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로의 대동맥 시베리아 횡단철도 - 01/13.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
아르촘 공항에서 56km떨어진 블라디보스토크는 흔히 연해주라고 부르는 프리모르스키 크라이(Primorsky Krai)주 주도로서 길이 30km, 폭 12km의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 반도 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러시아어로 블라지보스또끄는 16세기 러시아의 동방진출을 의미하는 ‘동방정복(블라지=정복, 보스또끄=동쪽)’이라는 복합어이다. 우리말로는 자리한 주의 이름을 따서 ‘연해주(沿海州)’라고 하나, 중국어로는 ‘하이션웨이(海蔘威)’라고 한다.
그 뜻에 관해서는 몽골어의 ‘해변가의 작은 어촌’이라는 설과, ‘해삼이 많이 나는 저지(低地)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원, 명대까지만 해도 ’영명성(永明城)‘이라고 불러 온 이곳은 17세기 중엽 러시아의 동발진출 전까지만 해도 청나라 길림부도통(吉林副都統)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가 러시아와 만청 간에 영토분쟁이 일어나 싸우지만 무능한 만청은 러시아와 불평등한 ’베이징 조약(1860)‘을 맺고 블라디보스토크를 포함한 우수리(Ussuri)강 이동 약 40만 평방길로미터에 달하는 넓은 땅을 러시아에게 내어주고 만다. 이즈음 러시아는 비밀리에 군대를 파견해 초소를 지으면서 항구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주를 시작한다. 얼마 안가서는 시로 승격시킨다.
개척리(開拓里)
블라디보스토크에 처음으로 발을 붙인 고려인(러시아어로는 카레이스키, 즉 한인)이 살았던 곳이 바로 개척리였다. 한인들의 긴 이주사와 더불어 뼈저린 애환이 서린 고장이다. 원래 19세기 중엽부터 극동 시베리아 방면으로 오가는 사람들은 있었으나, 가족 단위로 본격 이주를 시작한 것은 1863년부터이다.
인접한 함경북도의 13호 농가가 노브고로드(Novgorod)만 연안의 포시예트(Posyet)로 최초로 이주한 이래 이곳을 중심으로 수이펀강(綏芬河) 유역과 우수리스크(Ussuriysk), 그리고 하바롭스크 등의 지역으로 이민이 속속 이어졌다. 급기야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극동지역에만도 이민자가 20여만 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이 모태가 되어 고려인들의 거주지와 활동영역은 전 러시아로 확대되었으며, 그 수는 약 50만 명으로 추산된다.
개척리 마을은 한인들의 고달픈 이주역사를 고발하는 현장이다. 개척리는 1873년 군항의 개항과 더불어 개척된 마을이다. 해안가에서 300m 떨어진 마을은 당시로서 블라디보스토크의 중심부였다. 지금은 프라그니치나야 거리라고 하며 상점과 운동장, 스포츠센터 등 현대적 시설물들이 빼곡이 들어서 그 옛날의 모습은 완전히 지워졌다. 당시 이곳에는 민족 언론을 주도하던 ‘해조신문사(海潮新聞社)’와 대동공보사(大同公報社)‘가 자리하고, 성명회(聲明會)’라는 반일운동 조직과 한인학교도 함께 있었다.
이상설, 유인석 등 기라성 같은 지도자들의 눈부신 활동무대였다. 고려인들의 활동기세를 우려한 러시아 당국은 1911년 봄 난데없는 장티푸스 박멸을 구실로 삼아 이곳에서 고려인들을 강제로 철거시키고 이곳을 기병단의 병영지로 만들었다. 보금자리를 빼앗긴 고려인들은 당국이 지정한 도시 서북 변두리의 생소한 마을, 신한촌으로 옮기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낯선 땅에 삶의 뿌리를 내리는 데에는 고통과 슬픔이 앞서게 마련이다. 그러한 고통과 슬픔 가운데에서 가장 참기 어려웠던 것은 제정러시아 당국이 이른바 ‘황화(黃禍)‘라는 사시(斜視) 속에서 가하는 차별과 박해였다. ’황인종으로부터의 화(禍)‘ 라는 ’황화‘는 황인종, 즉 아시아인에 대한 유럽인들의 해묵은 인종차별이다.
1906년 극동지방 총독으로 부임한 운테르베르게르(P. F. Unterberger)는 고려인의 인구 증가를 ’엄청난 위험‘으로 간주하고 이민 금지, 관유지 임대 금지, 어장의 고려인 채용 금지 등 각종 제재조치를 취한다. ’고려인들은 러시아인들이 도저히 개간할 수 없는 돌밭을 개간하고 나서는 인근 지역을 야금야금 잠식하면서 친지들을 데려다가 새로운 부락을 만들곤 한다.
그래서 10년 안에 러시아인은 그곳에서 쫓겨나게 마련‘이라는 것이 총독의 판단이다. 또한 ’황화‘의 주범인 고려인의 존재는 극동 안보에도 위협이 되므로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37년 18만 극동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는 바로 이러한 시각의 연장선에서 일어난 비극이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기죽지 않고 삶을 꿋꿋이 개척해 나갔다. 그들의 근면성과 성실성, 강인성은 심지어 총독을 자문하는 지방 경찰서장들까지도 공히 인정하는 바였다고 한다. 술을 마셔도 난폭하지 않고, 중국인들처럼 강도나 살인하는 일은 거의 없으며, 러시아인 보다 청결하다. 아무리 험악한 땅이라도 그들의 손에 들어가기만 하면 농경지가 되며 생산성은 중국인의 2배나 된다. 이것이 고려인들에 대한 러시아 현지인들의 일치한 평판이었다.
우정(友情) 마을
미하일로프카군에 있는 이 마을은 중앙아시아에 강제이주 했다가 나서 자란 땅인 극동으로 되돌아오고 싶어 하는 동포들을 위해 한국주택건설협회가 집을 지어주기로 하고 조성된 마을이다. 계획은 1천 세대 분을 지어주기로 했는데 90년대 말 금융위기가 닥쳐오면서 지원을 포기해서 지금은 동북평화재단과 일부 자원봉사단체에서 돌보고 있다고 한다.
공사가 지지부진해서 이제 겨우 30여 세대만 입주한 형편이다. 다른 5개 마을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바람막이도 제대로 안 된 집에 입주한 사람들은 농사도 제대로 짓지 못하고 얼굴에는 수심기만 가득하다. 고사성어에 귀곡천계(貴鵠賤鷄)라는 말이 있다. ‘고니를 귀하게 여기고 닭을 천하게 여긴다.’라는 뜻이나 ‘먼 데 것을 귀하게 여기고 가까운 데 것을 천하게 여기는 것은 인지상정’이라는 말로서 ‘집 떠난 사람을 더 생각하라’는 훈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