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카 스
如 常 김 해 곤
평소 남의 사무실이나 가정을 방문할 때 빈손으로 가기가 멋쩍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부담되지 않는 박카스다. 이 정도면 웃으며 주고받을 수가 있다. 두 개 꺼내서 자기 하나 나 하나 즉석 대접도 용이하다. 나머지는 다른 방문객에게 가볍게 줄 수 있어서 좋다. 피로 회복제라 의미 있고 이보다 싸기도 한 것이 없을 것이다. 이제는 단골 약국에 가서 다른 것을 살 때마다 약사가 "아버님, 박카스 드려요?" 하면서 같이 웃곤 한다.
이렇게 가볍게 여긴 것도 작은 감동이 된 적이 있다. 진심의 전달은 진심을 낳는다 할까, 간장 종지 속의 태풍이라고나 할까?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치고 집사람과 같이 수원에서 40여 km 거리의 서울 방배동에 있는 우리 교회에 갔다. 주차를 하고 나니 갑자기 목이 말랐다. 시간은 촉박한데 어쩔 수 없이 1층 카페에 들어가니 마침 정리를 끝내고 올라가려는 여집사님이 있었다. 얼른 물 한 잔을 부탁했다. 그런데 일이 발생했다. 물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오는 것이다. 그것도 격렬한 기침과 함께. 한 번도 아니고 계속해서 그러니 당황했다. 침이며 콧물은 당연하고 눈물까지 쏟아지기 시작한다. 손짓으로 집사람과 집사님을 먼저 올려 보내고 주차된 차문을 열고 핸드폰을 들었다. 당시 기침은 기피대상이었다. 코로나19가 번성하기 시작한 때여서 마스크까지 난리를 치던 시기였다. 1339를 돌렸다. 평소 같으면 일요일이라 업무가 종료됐다고 할 텐데 전화를 받는다. 반갑다. 상냥하디 상냥한 여성이었다. 증세를 자세히 설명하니 감기 초기가 그럴 수 있으니 병원에 가보란다. '코로나'라는 말만 안 들어도 웬 떡이냐 싶었다.
놀랍고 흥분된 상태에서는 침착만이 약이라고 다짐하면서 예배당으로 올라가 한쪽 빈자리에 앉아 기도했다. 솔직히 목사님 설교는 뒷전이었다. 마치고 오면서 집사람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집에 가서 병원을 가보기로 했다. 옷을 바꿔 입고 자주 가는 병원에 가니 역시 감기약 3일 분을 처방해 준다. 물도 안 넘어갔는데 알약이 넘어가겠나. 몸을 구부렸다 젖혔다 해도 헛일이고 제자리 뛰기도 마찬가지다. 어렸을 때부터 약 잘 먹는다고 칭찬을 많이 듣고 자랐다. 신이 나서 배가 아프면 한 알씩 먹던 깅게락 (맞는 이름인지는 지금도 모름)을 한꺼번에 10알을 넘기고 졸도하고 말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런 하찮은 약을 가지고 끙끙거리다니.
그렇게 하루를 넘겨 월요일이 됐다. 출근이 늦겠다고 회사에 연락해 놓고 이 심각한 사태를 그냥 넘길 수는 없기에 인근의 소문난 내과를 찾아갔다. 꼬박 하루를 굶은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해결을 하는 것이 문제다. 기대와는 달리 똑같은 감기약 3일치의 처방이다. 역시 약은 넘어갈 리가 없고 이제는 지쳐가는 것을 느낀다. 아, 이대로 약도 못 먹고 굶어 죽고 말 것인가! 심란한 마음으로 묵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뇌리를 스치는 별이 하나 반짝 떴다. 그래 맞아! 목구멍이 문제가 아닌가? 그러면 이비인후과로 가야지 이 사람아!
