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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 편
[개 요]
주제-이 시가 기록된 상황에 대하여 다윗의 생애에서 특정한 사건이나 시기와 연관시켜 말하기는 어렵다. 기록된 상황을 설명하려는 여러 가지 시도들이 있었지만, 이것들은 모두 추측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는 하나님의 연단을 많이 겪은 사람이 기록한 것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시련 가운데 처했을 때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시이다. 독자들이 이 시에 나타나는 감정을 아직 체험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독자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면 이런 감정을 체험하게 하는 상황을 곧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시를 “어느 때까지의 시”라고 제목을 붙이곤 했다. 이 시에는 “어느 때까지”라는 단어가 자주 나타난다.
구성-이 시는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1-2절 염려 중에 하는 질문.
3-4절 부르짖는 기도.
5-6절 믿음의 노래.
[강 해]
1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1, 2절. "어느 때까지니이까." 이 질문은 여기에서 네 번이나 나타난다. 이것은 마음의 극한 고통과 구원받고자 하는 강한 소망을 나타낸다. 여기에 조급함이 함께 나타나 있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들도 때로는 이렇게 조급해지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간절한 소망이 조급함으로 변해 가는 것을 막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동안 불평하는 마음을 품지 않을 수만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일이다.
"어느 때까지니이까." 우리가 슬픔에 가득 차서 더 이상 다른 소리를 외칠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때에도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짖는 이 소리를 들으신다. 우리가 이렇게 부르짖는 중에도 성령께서는 우리로 소망을 잃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불을 지피시기 때문이다.
"어느 때까지니이까." 아! 우리 영혼이 안에서 낙담이 될 때에 하루는 얼마나 길게 느껴지는지!
우리가 슬픔에 잠겨 있을 때면
순간 순간이 왜 이리도 느리게 지나가는지
시간은 왜 이처럼 지체하는 것인지!
우리가 인생의 여름을 맞이했을 때, 시간은 그 나래를 활짝 펴고 날아간다. 그러나 인생의 겨울이 되면, 시간은 고통스럽게 날개를 퍼득거릴 뿐이다. 감옥에 갇혀 벽을 바라보며 지내는 한 주간은 자유의 몸으로 지내는 한 달보다 길게 느껴지는 법이다. 우리가 오랜 기간 동안 슬픔을 견뎌야 한다는 것은 우리 안에 죄악이 많다는 것을 증거할 수도 있다. 금을 용광로에 오랫동안 두는 때는 그 안에 태워 버려야 할 찌꺼기가 많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때에 우리는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부르짖으며,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게 된다.
1절.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아! 다윗은 왜 이처럼 바보 같은 말을 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잊으신다고? 전지하신 그분이 기억하지 못한다고? 여호와께서 그분의 사랑하는 자녀를 잊으실 수 있다는 말인가? 아! 형제들이여! 우리는 이런 생각을 품지 말자. 그리고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하시는 말씀을 듣자:"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사 49:14-16).
"영영히" 잊으셨다고? 하나님께서 잠시 동안이나마 잊으셨다고 의심하는 것은 정말 나쁜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결코 하지도 말아야 한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영영히 버리셨다고 상상이라도 할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분은 하룻밤 동안 잠시 진노하시지만, 그분의 사랑은 영원히 지속된다.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이것은 앞에 나온 질문보다 훨씬 더 지성적인 질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얼굴을 숨기시면서도, 우리를 기억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얼굴을 숨기셨다는 것은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잊으셨다는 말이 아니다. 그분이 얼굴을 숨기신 것은 사랑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에게는, 아버지께서 얼굴을 피하신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그분이 다시 미소를 짓고 나타나시기까지, 우리는 결코 안식할 수 없다.
2절.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이 구절의 원어에는 그의 마음속에 경영하는 것을 '쌓아 둔다'라는 뜻이 있다. 그가 여러 가지 방법을 쌓아 둘 만큼 수없이 많은 방법을 가지고 있지만, 아무것도 쓸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 점에서 우리도 다윗과 같은 경우가 많다. 우리는 날이면 날마다 여러 가지 방법을 궁구해 보지만, 우리가 당한 곤경에서 피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쓰라린 경험이다. 고난을 반추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어린아이들이 쓴 약을 삼키지 않고 반항하며 씹는다면, 그 아이의 입은 쓴 맛으로 가득할 뿐이다.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우리의 영혼이 우리 안에서 낙심될 때, 악한 원수들은 즐거워한다. 이것을 지켜본다는 것은 쓰라린 일이다. 원수들의 즐거운 웃음 소리는 우리의 귀를 슬픔으로 울리는 것이다. 마귀가 우리의 슬픔으로 기쁨의 축제를 벌일 때, 우리의 인내는 고갈되고 우리는 불평을 늘어놓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이 사실을 말씀드리면서 그분의 자비를 구해야 한다.
우리는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는 말을 네 가지 면에서 살펴보았다. 시편 기자의 슬픔은 네 가지 면에서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 잊으신 것처럼 보이는 것, 하나님께서 그분의 얼굴을 숨기시는 것, 내 마음에 근심이 있는 것, 그리고 원수들이 자긍하는 것을 통해 느끼는 슬픔이다. 우리는 모두 최악의 상태를 가정하고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기쁨을 무덤에 묻고 묘비를 세우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것으로 기념비를 세우려는 자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애가는 네 권이나 기록하면서, 아가는 한 권만 기록하는 경향이 있지 않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보다는 슬픔으로 통곡하는 것에 더 익숙해 있지는 않는가?
3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4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3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다윗은 이제까지 슬픔으로 인해 탄식했으나, 이제는 파수꾼이 새벽을 알리듯이, 목소리를 높여서 기도하기 시작한다. 이제는 밀물과 썰물이 바뀌고, 우는 자는 눈물을 거둘 때가 되었다. 속죄소는 절망을 묻고 소망을 회복하는 장소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다는 우울한 생각이 아직도 다윗의 마음속에 남아 있기에 그는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라고 기도한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회의가 자신에게 임한 재앙의 뿌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것을 제거해 주실 것을 부르짖었다. 영원히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곳은 지옥이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잠시나마 회의를 품었던 그는 지옥의 주변에까지 접근하는 고통을 맛보았다. 그는 하나님께 그를 '생각'하고 '응답'하실 것을 간구하며,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실 것을 기도했다. 우리가 비참한 지경에 빠졌을 때에 도움을 구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이 부르짖음에는 믿음이 나타나 있다. 우리가 시련과 슬픔을 당해서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다른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해도, 하나님을 잃어버릴 수는 없다. 천국은 우리의 확실한 기업이며, 우리는 영원히 천국 백성이기 때문이다.
"나의 눈을 밝히소서." 여호와여, 내 믿음의 눈을 밝게 하소서. 그래서 어둠 가운데서도 나의 하나님을 보게 하소서. 내 눈을 크게 뜨고 원수들의 덫에 걸리지 않게 하소서. 내 마음의 눈을 밝히사 올바른 길을 보게 하소서. 우리도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오, 여호와여! 간구하옵나니 어두움을 밝히소서!" 우리는 여러 면에서 성령께서 조명하시는 빛을 받아야 한다.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어두움은 잠을 부르고, 의기소침은 곧바로 눈을 무겁게 한다. 우리의 마음이 기진하고, 절망 가운데 눈이 어두워져서 사태를 확실히 보지 못할 때, 한걸음 앞에는 사망의 깊은 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그가 당하는 시련이 그의 생명에 종지부를 찍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두려움을 당해서 당연히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다. 우리가 깊은 슬픔에 빠질 때,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 간구하는 기도를 들으시며 은혜를 부어 주신다. 마음의 슬픔을 이기지 못해서 시편 기자는 죽음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내세를 향해 품는 소망과 즐거움으로 죽음을 바라보지 않고, 무서움으로 죽음을 바라보았다. 사망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4절.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우리는 원수들의 잔혹함을 들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우리 영혼의 원수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이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이것은 원수들로 자랑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다.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이 서로 분리될 수 없도록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우리는 이것들을 함께 잃거나, 함께 얻는 것이다.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 우리 원수들로 혼란에 빠지게 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들이 잠시 동안 우리를 놀리고 비웃는다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이 오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날이 되면 우리를 멸시하던 그들이 멸시를 당할 것이다.
5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6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
다윗은 기쁨을 다시 회복했다! 이제 비가 그치고, 새들이 노래하는 시기가 도달했다. 속죄소에서 우는 자는 마음의 기쁨을 회복하고, 목소리를 높여서 다시 노래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그와 함께 신음했다면, 이제는 그와 함께 춤을 추자. 다윗은 슬픈 일을 당해 한숨을 쉬고 탄식하며 시를 시작했다가, 이제 노래하면서 시를 마친다. 그는 때로 즐거움으로 노래하며 시를 시작했다가 탄식하며 마치기도 했다. 그래서 피에르 물랭(Peter Moulin)은 이러한 시들이 서로 다른 기질을 가진 두 사람이 지은 것을 합쳐 놓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태풍이 분 다음에 찾아오는 고요함이 더욱 즐거운 것처럼, 슬픔 뒤에 찾아오는 기쁨이 더욱 큰 것이다.
과거의 슬픔을 기억하면
오늘 누리는 기쁨은 더욱 감미롭다네.
5절.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다시 다짐한다. 지난 수년 동안 그는 여호와로 그의 피난처를 삼고 살았다. 그분께서 지금도 난공불락의 산성 뒤에서 미소짓고 계신다. 그는 자신의 믿음에 확신을 가졌고, 이 믿음이 그를 지키고 있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흔들렸다면, 그래서 마음의 창이 닫혀 있었다면,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우리 마음을 비추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믿음이 활동하게 되었다. 믿음의 활동이 있는 동안 우리는 결코 믿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산토끼나 참새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에는 우리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이 움직이면, 우리는 그 있는 곳을 곧 알아내게 된다. 원수들의 모든 공격도 시편 기자를 그 산성에서 떠나게 하지는 못했다. 파선당한 배의 선원이 그 돛대를 붙들듯이, 다윗은 그의 믿음을 붙들었다. 그는 여호와 그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버릴 수도 없었고, 버리려 하지도 않았다. 아! 우리도 그의 본을 따르자. 우리의 생명을 다해서 믿음을 지키자.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이제 믿음이 내 영혼 속에서 부르는 노래를 들어보자. 내 마음속에 있는 모든 종들이 기쁨의 종소리를 울리는 듯하다. 영광스러운 손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고, 살진 송아지를 잡고, 내 안에서 기쁨의 축제를 벌인다. 마음에서 울려나오는 노래는 참으로 감미로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마음의 노래에 합하여 입술의 찬송이 나타난다.
6절.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다윗은 목소리를 합하여 내면의 축제에 화답한다. 그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라고 다짐하는 것과 같이, 입술과 혀로 영혼과 함께 노래한다.
내가 날마다 당신을 찬양하리니
당신의 분노가 사라졌음이니이다
피 흘리는 어린양으로부터
평안한 마음이 흘러 넘치네.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 다윗은 하나님께 "여호와여······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라고 탄식하며 이 시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 이런 생각을 떨치고 그분이 그를 "후대"하셨음을 노래하며 시를 마친다. 우리도 잠시 동안 인내하면 이와 같은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조급하여 말로 불평을 토했지만, 곧 기쁜 마음으로 이를 정정할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우리를 후대하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주해와 설명들]
1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하나님께서는 진실된 성도들에게 시련을 주시되 결코 영원히 떠나지는 않으신다. 성도들이 받는 시련이 지리하고 오래 계속될 수는 있어도 결코 영원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을 잠시 동안 버린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분은 조만간에 성도들을 회복시키신다. 이때에 누리는 기쁨은 지난 날에 겪었던 슬픔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사 54:7). 여기에는 버린 후에 다시 모을 것이라는 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잠시" 동안 있었던 상처를 씻을 "큰 긍휼"에 대해 말한다.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기로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히 떠나실 수가 없다. -티모시 크루소(Timothy Cruso, 1696).
1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고난에서 벗어나고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다 한다 해도, 그리스도께서는 종종 그 고난이 극에 달하게 하여 그들로 시련을 거치게 하신다. 그분은 풍랑을 만난 제자들에게 다가가시기 전에, 먼저 제자들이 힘을 다해 노를 젓게 하신다. 그리고 밤 사경이 되어서야 오시는데, 이는 아침이 다 된 시간이다(막 6:48). 우리는 고난을 싫어한다. 그래서 고난을 받기 시작하면 연단을 충분히 받았기에 구원받을 때가 다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혜가 충만하신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연단을 더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아신다. -조지 허치슨(George Hutcheson, 1657).
