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맞는 것 같다. 여기는 자연적인 공간이 아니라 인위적인 공간이며 사술이 만들어놓은 공간임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온다. 이마와 코와 뺨에 살랑살랑 부딪혀 시원한 촉감을 일으키는 게, 과연 실제 바람일까하는 의구심이 일었다.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
-저벅저벅!
앞쪽에서 검은색 옷에 삿갓을 쓰고 긴 칼을 든 무리들이 걸어온다. 한눈에 봐도 무예가 높은 조선시대 무사나 자객 같다. 평범하게 걸어오는데도 분위기를 압도하는 포스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일이지?
느닷없이 칼을 든 자들이 어떻게 나타났을까? 내 앞에 나타난 이유는 또 뭐고?
필시 좋은 일은 아닐 터.
20미터 간격을 두고 발걸음을 멈췄다. 하나같이 초절정 고수처럼 보이는 3명의 무사들. 가운데 있던 무사가 삿갓을 위로 슬쩍 올렸을 때에야 비로소 얼굴이 드러났다.
아니, 저자는?
방금 전, 복도에서 3명의 남자 중에 가운데 서있던 남자. 정장에 넥타이를 맨 채로 주문을 외웠던 사내의 외모와 매우 흡사했다.
“오랜만이군.”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주위를 둘러봐도 들을 사람은 나밖에 없다. 오랜만이라면 예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라는 뜻인데. 하지만 내가 알 만한 사람이 아니다. 난생 처음 보는 자다.
내가 뻘쭘해 하자, 더 큰 목소리로 아는 척을 해왔다.
“이보게, 친구! 그래도 지난날 동고동락한 사인데, 서로 인사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말이 큰 영향을 주었는지, 몸속에서 뭔가가 크게 꿈틀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전에 라희가 어떤 손짓을 했을 때 뱃속에서 요동치던 현상과 비슷했다.
이제야 감이 온다.
박평!
저자의 인사는 내 안의 존재, 박평에게 하는 거였다. 꿈틀거리는 것은 박평이 반응하고 있는 것이고.
이윽고 중저음의 묵직한 목소리가 내 안에서 흘러나왔다.
[그래, 인사는 해야겠지. 생전, 자네의 외모와 비슷한 자를 골랐어. 못 본 지가 어느덧 170년이 넘었네그려.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은 정말 몰랐네. 반가우이, 채수 교관!]
라희가 보여준 영상 속 말고는 박평의 목소리를 실제로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선입견이 생겨서일까? 지난번 영상에서 기괴한 목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거부감이 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사내들의 진한 우정이 말투에서 배어나왔다.
“우리에게도 좋은 시절이 있었어. 그때가 그립구만. 자네는 선우회를 이끌고, 나는 에가리스 주술사들을 교육하고...일 마친 후 버드나무 밑 주막에서 막걸리 한 사발 걸칠 때, 기억나나?”
[그럼. 그때를 어찌 잊겠나? 자네도 그렇고, 선우회 전우들과 함께 했던 시간도...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라네.]
현재 두 사람은 죽은 후에 영혼이 빙의된 상태에서 다시 만나는 사이다. 못 본 지가 170년이 넘었으며 선우회 얘기가 나오는 걸 보면, 두 사람의 살아생전일 때는 영상 속의 언급처럼 조선 제25대 왕이었던 철종 때라고 봐야 한다.
박평과 채수!
서로를 향한 깊은 신뢰가 대화를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예전에는 좋았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하는, 회한(悔恨)의 정도 묻어난다.
이제 대화가 끝나고 나면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모르긴 해도 무시무시한 싸움이.
JP캐피탈에서 싸우다가 주술공간으로 넘어온 이유를 추론해보면 간단하다. 수순을 밟았다고 보는 게 맞을 듯. 먼저 약한 놈들을 상대하게 해서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했겠지.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 주술공간으로 넘어온 거고.
애초부터 나보다는 내 안의 존재인 박평을 상대하기 위함이었을 터. 내가 강해진 이유도 근본적으로는 박평 덕분이라고 봐야 할 테니까.
“박평 자네가 대군마마를 배신하지만 않았어도 우리 관계는 나빠지지 않았을 거다. 안 그런가?”
[무슨 소리를 하는가? 난 대군마마를 배신하지 않았다. 대군마마가 나를 배신했지.]
