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부모님 생애와 섭리 3권 - 제2차·제3차 7년 노정
제1장 제2차 7년노정 전 3년(1968~1970)
2. 제2차 7년노정 출발과 430가정 축복
1) 제2차 7년노정 출발
2) 430가정 합동축복결혼식
3) 3년노정 출발과 서울 지역분할 배치
4) 100일 특별기도와 협회수련
5) 전국지역장 인사조치와 목회현장
6) 1968년 하계 40일전도와 칠월칠석 특별의식
7) 1968년 하반기 주요행사
1) 제2차 7년노정 출발
1968년 1월 13일 참아버님께서 수택리 공장에 다녀오셨다. 1월 14일 주일 낮 예배 후 김원필 씨의 리틀엔젤스 도미공연 보고가 있었다. 1월 15일 참아버님께서 수택리에 다녀오셨다. 이날 15일부터 25일까지 430가정 축복을 위한 제5회 특별수련회를 주재하시고 약혼대상자 심사를 하셨다. 1월 19일 18쌍, 20일 45쌍, 21일 34쌍, 22일 11쌍, 24일 9쌍 등이 약혼됐다. 수련 중 16일 수택리에 다녀오시고, 17일 지구장회의가 있었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등 북한 무장간첩 남파사건으로 인한 정부시책에 따라 북한산 중생기도원이 폐쇄됐으며, 3월 22일 철거상태로 갔다. 1월 27일 참아버님께서 식구들과 함께 공항에 나가 내한하는 구보키 일본회장을 맞아주셨으며, 다음날 주일예배 후 환영회가 있었다. 1월 29일 유효원 협회장을 대동해 외출하셨다. 1월 30일(음력 1월 1일) 3시 지구장 부부 등이 참석한 가운데 하나님의 날 제전을 거행하셨다. 1월 31일 지구장회의가 있었고, 서울 성화학생회 제12회 가수료식이 있었다. 2월 2일 지구장, 부장들과 윷놀이를 하셨으며, 3일 구보키 회장과 지구장들을 대동해 남산성지에 가셨다.
1968년 2월 4일(음력 1월 6일) 오전 7시 전본부교회에서 참부모님 탄신기념식을 주재하시고, 낮 예배에서도 말씀하셨다. 탄신 48주년의 의미로 지난해까지 입으신 의복 중 세계순회 때의 것을 제외한 오버, 양복, 내의 등 48점을 지구장, 부장 등 간부들에게 추첨으로 나눠주셨다. 48수는 12수의 4배로서 7년 노정 종결과 함께 49수로 재출발해 영광의 역사가 시작되며 12수의 5배인 60세까지 탕감조건을 세우신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후 옷을 사탄들이 제비뽑아 나눠가졌으나 참아버님께서는 자진해서 돌려주시는 뜻이 있었다.
1968년 2월 6일까지 제11차 전국지구대항 웅변대회(1등: 청년부 경기 지구 김일환, 학생부 박성준)와 제9차 전국지구대항 음악콩쿠르대회(지구우승: 전남지구, 개인 1등: 없음)가 열렸다. 5일 참아버님께서 지구장, 부장회의를 주재하셨으며, 밤에는 문화행사로 지냈다. 6일 지구장, 부장회의를 계속하셨으며, 밤 시상식 후 124가정 축복식 영상 관람이 있었다.
이번 행사를 통해 7년노정 실제적 종결 선언과 아울러 유공자 202명에 대한 대거표창이 있었다. 참부모님께서 친히 하사하신 상은 7년노정 대상(20명), 21년노정 공로상(4명), 14년노정 공로상(15명), 공로상(46명), 옥고동참상(4명) 등이었으며, 협회장상은 공로상(35명), 헌신상(79명) 등이었다. 특히 기도에서 2월 4일을 계기로 7년노정과 21년노정이 완전히 끝나 제2차 7년노정을 가야 할 책임진 자리에 있음을 고하셨다.
2월 8일 전본부교회에서 ‘장성기 완성급을 넘어가는 식'을 가지셨다. 말씀에 의하면, 1960년에서 1963년까지는 124가정까지를 축복하심으로써 외적으로 가정과 종족을 찾으셨고, 이후로 참부모님의 가정적 기준을 세우셨다. 이날을 기해 지난 40일간의 활동에 의해 참부모님 가정이 참부모님만이 아시는 기준의 어떤 매듭을 지으셨다.
참부모님 가정이 복귀의 기준을 넘어섰고, 축복가정은 심정적으로 장성기 완성급을 넘어 아담 해와 타락 전 입장으로 들어가 신생아와 같은 자리에서 7년노정을 출발하게 됐다. 아브라함이 이삭헌제를 위해 모리아 땅으로 데려갈 때 이삭이 순종하며 따랐듯이 축복가정은 사위기대를 이뤄 정성과 순종으로 참부모님 가정과 하나돼야 한다.
말씀에 따르면, 1960년 부모의 날과 자녀의 날, 1963년 만물의 날, 그리고 1968년 1월 1일 하나님의 날 선포 때까지의 제1차 7년노정은 부모노정이었다. 그 후 제2차 7년노정은 자녀노정이 시작된다. 자녀는 부모가 걸었던 노정을 본보기로 해 걸어야 한다. 믿음의 자녀를 복귀해 부모의 축복을 받고 만물의 축복까지 받아서 사명을 인계하고 안식의 해를 맞이해야 한다. 이것을 7년 동안 하지 못하면 21년노정으로 연장된다.
하나님의 날은 참부모님께서 하나님의 실체로 나타나시고 인간에게 굴복하지 않았던 사탄이 참부모님께 굴복하는 날이다. 천사가 아담에게, 가인이 아벨에게 굴복했다는 조건이 세워졌다. 그래서 제2차 7년노정은 축복가정이 복귀된 장자 입장에서 출발한다. 과거에는 차자 입장에서 빼앗아야 했기에 핍박 받았으나, 이제는 장자 입장에서 복을 나눠주는 입장이니 핍박하지 않는다. 불응하면 때려서라도 복귀해야 한다.
제1차 7년노정에서 참부모님께서 하신 것처럼 제2차 7년정에서는 축복가정이 종족적 메시아 사명을 다해 조상자리를 복귀해야 했다. 하나님 앞에 축복받아 참부모의 인연을 갖추면 종족적 조상 자리를 탕감복귀하는 사명이 남는다. 제2차 7년노정에서 민족을 위해 충성하던 이상으로 자기 부모 형제 친척, 즉 종족을 복귀시켜야 했다.
제2차 7년노정은 가정들이 전도하는 시대이다. 천국은 가정 규합으로 이뤄진다. 그래서 예수님의 한을 푼 이상적 가정기준을 결정지어 편성해 놓아야 예수님이 열두지파의 결실체로 등장하신다. 메시아가 있어야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가 구해진다. 제2차 7년노정은 예수님께서 못다하신 종족적 · 민족적 메시아 사명을 대신하는 기간이다.
섭리는 세계적으로 발전해 나간다. 일찍이 유대교와 유대 나라, 로마는 예수님 중심하고 사위기대를 이뤄야 했다. 재림주님은 예수님, 기독교는 유대교, 한국은 유대 나라, 민주세계는 로마입장이다. 재림주님 중심하고 이들 또한 사위기대를 이뤄야 한다.
예수님은 영적 구원만을 이뤘지만 통일교회는 영 · 육 구원을 모두 이뤄야 한다. 이때는 야곱이 21년노정을 마치고 돌아와 형인 에서에게 재물을 바치던 때와 같다. 그래서 기성교회를 위한 초교파운동과 민주세계 단합을 위한 승공운동을 하는 것이다. 제2차 7년노정은 참부모님께서 하늘 앞에 쫓겨난 무리들을 찾아 구해주시고, 축복가정들은 예수님이 쫓겨나지 않고 찾은 것과 같은 기준을 세우는 기간이었다.
