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수 이야기
글쓴이 : 박 경 수
글쓴때 : 이천공백일십삼년 ⌜여름⌟
[차례]
♠ 글쓴이 의 말
Ⅰ. 회고(回顧) 편
Ⅱ. 뿌리 편
Ⅲ. 여행(旅行) 편
Ⅳ. 나는 지금에 산다.
♠ 글쓴이의 말
2013년 한 여름 날을 모두 바쳐 글을 써놓고도 누가 읽어볼 까봐 부끄럽다.
무엇하나 내놓을 것 없고, 그럴싸한 직위를 가져본 적도 없고, 보여 줄 것 없는, 정말 하잘것없는 부끄러운 인생사이며 이를 인생사(人生史)로 놓고 논하는 것조차도 수줍고 실패한 미약한 인생 삶이다.
글과는 가깝게 하지 않아 글재주도 없기 때문에 굳이 전문 작가가 아니라도 단번에 알아보고 흉보겠지만, 의식하지 않고 나름대로 용기 내어 그냥 일기 쓰듯 글로 옮겨 탈고하며,
내용 중에 관계된 사람이 기회가 되어 읽어 보더라도 나름대로는 있었던 그대로 기억을 더듬어 사실을 근거하여 쓰려고 애써 노력하였으며, 혹여 서로 생각과 표현 방법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겠으나 일부러 보태거나 배제하지 않았으며, 내용의 부족한 부분은 글의 미숙으로 받아주길 바라고 양해 바란다. - 경수 -
경수 이야기
글쓴이 : 박 경 수
글쓴때 : 이천공백일십삼년 ⌜여름⌟
[차례]
♠ 글쓴이 의 말
Ⅰ. 회고(回顧) 편
1.철부지
2.몰락과 음악
3.아상한 시작
4.역경
5.택시. 장인의 객사
6.아내와 나
7.방황과 불신
8.사업과 정치견학
9.부도와 도피
10.득수식당과 청호
11.법정다툼
12.정현 시형
13.새로운 시작
14.벌
경수 이야기
Ⅰ. 회고(回顧) 편 / 철부지
1. 철부지
⑴ 고향
마치 양손으로 팔을 쭉 뻗어 살포시 안아주듯이 높이 솟은 초롱 산을 뒤로하고 야트막한 야산과 전답이 어우러져 펼쳐진 원안에 둘러싸여 있으며 동구 밖에는 열려비(烈女碑)가 세워져 입구를 상징하는 정문거리가 있고 아리랑고개 넘어 장터길 가는 길에 졸졸 흐르는 약수 물 입에 머금고 할아버지 할머니 손잡고 어리광 피며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초롱 산에 은사(銀寺)절이 있던 곳이라 하여 은사리라고 불리었다고 하며, 산 아래 은적 골 또는 은절 골이 있으며, 내려오면서 분토(粉土)가 나서 붙여진 분토 골 또는 분둣굴, 그리고 토강(유수지) 아래 좌측으로 안주룰 마을이며 오른쪽으로는 논과 밭이 펼쳐지며, 예전에는 있었다고 하는 서당 골(주룰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전에 서당이 있었음), 옆으로 골짜기에 오릿 골(오류골), 그리고 마을 넘어 아래 짚은 골(깊은골), 이라하였으며 이를 합쳐 은사리라 하였는데 초롱산 아래 서남쪽으로 그러니까 은적 골에서 역말로 가면 산중턱에는 이곳에 자리 잡게 된 울산(蔚山)박씨의 중시조인 고려의 절신(節臣), 조상님의 산소가 넓게 자리하고 있으며, 1972년 선영아래 고려 말 당시의 상황과 업적을 기리는 글이 새겨진 신도비를 이조오백년 동안 자손대대로 숙원사업이었던 사적비를 유은한림울산박공사적비(柳隱翰林蔚山朴公史蹟碑)라고 선영 입구에 세워져있다.
여기서 우리는 왜 땅값 좋은 서울 강남 쪽이 아니고 하필이면 산골짜기 같은 이곳에 자리를 잡았는지 궁금하다. 그것도 500년이 넘도록 박씨 집성촌을 이루며 자리하였으니 더욱 궁금하다. 그래서 뿌리를 알고 싶어 족보도 뒤척여보고 또한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적은 지식이지만 좀 더 알 수 있었기에 여러 가지 흥미 있는 대목이 나와 후손된 자로 그냥 덮을 수가 없어 자세한 내용을 울산박씨 대동보를 기준하여 뿌리편에 별도로 적어보았다.
⑵ 가계
우리 집안은 주룰 박가 둘째 댁이라고 불리었고 할아버님의 함자는 성진(成鎭)이시며, 할머님은 풍천(豊川)임(任)씨 이시고 조부님은 4형제 이셨는데 첫째형이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 큰아들인 큰아버님을 양자로 보냈으며 둘째로 딸을 두었으며 할아버지 할머님는 한때 가족들과 같이 인천에서 자리하고 있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 혼기를 맞은 큰고모를 주변의 중신으로 혼인을 하게 되어 인천고모 또는 큰고모라 불렀으며 셋째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나의 아버님이신 승재(承宰), 함자를 쓰셨으며 어머님은 파평 윤(尹)씨 성에 용신(用信)을 쓰시며, 이웃동네인 청양군 비봉에서 아버님은 일정시대에 징용으로 끌려갖다가 해방되어 집으로 오시게 되어 24세에 중신으로 18세의 어머님을 만나 결혼하셨지만 결혼하시고 바로 또 국군으로 입대하시게 되어 오랜 군생활로 아버님 28세에 그리고 어머님22세에 은사리 자택에서 첫 자식으로 육이오사변이 있던 해인 1950년 11월 28일 인시(寅時), 에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리고 아버님의 여동생인 막내 고모가 계시다. 아버님은 형제자매의 서열로는 셋째가 되나 아들만 으로는 둘째 아들이며 조부님 형제분도 4형제 중 둘째이기에 은사 리 에서는 둘째 댁 이라면 우리 집을 지칭했다.
아버님과 어머님사이에는 큰아들인 나와 둘째로 차수(次秀), 셋째 관수(寬秀), 넷째 득수(得秀), 그리고 막내딸로 미자(美子)가 있다.
