락의 극에 달하였다. 삼산종사의 견성 인가는 다른 동지들에게 더 한층 공부심을 분발케 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한 후배가 삼산종사에게 물었다. [형님, 어쩌면 빨리 견성을 합니까?] [귀한 물건을 잃어버리면 밥 먹을 때나 잠자리에 들 때나, 심지어는 똥 눌 때까지 그 생각이 나지? 화두를 그렇게 잡아야지.] 삼산종사는 쉽고 간명하게 일러 주었다. [또 자네보고 도둑질 했다 하면 얼마나 분하겠나. 자나 깨나 어떻게 하면 이 애매한 욕을 벗을꼬 하고 진짜 도둑을 잡아야지 하겠지. 의두를 그렇게 잡아야 견성을 하지] 키가 훤출하게 크고 약간 꾸부정한 듯한 몸집에 언행은 느릿느릿한 편이나 그 태도는 청한자적하여 마치 저 선연한 연꽃 이 물위에 드러난듯 백학이 청송에 깃들인 듯, 진속을 초월한 인품을 지닌 사람이 삼산 김기천종사였다.
그는 평소 연구가 깊고 이론에 밝으며 또 공심이 풍부하고 임무에 성실하여 쉼 없이 꾸준하게 매사를 대하였다. 그는 내심에는 시비가 명확하였으나생활에 있어서는 시비를 따지거나 분명히 밝히지를 않았다. 후진들에게 늘 말하였다. [너무 시비를 가려도 못 쓰네] 그는 공연한 시비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언제나 초연하였다. 스스로 할 일만 자행하였다. 밥이 질면 질어서 좋고 되면 된대로 달게 먹었다. 옷이 크면 시원해서 좋고 작으면 작은 대로 좋다고 하였다. 그의 말에는 모가 나지 않았고 촉이 없었다. 유유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혹 예기치 않은 일을 만나도 그는 당황하거나 순서를 잃지 않았다. 너그럽고 부드럽고 맑고 한가한 그의 인품을 훗날 소태산 대종사는 [지금까지 만18년간 일호의 사념과 퇴보가 없이 참으로 향내나는 전무출신을 한 유일무이한 공인이었다.]고 표현했다.
④ 스승과의 문답 : 삼산종사는 소태산 대종사보다 한살 위이고 어릴 때 친구였지만 사부님으로 모시고 부터 그의 명이라면 水火를 무릅쓰고 오롯이 복종하였다. 자신도 이미 하늘의 이치와 인간 만사의 도리를 賁달았으나 자만함이 없이 대중살이 손에 모나지 않고 수선에 힘썼고 규율을 지켰으며 또한 대중 앞에서 대종사에게 묻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보다 동지들의 미망을 타파해 주고 싶은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견성을 못한 사람으로서 정식 법강항마위에서 여래위에 오르는 공력이 어느 편이 어렵나이까] [그는 근기에 다르나니 혹 최상 근기는 항마하면서 바로 여래위에 오르는 사람도 있고 항마위에 올라가서 오랜 시일을 지체하는 근기도 있나니라.] [수도인이 공부를 하여 나아가면 시해법(尸解法)을 행하는 경지가 있다 하오니 어느 위(位)에나 승급하여야 그리 되나이까.] [여래위에 오른 사람도 그리 안되는 사람이 있고, 설사 견성도 못 하고 항마위에 승급도 못한 사람이라도 일방 수양에 전공하여 그와 같이 되는 수가 있으나, 그것으로 원만한 도를 이루었다고는 못하나니라. 그러므로, 돌아오는 시대에는 아무리 위로 천문을 통하고 아래로 지리를 통하여 골육이 분형되고 영통을 하였다 할지라도 인간 사리를 잘 알지 못하면 조각 도인이니, 그대들은 삼학의 공부를 병진하여 원만한 인격을 양성하라.]