동시에 참부모님께서는 제2차 7년노정에 접어들면서 급격하게 세계적 활동 판도를 개척해 나가셨다. 특히 이 기간의 연두표어인 '전면적 진격' '승리적 통일전선' '통일기반 확보' 통일전선 수호'에서도 잘 드러났듯이 세계적 기반 조성을 위해 전력을 기울여 전면적 투쟁을 벌이셨다. 친히 세계를 향해 말씀을 전파하시고 세계의 도심을 뚫고 들어가서 진리 의 사령탑을 세우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신 것이다.
1908년 2월 9일 참아버님께서 최원복 선생, 유 협회장과 함께 구보키 회장에게 수택리 공장 구경을 시켜주시고, 저녁에 영화관람을 함께하셨다. 2월 10일 구보키 회장이 일본 거류민단장과 만나 공보부장관을 상봉했다. 2월 11일 주일예배 후 430쌍 축복결혼식준비위원회가 모였다. 2월 12일 참아버님께서 구보키 회장 중심으로 윷놀이를 하셨고, 축복결혼식 준비위원회가 모였으며, 수택리에 다녀오셨다.
2월 16일 구보키 회장이 세시봉에서 450명 대학생 상대로 일본 원리 운동에 관해 논했다. 2월 17일 밤 구보키 회장이 명원회 중심하고 간증했으며, 430쌍 축복식준비위원회도 열렸다. 2월 18일 주일예배에서 구보키 회장이 간증했다. 2월 20일 마츠모토 미치코(松本道子), 오야마 키미코(大山君子), 구보키 데츠코(久保木女子) 여사가 내한했다. 이날 지 구장회의에 이어 밤 12시부터 다음날 새벽 5시까지 참부모님 주재하에 430 성주식이 거행됐다. 2월 21일 참부모님 양위분께서 구보키 회장, 간부들과 함께 내한한 사사카와 부자를 위한 저녁 파티에 참석하셨다.
2) 430가정 합동축복결혼식
1968년 2월 22일 오후 2시 참부모님 양위분 주례의 436 합동축복결혼식이 서울 시민회관에서 하객 3천여 명이 만장을 이룬 가운데 거행됐다.
이번이 유효원 협회장이 집행위원장을 맡아 대행사를 치른 마지막 일이었다. 집행위원회는 위원장 : 유효원, 부위원장 겸 총무부장 : 김영휘, 관리부장 : 이기석, 문화부장 : 유광렬, 섭외부장 : 김인철, 경리부장 : 김원필, 수송부장 : 황충운, 준비부장 : 이요한, 의상부장 : 원심희, 진행부장 : 황환채, 신랑신부부장 : 이재석, 급식부장 : 김찬균 등이었다.
매우 추웠던 바깥 날씨와는 달리 외부로부터의 호응도는 의외로 좋았다. 축전만 봐도 일본의 22통을 포함한 외국교회 34통, 국내에서 이효상 국회의장을 비롯해 각 도지사와 전국 각 교회에서 120통이 들어왔다. 김종필 공화당의장과 일본의 사사카와 옹 등 국내외 정상급 인물들로부터 약 20개의 화환이 들어와 화려하게 식장을 장식했다.
이요한 목사의 사회로 개회된 축복결혼식은 국민의례에 이어 집행위원장인 유효원 협회장의 개식사가 있었다. 이어 선배 축복가정들로 구성된 들러리 입장 후 그 가운데로 주례이신 참부모님 양위분께서 입장해 남북으로 갈라서 마주 서셨다. 그 가운데로 신랑신부들이 악대 노들앙상블의 연주 행진곡에 발맞춰 입장했다. 이어서 4개항 결혼문답, 주례 축도, 예물교환에 뒤이어 참아버님께서 엄숙히 성혼선포를 하셨다.
이어서 신랑신부 대표가 주례 양위분께 꽃다발과 예물을 봉정한 후 유광렬 문화부장의 축시 낭송이 있었다. 다음은 박경원 강원도지사와 일본재향군인회 부회장 사사카와 선생이 축사했다. 끝으로 참아버님 선창의 만세 3창으로써 모든 순서를 마감했다.
식후 신랑신부들은 25대 관광버스와 수십 대 승용차에 나눠 타고 시내일원에서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시민회관을 출발해 남대문 삼각지 - 이태원 - 타워호텔 - 광희동 육교 밑을 거쳐 워커힐로 향했다. 여기서 잠깐 휴식한 후 퇴계로 5가로 나와 종로 5가 원남동로터리를 싸고돌아 중앙청 앞을 거쳐 시민회관으로 돌아왔다. 단거리 신혼여행 코스였다.
저녁 8시부터 축하의 밤 행사가 열렸다. 주로 리틀엔젤스가 출연해 거의 해외공연프로를 그대로 선보였다. 신순심 단장 외 26명과 악사 4명, 모두 30명이 수고해 줬다.
행사 전체에 걸쳐 국내외 신문 잡지 방송 등 보도진들의 열띤 취재경쟁도 있었으며, 각국 매스컴이 매머드 결혼식이라 이름하고 대서특필했다. 이로써 통일교회 합동결혼식은 완전히 전통이 확립되고 계속적인 관심사로서 세계의 이목을 끌게 됐다.
430가정 축복의 섭리적 의의는 무엇인가? 430가정은 1967년 단기 4300년과 일치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430년 만에 출애급하고 가나안으로 새롭게 출발했듯이 4300년 만에 43수 지상기반을 거쳐 세계시대 에덴복귀, 즉 본향의 세계 천국을 향해 돌아가는 출발이었다. 국가 민족을 하늘 뜻 앞에 세울 수 있는 터전을 확대하기 위한 대표 가정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해방돼 대이동한 것같이 각 도 경계를 초월해 신랑·신부들을 축복하여 대이동시켰다.
4수는 땅, 3수는 하늘로서 하늘땅 상징이며, 이것을 곱한 12수는 하늘 땅의 조화수이며 전체 대표수이다. 그래서 한국 땅에서 4300년 만에 430수 축복이 이뤄졌다. 모든 성씨 대표를 섞어 놓음으로써 모든 씨족이 자유로이 천국 들어갈 길을 열어 놓고 세계와 연결시키게 됐다. 각 성씨가 430가정과 연결된다. 거기엔 전과자 등 각 부류가 다 들어 있어 4300년 간 하늘 앞에 서지 못할 범죄자들까지 길과 다리를 놓아주셨다. 대한민국이 저절로 살길이 생기고 하늘나라와 연결될 수 있는 길이 닦아진다. 그래서 이때부터 부활한 예수와 성신의 실체로서 씨족을 구하는 종족적 메시아가 되라고 축복하신 것이다.
430가정 축복은 원래 1967년 계획이었으나 1968년 2월 22일 홍남감옥 입감 20년을 넘는 중요한 의미의 자리에 동참하는 권위를 부여하시고자 연장하셨다. 이는 2차 7년노정을 처음 맞으면서 그간 고생하고 수고 했던 식구들에게 주는 귀한 은사요 축복이었다. 1963년 7월 124쌍 축복식 후 여려 해가 흘렀기에 대규모 식구가 동참했다.
특히 해와국가 일본을 먼저 축복하시는 조건으로 구보키 오사미 회장 부부를 참여케 하셨고, 사사카와 료오이치 씨가 초청돼 축사를 했다. 이들은 일본의 아담, 해와, 천사장 복귀형이었다. 이들이 참여한 조건이 일본 복귀의 중요한 전환시점이 됐고, 이후 공산당 타파계획이 본격적으로 진척될 만한 기준이 세워졌다. 또 유광렬(柳光烈)-오야마 기미코(大山君 子) 부부가 한 · 일간 인연으로 차후 포함됐다.
