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달라졌다. 물론 제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백현을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그대로였다.
"가을."
"...."
"가을아."
"..으응,"
"일어나. 응?"
가을은 다시 잠이 늘었다. 투정도 늘었고, 칭얼거리는 것도 예전보다 더 늘었다. 식욕도 갑자기 늘었다. 날아가는 나뭇잎에도 웃었고, 티비를 보다가도 울었다. 그만큼 생각하는 시간도 많아졌다.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난 만큼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시간도 늘었다. 항상 가을이 보이지 않아 어디있나 살펴보면, 작은 방에 꼭 문을 닫고 들어가 1, 2시간 뒤에 나왔다.
그런 가을의 옆에서 가만히 기다리던 백현은 점점 가을이 걱정되었다. 가을은 문을 잠구고 들어가 생각했다. 대체 언제부터 저가 이렇게 됐나. 모든 건 자신의 앞에서 약해지는 백현을 보기 시작한 그때부터였다. 극단적인 생각이 들때면, 차라리 제가 백현의 옆에 없었으면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백현의 앞에서는 자신을 더 꽁꽁 숨겼다. 마음의 문을 더 꼭꼭 닫았다. 요즘따라 백현이 자꾸만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끙끙거리는 소리에 잠이 깨면, 항상 제 옆에서 식은땀을 흘리는 백현이 눈에 보였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가을은, 제가 모든 불행을 몰고 다니는 것 같았다. 딱 그때, 자신이 납치된 그 이후부터. 모든 삶이 삐그덕거리기 시작했다.
백현을 너무나도 사랑하는데, 다른 나약한 생각이 사랑을 이겨버릴까 봐. 그게 너무 무서웠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공포심이 자신의 사랑을 갉아먹을까 봐. 가을은 백현이 집을 잠시 비울 때마다 울고, 또 울었다. 자신을 만나기 전, 자유로운 백현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러다가 또 울컥한다.
"가을아, 밥 안 먹어?"
"...안 먹어도 돼."
"그래도,"
"조금만 더 잘래..."
"..그래."
가을이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파묻는다. 그런 가을을 보던 백현이 가을의 머리를 쓸어넘겨준다. 다시 곤히 잠에 든다. 백현은 생각한다. 도대체 어디부터 잘못되었을까. 자신은 그저, 가을을 재촉해서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곧 문을 열고 나올 거라고, 그렇게 가을이를 믿었을 뿐인데.
백현은 가끔씩 꾸는 악몽에 새벽마다 눈을 뜰 때가 많다.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제 옆에 가을이 잘 있나 확인하는 것이었다. 한 번은 눈을 떴을 때 제 옆에 가을이 없어, 그 새벽에 일어나 온 집안을 다 돌아다녔는데. 그 새벽에, 혼자 베란다에 나가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캄캄한 밤하늘을 계속 올려다보고 있는 가을이 보였다.
뭐라고 하고 싶어도. 베란다에서 나온 가을이 저를 보는 표정이, 꼭. 너무 쓸쓸해 보여서. 백현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저를 보면서 미소를 짓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방에 들어가 다시 잠에 청하는 가을을 보며 백현은 울고 싶어졌다. 제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속상함도 들었지만, 제게 말하지 못하는 가을의 속마음은 누구보다 곪았을 것을 알기에.
오후 1시. 더 자고 싶다는 가을의 옆을 끝까지 지키던 백현이, 끝내 일어나지 않는 가을의 이마에 한번 버드키스를 남기고는 거실로 나온다. 쇼파에 앉았다. 맍은 편, 큰 티비화면의 깜깜한 화면에 저 모습이 비친다. 항상 제 옆에 있었는데. 이 쇼파에 나란히 앉아 제 곁을 지키던 가을이었는데. 이제는 같은 공간에 있어도 멀리 있는 기분이었다.
한 번은 평소처럼 제 옆에 앉아있는 가을에게 기대있다가. 평소처럼 꼭 껴안고. 평소처럼 입을 맞췄을 뿐인데.
'...왜 울어.'
'....'
'가을,'
'그냥.'
'....'
'...좋아서.'
백현은 그런 가을을 그저 꼭 껴안아 줄 뿐이었다. 우는 가을의 얼굴을 제 가슴팍에 기대고. 그저 저는 맺힌 눈물을 흘려보내지 못하고 닦아낼 뿐이다. 어느 날은 아무렇지 않은 척이 아닌, 정말 예전처럼 아무렇지 않았다가. 또 바로 그 다음날은 펑펑 울었다가. 다시 다음날은 잠만 자고. 하루하루 다른 모습의 가을을 보던 백현은 속이 썩어문드러지기 시작했다.
고요한 쇼파에 가만히 앉아 생각하던 백현은, 어느새 잠에서 깨 제게 다가오는 가을을 꼭 껴안았다. 그러자 가을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얌전히 백현에게 안긴다. 백현은 제게 안긴 가을의 뒷통수에 입을 맞춘다.
"뭐야..."
"왜."
"나 머리 안 감았다구.."
"무슨 상관이야."
"..더럽잖아."
"나한텐 안 더러워."
가을이 그런 백현에게 주책이라는 듯이 허벅지를 한번 콩 때린다. 그제야 백현이 미소를 짓는다. 가만히 따뜻한 품에 안겨 있던 가을이, 또 잠이 쏟아지려는지 하품을 한다. 백현은 가을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가을에,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본다.