[법강항마위 승급 조합에 생.노.병.사에 해탈을 얻어야 한다고 한 바가 있사오니, 과거 고승들과 같이 좌탈입망(坐脫立亡)의 경지를 두고 이르심이 오니까.] [그는 불생 불멸의 진리를 요달하여 나고 죽는 데에 끌리지 않는다는 말이니라.] [앞으로 종법사 선거에 어느 위에 오른 분이라야 추대될 수 있아오리까.] [아무리 말세라도 항마위 이상이라야 종법사의 자격이 있나니라.] [혹 당대 종법사보다 법력 높은 도인이 날 때에는 법위 승급을 어떻게 하오리까.] [대중의 공의를 얻어 하나니라.](이상 대종경 변의품34-38장)
어느 때 삼산종사가 대종사에게 물었다. [사람이 어찌하면 순(順)과 역(逆)을 알게 되오리까.] [순이라 함은 저 춘.하.추.동 사시절의 변천이 차서를 잃지 아니함과 같이 모든 일에 그 순서를 찾아서 하는 것이요, 역이라 함은 일의 순서를 알지 못하고 힘에 감당못할 일을 구태여 권하며, 남의 마음을 매양 거슬려 주는 것이니, 사람이 무슨 일을 할 때에 먼저 이 순과 역을 잘 구분해서 순을 주로하여 행한다면 성공하지 못할 일이 거의 없으리라.(대종경 인도품 9장) 어느 때 또 삼산종사가 대종사에게 물었다. [근래에 여러 사람이 각기 파당을 지어 서로 옳다 하며 사방에서 제 스스로 선생이라 일컬으오나 그 내용을 보면 무엇으로 가히 선생이라 할 가치가 없사오니, 그들을 참 선생이라 할 수 있사오리까.] [참 선생이니라.] [어찌하여 참 선생이라 하시나이까.] [그대가 그 사람들로 인하여 사람의 허(虛]와 실(實)을 알았다 하니 그것만 하여도 참 선생이 아닌가.] [그것은 그러하오나 그들도 어느 때가 되오면 자신이 바로 참선생의 자격을 갖추게 되오리까.] [허를 지내면 실이 돌아 오고 거짓을 깨치면 참이 나타나나니, 허실과 진위(眞僞)를 단련하고 또 단련하며 지내고 또 지내고 보면 그 중에서 자연히 거짓 선생이 참 선생으로 전환될 수 있나니라.] (대종경 전망품 8장)
⑤문필(文筆)에도 능한 도인 삼산종사는 주로 해탈 도리를 많이 설하였다. 소박한 화술,간이 명백한 내용으로 교리 전반에 걸쳐 좋외 문진, 무애 자재, 사통 오달로 법을 설했던 삼산종사는 문필에도 능해 많은 사문을 남겼다. 삼산종사는 처음에는 글을 쓰지 않았다. 전음광 대봉도 송도성종사 김영신대봉도등에 의해 감각감상담이 소개되었는데 견성인가 받은 이후 많은 후진들의 질의와 요청에 의해 초학자들에게 교리에 바탕한 효과적인 한문공부를 위해 [철자집]을 저술하였고, 그 이후 가사조의 글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단법찬미곡]을 비롯하여 원기 18년(1933)에는 교리 전반에 걸쳐 읊조린 의욕적인 장시 [교리송(敎理頌)]은 유명하다. 저 허공에 밝은 달은 다만 한낱 원체로되/일천강에 당하오면 이런 낱이 나타나고/나의 성중(性中)밝은 맘도 또한 한낱 원체(圓體)로되/일만경계 당하오면 일만 낱이 나타나니/맘과 달이 둘이 오나 그 이치는 하나일세/ 달 사랑는 벗님네야 강 밑에 잠긴 달은 참 달이 아니오니 부디 그 달 사랑 말고 허공 달을 사랑하소/ 마음 찾는 주인공아 경계에 착된 마음 참 마음이 아니오니 부디 그 맘 딸치 말고 본성 맘을 찾아보소/고요한 밤 홀로 앉아 이 마음을 간(看)하올제 분별 주착 딸치 않고 무심적적(無心寂寂)들어가니/달도 이미 그믐 되고 심행처(心行處)도 멸하였遁[/적적요요(寂寂寥寥)본연(本然)한데 일각심월(一覺心月)원명(圓明)하다/소소영영(昭昭靈靈)저 심월아/보고 봐도 둘 아니요 홀로 비친 너 하나라 취하여도 얻음 없고 사(捨)하여도 버림 없다/그러하나 일각상(一覺相)은 