1968년 2월 23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사사카와 씨 부자와 일본 식구 중심으로 지구장 및 본부 부장회의를 주재하셨으며, 오후 6시부터 전국지역장회의가 열렸다. 이날 유효원 협회장이 3개 신문사 기자들과 축복결혼식에 대해 회견했다. 2월 24일 지구장, 협회 부장, 구보키 회장 등이 일본으로 돌아가는 사사카와 부자를 출영한 후 430쌍 축복결혼식 평가회를 가졌다. 2월 25일 주일예배로부터 종일 일본 식구 간증이 있은 후 탕감봉행사가 있었다.
2월 26일 일본 식구들이 정보학교로 견학을 갔다. 2월 27일 일본 식구들과 요미우리신문 특파원들이 휴전선 구경을 다녀왔으며, 저녁에 김인철 씨 댁에서 일본 신혼식구들 식사 후 참부모님 양위분께서 오셔서 말씀하셨다. 2월 28일 일본 식구들이 모두 휴전선에 다녀왔고, 저녁예배 후 참아버님께서 신혼부부들의 소감을 들으셨다. 2월 29일 한상국 씨 댁 에서 유효원 협회장과 일본 식구 모두 점심식사를 했다.
1968년 3월 1일 새벽경배식과 참아버님 새벽말씀이 시작됐다. 이날부터 9일까지 참아버님께서 최원복 선생, 유효원 협회장, 김영휘 부장, 유효민 씨, 구보키 일본회장을 대동해 430가정 탕감봉행사 차 전국지구순회 가정총회를 주재하셨다. 부산-대구-대전-광주-전주-청주-수원-춘천수택리 순이었다. 참아버님께서는 부부키스대회 후 탕감봉행사를 진행 하셨다. 특히 7일에는 축복행사에 참석한 일본 식구들이 수원집회에 참석했다. 순회종료 후 9일 밤 참부모님 양위분께서 일본 식구, 본부 간부들과 극장에 다녀오셨다.
참아버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하고 가정적 완성의 터전이 이뤄질 수 있는 시대로서 사탄의 참소권을 넘어서 하늘세계가 사탄세계에게 탕감시킬 수 있는 시대에 들어왔다고 하셨다. 430가정 축복으로 인해 세상 권세와 하늘 권세가 맞먹는 경계선에서 마주치는 때가 됐다. 따라서 대한민국이 자기 역량을 자랑하는 것보다 사상무장을 해야 된다. 이런 때 축복가정들은 종족을 수습하고 민족 앞에 자랑하며, 통일교회는 국가와 절충해 사상적, 이념적으로 수습해야 된다고 촉구하셨다.
3) 3년노정 출발과 서울 지역분할 배치
말씀에 따르면, 제1차 7년노정은 참부모님 해당 노정이다. 그때의 전도는 참부모님 집 짓는 데 협조한 것과 같이 참부모님을 위한 전도였다. 제2차 7년노정은 자녀들이 분가해 집 짓는 입장이다. 특히 1968년부터 1970년까지 3년간은 참부모님께서 1960년부터 3년간 축복으로써 세우신 가정복귀 기준을 세워야 한다. 지상 승리기준이 세워짐으로써 6천 년 간 뜻의 선봉에서 수고한 선조들이 재림역사를 할 수 있게 된다. 이 3년 노정을 걷고 나면 종족적 메시아 사명을 다한 입장이 되며, 제1차 7년노정과 합해 10년 노정을 걸은 결과가 된다.
제2차 7년노정에는 축복가정이 삼위기대 중심한 사위기대를 이뤄 12가정 복귀기준을 완결해야 된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성례식에 의한 열두 지파 가정 결실이 이뤄져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12가정이 하나의 틀로써 생활권을 편성해 서로 소통하고 연락하고 보고 싶어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제2차 7년노정 전 3년간 지성으로 일해야 했다.
1968년 3월 1일 공직자 인사이동이 있었다. 3월 3일 서울 유년주일학교 제13회 졸업식이 있었다. 3월 5일 참어머님께서 이정옥 씨를 대동해 희진님의 중동중학교 입학식에 다녀오셨으며, 7일 효진님이 상명유치원에 입학하셨다. 3월 10일 참아버님께서 새벽 가정식구집회에서 지시사항을 하달하시고 주일예배를 주재하셨다.
3월 14일 오스트리아의 베른하르트 마이어호퍼(Bermhard Maytholer) 선교사가 스위스에 개척전도를 나갔다. 14일 이날 참아버님께서 식구들과 함께 영화관람을 하셨으며, 특히 구보키 회장에게 순교당한 식구 석비문 ‘日本之情 忠孝之源(일본지정 충효지원)'을 휘호해 주셨다. 3월 16 일 참부모님 양위분께서 귀일하는 일본 간부들을 위해 공항까지 배웅하셨다. 3월 17일 새벽집회와 주일예배를 주재하셨다. 3월 19일 협회 부장 회의가 있었다. 3월 21일 참아버님께서 삼선교회에 다녀오셨다.
3월 25일 참아버님 명에 의한 특별집회에서 서울지구를 본부특별지역(서울특별지구장 겸 지역장: 이요한) 등 10개 지역으로 분할해 지역장을 선정했다. 3월 29일 제9회 부모의 날 기념행사가 거행됐다. 오전 7시 기념식에 이어, 11시 경축예배에서 참아버님께서 말씀하셨다. 오후 4시 부터는 제5차 전국지구대항 원리강의대회(1등: 전북지구 엄일섭) 및 제4차 영어원리강의대회(1등: 없음)가 개최됐다. 서울은 분할된 10개 지역 별로 속회를 형성해 인원을 배치하고 31일 환송예배 후 4월 1일부터 활동을 강화했다.
4월 1일 새벽 참부모님 양위분께서 최원복 선생, 이정옥 선생, 유효원 협회장 등 식구들과 태릉성지를 다녀오셨으며, 은진님 백일행사를 가졌다. 4월 3일 지구장회의를 주재하시고, 430쌍 축복결혼자 서울지역 식구 40일 기간 종료 후 부부완결식에서 말씀하셨다. 4월 4일 저녁 지구장회의에 이어, 5일 수택리에서 지구장회의가 있었다. 5일 서울지구 14개소에서 첫 속회를 가졌다.
특히 이 무렵 임도순 씨는 김원필 협회 경리부장이 겸직하던 용산지역장을 승계했다. 임 지역장은 부인 심우옥 씨가 청파동 본부교회에서 모심의 생활 중이었지만 함께 생활하기는 어려웠다. 참아버님께서는 늘 자정 넘어 취침하시고 새벽 3~4시면 기침하시기 때문에 한시도 개인적 시간을 낼 수 없었다. 태기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서대문구 승공연합과 용산구 교회 책임을 맡으면서 원효로에 강의소를 내어 강의를 계속했다. 승공강의와 원리강의를 하자 공장 청년들이 몰려와 전도가 잘 됐다. 나중 77쌍 축복식 때 21명을 축복받게 했다. 아무튼 그 무렵 참부모님께서는 청파동에 작은 방 두 개를 마련해 주시면서 홍순애 대모님을 모시고 살도록 해주셨다. 72가정 축복 후 처음으로 가정생활을 할 수 있었다.
부인은 전본부교회를 왕래하며 일했고, 임 지역장은 출퇴근하며 목회 일을 했다. 그 후 한 칸짜리 방을 얻어 가운데 장롱을 놓아 대모님을 모시고 생활했다. 너무 좁아 두 사람이 간신히 누울 정도였지만 감사하며 모시고 생활했다고 한다.