1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때면 그 이유를 알아보라. 우리가 그분으로 진노케 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분은 결코 이유 없이 진노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고, 그분으로 얼굴을 돌리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분의 명령 중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수행하지 않아서 그분이 매를 드셨는가?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 무슨 연고로 나로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나로 알게 하옵소서"(욥 10:2).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슨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오리 바람처럼 심판하시는지 계속해서 물어야 한다. 그분은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이처럼 오랫동안 진노하시고, 구원을 베푸시지 않는가? 우리는 슬픔으로 곡하며 사함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을 이처럼 흑암으로 덮으시고 우리로 낮이나 밤이나 그분의 진노 아래 고통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행하시는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이 왜 이처럼 진노하시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이런 고난의 이유와 원인을 파악하는 것은 때로 즐거운 일이다. -티모시 로저스.
1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무관심하지 않으신데, 그분이 잊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눈을 잠시라도 돌리신다면, 어미 닭이 병아리를 돌보지 않을 때에 독수리가 덮치듯이 우리의 영적 원수는 우리를 잡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서 달려들 것이다······아버지는 때로 아들의 성품을 알기 위해 아들을 시험한다. 그가 어려운 일을 당해도 그것을 감당해 내는지, 아니면 불평하는지, 아들이 자기 고집대로 하는 것은 아닌지, 아버지가 그를 돌보지 않기 때문에 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아버지가 그를 난폭하게 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도망을 가거나 아버지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은 아닌지, 아버지께 반항하는 것은 아닌지, 이런 것들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그분의 백성을 시험하시고, 돌보지 않는 것처럼 내버려두기도 하시면서 성도들이 어떤 성품을 가졌는지 시험하신다. 시련을 당할 때에 성도들이 그분을 계속해서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그들을 버린다고 해서 그들도 하나님을 버리지는 않는지, 하나님이 잊으신 듯할 때에도 해야 할 의무를 다 감당하는지, 하나님께서 돌보거나 보호하며 공급하지 않으시는 듯할 때에도 하나님을 의지하는지, 이런 것들을 보고자 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은 재앙을 당했을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왕하 6:33).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재앙을 당해서도 그분을 계속해서 의지하고 그분께서 구원해 주실 것을 간구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와 함께 이렇게 말하자:"이제 야곱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사 8:17).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사 30:18).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법은 사무엘이 사울을 대했던 것과 같다. 사울이 위급한 순간에 처했을 때에도 사무엘은 마지막까지 나타나지 않았다(삼상 13:8, 9). 사무엘이 사울 앞에 나타나지 않을 때 사울이 어떻게 하는가를 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그분의 성도들을 이렇게 대하신다. 그분은 종종 성도들에게서 오랫동안 얼굴을 숨기시며 그들이 어떻게 하는가를 시험해 보신다. 다윗이 고난에 처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셨던 것처럼, 성도들이 고난에 처했을 때 그들을 버리신 것처럼 보이시며 이러한 때에 그들이 어떤 길을 걷는지를 보고자 하신다. -토머스 가테이커(Thomas Gataker, 1637).
1, 2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질병은 말을 타고 와서 발로 걸어 나간다"는 프랑스 속담이 있다. 이것은 모든 악한 것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사람이 갑자기 넘어진다거나 과식하여 죽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이처럼 질병은 쉽게 오지만 고치기란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기쁨은 이와 반대이다. 기쁨은 소처럼 천천히 오지만 사라지기는 쉽다. 슬픔이란 집에 오래 머무르는 손님이고, 슬픔이 더 많을수록 더 오래 머무르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알기에 슬픔을 온화하게 대할 것이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그저 대문에 서서 마실 것을 요구하고 떠나간다. 그러므로 기쁨에게는 별 신경을 쓰지 않겠다. -조셉 홀.
1, 2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고통의 강도는 우리의 용기를 시험한다. 그러나 고통이 지속되는 기간은 우리의 인내를 시험한다. 우리는 고통의 강도 때문이 아니라, 고통이 지루하게 지속되는 것 때문에 지쳐 버린다. 고통이 임할 때에 처음에는 온 힘을 다해서 진심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한다. 그러나 고통이 지속되면 마음이 해이해지고, 마침내 낙담하게 된다. 욥은 밀물처럼 밀려오는 여러 가지 시험을 꿋꿋하게 견디어 냈다. 그러나 고통의 끝이 보이지 않자 그는 이 고통 가운데 허우적거리게 되었다. -앤드류 풀러.
1-4절. 생명이 떠나가면 모든 것이 이상하게 변한다. 그 모든 아름다움과 영광도 사라진다. 생명이란 즐거운 것이다. 이것은 감미롭고 편안한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창백한 것이고, 어느 곳에나 두려움과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님의 성도들은 그분의 호의가 떠나고, 그분이 얼굴을 숨기실 것을 두려워한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실 때면 그들은 놀람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고통과 환난을 느끼며 몸을 떠는데 이는 사망의 고통과도 같은 것이다. -티모시 로저스.
1, 5, 6절. 기도는 은혜를 증가시키고 자라게 한다. 운동이 몸에 유익을 주는 것처럼, 기도는 영혼에 유익을 가져온다. 기도 운동을 통해서 영혼의 방해물들을 소화하거나 떠나게 한다. 몸을 잘 움직이지 않는 자는 감기에 걸리고, 폐에 가래가 끼며 마침내는 천식에 걸린다. 그러나 신체적 운동을 하는 자는 몸을 깨끗하고 건강하게 유지한다. 기도는 성도들의 운동장이며, 이곳에서 은혜를 누리게 된다. 바람이 공기를 순환시키는 것처럼, 풀무로 아궁이의 숯불에 바람을 불어넣어 불길을 일어나지 못하게 막는 찌끼를 불어내는 것처럼, 기도는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한다. 크리스천들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적대적인 환경에서 살아간다. 세상에 대한 사랑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무디게 한다면, 세상에서 부딪히는 고통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약하게 한다.
크리스천들이 나아갈 은혜의 보좌가 없었다면, 이처럼 믿음을 약하게 하는 것들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시편 기자가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기 전에는 두려움과 회의로 가득 찼으나,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드린 후에는 하나님과 감미로운 교제를 나누고 안식을 누리는 것을 보게 된다(시 13:1). 그는 하나님께서 다시는 그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하며 기도를 시작했다:"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그러나 그가 기도의 의무를 조금이라도 수행한 후에는 의심이 사라지고, 안개가 흩어지며, 강렬한 태양처럼 믿음을 회복한다:"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시 13:5, 6). 이처럼 그는 믿음으로 곧 축제가 있을 것을 바라보며 준비한다. 이전에는 하나님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느냐는 회의에 잠겼으나, 이제는 믿음이 강해져서 마침내는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것이라는 소망으로 즐거워하게 되었다. 아브라함은 처음에는 오십 명으로 시작했으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성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의인의 수를 열 명으로 낮추었다. -윌리엄 거놀.
1, 6절. 하나님을 섬기다가 낙심되는 일이 일어나거든, 결심을 새롭게 하고 더욱 용기를 가지라. 한 가지 낙심되는 일로 물러서지 말라. 하늘 나라를 향해 폭풍처럼 돌진하라. 부모들은 때로 자녀들이 자신들을 더 찾는 것을 보고자 하여 숨기도 한다. 예수께서는 가나안 여인의 간청을 처음에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들어주겠다는 약속도 하지 않으셨으나, 여인의 끈질긴 간청에 그녀가 간구하는 것을 들어주셨다:"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 15:28).
지속적인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런 고통을 통해서 우리 주님을 만난다면, 오랫동안 인내한 보상으로서 충분하지 않겠는가? 복권을 자주 사는 사람이 스무 번이나 아무런 상을 타지 못하다가, 마침내 큰 상에 당첨된다면 그 만족함이 지극히 크지 않겠는가. 당신이 지속적으로 스무 번, 아니 마흔 번이나 문을 두드리다가 죽음에 임박하여 그 응답을 받고, 죽은 후에는 당신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 큰 상을 얻는다면, 그 모든 기도의 수고가 무한히 보상받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 이것을 기억하라.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여도 결코 기도하기를 쉬지 말라. 하나님께서 은혜로운 응답을 하시기까지 기도를 쉬지 말라. 이 시의 시작과 끝을 살펴보면서 위로를 받으라. 이 시는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라고 시작했으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라고 끝을 맺었다. -조지 스윈녹.
2절.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성도들은 여러 가지 상황에서 이 시를 읽고 위로를 받으며 약해지는 믿음을 다시 회복하게 될 것이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 된 병자가 누워 있었다(요 5:5). 어느 여자는 18년 동안 불구가 되게 하는 영에게 잡혀 있다가 풀려났다(눅 13:11). 예수께서 들려주신 비유에 나오는 나사로는 평생 동안 질병과 가난 아래서 고통하다가 죽음으로 이 모든 고통에서 풀려나고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눅 16:20-22). 그러므로 이 시에 나오는 불평과 같은 말로 불평하고자 유혹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마침내 도우실 것,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윌슨.
2절.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지 않으실 때, 우리에게 회개하지 않은 죄로 인한 죄의식과 비참함은 없는지 상고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먼저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아야 하는데도, 이것을 행하지 않고 위로만 받으려고 한다면,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윗도 이런 경우에 처한 듯하다. 그는 굉장한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이런 경우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그는 무엇을 해야 하며, 이 모든 일의 결국은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매일 슬픔에 빠졌다. 그러나 후에는,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자비를 의지하고 그분의 구원을 마음으로 기뻐했다. 오늘날 고난에 처한 사람들 중에도 다윗의 행동 중에서 앞 부분만 따르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다윗의 행동 중에서 뒷 부분도 따라야 할 것이다. -앤드류 풀러.
2, 4절.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고난을 당해 비참해진 자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게 되면 큰 위로가 된다. 우리를 도울 수는 없지만 우리의 슬픔을 진정으로 염려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약간의 위로가 된다. 그들은 우리의 상처를 다 치료하지는 못하지만 친절한 말과 행동으로 아픈 곳을 어루만져 준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곤경에 처한 자를 사람들이 놀리고 욕하면, 이는 그가 지고 있는 십자가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더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상처를 더 심하게 하는 것이다. 그의 친구들이 모두 우레의 아들들이 되어서 그에게 차마 할 수 없는 말들을 한다면, 이것은 진정 견딜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고통 없이 편안한 사람들에게는,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을 심하게 대하는 것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홧김에 내뱉는 말이 고난 중에 있는 자의 영혼에 깊이 찌르는 고통을 준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자들이 불평할 때에 그들을 책망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분노 아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안다면, 심판을 받는 사람들이 불평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하나님이 원수가 되셨다는 것을 느끼는 자들은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 그가 어느 장소에서 누구를 만나든지 자신의 슬픔을 표현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제 우리에게 자비로운 친구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시다는 것은 고난 중에서도 큰 위로가 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티모시 로저스.
3절.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질병과 슬픔으로 고통을 당할 때는 눈이 침침해지고 무거워진다. 죽음이 가까이 올수록 이 현상은 더욱 심해지는데, 마침내 죽음이 다다르면 어두움 가운데 눈이 닫혀 버린다. 이와 반대로 건강과 기쁨은 눈을 환하게 하고 반짝반짝 빛나게 한다. 마치 내부로부터 눈에 '빛'을 비추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질병을 고치고 슬픔을 거두어서 육체적인 건강을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거룩한 즐거움으로 영적 건강을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도 있다. 육체의 회복은 사망의 잠에서 구원받는 것이고, 영혼의 회복은 죄의 잠에서 구원받는 것을 말한다. -조지 혼.
3절.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여호와여, 어찌하여 당신의 얼굴을 숨기시나이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보고서 살 자가 없다고 하셨나이다. 아! 여호와여! 나로 죽음을 당하게 하소서. 내가 여호와 뵙기를 소망하나이다. 당신을 뵈옵고 나로 죽게 하소서. 나는 살기를 바라지 않고 죽기를 바라나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뵙고자 하여 죽기를 소원하나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자 나는 내 생명을 멸시하나이다. -어거스틴.
3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아! 주께서 숨으심은 나로 온전케 하려 함이니이다. 내 하나님이여! 당신의 보화를 숨기심은 나로 그것을 더욱 소원하게 하려는 것이나이다! 당신께서 진주를 숨기심은, 찾는 자로 더욱 열심을 내도록 하려는 것이나이다. 당신이 즉시 주지 아니하시고 지연시키심은, 나로 계속해서 간구하도록 가르치고자 함이니이다. 당신이 듣지 않으시는 듯이 보이는 것은, 나로 인내하게 하려는 것이나이다. -안셀무스(Anselm, 1034-1109).
4절.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멸시를 견딜 수 있겠는가?
파멸시키고자 하는 자의
독살스런 혀를
속된 무리들의 저질스런 욕설을
똑같은 행동이라도 당신이 성공하기만 하면
쏟아붓는 아부하는 말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승리감에 도취한 경쟁자의
조롱하는 눈빛을
악의에 찬 기쁨을
그리고 멸시가 담긴 동정을.