가끔은 생각이 서로 달라 의견충돌이 있을 때도 있으나 늘 부족하여 어려움에도 서로 아껴주는 마음과 그리 넉넉하게는 살지 못해도 가족우애는 참으로 좋은 편이다. 우리형제는 서로 도와주려는 착한 마음을 갖고 있는 형제들이다, 이는 효자 아버님의 착한 마음씨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나로부터 9대조 조상님이신 외자 이름을 쓰시는 ‘조’ 할아버님의 종손 의 종가집인 큰댁은 우리 집 뒤편으로 계단을 따라 오르면 오르막 사랑채가 넓게 펼쳐진 전통한옥 집이다. 사랑마루에 걸터앉아 탱자나무가지 향나무 사이 넘어 길가는 나그네를 내려 볼 수 있는 전경이 좋은 큰 기와집이며, 높은 사랑채에서 내려 보면 아지랑이 피어난 건너 논두렁이, 백로가 노니는 안산을 바라보며 뒤편쪽 오줌통 뒤로 기와 담 넘어 안 주룰 박 씨의 상징처럼 모셨던 부서진 사당과 옆으로 오름에 충청남도 지방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는 수령이 350년이 넘는 노거수로 박씨 전통과 더불어 수호신같이 묵묵히 마을을 지켜온 세월을 말해주듯 버티고 서있다.
은행나무의 뿌리는 동구 밖 성황당까지 내려갔다 하며, 지금도 은행나무에 노란 작은 은행은 가지가지 마다 잔득 열리고 나무 아래쪽에는 구멍이 뻥하고 크게 뚫려있어 어린 우리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했다.
은행나무 아래에서는 동네 어르신들의 중요한 회의장이기도 했으며 즐거운 날에는 돼지도 잡고 지나가는 장터길 왕래하던 나그네의 쉼터도 되고 한국전쟁 통에는 그 무서운 인민재판 장소이기도 했다한다. 하루는 인민군이 그리고 또 하루는 국군이 설쳐 대어 형제간의 혈전장소가 되기도 했다. 사상논쟁이 심한이때 입은 형제간의 상처들이 간혹 지금도 마음의 앙금으로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
은행나무위에 줄을 걸어 그네로도 사용했기에 나는 어려서 초등학교가기 전 이곳에서 비 개인 날 혼자 나와 놀며 그네를 타다 잔득 물을 먹은 그네발판에 그만 미끄러져 손을 놓치며 땅으로 곤두박질했으니 얼굴은 혹이 나고 막 갈아입고 나온 옷은 엉망이 되어버렸는데 몸이 아파 죽겠다고 엉엉 울며 집으로 들어가니 아픈 것은 둘째요
“금방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가더니 옷을 후질러 갖고 들어왔다!” 고 어머니한데 꾸중을 듣던 생각이 난다. 그야말로 희노애락(喜怒哀樂)을 같이한 역사와 추억의 은행나무가 아닌가?
안주룰 은행나무에서 내려오면서 큰댁과 셋째댁 그리고 우리 집 뒤로 간지럼나무(백일홍) 뒷집 육촌 한수네 집과 경계선으로 담이 있으며 집 앞쪽으로는, 안산 건너로 고개 마루 장터 가는 아리랑고갯길, 뒤로는 큰댁 기와집 뒤로는 대나무 숲과 큰 은행나무, 사이로 두 산소 봉분 그리고 얕은 언덕너머로 보이는 민택이네 지나 잘 꾸며진 한옥 집에 연못 있고 모과나무가 있는 ‘대티’ 종수형네...
집 뒷담의 셋째 댁 할머니, 마당 나무에 거미집처럼 라듸오 안테나를 멋지게 세워둔 한수네, 뒷방에는 기타를 잘 치는 광시국민학교선생님이 하숙도 하셨다.
뒤로는 참나무가 여러 나무 있었는데 가끔은 찍개발이 있는 장수하늘소와 붉은 개미를 볼 때도 있었으며 조금 더 가면 우측으로 상여(곳)집, 건너편 밤나무가 있는 작은 동산, 밤나무 사이 길로 내려가면 구례리로 가는 길..,
집 앞을 지나 초롱 산, 가는 길옆으로 넓은 분토골 토강, 초롱산 아래 에 사는 원규 형, 아버님은 한국전쟁 때 사상이념의 난리 통에 홍성에서 공산당 조직이 쳐들어와 아깝게 희생이 되셨다고 한다.
당시 학식이 높아 일찍이 현대 농법인 과수원을 운영하셨던 집안 어른의 과수원집 앞을 지나 광시 쪽으로 내려가면 박 씨 중시조인 한림공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역말..,
좀 더 내려가 면으로 들어서면 소들을 잔득 메여놓은 소시장이 펼쳐지는 소전이 있는 광시장터 풍경, 왁자지껄 모여든 장꾼들의 모습 그리고 알만한 동내 어르신들 와----! 시끌벅적 왁자지껄
울긋불긋 원색의 차양치고 장사하는 많은 사람들, 뻥튀기 솜사탕 생선전의 고등어와 갈치, 찐빵 양잿물덩이 예쁜 옷들 희고 검은 고무신 운동화 신발, 얼음과자로 불리는 아이스케키 그리고 알만한 동내 어르신들을 보면 왠지 힘이 난다. 입구에 국말이 국밥집은 앉을자리 없을 만큼 사람들이 북적인다.
할아버지 따라나선 장구경이기에 가마솥에서 국 주걱으로 가득담은 국밥 한 그릇은 어린 나로서는 많은 양이었다.
7살 되던 해 1957년 봄, 할아버지 손에 매달려 오리(2K)길 걸어서 광시국민학교에 입학한다. 오리(2K)가 넘는 학교 길은 어린걸음으로는 가쁜 걸음이다.
병수 한수 나, 모두 아래윗집이며 울산박씨 장무공 할아버지의 35세손이며 유(愈) 할아버지 19대손이 되고 그러니까 한집안의 형제인 샘이다. 서로동갑내기 이며 병수와는 10촌간이 되고 한수와는 6촌간이 된다. 학교 한반 동기다. 남자한반 여자한반 모두 두 반이 같은 학년 전부다.
이곳은 박 씨의 집성촌이니 당연히 집안 형제간 사이도 많았지만 심지어는 같은 또래 친구이면서도 아저씨 할아버지 때론 조카뻘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등교 길, 물이 넘치면 도랑을 건너 주려고 기다리던 육촌 길수형의 등에 업혀 건너 주기도 했고 하교 길, 날 좋은 날엔 도랑에서 물고기를 잡다 집에 늦곤 한다.
⑶ 서울생활
할머니의 행동이 바빠지셨다. 서울로 이사를 한다면서 살림살이를 챙기신다. 우체부 아저씨가 건네준 한문이 섞여있는 편지를 위아래로 쭉쭉 읽으시던 할머님이시다. 마을동내 분들도 때론 글을 못 깨쳤기에 읽어달라면서 이웃들이 들고 온 편지를 갖고 오면 차랑차랑하고 곱고 멋진 음성으로 읽어 주시기도하고 답장도 위아래로 한글이 섞인 한문으로 붓을 들어 대필해 주시곤 했다. 정말 멋진 풍천(豊川)임(任)씨의 성을 갖은 할머님 이셨다.
이제는 서울로 이사를 하려고 분주하시다. 나도 준비를 해야 했다. 근데 무엇을 어찌해야지...?