"..나 영화 보고 싶어."
"영화? 무슨 영화?"
"음.. 그냥 아무거나?"
"아무거나? 그냥 보면 되지."
"아니아니... 말구."
"그럼?"
"영화관 간지 우리 오래됐잖아."
가을이 영화관에 가자며 저를 조른다. 피식 웃은 백현이 고개를 끄덕이곤 가을을 안아 들어 화장실로 들어갔다. 씻고 나온 가을이 머리를 귀엽게 올려묶고, 이쁘게 원피스를 꺼내입는다. 오랜만의 데이트에 신나 보이는 가을이 방긋 방긋 웃으며 화장을 한다. 그런 가을의 모습을 보던 백현이 따라 웃는다.
백현에게 손을 내민 가을에, 손을 맞잡은 백현이 가을의 신발을 신겨준다. 거의 3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에. 제일 빠른 영화를 보고, 저녁을 먹고 들어가기로 했다. 제일 빠른 시간대에 있는 영화는 그저 그런 액션 영화였다. 가을은 사실 액션 장르를 좋아하지 않는다. 백현은 다른 영화를 보자고 했지만, 가을은 꾸역꾸역 고집을 피워 그 영화를 예매한다. 그리고선 제가 쏘는 거라며 영화표도 먹을거리도 가을이 다 산다. 그리고 결국 가을은 곯아떨어졌다.
액션 영화라 빵빵한 사운드 속에서 잘만 잤다. 백현은 그런 가을을 굳이 깨우지 않았다. 가을의 손을 깍지 껴 잡아 제 입에 가져간다. 향수를 뿌리지 않아 가을의 본연의 향기를 좋아했다. 손등을 앙 깨물었다가 쪽 쪽 입을 맞추기도 하고. 가을의 손을 열심히 괴롭히던 백현은, 영화가 거의 끝나갈 때쯤 가을을 깨웠다.
비몽사몽 일어난 가을은 애써 안잔척을 해보지만, 백현의 앞에서 먹힐리가 없다. 머쓱한 듯 허허, 웃은 가을이 백현의 손을 맞잡아 다급히 끌고 나온다. 뭐가 그리 다급한지. 거의 첫 번째로 상영관을 나온다. 가을이 먹지 않아 거의 새것인 팝콘과 음료수도 그대로 버렸다.
"그러니까 다른 거 보자고 했잖아."
"아니, 뭐.. 내가 잘 줄 알았나."
"돈 다 버렸네."
"괜찮아. 나 배고프다. 저녁은 백현이가 사자."
"그래, 백현이가 사자."
뻔뻔하게 백현의 팔에 팔짱을 껴 온 가을이 저녁밥을 사라고 한다. 백현은 가을이 말 안해도 그럴 생각이었기 때문에, 그런 가을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본다. 주차장으로 향한 가을에게 백현이 뭐가 먹고 싶냐고 묻는다.
"..음, 고기 먹고 싶다."
"고기?"
"응, 완전 개비싼 거."
"레스토랑이라도 갈까?"
"헐, 백현. 나 완전 뽕 뽑을꺼야."
"그래, 가을이 하고 싶은 거 다 해."
"후회하지 마라, 백현아."
신난 듯 가을이 웃는다. 저절로 방긋 올라온 볼살을 귀엽게 꼬집은 백현이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차를 부드럽게 이끈다. 옆에서 열심히 종알종알거리는 가을의 목소리를 들으며 운전하던 백현이 생각한다. 딱, 옛날로 돌아간 것 같다고. 그러다 쓸쓸해진다. 우리에게 이런 평범한 일상이 언제 옛날이 되어버렸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현은 가을을 탓할 마음은 없었다.
제 앞에서 스테이크를 먹고. 여느때와 같이 사진을 찍고. 적절히 욕도 섞어 가며 감탄하는 가을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백현은 지금까지 제가 생각하던 불안한 마음을 지웠다. 그래. 가을이 제 문을 열어 이제 나올 준비를 하고 있는 거라고. 백현은 가을을 보며 웃었다.
저녁식사까지 마치자 7시가 살짝 지나 선선한 여름 저녁이 되었다. 이대로 들어가기 아쉬운 가을이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조른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디저트로 먹고 가려 했더니. 그게 아니란다. 그냥 막대 아이스크림 하나만 된다길래. 한 봉투를 사주려 했다. 그러다가 등짝을 한 대 얻어맞았다.
"그거 아니야, 백현. 내려놔."
"아, 이거 아니야?"
"그냥 하나면 된다고. 이거 물고 나랑 산책하러 가자!"
가을은 제가 평소에 좋아하던 스크류바를 입에 물고 백현의 손을 잡아 이끈다. 한 손에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백현의 손을 잡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여기 몽룡이가 진짜 좋아하는 데잖아. 고등학생들 진짜 많네. 쟤들도 다 커플이야. 우리도 커플이지. 그치?
그런 가을의 머리를 쓰다듬은 백현이, 미처 앞에서 오는 자전거를 보지 못한 가을의 몸을 끌어당긴다. 그러다 가을의 손에 쥐어져있던 아이스크림이 바닥에 떨어진다. 치. 바람 새는 소리를 낸 가을이 백현을 흘겨본다.
