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 관촉사 –
뭇중생 사랑하는 법문(法門)의 자비심(慈悲心)은
사파(娑婆)의 고해(苦海)에서만 행하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란 것을 반야산(般若山)은 말한다.
제 몸을 살라버려 밝혀주는 불꽃은
어둠속 에서 더 한층 빛나는 줄 알았는데
한낮에 빛을 뿌리며 관촉사(灌燭寺)는 서있다.
뭣이든 들어주실 큰 귀를 가지시고
연꽃을 건네이며 자애로 내려다보시는
유난히 입술 두툼한 두상(頭狀)뿐인 얼큰이
발아래 아낙이 한낮을 밝혀놓아
촛불 흐느끼게 엎드려 삼배(三拜)하며
완벽한 균형이라고 암시하는 손곧춤
모내기 한창인 촌락은 화평한데
미간의 옥호에서 내품는 빛줄기 따라
놀뫼의 벌판 너머로 대자대비(大慈大悲) 퍼지다.
배달9202/개천5903/단기4338/서기2005/05/27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1) 법문(法門) : 중생이 불법으로 들어가는 문
2) 사바세계(娑婆世界) : 범어(梵語)를 감인토(堪忍土), 인계(忍界), 인토(忍土)라고 번역된다.
석가모니 세존이 출세하신 이 세계(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이름이다.
3) 반야(般若) : 범어 Praj의 음역, 만물의 본질을 이해하고
불법(佛法)의 참다운 이치를 깨닫는 지혜.
반야는 지혜 또는 밝음의 뜻이 있다. 모든 사물의 도리를 밝게 보며
근원적 진리를 막힘없이 드러내는 큰 지혜인 것이다.
4) 얼큰이 : 두상이 불균형적으로 큰 은진미륵의 애칭,
미륵(彌勒) : 범어 Maitreya의 음역, 일설에 메시아도 여기서 발원되었다 함.
석가모니불의 뒤를 이어 57억 년 후에 세상에 출현하여
석가모니불이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
5) 삼배(三拜) : 삼례(三禮)는 주례(周禮), 의례(儀禮), 삼배(三拜)의 3가지를 뜻하는데
여기서 3배란 쉽게 3번 절을 한다는 뜻으로 불교에서 절을 할 때 주로 사용하며
부처님을 공경하고 나를 낮추는 행위의 표현으로 절을 하는 숫자는
최소 3배에서 9배·21배·108배·1080배·3000배 등으로 여기서 3배가 나왔다.
6) 손곧춤 :합장(合掌).
7) 놀뫼 : 충남 논산 지방을 말함.
8) 자비(慈悲) : 부처가 중생을 불쌍히 여겨 고통을 덜어주고 안락하게 해 주려는 마음.
덧붙임)
2005/5/20 논산 취암 주택전시관 개관.
놀뫼라는 논산에 왔으니 그 유명한 은진미륵님을 뵙지 않을 수 없지.
5/27(일) 시간을 내어 관촉사를 홀홀단신 오르다.
근심이라곤 없을 것 같은 시골 아낙 하나가
은진미륵 앞에 촛불을 켜 놓고
엎드려 절하며 기원하고 있다.
촛불은 어둠 속에서 더 한층 빛나고,
사악함이 가득한 이승에서만
미륵의 대자대비가 필요한 줄 알았는데
야트막한 반야산 기슭에 올라서야 그게 아니란 것을 알았다.
촛불은 진정으로 밝은 대낮에 더욱 아름답게 빛나고
선함이 가득한 세계에서 또한 무량 공덕이 더더욱 필요함을 알겠다.
그래서 미래에 오실 메시아인 미륵님은 지금도
저승의 도솔천에서 끊임없이 수행하고 계심인가?
論山, 黃山)의 어원적 고찰
이곳 지방 토양이 누런 빛깔이어서 '놀뫼'[黃山]였는데,
1914년 일본인들이 놀뫼에 가장 가까운 한자음을 골라 논산(論山)이라 하게 되었다.
삼국사기지리지에 "黃山郡 本百濟 黃等也山郡 景德王 改名 令連山"이라 기록되어 있어
누를황(黃)과 니을연(連)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니을연은 사람들이 줄을지어 섰을때 "늘어섰다"고 한다.
또 "늘다", 늘이다(엿가래)등의 기본형인 "늘다"가 이미 백제시대에 사용되어 왔다.
그래서 "늘다"는 누를황과 동음이의어였던 것이다.
그래서 산이 늘어선 까닭으로 황산이라 하였는데
그 뜻은 "느러뫼"이며 후대에 와서 연산으로 고쳐진 것이다.
따라서 백제어에 "누르"와 "느러"의 두 단어가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놀뫼"는 "느러뫼"가 변하여 불리어진 지명이다.