늘 나는 할아버지와 같은 방을 쓰기에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살았다 오늘은 할아버지가 주무시지 못하고 밤새도록 금괴를 열어 돈을 세고 계신다. 끝내는 다 못 세시고 아버지와 큰아버지 그리고 셋째 댁 아저씨(당숙부)를 불러들여 돈을 세어 돈다발을 자루에 묶어 놓고서야 일어서신다. 아마 열 자루도 넘는 것 같다.
이사에 따른 비용과 나머지 여윳돈을 지게에 지고 갈, 가까운 사람이 정해진 것 같다. 서울로 가려면 우선 초롱산 넘어 발 빠른 젊은 장정이 한나절은 가야 홍성에 도착한다.
홍성에는 큰아버님이 살고 계시며 서울로 가는 장항선열차를 탈수 있는 홍성역이 있다.
난생 처음 타보는 기차다. 은사리 주룰 골에서는 가끔 하늘을 나는 비행기는 볼 수 있어도 기차는 처음 보았고 타보았다.
초등학교 이학년 겨울방학이 끝나고 삼학년 새 학기가 될 즈음 1958년 겨울, 할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서울역에 도착했다.
한복으로 바지저고리를 예쁘게 다려 입고 서울역 광장을 빠져나오는데 수많은 자동차의 물결과 사람들 그리고 주변의 높은 건물과 화려한 불빛의 네온사인들, 마치 제봉을 하는 것 같은 동작의 살아있는 네온사인 간판들은 나를 무아지경의 환상 속으로 빠져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시골 같으면 모두 잠들 시간인데 어찌 이리 차도 사람도 집도 많고 높은 건물도 너무도 많아 마치 내가 다른 세상에 왔는가?..,
⑷ 전학 1
1959년 봄, 북성초등학교 3학년에 전학했다. 시골과 다른 것이 너무도 많다. 이곳은 너무 세련되었다. 남녀가 같은 반에서 공부를 하고 반장도 여자였으며 성이 ‘고’씨인데 놀리느라고 ‘고구마’라고 불렀으나 키도 큰 편이며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했다. 무엇보다 이곳 서울 학생들은 똑똑해서 그런지 말을 너무도 똑똑하게 잘한다.
수돗물을 먹어서 그렇다고 한다.
그리고 세련되게 옷을 입은 것이 시골과는 확실하게 다르다. 역시 서울은 서울이다.
나는 한복바지와 저고리에 조끼를 입고 책보를 들고 교실에 들어섰다. 모든 학생들은 내 모습이 우스웠던지 깔깔대며 웃었으며, 담임선생님은 내 자리를 정해주어 앉게 했다. 한동안 촌놈이라며 놀림을 받았으나 그런대로 잘 어울렸다. 그러나 공부는 많이 떨어졌다.
4학년 때는 교실이 이동되었으며 반장은 남자 임주환 이었다. 담임선생님은 처음에는 남자선생님이었으나 얼마 후에는 여자선생님으로 바뀌었다. 떨어진 성적을 시골촌놈이 서울학생수준을 맞추기에는 역부족을 통감해야 했으며, 5학년 때는 담임선생님이 송효찬 선생님이셨다. 이름이 당시 내각수반의 정치인 송요찬과 이름이 비슷하여 기억하기에 좋았으며 학교에서는 체육을 담당하셨기에 약식의 ‘마스게임’ 같은 체육시범을 전교생이 모인자리에서 보여주었다.
우리는 이를 위해 열심히 연습했기에 멋있는 모습을 다른 학생들 앞에서 보여줄 수 있었다. 송효찬 선생님은 교과서 국어책에 나오는 각본을 연극으로 하도록 배역을 나누어주어 연습하도록 했다. 배역의 학생들은 각본 외우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겠으나 아마도 좋은 경험이었을 것이다.
⑸ 구전(口傳)
철희 아저씨는 나이가 두 살 위인 형 같은 아저씨다. 북성초등학교 2년 선배가 되는 철희 아저씨는 우리 할아버지가 외당숙(外堂叔)이 된다.
그러니까 우리 할아버지의 사촌여동생이 철희 어머님이 되는 것이다.
큰아들은 재희 아저씨며 둘째 아들이 철희 아저씨다. 그러니까 철희 어머니는 시골 오류골에서 시집와 북아현동에 살고 있으며 깔끔하고 사철하신 분이다. 우리아버님이 철희 모친의 조카가 되니 나는 당연히 나이는 두 살 위이나 형이라고 부르면 안 되며, 아저씨라고 불러야 되는 것이다.
◉ 사기꾼
하루는 철희 아저씨와 우리 집에서 철희 아저씨 네를 가려고 학교 앞을 지나는데 아저씨가 나보다 빨리 가기에 “철희 아저씨 같이 가!”
자고 소리를 쳤다. 그랬더니 길 가던 낯선 아저씨가 우리를 보고 “야! 니가 철희 지?”
하고 물어본다.
“네! 그래요 내가 철희 인데요?”
하고 철희 아저씨가 답하니.
“야! 철희야 내가 외삼촌이다 나 모르냐?”
“모르겠는데요?”
“집에 어머니 계시냐?”
“네 집에 계신데요?”
“그렇구나 그동안 내가 바빠서 누님을 찾아뵙지 못했는데 그래서 오늘 내가 일부러 찾아가는 길인데 선물을 사갖고 가려는데 선물 사러 같이 가자” 며 철희 아저씨의 손을 잡고 앞장서서 간다. 얼떨결에 외삼촌이 나타났으니 얼마나 좋겠는가?
나도 같이 덩달아 따라나섰다.
좁은 골목길을 이쪽저쪽으로 한참을 돌아서 안산에서 흐르는 냇물 윗길 ‘굴레방다리’시장의 쌀 가계 안의 방으로 우리를 데리고 들어간다.
방에 앉아 우리에게 용돈 하라며 10환짜리 종이돈을 한 장씩 주면서 하는 말이 “내가 오랜만에 누님을 만나기에 그냥 들어갈 수가 없어 선물로 쌀 한 가마니를 지개에 실어 보내니 앞장서서 잘 갖고 들어가라고 한다.”
그래서 철희 아저씨는 쌀을 지게에 얹은 아저씨의 앞장을 서서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 도착하여 어머니에게 “외삼촌이 쌀 한가마를 사 주어 갖고 왔다”
며 말을 하니, 할머니가 깜작 놀라며
“이게 무슨 말이냐 외삼촌이라니 네가 외삼촌이 어디 있냐! 집안이 아들을 못 낳아 양자로 이어온 집안인데 외삼촌이라니? 이런 사기꾼들이 어디 있냐?!”
고 소리를 지르며 펄쩍펄쩍 뛰신다. 알고 보니 아까 그 사람이 우리를 상대로 사기행각을 벌인 것이었다.
서울은 사기꾼들이 아주 많았다. 이 때문에 철희 아저씨는 서대문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기도 했었다.