"백현. 너 일부러 그랬니."
"가을아. 조심해야지."
"내 아이스크림 탐나면 그렇다고 말을 하면 되는 거 아니니."
"하,"
"잘못했어, 안 했어?"
"잘못했어."
"그치?"
"응. 내가 어떻게 하면 돼?"
이번에도 뻔뻔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오던 가을이 백현의 마지막 말에 입을 꾹 닫는다. 또 무슨 이상한 걸 시키려고 그러나. 골똘히 생각하던 가을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냥, 건강하기?"
"그게 뭐야."
"너 요즘에 악몽 엄청 꾸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리고 가을의 이어진 말은 더 예상밖의 대답이었다. 저가 악몽을 꾸고 있다는 것을 가을이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항상 제가 악몽에서 깨고 나면 가을은 제 옆에서 곤히 자고 있었기 때문에. 허, 헛웃음을 터트린 백현이 가을을 바라본다.
베시시 웃은 가을이 이제 들어가자며 저를 이끈다. 9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아, 오늘 겁나 알차게 데이트 했다. 나 늦게 일어났는데, 그치? 가을이 백현의 손을 잡으며 콩콩 뛴다. 그런 가을의 걸음에 치맛자락이 나풀거린다. 백현은 그런 가을을 바라본다.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이쁘고, 아름다워서. 백현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집에 들어오니 딱 9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가을이 그대로 침대에 엎어진다. 화장 지우기도 귀찮고. 옷 갈아입기도 귀찮고. 그런 가을의 다리에 손을 넣어 안아들은 백현이 화장실로 향한다.
"뭐야..."
"내가 해줄게."
"..웬일로 착한 일?"
"가을이한테 이쁨 받으려고."
"..지금도 많이 받고 있으면서."
"지금도 나 이뻐하고 있어?"
"...응, 엄청."
"영광이네."
가볍게 웃은 백현이 폼클렌징을 꺼내 가을의 얼굴을 살살 씻겨주었다. 양치도 해주고. 다 씻겨주고 나온 백현이 가을을 침대 위에 올려놓는다. 가을의 눈에는 피곤함과 졸림이 한가득이었다. 그런 가을의 이마에 한번 입을 맞춘 백현이 화장실로 들어간다.
금방 씻고 나온 백현이 침대 위에 잠에 든 가을을 발견했다. 이불도 안 덮고, 백현이 눕혀준 그 자세 그대로 색색거리면서 잠에 들고 있었다. 잠이 든 가을의 얼굴을 구경하다가. 이마에 한 번, 코에 한 번, 양 볼에도 한 번. 귀에도, 턱에도. 그러다가 마지막엔 입술에 입을 맞춘다.
입을 다신 백현이 그런 가을에게 좀 더 깊게 입을 맞춰왔다. 가을은 잠에 들락말락하다가, 자신의 입에 들어온 이물감에 놀라 눈을 뜬다. 제게 눈을 뜨며 입을 맞추는 백현을 본다. 열심히 혀를 섞는다. 그러다가 백현이 가을의 허리를 안아 들어 제 무릎 위에 앉힌다. 입술에 있던 입이 점점 아래로 내려간다. 가을의 잠옷 안에 손을 넣어 허리를 살살 쓸어내리던 백현이, 가을의 잠옷 단추를 하나 둘 풀어내린다. 그대로 가을을 눕힌다.
잠옷 상의를 완전히 벗겨내린 백현이 가을의 몸 이곳저곳에 입을 맞춘다. 가을의 입에서 탄성 어린 신음이 튀어나온다. 침대 아래에는 저들의 옷가지가 벗겨져 하나 둘, 떨어진다. 어느새 완전히 나체가 된 둘은 서로를 끌어안는다.
백현은 자신의 밑에서 눈물을 흘리는 가을에게 열심히 입을 맞춘다. 끙끙거리는 가을이 백현의 목에 팔을 감아온다. 가을의 눈에서 뚝 뚝 떨어지는 눈물을 핥아올린다.
"으, 으윽.."
"가을아."
"아, 아!"
"..사랑해."
"흐윽.."
"사랑, 해."
"하아..."
"문가을, 사랑해."
살이 격정적으로 부딪히는 소리가 방 안을 울린다. 가을은 그런 백현을 더 꽉 끌어안는다.
그날 밤, 백현은 오랜만에 악몽을 꾸지 않았다. 꿈 속에서 어김없이 등장한 가을이 저에게 사랑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달려온다. 사실 백현이 꾸던 악몽은, 꿈속에서 가을이 자꾸만 저를 떠났다. 눈물을 흘리면서, 저에게 아픈 말을 던지면서 멀어져갔다.
백현은 이번에도 가을이 저를 매정하게 밀어낼 것을 예상했는데. 그 반대로 가을은 아까 낮에 못지 않은 이쁜 옷을 입고 백현에게 하루종일 사랑한다고 했다. 입꼬리가 자동적으로 올라간다. 꿈에서 깬다. 눈을 뜬다. 아침 햇살이 커튼을 뚫고 방안에 들어온다.
백현이 습관적으로 제 옆에 누워있을 가을을 끌어안았다. 아니, 끌어안으려 했다. 손에 걸리는 것 없이 텅 빈 옆자리에 눈을 뜬다. 또 베란다나, 방 이곳저곳에 혼자 들어가 울고 있으려나.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누가 그랬나. 꿈은 현실과 반대라고. 백현은 원망했다. 항상 악몽을 꾸던 저가, 갑자기 그런 행복한 꿈을 꾼 것을.