-제임스 톰슨(James Thomson, 1700-1748).
4절.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내 비극으로 만들어진 희극. -존 트랩.
5절.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믿음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며, 승리 앞에서 기뻐한다. 환자는 운동을 할 때 잠시 동안 피곤하고 아프지만 기뻐한다. 이렇게 하여 건강을 회복할 것을 소망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환난 가운데서 즐거워하는 것은 그것들이 즐거운 일이어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을 알기 때문이다. 믿음은 즐거워하며, 선한 일을 이룰 것을 확신하는 가운데 승리를 거둔다. 믿음은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만 보지 아니하고, 인간의 모든 노력이 실패할 때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함께하시는 것을 바라보게 한다. -존 볼.
5절.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비록 욕정이 우리의 육신을 소유한다 해도, 인내로 우리 영혼을 소유하게 하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전쟁을 벌이지만 우리의 모든 고난은 끝이 나고, 우리의 승리는 영원할 것이다. 다윗은 승리를 노래한다:"내가 저희를 쳐서 능히 일어나지 못하게 하리니 저희가 내 발 아래 엎드러지리이다 대저 주께서 나로 전쟁케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로 내게 굴복케 하셨나이다 주께서 또 내 원수들로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나로 나를 미워하는 자를 끊어 버리게 하셨나이다"(시 18:38-40). 가난한 자들은 그들을 압제하던 자들을 밟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복하려던 자들을 정복하실 것이다. 그들이 우리의 머리 위를 잠시 동안 밟고 지나갔지만, 마침내 우리가 그들의 목을 영원히 밟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겸손히 인내하고 확실한 소망을 품었던 자들은 상을 받을 것이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 20:7). 하나님께서 추적하시는 때가 되면 병거의 힘으로 하나님을 대적할 수 없고, 말의 빠른 속도로도 도망갈 수 없다. "저희는 굽어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시 20:8). 그들이 믿던 것이 그들을 속인 것이다. 그들은 넘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셨다. 우리가 다시 일어선 것은 이제부터 영원토록 바로 서기 위한 것이다. -토머스 애덤즈.
5절.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믿음으로 사는 자처럼 기쁨으로 사는 자들은 없다. -매튜 헨리.
5절.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 말하노니 믿음으로 살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항상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담대히 말할 수 있는 바는, 당신이 우울하거나 사탄의 방해로 기쁨과 영적 쾌활함을 잃어버리고, 우울하고 침울한 삶을 사는 것은 믿음으로 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신이 암울한 시대에 살고 있다면 어떠한가? 믿음은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은가? 믿음으로 우리는 모든 염려를 맡기고, 모든 두려움과 슬픔을 버리고, 마음에 있는 모든 악한 생각과 욕정을 비우고,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사람이 강심제를 가지고 있다 해도 사용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군인처럼 칼을 찼어도 공격할 때에 그것을 빼내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당신이 우울해질 때, 믿음으로 "내 영혼아, 왜 불안해 하느냐? 네가 누구를 의뢰하는지 생각해 보라"고 두세 마디 한다면 곧 안식을 누리게 되지 않겠는가? 그러면 주님께서 바람과 폭풍을 꾸짖으시고, 풍랑이 이는 당신의 마음을 고요하게 하시지 않겠는가? 다윗이 수금을 탔던 것처럼, 누구나 우울증과 악한 영을 쫓아내는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어떤 사람들은 유쾌한 사람들과 지내면서, 어떤 사람들은 한 잔의 술을 즐기면서, 또 다른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면서 우울한 마음을 달래며 살아가려 하지 않는가? 이것들을 하루라도 거르게 되면, 그들은 눈물을 흘리거나 정신이 몽롱한 채 살아간다. 어떤 사람들은 아침에 해장술을 마시지 않는다면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는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과 대조해 볼 때, 이러한 삶은 정말 어리석은 삶이다. -사무엘 워드(Samuel Ward, 1577-1653).
6절.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 믿음이란 사람이 시련을 당할 때에 그가 과거에 체험했던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와 성실하심을 기억하게 하여 그 영혼으로 쓰러지지 않게 한다. 시편 기자는 고난 가운데 있을 때에 이렇게 해서 견딜 수 있었다. 믿음은 이렇게 말한다:"아! 하나님께서 당신의 겉 사람과 속 사람에게 무엇을 행하셨는지 기억해 보라. 그분은 당신이 고난을 당할 때에 당신의 육신을 지키셨고, 또한 당신의 영혼을 위해서 위대한 일을 행하셨다. 그분은 암울한 상황에서 당신을 구출하셨고, 당신과 언약을 맺으셨고, 당신을 위해 선을 베푸셨다. 그분은 당신이 기도하는 것을 도우셨고, 여러 번 당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눈물을 보셨다. 그분은 무서운 구덩이와 빠져들어가는 늪에서 당신을 건지시며, 당신의 입에 새 노래를 주시고, 다시는 두려움이나 믿음 없는 생각을 품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던가? 그런데도 고난 가운데서 승리하지 못하고 물에 빠져 허우적거린다니, 이 어찌된 일인가? -존 윌리슨(John Willison, 1680-1750).
6절.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존 필폿(John Philpot) 씨는 런던 의 주교의 석탄 저장소에서 얼마간을 지낸 후, 주교의 부름을 받고 불려 나갔다. 주교는 여러 가지 심문을 하던 중, 그들이 이런 나쁜 환경에 처했다면 탄식하고 슬퍼해야 할 터인데, 왜 감옥에서 노래를 부르며 그처럼 즐거워했는지를 물었다. 필폿 씨는 이렇게 대답했다:"우리는 시편을 노래하며 이렇게 즐거워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했고, 시와 찬미로 서로 화답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어둡고 불편한 장소에 갇혔으므로 서로 위로하는 것이랍니다. 저희들에게 화를 내지 마십시오. 바울은 누구든지 마음이 바른 자는 시편을 노래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바르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비극 가운데 있지만, 이렇게 노래를 부르며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한답니다." 몇 마디를 더한 다음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나는 석탄 저장소에 끌려왔지만, 여기에는 여섯 명이 함께 갇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쾌활하게 살아갑니다. 이것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기록했다:"엘싱(Elsing) 부부에게 안부를 전해 주시고, 내가 옥에 있는 동안 그들이 돌봐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해 주십시오. 여기 석탄 저장소는 매우 어둡지만,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자들에게는 여왕의 궁전보다 이곳이 더 사모할 곳이라고 전해 주십시오. 세상은 이처럼 극한 상황에서 우리가 그처럼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서 놀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불행을 경사스러운 일로 바꾸어 주십니다. 내가 하는 말을 믿어 주십시오. 하나님의 백성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있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나는 내가 체험한 것을 말씀드립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말을 믿으시고, 세상이 여러분에게 행하는 어떤 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우리 몸을 구속할 때, 우리 영혼을 자유케 하여 하나님과 대화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를 땅에 내동댕이치면, 그들은 사실 우리를 지극히 높여 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를 죽인다면, 우리에게 영생을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이 일은 고난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 선하신 하나님이시여! 내가 무엇이관대 이처럼 큰 자비를 베푸시나이까? 이날은 주께서 만드신 날이니 기뻐하고 즐거워합시다. 이 길은 좁은 길이나, 하나님의 평강이 가득하고 영원한 기쁨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아! 내가 곧 처형을 당한다니, 내 마음은 기쁨으로 뜁니다! 하나님, 내가 감사하지 못했던 것을 용서하시고, 이처럼 큰 영광을 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임을 용서하소서. 내 비록 어둡고 탄식하는 장소에 있으나, 탄식할 수 없는 것은 내 마음이 기쁨으로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밤이나 낮이나 기쁨으로 충만하며, 이전에는 결코 이처럼 기쁨을 누린 적이 없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영원히 찬양을 받으소서. 우리 원수들은 이것을 보고서 초조해 하며 이를 간답니다. 이 기쁨이 우리에게서 사라지지 않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 고난을 받으면 받을수록, 이 기쁨을 더 많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이나 물 앞에서도 약해지지 않습니다." -사무엘 클라크(Samuel Clarke, Mirrour, 1671).
6절.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 시편의 끝은 시작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존 트랩.
6절.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는 위기를 당할 때마다, 사탄이 나를 해하려고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내 곁에 계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 알지 못했다. 내가 두려운 일들을 당했지만 하나님은 나를 붙드시고 격려해 주셨다. 그러나 내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일을 시작했을 때, 하나님은 내게 은혜를 베푸셔서 내가 괴롭힘을 받지 않게 하시고 성경의 여러 말씀으로 이 모든 것들을 당한 나를 위로해 주셨다. 그래서 난 "하나님께서 허용하신다면, 더 많은 위로를 얻기 위해서 더 큰 고난을 주실 것을 기도하겠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 1:5 참조. 전 7:14).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
[설교힌트]
1절. 슬픔의 기간이 긴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그렇게 보일 뿐이다. 이 땅에서 누리는 기쁨이나 슬픔의 날들과 영원한 기쁨이나 영원한 슬픔을 대조하라. 조급함이나 다른 악한 정욕이 이 세상에서 사는 날들을 길게 보이게 할 뿐이다. 이것을 단축하려면 미래에 대한 예측을 하지 말고, 그 후에 불평도 하지 말라.
1절 하반절. 하나님의 얼굴을 숨기심. 왜 숨기시는가? 왜 내게서 숨기시는가? 왜 이처럼 오랫동안 숨기시는가?
2절. 배척을 받은 자, 또는 위로를 찾아 나선 영혼에 대한 권고. -풀러.
2절 상반절. 자해의 원인, 폐해, 범죄, 그리고 치유.
2절. 매일 겪는 내 마음속의 슬픔. (1) 슬픔의 이유-사탄, 불신, 죄, 시험, 예수의 임재를 상실함,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김, 인간의 죄성에 대한 탄식. (2) 슬퍼해야 할 필요성-타락한 것들을 깨끗이 함, 은혜를 받게 함, 하늘을 향한 소망을 일으킴. (3) 슬픔의 치유-말씀의 식탁에서 음식을 먹음, 기름진 약속들, 예수와 동행함, 선행, 경건치 못한 것을 피함. -데이비스.
2절 하반절. 패배의 날이 승리의 날로 바뀌는 때.
3절. 이 구절을 성도들에게 적용하라. (1) 사탄은 우리의 원수이다. (2) 그분의 원수가 우리 위에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3) “어느 때까지입니까?” -데이비스.
3절. “나의 눈을 밝히소서.” 누구를 위한 기도인가? (1) 참회하는 죄인. (2)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 (3) 그리스도의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4) 시련받는 성도들. (5) 죽어 가는 성도들. -데이비스.
4절. 악인의 성품이 나타나는 두 가지 경우. (1) 그들이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더욱 오만해진다. (2) 박해받는 자들 위에서 크게 즐거워한다. -윌콕스.
5절. 체험과 인내. “나는······,” 그리고 “내 마음은······.”
6절. 넘치도록 주시며 후대하시는 자, 그리고 온 마음으로 노래하는 자.
이 시는 전체적으로 탄식으로 시작하여 기쁨에 도달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특히 이러한 변화를 이루어 내는 전환 과정으로서의 기도에 대해 보여 준다. 탄식, 기도, 즐거움의 과정이 각각 두 절씩이다. -브라운(A. G. Brown).
시편 14 편
[개 요]
주제-이 아름다운 시에는 단순히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라고 머리말이 붙어 있다. 시편에서 모두 53편의 시에 “영장으로 한 노래”라는 머리말이 붙어 있다. 이것은 이 시편들이 성도들의 개인적인 묵상을 위해서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회중으로 모인 곳에서 찬양대가 노래로 불렀을 것이라는 점을 알려 준다. “영장”은 찬양대의 책임자를 말한다. 에인즈워스는 이 사람을 “음악의 대가”라고 불렀다. 이러한 시편들 중에는 찬양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도 있고, 여호와께 직접적으로 노래하지 않는 것도 있으나 공적 예배를 드릴 때 부르도록 되어 있었다. 어거스틴은 찬양 이외의 다른 내용은 예배시에 불러서는 안 된다고 했으며, 후에 찬송가를 편집하는 자들이 이와 같은 주장을 다시 펼쳤는데, 이것은 성경적인 주장이 아니다. 초대 교회는 영적 노래를 부르는 도중에 교리를 노래하며 기도를 드렸다. 또한 탄식하는 시도 이스라엘의 노래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받아 노래했던 것이다. 우리는 시편을 통해 여호와를 높일 뿐만 아니라, 바울의 가르침대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교훈하고 권면하며, 마음으로 주께 노래해야 한다.