철희 아저씨 바로 앞집이 막내 고모집이 있으며 고모부는 원효로에 자유당사무실에서 근무하셨다. 우리 집에서 일하고 있던 부얼이 누나하고 한번 찾아가 설렁탕을 맛있게 먹은 적이 있으며, 가족으로는 육군 맹호부대의 장교로 근무하는 아래동생과 자식들로는 정대영 숙영, 무영, 우영, 인영, 우일, 미영, 이가 있으며 그러니까 나하고는 내 사촌 형제간이 되며 고모부(姑母夫)는 일제 강점기 에는 홍성에서 군사훈련교관 교사로 근무하셨다. 그 이유로 해방 후 일본이 물러가고 국군과 인민의 치열한 전쟁을 겪으며 처갓집인 은사리, 우리 집에 피신하여 뒷마당 장독 뒤편에 굴을 깊이파고 굴속에 숨어 지냈으며 앞을 장작으로 위장해 놓아 혹여 잡혀가지 않도록 숨죽이며 혼란속의 위기를 보내며 지내온 때도 있었다.
어려서 나는 뒤편 장독대 뒤로 깊이 파인 굴을 보고 할머니에게 물어보면 무섭고 아찔했던 추억이 된 지난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작은 고모집인 ‘대영’ 형의 집 위치는 북아현동이기는 해도 북성초등학교 오른편이라고 한다면 우리 집은 북성초등학교의 왼쪽방향이며 한성중고등학교 뒷담 쪽에 군데군데 초가집도 있었으며 돈 받고 물을 파는 공동수도도 있었으나 우리 집은 기와집의 전통한옥 집에 개인수도가 집안에 설치되어 있는 집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집안이 주변에 많이 살고 계시며, 서울역 앞 후암동에는 전통한옥과 이어져 멋진 양옥의 이층집에 임씨 집안인 풍천임씨 할머니의 친정집이며, 공덕동에는 조카가 전통한옥 집에서 살고 계셨기에 할아버님의 손잡고 가끔 다니곤 했다. 그러니까 그 조카의 이름이 임완순 아저씨다 그 아저씨는 서울시 서대문구청에서 고급공무원으로 근무하셨으며, 집은 공덕동에 살고 계셨으며 그 뒤로 그러니까 공덕동에서 소의 초등학교 뒤쪽으로 산중턱에는 할머니의 조카 중 과자 장사 도매업을 아주 크게 운영하시는 아저씨도 계셨다.
갈 때 마다 엄청난 과자들이 이쪽저쪽 창고와 마루, 방, 할 것 없이 가득 가득 있으며 들락 달락 하며 아름다운포장의 과자와 물품들이 분주히 움직였으며 과자재조 공장도 운영하기에 소리가 요란했다. 많은 직원들이 있었으며 전통적인 옛 풍습의 과자공장을 겸한 도매상이었다. 또한 가끔 북아현동 우리 집에 오시는 할아버지의 절친한 박 씨 집안 형제간 되는 진(鎭)자 학렬이신 어느 할아버님도 아현동 건너편 공덕동입구 옛날 일정(日政)시대(時代)에 교도소자리였던 뒤편에 살고 계셨기에 할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자주 들르곤 했다. 기와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에 금봉어가 노니는 어장이 있고 새로 지은 깨끗한 전통한옥의 멋있는 집이며 대청에 올라가면 고급스런 등나무 쇼파가 있었다.
그 할아버지는 현역에서 근무하시며 우리나라 어느 정부기관의 고위층에 계셨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비서라면서 양복을 입은 남자가 그 할아버지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가끔 우리 집에도 오실 때면 지난번 그 집에서 본 비서도 따라와 집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튼 그 할아버지의 높은 위치는 상당할 것이라 고 짐작이 된다. 그러기에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할아버지이지만 그 할아버지가 오시면 당시의 최고급 술인 인삼주를 꺼내 오도록 했으며 모든 음식도 어머니가 아닌 할머니가 직접 대접했다. 서로 친구 같이 즐겁게 보내셨다. 나는 원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시골에서만 사시던 시골 할아버지와 할머니 인줄로만 알았으나 서울한복판과 주변에 이렇게 많은 인맥이 연결 되어 있다는 사실에 놀랐으며, 어찌 보면 서울 북아현동에 자리 잡으신 것은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가 있음이 짐작된다.
그러고 보니 할아버님과 할머님은 이쪽이 처음이 아니고 언제부턴가 이쪽에 인연이 있으셨던 것 같다.
어르신들의 이야기 중에 언젠가 귀 동냥으로 들으니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젊은 시절 인천에서도 오래 사셨다는데 그래서 인천에서 큰고모는 큰 고모부를 이웃의 중신으로 만나 혼인(婚姻) 하였고 이 과정에서 한참 혼기를 맞은 큰고모는 중신의 말이 오고 갈 때, 큰 고모부는 섹시가 될 큰고모를 미리 만나보고 싶어 몰래 큰고모가 있는 할머니 집으로 용기 있게 찾아와
“아무개의 심부름으로 왔는데요.”
하면서 능청스런 거짓으로 말하고 큰고모의 얼굴도 요리조리 힐끔 보고는 “목이 마르니 물 한잔 주쇼” 하면서 심부름도 시켜보고 얼굴을 이리저리보고는 도망가듯 내뺏다 고한다.
이때가 일정시대이고 보니 오래된 신파극 영화 한 장면 같다. 이는 큰고모가 후에 우리에게 들려준 '러브 스토리'였다.
또한 아버님은 그때 인천에서 최고가는 나무로 통을 짜는 인천최고의 통나무 기술자였다고 하며, 통나무기술자로는 최고의 급여를 받았다고 한다. 물론 주인은 일본사람 이었다.
그때는 그릇이 귀하던 시절 모든 그릇이 나무로 통을 짜서 쓰던 시절이기에 통짜는 기술자는 대접을 받던 시절이다.
아버님은 돈을 벌어 자전거를 사가지고 인천에서 고향인 광시까지 자전거를 타고 오셨다고 한다. 지금생각하면 어이가 없는 행보일 것이다. 인천에서 예산 광시 안주룰 까지 비포장 길을 자전거를 타고 오신 것이다. 지금생각하면 자동차를 사서 타고 가는 기분 이셨을까?