가을이 베란다에 없었다. 항상 잠에서 깨면 여기 있었는데. 작은 방에 들어간다. 방에도, 거실에도, 부엌에도, 심지어 창고에도. 백현의 집 어디에도. 가을이 없다.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이후...]
연락도 되지 않는다. 온 집안을 배회하다 백현은 갑자기 느껴지는 쎄함에 저가 나온 침실로 다시 들어가본다. 침실 옆에 옷장이 열려있다. 가을의 캐리어가 없다.
누가 그랬나. 꿈은 현실과 반대라고. 백현은 원망했다. 꿈속에서 행복하던 가을과 저의 모습은 현실의 어디에도 없었다. 그 어디에도.
가을이 사라졌다. 백현의 계절이, 백현의 사랑이, 세상이. 그렇게 사라졌다.
그렇게 소리도 없이 무너졌다.
열등감은 좋지 않은 감정이다. 그로 인해 느껴지는 자격지심들도. 가을도 안다. 그래서 몇 번이나 지웠다. 열심히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어차피 백현의 옆에서 느껴지는 그 모든 사랑들이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날 만큼 좋아서.
그러다 순간 마음이 나약해진 건, 그때부터였다. 제 앞에서 불안해하는 백현을 보면서. 하루가 다르게 악몽으로 끙끙 앓으면서도. 그러면서도 저를 먼저 챙기는 백현을 보면서. 제 앞에서 약해지는 백현을 보면서. 가을은 방향을 잃은 기분이었다. 나 때문에 약해지고, 무너지는 백현을. 저대로 둬도 될까. 백현이 약해지는 모든 전제는 '나'라는 사람 앞인데. 내가 백현의 앞에 있어도 될까.
하지만 가을은 몰랐다. 백현은 그저 가을이 제게 마음의 문만 열어주면, 모든 게 다 제자리일 텐데. 그럼에도 가을은 몰랐다. 제가 하루가 다르게 울고, 방에 들어가 고민하고, 생각하고. 그런 날들이 늘어날수록. 백현은 자신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그 무력감에 나약해졌던 것인데. 가을의 앞에서 의연한 척 티를 내지 않던 백현이었기 때문에.
가을은 몰랐다. 둘 다 서로에 대해 무지했다. 나만 참으면, 내가 기다리면. 나만 사라지면, 내가 버텨주면. 둘 다 서로에 대한 배려가 오히려 독을 불러 일으켰다.
한없이 마음이 시들어가던 가을은, 시든 마음 속으로 다른 바람이 불어들어오고 있다는 것 조차, 자각하지 못했다. 백현이 저 때문에 불안함에 떨기 시작한 그때. 저가 납치를 당한 날. 그 날만 없었으면, 내가 고등학생 때 제대로 처리를 했었으면.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곧. 아니야. 나도 힘들었는데. 그 일때문에 누구보다 힘든 게 나 자신인데. 그런 일만 없었어도. 저가 이렇게 망가지지 않았고, 흉터가 생기지 않았고. 학업에도 집중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백현이가 내 곁에 있어서 다행이다. 백현이가 아니었으면 어쩌면 완벽히 처리하지 못했을 지도 몰라. 이번에 완벽히 꼬리를 자를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렇다면, 백현이 없었으면? 저 혼자 해결할 수 있었을까? 아니. 이제는 백현이 없이 나 혼자 무언가를 스스로 할 수 있기는 한가?
제자리를 빙빙 도는 기분이었다. 백현은 저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고. 저는 그런 백현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기생 같은 존재. 백현은 저만 없으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다가 문득 이 상황이 서글펐다. 이런 생각까지 하고 싶지는 않은데, 너무 불공평하다고 느껴졌다. 세상을 다 가진 백현과, 그런 백현이 있어야만 하는 가을.
극단적인 생각의 끝에 다다른 가을은 서러워지기 시작했다. 분명 자신은 백현을 사랑하는데. 누구보다 사랑하는데. 사랑하는 마음만 가지고 이 관계를 이어가기가 두려웠다. 자신의 마음이 안정될 때까지 쉬고 싶었다. 이렇게 억지로 백현의 옆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런 가을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백현도 고통스러울 것이다.
진짜 이러고 싶지 않은데.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가을은 다시 생각한다. 백현이 곤히 잠든 사이 베란다로 나가서 생각에 잠긴다. 저가 항상 위험에 빠지고, 혼란스러워하고, 아파할 때마다 백현이 곁에 있어줬으니까. 짠하고 나타나서 저를 다시 위로 데리고 올라갔으니까. 이번에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가을은 이내 곧 마음이 부서진다. 저가 깬 사이를 못 참고 가을을 불안하다는 듯이 찾아다니는 백현의 모습에. 그리고 이내 마주친 그 얼굴이. 또 악몽을 꿨는지 수척해져 식은땀을 흘리는 그 모습이.