이 시에는 특별한 머리말이 붙어 있지 않으므로, 이 시를 암송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실제적 무신론에 대하여”라고 제목을 붙여 보았다. 이 시가 기록된 상황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이 있었으나 이것들은 모두 근거가 없는 것들이며, 이것들을 열거하는 것은 시간 낭비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모두 죄 아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인류의 모든 역사는 인류가 타락한 증거를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 근거하여 이런 결론을 내릴 필요가 없었다. 다윗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시 14편에서 모든 육적인 사람들이 싫어할 결론을 동일하게 내린다.
구성-이 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1절 세상의 잘못된 사상.
1-3절 잘못된 사상이 불러오는 부패한 도덕.
4절 사람을 핍박하는 죄인들의 성향.
5절 죄인들의 놀람.
6절 경건한 자를 조롱함.
7절 백성들의 즐거움을 위해 여호와께서 나타나실 것을 기도함.
[강 해]
1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1절. "어리석은 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무신론자는 세계적인 바보들이다. 그가 천성적으로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던들 하나님을 부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을 부인했으니, 그가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죄는 항상 어리석은 것이다. 죄가 극에 이르면 가장 존귀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공격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부인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가장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며, 오만한 일이다. 모든 인류가 인정하고 동의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자신이 자각하고 있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죄인이 자신이 신봉하는 무신론을 주창함으로써 그가 미워하는 하나님을 파괴할 수 있다면, 비록 그가 사악하다 할지라도 그런 대로 일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의 존재를 부정한다고 해도 불 가운데 있는 사람이 타는 것을 막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한다 해도 온 세상의 심판주 되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계명을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멸하시는 것을 막지 못한다. 무신론은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죄악이며, 이것을 맹신하는 어리석은 바보들은 무서운 진노를 자초할 것이다. 옛 현자는 "어리석은 자의 혀는 자신의 목을 자르느니라"고 말했다. 하물며 무신론자들은 자신의 몸과 영혼을 영원히 죽이는 것이다. 이 무식한 자들의 악행이 하나님께만 향한다면 그래도 나으련만. 아! 어리석은 바보 한 사람이 수백 명의 바보를 만들어 낸다. 요란스럽게 신성을 모독하는 자들은 거짓 된 교리를 펼치는데, 이것은 마치 문둥병자들이 병을 전염시키는 것과도 같다.
"어리석은 자"라고 번역된 말은 히브리어로 "나발"(lbn)이라고 한다. 에인즈워스는 이 단어가 나뭇잎이나 꽃이 시들어 가고 떨어지고 색이 바래고 죽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이 단어는 어리석은 자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는데, 이는 지혜와 이성, 정직함과 경건함의 수액이 모두 빠져나가 버린 것을 말한다. 트랩은 정곡을 찌르며 이 어리석은 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이 사람들은 진액이 다 빠져 버린 자들이고, 걸어다니는 시체들이다. 그들은 올바른 이성이나 종교가 시들어서 소멸된 자이며, 다 말라비틀어지고 썩어 버린 자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을 "배교자"라고 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천박한 사람"이라고 했다. 우리는 극히 조심하여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과 능력과 사랑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런 불신은 근본적으로 어리석은 자들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우리 중에 누가 이 구절에 나오는 어리석은 자들과 한 부류가 되기를 바라겠는가?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모든 사람은 근본적으로 이처럼 어리석은 자들이다.
"그 마음에 이르기를." 사람이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그와 반대로 될 수 있는가? 사람이 불신자가 되는 것은 그의 머리가 아니라 먼저 마음에서 시작하지 않는가? 그가 무신론자처럼 이야기할 때면, 이것은 어리석은 마음이 양심의 소리를 묵살하며 말하는 것이 아닌가? 만일 사람이 진실과 의를 사랑한다면, 신성에 대한 문제를 이해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선한 것과 옳은 것을 싫어한다면,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추방하고자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도덕적 통치자이시며, 정의의 수호자이시며, 악에 대한 심판주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의 마음속에 무신론이 판을 치는 것을 보고서 놀라서는 안 된다.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기 마련이다. 딕슨은 "누구나 하나님과 화목되지 못하고 새롭게 되지 못한 사람은 미친 사람이나 마찬가지다"라고 했다. 미친 사람이 헛소리를 한다고 해서 놀랄 일이 있겠는가?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이런 어리석은 자들은 모든 시대, 모든 나라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자들이다. 물을 주지 않아도 이들은 자라나고, 이 세상 어느 곳에나 흩어져 있다. 지적 대각성이 일어난다 해도 이들의 수가 줄어들지 않는다. 이것은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 어리석음과 위대한 학식이 종종 공존하는 것을 본다. 은혜가 이들의 마음에 들어가 믿음이 생기기 전에는, 무신론자들의 트집에 일일이 대답하는 것은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지혜로운 자가 7년에 걸쳐서도 다 대답할 수 없는 것들을 어리석은 자들은 불과 1시간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물론 지혜로운 자들이 넘어지도록 장애물을 놓는 것이 그들의 기쁨이기도 하다. 설교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리며 그들의 마음을 향해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그리하면 여러 가지 논쟁을 벌이며 그들을 설득하려 하는 100명의 변사들보다 하나님의 은혜로 더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하나님이 없다는 주장은 너무나도 괴상한 주장이기 때문에 이 사람도 감히 공개적으로 주장하지는 못하지만, 거의 공개적으로 말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칼빈은 이런 주장에는 논리가 없다고 생각하여, 어리석은 자들이 교리적 선언을 하는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알렉산더 박사는 이것이 그들의 교리라고 분명히 말했다. 이것은 단순히 죄인의 타락한 속성이 희망하는 것은 아니며, 그의 반역적인 마음이 소망하는 것도 아니며, 어떤 논리적 사고를 거쳐서 그 주장을 단언하게 하고, 그것을 사실로 믿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입술로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도 그들의 마음으로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데, 이들은 엄숙하게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통치자이시며, 인간에게 법을 주시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분이다. 어리석은 자는 이런 하나님을 과녁으로 삼아 화살을 쏘아 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악의는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 우리가 살아 활동하는 것이나 우리의 존재가 모두 그분으로 말미암았고 그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인데도, 그분을 대적하고 그분을 향해 분노하는 것이 얼마나 미친 짓인지!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했는데, 그분을 향해 "하나님이 없다!"라고 외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광기어린 행동인가! 모든 인류가 이처럼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이 없다!"라고 말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자유하기를 소망한다면, 이것은 인류가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저희는 부패하고." 이것은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성령께서 이것을 증거하신다. 로마서 3장을 보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마음은 부패하고 타락한 마음이다. 어느 유명한 비평 학자는 이 구절을 능동형으로 표현하여 "저희는 부패하게 행동했다"고 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죄의 속성이 어떠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죄는 우리의 기질 속에 악의 근원으로서 수동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불길을 향해 풀무로 바람을 일으키며 우리 자신을 부패하게 하여, 이미 흑암처럼 검은 마음을 더욱 검게 만든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쇠사슬로 묶는 것이다.
"소행이 가증하여." 사람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부인하기 시작하면 그 결말이 어떻게 될지 누가 예측할 수 있겠는가? 주인의 눈이 닫혀 있다면, 종들이 하지 못할 일들이 무엇이 있겠는가? 대홍수가 있기 전에 세상이 어떠했는지 보고, 그 인간의 속성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라:"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창 6:12). 하나님이 없는 세상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보고 싶은 자들은 로마서 1장을 읽어 보라. 여기에는 하나님 없는 인류의 비참한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어느 학식 있는 힌두교도는 이 표현이 오늘날 힌두 사회를 그대로 묘사한 것이라고 고백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죄성을 제어하지 않았더라면, 영국 사회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 이러한 표현은 사람들이 비밀스럽게 하는 행동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혐오스러운 일들이 어떤 사람들의 입맛에는 감미로운 것이다.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죄가 창궐한 곳에서는 선을 행하지 않는 죄도 넘치는 것이다. 해서는 안 될 일들을 하는 자들은 해야 할 일들은 하지 않는 법이다. 이것은 바로 우리 인류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 아닌가! 은혜가 다스리는 곳이 아니라면, 선을 행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범죄하고 타락한 인류는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요, 별이 없는 밤이요, 보석이 없는 똥더미요, 밑이 없는 지옥이다.
2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2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이 구절에는 여호와께서 파수대나 다른 높은 장소에서 사람을 주의깊게 바라보시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그분은 맹목적으로 벌을 주시거나, 반역의 소문을 듣고서 무분별하게 대량 학살을 명하는 전제 군주도 아니시다. 사람을 굽어살피시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당신은 무엇을 보는가? 우리는 편견이 없는 정의와 가련한 자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을 상상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정의는 심판을 내리시기 전에 죄를 먼저 달아 보시고, 의인이 죄인과 함께 멸망당하지 않도록 의인을 찾으시는데, 이것은 소돔에 심판을 내리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방문하신 것에도 잘 나타나 있다.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전지하신 분의 눈이 이 지구를 구석 구석 살피시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는 모든 백성과 나라 사이에서 하나님을 찾는 자를 들추어 내시기 위한 것이다. 사람들을 살피시는 그분은 누가 선한 사람인지 다 아시고, 그들을 찾고서 기뻐하시며, 그들을 속히 구분해 내신다. 그러나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떤 열매도 거두지 못한다. 아담의 후예로서 거듭나지 않은 영혼들은 선하신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는 부자나 위대한 사람이나 학식 있는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요구를 다 만족시킬 수가 없다. 그분은 세상에서 위대하고 탁월한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어떤 의무를 가졌으며, 그들의 영원한 운명은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행복을 누리는 것인가를 아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그분의 눈은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찾고 또 찾는 자에게 머무르신다. 세상에서 특별한 사람만이 이렇게 하나님을 추구하며 찾는 것은 아니다.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라도 올바른 이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아! 그러나 모든 것을 다 보시는 그분도 사람들 가운데서 선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님이 없다"고 부정하기를 기뻐하면서, 그들을 지으신 조물주 하나님께 등을 돌린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나 불신의 여행을 계속하는데, 그들이 걷는 땅은 불신과 격리의 땅이요, 흑암의 땅이다. 그곳은 사망의 그림자가 횡행하는 땅이요, 빛도 흑암처럼 어두운 곳이다.
3절. "다 치우쳤으며."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든 사람이 그들을 지으신 여호와와 그분의 율법을 버렸다. 고집 센 암소처럼 그들은 어떤 멍에도 메기를 거부했고, 목자를 떠나 다른 길을 걷기 좋아하는 양처럼 그들은 목자가 예비한 초장을 떠나 버렸다. 히브리 원어에는 모든 인류를 집합적으로 표현했다(원어에는 "하콜 사르"<rs lkh>라고 하여 모든 사람을 하나의 집합체로 보고서 동사도 단수 어미를 붙여서 표현했다. 또한 다음 구절에 나오는 "함께"라고 번역된 "예하두"<wdjy>는 '그들이 하나가 되다'라는 뜻으로 모든 사람이 다 여호와를 버렸고, 한 사람도 예외가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역자 주). 모든 인류의 마음이 타락하고 삶이 오염되어 버렸다.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그들은 모두가 썩은 누룩처럼 변질되었으며, 어떤 사람들의 표현처럼 썩어서 악취가 나게 되었다. 이처럼 악한 것을 우리가 분명히 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여기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지독한 냄새가 나는 곳에서 매일 일하는 사람들은 마침내 그 냄새를 맡지 못하게 되는 것과도 같다. 방앗간 주인이 그의 방앗간에서 나는 소리에 익숙해지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의 파멸과 타락을 발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하지만 특별한 예외적인 경우는 없을까?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단 말인가? 시편 기자는 이 질문에 어떤 오해도 없도록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부정적 단어들을 반복해서 사용한다:"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히브리어 원문은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강조해서 표현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이보다 더 강조해서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보고 아시는 여호와께서 내리는 선고에는 어떤 오류나 과장도 없다. 새롭게 되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 선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는 생각은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 성령께서는 이것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부정했다:"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인간이 나면서부터 타락한 존재라는 것을 부정하는 자들은 여기에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아니, 그보다도 우리는 이런 주장에 대해 무엇을 느끼는가? 우리는 나면서부터 타락한 존재라는 것을 고백하는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시며, 은혜가 우리를 주장하고 다스리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하는가?
