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기인 운익선생
낙양,
강남에서 학문의 성도가 악양이라면
강북에서는 낙양이 학문의 성도로 불리운다.
악양과는 달리 낙양의 유생들은 단단한 재력이 뒷받침이 되어 있다.
그러한 현상은 아마도 낙양이 전대 왕조들의 도읍으로
오랫 동안 영화를 누려 왔기 때문인 듯하다.
낙양성의 곳곳에 위치한 허물어진 성곽은
잃어버린 영화의 자취를 보여준다.
하나, 군력과 금력의 중심지였던 화려한 성도로써의 위엄은 사라졌더도
낙양은 여전히 세인들의 사랑 받는성도로써 화자되고 있으니...
그것은 유수한 학문의 발원지로써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운익대서원.>
낙양에서 가장 손꼽히는 서원을 들라면 맨 먼저 언급되는 서원이
바로 운익대서원이다.
창건된 연대는 비교적 짧아 중원 전체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학문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인물이라면
그 존재를 익히 알고 있었다.
원주는 운익선생 온양후,
그는 십 육 년이래
유림의 거두로서 지고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당대의 석학이었다
남과의 대면을 즐겨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와 한 번이라도 학문을 논한 인물이라면
누구라도 그의 높은 학식과 인품을 칭송한다.
혹자는 그를 대붕에 비교하니...
구름 속에 감취져 있는 그의 날개가 한 번 펼쳐지면
그의 능력이 천하를 덮으리라 한다.
청죽림,
대해를 방불케 하는 푸른 대나무 숲은
운악대서원의 또 다른 상징이었다.
이 방대한 청죽림이 있기에 운익대서원에는 담장이 존재치 않았다.
푸른 죽엽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서면
실로 무릉도원과 같은 광경이 펼쳐져 있다.
바닥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내가 시원스레 흐르고,
대리석으로 만들어 놓은 구름다리가 곳곳을 장식하고 있다
. 연못은 맑고 깊었으며
뛰어 오르는 비단 잉어는 찬사를 불러 일으키게 한다.
연뭇가의 한 정자 안,
한 명의 왜소한 노인이 난간을 짚은 채 수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노인의 키는 오척도 안돼 보였고 여윈 편이라
흡사 소인처럼 느껴졌다
체격에 비해 머리가 유난히 커서 다소 기형적으로 느껴졌다.
앞머리는 벗겨져서 어디까지가 이마인지 구분하기가 애매해 보였다.
하나, 약간은 우습게 보이는 그의 모습과는 달리
노인의 전신에서는 형용할 수 없는 신위가 서려 있었다.
특히나 그의 두눈은 신비스러우리만큼 맑았다.
어떤 아이의 동공 만큼이나 흑백이 선명한 그의 눈에서는
세상을 꿰뚫어 볼 지혜가 넘쳐 흘렸다.
이때, 말없이 수면을 응시하던 그가 손을 마주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 바로 그 수로군.
그는 정자 중앙의 돗자리위에 놓인 자단목 바둑판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그 친구를 이길 수 있겠군.
노인은 염소수염을 매만지며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이노인이 바로 운익선생으로 추앙된는 온양후였다.
그는 모든 재예에 뛰어났지만 그 중에서도 바둑을 가장 즐겼다.
그의 기력은 유림에서도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는 실력이었다.
낙곤!
그는 돗자리 위에 좌정하며 점잖게 외쳤다.
잠시 후,
청죽림의 소로를 따라서 한 노인이 모습을 보였다.
구부정한 허리에 절름발이 노인이었다
. 만일 그가 허리를 곧게 편다면
능히 거인으로 불리울 정도로 체격은 당당했다.
그의 얼굴 한쪽은 화상을 입은 듯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름은 낙곤이라 하며...
운익대서원의 유일한 종복이었다.
운익대서원은 문도들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무에
그 넓은 서원 안에는 운익선생 온양후와 그의 병약한 손녀 온주려,
그리고 그들의 수발을 받드는 낙곤만이 살고 있을 뿐이었다.
한데, 두달 전 운익선생은 파격적으로 한 명의 문도를 받아 들었으니..
낙양의 유생들은 그 인물에 대해 호기심이 대단했다.
온양후는 바둑판을 소맷자락으로 쓸며 영을 내렸다.
낙곤, 가서 용공자를 불러 오너라.
낙곤은 체격에 어울리지 않게 공손했다.
원주님, 용공자께서는 지금 춘추서고에서 범문을 탐독하고 계시는 댑쇼.
온양후는 나직이 헛기침을 했다.
, 낙곤, 네가 요즘 말이 많아졌구나.