“이보게, 박평! 자네가 대군마마의 누이동생 화연공주마마를 연모해서 그 끔찍한 일들이 일어난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다네.”
[공주마마를 연모한 건 부인하지 않겠네. 하지만 그게 다였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 자체도 죄가 된단 말인가.]
“이보게, 이 사람아! 우리 같은 칼잡이가 왕족의 공주를 넘보면 어찌 되는지 몰라서 그러는가?”
[화연공주마마는 나만 보면 눈물을 흘렸어. 궁궐이 싫다면서, 대군마마가 무섭다면서 어디 먼 데로 도망쳐서 살자고 그토록 애원을 했었지. 허나, 나는 그리 하지 않았네. 그러고 싶어도 그리할 수가 없었어.]
“아네. 자네 마음 잘 아네. 공주마마를 지켜드리고 싶어서 그리 했겠지.”
[그 일로 대군마마는 나를 벼르고 있었다네. 대군마마가 역모를 꾀한 건 채수 자네도 알지 않는가? 나는 그런 명은 따를 수가 없었네. 괘씸죄에 걸렸던 게지. 그게 빌미가 되어 대군마마는 나와 내 식솔들을 잔인하게 도륙했어.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누이동생인 화연공주마마까지 죽였어. 이게 진정 배신이 아니고 뭐겠나?]
“자네의 억울함은 알겠네마는 한번 맺은 주군은 영원한 거라네. 주군이 우리를 버리지 않는 이상, 우리가 먼저 주군을 버릴 수는 없어. 그게 우리의 운명일세, 업보란 말이네.”
[업보? 내가 명을 거역한 죄로 대군마마께 붙잡혀 고초를 당하고 있을 때, 배고픈 우리 가족들이 감자와 그 줄기를 몰래 훔쳐 먹은 적이 있었다네. 그거 한번 실컷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던 게지. 결국 관군들에게 끌려가 감자줄기를 입속에 넣고 모진 고신(拷訊)을 당했지. 그것도 성에 안 찼는지, 사지를 찢어서 죽였어. 누가 그 일을 시켰는 줄 아는가?]
“.....”
[대군마마야. 나는 대군마마를 용서할 수가 없네. 반드시 복수를 할 거란 말이네. 공주마마와 나는 죽어서도 자유로울 수가 없었던 거 알고 있나? 좋은 곳으로 가지 못한 채, 사악한 주술사가 만들어놓은 동굴의 결계에 갇히고 말았지. 그 일도 대군마마가 꾸며서 한 짓이야.]
듣다보니, 가슴 절절하고 억울하며 분노를 할 만한 사연이었다. 박평에게 이런 사연이 있었다니, 실로 놀라웠다.
왕실의 공주를 사랑했지만 공주를 지키기 위해 사랑을 포기하는 면도 그렇고, 역모를 꾀하는 주군의 명을 거스를 줄 아는 대쪽 같은 성품도 그렇고...
이처럼 이타적이고 정의로운데다 무인의 기개까지 충만했던 자가 왜 영상 속에서는 흉측한 모습으로 나왔을까? 그리고 지난날 30명이나 되는 선량한 마을사람들은 무슨 까닭으로 무참히 짓밟았을까?
한편, 대화에서 드러난 감자는 고구마를 지칭한다. 조선후기 때는 고구마를 감자라 불렀다. 연쇄살인을 당한 피해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온 표식이 바로 입속에서 검출된 고구마 줄기였는데, 박평의 가족들이 죽을 때의 모습과 흡사하다.
입속에 고구마 줄기를 넣고 살해한 엽기적인 행각에 어느 정도 실마리가 풀리는 대목이다. 그러나 대화에서 드러난 박평의 성품을 고려할 때, 전혀 납득이 되질 않는다. 앙갚음의 대상이 마을사람들일 리는 없다.
박평의 말대로 복수의 대상은 사악한 심성을 지닌 대군마마, 즉 자기 누이동생까지 죽인 영원대군이어야 하지 않을까?
“난 오늘 대군마마의 명을 받들어 자네를 죽이러 왔다네.”
[당연히 그럴 테지. 예상하고 있었네. 그런데 가능하겠는가?]
“물론 쉽지야 않겠지. 하늘이 내려준 자네의 검술실력이야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바. 그렇다 한들, 목숨을 걸고라도 명을 받들어야 하는 게 나의 임무이기도 하지. 오늘 나도 자네를 맞이하기 위해 이것저것 준비를 해왔다네.”
