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장성을 보지 못한 사람은 수원 화성을 가보라. 북경의 만리장성을 가면 주로 팔달령으로 올라가 끝없이 펼쳐진 장성을 본다. 진시황때 처음 시작했지만 명.청까지 계속 보수를 한 것이다. 또한 그런 무모한 행태에 희생당하고 눈물흘린 민초의 모습이 더 떠오른다. 너무 길어서 실제 성을 따라 걷는 것은 1킬로 남짓이다.
수원성 남문역할을 하는 것이 '팔달문'이다. 이름도 비슷하거니와 이곳에서 팔달산으로 올라가는 맛이 만리장성에 오르는 것과 흡사하다. 그렇다. 화성은 우리 나라 성곽문화의 백미다. 외국성곽의 장점만을 흡수해 완벽하게 건설된 도시 성곽이며, 또한 세계 최초의 계획된 신도시라는 알고 있는가?
화성은 1997년 12월에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세계유산중 입장료 안받는 곳은 여기 뿐일걸.... 성의 둘레는 5.7km 이며, 단순히 성곽의 역할뿐 아니라 41개의 아기자기한 유적지들이 보면 그저 신기에 가까울 뿐이다.
팔달문을 지나면 재래식시장을 거쳐야하는데 민초의 살 냄새를 마음껏 맡을 수 있어 좋았다.
2. 화성 건축의 미
수원의 행정청은 수원남쪽 8킬로 떨어진 화성군이다. 사도세자의 능을 이곳에 이장하면서 읍성과 민가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팔달산 아래 이곳으로 옮기고 읍명을 화성이라 했다.
남인의 영수이자 개혁정치의 최고인 채제공이 성역의 총지휘를 맡고, 다산 정약용이 축성의 모든 과정을 계획, 감독했다. 특히 그의 발명품인 활차와 거중기가 큰 힘을 발휘했다. 2년6개월만에 이 대역사를 끝냈다. 이는 이전에 비해 5분의 1이 단축되었고, 당대최고의 기술과 능력을 집약시킨 것이다.팔달산에 둘러싸인 계곡과 지형의 고저, 굴곡에 따가 돌과 벽돌을 적절히 쌓은 기술력에 머리가 숙여진다.
3. 화서문
장안문과 화서문 사이 노변 주차장은 무료다. 이곳에 주차하기 어려우면 화서문 안쪽에 공간이 보인다. 이곳엔 소풍 나온 학생들이 많다. 남녀가 끼득끼득...나도 저런 적이 있었지.
성벽을 따라 간다. 개나리꽃이 유난히 노란색을 내품는다. 화서문으로 올라가는 길을 택했다.
화서문은 수원성의 서문이며, 보물 403호다. 홍예문위에 단층문루가 세워져있으며 반월형 옹성이 한쪽으로 터져 있다. 중앙에 마루를 깔았으며 팔작지붕으로 아담하다.
4. 서북각루
조금 오르니 누각을 세워 성곽주변을 감시하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설물인 각루가 보인다. 화성엔 4개의 각루가 있다. 안엔 온돌방을 만들어 군인이 숙식 할 수 있도록 했다.
5. 서장대
서장대는 수원성 가장 높은 팔달산 정상에 위치한 수원성의 총지휘본부다. 이곳에서 성안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모든 동정을 살필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여기에 쇠뇌(여러화살이 한꺼번에 나가는 무기)를 발사 할 수 있는 '서노대'가 서장대 뒤에 있다.
2층누각으로 지은 서장대는 독특한 외양을 가지고 있다. 1층은 3칸의 정방형 평면이고, 모두 비어 있다. 둥근기둥 12개를 세우고 팔모의 화강석 주초를 받쳤다. 2층에 올라가면 사방100리가 보인다. 정조가 능참배를 위해 이곳에 방문할 때 이곳에서 군사를 직접 지휘했다고 한다. 장군복을 입은 봉사자들이 있어 사진도 찍고, 질문도 해도 좋다.