그러다 다시 생각한다. 이번엔 안 될 것 같아. 백현이 이런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자신을 알고. 또 손을 내린다면. 이번엔 제가 그 손을 끌고 나락까지 떨어질 것 같아서. 그래서 가을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가을은 그날따라 늦게 일어났다. 사실 그날도 가을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행복해하는 가을과 백현.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그 모습에.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계속 자고 싶었다. 그 꿈을 계속 꾸고 싶었다. 그렇게 백현이 없는 침실에서. 제 비어버린 옆자리를 알면서도. 잠에 깨고 들기를 반복하다가 더 이상 행복한 저들의 모습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는 일어나 백현에게 다가갔다.
가서 되도 않는 억지를 부렸다. 당장 나가고 싶다고. 영화관에 가자고. 아마 꿈에서 본 저들의 행복한 모습을. 그 감정을 현실에서도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가을은 다짐했다. 지금 이 순간은 아무 생각 하지 말자고. 그렇게 백현을 끌고 영화관에 데려와 좋아하지도 않는 액션 영화를 예매했다. 저는 액션을 좋아하지 않지만, 백현은 좋아했다.
제가 영화를 예매하고, 그렇게 상영이 끝난 영화관을 나올 때쯤엔, 백현이 저를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이 순간에도 너는 내가 먼저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아무 걱정 없이 즐길 법도 한데. 아무 생각 하지 말자던 그 다짐이 깨질 것 같아, 급하게 백현을 데리고 나와 배고프다며 칭얼댔다.
비싼 레스토랑에 가서, 맛있는 밥을 먹고. 그 조명이, 모든 분위기가. 정말 완벽한 데이트를 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여느 때처럼 평화롭게 백현의 손을 잡고 걷고. 저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가다가 삐진 척, 투정도 부려보고. 완전히 찾아온 어둠에 가을은 집에 들어가자며 칭얼거렸다.
가을의 모든 칭얼거림을 받아낸 백현은 가을을 화장실로 데려가 씻겨주기까지 했다. 제 얼굴을 살살 닦아내는 그 손길을 느끼며 편안했다. 저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뭐야..."
"내가 해줄게."
"..웬일로 착한 일?"
"가을이한테 이쁨 받으려고."
"..지금도 많이 받고 있으면서."
"지금도 나 이뻐하고 있어?"
"...응. 엄청."
"영광이네."
내가 너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그냥, 그냥.. 나는 쉬고 싶은 것 뿐이야. 내 마음이 너무 병들어서. 너한테 옮겨갈까봐. 그래서 나는 쉬고 싶어, 백현아.
오랜만에 아무 생각 없이 데이트를 마치고 들어와 피곤한 몸이 금세 곯아떨어졌다. 잠에 들기 직전 급하게 입을 맞춰오는 백현에 살짝 놀라기도 잠시, 금방 밀어내지 않고 받아주니 제 옷이 하나 둘 벗겨진다.
저를 어루만져주는 이 순간에도, 백현은 저를 배려하고 있었다. 그 손길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고개를 들었다. 이제 막 11시가 지나가고 있었다. 가을은 생각했다. 오늘 하루 아무런 걱정 하지 말자고. 아직 오늘이 끝나기까지 1시간이 남았다. 그냥 이 순간, 백현의 사랑을 마음껏 만끽하고 싶었다. 마지막인것처럼. 어쩌면 정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순간을.
"으, 으윽.."
"가을아."
"아, 아!"
"..사랑해."
"흐윽.."
"사랑, 해."
"하아..."
"문가을, 사랑해."
제게 사랑한다며 고백하는 그에게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그의 품에 안겨서 벅찬 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가을은 눈을 감았다. 제게 사랑을 말하기도 벅차 보이는 백현의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가을은 제 위에서 몇 번이나 콘돔을 까는 백현을 말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기적이고 싶었다. 백현이 제게 주는 사랑을 넘치도록 느끼고, 느끼다가. 어느새 정신을 차리면 캄캄한 새벽이었다. 뒷처리까지 깔끔하게 다 한 백현이 제 옆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백현이 악몽을 꾸지 않길 바랐다. 가을이 백현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춘다.
침대에서 일어서 발을 디딘 가을이 조심히 제 캐리어를 꺼낸다. 당장 많이 가져갈 것도 없다.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로만 챙기자. 짐을 챙기면서 가을은 멈칫했다. 제 손에 들린 남색 와이셔츠. 플리츠 스커트. 반팔 티. 연청 스키니진. 제 옷의 절반이 백현이 사준 것이었다. 가을은 괜찮다며 극구사양을 했지만, 그런 가을에게 대놓고 선물을 하던 백현이었다.
결국, 결국엔.. 다 백현에게서 얻은 것들이었다. 제 짐 중 정확히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가을이 눈물을 흘린다. 이것들 중 원래부터 자신의 것이었던 것이 없다. 어쩌면 저라는 존재 자체도. 백현이 주는 달콤함에 갇혀 3년동안 벗어나지 않았다. 그만큼 백현에게 길들여진 저조차도.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다급히 손을 들어 흘린 눈물을 닦는다. 이제는 제가 이렇게 눈물을 흘려도, 혼자 감당해야겠지. 자신의 눈물을 닦아주던 백현은 없겠지. 바닥에 끌려 소리가 나지 않도록, 가을이 제 몸만한 캐리어를 낑낑 들어 나간다. 그러다 문득, 다시 백현의 얼굴에게로 시선이 향한다. 속이 콱 막힌다. 이 순간에도 아침에 일어나 제 비어있는 옆자리에 저를 찾을 백현의 모습이 비춰진다.