힘차게 병원문을 밀고 들어갔다. 안면이 있는 의사는 증세를 자세히 들은 후 혀를 빼고 여기저기 뒤적이더니 "어디 큰 병원 아는 곳이 있나요?" 종합병원을 이용해 본 적이 없어서 얼른 생각이 안 났다. 그때 뉴스에 자주 나왔던 이국종 교수가 언뜻 떠올라서 '아주대학교 병원'이 어떨까요? 하고 물었다. 이 증세는 이비인후과와는 관계가 없고 신경과로 빨리 가보셔야 될 것 같단다. 그리고는 소견서를 써 주셨다. 급한 마음에 꾸벅 인사하고 도망치듯 나왔다.
집에 오니 집사람이 안보인다. 차를 몰고 내비게이션의 도움으로 아주 병원으로 갔다. 물어물어 응급실로 찾아갔다. 소견서를 보란 듯이 흔들며 젊은 의사 앞에 앉았다. 두려움 없이 죽음 앞에 임하겠다는 평소의 신념은 어디로 숨어 버렸는지 긴장된 마음이 한심하다. 초기 서류 절차를 마치고 지루하다는 생각으로 기다렸다. 선별 진료소에서 코로나 검사 후 대기실로 안내하더니 TV에서나 보던 확진자 싣고 가는 이동 침대에 누인 후 비닐하우스까지 씌운다. 겁이 덜컹 난다. 지금 내 몸은 위아래 속옷까지 홀랑 벗겨진 환자복 상태였다. 한편으로는 이비인후과 원장님이 일을 키웠다는 야속한 생각이 들었다. 중년 여성 의사가 오더니 CT, MRI를 찍어야 된다면서 가격대를 알려준다. 높은 금액에 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조용한 설득력에 넘어가고 말았다. 병원도 상당한 인내심을 요구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았다.
요새같이 과학이나 의술이 발달하고 IT시대에 MRI 촬영하면서 소음방지용 고무로 환자의 귓구멍을 막아 준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칼 하다. 이동식 침대에 실려 평상복을 넣은 자루를 덜렁덜렁 머리맡에 매달고 중환자실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이름부터가 거슬린다 중환자라니. 이제야 집에 연락을 했다. 출근한 줄로 알고 있었는데 웬 날벼락이냐는 반응이다. 갈급한 심령으로 엎드려 기도하는 모습이 떠올라 짠하다. 미안하기도 하다. 가장이 예고도 없이 대형 종합병원의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니 상상이나 했겠나. 이제 핸드폰까지 뺏기고 말았다.
촬영 결과는 왼쪽귀 뒤의 실핏줄 하나가 막힌 증세로 가벼운 뇌경색이란다. 말이 그렇지 내가 뇌경색이라니. 오히려 남들이 입을 모아 나의 건강을 부러워하고 칭찬하지 않았던가! 아니 이럴 때가 아니다. 실핏줄 하나 막혀서 삼키는 기능까지 삼켜 버렸다는 정도로 끝났으니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 이 상황은 얼마든지 회복이 된다니까 두려워 말자! 담대하게 견디면서 결과를 믿고 기도하자! 회사와 교회에 비로소 알려드렸다. 목사님이 밤인데도 부리나케 오셨지만 제재를 당해 되돌아가신다고 간호사가 알려준다. 조금 뒤에는 집사람과 큰아들이 놀란 토끼가 돼서 들어온다. 보호자 서명이 필요하니 가족의출입은 불가피했던 것이다. 일주일 정도 입원 치료하면 퇴원 가능하다는 설명을 듣고 간병인을 예약한 후 내 차를 가지고 갔다. 항상 건강한 모습으로 못 박혀 있어야 할 붙박이였는데, 때로는 한걸음 옆으로 비켜나 보는 것도 관심을 받아 좋다는 생각을 해보고 속으로 살짝 웃어봤다.