6. 효원의 종
평화의 종인지. 잘 기억은 못하겠는데 3천원을 내면 두번 치게 하는 종소리를 들은것 같다. 시도 때도 없이 종이 울려댄다.
7. 서포루
포루는 성의 치성위에 지은 누각으로 성내 이동하는 아군의 동향을 적이 알지 못하도록 설치한 군사대기사설이다. 성밖으로 7미터나 돌출 되었고, 누각엔 판문이 있으며 전안을 설치하여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했다. 도깨비문양의 총구를 볼 수 있다. 문양이 앙증맞다.
8. 서남암문
암문은 성곽의 비밀통로로 성곽의 굴곡된 부분이나 후미진 곳, 수목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설치 되어잇다. 적에게 보이지 않도록 양식이나 물자등을 반입하고나 사람들이 은밀히 내왕하는 용도로 만들어져 있으며 문 크기도 말 한필이 다닐 수 있도록 좁다. 이곳에는 벚꽃이 많이 피어 절경을 만들어낸다. 이곳에서 아래로 내려가면 '팔달문'이 나온다. 정말 만리장성 걷는 맛이 난다.
만리장성을 올라 갈때 도저히 얼굴을 들 수 없엇다. 치마입은 중국여인들의 팬티가 눈에 들어와 얼마나 민망한지... 정말 노래처럼 ' 빨간 팬티, 노란 팬티, 찢어진 팬티, 어쩌다 노팬티...'
9. 인포메이션센타
여기서 지도 한장 달라고 했더니, 나보고 어디 기관에서 나왔냐고 물어 본다. '그게 아니고..아마추어 답사객'이라고 했더니 지도 한장 던저 준다. 그 옆에 있는 서적이 뭐냐 물었더니.. 기관에서 나온 사람을 위해서.. 말을 흐린다. (아직도 안기부에서 사찰하나...)
10. 팔달문
보물 402호로 지정된 수원성 최고 아름다운 성문이다. 근데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홍예문과 옹성을 지켜 보았다. 옹성엔 '오성지'라는 시설이 있어 적의 화공시 물을 이용하여 끌수 있도록 만든 것이 눈에 띤다. 다음에 와서 또 봐야지...
복원 공사 때문에 유일하게 성곽이 끊어진 곳이다. 다시 성벽에 올라가려면 건어물과 야채 노점상이 있는 '지동시장'을 거쳐야한다. 시끌벅적한 사람냄새를 맡으니 당시 상인의 채취를 느낀다.
11. 봉돈
성의 동쪽의 통신시설이다. 5개의 커다란 연기통을 내었으며, 성곽 밖으로 5미터나 돌출 시켜, 여러개의 총구가 있어 봉돈을 방어했다.. 잘 쌓여진 벽돌의 진수를 맛본다.
낮에는 연기를 밤에는 불길을 밝혀 성주변에 알린다. 여기서는 용인 석성산(에버랜드) 봉수에 신호를 보낸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면 불길도 내지 못하고 연기도 품을수 없다. 이 경우 어떻게 신호를 보내는지 아는가? 답. 말타고 가서 알린다. (남산봉수대 아저씨가 얘기해 줬음)
12. 치성
치는 성곽의 요소요소에 성벽을 돌출시켜 전방과 좌우방향에서 성벽에 접근하는 적벽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로 화성에 10개소가 있다. 치는 꿩이란 뜻으로 본래 꿩은 몸을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하기 때문에 붙였다.
13. 창룡문
화서문과 비스하며, 6.25때 문루와 홍예가 손상되어 75년에 옛 모습대로 복원했다.
14.연무대와 활터.
아마 논산훈련소를 '연무대'라고 하는데 이걸 보고 그랬을거다. 멋드러진 팔작지붕이다. 이곳은 수원성 동쪽군사들의 지휘하던 훈련장이며 '동장대'라고한다. 즉 연병장의 지휘본부다. 빈터에 누각만 남은 것을 복원시킨 건물이다. 웅장하고 위엄이 넘쳐흐르는 건물이다.