4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4절.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하나님에 대한 증오와 타락한 삶은 다른 사람들을 박해하는 동기가 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악을 행하게 되고,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고 착취하는 데서 쾌감을 누리게 된다. "죄악을 행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을 사슬에 얽매는 것이다. 군함에서 노를 젓는 노예가 된다거나, 시베리아 광산에서 일하는 것이 이보다 덜 비참한 일이다. 노역은 죽지 않을 만큼 하면서 그 보상으로서 무서운 심판을 자초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스스로 이런 노예가 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교훈을 받은 자들은 이처럼 노예가 된 상태에서 구원받을 것을 간구한다.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그들로 악의 노예가 되게 했던 바로 그 무지가 그들로 자유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미워하게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떡 먹듯이" 하나님의 자녀를 먹어 치우려 한다. 그들은 매일 매일 일상적으로 식사를 하듯이, 하나님의 성도들을 일상적으로 압제하며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것이다. 사나운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들을 삼키듯이, 독수리가 작은 새들을 먹이로 삼듯이, 늑대가 목장의 양들을 찢듯이, 죄인들은 주님을 따르는 자들을 당연한 것처럼 핍박하고 욕하고 조롱하는 것이다.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이렇게 하나님의 성도들을 희생물로 삼으면서도 결코 기도하지 않는다. 그들은 기도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는 일관성을 보인다. 그들의 손은 무죄한 자의 피로 가득한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들으실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5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5절.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박해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으며, 그들에게는 멸망당할 시기가 있다.
"저희가"-입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던 자들, 강철같이 강한 손으로 압제하던 자들, 마음이 교만한 니므롯과 헤롯과 오만한 죄인들.
"거기서"-하나님을 부인하고, 그의 백성을 압제하던 곳에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공포가 이들을 사로잡으므로 이들은 두려워하고 또 두려워한다. 히브리어 성경의 표현에 따르면, "이들은 두려움을 두려워한다." 형체를 알 수 없는 두렵고 괴이한 공포가 그들 내면에 파고드는 것이다. 마음이 강퍅한 자들은 그들의 양심 때문에 공포의 땀을 흘리는 시기가 도래하는 것이다. 비겁한 자가 잔인한 것처럼, 모든 잔인한 자들은 마음으로부터 겁쟁이들이다. 과거에 범했던 죄악이 유령처럼 그들을 괴롭히고, 그들이 큰 소리치며 교만하게 굴어도 그들의 귀에 들리는 소리는 그들을 항상 괴롭게 할 뿐이다.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하나님이 의인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악인은 알기 때문에 그들은 의인들을 싫어한다. 그들이 눈을 닫아 버린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백성들에게서 풍기는 하나님의 형상을 느낄 수밖에 없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것을 분명히 보게 되는 것이다. 하만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모르드개와 같은 자들을 보고 본능적으로 두려워하며 떠는 것이다. 성도들이 비천한 처지에 있다 해도, 박해자들이 즐거워하는 가운데 성도들이 성문에서 탄식한다 해도, 죄인들은 성도들이 진실로 고귀하다는 것을 느끼고 기가 죽는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의인들과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비웃는 자들은 우리 주님을 핍박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가까이하신다.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신비스럽게 그들 중에 거하심을 말한다.
6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
6절.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악인들이 실제로는 비겁하다고 해도, 그들은 사자의 가면을 쓰고서 여호와의 백성들 위에서 군림하려 한다. 진정 어리석은 자는 그들인데도, 그들은 지혜로운 자에게 잘못이 있는 듯 그들을 조롱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 야수의 마음을 가진 자가 어떻게 선한 것을 알겠으며, 올빼미의 눈으로 태양을 바라보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조롱하는 핵심은 여호와에 대한 의인의 신뢰일 것이다. 너희 하나님이 너희들을 위해 무엇을 하신단 말이냐? 우리 손에서 너희를 구원할 신이 누구란 말이냐? 너희들이 그렇게 기도하고 부르짖는 보상이 무엇이란 말이냐?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의 면전에 이런 조롱기 섞인 힐문을 하며 그들의 피난처에 대해 수치심을 품게 하는 것이다.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 우리가 품은 신뢰에 대해 그들이 조롱하는 것에 영향을 받지 말자. 그들의 비웃음을 비웃고, 그들의 조롱을 물리치자. 이제 잠시만 지나면 그분은 택하신 자들을 위해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을 가볍게 여기던 그 모든 대적들에게 벌을 내리실 것이다.
7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 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7절.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이 시편을 이처럼 기도로 결론을 내리는 것이 적합하다. 무신론자들에게 하나님이 계심을 알리고, 박해하는 자들을 넘어뜨리며, 죄를 억제하고, 의인을 보호하는 데 이스라엘의 구원을 나타내 보이는 것보다 더 적합한 것이 있겠는가?
모든 시대의 의인들은 메시아의 오심을 고대했다. 그분은 모든 악을 깨끗게 하기 위해 이미 속죄 제물로 오셨지만, 이번에는 또 다른 속죄 제물이 필요 없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두번째 오실 것을 고대한다. 아! 이런 지루한 날들이 어서 끝나고 그날이 빨리 오기를! 그분은 왜 이리도 지체하시는가? 그분은 이 세상에 죄가 관영하고 그분의 백성이 짓밟힘을 받고 있는 것을 이미 아신다. 왜 지금 바로 구원하러 오시지 않는가?
"백성의 포로 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그분이 영광스럽게 오시는 날, 그분의 백성들을 포로로 잡힌 것에서 구출해 내시고, 그들이 당하는 영적 슬픔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씨름하던 야곱도, 다윗의 왕국을 세우며 부강함을 누렸던 이스라엘도, 그분이 그들의 구원을 위해 나타나시는 날 모두 즐거워할 것이다. 아! 그분이 어서 오셨으면! 그때에는 행복하며 거룩한 날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더디게 온다고 생각하지 말자! 보라, 그분이 속히 오신다! 그분을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주해와 설명들]
시 14편 전체. 이 시는 두 가지 면에서 특이하다. 첫째, 이 시는 시편에 두 번 나타난다. 시 14편과 53편은 한두 가지 표현을 제외하고서는 거의 동일하다. 둘째, 사도 바울은 이 시를 많이 인용했다(참조. 롬 3:10-12).
이 시에는 세상에서 가장 통탄할 만한 상태가 나타나 있다. 사람들의 행동이나 의견, 그들의 삶의 원리나 인간의 모든 면이 전반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통탄할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첫째, 이 시가 기록된 시기는 무신론주의가 세상에 들어오고, 세상에서 위대하다고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 이 사상에 사로잡힌 시기였다. 당시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은 없다"고 믿게 되었다. 그들이 이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살고, 그렇게 행동하고, 그런 가치관을 따라 살았던 것이다. 시편 기자는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라고 말했다. 어떤 특정한 사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자"가 그렇게 했다. 어리석은 자들을 "부패하고"(1절), "다 치우쳤으며"(3절)라고 표현했다. "어리석은 자"란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기에 어떤 부류의 사람들도 여기에 포함될 수가 있다. 그들은 각각 다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점에서는 모두 같다. 이들은 '실제적 무신론자들'이다.
둘째, 그들은 무신론주의에 적합한 욕정을 가졌다. 사람들이 각기 자신들이 좋아하고 신봉하는 사상을 따르며 살듯이, 이들은 그들의 무신론주의를 따르는 데 적합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없다"는 무신론주의를 따르는 자들에 대해 기대할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왜 시편 기자는 이들을 "부패"(1절)한 자들이라고 말했겠는가? 왜 그는 이 말을 반복하여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3절)라고 말했겠는가? 그들에게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부패하다'라는 말은 원어에 음식이 '상하다'란 뜻이 있다. 이전에는 그런 대로 마실 수 있는 음료였으나 이제는 김이 다 빠지고, 맛이 변질되어 아무 쓸모가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어서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라고 했다. 그들은 썩어 냄새 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들은 타락한 애정을 가졌기에 아무런 생명력도, 맛도 없게 되었다. 오직 냄새 나는 썩은 욕정을 추구하며 살아갈 뿐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한다. 이처럼 그들은 썩고 타락한 욕정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셋째, 그들의 행동은 어떠한가? 그들이 무신론주의를 따르고, 이에 적합한 욕정을 가졌다면, 그들의 행동은 이보다 더 나은가? 그들의 행동을 살펴보라. 두 가지 행동을 살펴보자:(1) 세상 안에서의 행동, (2)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행동.
(1) 그들은 세상 안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들이 마땅히 수행해야 할 의무를 생략해 버리는 것은 무엇이며, 그들이 수행하는 악한 일은 무엇인가? 그들은 어떤 선한 일을 하는가? 그들은 선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1절). 많은 사람 중에 단지 몇 사람이라도 선을 행하지는 않겠는가?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단호히 부정한다:"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3절). 세상 사람들 중에서 정말 선하고 유익한 일을 하는 사람이 단지 몇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희망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들은 무신론주의를 신봉하고, 타락한 욕정으로 가득 차 있으며, 선한 일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그 의무를 감당하지 않는다.
악한 일에 관해서는 무엇을 했는가? "소행이 가증하여"(1절)라는 구절에서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일이 무슨 일인지는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말을 할 수도 없을 만큼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모든 선한 사람들이 싫어하는 일이다. 시편 기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은 '냄새 나도록 부패하고 더러운 일'을 한다. 이처럼 시편 기자는 이 시를 기록하면서 사울이 통치하던 시대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2)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어떻게 행동했는가? 그들이 이렇게 타락했다면, 여기에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며 또 다른 죄를 더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곧 어긋나고 만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했다:"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4절). 그는 "그들은 이런 악한 행동을 하면서도 지식이 없다"라고 말하지 않고,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라고 했다. 시편 기자가 이렇게 표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는 것이 자신에게 파멸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 죄가 그들을 파멸시키고, 특별한 심판을 불러온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여러 가지 죄악 중에서도,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먹는 죄에 특별한 무게를 두고 심판하신다.
이 시에서 관찰할 수 있는 내용이 많이 있다. 그러나 몇 가지만 제시하고자 한다.
지금 어떤 상황에 처했는가?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이상한 점은 악인이 두려워한다는 것이다(5절). 그들은 무엇인가 두려운 일이 그들에게 임할 것을 알았던 듯하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압제와 욕정의 정상에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두려운 마음이 들게 하신다. 그리하여 죄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려움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시편 기자는 그 이유를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라고 했다. 그들은 계획한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것을 안다. 그들은 탈취한 고기나 빵을 소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악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먹으려 하면서도 정작 그들을 삼키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을 두렵게 하고, 놀라게 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보고서 맛있는 빵을 발견했다고 생각하고, 이것을 먹으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입 속에 자갈을 집어넣으시고, 그들의 턱주가리를 부숴 버리신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5절).
성령께서는 이 두 부류의 사람들-어리석은 자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상황에 있는가를 묘사한다. 잡아먹으려는 사람들, 그리고 잡아먹히는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했다. 그들은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몇 가지 방도를 취했다. 악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취한 방도를 어떻게 대했는지가 다음 구절에 나타난다:"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6절).
여기에 나오는 "가난한 자"는 다음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잡아먹힐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 가난한 사람은 이처럼 위기의 시간에도 소망과 피난처가 있다. 이 소망은 바로 여호와이시다. 가난한 자는 여호와로 자기의 피난처를 삼는다.
시편 기자는 모든 악한 사람을 한 사람 "어리석은 자"로 묘사하듯,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도 한 사람 "가난한 자"로 묘사하며 단수로 취급했다:"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6절). 하나님의 백성들은 각기 다른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여호와로 피난처를 삼는 데는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하여 여호와로 자기 피난처를 삼게 되었는가? 그들은 "경영"을 통해서 여호와로 피난처를 삼았다(6절). 그들은 우연히 여호와를 피난처로 삼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지혜를 짜 내어 그렇게 결정했다. 그들은 충고를 들으며 심사숙고하여 결정했던 것이다. 이것은 지혜로운 결정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취한 이 행동에 대해 악인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세상은 그들의 경영에 대해 뭐라고 판단하는가? 그들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6절) 했다. 여호와로 피난처를 삼는 것이 바보 같은 짓이라고 조롱하며 수치심을 품게 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유명하고 위대한 사람들로 피난처를 삼는 것은 괜찮은 일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여호와로 피난처를 삼는 것은 가장 바보스런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바보 같은 짓이라고 조롱하는 것이다.
가난한 자가 조롱을 받는 시기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편 기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기도하는 것이라고 했다:"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 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만일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부르짖으며 기도하라. "오, 여호와여!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바라나이다!" 시온으로부터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의 소리가 들리게 되고, 이것은 그분의 백성들에게 기쁨이 될 것이다. -존 오웬(John Owen).
1절. "어리석은 자." 진액이 다 빠져 버린 듯한 사람, 걸어다니는 시체와 같은 사람, 그 안에 종교나 올바른 이상이 시들고 말라 썩어 버린 사람,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배교자, 그에게서 하나님이 떠나 버린 사람, 그저 미물에 불과한 동물과 같은 존재, 무신론을 배우는 악한 사람. -존 트랩.