논산은 포효하는 호랑이 형상을 하고 있는
한반도의 단전부에 위치해 있는 중요한 힘의 원천지로
선사 시대부터 조상들이 정착하여 온 곳으로,
삼한시대에는 마한이 위치하고
삼국시대에는 백제가 위치하여
계백장군이 이끄는 5천 결사대와 신라의 김유신이 이끄는 5만군대가
황산벌을 중심으로 백제 최후의 결전을 벌인 곳이다
논산에 사는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네가 연산의 가마솥과 은진미륵과 강경의 미나(내)다리를 보았느냐`고
물어본다고 하여, 반드시 구경해야할 이 지방의 명물이, 물음의 세 가지이다.
관촉사 방문기
충남 논산시(論山市) 은진면(恩津面) 반야산(般若山, 해발 100m) 기슭에 있는 절인
관촉사(灌燭寺)는 논산 시내에서 건양대 방향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10여 분을 달리면(3km) 도착한다.
법당은 1386년(우왕 12) 건립해 1581년(선조 14)과 1674년(현종 15)에 중수했으며
1735년(영조 11) 다시 중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경내에는 관음전·삼성각(三聖閣)·사명각(四溟閣)·해탈문·현충각 등의
당우가 남아 있으며,
석조보살입상(보물 제218호)과 석등(보물 제232호)을 비롯해
사리탑·연화배례석·사적비 등이 있다.
가는 길에 벚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는 논산~관촉사간 643번 도로를 지나게 되는데,
이 길은 4월이면 온통 연분홍 벚꽃으로 뒤덮여 많은 이들이 찾는다.
또 봄만큼은 아니지만 가을 단풍철에도 이 길은 행락객들로 넘쳐난다.
날씬하게 솟은 일주문을 지나 다소 펑퍼짐해 보이는 천왕문에 이르면
대한 불교 조계종 제6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인 관촉사로 드는 산문이 펼쳐진다.
그리 울창하지 않은데다 말끔하게 새로 단장된 계단길이라
다른 사찰 진입로에 비해 운치는 덜하다.
하지만 오른편으로 보이는 '나무아미타불'이라 적힌 바위에
파랗게 이끼 돋은 모습이 고찰다운 풍치를 자아낸다.
보재루를 지나 경내로 들어서자
거대한 2층 규모의 대웅보전이 제일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고려 우왕 12년에 창건된 고찰치고는 새로 지어져
고풍스런 멋이 느껴지지 않는 대웅보전을 스치듯 지나자
관촉사의 중심 당우인 미륵전이 보인다.
미륵전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들자 처마 밑으로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서 있는 거대한 석불 하나가 보인다.
흔히 '은진미륵(恩津彌勒)'이라 부르는 이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은
언뜻 보기에도 푸근한 고향집 어머니 같은 미소를 짓고 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그 편안함을 능가하는
높이 18.12m, 둘레 9.9m, 귀의 길이 1.8m, 관 높이 2.43m로 국내 최대 석불이다.
또 얼굴과 갓 부분이 절반을 차지하는
우스갯말 로 '얼큰이(?)' 부처여서 은진미륵은 더욱 정이 간다.
마치 가분수 인형 같다. 석불의 제작 시기는 고려 광종 때로 전하며,
석불의 머리에는 2중의 보관(寶冠)을 얹고 있는데,
자연 암반 위에 허리 부분을 경계로 하여 2매의 별석(別石)으로 구성되어 있다.
머리부분을 보면 머리카락을 구름무늬처럼 조각하고,
머리 위에는 정으로 다듬은 흔적을 그대로 두면서 상면에 8각형의 관을 씌웠다.
2중의 보관은 하단에 8엽의 연화(蓮花)가 장식되어 있으며
보관 네 구석에 청동제 방울을 달고 있다.
얼굴은 상협하광(上陜下廣)의 형태로서
이마가 좁고 턱이 넓은데 눈은 옆으로 길게 돌아갔고
코, 입, 귀는 얼굴의 크기에 비해 매우 크게 표현되어 있다.
특히 귀는 양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목은 매우 굵고 삼도를 선명하게 표현했으며,
좁은 어깨에는 통견의 법의가 걸쳐 있다.
양손은 가슴까지 올려 바른손은 앞가슴에서 꽃가지를 들고 있고
왼손은 수평으로 올려서 가슴 앞에서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즉 아미타여래의 중품하생인을 표현하고 있다.
불신의 하단부는 법의가 양쪽 어깨에서 길게 드리워지면서
앞부분에서 U자형의 주름을 잡고 있는데 선각처리에 의해 꾸미고 있다.
불대좌는 없이 석불 자체를 자연석 위에 올리고 거기에 직접 발을 조각하고 있다.
이 상의 특징은 우선 크기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으로
불상예배의 경외심을 돋우어주는 신앙적인 효과가 크다.
이러한 위압감은 얼굴과 손이 신체의 다른 부분에 비해 크게 표현되어
그 효과가 더욱 강조되었다.
상의 크기에 비해 불신(佛身)의 표현은 소홀하여
어깨가 좁고 가슴이나 허리의 구분이 별로 없는 원통형이다.
천의(天衣)의 표현이나 옷주름도 매우 단순하다.