준비를 해왔다면?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냥은 오지 않을 테니, 회사 직원 한명을 작업했던 거고. 그러면 내가 나설 거라 짐작했겠지. 어쩐지, 임성원의 태도가 뭔가 이상하다 했다. 이 모두가 치밀한 계획 하에 이뤄진 셈.
JP캐피탈 뒤에 분명 영원대군이 있겠지. 잘 하면 오늘 영원대군을 볼 수 있겠다.
[에가리스 주술사들을 교육시켰으니까 아마도 주술을 쓸 모양인가 본데, 기대해 보겠네. 채수! 오늘이 어쩌면 마지막이 될 것 같지 않나? 왠지 슬픈 날이 되겠어.]
“나도 그리 생각하네. 자, 이제 시작해볼까?”
대화는 이쯤에서 마무리 되었다. 이윽고 채수라는 자가 들고 있던 칼을 땅에 대고 주문을 읊조렸다.
-하라바라 소바라 하다코다!
주문을 마치자, 주위에 있던 지형들이 바뀌기 시작했다. 절개지가 땅 밑으로 내려가고, 그 아래에서 검은색 물결들이 쏟아져 나왔다.
-스스스, 스스스 쉬쉬!
이게 뭐지? 바퀴벌레들인가? 검은색 물결은 살아있는 생물체들. 절지동물 갑각류 따위의 곤충 같다. 한눈에 봐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숫자. 금세 내 주위를 에워쌌다.
한 마리가 쏜살같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집게발과 곧추세운 갈고리모양의 꼬리.
전갈이다.
사방에서 시큼하고 비릿한 냄새가 코를 훑고 지나가는 걸 보면, 이 많은 전갈들이 독침으로 공격할 태세.
이게 실제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이란 말인가? 놀라워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앞에 있는 전갈을 빤히 쳐다보다가 발을 뒤로 뺄 틈도 없이, 독침이 들어있는 꼬리부분이 구두 앞부분을 콕 찔러왔다.
-아야!
세상에나! 독침이 구두를 뚫고 들어온다.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도 즉시 대응을 해줘야 할 것 같아, 발로 짓밟아 죽였다.
-찌직!
몸통 파열되는 소리가 발밑에서 들려왔다. 근데 그게 신호탄이었나 보다. 전갈들이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꼬리를 일렬로 세운 전갈들이 동서남북 사방으로 무리를 이루어 달려들었다.
방어하기에 안간힘을 썼다. 발로 차고, 손으로 털어내고,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발로 짓이겨 죽이고...하지만 끝이 없다.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독침에 얼마나 찔렸을까?
머리가 묵직해지면서 눈이 침침해진다. 사물이 둘로 보이기 시작했고, 속도 메스꺼웠다. 서있기가 힘들 정도로 악화되는 속도가 빨랐다. 게다가 몸까지 팅팅 부어오르고 있다.
어! 이러면 안 되는데.
주술공간에 들어와 처음 겪어보는 주술의 힘! 그 위력에 눌려 숨이 꽉 막혀오는 기분이다.
결국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초인적인 의지로 버틴다 해도, 육체가 받쳐주지 않으면 말짱 꽝이다.
눈을 뜰 수조차 없다. 검은 물결! 전갈들이 얼굴을 덮고 그 위에 또 덮고...그렇게 옷 속으로까지 기어들어온 전갈들로 얼굴부터 발끝까지 몸 전체가 두 겹 세 겹으로 덮여 거대한 산을 이루고도 남았다.
전갈들 입장에서 독침을 한방씩 쏘기 위해 줄을 서야 할 판. 몸은 이미 풍선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언제 터질지 몰랐다.
이렇게 끝나는가?
이처럼 허무하게?
의식이 거의 꺼져갈 무렵, 내면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잘 참아 주었다. 전갈 독이 주술공간에 적응시켜줄 뿐만 아니라 육체까지 강인하게 해 줄 거다.]
박평의 목소리였다.
다급한 상황에서는 무조건 개입한다고 하더니.
“무슨...무슨 소리야?”
[전갈 독이 몸속 신경세포를 자극하여 내 힘을 흡수할 수 있는 상태로 바꿔준 거다. 전화위복이다. 단전에 힘을 모아봐. 놀라운 일이 생길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