안전(眼前)에 역역(歷歷)하니 없는 것도 아니도다/존귀하다 저 심월아 짝할 물건 없었으니 심계독존(三界獨尊)아닐런가/아름답다 저 심월아 일점 하자(瑕子)없었으니 빙옥(氷玉)인들 당할소냐/견고하다 저 심월아 불생불멸 그 진체(眞體)가 만고장존(萬古長尊)하였으니 금강인들 당할소냐/광명하다 저 심월아 시방에게 대천계(大千界)를 여지없이 비추오니 천일(千日)인들 당할소냐/신통하다 저 심월아 감추면 개자(芥子)속에 펴 놓으면 우주 밖에 능소능대(能小能大)하는구나/지혜롭다 저 심월아 천만사리(千萬事理)당한 대로 걸림 없이 분석하네/여보소 주인공아 보배할 것 무엇이며 귀의할 것이 어디 있나/보배함도 심월이요 귀의함도 심월일레 여보소 벗님네야 이 심월을 구경하소.(회보24호)
그외에도 발표되지 않은 유작으로는 [설중(雪中)의 박노래][육일가][착심해탈가]등의 장편가사가 있다. 산문으로는 대개 감각 감상문을 썼는데 원기 19년(1934)에는 [대중살이 하는데 몇 가지 감상](회보6호),[술 취한 운전수를 보고](회보9호),원기 20년(1935)에는 [무형한 함정](회보15호)[원기 없는 자는 마른 나무와 같다](회보17호)를 발표하였다. 삼산종사의 가사는 거의 전부가 교리와 의식에 관한 내용을 읊었고, 산문은 자신의 수행과 관조에서 얻은 감각 감상들 뿐이다. 이것을 보더라도 삼산종사가 얼마나 자신의 수행과 적공에 오롯하였는가를 엿볼 수 있다. 그것이 모두 견성 이후 자필에 의해 발표된 글이라 볼때 각후(覺後)에 얼마나 수행에 철저하였는가를 알수 있다.
⑥선생은 참으로 순진한 옥(玉)입니다 : 부산에서 교화에 전념,대성을 기약하던 삼산종사는 원기 20년(1935)8월 중순 우연히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각처 동지의 지성기원과 백방의 구병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회생을 하지 못하고 9월 6일 부산 하단지부에서 46세를 일기로 열반에 들었다. 인격 지식 덕행을 구비하였던 삼산종사는 교단 초창 당시부터 18년간을 하루같이 소태산 대종사의 수제자로 그 신성은 하늘에 사무쳤고 공부와 사업은 대중 가운데 뛰어났으며, 총.지부 발전을 위해 가는 곳마다 그 성과가 컸었는데, 한창 일할 46세에 열반하니 일반동지와 친족들은 애석하고 섭섭하여 대성통곡하였다.
그 당시 소태산 대종사는 서울 유가(留駕)중에 금강산에 가기로 결정하였었는데, 삼산종사가 위독하다는 병보를 듣고 즉시 총부로 환가(還駕)하여 일산 이재철 종사를 문병차 부산으로 파견하는 한편 대중과 더불어 완쾌를 기원하였으나 거듭 열반의 비보를 받고서 [김기천은 나를 만난지 18년에 일호의 사심도 내지않은 정진불퇴의 전무출신이요, 오직 희유(稀有)의 공로자라, 가는 기천이도 섭섭하거니와 우리의 한 팔을 잃었다....]며 말을 마치지 못하고 통곡하였다.
정산종사는 추도사를 통해 [순진한 옥이라 하면 옥 가운데에도 가장 완전하여 티끌만한 흠도 없어야만 순진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선생은 참으로 순진한 옥입니다. 18년 동안이나 심간(心肝)을 통하고 고락을 같이 하며 종사주 슬하에 영원히 한 마음을 변치 않기로 혈심을 다하여 같이 서원하던 한 동지 한 단원 나아가 한 몸으로 여기던 그 선생을 잃은 우리 몇 사람의 마음은 슬프다 섭섭다 하기 보다 오직 정신이 멍멍하여 무엇이라고 그 감회를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고 술회했다.