1절. "어리석은 자."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리석은 자들의 세상이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류 중에서 다수가 완전히 비이성적으로 살아간다. 그들은 지극한 열심으로 영원보다 일시적인 시간을 선택하고, 영원한 기쁨보다 일시적인 기쁨을 누리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보다 사탄의 권고를 선택한다. 이것이 그들의 어리석음 중에서 가장 심각한 어리석음이며, 그들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다. 이것은 치명적인 선택이며, 지속적으로 이렇게 살아간다면 아무런 치료책도 없게 된다. 이 세상에 속한 일시적인 일에 실수가 있었다면, 이것은 나중에 바로잡을 수 있다. 이것은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영적이고 영원한 문제에 대한 실수는, 전 생애에 걸쳐서 그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나중에는 결코 회복할 수 없게 된다. 죽음 후에는 다시 구원의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피조물이라도 그가 범할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일은 바로 위대한 조물주의 존재와 그분의 온전하심을 부정하거나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이 죄를 범하는 자들에게 "어리석은 자"라고 불렀다. -존 제이미슨(John Jamieson, M.A., 1789).
1절. "어리석은 자." 이 단어는 성경에서 악한 자를 묘사하는 데 쓰이며, 이방 철학자들도 사악한 사람을 지칭할 때 이 단어를 사용했다. 히브리어로 "나발"(lbn)은 "나벨"(kbn)에서 파생한 단어이며, 이는 사람이나 동식물의 생명이 죽어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사야는 '꽃이 시들다'라는 표현으로 "나벨 치츠"([yx lbn, 사 40:7)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꽃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보이도록 하는 수액을 모두 상실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주신 지혜와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지식을 모두 상실해 버린 자를 말한다. 그는 죄에 빠져서 죽은 자요, 은혜를 상실해 버린 자이다. 이 사람은 이성이 없는 자가 아니라 이성을 남용하는 자이다. -스티븐 차녹.
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어리석은 자는 마음이 결박당한 자이다. 그러나 그들의 혀는 결박당하지 않았다. 이 혀로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불경스러운 말을 하며, "하나님이 없다"고 말한다. 그들이 하는 말의 강약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어떤 사람은 큰 소리로 외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작은 소리로 속삭인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마음으로 하는 말과 속삭이는 말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말을 다 아시듯 분명하게 듣고 아신다. 아! 아무리 작은 죄라도 얼마나 가증스러운 것인지. 이 죄는 위대하신 하나님께 그토록 상처를 주는 것이다! -데이비드 클락슨.
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이 시는 시 53편과 거의 동일하다. 단지 5절에서 변화가 있지만 그 의미는 같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성령께서는 한 번만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셨을까? 어리석은 자가 내뱉는 말이나 미친 짓을 우리가 극히 경계해야 하겠기에 시편에서 두 번, 그리고 로마서 3장에서 세번째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들 중에는 이렇게 말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우리들 중에 어떤 사람도 여기 묘사되어 있는 자와 같이 어리석은 자는 아니다!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를 우리가 찾아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들과 같은 부류가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우리는 다윗이 알지 못했던 신앙 고백을 하고, 그에게 한두 가지 알려 줄 수 있을 만큼 확실한 신앙을 가졌다. 우리 안에 어리석음과 부족함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늘의 만나로 삼아 넌더리가 나도록 먹었고, 대학이나 성직자들도 다 해결할 수 없는 교리를 배우고 자기 주장을 펼칠 수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은 없다'라고 주장할 만큼 어리석고 미친 짓을 하겠는가? 우리는 신을 믿지 않는 이방인을 이렇게 책망할 만큼 냉혹한 인간들이 아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라. 당신은 로마서 3장을 진지하게 살펴보라. 바울은 아담의 모든 후손이 죄 아래 있고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고 단정했다. 각 사람의 속성이 시편에 나타난 이런 자들과 같지 않다면, 어떻게 이런 결론을 내렸겠는가? 바울은 또한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 2:12)라고 결론을 내렸는데, 이것은 어떤 사람들을 예외로 인정하며 말하는 표현은 아니다. 사람들은 말로는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속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을 싫어하는 것 같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다. 그들의 계획에도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없어서, 하나님께서 보기에는 "하나님이 없다"라고 말하며 사는 무신론자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윌리엄 칠링워스(William Chillingworth, 1602-1643).
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왜 사람들은 그들이 감히 대적할 수 없는 하나님을 저항하려 하는가? 그들이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일까? 이렇게 '가벼운 멍에'를 싫어하고 '가벼운 짐'을 배척하며 평화롭고 즐거운 길을 피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영이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순종하기보다는 멸망의 길을 택하면서 그들은 죽음의 장소로 내려가고 지옥을 붙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을 보여주지 않는가? 그들의 마음이 냉담해지고 하나님과 화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이보다 더 확실히 증거해 주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들은 마음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데, 이는 그들이 "아! 하나님 같은 존재가 없다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은 그들이 악의 정상에 도달했다는 것을 보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정신 이상이 되었다는 것도 보여준다.
그들의 마음속의 생각을 말로 표현한다면, 하나님과 그분이 만드신 피조물을 모두 조롱하고 저주하는 표현이 나올 것이다. 마치 독기어린 숨을 내쉬면서 하나님을 저주하고, 모든 자연 만물을 시들게 하고, 우주 만상을 시들고 사라져 가도록 하려는 듯하다. 그들이 말로 하늘과 땅을 대적하는 것이 마치 전능하신 자의 말씀을 대적하고, 하늘과 땅의 기둥을 흔들며, 전능하신 자의 명령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처럼 어리석은 자들이 소수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자의 일반적인 모습, 반역한 모든 인류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 이처럼 일반적인 표현으로 묘사되었다:"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서기보다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들의 기질이다. 이것은 얼마나 미친 짓인가? 우리는 그들을 돌이킬 다른 방도가 없다. -존 하우.
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는 자연의 계시를 부정하고 하나님께 도전하는 자들이다. 땅에 있는 미물들이나 파리, 그리고 기어다니는 구더기들도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자들의 주장을 논박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서 사람이 달려가면서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이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존재가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지옥에 있는 마귀들도 무신론을 믿지는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듣고 두려워 떤다:"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떠느니라"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프리수신"(frivssousi)인데, 이는 바다에서 바람이 불고 물결이 이는 것을 묘사하는 데 쓰인다. 이것은 극한 두려움을 나타내는 말로서 두려워 떠는 것뿐만 아니라 공포로 인해 소리를 지르는 것을 묘사하는 데도 쓰인다(막 6:49행 16:29). 마귀들의 말을 주의해서 관찰해 보라:"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 8:29). 마귀도 우리가 믿는 네 가지 믿음을 인정하고 있다:(1) 하나님, (2) 그리스도, (3) 심판의 날, (4) 그들이 괴로움을 당할 것. 그러므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은 마귀보다 더 악한 자들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지옥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무신론에 속한다.
땅에서는 무신론자들이 많이 있으나
지옥에는 하나도 없다네.
어거스틴은 이 무신론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스스로 자신을 설득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가장 악하게 살았던 자들도 죽은 후에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세네카는 하나님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하는 자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낮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밤이 되면 그들이 했던 말에 대해서도 의심하기 때문이다. 세네카는 또한 어떤 사람에 대해 말하면서 그가 한때는 하나님이 없다고 했으나, 병들었을 때에는 하나님을 찾으며 도움을 구했다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은 거짓말하는 자들이고, 그들의 양심의 빛을 거스르는 죄악을 범하는 것이다. 툴리(Tully)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나라는 역사상 하늘 아래에 있었던 가장 야만적인 나라라고 말했다. -브룩스.
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사람의 마음이나 영혼이 받은 상처보다 더 치명적인 상처는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믿음, 소망, 자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질식시키고 지옥으로 떨어지게 하는 치명적인 죄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종교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로버트 코드레이(Robert Cawdray, Treasury or Storehouse of Similes, 1609).
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무신론자보다 더 어리석고, 무식하고, 비참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것보다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 자신은 언젠가는 죽을 것이고, 과거에 그가 존재하지 않은 때도 있었고, 그 자신이 앞으로 변할 것이며, 여러 세대가 흐르면 그가 있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밤이 되면 그는 날마다 잠을 잔다. 그러나 이런 일은 하나님께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가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는 어리석은 자이다. 사람이 모든 기술을 동원해도 조개 하나를 만들지 못하는데, 이처럼 정교한 하늘과 땅의 모든 것들이 우연히 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원인이 없는 결과, 통치자가 없는 훌륭한 정부, 중심이 없는 원, 영원이 없는 시간, 첫째가 없는 둘째, 조물주가 없이 만들어진 세상, 이런 것들은 철학이나 정상적인 사고에 배치되는 것이며, 이런 생각을 하는 자들은 지각 없는 야수와 같은 자들이다. 이것이 무신론자들이다:"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이것이 그의 성품이다. 지음을 받은 자가 지은 자를 부정하면서 아무도 그를 짓지 않았다고 하고, 혀는 스스로 말할 수 없었으나 말을 하도록 하신 분을 대적하여 말하고, 만들어진 것은 존재한다고 하면서도 만드신 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어리석음은 아무런 빛이나 밑바닥이 없는 지옥과도 같고, 태초에 아무것도 없었던 흑암과도 같은 것이다.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 1613-1667).
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지혜로운 자는 이성과 덕을 따라 살아간다. 그가 고요히 우주를 바라보면서, 이 모든 것이 서로 연관을 갖고 조화롭게 지어졌다는 것을 생각하고 자신의 욕정을 물리치며,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위대하신 모습을 그린다면, 전능하신 분은 이 사람을 누구보다도 가장 고귀한 존재로 바라보실 것이다. 이와 반대로, 무신론자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동물은 없다. 그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고, 자신을 이 땅에서 여기 저기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별볼일 없는 존재로 생각한다. 그의 주위에 있는 가장 보잘것없는 동물이 죽어 없어지는 것처럼 자신도 죽어 없어질 유한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동물과 다른 점은 그들은 이 사실을 알고서 살아간다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그는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도 더욱 무능한 존재가 된다. 재난을 당하게 되면, 지난 과거에 있었던 일이나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희망으로 어떤 위로를 받는 것도 아니다. 이런 때는 권총으로 자살을 하거나 어떻게 해서든지 이 세상을 떠나 버리는 것으로 피난처를 삼고자 한다. 그러나 이처럼 우울하고 신앙심이 없는 자가 극히 어려운 상태에 빠지게 되면, 그들은 다가오는 죽음에 공포감을 느낀다. 약 30년 전에 나는 이런 망나니 같은 사람과 함께 배에 올랐는데, 그때 갑자기 돌풍이 불자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보았다. 배가 흔들리자 그는 목사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자신은 악한 무신론자로서 지극히 높으신 분을 부정해 왔다고 고백했던 것이다. 이 소식은 사람들에게 빨리 전달되었고, 사람들은 그 배에 무신론자가 타고 있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함께 탔던 뱃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서 결코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람이 자신의 입으로 직접 고백하는 것을 보고서 더욱 놀랐다. 그는 그때까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결코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배에서 이렇게 고백을 하는 동안 한 선원이 갑판장에게 "이 사람을 바다로 던지는 것이 더 좋겠어요"라고 속삭였다. 그러나 우리의 시야에 항구가 들어왔고, 바람이 갑자기 잔잔해졌다. 회개한 그 사람은 다시 태도를 바꾸어 우리에게 배에서 일어났던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애원했다. 육지에 내린 지 이틀 후에 한 사람이 그가 배에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헌신했다고 떠들어 대자 그는 이 사실을 부인했다. 마침내 두 사람은 큰 소리로 다투다가 격투를 벌이고 말았다. 그 무신론자는 몸을 다쳐 피를 흘린 후에야 배에서처럼 하나님을 인정했으나 그 상처가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또 태도를 바꾸어 버렸다. 후에 그는 자유로운 사상가가 되었고, 현재는 요정이 실존한다는 의견에 반박하는 글을 쓰고 있다. -조셉 애디슨(Joseph Addison, The Tattler, 1671-1719).
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하나님은 없다."
"하늘이나 땅을 다스리는 하나님은 없다."
어리석은 자는 이렇게 말하네
믿음 없는 자의 눈을 가리는 가리개를 뜯어 내라
그들의 눈에 하나님이 들어오도록!
하나님이 없다고?
하늘에 펼쳐 있는 수천 수만의 별들
이것들을 바라보라
하나님의 형상을 반사하지 않는가!
하나님이 없다고?
은빛 물결치며 흐르는 강물,
상쾌한 공기, 땅, 나무,
꽃, 풀, 모래, 산들거리는 바람,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을 말하네, 한 목소리로
어리석은 자가 두려워하는 그분을
유창하게 증거한다네.
보지 못하는 자여
이 모든 것들에서 그분을 보라!
-조반니 코타(Giovanni Cotta).