낙곤은 얼른 머리를 조아리며 대꾸했다.
죄송하오이다 하지만 원주님께서 공자의 수학을 방해하는 자는
절대로 없어야 한다고 말씀하셨기에 소인은 그대로 따를 뿐이외다.
끄응...낙곤, 내 너같이 앞뒤가 꽉 막힌 녀석을
여태껏 종복으로 삼아 왔으니 나도 참 어지간하다.
온양후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혀를 찼다.
낙곤은 고리눈을 꿈벅이며 불멘 소리로 투정했다.
하지만... 소인이 없었다면 주인님께서는 어떻게 살아올 수 있겠습니까?
다 소인이 견마지로를 다한 덕분이외다.
견마지로...? 허허. 네가 이제 문자까지 쓰는구나.
예, 용공자께서 가르쳐 주셨는댑쇼.
공자께서는 하루에 한 시진씩 소인을 지도해 주시겠다고 하셨소이다.
그렇게 되면 소인도 일 년안으로 글을 읽게 될 것이라 했소이다.
낙곤은 우직한 미소를 흘렸다
. 온양후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한 마디 던졌다.
낙곤, 네 머리로는 글을 깨우치기가 매우 힘들다.
아니외다, 주인님. 용공자께서는 소인의 기억력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네 기억력이 좋다고...?
예,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매일매일 일어날 시간을 정확히 기억학 수 있으며,
또 삼시끼니 때를 미리 알고 음식을 장만할 수 있으며,
또 잘 시간에 어떻게 때맞춰 잘 수 있겠느냐는 것이외다.
온양후는 입맛을 다시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 아둔한 낙곤과 말상대를 한다는 일보다
피곤한 일은 아직 없기 때문이었다.
알았다, 이제 알았으니 어서 용공자나 불러 오너라.
한데 이때, 죽림 사이에서 한 명의 금의 청년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하하.. 낙노인이 수고할 것 없습니다.
저는 이미 와 있으니까요.
낭랑한 웃음소리와 함께 나타난 청년,
그는 한눈에 뜨이는 영준한 미청년이었다.
체격도 건장했으며 얼굴은 반안이나 송옥이 무색할 정도로 준수했다.
허허.. 용공자, 어서 오게나.
온양후는 한 손을 들어 그를 반겼다.
용공자, 그는 운익대서원의 문도였으나
온양후로부터 후대를 받고 있었다
. 그는 공손히 예를 표하고는 정자로 올랐다.
그가 오르자 낙곤은 그를 향해 히죽 웃어 보이고는
어슬렁 어슬렁 자신의 작업처로 갔다.
온양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침 잘 왔네.
이제 자네의 요상한 흉내 바둑을 격파할 수 있는 신수를 발견했네.
온양후는 검은 돌이 든 바둑통을 그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 용공자는 통을 받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두 달 동안나 번번히 지셨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하나 온양후는 자신있다는 듯이 웃었다.
허허..오늘의 결과가 말해줄 것일세.
이번도 역시 내기 바둑이겠지요?
용공자는 흑돌을 쥐고 먼저 천원에 착점했다.
천원에의 착수, 이것은 실로 기괴한 바둑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내기를 걸어야지,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로 만일 자네가 이기면
노부는 자네가 원하는 책을 보여 주겠네.
딱-!
청명한 음향과 함께 온양후는 좌상귀 소목으로 착수했다.
온양후는 이미 계산해 두었던 작전을 펼쳐갔다.
하나 자네가 진다면 하루종일 려아의 시중을 들어 주어야 겠네.
흉내 바둑,
이것은 집흑자만이 펼칠 수 있는 백전필승의 사이한 바둑 방법이었다.
흑돌로 먼저 천원을 차지하고 나서 백돌이 두는대로 흉내내는 바둑이다.
딱... 딱... 딱...
바둑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갔다.
용공자는 상대편을 따라 두는 것에만 신경을 쓸 뿐
별 시간을 끌지 않았다.
하나, 온양후는 중반 이래 무수한 계산을 반복하며 돌을 놓아갔다.
그는 이 집백필패로 알려진 흉내 바둑으르 격파하기 위해
무려 두 달을 고심했다.
그는 이제 그 신기한 방법으로 용공자를 격패시킬 요량이었다.
이때, 천원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엇?
용공자는 비로소 바둑이 이상하게 변했음을 간파했다.
백돌이 흑돌을 따먹는 순간 흉내 바둑이 깨진 것이다.
온양후는 시원스레 웃어 젖혔다.
허허허.. 어떤가? 패배를 시인하겠지?
용공자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예, 졌습니다.
모방이란 결코 창조를 이길 수 없는 법일세.