내가 갑자기 사라져 연락도 안 되면... 많이 당황하겠지. 화도 날 거야. 지금 이게 뭐 하는 건가 싶겠지. 이렇게 아무 말 없이 사라지면, 헤어짐을 떠나 예의도 없는 거겠지.
가을이 조심스레 제 책가방을 열어 작은 종이 한장을 찢어낸다. 검은색 볼펜을 딸깍인다. 백현의 이름을 먼저 적어 운을 뗀다. 다 적은 종이를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그대로 등을 돌린다. 미안해, 백현아
백현아. 일어났어? 밥은 먹었어? 일단.. 내가 없어서 많이 놀랐지. 놀랐을 거야. 그렇지? 내가 어디에 있나 집안 구석구석을 뒤져보겠지. 나한테 연락도 하고. 근데 나는 받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너무 힘쓰지 마. 백현아, 나 사실 너무 아팠어. 마음이 너무 아팠어. 분명 너는 알고 있었겠지. 알고 있었음에도 나한테 묻지 못했겠지? 이제서야 말해서 미안해. 나를 계속 기다렸다는 것도 알았는데. 나는 겁이 많아서 차마 너의 얼굴을 보면서 말 할 수가 없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냥 너무 미안해. 너가 혼자서 쓸쓸하게 나를 기다린 그 시간동안, 내가 내린 결론이 이것밖에 없어서. 나는 이제 쉬고싶어. 내 마음의 병이 너무 커져서, 너를 이렇게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 그런 내 옆에서 약해지는 네 모습도 보기에 이젠 너무 지쳤어. 다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바닥까지 떨어진 내 자존감과 열등감이, 너의 사랑의 무게보다 무겁더라. 그래서 나는 자신이 없어. 가끔 그런 생각을 해. 그냥 우리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그런 생각. 그날 그 편의점 앞에서, 나는 그냥 너한테 지나가는 여자였고, 나한테 너는 지나가는 선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런 생각. 백현아 나 사실, 그때 다 듣고 있었어. 너가 나한테 하는 말들. 네가 나한테 무슨 생각을 가지고 다가오는지도, 다 알고 있었어. 이제야 말해서 미안해. 너 죄책감 가지라고 하는 말은 아니야. 어찌 됐든, 우리는 같은 마음이었으니까. 오랜 시간을 같이 보냈으니까. 나는 네 옆에서 도망치는 게 아니야. 나한테서 너를 놓아주는 거야. 백현아, 네 옆에 있어서 나 많이 강해졌어.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가.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돼. 나 때문에 약해지지 말고 무너지지도 마. 울지도 말고 악몽도 꾸지마. 아프지도 말고. 그동안 고생했어. 수고했어. 미안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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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답답해진다. 소리도 못내고 눈물이 그렇게 떨어진다. 떨어진 눈물이 종이를 적신다.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니야, 아니야. 호흡이 가빠진다. 그대로 종이가 백현의 손에서 찢어진다. 아니야, 이건. 이건 아니야. 애써 부정한다. 주먹을 올려 콱 막힌 제 가슴을 퍽퍽 두들긴다. 죽을 것 같아.
어떻게 니가 나한테 이래. 어떻게. 백현의 손에서 갈기갈기 찢긴 편지가 제 의미를 잃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대로 일어서서 그 종이쪼가리를 짓밟는다.
내가 주는 사랑이 얼마나 하찮고 작게 느껴졌길래 그럴 수가 있어. 저 때문에 악몽도 꾸지말라는 말에 미친듯이 고개를 내젓는다. 하필 가을이 떠나고, 기막히게도 행복한 꿈을 꿨으니. 걸음을 비틀비틀 다시 침실로 옮긴다. 남겨진 가을의 옷을 본다. 저가 가을에게 선물했던 옷들만 남겨져있다. 정말 작정하고 숨어버린 가을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이 느껴졌다.
항상 가을이 사라질까, 빼앗길까, 외부의 모든 존재를 경계했는데. 백현은 깨달았다. 그 무엇보다 위험했던 건 가을, 그 자체였다는 걸. 어젯밤 저의 품에 안겨 눈물만 주륵주륵 흘리던 가을을 떠올린다. 너는 그때부터 계획하고 있었나. 아니면 그 전부터? 내 옆에 있으면서 나를 떠날 생각을 했어?
가을이 항상 저에게 물어왔다. 너는 나한테 왜 화 안 내? 그 말에 저가 하는 말은 항상 같았다. 너한테 화가 안 나는 걸 어떡해.
백현은 처음으로 가을, 그 자체에게 분노가 치솟았다. 감히, 감히 저를 두고 사라졌다. 머리를 쓸어올리던 백현이 하, 하고 실소를 터트린다. 눈에서는 아직 멈추지 못한 눈물이 미친듯이 흘러내리고, 입은 입꼬리를 애써 끌어당겨 웃는다. 그래, 날 떠났어. 날 버렸어. 네가...
분노와 집착에 정복된 눈이 번뜩인다. 지금껏 이렇게 큰 분노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테이블 위에 반짝거리는 가을의 반지가 보인다. 그 반지를 제 주먹에 꽉 쥔다. 가을과의 첫만남을 떠올린다. 저를 미친듯이 피해다녔던 그때의 가을을. 그때에도 내가 어떻게든 계속 따라다녔는데. 지금이라고 못 할 것 같아? 백현의 두 주먹이 떨렸다.
