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객부원(老客婦怨)-허균(許筠)
늙은 나그네 아낙의 원망-허균(許筠)
東州城西寒日曛(동주성서한일훈) : 동주 성 서쪽, 차가운 해 뉘엿뉘엿 寶蓋山高帶夕雲(보개산고대석운) : 우뚝한 보개산이 저녁 구름 감싸 있다 皤然老嫗衣藍縷(파연로구의남루) : 머리 허옇게 센 늙은 할미, 남루한 옷차림 迎客出屋開柴戶(영객출옥개시호) : 손님 맞아 방을 나와 사립문을 열어준다 自言京城老客婦(자언경성로객부) : 스스로 말하기를, 서울 늙은 나그네 아낙 流離破産依客土(류리파산의객토) : 파산하여 떠돌다가 객지에 사는 신세가 되었다오 頃者倭奴陷洛陽(경자왜노함락양) : 저 지난날 왜놈들이 서울을 함락시켜 提携一子隨姑郞(제휴일자수고랑) : 외 아들 손에 잡고 시어머니와 남편 따라 重跡百舍竄窮谷(중적백사찬궁곡) : 삼백리 길 걷고 걸어 깊은 골에 숨어왔소 夜出求食晝潛伏(야출구식주잠복) : 밤에 나와 밥을 빌고 낮에는 숨어 살았소 姑老得病郞負行(고로득병랑부행) : 시모 늙어 병을 얻어 남편이 업고 가니 蹠穿崢山不遑息(척천쟁산불황식) : 험한 산길에 발바닥이 다 뚫어져도 쉴지도 못했소 是時天雨夜深黑(시시천우야심흑) : 이런 때, 비는 내려 밤이 더욱 캄캄하니 坑滑足酸顚不測(갱활족산전불측) : 길 미끄럽고 다리 시러워 언제 넘어질지 몰랐소 揮刀二賊從何來(휘도이적종하래) : 칼 휘두르는 두 왜적은 어디서 왔는지 闖暗躡蹤如相猜(틈암섭종여상시) : 어둠 속에 머리 내밀며 서로 다투어 뒤를 밟아 怒刃劈脰脰四裂(노인벽두두사렬) : 성난 칼날 목을 갈라서 목이 찢어졌소이다 子母倂命流冤血(자모병명류원혈) : 어미와 아들 다 죽어 원한의 피 흐르고 我挈幼兒伏林藪(아설유아복림수) : 나는 어린아이를 끌고 덤불 속에 엎드렸소 兒啼賊覺驅將去(아제적각구장거) : 아이 울음에 들켜 잡혀가고 말았으니 只餘一身脫虎口(지여일신탈호구) : 내 한 몸 겨우 남아 호랑이 굴을 벗어났지만 蒼黃不敢高聲語(창황불감고성어) : 허둥지둥 경황없어 소리 높여 말조차 못했소 明朝來視二骸遺(명조래시이해유) : 다음 날 아침 와서 보니 두 시체 버려져 不辨姑屍與郞屍(불변고시여랑시) : 시모인지 남편인지 분간할 길 없었다오 烏鳶啄腸狗嚙骼(오연탁장구교격) : 솔개와 까마귀 창자 쪼고, 들개는 살 뜯으니 虆梩欲掩憑伊誰(라리욕엄빙이수) : 삼태기와 흙수레로 덮어가리려해도 누가 도와주랴 辛勤掘得三尺窞(신근굴득삼척담) : 석 자 깊이 구덩이를 천신만고로 겨우 파서 手拾殘骨閉幽坎(수습잔골폐유감) : 남은 뼈골 손수 모아 봉토하고 나니 煢煢隻影終何歸(경경척영종하귀) : 의지 없는 외그림자 끝내는 어디로 돌아갈까 隣婦哀憐許相依(린부애련허상의) : 이웃 아낙 슬피 여겨 함께 살자 하여 遂從店裏躬井臼(수종점리궁정구) : 이 주막에 더부살이 방아 찧고 물 길렀소 餽以殘飯衣弊衣(궤이잔반의폐의) : 남은 밥 먹여 주고 낡은 옷 입혀 주어 勞筋煎慮十二年(로근전려십이년) : 지치고 마음졸이기 열두 해가 되었다오 面黧髮禿腰脚頑(면려발독요각완) : 주름진 얼굴, 듬성머리, 허리도 다리도 뻐근한데 近者京城消息傳(근자경성소식전) : 근자에 서울 소식 드문드문 들려왔소 孤兒賊中幸生還(고아적중행생환) : 내 불쌍한 아이는 적중에서 다행히도 살아나와 投入宮家作蒼頭(투입궁가작창두) : 대궐에 투숙하여 창두가 되었다 하오 餘帛在笥囷倉稠(여백재사균창조) : 옷장에는 남은 비단, 창고에는 곡식 가득하니 娶婦作舍生計足(취부작사생계족) : 장가들고 집 마련하여 생계가 풍족하다 하나 不念阿孃客他州(불념아양객타주) : 타관살이 나그네 처지 제 어미께 생각 못하니 生兒成長不得力(생아성장불득력) : 낳은 아들 성장해도 그 덕을 보지 못하오 念之中宵涕橫臆(념지중소체횡억) : 생각할수록 한밤중에 눈물이 가슴 적시고 我形已瘁兒已壯(아형이췌아이장) : 내 꼴은 다 시들고 아들은 이미 장년이 되었소 縱使相逢詎相識(종사상봉거상식) : 설사 서로 만나더라도 알아볼 리 있을까 老身溝壑不足言(로신구학불족언) : 늙은 몸 구렁에 버려지는 건 더 말할 나위 없거니 安得汝酒澆父墳(안득여주요부분) : 너의 술이라도 얻어 아비 묘에 올려볼 수 없겠는가 嗚呼何代無亂離(오호하대무란리) : 아 슬프구나, 어느 시대인들 난리야 없으랴만 未若妾身之抱冤(미약첩신지포원) : 이 못난 여편네가 품은 원한은 아직도 없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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