그 옆에 활터가 있다. 시민들이 국궁를 하며 심신을 단련한다. 정조도 활쏘기를 좋아했다는데..
15.방화수류정 (동북각루)
방화수류정은 화홍문 동쪽 높은 벼랑에 세워져있다. 한국의 건축미와 정자문화를 맘껏 자랑한다. 또한 주위 경관도 수려하여 정자아래에 용연지를 꾸몄다. 한가운데 인공섬을 꾸며,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시킨다.. 시민들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누워서 하늘을 보는 연인의 모습이 보인다.
누각은 2층이며 돌과 벽돌 그리고 목재를 함께 조화를 이루어 화려하고 우아하다. 달밤에 방화수류정이 용지에 비칠 때 달빛을 타고 하강하는 듯한 환상에 잠기게 되는데 이 아름다운 경승을 '용지대월'이라 하여 수원팔경의 제일로 친다.
16. 화홍문
방화수류정 바로 아래에 있으며 무지개 모양의 7칸 홍예다리는 우리나라 홍예다리 가운데 가장 길다.
7개의 홍예사이로 칠간수가 흐르며, 정조는 수원팔경의 하나로 '화홍관창'이라 하여 폭포수가 옥같이 부서지는 장관을 즐겼다고 한다. 비가 안와서 그런지 물이 없다.
17. 장안문
장안문의 수원성의 북문이며 정문에 해당한다. 수원의 관문이면서 시가지 중심부에 위치한 수원시의 상징이다. 홍에문의 높이는 거의 4미터가 되며, 누각은 2층의 팔작지붕으로 위풍당당하다. 장안문을 싸고 있는 옹성이 눈에 띤다.
성문의 성곽은 전시에는 적의 목포가 되지만, 평시에는 성곽의 외관을 돋보이게 하는 아름다운 의장기능을 한다. 특히 옹성만 뺀다면 서울의 숭례문과 거의 흡사하다. 단지 문루 네 귀에 높은 기둥이 없는 것이 다르다. 시내복판이지만 성곽과 연결하는 육교를 만들어 직접 들어가 관찰할 수 있었다. 숭례문을 매일 보면서 들어가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는데 여기서 대리만족을 한다.. 이곳도 역시 장군옷을 입은 봉사자들이 있었는데 계단에 햇볕을 쬐며 담배를 태우는 모습이 눈에 띤다.
18. 끝맺는말
정조의 효심, 정약용의 실학정신을 몸소 느낀다. 한바퀴 도는데 3시간 정도다. 만약 이런 시간도 없다면 성 바깥쪽으로 도는 드라이브 코스도 있다. 팔달산자락 안에 행궁도 있는데 시간이 여의치 않아 다음에 보기로 했다. 이 행궁은 당시에 570칸의 대규모 건물이다. 즉 수원성 축성은 정조의 효성에서 비롯된 결단이지만 실은 개력정치의 이상을 수원에서 펼치며 마무리 하고자 했던 것이다.
실권세력인 노론벽파에게 탕평책과 규장각으로는 약화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조는 수원성 완공 후 다음해 49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집권세력의 음독설도 간혹 나온다. 이후 조선은 쇠퇴의 길을 걷는다. 그렇지만 화성의 화려함은 오늘에 이른다. 일제 강점기나 6.25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었지만 축성공사의 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를 참고했기에 복원을 온전하게 한 것이다.
3시간의 화성답사는 내게 큰 감동을 주었다. 돌 하나 벽돌하나에도 정조의 효성과 정약용의 과학정신이 배어 있음을 상기 할때 다시금 그냥 지나칠수 없었다. 성벽도 견고할 뿐 아니라 자연과 순응하는 배치와 화려한 건물모습에 그저 머리를 숙일 따름이다.. 개인적으로 만리장성보다 더 높게 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