이마 위에 늘어진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나
두 귀의 가운데로 걸쳐 있는 보발(寶髮)의 표현,
허리 밑으로 늘어진 앞치마처럼 생긴 둥근 옷자락의 표현 등은
고려초 보살상들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들이다.
이러한 특징은 강릉 신복사지석조비로자나불상(神福寺址石造毘盧遮那佛像)이나
연산의 개태사석조삼존불(開泰寺石造三尊佛)의 협시보살상과 같은
고려 초기의 불상들에서도 볼 수 있는데, 관촉사 불상은 보다 도식화된 면을 보여준다.
높은 원통형의 관(아마도 금속관이었을 것이나 지금은 없어짐) 위에
다시 사각형의 이중 보개(寶蓋)를 얹고 있는 것이라든지
연화가지를 들고 있는 수인(手印) 등은 도상(圖像)면에서도 매우 특이한 요소이다.
보개는 중국의 상에서는 보이지 않는 요소로, 아마도 상을 보호한다는 의미 또는
상의 위용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로 제작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독특한 모습의 보살상은 이후 고려에서 유행하여
비슷한 상이 여럿 조성되었는데,
그중에 부여 대조사(大鳥寺)의 석조보살입상이 대표적이다.
백호(白毫)를 수리할 때 발견된 묵기(墨記)에
"正德十六年辛巳四月十五日"이라고 적혀 있어 조성시기의 파악에 참고가 된다.
그런 은진미륵에는 재밌는 전설 하나가 전해내려 오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한 여인이 반야산에서 고사리를 꺾다가
아이 우는 소리를 듣고 가보았더니
아이는 없고 큰 바위가 땅 속으로부터 솟아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바위에 불상을 조성할 것을 결정하고
혜명에게 그 일을 맡겼다.
〈동국여지승람 東國輿地勝覽〉 권18 은진조와
1744년(영조 20)에 세워진 사적비(寺蹟碑)를 보아
광종연간(950~975)에 승려 혜명이 조성한 불상임을 알 수 있다.
혜명(慧明)은 968년(광종 19)명을 받고 970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36년 뒤인 1006년에 불상을 완성했으나
불상이 너무 거대하여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자승 두 명이 삼등분 된 진흙 불상을 만들며 놀고 있었는데,
먼저 땅을 평평하게 하여 그 본을 세운 뒤 모래를 경사지게 쌓아
그 중간과 윗부분을 세운 다음 모래를 파내었다.
혜명은 돌아와서 그와 같은 방법으로 불상을 세울 수 있었다.
뒤에 생각하니 그 동자승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변신해 가르침을 준 것이었다.
불상이 세워지자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 석불의 몸을 씻어주었고,
21일 동안 상서로운 기운이 서렸으며,
미간의 옥호에서 발한 빛이 사방을 비추었는데
석조미륵상이 발산하는 빛을 좇아 중국에서
명승(名僧) 지안(智眼)이 와 예배했다고 하여 관촉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 밖에도 이곳 은지미륵에 얽힌 이야기는 많다.
중국에 난이 있어 적병이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이 불상이 노립승으로 변하여 옷을 걷고 강을 건너니
모두 그 강이 얕은 줄 알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과반수가 빠져 죽었다.
중국의 장수가 칼로 그 삿갓을 치자 쓰고 있던 개관이 약간 부서졌다고 하며
그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또 국가가 태평하면 불상의 몸이 빛나고,
난이 있게 되면 몸에서 땀이 흐르고
손에 쥔 꽃이 색을 잃는다는 등의 전설도 전해오고 있다.
그리고 이 불상에 기도하면 모든 소원이 다 이루어졌다고도 한다.
은진미륵 앞으로 미륵전과 나란히 일자로 서 있는 석등과 배례석도 눈길을 끈다.
석불 바로 앞에 있는 석등(보물 제232호)은 방형식 고려 석등으로,
크고 장중하나 1층 화사석의 네 기둥이 가늘어 조금 불안한 느낌을 준다.
또 석등에서 약 10m 떨어진 배례석(충남 유형문화재 제53호)은
절을 찾은 불자들이 부처에 제물을 바치던 곳으로, 연꽃 세 송이가 새겨져 있다.
하늘을 향해 화사하게 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연꽃무늬 배례석을 뒤로 하고
다음으로 찾아간 곳이 은진미륵 바로 앞에 있는 미륵전이다.
이 미륵전 안에는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고 유리창을 두어
법당 안에서도 밖에 있는 은진미륵의 하얀 미소가 보이도록 해 이채롭다.
이 외에도 관촉사에는 종루, 삼신각, 해탈문 등의 볼거리가 있다.
이 중 관촉사 삼신각은 올라볼 만한데,
단정하게 정리된 계단을 따라 오르는 길이 운치있을 뿐 아니라
은진미륵과 키 높이를 맞출 수 있어 무엇보다 좋다.
또 아침에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출도 장관이다.
황산벌 비닐하우스 단지 사이로 붉게 올라오는 아침해는
바다 일출과는 또 다른 감흥을 안겨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