1968년 4월 5일부터 18일까지 14일간 제20회 협회수련회가 전본부교회에서 개최돼 67명이 참가했다. 제2차 7년노정 첫해 첫 수련회로서 의의가 컸다. 대외활동의 인지도 향상에 따라 금번에는 외부강사들을 다수 초청했다. 수련생들에게도 긍정적 결과를 얻었고, 강사 자신들에게도 인식전환의 계기를 마련해 줬다. 참아버님께서는 훈시말씀에서 이제는 누구에게나 기억되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다. 나아가 난세의 민족환경을 극복할 실질적 공인재료를 지녀 민족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4월 5일 일본 광언사(光言社)가 설립돼, 5월 25일 원리강론 판매 · 전도를 위해 발간기념 퍼레이드를 도쿄에서 벌였다. 4월 12일 자정 참부모님 주재 하에 전본부교회에서 기성가정 19쌍과 독신할머니 11명 축복식이 있었다. 4월 16일, 17일 참아버님께서 본부 부장, 지구장 연석회의를 주재하셨다. 4월 20일 참부모님 양위분께서 남산성지와 수택리 공장에 다녀오셨다. 4월 21일 동구릉 야외예배 후 식구들과 함께 수택리에 들리셨다. 4월 28일 주일예배를 주재하시고, 30일 서울 지역장회의에서 말씀하셨다.
5월 1일 5시 조례 후 남산성지에 다녀오시고, 오후에 협회창립 14주년 기념 특별예배를 주재하셨다. 5월 3일, 4일 참아버님 주재 하의 지구장 회의가 열렸고, 5일 태릉성지에서 주일 낮예배를 가졌다. 5월 7일 본부 부장회의가 있었다. 5월 8일 한선(韓仙)예술단 주최 제1회 연구발표회에서 문효진님 등 7명의 합창, 피아노 독주, 독창 등 발표가 있었다. 5월 9일 참아버님께서 국제승공연합과 선화어린이무용단 사무실을 방문하셨다.
4) 100일 특별기도와 협회수련
1968년 5월 10일부터 22일까지 참아버님께서 인진님, 흥진님, 최원복 선생 등을 대동해 전남 · 북, 경남 · 북 지구 11개 지역을 순회하셨다. 목포, 광주, 여수, 전주, 무주, 영주, 대구, 경주, 부산, 마산, 진주 순이었다. 같은 기간 유효원 협회장이 경기, 충남 · 북, 강원지구 11개 지역을 순회했다.
5월 20일부터 8월 30일까지는 '죽기까지 힘을 다하겠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전 식구 100일 특별기도를 실시했다. 참아버님께서는 뜻을 대한 이후에는 하늘이 끌고 들어가는 운명이므로 승패 결정 이전에 최대의 정성을 다해야 한다고 하셨다. 100일 정성기간은 이스라엘이 15배 이상 되는 아랍권을 격파했던 것처럼 안팎으로 무장해 소수인원의 단시일 굴복 격파작전이 필요한 전쟁시점이라고 강조하셨다. 이 무렵 김순화 씨의 경우 4월부터 7월 20일까지 삼각산(북한산) 기도원에서 특별기도를 실시했다.
1968년 5월 22일부터 6월 4일까지 제21회 협회수련회가 전본부교회에서 지역장 · 구역장 급 50명 참석 아래 열렸다. 참아버님께서는 7년노정에서 마을과 면이 규합될 기반이 됐는데 사탄 편에 놓쳤다면서 그 기반을 점령해야 한다고 하셨다. 강한 개척정신과 불타는 의분심으로 거침없이 밀고 나가 승리의 터를 닦는 것이 관건임을 강조하셨다. 이를 위해 선발대원 모두가 싸워 이겨야 한다고 독려하셨다.
5월 27일 제6회 만물의 날 기념행사가 거행됐다. 오전 7시 1차식은 21층에서 중심가정들 위주로 각종 청과들을 진설하고 참아버님 기도와 말씀 등으로 진행됐다. 이어 1층 성전에서 서울 식구들이 만원을 이룬 가운데 2차식을 주재하셨다. 식후 병과와 식사를 함께하며 하루를 즐겼다. 5월 29일 참부모님 양위분께서 최원복 선생을 대동해 지프차 편으로 춘천에 가셨다.
1968년 3월 철원지역장 시무 중 강원지구본부 전도부장 겸 경리부장으로 발령 받아 춘천으로 옮겼던 오윤성 씨의 사모 김학실 씨는 그때 1년간 참부모님을 세 번이나 모셨다고 회고했다. 지구본부를 깨끗이 청소해 놓으면 서울에서 춘천으로 떠나셨다는 전화가 왔다. 한 번은 청파동에서 출발하셨다는 연락을 받고 식사 준비를 하는데 어찌나 급했던지 김을 구우면서 설탕을 소금으로 착각하고 뿌려서 상에 올린 일도 있었다. 참어머님께서는 “강원도 풍습은 김에다 설탕을 바르냐?"고 하셨다. 그리고 양장점을 하면서 생활을 담당했기에 예진님과 인진님, 은진님의 원피스를 만들어 올리기도 했다.
그 후 남편이 협회 전도과장으로 발령 받아 서울로 올라왔다. 수저 하나도 가져올 게 없어서 식구에게 10만원을 빌려 답십리에서 전세방 한 칸을 얻었다. 춘천의 최정순 부인회장이 밥상을 사줬다. 친정어머니께 가서 쌀 몇 되와 밥그릇 몇 개만을 사 달라고 해서 가지고 와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협회에 출근하는 남편에게는 교통비도 나오지 않았다. 이웃에 있던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삯바느질을 하면서 생활했다. 그러던 어느 날 참아버님께서 시범 케이스로 시켜 봐야겠다며 친히 영등포에 철재 가게를 마련해 주셨다.
부산과 대구에서 오랫동안 헌신 활동한 박정민 씨는 1968년 참부모님 하사 1차 7년노정 공로상을 수상했다. 그 후 참아버님께서 대구에 있으라고 명하셔서 23년간 지내며 18년간 주일학생들을 지도했다. 매월 수련회 음악지도와 신앙지도를 하며 교구본부 살림살이를 돌봤다. 겨울철 수련회 때는 수련생들이 돌아갈까봐 마음 졸이며 조금이나마 편하게 해 주려고 깨끗이 청소한 다음 이부자리를 펴고 나면 이마에 땀이 흘렀다. 이불, 베개, 방석 하나라도 더 만들어 주기 위해 애썼다. 이렇듯 힘껏 교구본부 살림을 돌보면서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다. 뜻 앞에 바칠 것은 단 하나 생명뿐이었다.
1968년 3월 1일부로 춘성에서 강릉으로 발령된 김현철 지역장은 전도 활동과 함께 승공강의를 하며 각 지역을 다녔다. 그러던 중 양구지역장 시절 승공강의 문제로 다튔던 양구경찰서 정보과장이 주문진 파출소 소장으로 와 있어 만나게 됐다. 그 소장은 깜짝 놀라면서 “목사님이 나의 뒤를 따라다니는 것을 보니 참으로 하늘의 인연이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예전 일은 다 잊고 서로 잘 해보자고 해서 같은 마음이니 협조하면서 일하자고 했다. 그 후 친근하게 지내면서 서로 도우며 일을 했다.
5) 전국지역장 인사조치와 목회현장
1968년 6월 1일 참아버님께서는 전본부교회에서의 지구장회의에 이어, 2일 수택리로 들어가 지구장회의를 계속하시고 배구도 함께 하셨다. 그날 밤에 귀교해 3일에 회의를 계속하셨다. 6월 9일 새벽말씀과 주일 예배 말씀을 하셨다. 6월 10일 전국지역장 대거 인사조치를 단행하시고, 지구본부로 가는 부장들에게 훈시하셨다.
전국적 인사이동 때마다 교역자들은 이를 하늘의 명령으로 여겨 절대 순종했다. 그런 한편 고난의 날들 속에 결속된 식구들과의 끈끈한 심정의 관계는 무척이나 깊은 석별의 아픔을 겪게 했다. 김한수 당시 김해 지역장은 충남지구로 발령이 났다. 소식을 들은 식구들은 초상 난 듯 울음바다를 이뤘고, 아쉬워 울부짖는 식구들과 헤어져야 할 지역장 자신
도 가슴이 아팠다. 세 자녀 손을 잡고 개척자의 보람을 느끼며 정든 김해 땅을 떠났다. 이 때 경찰서에서 자동차를 내줘 이삿짐을 쉽게 옮기게 됐다.