다리가 많이 아프셨을 텐데, 하기야 그때는 고향에서 서울을 수십일 동안 걸어서 다니거나 광천에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갈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때이기에 당시의 자전거는 최고의 교통수단이었을 것이다. 물론 당시 할아버지는 한참 젊은 시절이었기에 아무 일이나 닥치는 대로 가리지 않고 하셨으며 큰아들인 승필(承必)의 백부(伯父)님은 할아버지의 형인 태진(秦鎭)의 큰 조부(祖父)님이 후손이 없어 양자를 보내셨기에 당시는 둘째 아들인 승재(承宰)인 우리 아버님이 할아버님의 장자로 되었기에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같이 인천에서 생활했으며,
어느 때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같이 엿을 만들어 판매하신 때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때도 착한 마음씨의 아버님은 부모님을 도와 열심히 일하셨으며 형편이 얼마나 어려웠으면 아버님은 어려서 신문도 팔았으며 찹쌀떡도 파셨고 할아버님을 도와 엿 장사도 하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비단 장사를 하셨기에 많은 돈을 버셨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지금 인천에 많은 연고가 있는 이유에도 분명 우연이 아닌 것 같다. 할아버님과 할머니의 젊은 날의 필연의 무대였을 것을 상상해본다. 참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어떻게 만나셨나?
⑹ 내가 느낀 4.19
뒷담 넘어 한성고등학교에서 계속 이어지는 요란한 함성소리에 호기심을 참지 못해 학교 뒷담 층계를 따라 내려가 학교정문 앞에 도착하니 검정교복을 입은 한성고등학교 학생들이 머리와 팔뚝에는 흰 띠를 두르고 5~6명씩 조를 지어 서로 어께에 손 올려 잡고 어께동무상태에서 함성으로 구호를 외치며 발마추어 행진하는 모습이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나는 더욱 호기심 발동으로 뒤따라 나선다. 한참을 따라가니 굴레방다리 돌아 학생들은 군가와 행진곡을 부르며 완장 두른 팔을 흔들며 힘차게 걸어간다. 전차길 따라 충정로 방향으로 돌아서며 시청방향 쪽으로는 길이 막혔는지 서대문방향으로 방향을 바꿔 잡으며 행진하다 잠시 건너편 서대문사거리의 경찰부대와 대치하더니 금방 경찰들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는 사이 학생들이 차지한다. 잠시 후 학생들이 점거한 트럭위에는 학생들이 가득 올라타 트럭 엔진 위부터 트럭 안은 물론 지붕에 까지 가득 올라타 요란한 함성의 구호와 힘찬 노래를 부르는 모습에 나는 왠지 흥분을 감출수가 없었다.
이때가 1960년이니까 내 나이 11살 때다.
대학생은 물론이지만 교복 입은 고등학생들도 상당히 많았다. 어디서 쏴대는지 ‘탕’ ‘탕’ 거리는 총소리도 들리고 요란한 함성이 이어지고 온몸에 피가 범벅이 된 머리를 손수건으로 막고 어디론가 무리지어 뛰어가는 학생들이 지나가면 잠시 후 경찰을 실은 트럭과 장갑차 행렬이 바삐 지나더니 이어서 학생들이 점령한 차량을 앞세워 태극기 흔들고 구호를 외치며 곳이어 커다란 동상이 쇠사슬 줄에 끌려 나온다. 반쯤 부서져 흉한 모습의 동상은 트럭에 매달린 줄에 질질 끌려가며 시끄럽게 나오는 요란한 소리와 행진하며 외치는 소리들이 어울려 온 세상을 진동한다. 동상의 주인공은 당시 부대통령인 이기붕 동상이었다.
더욱 호기심이 발동하였으나 어린마음이지만 섬뜩한 생각과 무서운 생각이 들었으며 이것이 혹시 전쟁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거리가 온통 피투성이와 부서진 벽돌들 그리고 요란한 함성이 이어진다. 어디서 무엇이 날라 올지 모르는 난리 통의 현실, 그 자체를 실감하며 더 이상은 떨리고 무서운 생각에 불연 듯 들기 시작하니 온 몸이 공포감이 밀려온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서대문에서 뒷골목 길로 도망치듯 그만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의 비명과 함성소리는 지금도 생생히 들리는 듯하다.
⑺ 전학 2
정부에서는 학교가 멀어 교통이 불편한 학생들을 위해 집단으로 전학 할 수 있는 정책에 의해 나는 또다시 전학을 해야 했다.
1961년 가을, 서강초등학교 5학년으로 2학기 느지막하게 전학한다.
당시 우리 집이 북아현동에서 서강역 앞으로 이사를 했다. 그러니 집에서 학교까지는 10Km 정도며 걸어서 학교에 다니기에는 너무도 먼 거리였다. 학교 다니기가 나도 힘들고 어려운데 더욱이 3살 아래 동생인 차수는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얼마나 학교 다니기가 어려웠을까?
나도 그리 어려웠는데..,
당시 차수는 2학년 이었으며 1시간 이상 걸어가는 등교 길을 두려워하는 아우를 달래며 걸어가곤 했으나 때론 너무도 측은하고 짠한 마음이..,
서강초등학교로 전학 왔으니 또 새로운 친구들과 지내야 했기에 늘 분위기는 서먹하여 친구들과 지내기가 쉽지 않은 학교생활과 수업이었다. 낯선 곳에 새로운 선생님의 학습방법에 익숙하지 못하다보니 학교공부가 점점 더 싫어진다.
학교의 위치와 전망은 너무 좋았다.
와우산자락 중턱에 자리 잡아 시야가 아주 훤하다.
뒤로는 소가 누어있는 것 같다는 적당한 높이의 와우 산, 앞으로는 밤섬과 한강이 어울려 시야가 정겹고 좋으며 여의도비행장 쪽으로 넓은 백사장이 끝없이 펼쳐지며 당인리 화력발전소의 큰 굴뚝에서 나오는 검고 흰 연기는 용이 하늘로 날아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했고, 새까만 석탄을 가득 싣고 당인리 화력발전소로 꼬리를 물고 들어가는 긴 화물 기차가 보인다.
⑻ 서강역 주변
집 마루에 누워 창밖을 보면 와우(蝸牛)산에서 내려오는 모습이 아우 차수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훤히 보인다.
서강역 앞에 늘어서있는 미루나무와 도르레가 매달려 있는 두레박으로 퍼야하는 깊이의 동네 공동우물이 있었다.
우리 집은 안마당에도 물맛 좋은 우물이 따로 있었고 마당 앞에는 별도의 텃밭이 넓게 있는 전통한옥 기와집이며 집 앞 서강역은 온통 석탄가루 투성 이다. 이곳저곳이 석탄으로 산을 이루었다.
서강연탄공장. 화성연탄공장. 삼표연탄공장 등 서강역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수개의 연탄공장이 운집해 있기에 동네가 온통 검정색의 석탄산 일수밖에 없다. 연탄공장 주변으로 이곳에서 근무하는 동네 분들의 피곤한 삶이 있었다.
공장에서 찍어 나온 연탄들을 실어 나르는 트럭, 말 마차, 우 마차, 사람이 끄는 리어커, 등 이 줄지어 다니며 규모가 큰 연탄공장도 있지만 손으로 연탄을 찍어주는 사람도 있고 석탄 차에서 흘린 석탄을 주워서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아주머니 부대의 부류가 있으며, 철도공무원들의 사택도 있고 철도 기지창에서 근무하는 철도공무원도 살고 있다,
바로 우리 집 윗집은 법원의 홍 판사 집, 그리고 옆집은 공군대장 집, 한국전력에 고위간부, 대학교 교수, 그리고 또한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여군대대장집이 어울려져있는 비교적 빈부가 잘 어울려져 있는 곳이다.