자네가 진정으로 바둑을 배우고 싶다면 그 사도를 버려야 할 것이네.
용공자는 멋젖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어서 려아에게 가 보게나!
약속대로 자네는 려아의 처소를 내일까지 떠나서는 안되네.
용공자는 몸을 일으키며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그럼, 잠도 한 침상에서 자란 말입니까?
예끼, 이 사람! 남녀가 유별한데 어찌 한 침상에서 잘 수 있단 말인가?
자네 혹시...려아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온양후는 염소수염을 비비꼬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용공자는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소생에게는 이미 정혼녀가 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는 온양후에게 예를 올리고는 죽림 너머의 벅향소축으로 향했다.
온양후는정자의 난간을 짚으며 그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 (신비스러운 녀석.. 볼수록 탐이 나는구나.)
하나, 그는 고개를 저으며 짐짓 커다랗게 뇌까렸다.
흠...고얀 녀석! 그래, 네 정혼녀가 얼마나 잘났기에
감히 노부의 손녀를 무시한단 말인가?
벽향소축의 정실,
아늑한 실내는 간촐하게 꾸며져 있었다.
안쪽 벽에 걸린 묵화 족자와
창문가에 놓인 세개의 청란화분이 전부였다.
창문옆에 하나의 침상이 놓여 있다.
용공자는 침상 앞에 놓인 의자에 앉은 채
물끄러미 침상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소녀,
깃털처럼 연약해 보이는 소녀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오랜 병고로 핏기 하나 없는 그녀의 몰골은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여위어 있었다.
다행희 소녀의 자색은 고운 편이라
그 여윈 몰골이 그다지 흉악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가 바로 운익선생의 손녀인 온주려였다.
방년 십육세,
그녀는 지극히 병약하여 간간이 행하는 산책이외에는
종일토록 침상에 누워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심성은 놀랍도록 맑고 순수했다
. 병자 특유의 못된 고집이나 신경질적인 발작을 부린 적은 한번도 없었다.
간간이 찾아오는 용공자와 애기를 나누는 것도 수줍어해 하는
온유한 성격의 소녀였다.
(주려..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하구나!
너같이 착한 소녀에게 하늘은 왜 이다지도 몹쓸병을 내렸단 말인가?)
그는 이불 밖으로 벗어난 그녀의 가녀린 옥수를 가만히 쥐었다.
너무도 여윈 그녀의 손은 조금만 힘을 가하면 그대로 부숴질 것만 같았다
그는 그녀의 손을 이불 밑으로 넣어 주었다.
그는 내심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주려, 언제고 내가 너의 병을 고쳐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하나지금은 나에게 아무런 방법도 없으니..)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창가로 다가갔다.
열린 창 밖으로 어둠이 밀려들었다.
그는 유등으로 다가가 불을 밝혔다.
유등에 비친 그의 얼굴은 정말 준수했다.
그는 문득 중얼거렸다
. 그는 유등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용비운아. 용비운아, 네가 여기 온 지도 벌써 두 달이 넘었구나.
아아...! 용비운!
그는 바로 용비운이었던 것이다.
그는 악양을 떠나 이곳 낙양에 이르러 자신에 대해 회의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지식과 품위에 대해 아쉬움을 느껴
낙양에서 가장 장서가 풍부하고 학문이 뛰어나다는
이곳 운익서원에 온것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학문을 익혀 좀더 자신의 지식을 넓힐 생각이었다.
다행히 운익선생은 그를 보고는
제자를 거두지 않는 규율을 깨고 파격적으로 그를 받아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난생 처음 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 그는 주야로 책에 파묻혀 학문에 몰두했다.
그러는 동안 그는 무지와 몽매에서 차츰 깨어났다.
처음에는 단순히 지식으오 섭취하는 생각이었으나,
그는 점차 학문, 그 자체를 좋아하게 되어 심취하게 되었다.
그의 성취는 가히 경이적이었다.
그는 불과 한달이 못되어 자작시를 짓게 되었으며
온갖 어려운 책 을해독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천고의 영약을 복용하여
기억력과 암기력이 뛰어나게 증진된 탓도 있었으나
본래 그의 자질이 허물을 벗고 빛을 발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학문에 심취했다.
이제 그는 천마심경의 요결을 환히 이해할 수 있다
. 뿐만 아니라 그는 고문에도 눈을 뜨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법문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대밀종천의 진산지보라는 범천패엽진경이
과연 어느 정도의 위력을 담은 무서인지 알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단 두 달 만의 변신...
이제 그는 과거의 아삼이 아니었다.