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무신론자들
대낮에 음탕한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는
올빼미 새끼
눈꺼풀을 내려 굳게 닫아 버리고
하늘에 있는 찬란한 태양을 향해 야유하며
"어디 있어?"라고 외치는
올빼미 새끼.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
(Samuel Taylor Coleridge, 1772-1834).
1절.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죄는 육체를 즐겁게 한다. 타락한 성품은 부패한 행동으로 그 욕구를 채운다. 유다의 탐욕은 부정한 소득으로 채워졌다. 요압의 굳은 마음은 피로 강퍅해졌다(왕상 2:5). 도둑질하고자 하는 마음은 남의 것을 빼앗는 것으로 살찐다. 교만은 어울리지 않는 칭찬으로 만족해 한다. 신성 모독은 교회에 강도들이 생겨 나게 하고, 알랑거리는 제사장들은 수고하지 않은 소득으로 배를 채운다. 마음의 성이 함락되면, 이성의 포탑은 곧 무너지는 것이다. 위통이 두통을 야기시키고, 어둡고 습한 땅에서 일어나는 안개가 상쾌한 공기를 질식시키며 태양을 어둡게 하듯이, 우리 영혼의 어두운 구석에서 나오는 타락하고 음란한 욕정은 우리 이성을 어둡게 하고 질식시키는 것이다. 욕정의 구름이 부정한 비를 내릴 때에는 하나님의 제단(사람의 마음)에서 은혜의 불이 타오를 수 없다. 욕정의 편견이 우리를 사로잡으면, 정확한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토머스 애덤즈.
1절.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베르나르는 이렇게 말했다:"사람이란 마음이 부패하면 행동도 가증해진다. 하나님 앞에서 부패하면, 사람 앞에서도 가증해진다. 세상에는 선을 행하지 않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첫째,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찾지도 않는 자들이다. 그들은 죽은 자들이다. 둘째, 하나님을 알지만 찾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은 악한 자들이다. 셋째, 하나님을 찾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다."
중세의 한 작가는 이렇게 기록했다:"오, 하나님이여, 오늘날 기독교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가증한 일을 행하는지요! 사람마다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경배하나이다. 교만한 자들은 세상 권세라는 우상 앞에서 절하고, 탐욕스러운 자들은 재물의 우상 앞에서 절하고, 음란한 자들은 미의 우상 앞에서 절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사랑하는 우상 앞에서 절하나이다."
사도 바울은 이 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 1:16).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바울은 이 내용을 로마서에서 이렇게 표현했다:"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롬 3:9). -존 메이슨 닐.
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내가 다루고자 하는 내용은 무신론자들의 신관이다. 그들의 신념은 "하나님이 없다"라는 짤막하고 부정적인 구절에 담겨 있다. 이것은 한 구절에 불과하지만, 여기에서 어리석은 내용이 수없이 많이 발전하게 된다. 이것은 너무나 비종교적이고 불경스러워서 그 자신도 감히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다만 "그 마음에" 비밀스럽게 속삭일 뿐이다.
본문에서 세 가지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1) 그는 누구인가? 그는 "어리석은 자"이다. (2) 그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 (3) 어떻게 이것을 말하는가? "그 마음에"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나이가 어린 어린애가 있고, 생활 태도가 어린아이 같은 어린애가 있다고 했다. 어린아이나 어리석은 자나 모두 헬라어로 "내이피오이"(nhpioi)라고 부른다.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자가 있고, 은혜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도 있다. 후자가 더 심각한 자이나, 양자가 모두 이성이 없는 자들이다. 주정뱅이는 그가 하려고만 하면 이성을 사용할 수 있지만, 죄인은 이성을 사용할 수 있어도 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윗이 말하는 어리석은 자는 도덕적으로 어리석은 자이며, 악하고 은혜를 모르는 자이다. 이것이 원래의 의미이다······이제 어리석은 자의 행동을 살펴보자.
이 어리석은 자는 무엇을 했는가?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만 말만 했을 뿐이다. 그는 무엇을 말했는가? 역시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다만 생각했을 뿐이다. 마음속으로 말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첫째는 입으로 말하는 것이고, 둘째는 마음으로 소망하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두번째의 말을 의미했다. 어리석은 자는 어떤 소리도 내지 않고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은 채 "하나님이 없다"고 했는데, 이는 '마음속으로' 한 말이었다. 어거스틴은 마음에도 입이 있다고 했다. 하나님은 마음을 들으시며, 마음의 말을 입술로 한 말과 동일하게 여기신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왜 부르짖느냐고 물으셨는데, 그때 모세는 아무것도 입으로 말하지 않았었다. 그레고리는 "침묵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도 그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말로 하지 않는 조용한 언어가 있다. 다윗은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시 4:4)라고 했다.
입으로 묵상을 하지 않는 것처럼, 마음으로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음과 입은 때로 그 역할을 바꾸어서 하기도 한다. 생각하는 혀가 있듯이, 말하는 마음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어느 철학자가 말했듯이 마음이 모든 것을 행한다. 마음에서 말을 하면, 혀는 그것에 소리를 담아 주는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혀는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의 메아리에 불과하다. 마음은 입을 다스리며,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를 알려 준다. 마음이란 영혼이 보낸 전령과도 같다. 마음은 영혼이 무엇을 선포하려는지 그것을 읽어 내고, 입은 그것을 외치는 것이다. 마음이 먼저 말한 것이 아니면, 혀는 그것을 결코 소리내어 말하지 않는다. 가장 진실된 언어는 마음의 언어이다. 혀와 입술은 거짓을 말하고 아첨하지만, 마음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한다. 마음이 사람의 귀에 들리도록 말할 수 있다면 스무 개의 입보다도 더 귀한 것이다. -리처드 클러크(Richard Clerke. D.D., 1634).
1, 4절. 악한 사람들이 나쁜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성경은 그 원인으로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시 10:4)라고 했다. 그들은 심판의 하나님이 계시고, 심판의 날이 올 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라고 마음을 다지면서 부패해지고, 하나님의 백성을 떡 먹듯이 먹는다. 그들은 떡 한 조각 먹듯이 사람들과 그들의 기업을 먹어 치우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죄가 사람을 그토록 비열하게 만들었기에 천지에 충만하신 여호와께서 그분이 거하기 위해 지으신 사람의 마음에 오실 수 없게 되었다(렘 23:24)! 세상 만물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하늘에 태양이 있다는 것보다도 더 명백한 사실이다. 그분이 계시지 않다면,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에게도 힘을 주셨건만, 악인은 그 힘으로 죄를 범한다. 죄는 무신론보다 먼저 생긴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 묵상하고 사모한다면, 그는 자신의 영혼을 죄에서 분리해 낼 것이다. -리처드 십스.
2절.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을 찾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그분을 간절히 찾지 않고, 또 그들이 죄 가운데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는 데 여러 면에서 실패했다. 첫째, 사람들은 하나님 그분을 목적으로 찾는 것이 아니다. 둘째, 그들은 하나님, 그분만을 찾는 것이 아니다. 셋째, 그들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먼저 찾는다. 넷째, 그들은 하나님을 냉담하고 부주의하게 찾는다. 다섯째, 그들은 하나님을 항상 찾는 것이 아니다. 유다와 데마가 그 예이다. 여섯째, 그들은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이것은 이단과도 같다. 일곱째, 그들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 속에서 찾지 않는다. 이것은 위선자들이 행하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마땅히 찾아야 할 시기에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이것은 회개하지 않는 죄인과도 같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과 세상의 풍속을 따라 살아간다. -토머스 윌슨(1653).
2, 3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하나님께서 사람을 살피시고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다 치우쳤으며." 인생들이 다 치우쳤다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과 그분의 도에서 멀리 떠나갔다는 말이다.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그들이 행하는 행동은 그들로 냄새 나게 하는 것들이다.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이 땅에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있지만,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도 없다. 이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는 빼어난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 중에서 한 사람도 하나님을 알거나 추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바울은 동물 같은 사람이나 지적인 사람이나 모두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 것은, 이것이 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윌리엄 그린힐.
3절.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비루한 자들이다:"네 무덤을 예비하리니 이는 네가 비루함이니라"(나 1:14). 죄는 사람들을 비루하게 만들고, 그들의 이름을 지우게 하며, 그들의 피를 오염시킨다. 그들은 "더러운 자"가 되는 것이다. 히브리 표현으로는 그들이 냄새가 나게 되었다는 말이다. 악인을 부를 때에 그들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들은 돼지이며(마 7:6), 독사요(마 3:7), 마귀이다(요 6:70). 악인은 찌끼와도 같은 존재들이다(시 119:119). 순수한 하늘을 이런 찌꺼기들로 오염시킬 수 없다. -토머스 왓슨.
3절.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로마의 풍자가들은 그 자신의 세대를 이렇게 표현했다.
이젠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죄악의 목록에 더 첨가할 새로운 것이 없다
우리 후손들도 같은 욕망을 느끼겠지
그래서 조상들의 어리석은 짓을 따라 하겠지
악은 이제 그 정상에 도달한 것이다.
-주베날리스(Juvenal, Sat. 1).
3절.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오리겐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중에는 헐벗은 자를 입히고, 배고픈 자를 먹이는 등 여러 가지 선한 행동을 많이 한 사람들이 있는데, 이처럼 선한 자가 아무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질문을 던졌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대답했다:"집의 기초를 놓고 그 위에 벽을 쌓는다고 해도, 그가 집을 완성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처럼 그들은 선한 행동을 조금은 하겠지만, 온전한 선에 이르지는 못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온전히 선한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자들도 온전함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람의 속성이 어떠한가를 보이고, 모두 죄 아래 있고 저주 아래 있으며, 은혜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도 없음을 말했다. 누구든지 선한 행실을 했다면 이는 은혜로 인한 것이며 그 자신이 행한 것이 아니다. 그가 자연 계시를 받아서 선행을 했다면,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게 마련이며 온전히 선한 행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앤드류 윌렛(Andrew Willett, On Romans 3:10, 1562-1621).
4절.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사람이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무지 때문이다. 악한 자들이 죄를 무서워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그들이 무지하여 모르기 때문이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그들은 지식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라는 구절에서 이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이런 떡 조각을 먹지만, 그 결과 그들은 끓는 물로 입에 화상을 입게 될 것이다. 그들이 이것을 알았더라면, 이처럼 박해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파멸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알았더라면, 하나님의 백성을 감히 만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리처드 알레인.
4절.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오스틴(Austin)은 그들이 떡을 먹듯이 매일, 또는 떡을 먹고자 하는 열심과 탐욕으로 이렇게 행동했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식인종들, 잔인한 야만인들은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도 없이 배고플 때에 좋은 음식을 먹듯이 가난한 자들을 먹어 치웠다. 연못 속의 큰 고기나 바다의 상어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는 것처럼, 이들은 가난한 자들을 먹어 치우는 것이다. 마치 타조가 어떤 금속이라도 소화시키는 것처럼, 이들은 무엇이나 소화시키는데 특히 돈을 소화시키는 데는 뛰어난 기술을 가진 자들이다. -존 트랩.
4절.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악인들과 하나님의 백성은 원수 사이라는 것을 성경이 말하는데도 이것을 믿는 자가 왜 이리 적은지! 성경은 악인들이 떡 먹듯이 하나님의 백성을 먹는다고 했다. 이것은 그들이 성도들을 핍박하고 탈취하는 이상한 성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하며, 배고픈 자가 음식을 먹듯이 큰 즐거움으로 이렇게 행한다는 것이며, 성도들을 괴롭히는 것이 그들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럽다는 것을 말한다.
성경은 그들의 나쁜 성질을 사자나 곰, 교활한 여우, 야생 황소, 탐욕스러운 돼지, 전갈, 찔레나 가시 등으로 비유한다. 성경은 그들이 피 흘리는 일에는 지치지 않고 지극히 열심을 내며, 악한 행동을 하기 전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묘사한다. 헤로디아는 나라의 절반을 갖기보다는 성도의 피를 원했다(마 14:1-12). 하만은 왕께 거금을 바치고서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을 죽이고자 했다. 악인은 자기 영혼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하나님의 눈동자와 같은 성도들을 향해 칼을 던지기를 바란다. 그들이 결국에는 심판을 받고 후회한다고 해도, 사회와 정부와 도덕적 의무를 저버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파괴하고자 한다. 성령께서는 그들을 "무자비한" 사람들, 난폭한 자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끓는 가마솥처럼 분노하며, 노도처럼 진노한다.