가을아, 니가 나를 버린 거야.
그런데 나는 다시 너를 데려와 내 옆에 앉힐 거야. 그러니까, 그때의 너는...
너는 내 말을 거역해서는 안 돼. 내 말만 들어야 해.
감히 내 옆에서 그딴 생각을 하고 떠나버린 너를.
나는 용서할 수가 없어. 그래서 다시 너를 데려올 거야.
죄를 지었다면 내 옆에서 벌을 받아.
내 옆에서만 아파해. 내 옆에서만 행복하고, 내 옆에서만 웃고 울어야 해.
네가 진정 나한테 미안함을 느낀다면,
내가 너를 씹어 삼켜도 너는 가만히 있어야 해.
알았지, 가을아?
/
"문가을, 너..."
"...."
"너, 대체...."
새벽부터 집을 나와 갈 곳을 잃은 가을은 제 몸만한 큰 캐리어를 들고 진아에게 연락을 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받기는 할까 걱정하던 차에, 진아는 그런 가을의 걱정을 깨고 연락을 받았다. 이제 막 잠에서 깬 것 같은 목소리였다. 진아에게는 미안했지만 가을은 서론, 본론 다 제치고 결론만 이야기했다. 나 좀 네 집에서 한동안 재워주라. 진아는 당황했지만 일단 제 집으로 오라고 말을 전했다.
"가을아."
"...."
"무슨 일이야, 너 왜."
"...."
"아니, 일단 이 꼭두새벽부터..."
"...."
"그 짐은 또 뭐고,"
"나 집 나왔어."
"...뭐?"
"..백현이 집에서 나왔어."
이어서 가을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진아는 이제 황당함을 넘어서 할 말을 잃었다. 백현과 가을은 교제하는 동안 거의 단 한 번도 싸우지 않았기에. 하지만 가을의 손에 들려있는 캐리어를 보며 진아는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아침도 아니고, 이 새벽부터 제 짐을 질질 끌고 나온 것을 보면, 백현 몰래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진아는 이 상황을 설명하라는 말보다는 일단 가을을 부엌으로 데려와 앉히고는 물 한컵을 따라주었다. 가을의 볼에 매말라 남아 있는 눈물자국이. 가을의 마음 또한 좋지 않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진아에게 가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도망쳤어."
"응?"
"도망친 게 아니라고, 비겁한 핑계만 적어놓고."
"...."
"..그 사람한테서 도망쳤어."
"...."
"이러다 정말 죽을 것 같아서..."
가을이 눈물을 뚝뚝 떨어트린다. 채 지워지지 않은 눈물길 위에 새로운 눈물이 떨어진다. 가만히 떨어지는 눈물을 느끼다 깨달았다. 진짜 나왔구나. 내가, 진짜.. 진짜 끝이구나.
"...사랑하기에 너무 벅차, 그 사람은."
"...."
"내 옆에 있으면,"
"...."
"우리 둘 다 죽을 거야."
진아는 끝까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묻지 않았다. 가을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었다. 가을이 제 앞에서 주구장창 백현 욕을 한다면, 맞장구 쳐 줄 수도 있었다. 가을이 손등으로 제 볼에 문댄다.
"이제 어떡하지..."
"...."
"..나 혼자서 어떡해야,"
"...."
가을이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고 엉엉 눈물을 터트린다. 진아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우는 가을의 등을 토닥여 줄 뿐이다. 위로의 말 한 마디도 함부로 꺼낼 수 없었다. 그렇게 아픈 새벽이 지나가고 있었다.
/
→가을아, 아윤이가 정교수님 수업 자료 좀 전달해달라는데.
→잠깐 볼 수 있을까?
백현의 집을 나온지 몇 일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이 지옥같은 시간이 빨리 끝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간도 보지 않았다. 대충 4, 5일 정도 지났겠거니 짐작만 할 뿐이다. 가을의 핸드폰은 밤, 낮, 새벽 가릴 것 없이 불이 나도록 울려댔다. 온통 백현에게서 온 전화, 문자들이었다. 어느새 전화는 100통이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미친듯이 쏟아지는 백현의 연락 사이에서 종인에게 연락이 왔다. 같은 교수님 수업을 듣는 가을이 아윤에게 잠시 수업 프린터물을 빌려준 적이 있었다. 그것을 다시 돌려주고 싶다며 온 연락이었다. 가을은 핸드폰을 들었다.
←아무때나 상관없어요. 혹시 지금 시간 되세요?
→응, 나도 괜찮아.
←그럼 지금 카페에서 만나요.
→그래~
종인과 간단한 연락을 마친 가을이 주섬주섬 제 옷을 껴입는다. 무난한 청바지에 검은 반팔 티를 입은 가을이 모자와 동글한 안경을 쓰고 진아의 집을 나왔다. 어느정도 가라앉은 붓기를 가리기 위함이었다. 택시를 탈까 하다가 그냥 걷는 게 좋겠다 싶어 하염없이 걸었다. 최대한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걸었다.
거의 카페에 다다른 가을이 핸드폰을 다시 들어 종인에게 연락을 했다.
←오빠 어디 계세요?
←저 한 2분? 정도면 도착할 것 같아요.