그는 학문을 익혔으며 매사에 있어서도 신중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인물로 변해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 그에게는 대인의 깊이는 없었으나
과거에 비한다면 놀라운 변신이었다.
그는 그동운 아쉬움이 하나 있었다
. 그것은 천마심경에서 나온 혈지도에 대해
아무런 결말도 얻어내지 못한 사실이었다.
그것은 운익대서원에는 만 권 이상의 장서가 있었지만
유독 기관기문학에 대한 책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용비운은 유등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 그는 몸을 돌렸다.
하나 그 순간,
그는 자신을 주시하는 아름다운 눈동자를 직면했다
. 그는 흠짓했다
주려..! 언제 일어났지?
온주려는 망연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파리한 입술을 열었다.
오빠...
용비운은 의아했다
. 온주려는 그윽히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빠에게는 비밀이 무척 많은 것 같아요.
주려에게도...알려 줄 수 없나요?
용비운은 흠칫했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무슨 뜻이냐?
온주려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본의 아니게 오빠의 말을 들었어요
. 오빠는 자신의 이름이 용비운이라고 하시더군요.
그 동안에 오빠는 용군엽이란 가명을 사용하셨죠.
아아... 처음 볼 때부터 오빠가 내력이 있으리라고 생각했어요.
용비운은 일시지간 어찌해야 좋을 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 다만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마른 손을 잡았다.
미안하다. 본의 아니게 속여서.. 나에게는 ...
순간 온주려는 그의 손을 마주쥐며 말했다.
창백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괜찮아요. 설사 오빠가 큰 죄를 지은 죄인이라 해도
주려는 오빠를 이해할 거예요. 무슨 사정이 있겠지요.
곤란하시면 말하지 않아도 좋아요
. 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어요.
정말이예요.
그녀는 새끼 손가락을 용비운의 손가락에 걸었다.
그는 온주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는 비록 그녀보다 나이가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웬지 보호하고픈 마음이 일어났다.
그동안 그는 그녀와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마다 그는 그녀에게 동정심이 치밀곤 했었다.
특히 온주려는 그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려 했다.
아니, 이 병약한 그녀의 가슴 속에는
어느 새 용비운이 이성으로써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문득, 용비운은 그녀를 내려다 보며 말했다.
주려, 마실 것 좀 갖다 줄까?
그말에 온주려는 지혜로운 눈을 반짝 빛냈다.
오늘은..제 곁에 오래 머무르는군요?
용비운은 빙긋 웃었다.
그렇다. 너의 시중을 들게 되엇으니 뭐든 시킬 일이 있으면 시켜라.
순간 온주려는 탄성을 발했다.
아...! 그럼, 그 흉내 바둑이 깨졌군요?
용비운은 웃음을 흘렸다.
하하하..그렇다. 운익선생의 지혜는 정말 당할수가 없더구나.
온주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천원 방향에서 걸렸을 거예요.
백돌이 항상 선착을 하게 되니 결국 오빠가 패할 수밖에 없지요.
용비운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보지 않고도 환하게 알다니..?)
그는 새삼 그녀의 영민함에 놀랐다.
온주려는 그의 생각을 눈치챈 듯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일전에 흉내 바둑의 애기를 듣고 생각해 보았어요.
의외로 쉽게 해결되던 걸요?
그녀는 미소를 머금었다
. 용비운 염두를 굴렸다.
(주려는 어렸을 적부터 침상에 줄곧 누워 잇었다.
그녀가 할 수 잇는 일이라고는 책을 읽는 것뿐..
. 운익서원의 방대한 장서를 몽땅 읽은 주려의 지혜와 학식은
아마 천하에 따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아니, 오히려 다소 축소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온주려의 지혜.. 그리고 특히 연상력은 그녀만의 능력이었다
하나의 일을 상상으로 해결해 가는 그녀의 연상 능력은 가히 초인적이었다.
십 육년 간 그녀가 해온 생활이라면 독서와 상상 뿐이었다.
그녀는 깨어 있을 때면 언제나 어려운 사건을 만들어 냈다.
연후 그녀는 자신의 지시과 지혜를 총동원하여
그 난제를 정확하게 파헤치며 해결점을 찾아냈던 것이다.
만일 천하를 얻을 방법을 그녀에게 묻는다면
그녀는 삼 일 안으로 그 해결책을 찾아낼 것이다.
문득, 용비운은 혈지도의 비밀을 그녀에게 의뢰하고 싶었다.
주려, 이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그는 품 속에서 혈지도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온주려는 큼지막한 눈망울을 상큼 치켜 울리며 혈지도를 응시했다.
그녀는 눈 한번 깜박하지 않고 혈지도를 훑어 내리고는 스스로 눈을 감았다.