한동수 당시 강진지역장의 경우, 소식을 접한 유지들이 한 지역장이 떠나면 다른 사람은 절대 발을 못 붙이게 할 것이라며 지구장에게 진정을 하고 협회본부까지 찾아가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보고를 받으신 참아버님께서는 그대로 놔두라고 하셨다. 서너 곳의 교회에서도 불가피한 사정을 토로하자 예외를 둘 수 없다고 하셨다. 아쉬워하는 유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북 남원으로 떠났다.
김현철 강릉지역장은 충북 제천지역장으로 발령 받았다. 전임자가 열심히 활동해 지역본부를 짓고 헌당까지 해놓았으나 남은 빚이 많았다. 임신한 사모는 감자로 연명했다. 공기총 판매 상으로 받은 10정을 팔아 빚을 갚았다. 하루는 중3년 성화학생이 찾아와서 지역장이 술을 먹고 여자를 만나고 비틀거리며 다니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며 따져 물었다. 공기총을 술집에서 팔고 나오는 것을 누가 보고 잘못 전한 말이었다. 때마침 그 장면을 우연히 봤던 어떤 식구가 해명해 줘 오해가 풀렸다.
경북 경산지역장으로 발령 받은 김진문 씨의 경우, ‘총값 유용하면 역적이다.'라는 말씀에 따라 삼시 순보리죽과 간장으로 살았다. 젓가락이 필요 없었다. 그때 맏이가 태어났는데 뼈에 가죽을 도배해 둔 것 같아 사람이 되지 않을까 염려됐다. 32세 첫 출산이었지만 가난이 복이 돼 힘 들이지 않고 낳았다. 지역장이 집에서 아기를 받았다. 그런데 자라면서 체격도 좋고 공부나 운동에서도 우수했다.
권우삼 씨는 430가정 축복 후 산성교회로 발령 받아 갔는데 월세 집이었다. 아내의 결혼반지를 팔고 집에서 가져 온 의복비, 경찰서 승공강사료 등을 합해 전세교회를 얻었다. 그런데 다시 창녕으로 발령돼 며칠 살지도 못하고 옮겨야 했다. 그때 산청 식구의 초대를 받아 저녁식사를 하다가 입과 코로 한 대접 정도 피를 쏟았다. 신임 지역장 부부와 식구들은 많은 눈물을 흘렸다. 또한 할 일 못 다한 자신이 원망스러워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렸다. 임지에 가서 죽자는 각오로 피를 토해가며 떠났다. 그러나 맞이해 주는 이 없는 강팍한 도성이었다. 남편을 따라 나선 아내의 슬픔을 달래면서 참아버님의 피의 노정을 실감하며 감사했다. 하늘이 필요하다면 살려 주실 것이라 생각하고 여전히 승공강의를 했다. 창녕여고에서는 각 학급에 들어가 강의해 몇몇 학생이 인연됐다.
창녕교회 역시 월세였다. 애써 전셋집을 마련한 후 가정방문 전도와 경제목적으로 사모는 화장품 행상을 시작했다가 1년 후 몸도 약해져 그만뒀다. 전세비가 모자라 쫓겨나서 보따리를 마당 가운데 모아 놓고 밤 새워 통곡하기도 했다. 하늘 찾아가는 길은 그렇듯 외로운 길이었다. 당시 영업소장 임채윤 씨는 공기총 사업, 새우젓과 게 사업을 통해 헌금하며 희생적으로 교회를 받들었다. 두세 명으로 출발했다가 떠나올 때는 30여 명이 전셋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승공활동으로 기관과의 유대관계 도 좋았다.
1965년 11월 강원도 특별전도단에 동원돼 횡성에서 활동하면서 430가정 축복을 받은 강종원 씨의 경우, 고생에 시달려 온 몸에 허물이 벗겨지고 손톱 발톱이 다 빠져 다시 나왔다. 축복 받고도 부인에게 양말 한 짝 못 사주고 개척교회에서 고생으로 출발했다. 임지는 산등성이 조그만 토담집인 서산군 대산교회였다. 학생과 청년 몇 명뿐이었고 헌금도 아무것도 없었다. 미취학 청소년들에게 중학과정을 무료교육하고 전도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친분을 갖게 됐다. 첫 아이 출산 때는 산파노릇을 했다. 48시간 산통 끝에 탈진해 낳아 애처로웠으나 자신이 다시 태어난 듯 기쁨과 감동은 무엇에 비할 수가 없었다.
황대성 씨는 430가정 축복 후 양양지역장을 거쳐 양구지역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가을철에 미리 식구들과 땔나무를 준비했다. 화천댐물이 양구읍내까지 들어와 있어 배를 빌려 식구 두 명과 3시간 정도 나가 산에서 나무를 했다. 교회에 도착하면 새벽 1~2시였다. 어느 날, 키보다도 더 높게 나무를 싣고 오는데 아무리 노를 저어도 배가 나가지 않았다. 넓 은 호수 한 가운데서 조금씩 가라앉았다. 물은 목까지 덮쳐 왔다. 참부모님 자식답게 자신을 회개하고 뜻 성사를 위해 기도하며 가자고 말했다. 인기척 하나 없더니 지나가던 낚시꾼에게 발견돼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했다.
교회에서 땔감을 자르고 있는데 하루는 전도관 관장 문인성 씨가 찾아왔다. 한두 번 만난 후 교대로 청강하며 교리 씨름을 했다. 결국 그는 원리에 감화돼 수련까지 받고 전도관 신도들을 전도하다가 발각돼 쫓겨 났다. 형용할 수 없는 핍박을 받았다. 강물에서 살리신 이유가 이렇게 하늘 사랑을 전하라는 뜻 아니겠는가 생각하며 감사했다. 문 관장은 그 후 777 가정 축복을 받고 공직의 길을 갔다.
송영석 씨의 경우, 군 복무 중 430가정 축복에 참여했다. 제대 후에는 전북지구 경리부장, 전도부장을 역임하면서 지구장을 도와 전북지구 성전 마련을 성공시켰다. 그리고 매일같이 원리수련 강의 등으로 자기 신앙을 돈독하게 연마시켜 나갔다.
6) 1968년 하계 40일전도와 칠월칠석 특별의식
1968년 6월 12일에는 14일 개최될 원연 주최 한 · 일대학생공대회에 참석한 오야마다 씨 중심한 일본 식구 6명이 내한했다. 6월 14일, 15일 참아버님 주재 하에 지구장회의가 열렸다. 6월 16일 참아버님 주일예배 말씀 후 일본 학생 내한환영회가 있었다. 6월 21일 사사카와 료오이치 씨와 구보키 일본회장이 내한했다. 6월 22일 참아버님께서 사사카와 씨와 구보키 회장, 유효원 협회장, 김인철 섭외부장, 황충운 사업부장, 엄덕문 선생 등과 함께 여의도, 난지도, 팔당, 워커힐 등을 시찰하셨다. 6 월 23일 참아버님께서 주일예배 말씀을 하셨으며, 오후에 사사카와 씨가 내교했다. 6월 24일 사사카와 씨가 귀일했다. 6월 26일 오전 6시 ‘세계만방이 찾아오는 식'을 거행했으며, 이날 일본 학생들이 전남, 경남·북 순회 후 상경했다. 6월 27일 3가정이 구보키 회장과 워커힐에 다녀오는 등 하루를 함께 지냈다.
1968년 7월 1일 참부모님 양위분께서 식구들을 대동해 남한산성에 다녀오셨으며, 3일 전본부교회에서 지구장회의를 주재하셨다. 7월 4일 양위분께서 많은 식구들과 함께 김포공항에서 구보키 회장을 출영하셨다. 7월 5일 한 · 일대학생승공대회에 참석한 일본 원연간부들을 데리고 영화 관람을 하셨다. 7월 6일 수원 서울농대에서는 일본 원연간부들을 맞이해 모임을 가졌다. 7월 7일에는 양위분께서 부산을 통해 귀일하는 일본원연 대표단을 서울역에서 환송하셨다.
