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주차, 오늘의 수업 주제는 ‘제주의 의식주-초가’입니다.
제주의 주거 형태와 돌담을 확인할 수 있는 하가리가 오늘의 탐방 장소였습니다. 하가리의 명소 ‘연화지’ 속 고즈넉한 정자에 모여 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
고내오름의 서남쪽에 형성되어 있는 제주 애월읍 하가리는 오랜 역사를 가진 마을입니다. 고려시대에는 고내현에 속해 있었고, 조선 초기 태종 때부터 고내현에서 분리되어 ‘더럭’이란 이름으로 불리었습니다.
‘더럭’이 한자로 표기되면서 ‘더할 加’자(‘더’에서 더하다의 의미)와 ‘樂(락)(럭의 비슷한 소리를 빌림)자를 써서 ‘가락’이 되었습니다. ‘웃더럭’과 ‘알더럭’은 ‘상가락’과 ‘하가락’이 되었고, 이 ‘하가락’이란 말에서 지금의 ‘하가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더럭초등학교’에서 하가리의 옛 이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래된 마을답게, 마을 입구에서 350년령의 팽나무를 만날 수 있습니다. 7M 높이의 팽나무를아래에서 올려다보면 파란 하늘과 흐드러진 나뭇잎이 어우러지며 신령한 느낌이 느껴집니다.
마을길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국가민속문화유산인 ‘제주 잣동네 말방아’를 만나게 됩니다. ‘잣’이라는 것이 돌을 무더기로 쌓아 놓은 것을 뜻합니다. 하가리는 잔돌이 많아 옛부터 이곳을 '잣동네'라 불렀다고 합니다.
말방아, 제주말로 ‘몰방애’는 제주인들의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적인 요소였습니다. 말방아는 한 마을에도 여러 개가 있었는데, 보통 30가구 당 하나씩의 방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바탕석이 되는 알돌 위에서, 중심축을 따라 도는 웃돌이 회전하면서 곡식을 정미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육지에서는 보통 소가 방아를 돌리는 역할을 했다면 제주에서는 말이 이를 대신했기 때문에 말방아라 하였습니다.
방아를 구성하는 알돌과 웃돌로는 매우 커다랗고 육중한 돌이 사용되었는데, 이를 다듬고 옮기기 위해서는 다수의 사람의 힘을 필요했을 것입니다. 공동의 말방아를 함께 설치하고 운영하기 위한 계가 있었으며, 매우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같은 계에 속한 사람들은 혈연의 친척이 아니더라도 ‘삼춘’이라는 호칭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제주에서는 매우 다양한 돌담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밭을 두르는 밭담, 무덤을 두르는 산담, 우영(텃밭)을 두르는 우영담 등등, 제주인의 손길이 닿은 어디에서든 제주스러운 현무암 돌담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제주의 들판을 특색있고 아름답게 만드는 밭담의 유래는 고려시대라고 합니다. 고려시대 제주 판관이었던 김구는 밭의 경계가 분명치 않아 분쟁과 피해가 발생하자 고민 끝에 좋은 생각을 떠올리게 됩니다. 밭에서 무수히 발견되는 돌을 이용해 밭담을 세우도록 한 것입니다. 밭담으로 밭의 경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힘 있는 사람들이 슬금슬금 밭의 경계를 늘려 억울한 피해자를 만드는 일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제주도 다양한 돌담의 용도만큼 돌담을 쌓는 방식도 다양한데, 지역마다 각각의 특색이 나타나게 됩니다. 사진에서 보이듯 아래쪽에는 작은 돌을 깔고 잔돌에서 시작해 점점 큰 돌을 쌓아 올리는 방식의 돌담은 김녕과 월정, 애월 지역 일부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월정 지역의 땅은 모래땅이라 흙이 바람에 날아가거나 빗물에 쓸려가기 쉬운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아래쪽에 잔돌을 많이 깔아 담을 쌓아 올려 밭의 흙이 유실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마을 안쪽으로 걸어 올라오면 ‘문형행 가옥’이 있습니다. 문형행이랑 사람이 살았던 초가 가옥으로 제주특별자치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가옥은 거릿길에 인접하여 부정형의 대지 안에 안거리, 밖거리, 우영, 안뒤, 눌왓, 쇠막, 통시로 이루어졌다.”