그러나 우리 동네는 흰 와이셔츠와 흰색의 옷은 잘 안 어울리는 곳이지만 아침에 군 지프차들이 문 앞에 대기하고 있는 모습은 진풍경이다. 더욱 여군 고급장교를 기다리는 군 지프차에 남자군인 운전병의 손을 올려 경례하는 절도 있는 모습의 행동을 보노라면 엷은 미소를 짓게 한다.
그래도 서강역 앞의 넓은 마당은 우리 동네의 편리함을 더해준다. 예전에는 제법 큰 역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고작 석유와 방카씨유 석탄수송이 전부인 것 같다.
⑼ 철부지들의 환상
금괴를 조심스레 열고 위장용으로 덮어놓은 할아버지의 옷 몇 벌을 걷어 올리면 차곡차곡 쌓여있는 돈 다발이 보인다. 조심스레 돈다발을 떨리는 손으로 비워둔 책가방에 가득 넣었다. 세보고 싶었지만 내 실력으로는 며칠을 세어도 정확하게 셀 수 없는 분명 엄청난 돈이다. 얼마나 넣었는지 책가방 아니 이제 돈 가방, 맞다 돈 가방을 들기조차 어려울정도로 가득 담았다. 그런데도 금괴의 돈은 별로 줄어들지 않았으며 이상하리만큼 표 나지도 않는다.
전에 할아버지도 밤새워 돈을 셋 지만 결국 정확하지 않아 다른 사람을 불러 세는 것을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금고속의 많은 돈다발 중에 내가 가져간 이 돈은 할아버지가 지금 나타나서 확인한다 해도 확인이 어려울 것이며 알 수 없을 것 같다. 는 어리석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돈이면 제주도에서 큰 농장을 구입해 멋있는 농장을 운영해보리라..,
언젠가 인천에 갔을 때 큰 고모집의 텔레비전에서 제주도의 멋진 목장의 모습을 보았고 내가 언젠가는 저런 넓은 목장을 운영해 보고 싶은 환상에 졌어있었다.
그래서 동경했기에 결심하고 행동에 옮기기로 했다. 그리고 성공해서 돌아와 할아버님 할머님 그리고 아버님 어머님께 용서를 빌 것이다.
대성공해서 찾아오면 용서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선다. 손은 부들부들 떨었지만 가능한 침착해야했다. 그리고 누군가 집으로 들어오기 전에 빨리 밖으로 빠져나가야했다.
돈 가방을 들고 바로 집을 나가 같은 반의 친구인 옆집의 ‘윤석’이를 찾았다.
“모두 해냈으니 빨리 모이라고 해 ! 빨리 빨리 !”
동내 뒤편에 철도기지 창고로 동행할 친구들을 모았다.
모두 일곱 명이었다. 우선은 이 돈을 지키고 제주도까지 같이 가서 넓은 땅을 구입해 목장을 하려면 사람이 많이 필요할 것이며 더욱이 마음에 잘 맞고 의리가 있는 친구와 말 잘 듣는 동생들이 필요했다.
서로 단결과 화합이 필요했으며 무엇보다 배신자가 있으면 안 되겠기에 윤석 이와 상의해 충성맹세를 받기로 했다.
우선 나이가 나보다 세살이 위인 윤석 이가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충성하겠다는 주먹을 펴 보이며 충성맹세를 했다.
“이 순간부터는 경수를 우리들의 대장으로 할 것이며 어떤 명령이라도 따르고 복종할 것이며 죽으라고 명령 하면 죽을 것이다. 만약 누구든 우리를 배신한다면 죽음만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의리와 죽음으로 충성을 맹세한다. 충성 !”
그리고는 일남 영섭 찬영 우태 태수 윤석 이렇게 모인 6명 모두는 순서대로 단결을 약속하고 충성맹세와 배신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수없이 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조직의 명칭을 ‘번개파’로 명명했다.
이제 되었다 싶어 모두 집에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다시모이기로 하고 헤어졌다.
돈 가방을 손으로 꼭 움켜쥐고 제주 섬의 넓은 대지위에 말을 타고 다니며 목장을 운영할 계획과 성공하여 돌아오는 나를 상상하면서 친구들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왜 이리도 온몸이 떨리는지 책가방을 꼭 쥐고 철도청기지창고 빔 사이에서 안절부절 하고 친구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데 왜 이리 시간이 긴지..,
불안을 재우기 위해 윤석 이가 주고 간 담배를 피워보았다. 맛도 모르지만 기침을 하면서 그냥 피웠다. 그래도 안 되겠다싶어 돈 가방이 무겁기도 하고 혹여 무슨 일이 생기면 어찌나 하는 마음에 손에 땀이 흐른다.
돈 가방을 들고 있으니 더 무섭다.
우선 책가방을 좀 떨어진 나만 알 수 있는 곳에 감추었다. 그리고 제자리로 돌아오니 마음이 좀 안도가 되는 것 같다.
기다리는 초조함에 또 담배를 꺼내어 물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제일먼저 윤석이가 나타났다. 반가웠다. 그리고 뒤를 이어 하나씩 둘씩 나타났다. 그러나 영섭과 우태는 오지 않았다.
윤석이는 그냥 우리 다섯 명 이서 출발 하자고 했으나 나는 각각의 사정이 있어 그런 것 같으니 좀 더 기다렸다가 같이 가자고 했다. 왜냐면 나는 우태 하고는 더 잘 통했기 때문에 같이 동행하고 싶었다.
그런데 기다리는 우태는 왜 이리 안 오지..,?
어느덧 땅거미가 내려않기 시작했다.
시간이 너무 늦으면 기차를 못타니 저녁7시에 출발하는 기차를 서강역에서 타기로 했다. 그래서 시간에 맞추어 역으로 나가야 할 텐데 바로 역 앞이 집이기에 우리가족 중에 누구든 만나면 큰일이었다. 우리 누구도 시계가 없어 시간을 모르지만 어둠이 깔리는 것으로 보아 역으로 나가야 했다.
혹여 우오네 집에 들러 불러보고 싶었지만 누군가와 마주치는 것이 두려워 그냥 가야했다. 내 옆에 우태가 있으면 든든하고 좋았건만 끝내 나오지 않았다. 어둠이 깔리니 더는 기다릴 수는 없었다.
모인 사람은 나를 포함해 모두 다섯 명이다, 더는 기다릴 수 없어 출발해야 하기에 이대로 출발을 결심한다.