대충 도착했다며 종인에게 문자를 넣어보지만, 답장이 없다. 자신이 보낸 메세지 옆 1은 그대로다. 이제 횡단보도만 건너 조금 걸어가면 카페에 도착이다. 가을은 종인에게 전화를 걸어보지만 전화도 받지 않는다. 뭐야.. 조금 늦었다고 이러는 건가, 이 오빠.
아무 생각 없이 초록불이 들어온 횡단보도를 건넌 가을이 거의 다다른 카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핸드폰만 보면서 걷던 가을이 도착한 카페 앞에서 고개를 올리자,
"...."
"야."
"...."
"가을아."
종인은 어디에도 없고 종인 대신에 서있는 백현의 모습에 그대로 몸이 굳는다.
"가을."
"...."
"문가을."
"...."
"대답해."
백현이 점점 제게 다가온다. 숨이 멎을 것만 같다.
"아."
"...."
"이젠 목소리도 들려주기 싫어?"
"...."
다가오는 백현을 피해 뒷걸음질을 친다. 얼굴을 제대로 마주볼 수 없어 고개를 숙인다. 그런 제게 점점 빠른 속도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이러다가 정말 제게 닿을 것 같은 백현에 가을이 그대로 뒤를 돌아 도망친다. 아니, 도망치려 했다.
"가을아."
"...."
"..씨발, 내가.."
"...아.."
"...너 때문에."
달려가는 제 손목을 붙잡아 몸을 돌린 백현이 제 손목을 세게 쥐어온다. 가을의 입에서 아프다는 듯, 소리가 나와도 더더욱 가을의 손목을 쥔 손에 악력이 가해진다. 그대로 가을의 손목을 잡고 어디론가 질질 끌고 간다. 가을이 온몸을 다해 발버둥치자 백현이 머리를 한번 쓸어올리곤 사람이 잘 들어다니지 않는 건물 사이 골목으로 가을을 데려간다. 그 와중에도 가을이 또 도망갈까, 잡은 손에 힘을 풀 수가 없다.
"대답 좀 해봐, 어?"
"...."
"내 연락은 그렇게 씹으면서,"
"...."
"김종인 연락은 기가 막히게 보네."
"...."
"입 열어."
"...."
"아무 말이라도 해."
"...."
"..진짜 씹어먹어버리기 전에."
백현에게 손목이 잡힌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한 가을이 제 몸을 벌벌 떤다. 그런 가을의 모습에 멈칫한 백현이 손에 쥔 힘을 살짝 푼다.
"...나는,"
"...."
"...."
"말 해."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가을이 입을 연다.
"...그만할래."
"...."
"나는 그만할 거니까..."
"...."
"..너 알아서 해."
가을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백현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다. 그리고는 허, 하고 헛웃음을 낸다.
"그딴 말 들으려고 온 게 아닌데."
"...."
"대체 언제부터 그럴 계획이었어?"
"...."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으면서."
"...."
"내가 너한테 사랑한다고 했던 그 모든 말이 우스웠겠네."
"...."
"네가 느끼는 그깟 감정들이 뭐길래,"
"...."
"..씨발."
"...."
"사랑한다고 했잖아."
"...."
"지금 내가 말하는 것보다 그게 더 커?"
백현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가을이 백현의 손을 뿌리친다. 제가 백현에게 느낀 죄책감, 열등감, 자격지심. 그런 것들을 '그깟'이라고 칭한다. 가을이 참지 못한 눈물을 뚝 떨어트린다.
"뭐? 그깟?"
"...."
"네가 말하는 것처럼... 나한테도,"
"...."
"..나한테도 그렇게 느껴질 거였으면 애초에 이러지도 않았어."
"근데 왜,"
"나는!"
"...."
"...네 옆에 있으면 이제 숨이 막혀."
"...."
"내가 너한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넌 모르면서."
"...."
"네 옆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게 얼마나 죄스러운지 알아?"
"...."
"내가 너한테 느끼는 열등감과 죄책감이, 너에 대한 사랑보다 더 크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 너?"
"...."
"...너는 세상을 다 가졌잖아."
"...."
"..그렇게 살아왔잖아..."
"...."
말을 마친 가을이 백현의 몸을 밀치고는 그대로 뛰쳐나간다. 도망간다. 백현은 제 눈앞에서 멀어지는 가을을 가만히 바라본다. 하. 가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점점 멀어져 사라져가는 가을을 보며 생각한다.
다시 내 옆에 데려올 때는, 다리를 분질러 놔야 할까. 아예 어디 방에 가둬야 하나. 아니면 니가 나한테서 멀어질 때마다, 니 주위에 있는 사람을 하나하나 죽여놓으면,
니가 날 떠나지 않을까.
백현은 제 손에 쥔 가을의 반지를 주먹쥐어 꾹 잡아온다. 또 도망갔어. 벌써 두 번째야. 어떻게 해야, 네가 돌아올까. 대체 어떻게 해야, 네가 내 손 안에 들어올까. 백현은 생각한다. 어차피 제가 이렇게 찾아가봤자, 가을은 더 멀리 멀리 도망갈 테니. 그렇다면,
네가 날 필요로 하게 만들어야겠지.
네가 니 발로 다시 돌아오게 만들어줘야겠지.
백현이 쓴웃음을 짓는다.
가을아, 너 절대 못 도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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