7월 8일 지구장회의가 있었고, 양위분께서 수택리에 다녀오셨다. 7월 10일 알레사 올토메어(Alexa Altomare) 오스트레일리아 선교사 환송회를 가졌으며, 12일 출국했다. 7월 14일 하계전도 참가자 명단을 제출했고, 15일 전도활동을 대비해 식구 원리강의 연습시간을 가졌다. 7월 16 일 선화어린이무용단 간부모임이 전본부교회에서 있었으며, 18일 지구장회의가 있었다.
7월 20일부터 8월 28일까지 제2차 7년노정 첫 번째 하계 40일 전도가 실시돼 1천8백여 명이 참가했다. 동시에 대학생 승공계몽단이 결성돼 8월 20일까지 농어촌 계몽운동을 펼쳤다. 7월 21일부터 10일간 원연 주최 제3회 하계수련대회가 74명 참석 하에 강원도 북평해수욕장에서 개최됐다.
참아버님께서는 7월 20일 오후 4시까지 말씀을 주시고 전도임지로 출발시키셨다. 부모의 타락으로 인해 사탄이 참소하고 세계와 하늘땅 앞에 가는 길이 다 막혔다고 하셨다. 따라서 부모의 책임을 하기 위해서는 영계와 지상의 함정을 다 메워서 자녀가 가는 데에 사탄이 참소할 길을 개방해야 한다. 그러므로 1968년은 세계로 가는 통일의 문이 열리는 때로서 축복가정들은 종족복귀를 해야 하기에 전체동원명령을 한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누락되면 제2차 7년노정 출발을 못 보는 것이라고 우려하시며 독려하셨다.
오늘의 눈물은 과거처럼 원수들이 조롱하는 자리에서 흘리는 슬픈 눈물이 아니라 민족의 슬픔을 대신해 제사장의 입장에서 흘리는 눈물이라고 하셨다. 핍박받고 몰리는 것은 민족이 핍박받고 몰릴 수밖에 없는 슬픈 운명을 대신해서 당한다는 긍지를 가지라고 하셨다. 참아버님께서 몰리고 쫓기고 눈물 흘리는 자리에서도 민족의 비참한 길을 막기 위해, 하나님을 부여안고 사정할 수 있는 한 자리를 갖기 위해 통곡하며 참아 나오셨다. 그렇게 해서 이 민족을 다시 한 번 부활시키자고 토로하셨다.
참아버님처럼 가인 자녀를 양육하기 위해 굶더라도 밥을 먹이고 밤을 새워서라도 말씀을 전하라고 당부하셨다. 음력 8월까지만 잘 넘기면 공산당이 절대 못 나온다고 하시면서 입교 3년 이상 된 사람으로서 동원되지 않으면 교회도 못 나온다고 엄중히 경고하셨다. 이때 일본에서도 하계 40일 개척전도가 전국적으로 실시됐다.
목포교회 민경례 씨는 가정을 희생시키며 헌신 봉사했다. 이 해 하계전도활동을 마친 뒤 수많은 사연이 담긴 목포교회를 떠나 대전으로 전근 간 딸에게 갔다. 딸은 지성껏 효도했고 교회활동도 열심히 하면서 축복 받았다. 남편과 함께 있었던 아들도 고등학생이 돼 내왕하며 모자의 정을 나눴다. “네 엄마는 통일교회에 미쳐서 자식을 버리고, 가정도 버리고 나갔으니 잊어버려라!”는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지냈다고 했다. 그때마다 엄마가 얼마나 원망스러웠고 어린 마음에 상처는 얼마나 컸을까? 언제가 아들이 보고 싶어 초등학교를 찾아갔는데 멀리서 엄마를 보는 순간 쏜살같이 도망가 버렸다. 너무 허전하고 슬픈 마음에 발길을 돌렸었다.
그후 아들은 대학 재학 중 수련을 받고 순전단 활동을 마친 후 학사공직에 헌신하며 축복받고 효도했다. 지난날의 고통과 슬픔이 크나큰 축복으로 바뀌었으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통일교회 안에서 살아 숨쉬고 뜻을 위해 미력이나마 바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1968년 7월 21일 참아버님께서 새벽말씀과 주일예배 말씀을 하시고 예배 후 일본 사사카와 선생과 일하던 박의사에게 4시간 넘게 말씀하셨다. 7월 24일부터 30일까지 참부모님 양위분께서 효진님, 심우옥(명옥), 박상돈, 박윤서 씨 등을 대동해 청평에서 낚시를 하셨다. 7월 29일에는 부산을 통해 27일 입국한 일본 식구 와타나베(渡部) 씨가 상경했다.
강순애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참아버님께서는 여름에 청평에 많이 가 계셨으므로 수택리에서 부식조달에 열심이었다. 청평에서 열심히 낚시하시고 방울낚시로 잉어도 낚으시면서 깊은 생각을 하셨다. 달밤에는 늦도록 낚시하며 자연의 향취에 젖기도 하셨다. 참어머님과 효진님은 옆에서 재미있게 해 드리기도 하시며 식사 때는 소박한 찬이지만 맛있게 잡수셨다. 홍수 때문에 텐트를 몇 번씩 옮기기도 했다. 뜻이 아니면 도저히 맛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감사하고 황공할 뿐이었다.
1908년 7월 31일(음력 7월 7일) 오전 7시 전본부교회에서 재경가정모임을 통해 참부모님께서 칠월칠석행사로서 하나님의 날 선포 후 7개월 총정리의식'을 거행하셨다.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6일 기간에 창조한 모든 것을 잃고 안식수 7수를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복귀역사는 6천 년 역사로 6수를, 7천 년 역사로 안식수 7수를 찾아 완성해 재출발 8수 연한을 찾아 나오신다. 이것이 기독교의 소망인 천년왕국, 즉 세계적 부활권이다. 이러한 역사를 거친 후 안식권을 얻어 비로소 하나님을 모시고 자녀의 공인을 받아야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할 수 있는 안식을 갖는다.
1968년 7월은 아담과 해와가 지음받아 거쳐야 했던 7수 과정을 넘어 가는 달이다. 참부모님과 식구들은 아버지인 하나님과 자녀인 아담 해와와 마찬가지 입장이다. 1월부터 7개월은 7년노정에 해당하는 7천 년 운세 복귀기간으로서 이 기간을 넘어서면 새로운 시대가 전개된다. 이 기간 중에 하계 40일 전도기간을 보내는 것은 천적인 의의가 있다. 식구들이 처한 자리는 유대교가 예수님을 받들고 종족과 민족이 일치돼 출발해야 했던 자리와 같았다. 자녀의 사명을 다해 타락한 아담가정을 복귀한 형태로서, 이후 7년노정을 거쳐 나가면 부모가 되는 것이라고 하셨다.
1968년 8월 1일 참부모님 양위분께서 새벽 경배식 후 식구들과 남산 성지에 다녀오셨다. 8월 5일부터 18일까지는 양위분께서 효진님, 최원복 선생, 김영휘 총무부장 등을 대동해 지프차(6742) 편으로 하계전도대원 격려차 전국순회를 하셨다. 의정부-수원-천안-대전-전주-순창-광주-순천-진주-마산-부산-대구-안동-점촌-청주-원주-강릉-춘천-구리 수택리-본부 순이었다. 하루 16시간까지 말씀하시며 혀가 돌아가는 때까지 일해야 한다고 하셨다.