역 주변에 전기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두워 캄캄한 역 가로등이 비출 무렵 기차가 도착했다. 우리일행 다섯 명은 기차에 몸을 실었다. 용산역이 종착역이었기에 갈아타야했다. 우리일행 중 실질적 안내와 리드 역은 윤석 이었다.
나도 윤석이 의 말이면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보다 세살이 위이기도 하지만 키도 크고 리더-쉽(leader-ship)이 좋았다. 그래서 더욱 그를 신임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때는 일행에게 내말이 잘 먹혀 들어가지 않을 경우 내가 윤석이 에게 지시를 하면 그때서야 애들이 행동 개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럴 때는 좀 슬프지만 나로써의 한계를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충성을 맹세했다하나 어쩔 수 없는 나의 한계였던 가보다.
용산에서 내려 인천 가는 기차로 바꾸어 승차했다. 기차 화물칸에 우리일행은 서로 등을 기대고 쭈그리고 않아 있는데 밤기차는 기적을 요란하게 울리며 한강철도를 지나고 있다.
“윤석아 제주도에 가려면 인천에서 배를 타고 가면 되는 것이 맞지? 응 맞아 목포로 해서 가도 되고, 부산에서도 배가 있어 하지만 인천이 가장 가까우니 인천으로 가면 돼.”
“음---, 알았어. 그런데 인천역에서 내리면 우선 오늘밤은 어디서 자야 되지?”
모든 것이 다 궁금했다. 그래도 ‘윤석’ 이는 너무 잘 아는 것 같아 힘이 되었으며 그를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두운 밤 인천역에서 내려 가까운 자유공원으로 올라갔다. 공원에는 공사를 하기위해 큰 원통의 하수관을 쌓아놓은 곳이 있었다. 어두워 어디인지 확실하지는 않아도 이곳은 우리가 하루쯤 묵어가기에 적당한 곳 같기에 일단 아지트로 딱 이었다.
우리일행은 이곳에서 하룻밤 지내기로하고 하수관속에 버려진 종이와 나뭇잎을 쌓아놓고 거적을 덮어놓고 이곳의 하수관을 각자 하나씩 차지하도록 했다.
⑽ 가출 2일차
넓은 하수관로지만 잠자기에는 좁은 시멘트 하수관속에서 잠을 자려고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니 밝게 떠있는 둥근 달과 수많은 별들의 움직임이 집에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 동생들이 스치듯 떠오른다.
갑자기 보고 싶어지는 것이 눈에서 눈물이 핑- 돈다.
정말로 나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선택한 것인가 누워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도 무섭고 떨린다.
괜한 짓을 벌렸다는 엄청난 사실을 비로소 통감한다.
후회스럽다. 정말 후회스럽다.
‘내가 우리 집 돈을 훔쳐갖고 나오다니 내가 미쳤어 정말 미쳤어 어쩌다 내가 이런 엄청난 도둑 짓을 벌였단 말인가 누구의 꾐에 속았나. 아님 정말로 내가 도둑질한 돈으로 목장을 할 수는 있기는 있는 것인지 아- 이제 와서 어쩌지 한편으로 화도 나고 후회가 밀려온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무서운 생각까지 머리를 스친다.
좁은 하수도 관속에 돈 가방을 머리에 비고 있지만 만약 이 가방을 잊어버리면 어쩌지?
내가 깊이 잠잘 때 이 가방을 누가 훔쳐갈 수도 있고 만약 잃어버릴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나는 죽어야한다.
암 당연히 죽어야지 맞아 이 가방은 내 목숨이야 !
그리고 배라고는 한 번도 타 본적도 없는데 정말 배타고 제주도에 가면 목장은 할 수 있는지?
하늘에 떠있는 수많은 별들을 보면서 집이 더욱 그리워진다. 또한 자신도 점점 더 없어진다.
아니 이제는 엄마가 보고 싶다.
그렇게 길고 긴 밤을 밤새도록 후회만 엄습해 온다. 얼마가 지났을까?
모두들 집을 떠나 잠을 자본일이 없는 어린나이에 잠 못 이루어 부시 럭 대는 소리와 훌쩍이는 울음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며 점점 크게 들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울음소리는 윤석이가 잠자는 곳에서 들린다.
내가 제일 믿었던 친구인 윤석이가 있어 이 계획을 실행에 옮겼는데 서서히 들리는 흐느적대는 소리가 정녕 세 살이나 위인 윤석이의 울음소리라는 것을 알고 나니 윤석이의 나약한 모습에 나는 더욱 막막해진다. 지네들은 돈 한 푼 없이 그냥 따라오고 결국 나만 엄청난 손실과 잘못으로 남을 것을 생각하니 겁이 더 나고 자신감을 상실한다.
그런데 주변의 철없는 친구들이 모두 동요를 받았는지 심상치 않다. 이제야 집을 떠나 돌아올 수없는 이 길을 떠났으며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과 어딘지 모를 이곳에 누워 있다는 사실이 이제야 실감이 난 모양이다.
울음소리가 전염되듯 점점 더 퍼져 나간다.
그러더니 어느 쪽의 하수관에선가는 “집에 가고 싶다”고 울먹이며 중얼거리더니 점점 커지는 울음을 훌쩍였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렇지 않아도 힘들어 하던 나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난다. 지금 나도 두려웠던 참이다. 화가 날 사람은 난데 지네들이 더 엄살 피는 것 같아 오히려 내가 더 화가 난다.
우선은 이를 잠재워야겠기에 커다란 몽둥이를 손에 꽉 쥐고 모두 나오라고 소리치며 어둠에 흐릿한 하수관과 땅바닥을 꽝꽝!! 두들기며 관로에 누워있는 모두를 끄집어내며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팬다.
“어떤 놈이 울고 지랄이야 어-엉!”
요란한 소리에 깜짝 놀라며 대장이 화가 많이 났다고 생각한 모두가 자기는 절대 울지 않았다고 변명하기 바쁘다.
“모두 엎드려! 니들 다 죽여 버릴 거야 엉 !”
어둠속에서 미친 듯이 몽둥이를 이리저리 휘두르니 언제 어디로 날라 올 줄 모르는 공포의 두려움에 요란히 엎드리는 행동들이 오히려 더 측은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 마음은 더욱 서럽고 두렵고 무서웠다.
“어떤 놈이 눈물을 훌쩍훌쩍 흘리고 지랄이야 엉! 내가 말했지 이런 각오 없으면 오지 말라고 했잖아! 엉 니들 죽어봐 !”
달빛어린 인천자유공원 공사현장에서 몽둥이를 땅에 두들기니 아프다고 소리치는 소리에 윤석이가 나보고 참으라고 하면서 나를 말린다.
생각해보면 이제 와서 자신없어하는 윤석이가 오히려 제일 미운 놈이다. 화가 치민 나는 기왕 들었던 몽둥이로 윤석이의 머리통을 향해 힘을 다해 내려쳤다,
‘펑’하는 소리와 ‘윽’하는 소리가 난다.