그러나 누가 이 성경 말씀을 믿었는가? 이처럼 악한 사람들이 성도들에게 어떻게 대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우리가 안전을 위해서 이 사람들을 의지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들의 분노에서 피하기 위해 방주를 가져야 한다. 우리가 그들 가운데서 아무런 해를 받지 않고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도 노아처럼 우리를 원수들의 분노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그들이 야만적으로 잔혹함을 보일 때에 놀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매일 그들을 억제해 주시는 것에 놀라야 한다. 경망스럽고 천박한 자들과 함께 지내게 될 때, 우리는 상처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사자와 전갈을 피하듯, 우리는 그들을 피해야 한다. 그들을 신뢰하지 말고, 우리의 비밀을 그들에게 털어놓아서도 안 된다. 그들이 사는 사회에 살면서 우리는 경망스럽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아비 마귀의 약속을 믿지 않는 것처럼, 그들의 약속도 믿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게달의 장막"에서 구원받기 위해 하나님을 사모해야 한다. 성도들이 악인과 관계를 맺고서도 안전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자녀들을 벨리알의 아들이나 딸들과 결혼을 시켜서 그들과 혼합시키지 말아야 한다. 마귀가 우리의 종이 되리라고 믿어서도 안 된다. -루이스 스터클리.
4절.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이 세상은 악한 세상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워한다.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하만은 모든 유대인들을 증오했다. 독이 없는 독사, 반점이 없는 표범을 찾을 수 있다면, 성도를 미워하지 않는 악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경건한 자를 표적으로 삼는다. "악으로 선을 갚는 자들이 내가 선을 좇는 연고로 나를 대적하나이다"(시 38:20). 세상은 경건한 자를 표적으로 삼으면서, 무엇인가 다른 이유를 내세운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문제삼는 것은 성도들의 거룩함이다. 세상의 증오는 마음속 깊이 맺혀 있다. 분노는 화해될 수 있는 것이지만, 증오는 화해가 불가능한 것이다. 하늘과 지옥은 화해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했다면, 또한 우리를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 15:18). 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미워해야만 하는가? 순결한 비둘기와 같은 그분은 어떤 악의도 없으시고, 샤론의 장미와 같이 가장 감미로운 향기를 내뿜으셨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의 악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성도들을 먹어 치우는 세상이다. -토머스 왓슨.
5절.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이 구절의 의미를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오만한 죄인들이 임박한 위험 앞에서 항상 기가 죽고 겁쟁이처럼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들이 모두 진정한 용기와 불굴의 정신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죽음을 대할 때에는 필사적으로 용기와 담대함을 보이는 자들이 많이 있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이 죽어 있고, 그들의 양심이 악에 대해 담대해져서 생기는 것으로서, 이로 인해 그들은 저주를 받게 된다. 그러나 여호와의 뜻을 따라 그들이 죽음의 잠에서 깨어 나게 되면, 이 가르침은 예외 없이 사실이라는 것이 증명되며, 가장 담대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가장 비열한 겁쟁이라는 것이 증명될 것이다. 가장 악한 일을 가장 담대하게 했던 자들이라도 하나님의 보수하시는 손이 그들을 붙잡으면 가장 겁쟁이가 되는 것이다. -존 도드(John Dod, 1547-1645).
5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의인의 세대와 의인들을 좋아하시고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세대와 함께하시나, 이런 세대를 가장 좋아하신다. 악인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셉 캐릴.
5절.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영광의 왕은 그 영광을 사람들에게 보이신다(시 24:9, 10).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에 위엄을 나타내 보이신 것처럼, 그분의 자녀들과 그들이 걷는 길에 영광을 보이시며 함께하신다. 이것은 그들이 가장 비참한 경우에 처했을 때에도 마찬가지다. 스데반이 죄수로서 공회 앞에 나타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스데반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셨다. 이것은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행 6:15). 솔로몬이 의인에 대해 한 말은 사실이다:"사람의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전 8:1). 베드로도 이렇게 말했다:"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영," 또는 "은혜의 영"이라고만 하지 않고 "영광의 영"이라고 했다. 이것은 순교자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순수함과 경건한 행동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있다. 그들의 평화스러운 모습은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을 혼란에 빠지게 했다. 그러므로 그들을 떡 먹듯이 삼키던 자들도(4절), 바로 이 사실 때문에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5절)을 알고서 두려워했다.
하나님은 악인의 행동에 놀라서 말씀하신다:"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4절). 그들이 이렇게 행하면서도 그들은 큰 두려움 가운데 있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가장 심하게 모욕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두려움으로 치신다. 왜 그런가? 이는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악인에게 그분의 백성은 의롭다는 것을 알리며 경고하신다(이것은 빌라도가 그리스도에 대해 경고를 받았던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빌립보서에도 나타나 있다:"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빌 1:28). 이 구절에서 '구원의 확신'이나 '두려움의 영'이 모두 하나님께로서 나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울은 다윗을 미워했고 그를 죽이려 했으나,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했다(삼상 18:9-12).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함께하심을 나타내 보이시고, 그의 경건함과 지혜로운 행동으로 사울의 양심을 치셨으며, 이것이 사울로 두려워하게 한 것이다. -토머스 굿윈.
6절.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 시 53편에서는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신 고로 네가 저희로 수치를 당케 하였도다"(시 53:5)라고 표현했다. 시 14편과 시 53편에서 언급하는 대상이 완전히 다르다. 시 14편에서는 악을 행하는 자가 가난한 자를 무시하고 수치를 당하게 하는 것을 말하는 반면, 시 53편에서는 악인이 마침내 수치를 당할 것과 주께서 그들을 멸시하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하나님께서 그의 가난한 백성을 돌보심이 감미롭게 나타난다. 가난한 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뿐만 아니라, 문자 그대로 가난하고 천한 자, 박해받는 자와 상처받는 자를 말한다. 하나님의 이런 성품이 그분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힌두교의 베다, 회교의 코란, 헬라와 로마의 법률을 모두 읽어 보라. 하나님의 압제받고 가난한 백성들에 대한 자비하심이나 불쌍히 여기는 동정심이나 사랑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성경에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구구 절절이 나타나 있다. -바르통 부시에.
6절.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어리석은 자들은 선한 것을 공격하려는 성향이 있다. 아이를 낳지 못하던 미갈에게도 많은 자손들이 있어서, 그들의 어미처럼, 거룩한 다윗을 조롱하는 것이다. -존 트랩.
6절.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것만큼 악인들이 마음속으로부터 멸시하는 것은 없다. 악인들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를 부끄럽게 하려 한다. 세상에서 지혜 있는 자는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고, 강한 자는 자신의 능력을, 부한 자는 자신의 재물을 의지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는 자를 의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2) 그들은 하나님의 원수이며, 하나님은 그들의 원수이다. 원수를 의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3)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의 방법을 알지 못한다. (4) 그들은 하나님이 주지도 않을 도움이나 물질을 추구하며, 그들의 욕망을 채우고, 분노하고 부패하며 어리석은 일을 하고자 한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이런 것을 허용하시지 않을 것이다. 죄를 짓기 위해서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뿐이다. 그들이 처한 상황을 생각해 보면, 그들의 어리석음이 바로 그들의 지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죄에 거하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그래서 가난한 자의 경영을 멸시한다. -존 오웬.
6절.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 (KJV에는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는데,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그의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이다"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그들이 가난한 자를 부끄럽게 하면서 다른 여러 가지 이유를 들겠지만, 이것이 진정한 이유이다. 그러므로 이 교훈을 생각하라. 참되고 경건하게 살려는 하나님의 백성은 악인과 분쟁을 피할 수 없다. 악인은 하나님의 백성을 싫어하는 이유를 몇 가지 들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교만하여 다른 사람들의 일에 간섭한다든지, 이웃을 멸시하고 냉소적이라든지, 현상황에 만족하지 못하고 문제만 일으킨다든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다른 이유를 댈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 구절에서 악인이 성도들을 멸시하는 참된 이유를 제시했다. 이것은 성도들이 여호와를 신뢰하며, 세상 사람들이 신뢰하는 거짓 되고 헛된 것들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존 도드.
6절.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숨으라. 피난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피난처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에게 피하라. 이 바위로 달려가라. -랠프 로빈슨(Ralph Robinson, 1656).
7절.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우리가 평안할 때는 기도하지 않거나 하나님을 향해 냉담하게 된다. 그러나 역경과 시련에 처했을 때, 우리 영혼은 간절히 기도한다. 이런 예를 다윗의 시편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배고픈 자가 고기를 먹듯이, 고난은 기도하게 하는 근원과 같다. 고난이 없는 자의 기도는 향기가 없다. 이들은 기도하지 않으며, 기도를 위조하거나 습관적으로 기도한다. -볼프강 무스쿨루스(Wolfgang Musculus, 1497-1563).
7절. "시온에서." 시온으로서의 교회는 구세주가 아니다. 교회의 사역자들이나 종교 의식을 의지한다 해도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 그러나 구원은 교회를 통해서 온다. 굶주린 군중들은 제자들의 손을 통해 영적 양식을 공급받는다. 이 제자들은 복음의 잔치 자리에서 섬기는 것을 즐거워한다. 치유하는 샘의 근원이 시온에서 시작하여 동쪽과 서쪽으로 흐르고, 마침내 모든 나라들이 그 물을 마실 것이다. 이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가 그 역할을 가장 순결하고 힘있게 해야 하는 참된 이유가 된다. -C. H. S.
7절.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 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이스라엘"은 누구인가? 우리 주님은 아직 우리 안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있으며, 그 양들을 불러서 그분의 목소리를 듣게 해야 한다고 하셨다. 이스라엘은 바로 이러한 양들을 의미한다고 이해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 된 것을 돌이키실 때." 이것은 영광스런 꿈이다. 우리가 그 아름다움을 상상해 보지만, 이 꿈이 이루어지는 때에는 우리의 상상이 실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우리의 영혼은 "포로"로 잡혀서 욕정에 시달리고, 육신은 죽음의 법 아래에 있으며, 우리는 두려움에 떤다. 자일즈 플레처(Giles Fletcher, 1588-1623)는 그의 유명한 시("Christ's Triumph over Death")에서 우리가 누릴 자유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다.
슬픔의 그늘이 없는 곳
질병이 얼굴을 창백하게 하지 않는 곳
세월이 흘러도 머리가 희지 않는 곳
헐벗음이 없고
가난과 수치가 없는 곳
죽음의 두려움이 없고 삶의 기쁨이 넘치는 곳
세월이 흘러도 시들지 않는 곳
사망과 슬픔이 없는 곳.
-존 메이슨 닐(자일즈 플레처의 시에서 인용).
[설교힌트]
1절 상반절. 무신론의 오류.
1절. 마음의 무신론.
1절. 어리석은 자의 교리. (1) 그 근원-“마음.” (2) 교리-“하나님이 없다.” (3) 열매-“부패”, “가증” 등.
1절. (1) 죄의 근원-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짐. (2) 죄가 다스리는 장소-마음. (3) 지식인에 대한 영향-어리석은 자로 만듦. (4) 삶에 나타나는 현상-그들이 행하는 것, 행하지 않는 것.
1절 하반절. 디오게네스(Diogenes)의 등불. 이 등불을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게 비추고, 그들의 죄를 책망하라.
2절. (1) 굽어살피시는 여호와. (2) 여호와의 호의를 받은 자들. (3) 자비하신 여호와의 의도.
2절.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과 사람이 찾는 것. 사람은 자신의 성품과 어울리는 것을 찾는다.
2, 3절. 하나님은 선한 사람을 찾으신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3절. 인류의 전적 타락.
4절.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분의 율법, 죄의 악함, 지옥의 고통, 그리고 다른 진리들을 바로알았다면, 그들이 지금 행하는 것처럼 죄를 지을까? 그들이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악을 계속 행한다면, 그들의 죄는 더욱 중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을 것이다. 이 질문에 긍정적, 그리고 부정적인 답을 찾아보라. 훌륭한 설교가 준비될 것이다.
4절 상반절. 계시와 지식을 범하는 죄.
4절 하반절. 기도하지 않는 것은 은혜를 모르는 자의 특성이다.
5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어리석은 자의 두려움.
5절. 여호와께서 의인을 가까이하심. 박해자에게 미치는 영향, 성도들에게 주는 격려.
6절. 여호와를 우리의 피난처로 삼는 지혜. -존 오웬.
6절. 다음의 내용을 설명하라. (1) 가난한 자가 계획하는 것. (2) 그의 경영. (3) 그가 당하는 어려움. (4) 그의 피난처.
6절.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어리석은 자에게는 조롱거리가 된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지혜임을 보이라.
7절. 주의 재림을 기다림.
7절. “시온에서.” 교회는 사람들이 축복을 받는 통로이다.
7절. 부흥을 위한 설교. (1) 교회가 자주 처하는 상태-“포로.” (2) 부흥의 방법-여호와께서 은혜로 오심. (3) 그 결과-기쁨과 즐거움.
7절. 영혼의 자유함.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어떻게 주어지는가? 어떻게 성취되는가? 그 결과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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