용비운은 의자에 기대앉은 채 묵묵히 그녀의 해결을 기댜렸다
. 하루 열 두시진중 여덟 시진을 잠으로 보내는 그녀였기에
깨어 있을 때에는 범인보다 십배는 총기를 했다.
그녀는 그 복잡한 혈지도를 단 한 번 보는 것으로 모두 암기한 것이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지혜와 학식을 총동원하여 혈지도를 하나씩 해부해 갔다.
(나도 기억력이라면 자신이 있었는데..주려의 기억력도 놀랄 정도구나.)
용비운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때, 온주려의 미간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아마도 어떤 난제에 부딫친 듯했다.
용비운은 자신이 괜한 일로 그녀를 피곤하게 하는가 후회했다.
그녀의 연약한 몸에 무리가 갈까 우려됐다.
주려, 중요한 것은 아니니 너무 신경쓰지 말라.
하나, 온주려의 경직된 안색은 풀릴 줄 몰랐다.
그녀의 집중력은 아마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다.
그러한 집중력이 있기에 어떠한 난제의 해결도 성사됨이 틀림없었다.
이때, 온주려는 그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말했다.
오빠, 소매를 좀 일으켜 주겠어요?
음...
그는 그녀를 침상에서 들어 안았다.
너무도 허약한 그녀였기에 거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온주려는 그의 목을 가볍게 끌어 안고는 말했다.
아마 이 비밀을 풀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서도 세 명 정도에 불과할 거예요.
세 명...?
그는 궁금해졌다. 온주려는 문득 속삭이듯 말했다.
저 오빠가 산책 좀 시켜 주시겠어요?
용비운은 흠짓했다.
밤공기가 해로울 텐데...
하나 온주려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오빠와 함께라면 언제 또 기회가 있겠어요.
용비운은 아무 말도 못했다
이윽고, 그들은 달빛이 흘러내리는 밖을 향해 나갔다.
두 남녀는 뜨락에 선 채 암청색으로 밝은 야천을 바라보았다.
동천에서 솟아오는 만월은 금가루 같은 월광을 세상에 가득 채울 듯
뿜어내고 있었다.
아...아름다와요.
온주려는 포근히 젖은 모습으로 연시 찬사를 발했다
. 용비운은 그녀의 청순한 모습을 잠시 엽완란으로 착각햇다
. 하나 그는 자신을 질책했다.
(이...주려에게 큰 죄를 짓는 것이다.
주려를 엽소저로 착가하게 되다니..
온주려는 야천에서 용비운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가.
용오빠, 오빠는 정혼녀가 있다고 했지요?
음..
그 언니는 무척이나 아름답겠지요?
아름답기 보다는 심성이 맑고 곱지.. 마치 주려처럼...
고마와요, 오빠..하지만 소매를 그렇게 위로해 주지 않아도 돼요.
소매는 보기보다 약한 아이는 아니예요.
온주려는 용비운의 탄탄한 가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참, 애기하다 말았군요.
그 세 사람이 누구인지 아시겠어요?
흠, 주려도 해당될 테고...또 주려의 조부이신 운익선생...?
온주려는 한뿍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어요., 그리고 또한 사람은...?
용비운은 고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림계에 천하제일뇌라는 현자가 있어요.
그분의 성품은 온화해 달리 무림성자라고도 불리우죠.
공공천야 공손찬 기인이 바로 나머지 한 분이예요.
용비운은 내심 흠짓했다.
(공공천야...?)
온주려는 다소 피곤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웬만한 기관도해에 능한 인물이라면 이 혈지도의 일부를 해독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완전한 금궁에 들어갈 수 없어요.
금궁...?
용비운은 검미를 살짝 치켜 올리며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온주려는 가득한 눈으로 마주 그를 응시했다
궁금하시죠..? 하지만 한꺼번에 말하지 않겠어요.
그래야 용오빠를 좀더 붙들어 놓을 수 ..
온주려는 입술을 달싹이며 스르르 수면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녀가 한 번에 반 시진 이상 깨어 있기는 그래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용비운은 그녀의 메마른 볼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주려, 훗날 일이 잘 해결된다면. 너와도 할께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녀의 드을 다독이며 벽향소축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다 문득, 그는 만월로 힐끗 시선을 돌렸다.
보름.. 유월 보름.. 대밀종천과의 약속기한이 한 달밖에 남지 않았군.
대파산천각봉이라 했던가
.하나 굳이 내가 엉겁결에 한 그 약속을 지킬 필요가 있을까.
그는 그점에 대해 아직은 확실한 자신의 주관을 세울수가 없었다.