입원하고 하나를 알았다. 양쪽 콧구멍에 꽂은 가느다란 투명 호수가 어디로 들어가는지 궁금했는데 당하고 보니 실상은 1 cm도 안되게 콧구멍 언저리에 걸쳐놓고 맑은 산소를 공급해 주는 것이었다. 머리맡에 세워 놓은 링거가 마치 수호신처럼 서있는 덕분에 이틀 후 일반 입원실로 옮겼다.
한 평 반 정도의 입원실은 환자용 침대와 간병인용 얕은 간이침대가 있다. 출입문은 칸막이 용 천의 커튼으로 되어있다. 최소한의 사생활 보호는 되는 셈이다. 다만 젊은 도우미 여성과 손만 뻗으면 닿을 공간에서 나란히 누워 있다는 것이 불편할 따름이다. 나뿐 아니고 모든 환자들도 간병인을 두고 있는데 하나같이 중국에서 건너온 조선족이다. 남녀 가릴 것 없이 간병인들은 환자들 옆에서 목청을 높여 전화질과 잡담을 한다. 의사도 간호사도 누구 하나 제재도 못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심지어 남자 간병인은 환자와 싸우기까지 한다.
나는 보다 못해 "여기 입원하신 분들은 오고 싶어 온 것이 아닙니다. 무슨 큰 죄를 지어서 온 것도 아닙니다. 아파서 온 것입니다. 가족들이 감당 못 할 형편이라 여러분을 보수를 주고 채용한 것입니다. 아프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닌 것처럼 간병을 하고 싶어서 하겠어요? 서로 애석하게 생각하고 조용하고 편안하게 잘 좀 협조해 주십시오. 그래도 시정이 안되면 용역회사에 정식으로 접수하겠습니다!"라는 식으로 당부를 했다.
퇴원할 때도 서면으로 병원 측에 건의를 하고 왔다. 어느 남자 환자는 아내가 오니까 용기가 솟는지 울부짖으면서 간병인의 뺨을 갈기고 말았다. 통한에 맺힌 일격이리라. 묽은 죽과 요구르트와 '뉴 케어 토로미 퍼펙트'라는 가루 첨가제를 섞어 먹으면서 목으로 넘기는 기능을 회복했다. 오히려 여성 간병인을 모시고 있다가 대망의 퇴원 길에 올랐다.
모처럼 부담 없이 택시를 탔다. 가다가 합승을 원하면 같이 태우라니 요새는 코로나 때문에 못한단다. 잠깐 택시를 세우고 박카스 한 박스를 샀다. 소견서를 써준 이비인후과로 직행했다. 올바른 진단을 하신 원장님을 뵙기 위해서다.
"어마! 오셨네요?"
"네, 원장님 좀 뵈려고요"
"오늘은 어디가 불편하세요?"
" 지난번에 제대로 진료해 주셔서 치료받고 퇴원하는 길에 감사 인사를 드릴려고요"
"어머! 이런 경우는 처음이에요!"
두 간호원이 벌떡 일어나더니 한 명은 쏜살같이 원장실로 뛰어간다. 잠시 후 나오더니 안내한다.
"치료 잘 받고 퇴원하셨다고요?"
"네, 원장님 덕분에 치료받고 인사하러 왔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부담되실까 봐 작게 들고 왔으니 가볍게 받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어이쿠! 제가 고맙죠, 병원 수십 년 해왔지만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감사합니다!"
나올 때까지 박카스는 원장님 손에 들려 있었다.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됐다. 만남이란 우연이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善}을 이룬 결과이다. 인연이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내가 쓴 책과 소속 문학회의 작품집도 드리면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진찰실 회전의자에는 항상 두꺼운 책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앉지 않으려고 애를 쓰시나 보다. 건강하게 사셔야지.
2022. 09. 05
첫댓글 참 재미있으면서도 많이 생각하게 하는 글입니다. 수필은 흥미롭고 감동적일 때 제 맛이 납니다. 좋은 소재를 찾아 재미있게 쓰셨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회장님께서 바쁘신 와중에 여기까지 오셨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