이 초가 가옥은, 명칭도 생소한 안거리(안채), 밖거리(바깥채), 우영(텃밭), 안뒤(안거리의 뒤쪽에 있는 뜰이나 텃밭), 눌왓(소의 먹이인 건초를 쌓아 올리는 장소), 쇠막(소외양간), 통시(화장실, 돼지우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당을 사이에 두고 안거리와 밖거리가 마주보고 위치해 있습니다. 안거리는 집주인의 생활 공간으로, 보통은 안거리에 부모 세대가, 밖거리에 결혼한 큰 아들 내외가 거주했다고 합니다. 육지의 경우 안채는 여성, 사랑채는 남성이라는 성별을 기준으로 한 공간 분리 형태가 나타난 반면, 제주도의 경우 안거리는 부모 세대, 밖거리는 자녀 세대라는 세대별 공간 분리가 되는 독특한 주거양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밖거리에 큰아들 내외가 거주한다는 것은 아직 경제권을 물려받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세월이 흘러 노쇠한 부모가 아들 내외에게 경제권을 넘겨주는 시기가 되면 아들 내외에게 안거리를 내어주고 부모가 밖거리에 거주했다고 합니다.
정지 앞에 있는 이 돌은 물허벅을 놓아두는 선반인 ‘물팡’입니다. 지하수가 개발되고 수도가 들어오기 이전의 제주는 물이 귀한 곳이었습니다. 보통 물이 나는 곳이 집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제주의 여성들은 새벽마다 물허벅을 등에 지고 물을 날라다 놓아두어야만 했습니다. 물이 귀했던 만큼, 이웃에 행사가 있을 때 물을 길러다 주는 ‘물부주’ 문화도 있었다고 합니다.
“바람 피해를 줄이기 위해 지붕경사를 완만하게 만들었으며, 강렬한 햇빛과 비바람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앞퇴에 풍채를 달아놓았다.”
제주 초가집의 지붕을 살펴보면 육지와는 다른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붕 중앙에 있는 마루를 용마루라고 하는데, 육지의 초가에서는 용마루를 발견할 수 있지만 제주 초가집의 경우 용마루가 없습니다.
바람의 섬 제주에서는 집의 형태에서도 바람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지혜의 흔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주의 초가는 용마루를 놓아 바람과 싸우는 대신 둥글게 모양을 내어 바람이 부드럽게 타고 넘어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는 제주 오름의 모습을 닮아있기도 합니다.
또한 사진에서처럼 초가의 지붕을 띠로 묶어 바둑판처럼 얽어 놓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역시 거센 바람에 견딜 수 있기 위한 건축 양식의 하나입니다.
'안뒤'는 안거리의 뒤쪽에 위치한 뜰입니다. 이 곳은 집의 여주인의 공간으로 오직 안거리를 통해서만 출입할 수 있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마당과 안뒤 사이에는 돌담을 쌓아 두어 마당에서 바로 들어갈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장독대 등이 놓이는 곳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은 '통시'로, 돼지를 기르는 공간과 사람이 일을 보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돼지가 접근하지 못하게 막대기로 휘저으며 화장실을 이용하는 모습을, 김천석 교수님께서 몸소 보여주고 계십니다. 화장실에 얽힌 어린시절 교수님의 생생한 에피소드를 전해주셨습니다.
집이란 그 속의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공간일 것입니다. 제주 초가 곳곳에서 제주인들의 삶의 애환을 발견하고, 마루에 앉아 마당을 바라보며 제주인들의 눈에 보이던 풍광을 상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오늘의 수업을 통해 어김없이 제주와 제주인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행복한 수업과 행복한 회식에 오늘도 알차고 헹복한 문화탐방 수업 시간이었습니다.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첫댓글 1빠~!!
차기 총무님답게 정리가 잘된 후기네요~^^
MZ세대 아영님~ 은밀하고 조용하게 감각적인 사진을 잘 찍으시더니 후기도 깔끔하고 딱뿌러지게 잘 쓰셨어요~!!
고생하셨습니다~~♡
아~ 소윤언니~ ㅋㅋㅋ
초가에 용마루가 뭐였나 긴가민가 했었는데
참고자료까지 꼼꼼한 후기덕에 열심히 복습했습니다~!!! 아영님 👍👍👍👍
아영님! 후기 잘 읽었습니다~
보충 자료로 올려주신 사진과 설명도 많은 도움되었습니다~
감사해용~🤗☺️
아영쌤의 미소처럼 잔잔하고 친절하게 하가리의 돌담마을을 표현해 주셨네요 다시 한번 둘러본 느낌이에요 감사합니다~♡
잘 정리해주시고 사진까지 잘 넣어 주셔서 읽을 때마다 하가리 돌담마을을 다시 다녀온 기분입니다. 고맙습니다.
맑은 바람이 이는 햇살 좋은 날...
가장 제주다운 모습의 더럭마을 풍광과 함께
보석같은 막내 아영님의 향기가 어린 이쁜 글을 읽습니다.
재밌어요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