삼산종사는 제일대 성업봉찬회시 법위가 정식법강항마위요, 사업등급정특등으로 원성적은 준특등 8인중 4호였으며, 원기 49년(1964)제2차 법훈증여시 종사위로 추존되었다. 삼산종사의 장의(葬儀)는 교회전체장으로 영구(靈柩)를 총부로 옮겨와 당시 익산군 북일면(현 이리 총부근방)공동묘지에 임시 안장하였는데 후일 그 자손들이 영광군 백수면 천정리로 이장해 갔었다가 원기 70년(1965)3월 왕궁 영모묘원 법훈묘역에 다시 이장했다. 삼산종사의 유족으로는둘째딸 김수련(金修煉)이 중앙수양원에 수양하고 있으며, 세째딸 김양화(金兩華)가 북일교당 주무로 있으며, 외손자 정귀원.인덕교무와 외손녀 정도원이 전무출신하여 외조부의 뒤를 잇고 있다.
⑦삼산종사 어록 ◇ 근(勤)은 부지런하다는 뜻이니 나태의 반대요, 검(儉)은 검박하다는 뜻이니 사치의 반대이다. 근은 또한 지성(至誠)을 짝한 것이다. 지성은 능히 하늘을 감동시킨다고 한다. ◇ 우리의 생명은 적은 물의 고기와 같고 서산에 지는 해와 같다. 부지런히 공부하여 생사고해를 초월하자.
◇ 큰 원을 지극하게 세운 후에는 어떠한 소소한 사념이 올 때마다 그 원하는 바를 회상하여 볼 것이니 그리하면 소소한 사념이 저절로 물러난다. ◇ 계명과 규칙 행하는 것을 나의 원하는 바 목적지를 가는 차나 사다리로 알아서 잠시라도 탈선하지 말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심신이 태연하고 세욕에 냉담하여지며 도락(道樂)이 진지할 것이다. ◇ 시방을 나의 한 집으로 알고 대중을 나의 부모 처자로 보아 나의 몸과 마음을 오로지 여기에 바쳐 희생할 것을 맹세할 것이니 그러고 보면 백사(百事)를 해탈하여 사은사요의 실행이 어렵지 않고 생노병사를 초월하여 무궁한 생명과 복전(福田)을 얻을 것이다.
◇ 겸양심을 써야 할 것이니 그러고 보면 교만심이 없어지고 잘한다 잘못한다 하는데에 화나 상(相)이 나지 않을 것이다. ◇ 남을 위하고 자기를 낮추는 머리에 대중과 촉이 없고 충고의 문이 열려서 허물은 날로 고치게 되고 지식은 날로 증진하게 된다. ◇ 큰 고기를 낚으려 하는 어부 앞에는 작은 고기의 류가 보이지 않는다. ◇ 공부와 사업에는 부지런하고 의식과 주처에는 검박하여야 한다. ◇ 일이 있을 때는 상시응용주의사항,1,2,6조를 잘 지키면서 일을 부지런히 하고 일이 없을 때에는 3,4,5조를 잘 지켜서 공부를 부지런히 하여야 한다.
◇ 꽃이 너무 황홀하면 열매가 오히려 가볍다. 사람의 말이나 글도 그와 같아서 너무 번다하면 매우 자상할 것 같지만 중(中)을 잃기 쉽고 듣는 사람이 요령을 얻기 어렵다. 글자에 끌리지도 말고 언어에 팔리지도 말것이다. 마음공부는 먼데 있지않고 어렵고 복잡한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가까운 데 있고, 간이한 데 있다. 우리를 지도하시는 대종사님의 교법이 바로 그것이다.(제1대 창립유공인역사에 수록) 참조:회보20호
< 아침기도의 노래 >
1. 거룩하신 법신불 사은이시여 은혜속에 또 하루를 맞이합니다
오늘도 건강한 몸 맑은 맘으로 부지런히 부처님 길 닦게 하소서
2. 거룩하신 법신불 사은이시여 은혜속에 또 하루를 맞이합니다
오늘도 고마운 맘 고운 말씨로 인연마다 화한꽃이 피게하소서
3. 거룩하신 법신불 사은이시여 은혜속에 또 하루를 맞이합니다
오늘도 좋은 세상 이루기위해 모두 함께 보람찬 일 하게 하소서
< 폐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