협조하는 의미의 것이어서 식구 자신의 책임은 없었다. 제2차 7년노정부터는 자신을 중심하고 믿음의 부자관계가 되기에 전도 기간 인연 맺은 자녀를 그냥 둬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셨다. 믿음의 자녀를 잘 지도하고 키우지 못하면 나중에 책임추궁 받게 된다. 특히 자기 종족권 내에서 해산한 아들딸을 고아로 만든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이번에 전도한 식구는 자기가 품고 길러 줘 어떻게든 전도자를 부모같이 모실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제2차 7년노정은 식구들이 가야 할 노정이다. 어떻게 하면 초창기의 뜻대로 가게 할 수 있을까하는 것이 문제였다. 지방 지역장 이동의 의의도 여기에 있었다. 참아버님 전국 순회 결과는 대체적으로 안심될 정도였다. 참아버님께서는 금년 8월만 잘 넘어가면 1970년대까지 연결시킬 수 있다고 하셨다. 그때에 가면 일본인을 세워서 책임 지워 일본에 다리 를 놓는 제2차 작전을 전개시킬 계획이라고 밝히셨다.
1968년 8월 전국 대이동 방침에 따라 공주에서 영월로 발령된 이연훈 씨는 제천교회에 들러 하룻밤을 보낼 때 파란 강물에서 조그마한 붕어들을 밤새 잡는 꿈을 꿨다. 1970년 3월 영월을 떠날 때까지 몽시대로 전도가 잘 됐다. 주로 중·고등학생들과 처녀들이 많이 입교했다. 공기총 관매도 계속했다. 지역본부에서 생활하는 식구들과 공장지대를 찾아다니며 판매했다. 정문 수위들에게 내쫓기는 수모를 반복해야 했다. 각 기관과 지역 유지들과의 유대강화를 위해 노력한 결과 기관장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종교 지도자들과의 관계개선에도 정성을 쏟았다. 1968년 가을 영월군 종교협의회가 창립돼 매월 교대로 만찬을 베풀고 친목을 다져 나갔다. 1969년 임원 개편 때 덕포 중앙감리교회 목사의 추천으로 제2대 회장에 추대됐다. 뜻밖의 일이었다. 전도관과의 관계도 이뤄져 청년 두 명이 전도돼 축복가정으로 결실됐다. 찌든 지역생활이었지만 식구들의 눈물어린 정성이 있어 활기 넘친 활동이 가능했다. 영월지역은 학생회와 청년회를 중심으로 부인회가 뒷받침이 돼 부흥의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7) 1968년 하반기 주요행사
1968년 8월 24일 참아버님께서 재일교포 거류민단장 정동화 씨에게 말씀하셨다. 8월 29일 영국에서 전 사라와크 왕 앤터니 브룩 경과 모니카 여사가 영국 등지의 영적현상에 대한 질의 차 내방했다. 참부모님 양위분께서 유효원 협회장, 최원복 선생 등을 대동해 김포공항에 나가 맞아주셨다. 8월 30일(음력 7월 7일) 제1차 7년노정 100일 기도 및 40일 동원수료식을 주재하시고, 앤터니 브룩과 모니카 상대로 말씀하셨다.
1968년 9월 1일 참아버님께서 주일예배를 주재하셨다. 9월 2일에는 공기총 판매요원 특별모임에서 말씀하셨다. 9월 2일 이날 앤터니 브룩 경과 모니카 여사가 입국 5일 만에 출국했다. 9월 3일 참아버님께서 청평에서 지구장회의를 주재하신 데 이어, 4일 청평낚시터에서 지구장 낚시대회(1등: 홍성표 지구장)를 개최하셨다. 9월 5일 일본협회 사업부장 이시이 미츠하루 씨가 내한했다. 9월 6일 공기총 판매요원 수택리 공장 견학이 있었다. 9월 8일 주일예배 중 이시이 씨의 보고가 있었다. 9월 9일 참아버님께서 크리스찬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열린 신흥종교연구모임에서 인사말씀을 하셨다.
9월 10일 일본협회가 대폭 인사이동을 단행했다. 9월 15일 사사카와 요헤이(川陽平) 씨가 내한해, 오후 남산음악당 선화어린이무용단 공연석상에서 참부모님을 뵈었다. 9월 16일 사사카와 씨와 이시이 씨가 유효원 협회장과 함께 무역박람회를 시찰했으며, 오후에 수택리에서 참아버님을 뵙고 통일기계제작소를 둘러본 뒤 밤늦도록 말씀을 들었다.
9월 17일 참부모님 양위분께서 귀일하는 사사카와 씨를 환송하셨다. 이날 오후 8시 30분 리틀엔젤스 무용단이 제4차 해외순회공연차 멕시코로 향발, 1969년 2월 4일까지 4개국에서 공연을 펼쳤다. 참아버님께서 공항에 나가 환송해 주셨다. 특히 68멕시코 올림픽 민속예술제에 정부 대표의 일원으로 참가해 민속예술제에도 시상이 있다면 단연 금메달감' 이라는 격찬을 받았다. 「뉴욕타임즈」는 ‘경이적인 무용단'이라고 평했으며, 워싱턴 내셔날 프레스 클럽에서 연 4차 초청공연으로 감사장을 받기도 했다.
9월 18일 참아버님께서 전본부교회에서 지구장회의를 주재하셨으며, 19일 참부모님 양위분께서 효진님과 낚시를 가셨다. 9월 21일 양위분께서 청평에서 본부 부장 부인들 회합을 주재하셨다. 이날 독일 에센에서 40일 전도가 개시됐다. 9월 25일 출국하는 호킨스(Hawkins) 씨를 위해 식구들이 공항으로 배웅을 갔다. 참아버님께서는 9월 26일 비자문제로 미대사관에 다녀오시고 삼오정에서 이시이 씨를 만나 말씀하신 후 낚시터로 가셨다. 9월 27일 유효민 씨와 이시이 씨가 출국했다.
1968년 10월 1일 새벽집회와 남산성지 기도 후 참부모님 가정이 낚시터로 가셨다. 10월 3일 가정집회에서 말씀하셨다. 10월 3일부터 12일까지 10일간 제1회 원연축제가 열려 체육대회(경희대 노천극장), 학예의 밤(YWCA강당), 시화전(남산 소월시비), 가든파티 등을 가졌다. 10월 5일부터 참아버님께서 청평 낚시터에서 지구장회의를 주재하셨으며, 특 히 6일 큰 잉어를 낚으시어 밤에 큰 잔치와 윷놀이를 가졌다. 10월 7일 양위분께서 지구장들을 대동해 귀교해 오전 회의를 하신 뒤 함께 무역박람회에 다녀와 삼오정에서 저녁식사를 하셨다. 10월 8일 참아버님께서 인진님, 흥진님과 함께 낚시하러 가셨다. 10월 12일 본부 부장회의가 있었다. 10월 14일 참부모님 주재 하에 이남출감(13주년) 및 이북출감(18주년) 기념예배를 서울 종묘에서 가진 후 창경궁을 들러 오셨다. 10월 15일 서울 지역장회의, 부장회의가 있었다.
10월 17일부터 25일까지 참부모님께서 각지 명산에서 개최된 전국 지구별 가정총회 격려 차 지방순회를 하셨다. 17~19일 김영휘 총무부장을 대동해 강원지구(설악산) 가정총회를 주재하셨다. 이어 최원복 선생, 유효원 협회장, 김영휘 총무부장, 이요한 목사를 대동해 20~22일 경기 · 충 남 · 충북지구(속리산) 총회를 주재하셨다. 연이어 22~24일 전남·전북 지구(내장산), 24~25일 경북·경남지구(해인사) 순으로 순회하셨다.
참아버님께서는 격려말씀에서 하나님과 참부모님 중심한 축복의 역사성과 축복가정의 가치와 책임을 역설하셨다. 또한 자녀들이 인정할 수 있는 전통적 가정생활을 촉구하시며 종족적 조상의 책임을 완성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1968년 10월 23일부터 27일까지는 성화학생회 창립 제13주년 기념 제4차 전국성화학생총회가 210명(남자 147명, 여자 63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본부교회에서 개최됐다. 원리강의대회(1등: 충남 김상준), 웅변대회 (1등: 경북 신호철) 등에 이어 체육대회가 창충단공원에서 축구, 릴레이, 기마전, 지구기 쟁탈전 등의 종목으로 열렸다. 참아버님께서는 10월 26일 순회귀환 후 27일 성화학생들이 동참한 가운데 새벽 말씀을 하셨다. 이어 주일예배 때 김영휘 총무부장이 순회보고를 했고, 성화학생총회 시상식이 있었다.
