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원 - 십자가를 내가 지고 - 7. 축복과 순회사 시절
1 모두 열심히 전도들을 하기 때문에 나만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동계 전도를 마치고 봄철 옷으로 바꾸어 가지고 다시 임지로 향하려고 선생님께 인사차 본부교회에 갔다. “선생님 저 내일 다시 임지로 전도 나가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전도는 무슨 전도, 가만있어, 시집을 가야지” 하시는 것이었다. 가지 말고 기다리라는 말씀에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도 깜짝 놀라며 아! 축복이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2 꽃이 피는 봄날, 선생님께서는 전국의 지구장들을 위시하여 이대 퇴학생인 명원 회원들을 광릉으로 해서 비원, 창경원으로 데리고 다니시며 이모저모로 시험도 하시고, 누가 누구와 배필이 되면 좋을까 살펴보시는 듯하였다.
3 그때 명원 회원들이 먼저 약혼이 되었는데 나는 당시 충청 지구장 이재석씨와 노아 가정으로 선정되었으며, 다음으로 야곱 가정 , 아담 가정을 선택하시어 역사적인 36가정 축복식이 5월 15일에 거행되었다. 흰옷을 입은 식구들의 찬송 소리에 발을 맞추며 부모님께서 쌍수를 들어 축복하시는 가운데 감격의 순간을 맞았던 것이다.
4 축복식이 다 끝난 후 우리 명원 회원들의 숙소(지방 여학생들이 합숙하는 집)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자다가 요란한 소리에 놀래어 깨어보니 우리를 핍박하던 민주당 정권이 무너지고 박정희 장군을 중심한 5.16혁명이 일어난 것이었다.
5 부모님의 성혼식이 있은 다음날에는 4.19의거가 일어나 우리를 못 살게 굴던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그와 함께 박마리아씨 가족들도 목숨을 끊게 되었다.
6 3일간의 행사를 마치고 각자 임지로 가게 됐다. 나는 처음으로 실시되는 전국 순회사로 발령을 받았는데 경상북도가 나의 임지로 결정되었다. 선생님께서는 한 10일간 신랑이 있는 대전에 다녀서 가라고 하시며 없는 살림에 준비하느라고 고생할 테니 편지나 전화 연락도 하지 말고 그냥 가라 하시면서 김수완 부인 식구님과 같이 대전으로 보내시는 것이었다.
7 교회에 도착하니 문이 잠겨 있었다. 조금 있으니 청년 식구가 와서 지구장님과 식구들이 유성온천 가는 도중에 있는 유천에서 자갈을 모으고 있다고 하였다. 지구 본부 교회를 좀 더 큰 곳으로 옮기기 위하여 자갈을 채취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며 나간 뒤 얼마 있다 남편 되는 지구장과 송복순 부인 식구가 나타났다. 그의 모습을 보고 선생님께서 연락하지 말고 가라고 하신 뜻을 알게 되었다.
8 대구에는 5월 30일에 도착하여 6월 1일부터 경상북도를 순회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군, 읍, 리까지 어린 중학교 학생들까지도 나가있어서 한 곳도 빼놓지 않고 순회를 하였다. 경북은 수해지구로서 냇물이 강을 이루어 가방을 머리에 이고 냇물을 건너던 일이며 하루에도 몇십 리씩 걸어서 발이 붓고 발바닥이 아파서 더 걸을 수 없었던 일이 생각난다. 그때 가장 무서웠던 일은 시골 전도소로 가는 도중 산속에서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다.
9 그렇지만 순회사를 기다리고 있을 어린 대원들을 생각하여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도 마다 아니하고 떠났었다. 도중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영주교회를 찾아가니 수해를 입고 교회 간판만이 남의 집 담 밑에 걸려져 있지 않은가. 비록 전도사는 없어 만나지 못했지만 간판이라도 보니 반갑기 한이 없었다.
10 몇 명의 식구를 만나보고 기차로 풍기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임병숙(36가정)씨를 만나서 그곳의 소식을 듣고 다시 부석사로 향하였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 깜깜하고 길은 울퉁불퉁하여 걷기 힘든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마침 수해지역을 찾아가던 경찰서장을 만나 서장의 짚차를 탈 수 있게 되어 평안히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
11 봉화군에는 송방송, 안병화, 이창현, 주병규씨가 나누어 전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송방송씨는 예전에 벼슬하던 집에 숙소를 정하고 머물러 있으면서 많은 청년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었다. 이 당시에는 보리쌀로 만든 미숫가루를 가방에 넣고 다니며 먹던 시절이었다.
12 그런데 잠깐 앉아 있는 동안 어느새 차렸는지 교자상에 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먹을 것이 차려져 나왔다. 어떤 것을 먼저 먹어야 좋을지 또 이 많은 음식을 춘양면에서 고생하고 있는 주병규씨(주병규씨는 감자도 없어 못 먹으면서도 순회사가 오면 대접하려고 먹을 것을 남겨 놓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먹을 것이 없어 파잎만 데쳐서 먹는다고 한다)에게 주면 얼마나 잘 자실까 생각하니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13 그래도 나는 가는 곳마다 전도대원들에게 미숫가루와 약간의 돈을 주고 오는 것이 즐거웠고, 더 기쁘게 생각했던 일은 내가 어떻게 이 시대에 더군다나 한국에 태어나서 말씀의 실체이신 선생님을 모실 수 있게 되었는지 또 그분의 사상, 신앙,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을 뭇 생명들에게 전할 수 있게 되었는지 이런 일만 생각하면 매일같이 몇십 리 걷는 것도 괴롭지 않았다.
14 또 내가 지치지 않고 순회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나의 주체인 사랑하는 남편의 편지가 내가 가는 곳마다 이미 도착되어 있어서 전도대원들도 내가 올 줄 알았다면서 편지와 함께 반겨주는 것이었다.
15 예천, 점촌, 문경, 상주, 김천, 선산, 왜관, 대구, 경산, 청도, 청송, 영양 한 곳도 빠뜨리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경북을 순회하였으며, 안동에서는 이순신 장군을 도와준 유성룡 장군의 집을 찾아가서 그곳에 있는 완고한 유생들과 대화하였다. 새로운 시대의 새말씀이 나왔으니 앞으로 한국도 희망이 있는 나라가 될 것이며 세계 오색인종이 한국으로 몰려오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정말 감동을 느끼며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