순간 내가 잘못했나 하는 생각은 들지만 다른 애들은 꼼짝없이 무릎 꿇고 앉아 있으며, 미친 듯 날뛰는 내 모습을 보고 숨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않아있었다.
윤석이를 힘으로는 도저히 당할 수없는 나다. 그런데 갑자기 윤석이를 죽여 버리고 나도 죽고 싶어졌다.
“야 이 새끼야 너 때문에 지금까지 이렇게 어려운 일을 나는 했는데 너는 하루도 안지나 징징 짜고 지랄이야--엉!”
힘이 센 윤석이가 내게 덤빌 것이라는 예감에 선수를 놓치지 않으려고 몽둥이를 또 내려쳤다. 기왕 내친김이다. 이제는 겁도 안 난다. 다 죽여 버리고 나도 죽고 싶다.
그런데 나에게 덤빌 줄 알았던 윤석이는 어둠속에 얻어맞은 자기머리를 두 손으로 잡고 아파 죽겠다고 소리치며, -
“내가 모두 잘못 했으니 이제 그만 때려! 너무 맞아 머리가 아파 정말 죽을 것 같다.!”고 내손을 잡으며 살려달라며 애원한다.
머리에서 흐른 피가 얼굴을 덮었다.
달빛과 멀리서 비추는 가로등빛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만져보니 촉촉하며 끈끈하다. 엄청 세게만 느껴졌던 윤석이다.
죽기 살기로 덤비는 나이기게 윤석 이로도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그만 무릎을 꿇은 것이다.
“경수야! 아니 대장 정말미안 하다 사실 나도 모르게 갑자기 눈물이 나와서 그랬는데 대장이 이렇게 화낼 줄은 정말 몰랐다.” 고 하면서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연실 닦아내고 있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너무했구나 하는 마음이 든다.
하지만 혹여 윤석이가 덤빈다면 어찌 하겠는가? 하는 생각에 긴장을 풀 수 는 없었으나 이미 기죽은 윤석이의 돌출행동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제서야 애들보고 빨리 일어나 윤석이 머리를 닦아주라고 하고, 나는 속옷인 윗옷을 벗어 윤석이의 머리를 감싸주었다.
충분이 나에게 덤빌 수 있는 힘이 있는 윤석이다 나이도 위지만 싸움 또한 전교에서 제일 잘하는 친구다. 그런데 오늘은 그냥 일방적으로 내게 무조건 항복했다.
그도 어떨 결에 나와 의기투합했으나 점점 무섭고 거칠어지는 내 말투와 미친 듯이 흔들어대는 몽둥이가 관로에 두들겨 나는 마찰 소리와 어떻게 변해버릴지 모르는 내 모습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참아준 것 같다. 한바탕 요란을 끝내며 -
“빨리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 일찍 항구에 나가 배를 타고 갈 것이니 우선은 잠을 자야 된다.”
고 달래어 모두 각각의 하수관로에 들어가 잠이 들었다.
다들 잠든 것 같은데 나는 엎치락뒤치락 잠을 청하지만 참으려고 애쓰면 쓸수록 눈물이 왜 그리 소리 없이 자꾸만 내리는지..,
아침녘에 잠시 잠이 들었나보다.
⑾ 화폐개혁
아침이 왔다. 멋진 파이프 담배를 물고 서있는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모습과 쌍망원경을 매고 서있는 맥아더 동상의 모습이 더욱 멋있게 보인다. 우선 아침을 해결하기위해 돈 가방에서 몇 장을 꺼내어 윤석이 에게 주며 먹을 것을 마련해 오라고 지시했다. 물론 약국에 들러 치료약도 사오라고 했다. 아침 요기를 위해 주변을 돌아다니던 윤석이가 정신없이 뛰어 들어오는 머리에는 반창고가 붙어있었으며 약국에서 간단히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윤석이는 숨을 몰아쉬고 헐떡이며.!!!
“야 ‘대장’ 큰일 났다.! 큰일 났어!”
“무슨 일인데 그래”
“돈이 다 바뀌었데!”
오늘부로 화폐개혁이 된 것이다.
5.16 군사혁명이라는 타이틀로 1961년 5월16일 당시 제2공화국의 윤보선 대통령 정부를 육사8기생을 중심으로 군사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박정희정권은 이듬해 1962년 당시 사용화폐를 환에서 원으로 바꾸었다. 일만환은 일천원, 일천환은 일백원, 일백환은 일십원, 일십환은 일원,이 되었다. 모든 돈이 1:10로 변한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화폐가 신화와 구화로 구분되며 구화는 사용이 중지 되었으며, 신화로 바꾸는 것은 우선 갖고 있는 모든 돈을 은행에 입금하고 신화가 인쇄되어 나오면 그때 바꾸어가는 형식을 갖추었기에 우리는 당장 갖고 있는 돈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모든 친구들을 불러 긴급회의를 했다. 현실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화폐를 갖고 있으니 아무소용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번개파’를 해체 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론을 내리고 자유공원을 내려왔다.
돈 가방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을 들어서는데 어머니와 마주쳤다.
그런데 어머니는 “어디 갖다. 이제오니?
밤새도록 공부했니?”
“아 예--- 윤석이네 집에서 공부 했어요”
“음 그랬구나.”
별다른 의심 없이 그냥 지나친다.
‘후-휴---’,
안도의 마음으로 가슴이 쓰러 내려진다.
그동안 경비로 많이 쓰여 졌지만 얼른 금괴를 열어 남은 모든 돈을 제자리에 넣었다. 한숨을 내리쉬고 자리에 앉으니 잠이 쏟아진다.
누워 막 잠을 자려는데 아버지와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일꾼 두 명이 들어온다.
할아버지는 금괴를 열어 돈다발을 세어본다. 장부에 돈다발 수량을 기록하며, 자루에 넣어 밖의 일꾼들의 지게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은행에 갖고 간다며 집을 나선다. 온 집안이 북적댄다. 내 마음은 조마조마하게 뛴다. 억지로 자는척하고 있지만 들킬까봐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아마도 일일이 돈을 세지 않고 다발 수만 맞추어서 자루에 넣어 가는 모양이다.
아~휴~ 정말 철없어 저질러 놓은 ‘미성년자 가출미수사건’ 아니 그보다 ‘미성년자 특수절도 및 가출미수사건’ 이 맞을 것이다.
환상의 세계를 동경한 너무 미련한 철부지들의 모험이 아니겠는가? 신이 돕나보다. 화폐개혁이라는 특수상황 속에 나의 엄청난 완전범죄사건은 영원히 미궁으로 빠지는 행운이 온 것이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짓 하지말자!
휴우--!
세상에 이럴 수가...,
계속자자...,
그래 자자. 철부지야
머릿속으로 되뇌는 말
에이 정신 나간 바보 휴우 ---,
바보 미친놈 철부지 !’ 얼빠진 바보. 병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