참아버님께서는 이날 '4만 명 배가운동과 3천만의 불침번'을 활동목표로 정하시고 격려해 주셨다. 제1차 7년노정은 장년과 청소년을 위한 길, 제2차 7년노정은 에덴동산의 아담 해와가 행진하는 것과 같은 길이니 씩씩하게 나가야 한다고 독려하셨다.
1968년 10월 29일 참아버님께서 이진태 지구장의 소개로 안일력 씨를 만나시고 정도술체육관을 허락하셨으며, 유 협회장이 함께 가서 시찰하고 사범들과 점심식사를 같이했다. 10월 31일 서울대 문리대 강당에서 개최된 기독학생회 주최 신사훈 씨의 유사종교비판 강연회에 협회 간부들이 다녀왔다. 이날 추상춘 씨가 일본에서 찍은 8mm 필름을 시사했다.
1968년 11월 1일 새벽예배 후 남산성지에 가셨다. 일본 고베(神戶)교회 나카무라(中村) 목사가 유 협회장 인도로 성지에 와서 인사했다. 참부모님 양위분께서는 최원복 선생을 대동해 수택리 성지와 공장, 춘천교회에 다녀오셨다. 이날 어제에 이은 신사훈 씨의 통일교회 비판강연회에 울분을 품은 전도관 김 집사가 인분세례를 주어 문제가 야기됐다.
11월 2일 참아버님께서 수택리 공장에 다녀오셨고, 참어머님께서는 심우옥 씨와 시내에 출타하셨다. 이날 유효원 협회장 가족이 희진님을 모시고 워커힐을 들러 저녁식사와 영화관람을 같이했다. 11월 3일 참아버님께서 새벽말씀을 하시고 주일예배 후 가정들을 소집해 말씀하셨다. 11월 4일 수택리 공장에 다녀오셨다. 11월 5일 지구장회의를 주재하시 고, 6일 회의 후 오후에 지구장과 본부부장들을 대동해 수택리 공장에 다녀오셨다. 11월 7일 효진님과 함께 수택리 공장에 다녀오셨다. 11월 8일부터 지구 총무부장회의가 있었으며, 특히 9일 삼오정에서 점심식사 를 함께 하셨다. 11월 10일 새벽말씀을 하시고, 밤 예배 후 말씀하셨다.
11월 12일 수택리 공장에 다녀오셨다. 11월 13일 수요일 밤 예배 후 구보키 일본회장의 보고가 있었고, 참아버님께서 공기총 판매 수금에 대해 말씀하셨다. 11월 14일 참아버님께서 수택리 공장에 다녀오셨다. 11월 15일 구보키 회장과 시내에 다녀오셨으며, 이날 협회기관지 월간 회보(會報)가 창간됐다. 11월 19일 총판매 요원들에게 말씀하시고, 밤 지 구장회의를 주재하셨다.
11월 20일 제9회 자녀의 날 기념행사를 주재하셨다. 세계 각 선교국으로부터 무수한 축전, 축하 카드 및 감사헌금이 답지한 가운데 오전 7시부터 2층에서 각종 햇곡식을 마련해 1차식을 거행했다. 9시부터 1층 성전에서 일반협회원 중심의 2차식을 주재하셨다.
11월 22일 참아버님과 식구들이 김포공항에 나가 출국하던 구보키 회장을 환송했다. 이날 일본 교토대학 원연 주최로 관서대학대회가 개최돼 3천여 명이 참석했다. 11월 25일 참부모님 양위분께서 인진님, 흥진님, 최원복 선생과 함께 수택리를 들러 춘천에 다녀오셨다. 11월 28일 참아버님께서 총판매 요원들을 독려하셨으며, 29일 수택리에 들러 수원지구본부를 다녀오셨다. 11월 30일 3가정이 희진님과 함께 삼오정에서 참부모님 양위분을 모시고 식사했다.
12월 1일 새벽예배 후 남산성지에 다녀오시고 희진님, 예진님, 효진님, 최원복 선생, 유효원 협회장, 김인철 사장 등을 대동해 수택리 공장에 다녀오셨다. 주일예배 후 말씀하시고, 밤에도 말씀하신 후 세계선교국 보고를 들으셨다. 12월 2일 본부 부장들이 지방 공기총판매 실정파악과 경리감사 차 내려갔다. 12월 3일 참부모님 양위분과 최원복 선생, 유효원 협회장이 대한극장 앞 정도술(正道術) 체육관(관장: 안일력)에 다녀오셨다.
12월 5일 밤 전본부교회에서 본부부장과 지구장 연석회의를 주재하셨다. 12월 6일 새벽 수련생들에게 말씀하시고 지구장들을 대동해 수택리로 들어가 회의하신 뒤 귀경, 영화관람을 하셨다. 이날 12월 6일 경남 지구 문화부에서 지구간행물 「聖地(성지)」를 발행했다. 12월 7일 총판매 요원들에게 불고기 파티를 열어 격려해 주셨다. 12월 8일 새벽말씀을 하시고 낮 예배 후 입교 6년 된 식구들만 모아 말씀하셨다. 예진님, 효진님, 인진님과 함께 수택리 공장에 다녀오셨다. 12월 10일 이시이 씨가 내한 했다. 12월 12일 흥진님 탄생 2돌 행사를 가졌다. 12월 15일 참아버님께서 수택리 공장 식구들에게 말씀해 주셨다. 12월 16일 구보키 일본회장과 사사카와 부자가 내한했으며, 오후 3시 참아버님과 식구들 참석하에 정도술 체육관 개관식이 있었다.
12월 18일부터 22일까지 5일간 제주도에서 한 · 일친선수렵대회가 열렸다. 참아버님께서 간부 다수를 대동해 참석하셨다. 일본에서는 2진으로 나뉘어 부산을 통해 입국, 제주도에 도착했다. 사사카와 씨 부자 주도로 일반 엽총부 100여 명이 동참해 한국 사회기관 등의 큰 관심거리가 됐고, 공기총부는 50명이 참가했다. 일본 간부 전원이 내한해 일본 공기 총 판매 붐을 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이미 공기총 2천5백 정이 수출돼 있었다.
12월 22일 오후 참아버님께서 간부들과 사사카와 씨 등 일본 요원들을 대동해 김포공항을 통해 귀경하셨다. 참어머님께서 공항에 마중 나가셨으며, 귀교 후 일본 간부단 내한 환영회를 가졌다. 12월 23일 한 · 일승 공대회가 신문회관에서 열렸고, 24일 반공연맹 세미나가 있었다. 12월 24일 사사카와 씨가 귀일했다.
12월 25일 일본 식구들이 수택리 공장을 견학했으며, 26일 중앙정보 학교와 신문사 등을 방문했다. 12월 27일 참부모님께서 일본 식구들을 데리고 미도파에 가시어 모두에게 코트를 사주시고, 영화 관람을 하셨다. 12월 28일 일본 식구들이 삼팔선을 시찰했다. 12월 29일 참아버님께서 주일새벽 말씀을 하셨으며, 주일예배에는 일본 식구들 간증이 이어졌 다. 일본 식구들은 부산으로 내려가 30일 귀일했다. 12월 중 한 · 일 원연회원 간담회가 있었다.
12월 20일부터 동계 40일 전도가 출발됐다. 참아버님께서는 전도하지 않고 저나라에 가면 부부끼리 붙들고 통곡하게 된다며 특권계급 없이 총출동할 것을 독려하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